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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1. 종과 상전(1-2)
성도가 복음으로 산다면, 복음의 흔적은 자연히 그의 삶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1절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본문은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무작정 종이 상전에게 취할, 태도에 대한 규례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곧 ‘종은 상전을 공경하라는 것이 성경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전에 대한 규례를 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종이 상전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비방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상전에 대한 공경을 말하는 것은, 단지 상전이 종으로부터 공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거나, 상전으로 하여금 공경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종이 상전을 공경하고 안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비방을 받는 문제로까지 언급을 하는 것일까요? 먼저 종이 상전을 공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부터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종은 주인에게 종속된 노예의 입장에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고, 아무리 일을 해도 자신의 소유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이년을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고, 자신의 자손도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인생이 종입니다.
이러한 종에게 과연 자신을 주관하고 부리는 상전을, 공경할 마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신세한탄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전을 보면서, ‘하나님, 왜 나는 종으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왜 나의 신세가 이럽니까?’라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한탄하고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불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거부하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위한, 창조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세한탄이며, 대개 이런 한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곧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상전이 누리고 있는 것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현재의 인생을 거부하는 마음에, 상전 공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불평과 한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겠다고 했느냐?’면서, 하나님의 일 자체를 거부하고 싶어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라는 것인데, 복음의 정신 밖에서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일을 부여 받은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살아가는 처량한 자신의 신세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상전을 공경하라는 것은, 상전을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이라는 신분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할 때, 상전을 향한 공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종이 종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종이라는 처지가 자신을, 은혜와 상관이 없는 자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아는 성도라면, 이러한 사람으로 고침받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종과 상전을 차별하여 대우하신다면, 종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과 상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다만 똑같은 하나님의 도구로만 여길 뿐입니다. 마치 감독이 드라마를 촬영할 때, 누구는 종으로, 누구는 상전으로 배역을 맡기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감독은 종의 역할에 맞는 사람을 골랐을 뿐이고, 상전의 역할에 맞는 사람을 고를 뿐입니다.
드라마에서 종이 영원한 종이 아니고, 상전이 영원한 상전이 아닌 것처럼, 드라마가 끝나면 종이든 상전이든, 똑같은 위치로 돌아가게 되는 것처럼,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잠시 동안 이어지고 있는, 드라마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기 배역을 맡아서 세상, 곧 무대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라는 역할에 대해, 무척이나 못마땅해 합니다. 이왕이면 편하고 쉬운 역할을 주지 않았다고 아우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맹인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차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잘 태어나고 못 태어난 것으로 사람을 구분한 것입니다.
두 눈이 멀쩡한 자신들에 비해서,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것은, 뭔가 그 인생이 단단히 꼬였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것은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멀쩡한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잘난 척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멀쩡한 눈으로 태어난 것이, 맹인보다 잘났기 때문이 아니고, 맹인보다 더 착하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멀쩡하든 맹인이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맹인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세한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2절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상전이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곧 믿음의 형제라는 것을, 자신의 유리함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자신은, 특별히 잘 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상전을 공경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히 여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상전을 만나게 하신 것은, 나에게 편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 형제의 관계에서도 상전을 공경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믿는 상전에 대해서도 경히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왜 나는 이렇습니까?’라는 불평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면 되는 것이지, 타인을 바라보면서 타인처럼 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한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연이란 우리의 눈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곧 내 눈에 예쁘고 예쁘지 않고와 상관없이, 자연 만물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같으면 예쁘지 않은 것은 다 뽑아 버리고, 예쁜 것만 남기고 싶어 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쁘지 않은 꽃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피조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정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정원으로 가꾸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정원이 아니라, 자연처럼 내 욕망과 상관없이 흘러갑니다.
