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원짜리 죽 한 그릇 / 김석수
관사에서 사무실에 도착한 지 한 시간쯤 지났는데 딸이 “엄마가 밤새 아파서 119구급차로 실려 갔어요.”라고 다급하게 연락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뜨끔했다. 해외 근무 마치고 도교육청에서 근무하던 때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캐비닛 문을 잠그고 컴퓨터 전원을 껏다. 상사에게 급한 일이 있어서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하고 광주로 향했다.
차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내는 아침마다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준 뒤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직장까지 출근한다. 아들이 늦잠을 자거나 학교 가기가 싫어서 짜증을 내는 날이면 힘들다고 가끔 하소연한다.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걱정이지만 곧 좋아질 것이라며 내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가족 옆에 있어야 하는데 아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보니 아내는 링거주사를 꽂고 있다. 나를 보자마자 “저녁 내내 기침하고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잠을 자지 못했다.”라고 내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해외에서 아들이 아파서 아내가 마음고생이 많았다. 국내에서는 괜찮겠지 했지만 여전히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데 힘들어했다. 아내는 직장 생활하면서 아이들 돌보는 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서 보더니 폐에 물이 많이 찼다고 한다. 그는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서 물을 뺀 뒤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예요.”라고 한다. 내가 “무슨 병인가요?”라고 물었더니 “폐흡충증이요. 날 음식을 먹으면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 생기는 병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사모님이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 봐요? 선생님이 신경 좀 써 주세요. 수술하고 나면 회복하는 데 단백질이 필요하니 쇠고기 죽 사다 드리세요.”라고 귀띔했다.
죽집에 가서 쇠고기 죽을 보니 소고기는 보이지 않고 흰쌀만 보였다. 가게에서 죽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죽을 만들기로 했다. 집 근처 마트에서 소고기와 양파, 호박, 당근, 표고버섯을 샀다. 우선, 쌀을 물에 불려 둔다. 죽에 들어갈 채소와 소고기를 잘게 썰어서 다져 둔다. 소고기는 찬물에 담가 두었다가 핏물을 제거한 뒤 물기를 없앤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달달 볶는다. 채소와 소고기를 함께 섞은 뒤 살짝 더 볶았다. 물을 충분히 넣고 쌀과 소고기, 채소를 함께 넣는다. 가스레인지를 약한 불로 조정한 뒤 눌어붙지 않게 주걱으로 저어주며 죽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소금간으로 마무리했다.
한나절 동안 정성껏 만든 소고기죽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 전에 빨리 병원으로 가려고 서둘렀다. 승용차에 죽 그릇을 싣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려다 주차된 차 범퍼를 스쳤다. 내려서 확인해 보니 크게 다친 것을 아니고 작은 흠이 생겼다. 급하게 차를 빼려다 실수를 한 것이다. ‘사고를 내서 미안하다.’라는 메모와 함께 내게 연락할 전화번호를 그 차에 남기고 병원으로 갔다. 점심 먹기 전에 죽 그릇을 들이밀었다. 아내는 “잘 먹었네요. 자주 입원해야겠네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녁 무렵 차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보상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보험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보험 회사에 연락했더니 다음 날 직원이 와서 차를 점검한 뒤 현금을 주고 합의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는 “10만 원 주면 카센터에서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데 보험 처리하면 더 비싸다.”라고 했다. 보험회사 직원이 설명해도 차 주인은 보험 처리해 주라고 계속 주장한다. 며칠 후 차 범퍼를 교환했다며 비용이 50만 원이라고 통지가 왔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내가 알면 핀잔맞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수년이 지나서 단풍이 울긋불긋한 산길을 함께 걸으면서 그 죽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그러니까, 그 소고기죽이 50만 원짜리였다고요?”라고 하면서 화들짝 놀랐다.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웃는 얼굴로 긴 인생에서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어려운 시절 함께 한 우리 부부간의 소박한 사랑의 기억이 여생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첫댓글 우와! 50만 원 짜리 죽 맛나겠네요.
다사다난 했던 세월을 웃으며 얘기하며 걸어가는 장면이 그려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