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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속초시 신흥2길 16 (노학동 736-1번지)
033-639-2976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 어른 2,000원 / 청소년, 군인 1,500원 / 어린이 700원
(단체 어른 1,500원 / 청소년, 군인 1,000원 / 어린이 500원)
무료 주차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바로 앞 매표소로 이동하였다.
속초시립박물관은 속초가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민속문화를 소개하고
향토민속문화를 손수 체험할 수 있는 문화체험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보이고...
왼쪽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서 발해역사관을 먼저 관람하기로 한다.
끝에서 발해역사관 쪽 왼쪽 길로 돌아서...
육각형의 기와지붕에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목조건물로 기둥과 처마에 화려한 단청가지 입혀서 운치를 더한 정자가 있다.
유정정(有貞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2017년 4월 한국전쟁 참전유공자 조규정 선생이
속초시립박물관의 편의를 제공하고 휴게공간으로 활용해 달라고 기증한 것이다.
국가유공자의 有(유)와 조규정 선생의 貞(정)을 따서 "유정정"으로 명명한 것이다.
정자 옆에는 발해연못이 있다.
발해와의 역사적인 연관성은 없다. 발해역사관 가는 길에 있어서 발해연못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시원한 물줄기 덕분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을 제공한다.
고구려벽화에도 나오는 삼족오는 고구려군의 상징이었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도 삼족오 깃발을 사용했다.
발해역사관은 마치 발해의 상경성 궁성으로 둘러싸인 듯한 형태로 건축을 했다.
발해 상경성 궁성의 축고와 구조
궁성은 주로 현무암을 다듬어 쌓았다.
성벽의 길이는 동서길이 720m, 남북너비 620m이며, 둘레는 2,680m이다.
성벽은 높이 3~4m, 두께 약 5m이다. 궁성은 담장을 기준으로 동쪽·중앙·서쪽 3부분으로 나뉜다.
궁성 안에서 모두 37곳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성벽의 동·서·북면에는 금원(禁苑) 등 부속부분이 있다.
공간이 가장 넓은 중구에는 오중전(五重殿)이라 불리는 1~5번 궁전지가 있다.
남쪽 성벽 중앙에는 오봉루(五鳳樓)라고 불리는 대규모 성문이 있다.
오봉루 기단은 동서길이 42m, 남북너비 27m, 높이 5.2m이다. 오봉루 양 옆의 출입구는 오문(午門)이다.
발해역사관의 관람료는 속초시립박물관 관람료에 포함되어 있어 따로 지불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발해역사관이 왜 속초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영상실에서 영상을 관람하면서 바로 깨달았다.
먼저 첫번째 영상은 드라마 대조영의 줄거리를 짧게 편집한 영상이었다.
2006년 9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KBS에서 방영한 역사대하드라마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삶을 담은 드라마였다.
대조영 역할의 최수종의 열연이 돋보이는 대하사극의 최정점을 찍었던 드라마였다.
드라마 대조영의 촬영지가 바로 속초 한화리조트내 대조영 촬영지였다.
이후 다른 영화와 드라마를 추가로 찍으면서 지금은 "설악시네라마"라는 오픈 세트장이 되었다.
발해의 건국과정이 담겨서 고구려와 당나라의 모습을 재현한 세트장을 볼 수 있다.
입장료가 대인 4,500원 소인 3,000원 이다. 한화콘도 투숙객은 3,500원 2,500원으로 할인을 해준다.
두번째 영상은 홍라녀 공주의 전설을 담은 인형극이었다.
나름 흥미롭게 관람을 했다.
영상실 바로 옆에 발해체험실이 있다.
당시의 옷을 입어보고 대조영의 주요 인물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다.
15년이 지난 드라마지만 속초 발해역사관의 근간이 되는 드라마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한화리조트 설악씨네라마의 거대한 오픈 세트장 관람과 더불어 발해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발해문화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남북국시대의 한 축인 통일신라와 더불어 되살려야 할 우리역사인 발해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임은 틀림없다.
2002년 중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작된 동북공정은 발해 뿐만 아니라 고구려까지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서 고구려는 물론 발해까지 지켜내려면.... 발해역사관 방문해야지 뭐
2011년 발해 대조영 두 장의 발행우표 사이에 대조영 영정이 있다.
1층에 있는 해동성국 발해실로 들어가면 첫번째 ZONE으로 "발해의 건국"이 시작된다.
고구려의 부활 발해
망국의 한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230여년간 현재의 중국 길림성ㆍ흑룡강성ㆍ요령성과 북한ㆍ러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남쪽의 신라와 남북국(南北國)을 이룬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스스로 이동하였거나 강제로 이주되었다.