종으로 나든 상전으로 나든, 우리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상전이라고 해서 거들먹거릴 수 없고, 종이라고 해서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났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성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2. 바른 말(3-8)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나, 손해가 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나 선지자들은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해야 할 말들이, 그들 개인을 유리하게 하거나 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반감을 일으키고, 배척을 받을 수 있는 불리한 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선지자와 사도들은, 그들이 전해야 했던 말씀으로 인해, 원하지 않은 고초를 겪게 되었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선지자와 사도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3절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 구절을 보면 다른 교훈, 바른 말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사도는 바른 말에 대해 설명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십자가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에 관한 교훈 역시, 십자가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교훈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십자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십자가만 전한다면,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거기에 부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을 더하여 전해야만, 소위 인기라는 것을 붙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십자가가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십자가는 성도로 하여금 자기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망에 처한 나를 구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이 있게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은, ‘나는 사망에 처한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는 고백이 있는, 낮아짐의 자리까지 내려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게 될 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종이 상전을 공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한 신분입니다. 하지만 육신은 종이라는 낮아진 신분에 있다고 해도, 그 마음은 낮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상전을 시기한다면, 그것은 낮아진 마음이 아니라 높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공경이 있을 수 없고, 종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도 물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분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주님, 저는 사망에 처한 악한 자일뿐입니다. 이러한 저에게는 종의 신분도 과분할 뿐입니다’라는 마음이 낮아진 마음이고, 이 마음에서 공경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낮아지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 마음을 높은데 두고 살아가는, 악한 자일뿐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반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말이란 바로 이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파헤치며,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꺾으며, 낮아진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 바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에는, 열심히 하고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자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바른 말을 따른다면, 예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바른 말을 따른지 않으면, 결국 교만한 마음에서 배출되는 죄의 흔적들만 보일 뿐입니다.
그 죄의 흔적들을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다른 교훈에 빠짐으로 인해서, 신호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고, 변론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른 교훈에 빠짐으로써, 그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보지 않기에, 지금도 예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자신이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내세워, 자기의 성도 됨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교만에서 변론과 언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변론과 언쟁은 자신의 것을 주장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를 말하면서, 그 의를 알고 있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에, 결국 자신의 옳음과 지식으로 변론하고 언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변론을 하고 언쟁을 할 때, 그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가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한 것이라면, 맺는 것은 감사일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었고, 사랑을 나누었고, 성령으로 교제한 증거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얘기했다고 해도, 변론과 다툼과 언쟁이 남았다면, 성경을 얘기했으되, 그리스도로 교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른 말을 전한다면, 그것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히신, 낮아진 자리로 내려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주님이 계신 자리로 가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지식만 머리에 쌓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의롭고, 주님을 잘 아는데, 다른 사람은 모두 주님도 잘 모르는, 악한 자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바른 말은 이러한 모든 교만을 꺾어 버리고, 우리의 심령을 붙들어 주님의 십자가 아래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6-8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서 언급한 자족하는 마음이란, 인생이 세상에 오고 가는 것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가지고 가지도 못한다는 것은, 지금 내 수중에 있는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대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 내 소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내게 맡겨진 것일 뿐이라는 마음이라면, 지금 주어진 것으로 얼마든지 자족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마음에서 변론과 다툼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족하는 마음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이 곧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기 부족을 알고, 그래서 다만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지 않을 때, 인간의 마음은 높은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지금의 것에 자족하지 못하기에, 지금보다 높은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높아지는 것이 은혜라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지금의 자신에 대해 감사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잘난 자가 보이고, 나보다 많이 받은 자가 보이는데, 어떻게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시기하게 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말하면서,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누가 못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높은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이 계신 낮아진 자리로 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말을 가볍게 하고 있는, 자신의 악함과 위선에 대해 놀라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의 괴수였음을 마음 깊이 실감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에 대해 고마움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심으로, 모든 것에 지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타인과의 다툼이나 변론이나 시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바른 말은 우리 모두를 십자가로 끌어갑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해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을 따르며 살아갈 때,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미움 대신에,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과 감사함만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얼마나 알고 모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감사함이 그 마음에 채워져 있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예수님을 아는 성도인 것입니다.
