권진규(1922-1973)
함남 함흥에서 석유총대리점을 운영하던 권정주의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함흥 제1보통학교와 춘천 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에 일본에 갔다. 44년에 징용을 피하여 다시 조선에 나왔다가 1947년에 재차 도일하였다. 1948년에 동경 무장야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하였다. 1950년에는 일본의 이과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함으로 그의 재능은 보여주었다. 미술학교를 다닐 때 6.25 전쟁을 치루는 한국에서 학비도 끊겼다. 밤에는 마네킹 만드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이때 이 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던 도모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도모 여사도 남편을 도와서 마네킹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이때가 가난은 했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보낸 6년간이 권진규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했다.
도모와 결혼하진도 6년이 지났고, 일본으로 밀항한지는 13년이 되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을 받고 1959(37세)에 귀국하였다. 이때는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서 도모를 데리고 귀국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먼저 귀국하여 부인을 부르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했다. 이후의 권진규의 삶을 들여다 보면 평생을 도모 여사를 가슴에 품고 외롭게 살았다고 주위에서 말한다.
6년이 지나도록 엽서 한 장 보내지 않자 도모의 부모가 한국으로 이혼장을 보냈다. 권진규도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몇 몇 여자들과 결혼과 이혼을 하였지만 모두들 스쳐가는 여자였고, 어느 여자의 품에서도 안주하지 못했다.
1968년에 2회 개인전을 일본에서 가졌다. 전시회 성과가 좋았으므로 모교인 동경미술학교에서 교수로 초빙했고, 화랑에서도 작품 제작을 후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제의를 거절하고 귀극하였다.
그때의 일본 신문에 소개된 전람회 평은 “쓸데 없는 살을 깎을 수 있는 만큼 깎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을 가능한한 단순화 하여 얼굴 하나 속에 무서우리만큼 긴장김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두어 번 개인전을 가졌으나 한국 조각계의 싸늘한 시선으로 결과는 참담했다고 한다. 작품 값은 깎이고, 또 깎이어 생활하기조차도 힘들었다. 대학에 강사로도 나갔으나 생활이 무척 곤궁했다. 작업실 구석에 작은 방을 마련하여 외롭고 쓸쓸하게 생활을 꾸려나갔다. 세상살이도 무척 어두웠다.
권진규는 주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였다. 권진규의 작품은 대체로 단순화하여 로댕과 부르델의 양식을 닮았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인물상이 많다. 초상 조각의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나체 인체상보다는 두상이 많다. 더군다나 얼굴의 표정에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부분은 단순화 시켰다. 테라코타에 전통적으로 건칠을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사실적인 기법이지만 작가가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는 특징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조각은 한국적인 인체와 조형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으로 조각가가 잘 쓰는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테라코타와 건칠인데, 그가 조각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테라코타나 건칠이라는 재료를 재발견하여 작품을 하였다는 데 있다. 흙을 직접 손으로 빚으면서 가마도 직접 만들어 구워내는 테라코타와 얇은 삼베천에 옻칠을 덧입혀 형태를 만들었다. 이처럼 전통적인 방식인 건칠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사물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그만의 독특한 형식이다.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전통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으며,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하고,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에서 절제의 미와 단아함이 느껴지는데, 그의 작품의 볼륨과 선에서 우리 미감이 서양식 조각 방식으로 표출되어 있다고 평론가 김이순은 말한다.
권진규의 조각은 로댕과 부르델에 연결되는 조형형식을 취했다고 말한다. 그가 일본대학에서 배운 교수님이 부르델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한국 조각계의 두터운 벽으로 소외 당하여 외롭게 지내다가 1973(51세) 자결하였다.
권진규는 주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였다. 권진규의 작품은 대체로 단순화하여 로댕과 부르델의 양식을 닮았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인물상이 많다. 초상 조각의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나체 인체상보다는 두상이 많다. 더군다나 얼굴의 표정에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부분은 단순화 시켰다. 테라코타에 전통적으로 건칠을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사실적인 기법이지만 작가가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는 특징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조각은 한국적인 인체와 조형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으로 조각가가 잘 쓰는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테라코타와 건칠인데, 그가 조각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테라코타나 건칠이라는 재료를 재발견하여 작품을 하였다는 데 있다. 흙을 직접 손으로 다루며 가마를 직접 만들어 구워내는 테라코타와 얇은 삼베천에 옻칠을 덧입혀 형태를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방식인 건칠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사물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그만의 독특한 형식이다.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전통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으며,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하고,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에서 절제의 미와 단아함이 느껴지는데, 그의 작품의 볼륨과 선에서 우리 미감이 서양식 조각 방식으로 표출되어 있다고 평론가 김이순은 말한다.
