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 태성이, 태현이가 소달구지를 타고… 아빠는 앞쪽에서 소를 끌면서 따스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일본으로 떠나보낸 가족과의 해후를 꿈꾸며 아비 이중섭(1916~56)은 달구지에 탄 가족을 편지에 그려 아들에게 보냈다. 이 편지 삽화와 똑같은 구도의 그림이 있다. 유화 '길 떠나는 가족(1954)'이다. 연출가 이윤택이 같은 이름의 연극으로 제작하기도 한 이 작품엔 이중섭이 평생 부여잡고 있었던 두 주제 '가족'과 '소'가 함께 들어가 있다. 추위와 굶주림, 눈물과 슬픔이 없는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가(歌)다. "중섭처럼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예술가를 나는 모른다"고 했던 시인 구상의 말이 떠오르는 자전적 그림이다.
지난 1년간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 준비에 참여해온 자문위원들에게 이번 전시에서 꼭 봐야 할 작품 추천을 각자 5점 꼽아달라고 부탁했더니, '길 떠나는 가족'이 공통적으로 꼽혔다. 자문위원단에는 오광수 뮤지엄 산 관장(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서성록 미술평론가,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등이 참여했다.
◇한민족의 상징 '소' 10점 전시
역시 이중섭 하면 소다. 총 10점(사람과 함께 있는 소 제외)의 소가 전시장으로 출동한다. 오광수 관장은 '흰 소'(1955, 홍대박물관)를 백미로 꼽았다. 오 관장은 "이중섭의 흰 소는 백의민족, 즉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이중섭의 민족의식이 반영된 대표적 작품이라 볼 수 있다"고 했다.
언뜻 보기에 분간하기 어려운 닮은꼴 황소 머리 2점도 등장한다. 빨간 배경으로 소의 머리 부분을 집중해 그린 '황소'(두 점 모두 1953~1954, 개인 소장) 두 점이다. 한 작품은 가로로 붓터치를 해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그린 반면, 다른 한 점은 배경의 붉은빛이 조금 더 어둡고 붓터치를 둥글게 했다. 후자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박명자 회장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 하나가 주름이 적고 젊다. 자녀 손을 잡고 두 그림을 비교 관찰해보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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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흰 소 /조선DB
◇뉴욕에서 날아온 은지화
종이 값이 없어 담뱃갑의 은지(銀紙)에 그린 이중섭의 은지화는 가난한 예술혼의 상징과도 같다. 얇은 은지를 긁어 그린 은지화는 마치 암석에 새긴 경주 남산의 고대 불교 조각을 연상시킨다. 이 은지화는 현대미술의 정상급 미술관인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MoMA)에까지 소장됐다. 주한 미국 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아서 맥타가트가 1955년 구입해 MoMA에 기증한 은지화 3점이 전시에 나온다. 이 중 '신문 읽는 사람들'은 6·25 이후 어수선한 정세 속에 신문을 들여다보는 보통 사람을 그렸다. 서성록 평론가는 은지화 '도원(낙원의 가족)'을 추천했다. "손바닥만 한 은지에 거대 서사가 그려져 있다. 유화 '서귀포의 환상'에 버금가는 좋은 작품"이라고 했다.
'국민화가' 이중섭의 대표작을 찾습니다
올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 화가' 이중섭(1916~1956)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섭을 너무 몰랐고, 또 홀대했다. 단적으로 국공립미술관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중섭의 흔적을 추적할 자료도 변변찮다.
한국 미술의 귀재(鬼才) 이중섭을 다시 보는 뜻깊은 전시가 열린다. 조선일보사와 국립현대미술관 공동 주최로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과 1988년 '이중섭미술상'을 제정해 28년째 그의 예술혼을 기리는 조선일보가 함께 여는 국민 화가의 전시답게 최대 규모로 열린다. MoMA(뉴욕현대미술관)가 소장한 은지화 3점을 비롯해 국내외 미술관 소장품, 개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어 일반인들은 보기 어려운 작품 등 총 150여점이 덕수궁으로 총집합할 예정이다. 이렇게 많은 이중섭의 작품이 한데 모이는 건 1986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이중섭 30주기전' 이후 30년 만이다.
이번 전시 취지 중 하나는 '국민과 함께하는 이중섭 찾기'다. 지면을 통해 소장처가 불확실한 작품을 독자와 함께 찾아 전시장으로 초대할 계획이다. 관객이 준비에 참여하는 쌍방향 전시인 셈이다.
1차로 도록에는 간간이 보이나 정작 어디 있는지 알 길 없는 대표작 2점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하나는 1950년대 초반 작품으로 알려진 '피란민과 첫눈(세로 32.4㎝·가로 49.7㎝, 종이에 유채)'. 삶의 터전을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피란민 위로 속절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온 힘으로 날갯짓하며 절규하는 새들과 팔딱거리는 물고기만이 그들의 고통을 나눈다. 몸 눕힐 곳 하나 없던 피란민에게 눈(雪)은 야속한 존재이면서도, 겨울이면 순백으로 변하는 고향땅 향한 그리움의 증폭제였으리라. 1950년 12월 노모(老母)를 남겨두고 일본인 아내 이남덕 여사, 두 아들, 장조카와 남으로 피란 온 이중섭의 자전적 이야기를 승화한 그림으로 보인다.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발표된 것으로 추정되나 1979년 개인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또 다른 작품은 1951년 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세로 41㎝·가로 71㎝, 합판에 유채). 이중섭이 아내, 두 아이와 제주 서귀포의 작은 초가에서 피란살이할 때 그린 그림이다. 세찬 바람에 뼈가지가 휜 팽나무, 현무암을 쌓아 만든 돌담, 초가집 뒤로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섶섬이 보인다. 세들어 살던 초가 근처 정방동 주민센터 쪽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섭의 풍경화 중 사실적이고 정확한 장소가 나와 자주 언급되는 작품인데 정작 소장처는 모른다.
"신화에 빠진 이중섭을 구출하라"
이중섭은 한국에서 작품 호(그림 크기의 단위)당 평균 가격이 두번째로 높은 화가다. 비싼 만큼 그의 작품을 둘러싼 진위(眞僞)논란은 잦았고 이목도 집중시켰다.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에 따르면 2003~2012년 감정한 이중섭 작품의58%가 가짜였다. 박수근·천경자·김환기 등 유명 화가들보다 위작 비중이 높다.
2005년엔 유족이 직접 내놓은 이중섭 작품조차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중섭 위작(僞作) 수백점을 가진 대규모 조직이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위작 논란에 검찰까지 나섰다. 2007년 검찰은 이중섭·박수근의 작품이라는 그림 2800여점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위작 논란 여파로 2006년 이중섭50주기는 기념전 하나 없이 지나갔다.
이중섭은 입버릇처럼 자기 작품을 ‘가짜’라고 했다고 한다. 위작이란 얘기가 아니라 수양이 부족하다는 겸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위작 논란은 사후에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이중섭의 지인이었던 김광균 시인은 이중섭의 진짜 은지화를 판별하는 나름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미군 레이션에 들어있는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 은박지가 진짜라는 것이다.
미술에서 대가의 작품에는 으레 위작이 따른다. 그래서 정확한 감정(鑑定)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진짜라고 판정하는데도 작가 본인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작가가 자기 작품을 못 알아보고 가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