3. 일만 악의 뿌리(9-10)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하고서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는, 십자가의 은혜 역시 마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생각한다면 사람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에 두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을 심판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잊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사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을 위해서, 많은 재물이 손에 들어오기를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본문의 말씀은 찬 물을 끼얹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9-10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해지고 싶은 것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중단되지 않은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가 영원한 생명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는 멸망에 빠진다는 것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어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은, 곧 천국의 삶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삶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 역시 천국의 삶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의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하는, 돈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며,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전혀 제공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항상 소원해야 하는 것은, 땅에서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부해지려고 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생존을 위해 돈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나를 영생에 있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에 감사하고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십자가는 이미 인기 없는 말로 전락 된지 오래입니다. 천국을 가는 것은 좋아한다고 하지만, 교회에서 천국만 말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천국 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타협하여, 십자가에 세상이 원하는 다른 것을 첨가하여, 예수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생존이라면,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이 현실로 다가올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그에게 생존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존의 모든 문제도 결국 심판이라는 현실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을 뜻합니다. 세상이 위대하게 여기는 것도, 가치 있게 여기는 것도, 보물로 여기는 것도, 심판으로 인해서 모두 무너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헛됨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헛됨을 아는 자가, 생존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헛되지 않은 것,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보배를 필요로 하고 소망하게 될 뿐입니다. 이들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좋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병이 들어도 돈이 있어야 병원을 갈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집도 살 수 있고, 하여튼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돈’하면서 돈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돈이 나를 살린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악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살고 있으니, 당연히 내일도 모레도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할 뿐,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자신이 책임지고 있고, 자신의 능력으로 목숨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80이 아니라 800년을 산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책임지지를 못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게 하신 분이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 자격이 있어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여기면서, 생존을 위해서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람의 본질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사람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면,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는 것이고, 결국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로 나아가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본질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망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 속에서, 인간이 과연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좋습니까? 솔직히 돈이 좋지 않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돈이 과연 좋기만 할까요? 돈은 우리를 웃게도 하지만, 울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하고, 염려하게도 하고, 친구를 원수로 만들기도 하고, 부모 형제도 버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지독한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 악의 근원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사랑이 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자기 사랑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까? 의로운 자로 남고 싶어 하고, 가치 있는 인간되고 싶어 하는 자기 사랑의 인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싫은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사랑에 묻혀 사는 인간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저주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그 소리를 듣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돈일뿐입니다. 돈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눅 16:13-14절을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겠습니까?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로서, 돈으로 사는 세상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서 ‘사람이 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돈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야 말로, 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돈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천국을 외면하게 합니다. 그래서 악의 근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복음이 비웃음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을 말하면, 눈앞의 현실을 외면한, 비현실적인 말로 여길 뿐입니다. 복음만을 얘기하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비난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육이 잘되는 것까지 책임지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에 주저앉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향해서, 하루하루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는 성도를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땅에서, 입고 먹고 마시고, 다른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이 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돈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살아갑니다. 영원한 세상입니다. 반면에 이 땅은 썩어 가면서, 점차 무너지고 있는 곳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천국에 두게 되면, 자연히 사랑의 대상은 달라집니다. 돈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4. 믿음의 선한 싸움(11-12)
성도는 하루하루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과는 분명, 그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 것과, 믿음이 없이 산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과연 그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가 하루아침에 믿음을 버려버린다면, 물론 믿음은 버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믿음으로 살던 사람이 믿음이 없이 산다면, 분명 달라지는 것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던 것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도, 사후에 좋은 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성경을 보지 않고,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물론 믿음을 버린다면 교회도, 성경도, 헌금도 멀리하게 되겠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보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역시 맞는 생각은 아닙니다.
지금의 얘기는 믿는 자가 심사숙고해봐야 할 내용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버렸다는 것은, 곧 믿음의 삶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던 사람에게서 믿음의 삶이 사라졌다면, 분명 있던 것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과연 여러분이 오늘 믿음을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삶에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을 제외하고,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면, 그것은 그동안 교회를 다녔을 뿐, 믿음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을 두고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대해 좀 더 긴장감을 가지고, 깊은 생각을 해보자는 뜻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교회를 출입하는 것이 계속됨으로써, 어쩌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진 채, 교회를 찾는, 곧 습관과 형식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8절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곧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는 형편에서, 더 갖고자 하는 것은 욕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지 못하고, 더욱 더 부해지고 싶은 욕망으로, 돈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사도는 11-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12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유리한 말, 내 마음에 드는 말은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단지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좋은 말로 여기고, 머리에 보관하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가야할 길을 말씀하는 것이고, 성도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사도가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호칭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세상의 사람을 둘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사람인 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가는 길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 가는 길과, 하나님께 속한 성도가 가는 길이 다르기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피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부해지고자 하는 것이고,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본래의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는가?’입니다.
