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를 읽고 / 정희연
60세만 되어도 장수했다며 마을 잔치를 열었는데 지금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바뀌어 옛말이 된 지 오래다. 100세 시대가 열렸고 내 나이 50 중반이니 20~30년은 일해야 할 뿐더러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바뀔지 모를 일이다. 학창시절 배운 짧은 지식으로 지금까지 잘 버텼지만 앞으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2016년부터 책을 읽었다.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독서다.
푸석푸석한 머리로 글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무작정 읽었다. 몇 년간 자기계발서와 시를 접했다. 소설은 중간쯤 읽으면 앞부분이 생각나지 않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때 소설을 읽는 나를 보았다. 빠르게 한 권을 읽는 습관이 도움된 것 같았다. 그러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작가에 빠져 개미(5권), 꿀벌의 예언(2권), 신(3권), 죽음(2권)을 읽고 위대한 유산(2권), 열하일기(3권) 등 장편만 찾았다.
<일상의 글쓰기>수업 중 교수님은 박경리의 <<토지>>를 추천했다. 20권이다. 토요일, 모종판에 상토를 고르고 수박, 오이, 호박 씨앗을 뿌렸다. 작년에 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올해는 아내가 일이 많아지고 식구들도 늘어 그렇게 한 것이다. 어느새 도시 사람이 되었는 지 장시간 노동을 하지 못하는 저질 체력이 되었다. 무안 도서관으로 갔다. 광주와 고향 사이에 있어 자주 들른다. 토지 1,2,3,4권을 손에 넣었다. 새 책같이 깨끗하다. 다짐이 필요했다. 올해는 장편 소설 토지 20권, 아리랑 12권, 태백산맥 10권을 읽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사투리가 많아 적응이 어려워 포기했었다.
인터넷에서 <<토지>>를 검색했다. 얽히고설키는 인물 관계도가 에이쓰리(A3)용지로 부족하다.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500명이 넘는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 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툇마루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독특한 문체다. 글속에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매끄럽게 이끌어 낸다. 언어는 시적이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감정의 세밀한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지만 서희, 윤씨 부인, 길상, 강포수, 구천, 귀녀, 두만네, 봉순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다.
“잘난 사람은 일 못한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파는 게야.”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
“나는 이대로가 좋다! 나는 이렇기 사는 것이 몸에 맞은 옷 입은 것겉이 좋단 말이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그래도 나는 나다! 아버지도 형님도 아니다.”
“어 가자. 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산 보듯 강 보듯, 가자!”
“뭐니 뭐니 혀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가난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일을 해도 배불리 먹을수 없는 천박한 땅에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사로잡혀 사는 거야 말로 수치다.”
주말이면 일부러 도서관을 찾았다. 길게 늘어져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세권까지는 인물 관계도를 보면서 내용을 이해하며 읽으려 애썼다. 다섯 권에 다다르니 전체를 헤아리는 것이 차츰 어려워지는 걸 느꼈다. 여덟 권을 접하면서 잡았던 끈을 놓아야 할것 같았다. 사건에 사건이 더해지고 등장인물도 갈수록 많아졌다. 책이 이끄는 대로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열 권에 이르니 앞과 뒤가 섞여 내용 파악이 갈수록 어려워 졌다. 어떻게든 읽어야 하는데 앞길이 구만리다. 컴컴한 길을 아무런 생각 없이 가고 있다. 새로운 사람이 계속 보인다. 머리가 한계에 다다랐다.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열 다섯 권 쯤 일까, 이제 이것도 저것도 다 싫어진다. 주제·배경·구성·인물·사건 모두 관심 없다. 어서 결론이 나오기를 바랄뿐이다. 지쳤다. 열 일곱 권에서 멈췄다. 이 삼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주말이 다가온다. 다시 힘을 내보지만 재미가 없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아주 긴 시간과 함께 두 권이 지나갔다. 마지막 한 권이 남았다. 그래도 인물과 사건은 계속 더해진다. 빨리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으련만 마지막 까지 내 편이 아니다. 언제 정리하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토지>>와 26일을 함께 보냈다. 읽기는 했는데 무엇을 얻고 찾은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한 주를 더 보내며 서점, 유튜브, 박경리 문화관을 찾아 <박경리와 토지>를 공부했다. 경남 엠비씨(MBC)에서 ‘토지 완간 10주년 특별대담’으로 제작한 3부작 다큐멘터리도 두번 보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토지>>를 읽고 세 가지를 얻었다. 장편소설 20권은 완독했다는 기쁨과 나에게 감동과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책이면 어느 것이던 기꺼이 받아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박경리, 경남 통영, 평사리 최참판댁이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이 세 개가 가지를 뻗어 어떻게 다음으로 나를 이끌지 기대된다. 「1989년 한가위 경남 하동에서 시작한 토지는 간도 일본을 거쳐 815 해방까지 이어졌고, 해방된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첫댓글 저는 <<토지>> 읽다가 멈췄어요. 선생님 대단하세요. 느낀 점 같은 거 들어가면 글이 더 좋을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해 보세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정희연 네. 읽어 볼께요!
