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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동영상: 시리아 비포장 도로를 취재진 차량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린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시리아 국경 마을, 시리아 난민 7만여 명이 살고 있는 아르살 (Arsal) 난민촌입니다. 한국에서 취재진이 왔다는 소식에 호기심 어린 꼬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환호하는 아이들), 수백여 개의 천막을 지나 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두 명의 손주가 사는 시리아 난민가족입니다. 노부부는 10년 전 아들 두 명을 모두 전쟁 통에 잃었습니다. 숨진 아들들을 가슴에 묻고 고향을 떠나면서 남은 가족만이라도 부디 목숨을 건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夫아베드 하피즈/시리아난민(65세)/婦하인드 모함마드/시리아난민(62세): 하늘에서 폭탄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폭탄끼리 서로 부딪칠 것 같았습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죽은 아들 장례식을 치렀고, 매장을 했습니다.
내레이션: 며느리들은 재혼해서 떠났고 이제 노부부에게는 손자 손녀가 남았습니다.
아베드: 우리 부부는 이미 늙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의 뜻에 따라 남아 있는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내레이션: 난민촌의 오후, 손녀 라마를 따라서 민간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가봤습니다.
강사: 오늘 우리는 슬픈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 볼 거예요.
내레이션: 소녀들은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자신이 태어나자 마자 아빠는 목숨을 잃었고 엄마는 떠나버린 아이, 수업 내내 울고 있는 라마에게 조심스레 위로를 건넸습니다.
취재진: 엄마는 널 매일 기억할 거야.
라마: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취재진: 아는데 왜 이렇게 계속 울어요?
라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내레이션: 또 다른 천막, 이곳에서는 할머니와 손녀 이렇게 두 명이 살고 있습니다. 함께 서 있기도 비좁은 공간, 할머니는 낯선 취재진에게 집안 살림살이를 보여주며 난민촌에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설명했습니다.
할머니: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내레이션: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이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빠는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재혼을 한 탓에 10살 소녀는 난민촌으로 보내져 할머니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하산 무스타파/시리아 난민(65세): 손녀는 좋은 시대를 살았으면 해요. 앞으로 손녀가 살아갈 나날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는 좋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레이션: 할머니는 손녀의 앞날은 전쟁으로 얼룩진 본인의 삶과 다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레이션: 손녀 리마스는 난민촌 인근 학교에 다닙니다. 부모의 부재는 소녀를 일찍 철들게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면서도 리마스는 시리아에 있는 엄마를 늘 생각합니다.
리마스/시리아난민(10세): 엄마는 좋은 사람이고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엄마가 참 그리워요.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엄마는 내 전부에요.
내레이션: 난민촌 소녀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리마스(10세): 할머니가 행복하시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를 너무 사랑해요, 저는 커서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어요. 엄마를 만나야 하니까요. (전쟁으로 폭격 폭발하는 동영상),
내레이션: 2011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에서 시작된 정부군과 반군간의 내전, 12년간 전쟁이 계속되는 사이 35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시리아 난민은 680만 명에 이릅니다. 전쟁 시작 당시 시리아 인구 2273만 명의 30%에 해당합니다. 부모 잃은 아이들, 나이든 어르신이 많은 난민촌에서 젊은 남성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자녀 셋을 부양하고 있는 가장을 만났습니;다, 세 명의 자녀 가운데 두 명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도 없고 충분히 먹일 수도 없는 상황에 아버지는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노우딘 엘 제인/시리아난민(44세):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약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없고요.
내레이션: 이처럼 병들고 다친 사람들이 많은 난민촌에는 환자들이 넘쳐납니다. 난민촌 근처의 병원을 찾았습니다. 아픈 난민들이 가득한 병원에서 눈코 뜰새 없이 바빠 보이는 의사, 그 역시 고국을 떠나온 난민입니다.
아그함 호리아/시리아난민 의사: 열악한 상황의 난민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기쁘죠. 우리 국민에게 1%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내레이션: 그는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3년 동안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그는 이 상황이 지친다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취재진: 시리아에 결국엔 평화가 올까요?
아그함: 결국 그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끝이 없는 전쟁은 없으니까요.
내레이션: 이런 시리아 난민 가운데 80여만 명은 레바논에 살고 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밀려드는 시리아 난민들을 비교적 너그럽게 수용해 온 레바논이지만 점점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유엔 난민기구가 운영하는 난민학교,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취재진: 앞으로 시리아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시리아 난민아동: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내레이션: 전쟁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느냐는 물음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리아 난민아동: 신께서 이 위기를 해결해 주셔서 제발 포격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내레이션: 그토록 두려운 전쟁을 피해 레바논으로 왔지만 레바논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심각한경제난을 겪고 있는 레바논, 곳곳에서 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부족해 신호등 마저 모두 꺼진 거리, 은행 시스템이 무너져 어디서도 카드를 쓸 수 없는 상점들, 유엔은 외부의 도움 없이 시리아 난민촌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호소했습니다.