본래 우리 마음은 항상 부를 향해 따라갑니다. 돈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평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을 12절에서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람이 취할 것은 돈이 아니라 영생이며, 이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영생을 취하고자 할 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갈등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가던 길과 다른 길을 가야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이 성도이기에,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속에서 발생하는 싸움이며, 이것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만나,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복음을 전파하기 앞서 가장 먼저, 마귀를 만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세상이, 마귀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충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과의 화해가 아니라 충돌, 분쟁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검을 주시는 것입니다. 곧 전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마귀의 말과 예수님의 말 중에, 어느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까?
머리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만들어 내는 정답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 제시하는 답은, 사람은 돈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이 밥 먹여 주느냐는 것입니다.
마귀의 두 번째, 세 번째 시험 모두가 동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말에 더 끌리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영생을 취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옛사람과 말씀의 충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말씀한 것처럼, 믿음으로 살던 성도가 믿음을 버렸을 때 달라지는 것은, 충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곧 선한 싸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한 싸움의 사라짐, 곧 있던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그동안 충돌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심사숙고 해봐야 할 내용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속에 아무런 충돌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마귀가 유혹하는 대로, 내 육신의 이익을 따라 흘러온 삶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도가 부름을 입은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름을 입었다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부터 빠져 나온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부름을 입은 자가 가야할 길은, 영생을 취하는 길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성도에게, 선한 싸움은 필연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원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부해지고 돈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라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갈 5:16-18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것이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싸움이 없이 살았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돈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부해지는 길을 가고자 하기 때문에, 선한 싸움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항상 육신에 유리한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영생을 취하는 길로 끌어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영생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으로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승리는, 세상 속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자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의 승리를, 세상에 증언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은(13-16)
성도는 누구든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의를 가지고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을 절대로 의로운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죄인이라는 고백으로만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관계에서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사라진 채, 의를 가지고 경쟁하고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의로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기 때문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당에서나 찾는 분이고, 세상에서의 삶은 나 홀로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때와 시간, 장소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의로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서는, 어디서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13절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이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곧 바울의 삶은, 항상 하나님 앞과 예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실제 눈으로 보며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베푸시는 세계를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의 흔적임을 알았기에, 바울은 어디를 가든 하나님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이라는 말을 합니다. 세상 만물이 살아가는 것이, 모두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곧 악이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는데,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은 없으면 안되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돈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해준다고 생각하기에, 돈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나를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12절에서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은, 만물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심과의 충돌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싸움이 없다는 것은, 만물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대로 살겠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없기에, 자신의 욕심과의 충돌도 없는 것이고, 선한 싸움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합니다. 빌라도를 향하여 하신 예수님의 선한 증언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위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만 증언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선한 증언입니다.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래서 성도는 이 말씀처럼, 주님이 오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명령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자로 사는 것은, 영생을 취하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영생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영생을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라면, 날마다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족한 줄을 알고 살아갈 것이고, 이런 믿음에서는 부하려고 하는 것도 없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돈을 사랑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15-16절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는 말씀처럼, 세상에서 죽지 아니함이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죽지 않을 자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지 않음을 믿는 성도라면, 그의 삶은 자연히 영생을 취하는 것으로 향할 것입니다. 오직 영생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이지, 세상은 결코 죽음에 처한 자를 건질 수도, 구출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마음을 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잘살고 못사는 자신에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이고, 결국 잘사는 것으로 교만하게 되고, 못산다는 것으로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나를 살게 하시는 주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면, 영원히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영생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면, 결국 멸망으로 끝날 뿐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이 떠진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약이 이르면 주님은 분명히 오십니다. 