26일 만에 <토지> 20권을 다 읽었다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 맞나요? '혀를 내두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군요. 감탄해서요.
시작하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가다 멈추면 아니 간만 못 하는데, 아내와 딸에게 부탁 했습니다. 멀리 가지 않을 테니 한 달만 일 시키지 말아 달라고요.
저는 한 번은 빠르게 읽습니다. 책이 마음에 들면 다시 읽어요. 그러면 더 재미도 있고, 내용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저도 토지 완독은 했는데, 다시 도전해 보고싶네요.
카페에 교수님이 쓰신 <<토지>> 관련 글도 읽어 보세요. 저는 그거 읽고 나서 <<토지>> 읽었어요.
기분 좋은 26일 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https://cafe.daum.net/ihun/jIQm/37
https://cafe.daum.net/ihun/jIQm/38
저도 처음에 읽을 때 너무 재밌어서 정신 못차렸는데.
지금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봅니다. 가끔.
박경리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를 알기 전과 후로 많은 변화가 있을 듯 해요.
저도 하동 최참판댁도 다녀왔답니다. 구석구석 돌아보며 책속의 주인공들도 떠올려 보았네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가까이 하시는 모습이 왜 부러울까요. 하하
그러셨군요, 저도 가야할 곳이 생겼습니다. 서희 가족이 가마를 타고 둘러본 평사리 들녘과 마을 곳곳을 보는 것이 기분좋은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책에 묻혀사는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저는 신혼 때 읽었는데 신분사회가 영 못마땅 했습니다. 최참판댁은 해마다 어린이집 아이들과 함께 가서 마당에서 제기를 차고 굴렁쇠도 굴러봅니다.
굴렁쇠 굴려보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독서광이 된 정희연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머리가 굳어져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냥 해요, 일이라 생각하면서요. 고맙습니다.
노안이 와서 책 읽기 어렵네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많이 읽기를 바랍니다. 도전하는 희연님, 대단하시네요.
시도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독서력이 대단하네요. 나는 그냥 무슨 책이든 재미있게 읽어요.
이제는 그도 어럽지만요.
읽고 기록해서 날마다 올려야 하는 숙제가 있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면 거의 잊어버린 것 투성입니다.
저는 16권짜리로 읽었는데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요.
도전 정신이 부럽네요.
재밌는 책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나 봅니다. 젊어서 해야 할 숙제를 안 해서 이제 하고 있어요.
저도 솔 출판사에서 나온 16권을 사서 부자처럼 아껴 가며 읽었던 게 생각납니다.
조카들이 올 때마다 한 권씩 빌려가고선 반납하지 않아서
우리 집 토지는 6권부터 시작이네요.
오늘 점심시간에 오래 전 제자 둘과 만납니다.
<개미>를 재미나게 읽고 국어 시간 내내 칠판에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했던 아이들이죠.
나이를 세어 보니 마흔 셋이더라고요.
최명희의 <혼불>도 추천합니다.
<혼불> 꼭 찾아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달 통영에 가서 박경리 선생님의 기념관을 들렀어요. 그 분의 묘 앞에서 얘기도 나눴구요. 선생님 글을 읽고 우리 집 서재에 먼지를 뒤집어 쓴 토지를 무심하게 바라봅니다. 얼른 백내장 수술을 받고 다시 읽기를 시작해야 하나?
몇 년 전에 갔었습니다. 그냥저냥 머물다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와, 선생님의 열정은 어디가 끝인가요? 뭔가 크게 이루실 듯요. 토지... 음... 엄두가 안나는데요. 하하.
스스로 무너지는 일은 없도록 "천천히, 천천히, 멈추지 말고, 멈추지 말고,"를 되뇌고 있습니다. 그냥 일상에 넣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