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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부르셨다.
입사 때 면접 보다도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회장실에서 그 분과 독대했다.
질문은 간단했다.
내가 속해 있던 사업부의 '비전'과 '전략'을 물어보셨고, 내가 가지고 있던 '플래너'를 보자고 하셨다.
내 BU(Business Unit)의 '비전과 전략'에 대해선 간단명료하게 핵심만 말씀드렸다.
그러나 플래너 정리는 내가 봐도 별로였다.
난 선천적으로 그때 그때 메모는 잘 하는 편이었지만 일목요연하게 자료들을 묶고 관리하는덴 젬병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2030 시절엔 그랬다.
플래너를 보시던 회장님의 미간이 일순간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아뿔싸"
난 마음속으로 '미역국'을 생각했다.
이 회사에서 중책을 맡는 일은 아직도 멀었다고 자평했다.
미팅을 마치고 본사 7층에서 계단을 타고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그날따라 그 계단이 참 길다고 느껴졌다.
입사 후 회장님과의 3번째 독대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존경하는 그분과의 독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미팅은 '그룹인상' 선정 과정에서의 만남이었다.
'삼성그룹'엔 '삼성인상'이 있고 'LG그룹'엔 'LG인상'이 있다.
해마다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직원들에게 그룹이 내리는 최고의 영광이요, 최대의 찬사였다.
내가 다녔던 회사도 '그룹인상'이 있었고, 제1회 때 내 이름도 서너 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어떤 상을 받기 위해 회사생활을 열심히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열정과 헌신의 흔적들이 그룹의 심사평가단으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았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당시 나는 'BLUE JEANS & CASUL' BU에서 뜨겁게 젊음을 불사르고 있었다.
회사가 수익을 남기는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정상 판매율'과 '원가관리'가 핵심이었다.
경비를 줄인다고 괜시리 말단 직원들을 닦달해봤자 사기만 떨어질 뿐 회사 수익의 본질적인 변화는 미미했다.
복리후생비, 문화비, 여비교통비, 교육비, 기타 등등 비핵심 비용의 삭감이나 절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영자가 있다면
그 회사는 이미 뻔한 상태였다.
나는 주임시절에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내 입장에선 '원가관리'가 핵심이었다.
그래서 JEANS의 원재료인 'DENIM'의 직거래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무슨 업무를 맡든 그 분야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핵심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 지를 생각했다.
야무지게 뛰는 건 그 다음 순서였다.
'DENIM'을 생산하는 회사의 부산 공장과 서울 본사를 말 그대로 문지방이 닳도록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목표가 세워졌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성공시키고 싶었다.
행동과 실천만이 핵심을 향한 유일한 열쇠였다.
지금까지는 '데님'의 도매상이나 소매상을 통해서만 조달이 가능했다.
업계의 오래된 관행이자 시스템이었다.
여러가지 난관이 산적해 있었지만 끝내 부산 공장과 우리 BU간의 직거래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로 인해 회사에 큰 수익을 안길 수 있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그룹인상'에 내가 선정되었다.
내 이름이 새겨진 상장과 상패도 보았고 그룹 인사과로부터 "축하한다"며 전화도 받았다.
2주간의 미국 단기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그 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우리 그룹엔 노조설립 문제로 노사갈등이 심했었다.
나는 노조편이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노조활동에도 힘를 쏟고 있었다.
노조의 주장이나 존재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셨던 회장님.
그 문제로 인해 회장님과 다시 한번 독대 했었다.
내가 노조활동을 그만두고 회사일에만 전념하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양자를 모두 열심히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에겐 패기와 열정만 가득했지 눈치코치가 없었다.
그 문제로 인해 나에 대한 큰 기대가 실망의 눈빛으로 급변하는 걸 보았다.
그 미묘하고 복잡했던 분위기와 방안의 공기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회장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로 또 시간이 흘렀다.
나는 미팅했던 사실 조차도 잊은 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블루진 사업부의 차기 '본부장'에 선정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율이 흘렀다.
입사 6년 차, 내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BU의 대표가 바뀔 것이므로 서류들을 제출해 달라고 했다.
서류가 꽤 복잡했다.
요청받은 서류들을 그룹 인사팀에 제출했다.