발해를 세운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大祚榮)도
당나라에 의해 현재의 요령성 조양(朝陽)인 영주(營州)지역으로 강제로 옮겨가 살았다.
건국의 꿈을 품고
696년 영주(營州)에서는 영주도독 조홰(趙날개 치는 소리 홰)의 폭정에 항거하여
거란인 이진충(李盡忠)ㆍ손만영(孫萬榮)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순식간에 유주(幽州)까지 점령하였다.
영주에 강제로 사민되었던 대조영(大祚榮)은 이 틈을 타고 무리를 이끌어 요하를 건너 요동에 이르렀다.
당나라에서는 이해고(李楷固)의 군대를 파견하여 추격하였다.
대조영(大祚榮)은 천문령(天門嶺)에서 이들을 대파하고 현재의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동모산(東牟山)에 이르러,
698년 발해를 건국하였다.
고구려계승국 발해
발해의 국가적 성격은 무왕과 문왕대에 명확히 드러난다.
제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소유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역사적ㆍ문화적으로 부여-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발해는 '고려'라는 명칭도 사용하였다.
758년 일본에 사신으로 떠난 양승경(楊承慶)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고려사'라고 불렀고,
그가 지닌 국서에서는 '고려국왕 대흠무가 말하노니'라고 하여,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발해는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제1대 고왕(高王) 대조영 (~719)
시호는 고왕(高王), 연호는 천통(天統)이다.
고왕은 진국(振國)을 세우고 곧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를 맺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여
부여(扶餘)ㆍ옥저(沃沮)ㆍ변한(弁韓)ㆍ조선(朝鮮)ㆍ해북제부(海北諸部)를 개척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낭장(郎將) 최흔(崔忻)을 보내어
고왕(高王) 대조영(대조영(大祚榮))을
‘좌효위원외대장군 (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 (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홀한주도독 (忽汗州都督)’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발해는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
두번째 ZONE "황상의 나라"
영토팽창
발해는 사방 5천리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편호(編戶)가 10만, 승병(勝兵)이 수만에 이르는 거대한 나라이다.
발해에 관한 기록을 전하고 있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영토의 범위가
2천리와 5천리로 달리 기술되어 있으나 발해가 가장 강성했을 당시의 영토가 5천리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옳다.
발해의 영토확장은 고왕, 무왕, 선왕 3대에 집중되었다.
건국이후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은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여
부여(扶餘)ㆍ옥저(沃沮)ㆍ변한(弁韓)ㆍ조선(朝鮮)ㆍ해북제부(海北諸部)를 개척하였다.
이에 713년 당나라로부터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되었다.
무왕 시기에는 더욱 말갈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여 동북지방의 오랑캐, 즉 말갈을 복속시키는 한편,
당나라의 기미주가 되어 발해를 공격하려던 북방의 흑수말갈을 정벌하였고, 심지어 당의 등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0대 선왕 때에 이르러서는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해북제국(海北諸國)을 정벌한 후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었다.
천도과정
발해는 742년 무렵에 건국의 터전인 구국(舊國)에서 중경(中京)으로, 756년 중경(中京)에서 상경(上京)으로,
785년 상경(上京)에서 동경(東京)으로, 794년 동경(東京)에서 상경(上京)으로 4번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중심인 수도를 빈번하게 옮긴 목적이 무엇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4번의 천도 가운데 5대 성왕 재위기간(794년)에 동경(東京)에서 상경(上京)으로 환도(還都)한 것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3대 문왕대(737~793)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바로 천도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번째 ZONE "꿈꾸는 발해"
대륙의 꿈 "상경성"
상경용천부의 위치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유지는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에 있다.
그 위치는 현성 서남쪽 약 35㎞에 있으며, 동으로 동경성진(東京城鎭)과 약 3㎞ 떨어져 있다.
고성 범위 안에는 발해진과 토대자(土臺子)ㆍ백묘자(白廟子) 등 여섯 개의 촌락이 있다.
동경성진과 발해진은 모두 상경용천부 고성으로 인해 얻은 이름이며 고성유지는 발해진의 영역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불교는 고구려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그 전통을 받은 발해에도 불교가 계승되었지만 관련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문헌적으로는 발해의 왕자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절에 가서 예불하기를 원했다는 기록,
814년 사신을 통해서 당나라에 금불상과 은불상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발해 3대 문왕은 그의 존호로서
전륜성왕의 의미를 담고 있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을 사용하였다.
