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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 신봉승 작사. 조용필 작곡
조용필이 부르는 이 노래 간양록은
강항 선생님의 '간양록'에 실려 있는 시를 기반으로 지은 노래이며
강항을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룬 80년대 사극의 주제곡입니다.
아래에 원작詩를 써놨습니다.
'사무라이 정신'의 정체...
필자가 사무라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중학교 무렵에 '쑈군(將軍)'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였습니다.
흔히 조선을 말할때...
봉건적... 가부장적... 이런 표현을 쓰는데...
조선은 가부장적 정서가 강한 나라인건 맞지만... (시대가 그랬죠. 동시대의 서구에 비해 오히려 유연했어요.진짜루~! ㅎ)
봉건제 국가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들 쓴다는 사실에 황당했었죠.
일본은 지구역사상 가장 최근까지(명치유신이전) 봉건제가 남아있던 나라죠.
책 '쑈군(將軍)'에서는...
봉건영주와 휘하의 사무라이가 지날때
넙죽 업드린 민중이 고개를 들었다는 이유로... 그냥 댕강 목을 베어버리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법치국가에서는 당연한 과정... 체포되고 심문... 구금되고 처벌되고 하는 과정은 없습니다.
사무라이는 그냥 길을 가면서 다짜고짜 목을 베고 그냥 가던 길을 갑니다. 헐...
비록 소설이지만 그것이 설정된 픽션은 아닙니다. 사실에 기반한 묘사입니다.
봉건제가 그런 거고... 사무라이가 그런 겁니다.
봉건적... 이라는 표현.
그런 일본...식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 역사 자평에나 어울릴,
일본인들만의 표현법을,
이 땅에서는 왜색에 쩌들어 버린 자칭 지식인들이
조선을 격하시킬때 써먹는 표현법으로 통용되었던 거였고...
이 땅의 일반인들은 어떠한 재확인도 없이 그냥... 답습한거였죠.
봉건제는 중원의 고대국가 주나라. 중세 유럽. 그리고 중세 일본에만 있던 제도였습니다.
우리땅에서는 그 따위 미개한 제도는 단 한번의 시도도 사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조선에서는 노예제도 자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분제 없는 평등사회. 고조선은 연합체. 합중국같은 성격이었는데요.
주류국가의 주류산업이 농경 보다는 목축.유목이었기에 신분제고착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겁니다.
전국민이 각 영주의 노예인게 봉건제입니다.
강력한 왕권이 없이 땅은 조각조각 영주들에게 분할되고
따라서 국민생활의 기준점이 되는 국법의 시스템은 부실하고
각 영주 맘대로 지 영지의 모든것을 소유하고 주물러대는게 봉건제의 맹점이죠.
유럽봉건의 사례를 보면...
평민(사실은 농노) 처자가 결혼을 하게되면...
그 처자는 영주에게 처녀성을 바치고 나서 결혼해야하는 때도 있었죠. 헉~
그게 임신이 되면... 평민 남편은 첫아이가 내 아이인지를 확신할 수도 없는거죠.
자식새끼 제대로 키워질리 없죠.
가장인 애비에게... '내 자식'이라는 확신을 줄 수 없다는건...
우리나라의 아비들이 예로부터도 후대에 충실하고 애착을 보이는것과는
매우 대조적일 수밖에 없는 가정문화적 차이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유럽서구에서... 가정의 중심이 전통적으로 자녀가 아닌 부부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회단위의 기초는 가정인데... 사회의 근간을 영주새끼들의 욕망이 헝클었으니
가정의 애착은 삼천포가 아닌 삼만포로 빠지네요. 허~
그것의 방어기제로... 극강의 보수적 사회인 중세 카톨릭문화임에도
민간의 혼전관계는 특별난 저항없이 민간 전반에 수용되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나비효과.
결혼날짜 정하기만 하면 무조건 그 전에 영주에게 한번 불려가야 하는데... 차라리
그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치뤄는게... 지극히 인간적 심리죠.
그렇게 슬픈 연유로 민간으로 부터 점점 허용되기 시작한 성문화... 따지면 아프고 슬픈 역사...
조선에서 거듭된 호란을 겪은 이후 공녀로 가지 않기 위해 조혼풍습이 더욱 가속화된 현상과도 유사합니다.
우리전통의 관습적 호주제를 토인비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안정된 가족제도라고
극찬한 이유가 그런 이유와도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는 한국 고유의 관습적 호주제가
부계에 후계의 확신을 줌으로써 획득되는 가정의 안정이라는 지점에 주목했던거죠.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떤 결함도 없는 매우 심리적이고 현실적 장치라고 본거죠.
Arnold Toynbee는 경제학자. 30세에 요절한 삼촌이고
Arnold Joseph Toynbee는 역사학자. 1975년 86세 장수한 조카입니다.
