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피는 날에는 / 김영숙
앙상한 복숭아 나뭇가지 사이로 사월의 햇살이 분주하게 드나들며 골고루 볕을 뿌리고 다닌다. 이에 질세라 바람도 덩달아 햇살을 따라다니며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더니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뜨린다. 농원마을 언덕 과수원에는 온통 분홍빛이 범람했다. 금방이라도 사선대에 분홍색 꽃물이 우르르 몰려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복사꽃은 갓 피어나면 연분홍색이다가 벌들이 분주하게 드나들며 수정을 도와주자 서서히 부끄러운 듯 진분홍색으로 변해 비로소 복숭아를 잉태할 진정한 복사꽃이 된다. 벌은 꿀을 얻고 꽃은 수정을 이루고 나는 ‘눈 호강’하고 가슴에 추억 한 줌을 복사꽃처럼 피우니 이보다 더 좋은 봄날이 있을까?
꽃은 햇살 고루 받아먹고 한 시절 곱게 지내다가 꽃비 되어 떠난다. 꽃 진자리는 이파리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여름이면 태양 닮은 복숭아를 세상에 내놓는다. 사월 이맘때면 임실은 어디를 가나 복사꽃 천지다.
복숭아를 생각하면 나는 늘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시골집 앞마당에는 밑동 잘린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는 그루터기에서 새순 내 자라더니 여전히 30년째 꽃을 피운다. 인적 끊긴 마당은 들풀들이 다 차지하고 담벼락은 바람이 반쯤 뜯어내고 제집 드나들듯 하는데, 그래도 한해도 거르는 법 없이 봄이면 저 혼자 도원경桃源境을 꿈꾼다.
아들 동직이를 임신하고 나는 왜 그렇게 복숭아만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복숭아 통조림도 먹어봤지만, 본디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나무에서 갓 딴 싱싱한 복숭아만 먹고 싶었는지. 그러고 보면 우리 아들은 입맛도 참 고급 졌던 것 같다. 며느리 사랑이 각별하셨던 시아버지께서는 그런 며느리를 위해 제철이 아니어서 복숭아를 구할 길 없으니 대신 복숭아보다 한두 달 먼저 익는 자두와 살구를 온 동네를 돌면서 얻어서 주곤 하셨다. 그러나 복숭아를 먹고 싶은 나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달랑 몇 개밖에 안 달린 복숭아를 날마다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고 손에 닿을 수조차 없는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복숭아는 내 시선을 피하며 더 태양을 닮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님은 톱을 가져오시더니 복숭아나무를 아예 싹 둑 잘라버리고 설익은 복숭아를 따 주셨다. 딱딱하고 시금털털한 복숭아가 어찌나 맛있던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날의 그 맛, 그 오묘한 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무야 또 심으면 되지만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 평생 한 된다.”
나무를 자르며 하시던 말씀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생생해진다. 눈물겹도록 깊은 당신의 사랑은 복사꽃 화사하게 피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소환되어 다가선다. 복숭아나무는 잘려 나간 상처를 딛고 새순이 돋더니 봄이면 빈집 앞마당을 지키며 화사한 추억을 몽실몽실 피우며 해마다 추억이 매달린다.
나무를 자른 뒤에 아버님은 복숭아가 나는 철이면 장날마다 몇 개씩 사다 주셨으니 나는 봉숭아 맛에 푹 빠져 살았다. 복숭아는 많은 종류가 있고 그 맛 또한 다양하다. 사각사각한 식감의 복숭아, 첫 키스처럼 황홀하고 부드러운 복숭아, 한입 베물면 과즙이 뚝뚝 흘러내리는 아주 연하고 달콤한 복숭아 등 가지각색이다. 복숭아만의 특유의 향기와 새콤달콤한 맛을 가졌다. 여러 복숭아를 다 먹어보아도 나는 입덧하던 때 먹었던 그 복숭아 맛을 아직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그 성질과 맛은 사람과 참 많이 닮았음을 알았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살아가지만 추구하는 삶의 색깔은 각자 다르듯이 그 성격 또한, 다양하다는 것을. 나는 이런 임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산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농사짓는 복숭아는 당연히 맛있다. 임실 복숭아는 과실이 크고 과육이 단단해 상품성이 높아서 농수산물시장에서 최상품으로 인기가 높다.
함박눈처럼 복사꽃 꽃눈이 내리는 날, 4월의 뜰에 앉아 아련히 복숭아에 어린 상념을 살포시 내려놓으니 우물에서 숭늉 찾듯 벌써 혀끝에 달콤한 단물이 밀물처럼 일어 혀끝에 감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시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돋아 마음이 아리다.
이제 오래지 않아 복숭아가 나올 터이고 세월이 키운 추억 한 입 베물고 달콤한 인생을 맛볼 그 날을 기다린다.
[김영숙[ 수필가. 《시사문단》 등단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인협회, 전북수필 회원
현 임실문인협회 사무국장
* 수필집 《사소한 아줌마의 소소한 행복》, 《섬진강 들꽃처럼》
* 시집 《꽃에 안부를 묻다》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며, 이름 하여 복숭아의 계절이 칠월입니다. 저도 복숭아 농원 즐비한 전주의 복숭아 마을, 용산리에 살고 있습니다만, 뭐가 그리 바쁘다고 늘 복닥대며 복사꽃 필 때 꽃구경 한 번 못했네요.
올 장마가 유달리 길고 국지성 호우가 빈번해 복숭아 단맛이 떨어져 걱정하는 소리도 들리던데요,
마침 오늘, 7월 19일(수요일) 전주종합경기장 일원에서 제25회 <명품전주복숭아 큰 잔치>가 열린다고 합니다. 전주 복숭아도 유명하지만, 임실 복숭아도 빼놓을 수 없지요. 맛난 복숭아, 단물 뚝뚝 떨어지는 꿀 복숭아 생각에 침이 고입니다.
시아버지의 온정 가득한 마음, 아름답게 간직된 따뜻한 얘기가 복사꽃만큼 아름다워요.
궁금해서요, 복숭아나무를 자르지 않고 복숭아만 땄으면 나무가 해마다 또 복숭아를 선물해줄 텐데, 시아버지는 왜 복숭아나무를 잘라버리셨을까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키가 너무 커서 손에 닿지 않는 나뭇가지를 잘라 며느리에게 복숭아 맛을 선물하신 아버님, 시아버지 사랑을 듬뿍 주셨군요. 복숭아철 마다 당연히 생각나시겠어요.
복숭아는 눈이 없어도
주인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 봅니다
많이 아껴 줄 수록 크고
맛이 있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