그때까지 죽음이 없는 예수님을 소망하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으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구할 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생을 향해 달려가는 삶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 순간은 인생의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세상의 결국은 기약이 이르면, 주님이 오시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복된 삶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고,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신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인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약이, 이를 때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날이 끝이고 그때는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 전부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 영생을 추구하는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오직 돈 벌어 잘 사는 것이, 인생에서 최고 복된 것으로 여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심판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로서, 과연 무엇을 따르고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승리는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도가 추구할 것은 영생 밖에 없기에,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것 역시 영생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만 소망하고 인내하면서,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다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그리스도를 믿고 소망하고 신뢰하는 성도라면,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이고,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복된 삶이기에, 성도는 세상 다른 것이 없다고 해도, 주님만으로 전혀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곧 모든 비결은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말하는 자로서, 참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세상이 사는 대로 무작정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에 대해 마음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마음이 붙들리기를 소원하면서, 영원히 사는 길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것, 영원한 것을 구하십시오. 돈으로 모든 것이 갖춰지고 채워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대속의 피로 이뤄지는 삶을 원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6. 좋은 터를 쌓아(17-19)
본래 인간은 인생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이 본래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사탄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자신에게 두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나 방향이, 자신의 높아짐으로 고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오직 하나님께만 두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어떤 훼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높아짐을 위해, 예수님을 부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라고 말합니다. 곧 부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인데, 여러분 중에 자신을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돈이 좀 많다고 할 수 있는 분들도, ‘세상에 부자가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것을 부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부자들입니다. 8절을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족하다는, 이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여러분은 자신을 부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미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는, 전혀 족함을 모르는 사람으로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는 삶은 거절해 버릴 정도로 높은 마음들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것으로는 만족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타인에 비해 소유물이 적은 자신이 초라하게 보입니다. 많이 가진 자 앞에서, 적게 가진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높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결과들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이 얼마나 부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패한 마음입니다.
17절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여기서 마음을 높이지 말라는 것은, 마음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곧 낮은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세상에는 소망 둘 것이 없음을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사망에 처한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아무리 땅의 것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도, 결국 사망으로 끝날 인생임을 알게 되고, 그러므로 세상 그 무엇도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될 수 없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비로소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놓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소망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낮아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 마음인 것입니다.
결국 높아진 마음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재물만 있으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이야 말로 높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이 되겠습니까?
재물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재물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사망에 처한 자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그리스도만이 소망임을 안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인생이야 말로, 그 어떤 부자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일 때 17절 끝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높은 마음에 있다면, 그런 마음에 하나님은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높은 마음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후히 넘치게 받았다’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낮은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둘 때,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위해 대속물로 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후히 넘치게 대접받고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낮은 마음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만으로도 족한 줄로 알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채워 주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높아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밑바닥에 구멍 난 항아리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만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아무리 후히 주신다고 해도 족함을 모르는 마음이고, 날마다 빈곤의 마음이 되어서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생은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말씀을 기준하여 자신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지금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높은 마음으로 인해서, 후히 주신 은혜를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정함이 없는 재물에만 소망을 둔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진 마음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8-19절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선한 일,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낮아진 마음에서 선한 일이 나오게 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게 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을 하고, 나누어주기를 부지런히 하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가를 통하여, 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구제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선한 사업을 많이 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낮아진 마음에서는,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게 되고, 구제도 즐거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 제가 돈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이 말에 나타난 잘못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은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을 도울 형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이미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후히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죽을 때까지,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는 것은,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은혜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얼마큼 많이 나누어 주고,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후히 누리고 있는 자로 보면서, 후히 받은 것을 나누기를 기뻐하는 믿음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19절에서 말하는 좋은 터란, 참된 생명의 터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터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를 뜻하는 것입니다.
좋은 터에 거하는 마음은,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든, 모든 것이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게 되며 감사하게 됩니다.