라사/UNHCR 레바논 지부 미디어담당관: 레바논에 있는 난민 90%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사람은 1% 미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시리아 난민들이 재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최근 시리아 난민들의 본국송환을 추진하고 있는 레바논 사회부 장관은 고민을 가감 없이 들어냈습니다,
헥터 엘 하자르/레바논 사회부장관: 레바논은 사회 전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시리아 난민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기는 힘듭니다. 레바논인들을 위한 지원도 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시리아 난민들까지 지원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다가는 사회 곳곳에서 분쟁과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고국은 전쟁 중인데 바로 옆 나라의 상황도 바로 나빠지고 있는 현실, 시리아 난민들은 갈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천광역시), 압둘라 흐만씨는 시리아에서 한국에 온지 10년이 됐습니다.
압둘라 흐만/시리아출신 인도적체류자: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조국에서 징집만은 피하고 싶어 탈출구를 찾던 끝에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한국입니다.
압둘라: 사람들의 집도 다 폭발됐고, 사람이 길을 가다 죽을 수도 있고 군인들 때문에---되게 힘들더라고요.
내레이션: 한국 정부에 세 차례 난민신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결국 인도적 체류신분을 받았습니다. 인도적 체류자들은 일년에 한 번씩 체류 갱신 허가를 받아야 하고 단순 노무직에만 취업할 수 있습니다. 난민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생각을 합니다.
압둘라: 실망, 사실 한 마디로 말하면 실망, 시리아로 돌아갈 수 있으면 아저씨가 얘기 안 하셔도 제가 그냥 이미 돌아갔을 거라고 얘기할 거예요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어요.
내레이션: 한국에는 현재 압둘라 흐만씨 같은 시리아 출신의 인도적 체류자가 1200여명 살고 있습니다. 1994년 우리 정부가 처음 난민심사를 시작한 후 난민 신청건 수는 모두 84,900여건입니다. 이 가운데 인정건수는 1300여건으로 난민 인정률은 1.6%에 불과합니다. 시사기획 창에서는 유엔 난민기구의 자료를 바탕으로 최근 2년 동안 OECD 국가들의 난민 인정률을 계산해 봤습니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지난 10년 평균보다 더 떨어진 0.5% 대로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 수준입니다. (1위 네델란드 57.86%, 2위 영국 56.31%, 3위 룩셈부르크 55.06%---36위 대한민국 0.55%, 37위 슬로바키아 0.36%, 38위 이스라엘 0.05%), 난민불인정 사유는 신청자가 본국의 어려움을 입증하지 못해서, 본국에서 받은 박해의 이유가 불분명해서 등 다양했습니다. 난민이 아닌 사람을 걸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한국의 난민 제도, 난민은 잠재적 범죄자이자 사회의 짐이라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일/법무법인 어필 변호사: 많은 수의 난민들은 대부분 그 나라에서 엄청난 용기와 대단한 기술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어도 해외로 나가서 바다를 건너 국경을 건너 여기까지 온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거든요. 1994년~2022년 국적별 난민인정현황 (출처: 법무부), 미얀마 432명 에티오피아 151명 방글라데시 122명 파키스탄 102명 이집트 102명 기타 429명 총합 1338명, 한국에 살고 있는 난민 인정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는 미얀마입니다. 미얀마 출신 난민 인정자는 모두 430여명, 어려운 고국사정을 생각하며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난민촌 인근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미얀마인 모임회장: 원래 5천원씩 보내던 후원금을 만원씩 하면 어떨까요?
내레이션: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는 군부독재의 소식을 한국에서 듣고 있는 미얀마 난민들, 본인들만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국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해집니다.
사에크리스/미얀마난민(30세): 마음이 너무 아파요. 페이스북 같은 거 보면 아이들이 죽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소무퍼/미얀마 난민(29세): 불에 태워서 죽이기도---,마음이 너무 아파요. 빨리 미얀마가 평화로웠으면 좋겠어요.
내레이션: 한국에 온 미얀마인들이 어울리는 자리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봅니다. 미얀마인 야후씨는 태국에 있는 난민촌에서 살다가 7년전 한국으로 왔습니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직해 일한지 3년째 입니다. 이제는 일이 제법 익숙합니다. 고된 노동이지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야후/미얀마 난민30세):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8시 반까지 일해요.
취재진: 너무 힘들진 않으세요?
야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취재진: 언제까지 이 일하고 싶으세요?
야후: 아기 다 클 때까지 할 거예요.
내레이션: 야후씨와 아내 분야씨의 부모는 미얀마 군부독재를 피해 태국의 난민촌으로 들어갔습니다. 난민촌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한국에 오기 전에는 난민촌 바깥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유엔난민기구가 한국에 갈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야후: 기분이 좋았어요.
분야: 깜짝 놀랐어요.
야후: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제 생각하는 것이 꿈만 같았어요. 여기는 갈 수 없어요. 꿈같아요.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계속 생각했어요.
내레이션: 아직도 한국 생활이 꿈을 꾸는 것처럼 신기하고 새롭다는 부부, 취재진은 태국의 난민촌을 찾아 갈 것이라고 알려주고 거기에 있는 부모님께 전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분야/미얀마 난민(27세): 엄마, 아빠, 돈 많이 벌어서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게요. 사랑해요.