며칠 후 우리 BU의 '사업자 등록증'이 새롭게 갱신되어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 등록증엔 (주)00, 대표이사 '현기욱'이라고 찍혀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사업자 등록증을 바라보며 내 책상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짧은 시간, 만감이 교차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회사들이 그렇지 않지만, 15년 전 우리 그룹엔 각 BU의 '본부장'이 그 영역의 '대표이사'를 맡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이 어린 CEO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BU엔 163명의 직원이 있었고 매출액은 1,000억을 상회하고 있었다.
한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였다.
회장님과의 몇 번의 독대가 있었고 그때마다 기대보다는 실망만 안겨드린 것 같았는데 끝내 임명이 된 것이었다.
회장님도 쉽지 않은 결정을 하셨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셨겠는가.
실망스런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패기와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과 진정성을 크게 평가하신 듯했다.
'본부장'이 된 이후로 첫번째 급여일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큰 쇼크를 받았다.
우리는 매달 봉투 안에 급여 리스트를 넣어 개인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이었다.
돈은 통장으로 바로 들어갈지라도 내가 한 달 동안 일한 내역과 보수 명세서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봉인 된 봉투를 뜯고 급여 리스트를 보았다.
'대표이사 수당'이란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항목이 있는 지도 몰랐다.
당연했다.
그런데 그 금액이 당시로서는 매우 큰 규모였다.
가슴이 떨렸다.
입사 후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 했지 직급과 직책에 따른 다양한 세부항목과 남다른 처우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인사발령'의 기쁨은 잠시였다.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또한 우리 BU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본부장 선임 후 1년 차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2년 차부터 본격적인 '선택'과 '집중'에 드라이브를 걸어 승부를 내고 싶었다.
1년 간은 우리 사업부의 냉철한 현황 파악과 S.W.O.T 분석 그리고 동료들 간의 긴밀한 소통에 상대적으로 방점을 두면서 전략을 재정립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그 해 연말 국가부도 직전의 'IMF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참답했고 암울했다.
꿈을 향한 전략을 펼쳐 보기도 전에 강력한 '구조조정'이 화두로 떠올랐다.
개인도, 회사도, 국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욕을 먹고 돌멩이가 날아들더라도 우물쭈물 하거나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함의 침몰 만은 온 몸으로 막아내야 했고 변명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과감하고 강력한 실행력이 요구될 뿐이었다.
그게 리더의 숙명이었다.
눈물 겨운 기도와 간구로, 그리고 냉철한 판단과 결정으로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한 지 2년 반이 흘렀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깊은 좌절의 늪에서 스스로 목숨을 저버릴 만큼 참혹했던 태풍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 때 그 동료들, 공장 사장님들, 매장 사장님들, 수많은 거래처 사장님들, 해외의 다양한 소싱업체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러 사업 파트너들께 다시 한번 진신어린 사과를 전하고 싶었다.
십 년 하고도 다시 수 년이 흘렀지만 나는 그 당시 우리 BU의 책임자로서 꼭 이 고백을 드리고 싶었다.
그 악몽 같은 시기에 경향각지를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다녔다.
원성과 비난이 심한 현장일수록 한번이라도 더 찾아가 대면했다.
비굴하게 화살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원색적인 욕을 먹으며 멱살을 잡힐지라도 꿋꿋하게 견디며 가슴으로 그들의 눈물과 분노를 받아내야만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위천공 때문에 나는 끝내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완전한 패잔병의 몰골로 10여 일 후에 퇴원했다.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수리가 되지 않았다.
3-4개월 후에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고, 회장실에서 그 분과 다시 독대했다.
서로 간에 어찌 할 말이 없었겠는가.
많았다.
차고 넘쳤다.
하지만 안타까운 눈빛으로 대화를 대신했다.
40여 분 간 단 몇 마디를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국가부도의 위기였다.
서로의 입장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망망대해에서 내가 키를 잡고 있던 거함이 엄청난 태풍을 만났다.
나는 선장으로서 침몰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우리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한없이 불쌍했던 풍전등화 같은 존재였다.
2년 반 동안 '구조조정'이라는 시대적 사명감 하나를 붙든 채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다.
나도 심하게 아팠고 고통스러웠으며 무지 외로웠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서 여러번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뜨거운 액체가 턱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회장님 방에서 그 분과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다.