높아진 마음으로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만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고,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만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좋은 터를 벗어난 마음이고, 이런 마음으로는 나누어 주기를 즐거워 할 수도 없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것을 챙기기에 바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후히 주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있어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합니다. 재물로 내 마음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나누어 주기를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성도는 소망을 예수님께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좋은 터를 쌓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다시금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왜 재물이 정함이 없는 것이고, 소망이 될 수 없는지를, 인간의 본질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부탁한 것을 지키라(20-21)
사도 바울이 20절에서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는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과연 사도가 디모데에게 피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은 무엇일까요?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당부하고 있는 피하라는 것은, 복음을 비방하는 말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것은, 1:3-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시 에베소교회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무리로부터, 에베소교회의 성도를 지키기 위해 디모데를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은 하나님의 일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개입하였으며,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인간이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를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훈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의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이, 멸망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인도하여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신뢰함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일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교훈이 목적하는 길에서 벗어난 채, 인간의 일을 이루기 위한 교훈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피 흘리신 공로로, 사망에 처한 죄인을 구속하신 구속사역만 증거하는 것이 복음인데, 다른 교훈은 사람의 일을 위하고 돕기 위한 복음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피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복음이 교훈하는 것만 증거 하는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은 무작정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나를 천국가게 하기 위한 것이 복음이기에, 복음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담고 있는 교훈, 곧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 모두가 복음인 것으로 착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복음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도 열심도,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서는, 헛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훈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옹호합니다. 오히려 열심히 노력하여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이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인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거짓된 것이고 망령되고 헛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게 하는 말이 아니기에, 헛된 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1절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람이 서로 자기의 일을 내어 놓으면, 결국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자기의 일을 내세워 경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일을 내어 놓는 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따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내어 놓을 것은 그리스도부터 받은 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내어 놓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사망에서 건짐 받게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 곧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선 성도에게서는, 자신의 것이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 자신의 것은, 어떠한 것이라 해도 무가치한 것이고, 허접한 것임을 스스로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반론 역시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반론은 인간의 충돌의 결과입니다. 서로 자신의 것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반론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말, 자기 지식의 옳음을 증거하기 때문에,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 자식의 지식을 내어 놓기 때문에, 반론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증거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곧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내 죄로 인해 세상에 오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공로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반론은 인간의 공로의 충돌이기에,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는 관계에서는, 충돌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얘기할 때도, 자신의 지식을 내어 놓는 것이 되면 결국 반론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이 맞음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함께 앉아 성경을 얘기하는 본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성도가 함께 성경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서로 나누면서, 주님의 은혜에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믿음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내 말을 받지 않으니까, 그는 성도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 말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자연히 맞는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은, 믿음에 있는 자라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인가 성도가 아닌가라는 것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그리스도만이 아실뿐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설사 자기에 대해서도, 자신이 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에 있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의 증거가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무너짐에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맛보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나타나는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말을 한다고 해서, 그를 신앙이 없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벗어난 말을 한다면, 무엇이 복음인가를 증거함으로써, 더 깊은 신앙의 기쁨이 있는 자리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성도는 지식을 전달하고, 나와 같은 지식을 갖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맛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가 진심으로 말씀 안에서 만난다면, 헛된 말도, 반론도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저 자신도 항상, 이것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를 위해 설교를 하게 되면, 자칫 목사 자신부터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기쁨에서 멀어진 상태에서, 성경을 얘기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 스스로도 이것을 경계해야 하고, 여러분도 이것을 경계하면서, 언제나 그리스도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을 내어 놓고, 증거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 피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따르는 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믿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기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목표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 목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목표에서 벗어남으로, 결국 자신의 말과 자신의 지식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도가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도의 관심은 한순간도, 주님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신을 어느 정도로 경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날마다 자신을 살피며, 주님의 길에 서 있는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인지를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신앙이 있다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속이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로 채워져 있다면, 믿음이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가장 크신 분으로 내 속에 자리하기 때문에, 자연히 크신 분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고, 크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못남을 여실히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내어 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성도가 이렇게 사는 것 또한,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삶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것, 인간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는 말로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다. 주의 은혜가 그들을 믿음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