내레이션: 이제 부부가 살다 왔다는 태국의 난민촌으로 향합니다. 태국 방콕에서 북으로 500km 가량 떨어진 메솟(Mae Sot) 지역,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난민들이 수시로 넘어옵니다. 메솟 시내에서 다시 2시간 가량을 더 달리면 산 속에 있는 은피엔 난민촌이 나옵니다. 얼기설기 지어진 허름한 집들, 이 가족은 군부정권을 피해 이 난민촌에 들어온지 16년째가 됐습니다. 군부독재와 군사쿠데타로 혼란스러운 고국을 떠나서 이곳에 왔지만 난민촌 생활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파사/미얀마 난민(60세): 여기서는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지요. 모든게 통제를 받으니 자유롭지 않습니다.
내레이션: 그 사이 2년 전엔 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돌아갈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상황,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피야피/미얀마 난민(40세): 유엔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구호품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이제 아이들만이라도 이 난민 캠프를 벗어나서 다른 나라로 가서 잘 살기를 바랄 뿐이에요.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입니다.
내레이션: 난민촌에서 나고 자라고 있는 네 명의 자녀들,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엠지엠지/미얀마 난민(10세): 저는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난민촌 바깥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어요. 바깥 사람들은 다 자기 집에서 살고, 기본적인 물도 있고 다 있겠죠.
내레이션: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이 아이는 날마다 난민촌 바깥에서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취재진이 한국에서 만난 야후씨는 자기 꿈을 실제로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야후씨 부부가 안부를 전한 이들의 부모는 안타깝게도 현지 사정상 직접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살고 있는 은피엔 난민촌, 국제사회와 NGO들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난민 숫자, 수십년 째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태국 정부도 국제사회의 관심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곳에 온지 14년 째라는 다른 난민 가족을 만났습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환경에 지쳐갑니다.
네체포/미얀마 난민(34세): 예전 보다 사정이 훨씬 더 나빠졌어요. 물건 가격은 오르고 일은 할 수 없고요.
내레이션: 난민촌 바깥은 전혀 모르는 아이에게 상상 가능한 가장 큰 대상은 그나마 난민 캠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태국이나 미얀마 경계에 있는 메솟뿐입니다.
취재진: 바라는 게 있으면 다 말해 볼래요?
클레버 세이/미얀마 난민(8세): 메솟에 가보고 싶어요.
취재진: 한 번도 메솟 안 가봤어요?
내레이션: (1,355,496명 국가별 미얀마 난민수용 현황), 전 세계 미얀마 난민은 135만여 명 입니다. 주로 인근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950,972명, 말레이시아 157,866명, 태국 90,617명, 인도 64,380명, 인도네시아 902명), 태국에는 9만여 명이 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법적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을 막기 위해 국경 곳곳에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밀려드는 난민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인듯 보였습니다. 버젓이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 미얀마 난민을 간간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난민촌으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얀마 임시정부 구성원 일부도 태국 메솟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미얀마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한 건물에서 그들은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미얀마 난민들 시위 동영상-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이걸 것입니다),
내레이션: 미얀마는 1962년부터 50여년 동안 군부독재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2015년 아웅산 수치 여사의 민주주의 민족동맹의 압승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주의를 일궈나가는 듯 싶었지만 2021년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미얀마가 민주주의를 경험한 기간은 단 5년에 불과합니다.
네이 폰 렛/미얀마 임시정부 대변인: 지난 2년 동안 군부는 3천~3천5백명의 민간인을 죽였어요. 대부분의 시민은 국가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얀마 난민을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내레이션: 희망을 가지기가 쉽지 않지만 이들은 고통이 곧 끝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이 킹 묘 툰/미얀마 임시정부 교육부차관: 독재가 무너지면 모든 문제도 끝날 것입니다. 다른 국가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거예요.
취재진: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까요?
사이킹: 그럼요, 돌아갈 겁니다.
취재진: 그렇게 믿으세요?
사이킹: 저는 굳게 믿습니다.
내레이션: 미얀마 내부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태국 메솟 시내 곳곳에서 숨어살고 있었습니다. 세 딸 중 가운데 한 명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둘째 딸이 미국에 숨어 활동을 계속하는 사이, 나머지 가족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도망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우 차우/미얀마 난민(67세): 평생 모아둔 재산을 다 버리고 떠나왔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서 이렇게 사니까 정말 답답합니다.
내레이션: 자매는 국경을 넘다가 잡혔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슈슈 미트/미얀마 난민(30세): 태국 군인이 미얀마로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안 돼요,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는 돌아가면 죽어요. 무서워요” “안전하지 않아요, 제발 도와 주 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방금 미얀마에서 탈출했단 말이에요. 도와 주세요”
내레이션: 이 가족의 큰 딸과 함께 가족이 함께 몰래 건넜던 미얀마와 태국 국경을 찾았습니다. 강 건너 바로 보이는 미얀마 땅,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등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영 난민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언젠가 다시 돌아갈 날을 그려봅니다.
큐큐 미트/미안마 난민(34세): 저는 미얀마가 정말 그립습니다. 우리가 세울 새로운 정부가 우리나라를 더 좋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취재진: 돌아가고 싶나요?
큐큐: 네, 그럼요, 저는 돌아가서 제 학생들을 가르칠 거예요.