그냥 토인비라 하면 이 역사학자. 조카인 아놀드 조셉 토인비를 말하는 것이지만
아놀드 토인비라고 하면 삼촌인줄 오인될 수 있다능... 그럼에도 그렇게들 많이 쓰고 있다능... ^^
(폐지된 호주제에 대한 논박 절대사절함.
토인비의 관점을 인용한것 뿐임.대학자 토인비의 관점에 대한 이해없이... '관습적 호주제'의 용어적 이해도 없이...
이땅 현대사에서 펼쳐지는 얄팍한 정치적 입장의 잣대는 쫌 들이대지마시라능~
이 논의는 역사 방향성임을 재차.삼차 백만스물두차에 걸쳐서 확인해 dream..
가끔... 난독증에 대한 반성없이 시대 소급하는 논점이탈 헛발질하는
성의없는 자칭만 페미니스트님은 쫌 자제요망 dream. 그게 페미니스트면 난 페스트푸드!)
영주에게 처녀성을 바치고 나서 결혼...이라...
기독교가 모든 생활의 중심이던 중세유럽에 그런 개족발같은 법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죠.
교회 성직자의 신분은 제2계급인 일반귀족들보다 상위인 제1계급이었으니까요.
제1계급은 왕실계급. 영주계급. 성직자계급.
다음이 제2계급인 일반귀족계급...
중세교회는...
그렇게 평민들의 가정도 지키지 않았고
가장 인간적인 당연한 인권도 관심없었습니다.
중세교회에게 농노들은 인간이 아니었던게지요.
아니면 평생 지들에게는
그런 性적 영역은 '해당없음'이니... 관심을 끊었을지도 모르고요.
칼든 귀족들하고 잘지내야 편하지...
농노들 따위 입장을 대변하다가는 국물도 없을테니
모르는체 외면하는게 상책이겠죠.
어차피 독신주의(?)인 자기네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일이기도 하겠고요.
사실은...
그런일이 가능하게 된 근본적 요인의 생산지는... 놀랍게도 교회였습니다.
잘못해석된... 또는 알고도 고의적으로 잘못해석한...
권력가진자 위주의 유권해석적 기독교적세계관의 영향권 아래에서 자행된 만행이었습니다.
불신자 살해. 이교도 살육. 마녀재판 등등이 교회가 강도짓을 하기위한 물욕에서 비롯되었으나 교리로 포장되었듯...
농노 처녀의 혼전 성상납 강제... 그것도 권력자의 육욕에서 비롯되었으나 교리로 비호되었던거죠.
비유럽권의 첩실제도와는 그 차원이 매우 다릅니다. (비유럽권 첩실문화는 사회기능적 면이라도 일부 있었지만...)
중세교회의 사악함. 기회주의적 속성. 비인간적 행태...는 여기까지만 하죠.
종교 얘기는 또 논점이탈 헛발질이 쉽게 달겨드는 특징이 있으니까요.ㅋ
(예수님 감싼답시고 논점이탈 헛발질로 들이대는거... 존나 정중하게 사절. 예수야말로 사회혁명가거늘...)
인간심리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정과 사실에는 과학적 사고체계가 작동하지만 '믿음(信)'에는 종교적 사고체계가 작동한다."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양축의 시선입니다.
예컨데
공적관계에서는... 과정과 사실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체계가 주로 작동하고...
혈연관계.애정관계.사적관계에서는 종교적 사고체계가 주로 작동합니다.
그 함수현상은 사안별로도 차이가 있고 개인차도 있고 민족차도 있고 문명권차도 있고 시대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축의 시선이 함수관계. 균형관계라는 사실에는 정신질환자라 할지언정 절대적 예외는 없습니다.
종교적 신앙을 일컬어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농노들에게는 인권이 보장될 필요가 없다고 정해진 사회.
국가권력이... 아니 사실은 국가폭력이...
있는 자들에 의해 '그래도 된다'고 지 편한대로 믿는 현상은... 차라리 '신앙'입니다.
'과학'이 아닙니다.
'과정과 사실'이라는 과학적 사고체계 코드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할 수 가 없는겁니다.
'신앙'은 욕망이고 기대이고 선호이고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과정과 사실이 무시되거나 생략된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각종 종교 신앙인들을 깍아 내릴 의도는 없습니다. 여기서 '신앙'이라는 어휘는 용어적 객관개념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과학'은 그 농도들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유의지의 영역이기에 선천적인 심리입니다.
그것을 중세유럽의 봉건제 권력구조는... 약탈을 했고
거기에 빌붙어 먹던 중세교회는... 침묵.방관 정도가 아니라 비호했던 겁니다.
당시... 정치권력은 팽창중이고 종교권력은 위축중이었으므로...
그런 태도는... 명백하게 '기회주의'였던 겁니다.