고학적으로는 상경성에서 발견된 9곳의 절터, 중경·동경지역·러시아 연해주·함경북도 등에서 사찰지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례풍속에 불교가 습합된 형태의 묘탑장도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마적달탑(馬滴達塔)·영광탑(靈光塔) 등에서 실시되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불상도 제작되었는데,`유적에서 석불·철불·금동불·전불·소조불 등이 1,200여점이 발견되었다.
상경 · 동경 등에서 발견된 수많은 불상들 대부분은 도쿄대학 고고학연구소에 보관되어 있고,
일부는 서울대학교 박물관·흑룡강성박물관 등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다.
북한지역에는 발해 5경 가운데 남경이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와의 교류에 중축선이었던 신라도가 있다.
북한지역 고성은 함경남·북도에 집중분포한다.
고성은 둘레길이가 2km을 넘는 청해토성을 비롯하여 용전지산성·안곡산성·거산성·부거성·운두산성·가응산성·성상리토성·지방덕성·고읍성·양마성·성현리토성·지방리산성 등이 있다.
규모면으로 살펴보면 지방리산성과 운두산성이 6km에 달하며, 청해토성·지방덕성·고읍성 등은 2km가 넘는다.
부거성·가응산성·성상리토성 등은 1km가 넘으며, 양마성과 같이 둘레길이가 불과 100m에 달하는 성도 있다.
성은 토성과 석성, 그리고 토석혼축성이 있으며, 일부 성은 판축하고 굽도리를 만들어 쌓아올린 것도 있다.
고구려시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치·각루·망루 등이 있고, 해자같은 방어시설도 눈의 띈다.
고분은 부거리 · 연차골 · 다래골 · 독동 · 금성리 · 정문리 · 룡산동 · 송정동 · 평리 · 오매리 등에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 발굴된 것은 연차골 1 · 2지구를 비롯하여 수십 곳에 이른다.
고분의 유형으로 보면 석곽묘 · 석곽봉토분 · 석실봉토분 · 석광봉토묘 등이나, 대부분은 석실봉토분이다.
묘실규모는 발굴된 고분 거의 대부분이 길이 205~280cm이고, 3m를 넘는 것이 8곳, 4m를 넘는 고분도 1곳이 있다.
묘실천정의 형태는 평천정 · 궁륭식천정 · 평행고임천정 · 삼각고임천정 등이다.
출토유물은 주로 단지·보시기·그릇 등과 마구류·쇠칼 등의 병장기,
그리고 옥구슬·가락지 등과 같은 장신구가 일반적으로 출토된다.
"허천평성" 또는 "북청토성", "신창토성" “하호토성”으로도 불리는 청해토성은 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의 남대천 좌안에 위치한다.
건물지, 주변의 유적분포상황, 옥도장 · 치미 잔편 등에 근거하여 학계에서는 남경남해부로 추정한다.
청해토성은 흙으로 축조했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기단부분에 돌이 사용되었다.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고 둘레길이는 2,132m이다. 네 벽 중간에 각각 성문지가 하나씩 있으며
성 안쪽에는 십자형으로 4m너비의 도로가 교차한다.
성내부에서는 관청터와 온돌, 무기제작장 · 우물 · 병영터와 절터가 발굴되었다.
성벽에는 치 · 각루가 있다. 발해시기 기와막새 등 발해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네번째 ZONE 드라마 "대조영"으로 부활하다
7세기 중반, 세계 최강국이던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
일찍이 수나라를 굴복시킨 당당했던 고구려가 아닌가? 풍전등화?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이끈 30만 대군은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 앞에 무릎꿇는다.
대제국 고구려의 위용이 휘날린지 불과 20여년 후인 668년,
내부 분열로 인해 고구려는 나, 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야 만다.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학살되고 통한의 망국인이 되어 유민으로 떠돈다.
암울한 패망의 그늘 속, 한 명의 고구려 청년이 분연히 일어난다.
당나라의 지배에서 신음하던 고구려 유민을 구해내고 흩어진 군대를 규합,
처절한 투쟁을 통해 고구려 정통성을 잇는 새나라를 건설한다.
고구려 패망 불과 30여 년만의 일이다.
대조영 그리고 발해.... 오래 전 대륙의 역사에 대한 향수인가?
아니다. 과거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일제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나라를 세웠지만, 산적한 내부 문제에 허덕이고
계속되는 주변 강대국의 대립과 견제 그리고 지루한 분단 시대에 지친 우리들...
시간을 돌려 1300년 전의 발해를 보자.