내레이션: 난민, 정신적 종교적 인종적 차이로 인한 박해로 인해 외국으로 탈출환 사람들, 다른 나라에서 살기 위해 가짜로 자신들의 삶을 꾸며낸 사람일까요? 취재진이 만난 난민들은 누구보다 간절히 현재의 난민생활을 접고 안정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정부군의 징집을 피해 11년전 시리아에서 한국에 온 뒤 한국 국적을 취득한 나연우씨, 가짜 난민이 존재할 수 있냐고 반문했습니다.
나연우/시리아출신 귀화한국인: 같은 나라 사람을 죽여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이것을 거부하고 떠나게 됐어요. 가짜 사람 난민이라는 건 없어요. 우리는 지구상으로 항상 이동하고 살잖아요. 그래서 가짜 난민이라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 한국에서 난민이 되는 과정은 본인의 삶과 고통을 상세하게 증명해야 되는 까다로운 과정입니다. 그 시간 동안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고 이웃의 수 많은 편견을 이겨내는 것은 난민들, 본인의 몫입니다.
김연주/난민인권센터 변호사: 대기한 이후에 충분하게 심사의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채 불인정 결정을 받게 되고 그 사유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유를 받게 되는데 또 그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처우보장이 없기 때문에,
내레이션: 세계에서 가장 이주민과 난민에게 관용적인 나라, 독일로 향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2013년~2022년) 난민 927여만 명을 받아들인 나라, 난민 인정률이 한 해 평균 20%가 넘는 이 나라에서는 난민과 난민 신청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베를린 시내에 있는 건설 현장에서 기니 출신의 아마두씨를 만났습니다. 유럽 각국을 떠돌다 독일에 온지 3년째, 취업허가를 받아 상하수도 파이프관을 만드는 회사에서 직업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독일 정부는 그에게 회사에 취직해 기술 교육을 받고 언어를 배울 기회를 줬습니다.
아마두/기니출신 이민자(23세):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행복해요. 제 꿈을 위해서니까요. 저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그건 저의 큰 장점이 될 겁니다.
내레이션: 아마두씨는 일단 임시체류 비자를 받았지만 일을 하면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5년만 체류하면 영주권 체류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에게 독일은 언어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나라지만 무난하게 이 사회에 정착했습니다.
아마두: 저는 이 나라에 혼자 왔어요. 친구도 없었죠. 하지만 독일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훨씬 쉬워졌어요. 어딜 가든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거든요. 이제 같이 어울릴 친구도 많이 생겼죠.
내레이션: 이 기업은 전체 직원 160명 가운데 4분의 1 가량이 난민을 포함한 이민자입니다. 회사는 3년 동안 일정 월급을 주면서 직원들을 교육하고 이후에는 정식직원으로 채용합니다. 회사 대표는 난민과 이주민 채용은 독일 기업들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디어터 미에벤/상하수도관 건설업체 대표: 독일인 훈련생을 충분히 찾기 어렵기 때문에 난민이나이민자들을 찾아보는 겁니다. 근로자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5년에서 10년만 지나면 그들은 연로해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내레이션: 회사 대표는 나이든 사람은 갈수록 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드는 독일의 현실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습니다. 일할 사람의 공백, 그 공간을 매우는 것이 난민과 이주민이라는 것입니다.
디어터: 그들은 의지가 강하고 열심히 일하며 매일 공사 현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공사 현장에서 독일인과도 잘 어울립니다.
내레이션: 2021년 독일 출생아 숫자는 79만여 명, 같은 해 독일이 받아들인 이주민은 난민을 포함해 132만여 명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이 더 많아 지고 있습니다. 독일이 제공하는 난민보호는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망명-본국으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 주는 자격, 난민-국적과 종교 등의 사유로 국가나 비국가 단체로부터 위협을 받은 사람에게 주는 난민 자격, 이 외에도 본국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보충적 보호자격과 위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체류 가능한 추방금지자격을 비교적 관용적으로 부여하고 있습니다.
신옥주/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망명이 안되면 난민, 난민이 안되면 인도적 보호자, 인도적 보호자가 안 되면 강제추방금지 그리고 설령 다 거부가 되더라도 그냥 살 수가 있는 카테고리들을 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독일의 망명법제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훌륭하고 많은 사람이 모델로 삼으려는 안이 될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어떤 범주에 속하든 취업을 해서 독일에 체류할 수 있고 기초 생활에 관련된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또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5년 뒤에는 영주권을 취득할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열려있는 겁니다. 독일에 온지 13년이 된 아프가니스탄 가족을 만났습니다. 이 가족은 오랜 내전으로 고통 받아온 고국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유럽행을 택했습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독일 사회는 열려있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가족 모두 난민 인정을 받았습니다. 큰 딸 파티마씨는 6년전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지금은 안경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를 벗어난 삶, 그녀는 여기서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파티마/아프가니스탄 난민(28세): 베를린에 도착한 날 우린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여기서 삶을 시작할 수 있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됐어요. 우리가 여기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의 기회에요. 그 점에 정말 감사하죠.