진리를 다룬다면서 시류는 참 잘탄다능... 종교 스스로 독신을 한 셈입니다.
인본주의가 부재인 가짜신본주의만의 사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첫날밤을...
그 자연스런 인간본연을...
강제적으로 권력으로 강탈한다는 것...
게다가 고하를 막론하고 불신자는 처형되던 살벌한 신앙강요의 시대 끄트머리에서
신의 대변자들은 팔짱을 끼고 키득거리기만 합니다. 신은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요?
민중들에게 그러므로... 그건 그렇게 차라리 지옥입니다.
그렇게 유럽중세봉건주의는 '암흑시대'입니다.
일본의 봉건시대 또한 그러한 점에서 근본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암튼... 봉건영주제는 그런 제도입니다.
종교적 틀로 옥죄여서 인간을 짐승처럼 다룬 국가폭력의 폭주시대.
중간확인합니다.
봉건제는 인류역사에서 3차례의 사례가 있습니다.
중원 고대국가인 주나라.
중세 유럽.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
우리의 역사에는 봉건제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간혹... 우리의 역사를 논하면서... 자칭 지식인들 조차도
자아비판조로 "봉건적인... 봉건주의적인..." 이따위 표현을 쓰는데 기실... 참으로 무식한 표현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왜색에 쩔고 쩔은 무개념 삽질입니다.
봉건제가 청산된 일본의 명치유신을 미화하려는 일본 개혁세력의 논법을
일제강점 당시... 일제가 조선을 깍아내리기 위해 그대로 삽질해다가 이 땅에서 써먹었는데요.
봉건제가 있지도 않았던 조선에게 봉건제를 허울처럼 씌워서 손가락질을 한 격인거죠.
갸들이 말하고 싶었던것은 "조선은 고리타분하다. 미개하다" 정도였겠죠. 지랄...
그걸... 당시 이 땅의 식자들중 친일 개화파 세력이 따라쟁이 한겁니다. 육갑...
그걸... 또 후손들은 아무 생각없이 합당한 용법인냥 쓰고 있는것이고요. 염병... 심각하죠.
이런... 자면서 남의 다리를 긁어도 유분수지...
왜놈들과 친일파들의 무식한 용법이 오늘날까지도 이 땅에서
테라우치가 말한 '백년의 노예정신'으로 횡행하고 배회하는 중입니다.
심각하고도 놀랍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자아비판하듯 쓰는 "봉건적인..." 이라는 표현.
제발 멈춰지기를 소망합니다.
시파~! 방송에서... 강단에서... 방송하고 강의하고 지랄인
지잘났다는 입으로 그런걸 들을때면... 절망감마저 느낍니다.
모르면 닥치고나 있지... 주제넘게 마이크에 분필은 니미...
(그런것들의 대부분은 자칭 우파입디다. 양놈좋아 양파도 아니고... 쪽바리좋아 쪽파도 아니고... 우파는 뭔...)
암튼 봉건영주제는 그런 제도입니다.
그런 영주의 조폭조직을 사수하고 수호하는 새뀌들이 있으니...
요즘도 골빈것들이 읊어대는 '기사도 정신'으로 뭉친 조폭집단 기사(knight)계급입니다.
('사무라이 정신'에 다름아닌 '기사도 정신'을 읊는것 자체를 경멸합니다. 알고 보면 참 황당.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창칼의 힘으로 영주의 그딴 권력을 옹호하는 무력이죠. 조폭아니면 뭘까요. ㅎ
중세 유럽의 기사?
그게 일본으로 말하면 사무라이인거죠.
봉건영지에 소속되어 영주의 꼬붕으로 밥빌어 쳐먹고
하는 일이라고는 칼질밖에는 모르는 그런 부류들...
그것들이 제 이름은 쓸 줄이나 알았냐구요? 천만에요.
대철학자 미셸푸코는 지적합니다.
중세유럽의 기사들. 귀족들은 <'앎'의 힘>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고요.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믿는건 오로지 칼! 타고난 신분! 그따위 글자 몰라도 아쉬울거 없어!
중세말이 오기까지 중세유럽의 기사(귀족포함)는 최하 90% 이상이 문맹이었습니다. ㅎ
외국의 문헌에 증거되는 "농부들 조차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라는 철인의 나라. 조선과는 대조적이죠.
귀족계급의 문맹... 이 점은 비단 중세유럽만의 특징은 아니었습니다.
봉건영주제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는게 정답입니다.
일본의 봉건귀족들도 상당부분 문맹이거나
또는 글을 안다해도 그 실력은 비천하기 짝이 없어서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가 많았습니다.
(조선은 그점에서 왜를 무시했죠. 그러나 왜인들은 그 사이... 하던대로 칼을 갈고 있었네요.)
중세유럽의 기사에 해당하는 사무라이들은 더더욱 대부분 문맹.