패망의 황무지 위에 나라를 건설, 주변국 어디도 바라지 않는 건국,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정치...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극복해 낸 발해는 대립했던 당나라마저 인정한 동북아의 최강국이 되어,
평화와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세계와 교류하며,
고구려를 패망시킨 적국 신라마저 민족의식을 근간으로 우호친선관계로 껴안았다.
"대조영과 발해"를 그리는 일은 찬란한 한민족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역사적 통찰력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대제국 발해를 세운 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1층의 관람을 마치고 지하1층 발해고분 전시실로 내려간다.
정효공주고분을 중심으로 발해고분을 통한 발해문화를 이해하는 공간이다.
첫번째 ZONE 고분으로 만나는 발해문화
무덤[고분]은 죽은 자를 위해 만든 시설이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거기에는 당대인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당대의 문화 의식, 전통 의식이 매우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축조 당시의 토목 기술 수준과 부장된 유물은 당대의 물질문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전통성으로 말미암아 사용 주체의 성격까지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해무덤은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여러 도시와
변방지대였던 함경도 및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이르기까지 수천 기가 분포하고 있다.
발해무덤의 구조, 매장풍습, 벽화, 출토 유물을 통해서 보면
발해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위주로 말갈문화, 당 문화를 흡수하여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발해 문화에 반영되는 이런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는 결국 발해국은 고구려 유민이나 말갈족이 단독으로 세운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던 말갈의 일부가 공동으로 건립한 국가이며
발해 건국 이후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기타 민족도 통합하여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분구조에서 보이는 발해문화의 고구려 계승성
발해무덤의 매장풍습은 고구려의 매장풍습, 말갈의 매장풍습 및 중국 동북지역의 원시사회로부터 전해오던 옥저 등
여러 민족의 매장풍습이 여러 면으로 반영되어 있다.
무덤 위에 건축물을 짓는 습속은
고구려의 고분 위에 건축물을 짓거나 기와를 덮는 실례가 존재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인다.
다만, 다인(多人)합장은 고구려고분보다 말갈고분의 영향이 더욱 컸다.
매장풍습에서 보이는 발해문화의 다원성
발해무덤의 벽화는 크게 보아 당나라벽화의 영향이 뚜렷하지만 고구려의 영향도 일부 반영되어 있고 발해의 독특한 점도 있다.
묘실의 천정에 꽃무늬를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의 회화 전통이지만
인물의 형상이나 복식의 양식은 당나라의 화풍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발해인들은 그 형식을 독자적으로 소화해 표현했다.
두번째 ZONE 비문으로 밝혀지는 신비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남편과 딸을 잃고 슬픈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792년 여름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벽화 속 인물들을 통해 공주의 생활을 상상해보자.
공주는 궁궐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유순했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玉)같은 나무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고 온화했다.
공주는 일찍이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스승과 같아지려고 노력했고,
한(漢)나라 반소라는 인물을 그리워하며 시와 글을 좋아하고 예와 음악을 즐겼다.
결혼한 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쌍의 봉황이 노래하는 듯 했고, 한 쌍의 난조새가 춤추는 듯 했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어린 딸마저 일찍 죽자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수심을 머금고 지냈다.
이번에는 공주의 외출 장면을 한번 그려보자.
고대광실(高臺廣室: 규모가 굉장히 크고 잘 지은 집) 저택 문을 무사가 지키고 있다.
그리고 보초가 철퇴와 검을 들고 집을 지키고, 시종들은 공주를 둘러싸고 시중을 든다.
공주 주변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여 공주를 즐겁게 해 주고 있다.
궁궐마당의 여러 나무들은 어느덧 예쁜 꽃을 피워 주변이 아름답다.
공주는 예쁜 꽃을 감상하려고 목이 둥근 단령포라는 옷을 입고서,
얼굴에 연지 곤지 찍고 머리도 곱게 빗어 딴 뒤 마당으로 나온다.
그러자 딸린 시종들이 우산[일산]을 받쳐 들어 햇빛을 가려준다.
참으로 어여쁜 공주의 모습이다.
세번째 ZONE 되살아나는 발해인
발해의 생활문화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발해의 문화는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았고,
8세기 중반 3대 문왕 대문예가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질적인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발해의 영토 일부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왔던 말갈인의 문화 흡수 및 신라나 일본과도 문화적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타나게 된 특징으로, 발해인은 각국의 다양한 문화들을 적절히 융합시켜 발해 고유의 독자 문화를 탄생시켰다.
발해 초기에는 정치적·문화적으로 발해 지배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고구려인의 복식 문화를 계승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복식을 착용하였다.
이후 3대 문왕이 즉위하고 당나라로 파견되었던 사신들을 통해 당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나라의 복식 문화 요소가 도입되었다.