내레이션: 아프가니스탄인 18만여 명이 살고 있는 독일 사회, 독일 아프가니스탄 협회는 독일에 온 자국민들의 취업과 정착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열린 사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곳, 난민들은 이 사회에서 본인들이 받은 혜택을 어떤 형태로든 보답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미트라 하세미/독일 아프가니스탄 협회장: 독일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아프가니스탄에 오시도록 환영할 겁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우크라이나 상황을 보세요.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독일인들이 우리 아프가니스탄으로 오도록 환영할 거에요. 두 팔 벌여서 환영하며 과거 독일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들에 다시 감사할 겁니다. (베를린 주정부 이민국),
내레이션: 독일 정부가 이토록 관용적으로 난민과 이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를린 주정부 이민정책 담당관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난민과 이민자들이 많아지면 독일의 정체성이 흔들릴까봐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독일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카트리나 뉴에잘/베를린 주정부 이민정책 담당관: 누구나 이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인입니다. 이 나라의 가치를 이해하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독일인입니다.
내레이션: 그러면서 세계 각국의 순혈주의, 자기 민족만이 그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경계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게르만 민족만이 독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카트리나: 순수 독일 혈통만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혈통이 애국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일 헌법과 정신이, 누구나 지키는 기본법이 독일인을 만드는 겁니다.
내레이션: 다양한 사람이 모인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 상대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깊은 자각, 독일이 난민과 이주민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카트리나: 우리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모인 집단이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본인 머릿 속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현장에서, 가정에서, 이웃에서, 친구끼리, 가족끼리, 실제로 만나는 곳에서 편견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부디 서로 만나기를 권합니다.
내레이션: 레바논에 있는 시리아 난민촌에서, 태국의 미얀마 난민촌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많은 난민들을 만났습니다. 시리아와 미얀마 속으로 들어가 이들이 말하는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더 나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면서 살아가는 것, 인간 존재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간다운 삶, 더 나은 삶을 애타게 찾아온 그들을 너그럽게 품는 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너의 난민이 아닌, 나의 난민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인정하는 사회가 더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취재진: 저희가 한국에서 난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잖아요. 우리한테 하고 싶은 애기 마지막으로 해줄래요?
리마스: 만나서 너무 반갑고, 고맙고, 사랑해요. 끝. (KBS 시사기획 창 특별기획 난민2 난민에 대한 오해와 편견, 423회 나의 난민, 너의 난민 에서 정리).
내용 요약
① 시리아 비포장 도로를 취재진 차량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린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시리아 국경 마을 아르살(Arsal) 난민촌, 시리아 난민 7만여 명이 살고 있다. 한국에서 취재진이 왔다는 소식에 호기심 어린 꼬마들이 모여들었다. 환호하는 아이들, 수백여 개의 천막을 지나 한 가족을 만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두 명의 손주가 사는 시리아 난민가족이다. 노부부는 10년 전 아들 두 명을 모두 전쟁 통에 잃었다. 숨진 아들들을 가슴에 묻고 고향을 떠나면서 남은 가족만이라도 부디 목숨을 건질 수 있기를 바랐다. 하늘에서 폭탄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폭탄끼리 서로 부딪칠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죽은 아들 장례식을 치렀고, 매장을 했다. 며느리들은 재혼해서 떠났고 이제 노부부에게는 손자 손녀가 남았다. 부부는 이미 늙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난민촌의 오후, 민간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가봤다. 소녀들은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태어나자 마자 아빠는 목숨을 잃었고 엄마는 떠나버린 아이, 수업 내내 울고 있는 라마에게 조심스레 위로를 건넸다.
② 또 다른 천막, 이곳에서는 할머니와 손녀 두 명이 살고 있다. 함께 서 있기도 비좁은 공간, 할머니는 낯선 취재진에게 집안 살림살이를 보여주며 난민촌에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재혼을 한 탓에 10살 소녀는 난민촌으로 보내져 할머니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손녀는 좋은 시대를 살았으면 한다. 앞으로 손녀가 살아갈 나날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는 좋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손녀의 앞날은 전쟁으로 얼룩진 본인의 삶과 다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손녀 리마스는 난민촌 인근 학교에 다닌다. 부모의 부재는 소녀를 일찍 철들게 했다.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면서도 리마스는 시리아에 있는 엄마를 늘 생각한다. 난민촌 소녀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할머니가 행복하시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를 너무 사랑한다, 저는 커서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를 만나야 하니까.
③ 2011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에서 시작된 정부군과 반군간의 내전, 12년간 전쟁이 계속되는 사이 35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시리아 난민은 680만 명에 이른다. 전쟁 시작 당시 시리아 인구 2273만 명의 30%에 해당한다. 부모 잃은 아이들, 나이든 어르신이 많은 난민촌에서 젊은 남성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 속에서 자녀 셋을 부양하고 있는 가장을 만났다, 세 명의 자녀 가운데 두 명이 병을 앓고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도 없고 충분히 먹일 수도 없는 상황에 아버지는 절망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약을 구할 수 없다.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없다. 이처럼 병들고 다친 사람들이 많은 난민촌에는 환자들이 넘쳐난다. 난민촌 근처의 병원을 찾았다. 아픈 난민들이 가득한 병원에서 눈코 뜰새 없이 바빠 보이는 의사, 그 역시 고국을 떠나온 난민이다. 열악한 상황의 난민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기쁘다. 우리 국민에게 1%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그는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3년 동안 감옥에 수감됐다. 그는 이 상황이 지친다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시리아에 결국엔 평화가 올까. 결국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다. 끝이 없는 전쟁은 없으니까.