중세말에 해당하는 시대에는 약간 개선되기는 해서...
역관이고 천재시인인 이언진의 지적대로 지이름자 정도는 쓸줄 알았고...
되먹지 못한 글질 몇자 정도는 흉내낼 정도가 되기는 했습니다...만.
선천적으로 영주계급이 보장되어 있는 귀족들이... 글을 읽어 뭐하겠어요. ^^
중앙집권.통치구조라서 과거제도가 활발할 일도 없는데 뭔 할일없이 글공부를 하겠어요. ^^
왕이랍시고 있기야 있지만... 갸는 뭐... 허울뿐인 천황인걸
지까짓게 내 타고난 신분을 꺽을것도 아니고...
꺽는다해도 내가 힘쎄면 그까짓거 되려 내가 뿌러뜨려도 그만...
각 영주는 결국 토호이므로 그럴 수 있죠.
토호중 최고의 실력자로 실권을 장악한 자. 막부의 쇼군은 천황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실세니까요.
일본의 천황이라는게 말이죠. 한때는 막부에 의해 취급조차 못받아서 밥걱정하며 연명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머리아프게 글 공부할 그 시간에 옆의 영지(번)와의 마찰에 대비해서
칼이나 갈고 있는게 더 실속있는거죠. ㅎ
지엄한 국법이라는건 있을턱이 없고
천황은 허울뿐이니... 최고 100여개로 나뉘어 있는 지들끼리 기회만 되면 전쟁질이죠.
그야말로 야생입니다. 막부? 그것도... 쎈놈이 바꿔앉는게
왕조국가에서는 당연시되는 군신간의 도의...君爲臣綱... 그것조차도 없는 그런 사회입니다.
무식한 칼잽이들의 사회니... 기회주의적일 수 밖에 없죠.
(아래에 적어둔 이언진의 詩는 고의적 폄하가 아닌 매우 사실적인 詩인거죠.)
암튼... 지엄한 국법이라는 그런 가치기준 잣대가 부실한 사회를
어느정도 균형잡기위해 봉건제 사회에는 반드시 등장하는게 하나 있는데요.
그게 '종교'입니다.
강력한 중앙통치에서는 국법이
그 사회의 가치관을 장악하는 기준 잣대의 기능을 하겠지만
봉건영주제는 그런 기준 잣대가 허울뿐이니...
종교라는 가치관이라도 공유되어야 작동되기 때문에...
봉건제에서의 종교는 범용적 가치관으로 마구 팽창됩니다.
중세유럽의 카톨릭은 그렇게 터질듯이 속절없이 팽창한 것입니다.
일본의 천황(텐노)이라는것도 그렇게 요긴한 이유로 대대로 가공된 가치인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의 전통적 종교체계. 신도(神道:씬또)의 중심에 천황이 있는거죠.
(일왕이라 하지 않고 천황이라고 했다고... 혼자 개념있는 척... 들이대는거 사절함. 용어용법임을 고지 dream.)
명치유신을 거쳐 막부의 시대는 끝나고 친정체제가 시작되면서...
정치권력의 신격화는 오히려 더 강화되는 특이한 현상이 생겼죠.
신도가 국교로 선포된거죠. 신도는 국가의 관할로 편입되고 그 꼭대기에는 천황을 올려 놓은거죠.
일본인들이 지금도 죽고못사는 일왕인지 천황인지가... 그렇게 정치가 아닌 종교인 이유입니다.
현대 일본이 60여년간이나 저항없이 보수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일본인이 겉으로는 예의바르지만 속으로는 교활한 특징을 보이는 이유도...
일본인이 남일에는 끼어들지 않는 특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모두... 지구 역사상 가장 최근까지 존속했던 봉건제의 폐단에서 비롯된 특징입니다.
명치유신으로 봉건제는 끝났으나... 그 장구한 세월... 질긴 형질의 근본적.화학적 변화는 더딘 법.
중앙집권인 우리 조선은 어땠냐구요?
과거제도가 있으니 <앎의 힘>은 그야말로 실력인거죠.
게다가 그 <앎의 힘>은 신학이 아닌 주자학... 성리학... 결국 철학...
철학을 신학의 시녀라고 표현을 하는데... 서양철학의 출생지가 신학이니...
그건 미개한 중세유럽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극동의 조선과는 해당없는 얘기입니다.
(철학이란... 실처럼 엉켜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애초의 관념세계와 사고체계를 엮어내서
씨줄 날줄이 정확하게 맞물린 섬유처럼 정돈하는 직조기같은 역활을 합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지능이 높다 하여도 철학구조가 없으면 버전 높은 메모리카드에 불과란것.
상위개념인 철학을 가르치지 않고 하위개념인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그래서 수구의 의도대로 '자발적 복종'을 쉽게 이끌어 내고 시민 아닌 국민을 축산한 셈입니다.