이후 발해의 복식 문화는 고구려 복식 문화와 발해 건국 이전부터 발해 영역의 토착세력이었던 말갈의 복식 문화 및
당 문화의 유입에 의한 새로운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네번째 ZONE 정효공주 고분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는 묘실(墓室:널방)의 동ㆍ서ㆍ북 세 벽과 연도(羨道:널길)안에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인물들은 그 직분에 따라 무사, 시위, 악사, 시종, 내시 등의 부류로 구분된다.
연도 뒤편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무사들은 붉은 술을 단 투구를 쓰고 고기비늘 무늬 갑옷을 걸치고 왼쪽 허리에 검을 차고,
오른손으로 철퇴를 잡아 어깨에 메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묘실 동쪽 벽에는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공주를 경호하는 시위 1명과 시중을 드는 내시 3명이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색 머리띠를 두르거나 두 날개를 교차시킨 복두(幞頭)를 썼으며, 손에는 철퇴, 구리거울, 봇짐 등을 들고 있다.
묘실 서쪽 벽에도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1명은 호위병이고 나머지 3명은 악사들이다.
묘실 북쪽 벽에는 활을 메고 화개(華蓋)로 보이는 양산을 들고 있는 시종 2명이 묘사되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키는 113~117㎝이다.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는 벽돌위에 회칠을 하고 그렸다는 점과
시위도(侍衛圖:무덤 주인을 지키고 호위하며 시중을 드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를 중심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당나라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은 점에서 중국의 벽화들과 많은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 시기 발해인들은 고구려 벽화의 기법을 일부 계승하여 그 형식을 독자적으로 소화해 사실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들은 발해인의 외모와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
정효공주묘 내부 벽화
벽화는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그 위에 열두 사람의 인물을 채색으로 묘사했는데,
인물의 윤곽을 스케치하는 방법만 다를 뿐 모든 회화기법은 고구려의 프레스코 전통화법에 이어지고 있다.
무덤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는데 벽화는 안길의 뒷부분과 안칸의 동, 서, 북쪽의 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는 처음에 예리한 긁개같은 것으로 윤곽을 표시한 다음
적 청녹, 흑, 백색 등 여러가지 색깔을 고르게 입하고 다시 먹선으로 윤곽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썼다.
이것은 고구려 수산리 벽화무덤 등 고구려 벽화에서 발휘된 전통적인 화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용도의 동서벽에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사람든 갑옷을 입고 어깨에 철퇴를 걸친 문지기 무사이다.
널방동벽의 네 사람 가운데 남쪽의 첫째 인물은 시위로 오른쪽 허리에는 칼과 화살통을 찼으며
다른 세 사람은 악기로 박판, 공후, 비파류의 악기를 들고있다.
얼굴표현 및 몸매로 보아 내시와 악기는 남자차림을 한 여자이다.
북벽의 두 인물은 공주의 호위를 담당하는 시종들로 허리에 화살통을 차고 어깨에는 활을 메고 있다.
널받침 남면의 벽화는 상서도의 일종이나 심하게 손상되어 사자의 머리 부분으로 보이는 일부만 알아볼 수 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넷째 딸이다.
그녀는 756년에 태어나 792년에 사망하고, 같은해 11월에 용수향 용해촌 용두산 발해 왕실 귀족 무덤지에 안장되었다.
묘는 묘도, 연도, 묘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바로 탑 밑에 무덤을 설치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발해 특유의 묘제로서 중국의 경우 수 ㆍ 당대에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무덤은 경사로로 내려가는 묘도, 연도, 묘실로 구성되어 있고 벽돌과 판석으로 이루어진 전실묘이다.
이러한 묘제는 기본적으로 동위 이후의 북조선시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정효공주묘만의 독특한 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아.
첫째, 정효공누묘의 묘도는 북조나 수당의 묘도와 같이 길지 않고 짧으며 묘실에 비하여 폭이 넓다.
또한 계단형으로 되어있는 점이 중국의 경우와 다르다.
둘째, 북조 및 수 ㆍ 당의 널방은 각 면에 있으며 가운데가 볼록한 방형으로 되어 있는 반면,
정효공주묘는 고구려고문처럼 각 면이 곧은 직방형으로 되어 있다.
셋째, 북조 및 수 ㆍ 당의 묘실천장이 궁륭형으로 되어있는 반면, 이 묘의 천장은 평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묘 위에 탑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편청장으로 처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평천장은 2단의 평행고임 위에 설치한 것으로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정효공주 무덤의 구조
정효공주(貞孝公主:757~792년)의 무덤은
발해의 중경(中京)이 있던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서쪽의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다.