한국 조각계의 두터운 벽으로 소외 당하여 외롭게 지내다가 1973(51세) 자결하였다.
당시의 조각계에서 철저하게 소외 당하면서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결국은 사회의 냉대와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작업실에서 쇠사슬에 목을 걸어 자살하였다.
잠시 그의 연구실에서 작업하였던 서울공대 박혜일 교수는 ‘그를 우리 사회가 죽였다.’라고 하였다. 윤효중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인물이다.
권진규를 잘 아는 지인의 말로는, 권진규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했고, 무척 과묵했다고 한다. 성격도 외곬수라서 웬만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므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사회의 두터운 벽으로 대학에서도 자리를 얻지 못했다. 우리가 예술에만 혼을 쏟아 붓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너그럽다면 얼마나 좋을까? 뼈저린 고독을 견디가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조각계의 두터운 벽과 소외를 견지지 못하여 외롭게 지내다가 1973(51세) 자결하였다.
먼 훗날 한국에서 중앙일보 기자가 찾아갔을 때 도모 여사는 물기 젖은 눈을 닦으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어요. 그이의 작품은 매우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이가 서울로 가서 변했어요. 그의 서울 작품에서는 고독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요.”
권진규의 테라코타 작품에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유토피아니즘이 묻어 있다고 한다. 그는 일제, 광복, 6. 25 전쟁 등 암울했던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불행했던 현실을 냉정하리만치 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생명을 작품을 담았다. 이렇게 구워낸 작품은 차거운 물질만이 아닌 생명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 생명의 느낌이 서러운 것이기는 하나 작품의 인물상이 가진 표정에는 영원을 갈구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그 얼굴이, 그 표정이 도모 여사의 것이든, 아니면 한국의 이름 없는 여인의 것이든, 고독한 영혼의 눈물처럼 느껴진다.
친척 조카인 권옥연 화가의 증언에 의히면 발붙일 직장 하나 구하지 못했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대형 기념물은 웬만한 조각가이면 한, 두 점은 의뢰 받았다. 그는 여기서도 철저히 무시 당했다. 그의 증언을 더 들어보면 동원화랑과 계약서를 쓸 때 한 달에 겨우 3만원을 요구했다고 한다.(그해는 내가 인턴을 하던 해이다. 인턴 월급은 용돈 수준이라고 했는데, 2만원 받았다.) 그는 세상살이에도 이처럼 어두웠다고 한다.
그가 1968년에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옛 아내 도모 여사와 만났을 때를 권옥연은 이렇게 증언했다. (권옥연이 주선하여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몀춰 섰고, 아저씨는 그냥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아저씨의 등을 떠밀자 그제서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었다. ‘당신은 바보야’ 하면서 그녀는 아저씨의 등을 치면서 울었다. 어저씨는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만큼 아저씨는 감정표현이 서툴렀고, 사회성도 모자랐다.”
1973년 5월 5일에 자신의 작업실에서 목에다 쇠줄을 걸고 이 세상을 훌훌 떠나가 버렸다. 혼자 살고 있던 그에게 유족이라고는 그의 자매들의 가족이 전부였다. 그의 관이 조카들의 손에 들려서 언덕베기에 있는 작업실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올 때 길 모퉁이에서 몇 몇 여제자만이 흐느끼고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1973년 타계할 때까지 작업 활동을 한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는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으며 현재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보전·관리하고 있다.
1995년에는 춘천시 월곡리에 ‘권진규미술관’을 개관했다. 죽은 뒤에 천재 조각가로 살아난 것이다.
생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불우한 작가가 죽고 나면 박제된 천재로 둔갑시켜주는 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인가? 그렇다면 권진규는 박제된 천재일까? 그가 굽어낸 조각의 슬픈 얼굴을 보자. 슬픔을 안으로만 안으로만 삭이고 있는 여인상을 보면 고독했던 한 천재가 자신의 외로움을 빚어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빚어낸 슬픔이 너무 순수하여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가버린 것도 아름답게 보인다.
권진규는 박제된 천재가 아니고, 영혼의 소리를 울려주는 살아있는 천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