아무리 지식인이라 해도 지성에 접근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한국은 대단한 고학력. 지식인 사회... 메모리들의 사회.
지식인은 널렸으나 지성인층이 가장 빈약하고 희박한 사회. 단순메모리들의 사회. 철학부재의 사회.
학문.예술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틀거리인 철학이 부재인... 놀라운 사회.
세계적으로 이런 혹평을 받고있는 이유는...
현대사 내내 수구세력이 고의적으로 철학을 제도권교육에서 배제한 결과입니다.
철학적 인식구조가 있는 시민은 수구세력에게 참 불편한 대상이니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서구 봉건제에서의 <'앎'의 힘>은...
'소외'로 부터 발생되고 확인되고 강화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요. ^^
중세유럽의 암흑기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정치적)권력은 귀족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생깁니다.
뭔래 권력은 분산을 추구하지 않는 특성이 있죠. 노골적인 특성이죠.
세상 어느 권력이 나눌려고 하겠어요. ^^
인간의 탐욕은 그런거잖아요.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말타면 마부 부리고 싶고...
귀족들은 자꾸 성직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내게 되는거죠.
그러기까지... 카톨릭성직자들이 쫌 지랄맞게 하기는 했습니다. ^^
칼 무서운걸 몰랐던거죠. ㅋ
그렇게 그렇게 대강대강 하나님 팔면 고하를 막론하고 만사형통하던 시대는 가고...
욕망에 넘치고 지 잘난 귀족들에게는 그게 잘 안통하게 된거죠.
칼들은 귀족들에게 신이라는 빽만 믿고 깝치다가 자꾸자꾸 도가 지나치니... 뿌러지게 된거죠.
정교가 자꾸 분리되는 현상이 가속화됩니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은 정교분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때!
권력의 중심에서 자꾸자꾸 밀려나
소외되고 위기감을 느끼게 된 카톨릭 성직자들은...
'앎'에도 '힘'이 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대로 바이블을 전승한 실력...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학문. 신학.
학문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닌 신학을 독점했으니
당시에는 <'앎'의 힘>은 카톨릭 성직자들에 독점되고 있는 '힘'인거죠.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힘! '앎의 힘' 등장~~ 짜잔~! ^^
그래서 카톨릭성직자들은 평민들이 바이블(聖경라고 하기에는 쫌... ^^;)을 읽는것 조차 금지했죠.
지들 입맛대로 가공되고 해석되고 주장되고 유포되어야만 하기 때문인거죠.
그렇게 신은 또 카톨릭성직자들의 '권력'을 위해 독점되고 이용되었습니다. 불쌍해~ ^^;
신은 그들의 추락중인 계급과 권력을 다시 보장해주는 끗발좋은 배경인거죠. 장사 수완이 참 좋죠. ^^
(이부분 좀더 자세한 학문적 추구는 미셀푸코의 저서들을 추천합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가장 주요인도 <'앎'의 힘>과 연관있죠.
조선은 臣權의 나라...
특히나 세종때만 해도 조선은 개국공신들의 파워가 막강할때...
왕권을 심히 견제하는 신권을 견제하려면
왕이라면 일단은 팍 숙여주는 백성(민중,민초)들과
왕권이 더욱 밀착되는게 해답이죠.
이 시대는 백성에게 왕이란...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니까요.
그럴려면 백성이 깨어나야 하는것이고
깨어날려면 당연히 온 백성이 문자를 알아야 해답인거...
그래서 세종은 언문을 만들어야 했던겁니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주요인자였습니다.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그럴듯한 슬로건은 그렇게 확장됩니다.
(한글의 민간보급은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생산해 냅니다. 그 벤치마킹이 김대중 대통령의 '인터넷 보급'업적입니다. ^^)
세종은 당대 세계최고의 언어학자였습니다. ^^
알려지기를... 한글은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작이라고 합니다만... 아닙니다.
한글은 세종의 단독작입니다.
명백한 사실입니다. (훈민정음해례본 참조)
신권이 어느정도 적절히 왕권을 견제하는 균형구조는 바람직합니다.
조선이 당시 국제적 기준에서는
어느정도 민주적(?)인 사회였던것은 균형감있게 그 작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조차도 대통령의 식민지라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지평...
보다도 어쩌면 조선이 더 착실했을 수도 있는거죠. ^^
그러나 군주제 국가에서 신권이 비도덕적이거나 난립하면서 팽창되면...
봉건제 국가가 가지는 폐단과 유사한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한글의 등장은 생각보다... 표면보다도... 뜻밖의 기능까지를 하게 됩니다. 위대한 한글! ^^
조선은 이렇게 희안하고도 특이한 지점으로도 봉건제의 폐단을 비껴서 진행됩니다.
깨어 있는 민중의 힘! 앎의 힘!
지구상 출생의 유전자.근거.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문자. 위대한 한글...