정효공주 무덤은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 남북향 170°의 장축을 지니고 있으며, 벽돌과 판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전체적인 구조는
묘도(墓道:무덤길), 묘문(墓門:무덤문), 연도(羨道:널길), 묘실(墓室:널방), 탑(塔)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무덤 위에 설치된 탑은 오래전에 파괴되어 기초만 남아 있다.
무덤길은 남쪽에 설치되었으며 수평거리가 7.1m로 남쪽이 넓고 북쪽 무덤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나팔모양의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2차례에 걸쳐 수축되었다.
벽돌로 쌓아 막아 놓은 무덤길을 지나면 길이 1.9m의 널길에 이르는데, 중간에 판돌문과 나무문을 각각 만들었다.
문 안쪽에는 정효공주 묘지(墓誌)가 세워져 있다.
널방의 바닥은 지면에서 3.4m 되는 지하에 만들었는데,
네벽은 장방형 파란벽돌[靑塼]로 쌓았고 남벽을 제외하고는 안으로 약간 경사지게 하였다.
널방은 남북 길이 3.1m, 동서 너비 2.1m, 높이 1.9m이다.
널방과 널길에는 벽과 천장에 백회를 발라 벽화를 그리고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다.
널방 가운데에 벽돌을 쌓아 남북 길이 2.4m, 동서 너비 1.45m, 높이 약 0.4m의 널받침[棺臺]을 만들었다.
널받침은 2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천장은 장방형 벽돌과 장대석(長大石)을 이용하여 여러 단의 평행고임을 한 뒤에 큰 판돌을 동서로 몇 개 덮었다.
정효공주 무덤의 구조는 벽돌로 쌓은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또한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발해의 독특한 양식으로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이 불교와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
정효공주 무덤에 깃든 발해의 신비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돌방무덤[塼築石室墳]으로 벽돌로 쌓은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또한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이 불교와 습합되어 발해만의 독특한 무덤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의 널방[墓室:玄室]에 벽화로 그려진 12명의 인물들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樂士)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인공인 정효공주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적 기법으로 표현되어 발해인의 외모와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
정효공주 묘지(墓誌)는 정혜공주 묘지와 함께 발해인이 남긴 진귀한 발해사 연구의 1차적인 사료(史料)이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文王)시대의 정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문왕의 넷째 딸로 정효공주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문왕의 존호(尊號)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이었으며,
그가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寶曆)으로 개원(開元)하였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복귀하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왕에 대해서 황상(皇上)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던 사실은
그가 당시에 황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측에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속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묘지문에는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중국의 문학 작품들이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왕 시대에 유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존호 가운데에 사용된 ‘금륜성법(金輪聖法)’은 불교적인 용어로서 문왕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표방하였던 사실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적 요소는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탑장(塔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정효공주를 칭송하기 위해 한나라 때의 고사를 잘못 인용한 예도 있어서,
당시 발해 문학의 한계성을 반영하고 있기도 한다.
다섯번째 ZONE 한민족의 역사, 발해
해동성국 발해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宣王:大仁秀, 819~830년)이 즉위하면서 영토를 크게 개척하여 증흥을 이룩하였다.
이 때 발해는 대부분 말갈 부족을 통합하여 연해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요동(遼東) 지역에 다시 진출하여 요양(遼陽) 일대까지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 방면인 대동강 이북지역까지 나아갔다.
11대 대이진(大彛震:831~857)으로부터
12대 대건황(大虔晃:858~871), 13대 대현석(大玄錫:872~894) 대에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발해는 나라 안의 사방 경계와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완성하고, 통치조직을 다시 정비하여 최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나라는 이 시기의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일컬어 그 세력의 성대함을 인정했다.
7세기 이후 격동하던 동북아시아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를 중심으로 신라 ㆍ 발해 ㆍ 일본 등이 공존하는 안정된 국제관계의 틀을 갖추었다.
각 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가 잦아지고 일반 사람의 교류 또한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발해는 농업, 수공업, 수렵, 어로 등 모든 경제생활 면에서 생산이 늘어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이 크게 증가하였다.
발해는 특히 당나라와 가장 활발히 교류하였다.
발해에서 건너간 학생들은 당나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에 입학하여 빈공과(賓貢科) 시험에서 많은 합격자를 냈다.
발해 사람들은 당시 가장 앞선 문화를 누리던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진문물과 제도를 받아 들였다.
이를 통해 발해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민족의 혼을 되세기며...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가 터를 잡았고, 다시 이 드넓은 땅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왕조가 있었다.