④ 이런 시리아 난민 가운데 80여만 명은 레바논에 살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밀려드는 시리아 난민들을 비교적 너그럽게 수용해 온 레바논이지만 점점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유엔 난민기구(UNHCR)가 운영하는 난민학교,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봤다. 앞으로 시리아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단다. 전쟁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느냐는 물음엔 신께서 이 위기를 해결해 주셔서 제발 포격이 멈췄으면 좋겠단다. 그토록 두려운 전쟁을 피해 레바논으로 왔지만 레바논 상황도 만만치 않다.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레바논, 곳곳에서 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기가 부족해 신호등 마저 모두 꺼진 거리, 은행 시스템이 무너져 어디서도 카드를 쓸 수 없는 상점들, 유엔은 외부의 도움 없이 시리아 난민촌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⑤ 레바논에 있는 난민 90%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사람은 1% 미만에 불과하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시리아 난민들이 재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최근 시리아 난민들의 본국송환을 추진하고 있는 레바논 사회부 장관은 고민을 가감 없이 들어냈다, 레바논은 사회 전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시리아 난민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기는 힘들다. 레바논인들을 위한 지원도 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시리아 난민들까지 지원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다가는 사회 곳곳에서 분쟁과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고국은 전쟁 중인데 바로 옆 나라의 상황도 바로 나빠지고 있는 현실, 시리아 난민들은 갈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광역시에 압둘라 흐만씨는 시리아에서 한국에 온지 10년이 됐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조국에서 징집만은 피하고 싶어 탈출구를 찾던 끝에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한국이다. 사람들의 집도 다 폭발됐고, 사람이 길을 가다 군인들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 되게 힘들었다.
⑥ 한국 정부에 세 차례 난민신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결국 인도적 체류신분을 받았다. 인도적 체류자들은 일년에 한 번씩 체류 갱신 허가를 받아야 하고 단순 노무직에만 취업할 수 있다. 난민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생각을 한다. 실망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실망이다, 시리아로 돌아갈 수 있으면 벌써 얘기 하기 전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다. 한국에는 현재 압둘라 흐만씨 같은 시리아 출신의 인도적 체류자가 1200여명 살고 있다. 1994년 우리 정부가 처음 난민심사를 시작한 후 난민 신청건 수는 모두 84,900여건이다. 이 가운데 인정건수는 1300여건으로 난민 인정률은 1.6%에 불과하다. 유엔 난민기구의 자료를 바탕으로 최근 2년 동안 OECD 국가들의 난민 인정률을 계산해 봤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지난 10년 평균보다 더 떨어진 0.5% 대로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1위 네델란드 57.86%, 2위 영국 56.31%, 3위 룩셈부르크 55.06%---36위 대한민국 0.55%, 37위 슬로바키아 0.36%, 38위 이스라엘 0.05%), 난민불인정 사유는 신청자가 본국의 어려움을 입증하지 못해서, 본국에서 받은 박해의 이유가 불분명해서 등 다양했다. 난민이 아닌 사람을 걸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한국의 난민 제도, 난민은 잠재적 범죄자이자 사회의 짐이라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는 게 아닐까.
⑦ 많은 수의 난민들은 대부분 그 나라에서 엄청난 용기와 대단한 기술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어도 해외로 나가서 바다를 건너 국경을 건너 여기까지 온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1994년~2022년 국적별 난민인정현황 (출처: 법무부), 미얀마 432명 에티오피아 151명 방글라데시 122명 파키스탄 102명 이집트 102명 기타 429명 총합 1338명, 한국에 살고 있는 난민 인정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는 미얀마다. 미얀마 출신 난민 인정자는 모두 430여명, 어려운 고국사정을 생각하며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난민촌 인근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는 군부독재의 소식을 한국에서 듣고 있는 미얀마 난민들, 본인들만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국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해진다. 한국에 온 미얀마인들이 어울리는 자리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본다. 미얀마인 야후씨는 태국에 있는 난민촌에서 살다가 7년전 한국으로 왔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직해 일한지 3년째다. 이제는 일이 제법 익숙하다. 고된 노동이지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 것이 고맙다.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8시 반까지 일한다.