그리고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경은... 그냥 어쩌다보니 나온게 아닌거죠.
"사무라이 정신의 정체"를 논하기 위해... 전제가 쫌 길어졌군요. ^^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진정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ㅎ
임진왜란때 일본에 포로로 납치 되었다가,
나중에 귀국하였던 강항(姜沆,1567~1618) 선생님이
귀국후에 작성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간양록(看羊錄)'中 한 구절을 발췌해 봅니다
(나 강황이 ) 일찍이 왜장ㆍ왜졸에게 물어보기를,
"왜인은 주장이 싸움에 패하여 자결하면,
그의 부하들도 모두 자진하여 자결한다.
내가 왜장과 倭卒에게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생물에게 있어서 모두 한 가지일 텐데,
倭人만이 죽음을 즐거움으로 하면서
삶을 싫어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라고 묻자
모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본의 征夷大將軍은 민중의 이권을 독점하여,
머리털 한 가닥도 민중에게 속한 것이 없다.
그래서 주군의 집에 몸을 의탁하지 않으면 입고 먹을 것이 없다.
일단 주군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담력이 모자라는 것으로 간주되면 어디에 가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이 좋지않으면 인간 취급을 받지못한다.
칼자국이 얼굴에 있으면 용기있는 남자라고 간주되어 후한 녹을 받는다.
칼자국이 귀 뒤에 있으면 도망만 다니는 남자라고 간주되어 배척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입고 먹지못해 죽는 것보다 적과 대항하여 사력을 다하는 편이 낫다.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주군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고 먹지못해 죽는 것보다 적과 대항하여 사력을 다하는 편이 낫다.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주군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입니다.
목숨내주고 빌어먹어야 하는... 그럴 수 밖에는 없는 쳐묵쳐묵 먹고사니즘...
목숨내주고 빌어먹어야 하는... 그럴 수 밖에는 없는 구차한 구차니즘...
강한것이 아름답기는 고사하고... 불쌍한거 잖아요~ 가련하기까지 하잖아요~
뭔놈의 '정신'이 거기에 낑길 틈이 있다고...
'사무라이 정신'이 어쩌고 저쩌고~
환경미화를 하고 자빠진건지를 도통 모를일 입니다.
이 땅의 속절없는 종자들까지 가세해서 그게 뭐가 위대해 보이고 부럽다고 뽐뿌질인지 도통 모를일 입니다.
이런 견해... 공부를 해야 얻어지는것도 아닙니다.
몇개의 상식을 기반으로 개연성만 따져보면... 척! 답이 나오는 겁니다.
가설이 세워지면... 검증을 하면 그만입니다.
김샘이 그려 놓으신 e-편한 인터넷 세상... 이 편한 검색신공의 정보화사회... 얼마나 좋습니까?
몇번의 검색만으로도 관련자료는 쓰나미보다도 더 넘치게 궁금증을 적셔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우리 주변의 한국말하는 입으로
'사무라이 정신'을 뽐뿌질하는 풍경을 보고는 합니다.
빨때를 꽂아도 어찌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변기에다가 꽂는지 도통 모를 일입니다.
뽐뿌질... 빨대... 제발 그만! 멈췄으면 합니다.
사무라이? 무식하고 독살스럽고도... 따지면 또 처절하게 불쌍한것들인데... 우러르기는... 뭘?! 뭘?! 대체 뭘?!
지금 듣고 계신 브금...
조용필의 '간양록'의 기초가 된 강항 선생님의 '간양록'에 수록된 詩
봄은 동녘에서 오는가.
한많은 봄이로세.
바람아 너는 서녘으로 갔느냐.
맘만 들떠 바쁘이.
새벽단. 어버이 한숨실은 새벽달일세.
밤길도 더듬더듬 헤매신다.
촉대로 새운밤을 그 누가 알랴.
그 누가 알랴.
아침 햇빛에 복받치는 내 설움을
글방 옛터에 피고 진들 누가 알리
선영 뒤산에 잡초는 누가 뜯고.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수가 있으랴.
조선후기 뛰어난 천재 시인 이언진(1740-1766)이
倭國에 역관으로 갔다가
倭國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빈정댄 한시(漢詩)를 보시겠습니다. 디저트입니다.
< 海覽篇 >
발가숭이에 갓만 얹은 무리
밖으로는 독충이고 안은 전갈이라.
일 생기면 죽 끓는 것처럼 소란하다가
남해칠 때는 쥐새끼처럼 교활하구나
구차히 이익을 탐할 때는 사람을 해치는 불여우,
자그마한 일로 소란떠는 것이 돼지처럼 충돌한다
여인들은 희롱을 일삼고,
아이놈은 덫을 놓는다
조상잊고 귀신 믿기
살생을 즐기면서 부처에게는 아첨하고
써 놓은 글씨는 제비 꼴이고,
시 읊으면 때까치 지저귀는 소리
역시 천재 시인이네요. 명불허전.