나는 "회장님을 평생의 스승으로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감사와 의리의 일환으로 "지난 10년 간 이 회사에서 배우고 익혔던 분야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생소한 광야로 나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사는 것이 스승에 대한 제자로서의 인간적인 도리라고 믿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그래서 낯설고 생소한 자동차 분야에 투신했다.
법대 행정학과 전공에 패션, 유통, 레저 분야에서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던 사람이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자동차 분야라니?
아내도, 부모님도, 여러 지인들도 펄쩍 뛰었다.
그러나 나의 결단은 단호했다.
평생을 마음 속으로 모시고 싶었던 스승님이 마음을 다해 가르쳐 주셨던 바로 그 분야에서, 내가 또다른 경쟁자가 되어 이전투구하는 모습으로 살 순 없었다.
한마디로 비슷한 분야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부대껴가며 먹고 살기는 싫었다.
아니 내 영혼이 그런 교집합을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안 가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값지불을 톡톡하게 치러야만 했다.
당연했다.
그러나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
그건 어떤 면에선 용기일 수도 있었지만 어떤 각도에선 만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연거푸 2번이나 많은 돈을 까먹었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홀로 아픔을 삭이며 견뎌야 했다.
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울타리 밖의 현실은 너무나도 춥고 가혹했다.
그러나 나의 길이라면 어렵고 곤고할지라도 힘차게 가겠노라고 다짐했다.
사막에서 혼자 우물을 파내려 갔다.
너무나도 외롭고 처절했다.
그렇게 삽질을 시작한 지 7-8년 만에 내가 파냈던 우물에 조금씩 물이 괴기 시작했다.
흙 뭍은 손으로 퍼낸 첫 바가지.
그 바가지 속엔 물이 반이었고 흙이 반이었다.
그래도 물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는 게 어딘가.
감사했다.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아내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2번의 사업 실패 후에 거의 십여 년 만에 일용할 '양식'과 애들 '교육'에 대해 애비로서의 걱정과 근심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겐 정말로 어둡고 눅눅한 터널이었다.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 전주 터미널에서 포항 훈련소로 가는 날에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 떠올랐다.
"남자는 가슴으로 운다. 참을 忍자를 가슴에 새기며 매순간 기도하고 정진하거라. 태산 같은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내 골수에 새겨진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남자의 길.
나도 뒤돌아 보니 그건 끊임없는 '인내의 길'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무지 힘겹고 외로울지라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의지의 길'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번째로 창업한 지 12년 차다.
그 생각, 그 다짐, 그 기도 때문에 참 많이도 돌고 돌아왔다.
일견 바보 같은 선택이기도 했지만 나는 시종일관 떴떴하고 싶었고 힘들어도 정신적으로 당당하고 투명하게 살기를 서원했다.
그래서 값비싼 댓가를 혹독하게 치렀지만 후회는 없다.
비록 작은 우물일지라도 깨끗한 물이 조금씩 샘솟고 있고 그 덕분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 감사할 따름이다.
몇 년 사이에 아버님 두 분이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
회장님께서는 군산의 빈소까지 그룹 비서실장을 보내셨다.
그 회사를 떠난 지가 언젠데, 두 번 다 큼지막한 조화뿐만 아니라 진심어린 위로와 함께 금일봉까지 전해 주셨다.
깊은 관심이자 위로였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퇴직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장님을 찾아가 뵌 적도 없었고 따로 전화를 드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늘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사표로 남아 있다.
나도 그 분과의 무언의 약속과 의리를 굳건하게 준수하며 살고 있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내 삶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내 마음 속 맹세와 기도 때문에 묵묵하게 지금도 나만의 길을 가고 있다.
내 영혼엔 세 분의 스승님이 계신다.
두 분의 아버님과 회장님이다.
그분들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드리며 살고 있다.
스승께서 가르쳐 주셨던 많은 가르침들을 내 가슴판에 새긴 채 평생 동안 올곧은 삶을, 배려의 삶과 헌신의 삶을 엮어가고자 한다.
30년도 넘게 이어온 나의 새벽 Q.T와 그 메인 테마도 바로 이것이었다.
세 분의 스승님께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6월 24일.
나의 물망초, 심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