⑧ 야후씨와 아내 분야씨의 부모는 미얀마 군부독재를 피해 태국의 난민촌으로 들어갔다. 난민촌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한국에 오기 전에는 난민촌 바깥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유엔난민기구가 한국에 갈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아직도 한국 생활이 꿈을 꾸는 것처럼 신기하고 새롭다는 부부, 취재진은 태국의 난민촌을 찾아 갈 것이라고 알려주고 거기에 있는 부모님께 전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부부가 살다 왔다는 태국의 난민촌으로 향했다. 태국 방콕에서 북으로 500km 가량 떨어진 메솟(Mae Sot) 지역,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난민들이 수시로 넘어온다. 메솟 시내에서 다시 2시간 가량을 더 달리면 산 속에 있는 은피엔 난민촌이 나온다. 얼기설기 지어진 허름한 집들, 이 가족은 군부정권을 피해 이 난민촌에 들어온지 16년째가 됐다. 군부독재와 군사쿠데타로 혼란스러운 고국을 떠나서 이곳에 왔지만 난민촌 생활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는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일을 할 수가 없다. 모든게 통제를 받으니 자유롭지 않다. 그 사이 2년 전엔 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돌아갈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상황,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⑨ 난민들은 유엔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구호품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이제 아이들만이라도 이 난민 캠프를 벗어나서 다른 나라로 가서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다. 난민촌에서 나고 자라고 있는 네 명의 자녀들,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기서 나가고 싶다. 난민촌 바깥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 바깥 사람들은 다 자기 집에서 살고, 기본적인 물건도 있고 다 있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이 아이는 날마다 난민촌 바깥에서 살아가는 꿈을 꾼다. 취재진이 한국에서 만난 야후씨는 자기 꿈을 실제로 이룬 사람이었다. 야후씨 부부가 안부를 전한 이들의 부모는 안타깝게도 현지 사정상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살고 있는 은피엔 난민촌, 국제사회와 NGO들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난민 숫자, 수십년 째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태국 정부도 국제사회의 관심도 줄어들고 있다. 이곳에 온지 14년 째라는 다른 난민 가족을 만났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환경에 지쳐간다. 예전 보다 사정이 훨씬 더 나빠졌다. 물건 가격은 오르고 일은 할 수 없다. 난민촌 바깥은 전혀 모르는 아이에게 상상 가능한 가장 큰 대상은 그나마 난민 캠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태국이나 미얀마 경계에 있는 메솟뿐이다.
⑩ 전 세계 미얀마 난민은 135만여 명이다. 주로 인근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방글라데시 950,972명, 말레이시아 157,866명, 태국 90,617명, 인도 64,380명, 인도네시아 902명이다, 태국에는 9만여 명이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법적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을 막기 위해 국경 곳곳에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하지만 밀려드는 난민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인듯 보였다. 버젓이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 미얀마 난민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난민촌으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미얀마 임시정부 구성원 일부도 태국 메솟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얀마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한 건물에서 그들은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미얀마 난민들 시위 동영상-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이걸 것이다, 미얀마는 1962년부터 50여년 동안 군부독재로 고통을 받았다. 2015년 아웅산 수치 여사의 민주주의 민족동맹의 압승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주의를 일궈나가는 듯 싶었지만 2021년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미얀마가 민주주의를 경험한 기간은 단 5년에 불과하다. 지난 2년 동안 군부는 3천~3천5백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대부분의 시민은 국가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그것이 미얀마 난민을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유다. 희망을 가지기가 쉽지 않지만 이들은 고통이 곧 끝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독재가 무너지면 모든 문제도 끝날 것이다. 다른 국가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거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까.
⑪ 미얀마 내부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태국 메솟 시내 곳곳에서 숨어살고 있었다. 세 딸 중 가운데 한 명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한 가족을 만났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둘째 딸이 미국에 숨어 활동을 계속하는 사이, 나머지 가족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도망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평생 모아둔 재산을 다 버리고 떠나왔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서 이렇게 사니까 정말 답답하다. 자매는 국경을 넘다가 잡혔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태국 군인이 미얀마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했다. “안 돼요,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는 돌아가면 죽어요. 무서워요. 안전하지 않아요, 제발 도와 주 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방금 미얀마에서 탈출했단 말이에요. 도와 주세요” 이 가족의 큰 딸과 함께 가족이 함께 몰래 건넜던 미얀마와 태국 국경을 찾았다. 강 건너 바로 보이는 미얀마 땅,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등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영 난민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미얀마가 정말 그립다. 우리가 세울 새로운 정부가 우리나라를 더 좋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 난민은 정신적 종교적 인종적 차이로 인한 박해로 인해 외국으로 탈출환 사람들, 다른 나라에서 살기 위해 가짜로 자신들의 삶을 꾸며낸 사람일까. 취재진이 만난 난민들은 누구보다 간절히 현재의 난민생활을 접고 안정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⑫ 시리아 정부군의 징집을 피해 11년전 시리아에서 한국에 온 뒤 한국 국적을 취득한 나연우씨, 가짜 난민이 존재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저는 같은 나라 사람을 죽여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이것을 거부하고 떠나게 됐다. 가짜 사람 난민은 없다. 우리는 지구상으로 항상 이동하고 살고 있다. 그래서 가짜 난민이라는 건 없다. 한국에서 난민이 되는 과정은 본인의 삶과 고통을 상세하게 증명해야 되는 까다로운 과정이다. 그 시간 동안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고 이웃의 수 많은 편견을 이겨내는 것은 난민들, 본인의 몫이다. 대기한 이후에 충분하게 심사의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채 불인정 결정을 받게 되고 그 사유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유를 받게 되는데 또 그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처우보장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이주민과 난민에게 관용적인 나라, 독일로 향했다.