왜의 수많은 특징을 단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이 기막힌 솜씨...
이 정도면... 카툰을 넘어... 마치 동영상이라는 생각입니다. 아...
비록 중인 신분의 역관에 불과했으나 철인과 문인의 나라. 조선의 내놔라하는 사람들을
몽땅 질려버리게 할 정도였다는 이언진의 문장...
비록 중인 신분의 역관에 불과했으나 무지한 왜인 지배층들마저...
경이롭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불과 20대의 이 천재... 아...
[이하는 본문 글과 관련된 상세 자료입니다.]
시간있으시면... 열공~!
시간없으시면... 패쓰~! ^^
강항 [姜沆]
조선 의병장 [1567]
1567(명종 22)~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좌찬성 희맹(希孟)의 5대손이며, 극검(克儉)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선조 26)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 보급에 힘썼다.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싸웠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 오쓰 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이즈시 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우리나라로 보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 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후지와라[藤原醒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1600년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후
1602년 대구교수, 1608년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사직했다.
그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데도 뛰어났다.
저서에 〈운제록 雲堤錄〉·〈강감회요 綱鑑會要〉·〈좌씨정화 左氏精華〉·
〈간양록 (看羊錄)〉·〈문선찬주 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 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제향되었다.
[브리태니커]
간양록 [看羊錄]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강항(姜沆 : 1567~1618)의 기록을 엮은 책.
일본에서 보고 들은 풍속·지리·군사정세 등을 기록하고 있다.
1권 1책. 목판본. 1668년(헌종 9) 간행되었다.
강항은 원래 이 책을 〈건거록 巾車錄〉이라고 했다.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를 뜻하는 말로 포로가 된 자기는 죄인이라는 뜻에서 썼다.
뒤에 제자들이 〈간양록〉이라고 고쳤는데,
이것은 한(漢)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다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강항은 형조좌랑의 자리에 있었는데,
고향에 갔다가 왜군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난을 겪었으나,
유학자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이황의 성리학을 일본에 전하게 되었다.
3년간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대응할 수 있게 한다는 의도에서 기록했고 귀국 후 책으로 엮었다.
내용은
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적중봉소 賊中封疏〉,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 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주는 글인〈고부인격 告浮人檄〉,
자기 체험을 기록한 〈섭란사적 涉亂事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고
그때 느낀 점을 한시로 적기도 했으며
전란에 대비할 국내정책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에 불에 타서 현재는 희귀본이 되었으며,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브리태니커]
이언진(李彦瑱)
1766(丙戌년)년 음력 3월 29일. 27세에 요절한 조선의 천재시인.
이언진은 역관이다. 역관은 중인 신분으로 실무능력을 갖춘 전문 지식인이다. 이언진은 지식을 가진 점에서 사대부와 가깝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인을 비천하게 여겼다. 그들은 중인의 능력을 보기보다 신분질서라는 경계의 틀로 중인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언진은 외국어에 능통하여 중국과 일본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이언진은 종이에 붓을 대기만 하면 세상에 전할 만한 작품을 지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자신을 알아줄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에게 이기려 들지 않았으니 자신을 이길 상대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송목관집서松穆館集序>
이언진의 스승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자신의 제자를 세상에 걸출한 존재로 보았다. 학문과 문학의 원숙한 경지에 들어선 스승의 눈으로도 20대에 불과한 젊은 이언진의 문학적 수준과 깊이를 인정한 발언이다. 누구도 쉽게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이언진의 문학적 창조성을 부러운 시선으로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용휴는 다른 글에서 “벽을 어떻게 걸어서 지나갈 수 있겠는가? 이언진이야말로 바로 이 벽과 같은 존재다.”라 하여 이언진의 진면목에 찬탄해 마지않거니와, 실제로 이언진은 글쓰기의 천재였다.
이언진은 자신이 남긴 작품이 결코 의미 있게 취급되지 못하는 세상과 불화하며 끝까지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구속에서도 각성된 주체의 힘으로 자신만의 자유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러한 길은 외롭지만 자아를 확인하는 ‘나만의 길’이라는 점에서 시대성을 지닌다. 이언진이 자신의 시문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도 이러한 인식의 소산이다.