그 왕조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무대는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우리 역사상 마지막으로 만주를 지배했고 가장 방대한 영토를 가졌던 왕조의 이름은 바로 ‘발해(渤海)’였다.
고구려의 힘찬 기상을 이어받은 발해는 만주에서 일어나 만주에서 멸망한 유일한 나라이다.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만이 쓰는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발해는 동북아시아 무대에 등장한 지 불과 100여 년 만에 새로운 강자(强者)로 부상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삼국시대의 이후의 시기를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그 시기, 통일신라의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발해를 우리 역사로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더욱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발해가 누구의 역사인가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잘 알지 못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활약상, 일반 백성 대부분을 이룬 말갈 사람들의 생활 모습 등은
모두 우리가 앞으로 찾아내고 그려내야 할 모습이다.
우리는 이제 한반도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눈에서 벗어나 만주 땅과 연해주,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로
우리 고대 역사의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1300여 년 전 ‘해동성국’ 발해를 기억하고 민족혼을 되새기는 이유이다.
발해역사관의 관람을 마치고 실감콘텐츠체험관으로 이동했다.
모퉁이를 돌면 다양한 놀이기구 체험장이 있다.
실감콘텐츠체험관이 30분 간격으로 상영을 하기 때문에 놀이기구 체험을 하면서 기다리다 입장하면 된다.
실향민의 아픔을 담은 감동적인 영상이다. 꽃순이가 나오는데 헤어지는 장면에서 영화 국제시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테블릿을 나눠주는데 상영 장면에 맞춰 게임도 하고 세부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총 상영시간은 10분 정도이다.
영어자막을 제공하기 때문에 외국인도 관람할 수 있다.
실감콘텐츠체험관 바로 옆에는 프랑스식 고깔형 건축구조의 속초역이 있다.
속초시 동명동 450-195번지에 있었던 프랑스식 고깔형 건축 구조의 속초역사(驛舍)를 재현해 놓았다.
1978년 철거되기까지 37년간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운명을 함께 했다.
속초역사는 1941년 동해북부선(원산∼양양)이 지나는 역사의 하나로 세워졌는데
동해북부선은 일제가 양양의 철광석을 군사기지였던 원산으로 수송하려는 제국주의적 수탈의 목적에서 건설한 철도였다.
당시 북으로 가는 기차는 양양역을 출발하여 낙산ㆍ물치ㆍ속초ㆍ천진ㆍ문암ㆍ공현진ㆍ간성ㆍ현내역을 지나
통일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던 초구역, 그리고 지금의 북한 땅인 고성ㆍ삼일포ㆍ외금강ㆍ장전ㆍ통천역을 지나
종착역인 원산역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속초역사는 38선 이북지역에 속해 북한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대규모 폭격으로 철로가 파괴되어 역사의 기능이 중단되었으며,
국군이 북진할 때는 화장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51년 8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속초 지역에는 미군정이 실시되었는데
당시 속초역사는 미군항만사령부의 취사장과 댄스홀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56년 4월에 명신고등공민학교가 들어서 불우학생의 배움터가 되었다가
1957년부터는 벽돌공장인 고려산업사가 입주하였다.
이후 동해북부선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속초역사는 1978년 4월 10일에 철거되었다.
"다큐 속초의 실향민들" 상영관이 있다.
"속초의 실향민들" 영상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속초의 망향동산" 영상이 나온다.
실향민들의 애환과 망향의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속초역사를 나오면 외쪽으로 청호동 아바이 마을 "실향민 문화촌"이 펼쳐진다.
청호동 아바이 마을은 6·25전쟁 이후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50년이 넘은 오래 된 가옥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작은 골목에는 50년대 초반 피난민의 고단함이 그대로 배어있다.
전상수 가옥은 ‘하꼬방’ 집으로 불리는 가옥으로 그 때의 사정을 말해준다.
물자가 없어 판자, 깡통, 종이박스 등을 구해다가 만든 작은 부엌과 단칸방이 피난민에겐 전부였다.
그래도 중간에 함경도 가옥의 정주간과 유사한 공간을 마련하여 고향의 전통을 이으려 했다.
공동주택은 거주민들의 증가로 주거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단체 생활을 하는 어민들을 위해 생겨난 형태였다.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가족을 두고 혼자서 생활해야 했고, 몇 사람이 모이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했다고 한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방과 극히 필요한 면적의 부엌만을 만들었다.
미군정과 속초사람들
한국전쟁의 휴전(1953년 7월 27일)으로 동해안에서는 38선을 넘어 북으로 밀고 올라가 양양, 속초, 간성, 거진, 대진 등을
실지 회복하였으나, 서쪽에서는 38선 이남에 있던 개성 등을 잃고 말았다.