⑬ 지난 10년 동안 (2013년~2022년) 난민 927여만 명을 받아들인 나라 독일, 난민 인정률이 한 해 평균 20%가 넘는 이 나라에서는 난민과 난민 신청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베를린 시내에 있는 건설 현장에서 기니 출신의 아마두씨를 만났다. 유럽 각국을 떠돌다 독일에 온지 3년째, 취업허가를 받아 상하수도 파이프관을 만드는 회사에서 직업교육을 받고 있다. 독일 정부는 그에게 회사에 취직해 기술 교육을 받고 언어를 배울 기회를 줬다. 제 꿈을 위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행복하다.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그건 저의 큰 장점이 된다. 아마두씨는 일단 임시체류 비자를 받았지만 일을 하면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5년만 체류하면 영주권 체류자격을 얻게 된다. 그에게 독일은 언어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나라지만 무난하게 이 사회에 정착했다. 아마두씨는 이 나라에 혼자 왔다.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독일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훨씬 쉬워졌다. 어딜 가든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이제 같이 어울릴 친구도 많이 생겼다. 이 기업은 전체 직원 160명 가운데 4분의 1 가량이 난민을 포함한 이민자다. 회사는 3년 동안 일정 월급을 주면서 직원들을 교육하고 이후에는 정식직원으로 채용한다. 회사 대표는 난민과 이주민 채용은 독일 기업들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인 훈련생을 충분히 찾기 어렵기 때문에 난민이나 이민자들을 찾아보는 거다. 독일 근로자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5년에서 10년만 지나면 그들은 연로해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거다. 회사 대표는 나이든 사람은 갈수록 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드는 독일의 현실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일할 사람의 공백, 그 공간을 매우는 것이 난민과 이주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의지가 강하고 열심히 일하며 매일 공사 현장에 나온다. 그리고 공사 현장에서 독일인과도 잘 어울린다.
⑭ 2021년 독일 출생아 숫자는 79만여 명, 같은 해 독일이 받아들인 이주민은 난민을 포함해 132만여 명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이 더 많아 지고 있다. 독일이 제공하는 난민보호는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뉜다. 망명-본국으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 주는 자격, 난민-국적과 종교 등의 사유로 국가나 비국가단체로부터 위협을 받은 사람에게 주는 난민 자격, 이 외에도 본국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보충적 보호자격과 위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체류 가능한 추방금지자격을 비교적 관용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망명이 안되면 난민, 난민이 안되면 인도적 보호자, 인도적 보호자가 안 되면 강제추방금지 그리고 설령 다 거부가 되더라도 그냥 살 수가 있는 카테고리들을 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독일의 망명법제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훌륭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델로 삼으려고 한다. 어떤 범주에 속하든 취업을 해서 독일에 체류할 수 있고 기초 생활에 관련된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다. 또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5년 뒤에는 영주권을 취득할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독일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열려있다. 독일에 온지 13년이 된 아프가니스탄 가족을 만났다. 이 가족은 오랜 내전으로 고통 받아온 고국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유럽행을 택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독일 사회는 열려있었다. 어렵지 않게 가족 모두 난민 인정을 받았다. 큰 딸 파티마씨는 6년전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지금은 안경사로 일하고 있다. 전쟁의 공포를 벗어난 삶, 그녀는 여기서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있다. 베를린에 도착한 날 우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여기서 삶을 시작할 수 있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여기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의 기회다. 그 점에 정말 감사한다.
⑮ 아프가니스탄인 18만여 명이 살고 있는 독일 사회, 독일 아프가니스탄 협회는 독일에 온 자국민들의 취업과 정착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열린 사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곳, 난민들은 이 사회에서 본인들이 받은 혜택을 어떤 형태로든 보답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독일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아프가니스탄에 오시도록 환영할 거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우크라이나 상황을 보라.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독일인들이 우리 아프가니스탄으로 오도록 환영할 거다. 두 팔 벌여서 환영하며 과거 독일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들에 다시 감사할 거다. 베를린 주정부 이민국, 독일 정부가 이토록 관용적으로 난민과 이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를린 주정부 이민정책 담당관을 만났다. 이렇게 난민과 이민자들이 많아지면 독일의 정체성이 흔들릴까봐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독일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누구나 이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인이다. 이 나라의 가치를 이해하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독일인이다. 그러면서 세계 각국의 순혈주의, 자기 민족만이 그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경계해야한다고 말했다. 게르만 민족만이 독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수 독일 혈통만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혈통이 애국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일 헌법과 정신이 독일인을 만든다. 다양한 사람이 모인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 상대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깊은 자각, 독일이 난민과 이주민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이유였다.
ⓐ 우리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모인 집단이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본인 머릿 속에서 만들어진다. 현장에서, 가정에서, 이웃에서, 친구끼리, 가족끼리, 실제로 만나는 곳에서 편견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모두가 부디 서로 만나기를 권한다. 레바논에 있는 시리아 난민촌에서, 태국의 미얀마 난민촌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많은 난민들을 만났다. 시리아와 미얀마 속으로 들어가 이들이 말하는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은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더 나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간다운 삶, 더 나은 삶을 애타게 찾아온 그들을 너그럽게 품는 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너의 난민이 아닌, 나의 난민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인정하는 사회가 더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 저희가 한국에서 난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잖아요. 리마스에게 우리한테 하고 싶은 애기 마지막으로 해줄래요? 리마스는 만나서 너무 반갑고, 고맙고, 사랑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