"답장을 올립니다. 소생은 시문을 지어,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고 세상에 전해지기를 구하지 않으며, 나 혼자 즐길 뿐입니다. 한 축을 억지로 집사에게 빼앗겨서, 그것이 다른 이의 안목에 전파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져 땀이 솟는 것을 그치지 못합니다. 그간 지은 여러 시들은 지금 모두 한바탕 불길에 주어버려, 한 조각 종이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소생이 집사에게 대해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옅지 않지만, 이것은 곧 평소의 정견이므로, 비록 오정을 얻더라도 내 뜻을 빼앗지 못할 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해량하소서." ― <답상서答上書>
이 편지는 1766년, 그가 죽은 해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서얼시인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이 이언진의 시문을 보기 위해 부탁한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이언진은 평소 자신의 시문이 남에게 알려지거나 스스로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한다. 이언진은 자신이 쓴 글을 ‘유희고游戱稿’ 혹은 ‘구혈초歐血草’라고 부르곤 하였다. ‘유희고’는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기 위한 자오自娛한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순히 혼자 노는 유희의 성격을 넘어 자기 존재를 표현하고, 자기 존재를 실현하는 그러한 것이다. ‘구혈초’라고 부른 것은 피를 토하며 쓴 글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스스로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언진의 시문은 신분 하나로 모든 능력을 배제하는 사회에서 살아 온 그 억울함과 울분을 심혈을 기울여 담아내었기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언진은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쉽게 줄 수 없고, 주더라도 자신의 시문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마저 깔려 있다.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글을 모두 불에 태웠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이언진의 작품 일부를 불에서 건졌다. 그의 문집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는 바로 불태워지고 남은 원고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언진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진정한 사람이 없어 원고를 불살라 버리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절망에서 나온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지만, 이 역시 기성 질서와 세상에 대한 이언진의 저항의 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글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
빠져나올 어떤 방법도 없네.
팔십 되면 모두 죽여 버리니
백성도 임금도 똑 같은 신세.
此世界大牢獄, 沒寸木可梯身,
八十年皆殺之, 無萬人無一人.
*인생무상을 아주 간명하게 소묘(素描)한 이언진의 詩.
서산에 뉘엿뉘엿 해 넘어갈 때
나는 늘 이때면 울고 싶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서 저녁밥 먹자고 재촉하지만.
白日轣轆西墜, 此時吾每欲哭,
世人看做常事, 只管催呼夕食.
* 이 시에 대하여 박희병 님은
"<호동거실>시편 중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시다."라고 평하셨습니다.
[별책부록]
제가 쓰는 이런 류의 글 중 상당부분이...
매우 예민한 사안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량 포함되어 있을뿐더러
각 이해집단(?)과 직간접적으로 다소 관련되어 있는지라
난독증으로 인해 논란을 불러오거나 곡해되는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논박의 모습이 성의있거나 타당하다면... 저로서는 오히려 매우 반갑습니다만...
상당부분... 그런 성의있고 타당한 논박은 드물거나 없었습니다.
이런 류의 글이란 본시... 기분 내키는대로 쓰는것도 아니고 기분 내키는대로 읽을것도 아닌것.
난독증이거나 무지로 부터 비롯된 뻘소리에 일일이 대처하기는 차마 혐오감 마저 들 정도로 질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진실... 하늘도 모르는체를 한다 할지라도 진실은 진실.
그런 마음으로 쓰는... 아프게 마음 짜서 쓰는... 비루하지만 성의있는 글입니다.
글 중간 중간에 마치 예의를 내다버린듯 비춰질 수도 있는 거듭된 '사절함'이라는 표현...
비루하지만 성의있게 쓴 글... 성의있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 그렇게 이해해 주시길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http://cafe.daum.net/neocitizen... by ZEN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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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전에 들은 우스운 이야기,, 왜놈이 우리 사신이 상투 쓴걸 보고 따라 하고 싶다니 우리 사신님 왈 너희는 상것이니
상투를 머리중앙에 틀지말고 가운데를 깍고 뒤로 상투를 틀어라 했다네요
또 삿갓을 쓴 모습보고 자신들도 삿갓을 쓰고 싶다하니
우리 사신이 신고 있던 버선을 던져주며 이것을 쓰라하니 왜놈이 좋다하며 이것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하니
우리사신 왈 "좃마개"라 하여라 하니 이후 일본에서는 버선같이 생긴 모자를 지금도 좃마개라 부른다는군요
일인 전통 복장의 버선양말 같은 모자가 진짜 좃마개 발음인지^^ ,,,?
ㅎㅎㅎ
그런 이야기가 있군요.
기모노의 오비(허리띠)가 과장되어 허리뒤에 장식으로 매달린건...
우리나라에서는 담요같은거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요...
남자들이 잦은 전쟁으로 많이 죽어 인구가 줄다보니
여자들로 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출산을 위한 성접촉에 임(?)할 수 있게
담요를 달고 다니라는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어찌어찌 그리한것이다...
라고 아주 구체적으로까지 설명 하더구만요.
그러나 그건... 사실은 우리쪽의 왜곡입니다.
그건 담요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용도도 더더욱 아니구요.
일본으로서는 분노할 일이지요. ^^;
일본은 그보다 곱절에 곱절 곱하기는 더 했지만... 똑같이 할 수는 없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