그 중 전 지역이 완전 수복된 양양지구는 1951년 4월부터 군자치위원회가 다시 구성되고 민정관이 임명되어
1951년 8월 18일부터 1954년 11월 16일까지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전시 사진들은 당시 속초에서 군 생활을 했던 폴 뷰포드 팬쳐(Paul Buford Fancher), 찰스 레버렛(Charles Leverett)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1953~1954년에 속초의 풍경을 찍은 사진과
1963~1965년 속초의 미군부대에서 생활을 한 바이런 디킨슨(Byron Dickinson)이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한 사진들이다.
미군정이 실시된 배경을 살펴보면, 1952년 속초와 38선 이북 양양군을 방문했던
첩보원 오스본(J. Osborne)이 작성한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속초 양양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처음으로 점령했던 공산주의국가 영토로서 공산주의의 행정연구와
미국화, 자본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실험장으로써 미군정을 실시하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미군정시기 속초는 1군단 민사처에서 실지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부정기적으로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동해사령부에 가서 구호물자를 인수하여
각 민정관들과 주무부처 직원, 구장, 피난민 반장 등을 통해 일반 주민과 피난민에게 일정한 양을 배급하였다.
1952년 6월 이후 1953년 5월말까지 속초 전체 인구 16,213명 가운데 45%인 7,364명이 요구호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류, 식료품, 곡류, 어선용 전나무, 주택용 자재, 의약품, 학용품 등을 배급하였다.
재현해 놓은 아바이 마을 피난민 가옥의 모습은 다른 지역 피난민들의 생활상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조금이라도 고향과 가까운 아바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피난민들의 정착으로 형성된 아바이 마을의 196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전상수 가옥
방과 부엌 사이에 창고가 일자형으로 배치된 구조로 현재 청호동 아바이 마을에 원형이 일부 남아있다고 한다.
방과 부엌 사이의 창고는 함경도 정주간과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어 고향의 생활양식이 전승된 가옥 구조를 보이고 있다.
정줏간 : 부엌과 방 사이에 벽이 없이 자리하는 온돌방
부엌은 밥을 짓기 위한 도구와 물품 보관을 위한 아주 최소한의 공간으로 만들어졌고,
아주 작은 방에 여러 식구가 모여 살았던 겨울 생활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그때 그시절에도 학교 공부는 계속되었다.
잘 살수 있는 마음의 준비
1.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
2. 제 정신 제 힘으로 살 길을 찾자
3. 슬기와 부지런함으로 가난을 몰아내자
4. 서로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일하자
5. 행복은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고 내 발로 걸어가서 찾아내야 한다.
박송월 가옥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기존의 집에 방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확장한 구조로,
길게 연결된 각 방과 작은 부엌은 정착생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현재 박송월 가옥은 원형 그대로 청호동 아바이 마을에 남아있으며, 여름철 생활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속초와 실향민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는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500만명이 넘는 실향민이 생겨났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수를 3,000만명이라 볼 때 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이산가족 70년" 백서에 의하면 1945년 해방 후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38선 이남으로 넘어와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월남 실향민이 350만 명이며,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남한을 선택한 북한 동포는 15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속초를 비롯한 동해안 각지에 있던 대부분의 함경도 사람들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미군 LST로 부산에 상륙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이들은 중공군이 격퇴되자 국군의 북진과 더불어 고향 가까운 곳에 가려고 따라 올라오다가 주저앉게 된 사람들이다.
6.25전쟁 후 속초시는 양양군에 속한 하나의 작은 읍에 불과 하였지만,
1960년대의 한 신문기록에 의하면,
전쟁이 끝나고 각지에서 모여든 실향민들은 당시 속초 인구의 70%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분단의 쓰라림을 뼈저리게 느끼는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속초에는
실향민들의 염원이 담긴 수복기념탑이 세워져 망향의 한을 달래고 있다.
피난보따리를 들고 왼손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북녘을 향해 걷는 모장상의 북녘 고향을 향한 눈길은
아마도 500만 실향민의 공통된 염원의 상징일 것이다.
가을동화 촬영지로 잘 알려진 은서네집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현재 아바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박물관에서 매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KBS2 드라마 "가을동화"는 어릴 때부터 남매로 지내오던 준서(송승헌)와 은서(송혜교)의 비극적인 사랑이 펼쳐지는 이야기다.
원빈과 송혜교의 명대사가 기억난다.
원빈: 사랑? 웃기지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송혜교: 얼마나... 줄수 있는데요?
본격적인 속초시립박물관의 설명은 다음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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