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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0.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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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2-29)
형제 여러분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8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복음<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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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0.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141 2026.10.09 21:26 2026년 10월 10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27-28
짧지만 깊은 복음입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도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는 모진 비방을 들으셨습니다. 그 위태로운 자리에서, 군중 속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저렇게 훌륭한 분을 낳은 어머니는 얼마나 복될까!’ 어머니를 칭송함으로써 아들을 높이는, 참으로 정겹고 따뜻한 찬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얼핏 어머니를 물리치시는 듯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이 보면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찬미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참된 행복이 어디서 오는가’를 밝히십니다. 혈육의 인연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성모님은 ‘가장 복되신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그린 성모님을 보십시오. 천사의 말씀을 듣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하셨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셨으며, 열 달 동안 ‘말씀’을 태중에 모시고, 서른 해를 그 ‘말씀’ 곁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은 그저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말씀을 가장 잘 듣고 지키신 분’이기에 복되십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우러르는 참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즐겨 말했듯, 마리아께서 마음으로 말씀을 잉태하신 것이 몸으로 잉태하신 것보다 더 복됩니다. 그리고 그 복됨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 복에 참여합니다.
눈여겨볼 낱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키다’입니다. 듣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듣기만 하고 사는 것은 헛된 감상에 그치고, 지켜 내는 데서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성모님의 삶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는 달랐습니다. 혼인 전 잉태로 파혼의 위기를 겪으셨고, 사랑하는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키는 행복’은 편안함의 보증이 아니라, 어떤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복입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첫 주간의 완벽한 매듭입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 들은 말씀을 ‘지켜 내는 것’입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성모님처럼 부드럽게 “예” 하는 것입니다. ‘절제’가 무엇입니까? 흩어짐 속에서 말씀 하나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될 ‘친절과 선행’은, 바로 이 ‘지킨 말씀’이 이웃에게 흘러넘치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 사람의 손은, 반드시 이웃을 향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는가? 나는 겉모습(혈육·직책·경력)으로 복을 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둠 속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깊은 복을 아는가? 내가 지킨 말씀은 이웃과 창조를 향해 흘러넘치는가?
주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지켜 살게 하소서. 성모님처럼 마음에 새겨 간직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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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0.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4?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0. 04:00
귀 기울이고, 배우며, 공동선에 기여합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관상은 세상과 더 깊이 하나 되는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세계 귀 기울이고, 배우며, 공동선에 기여합시다! 2026년 10월 9일 금요일 체로키족 후손 랜디 우들리(Randy Woodley)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임종 자리에서 남긴 초대, "나는 내 몫을 다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몫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에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저의 키투와(Keetoowah) 조상들은 이 질문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 모든 존재, 모든 창조의 요소가 고유한 책임을 지니며,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데 맡겨진 역할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모든 이가 같은 역할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는 치유자였고, 어떤 이는 공동체를 지키는 용사였으며, 또 어떤 이는 농부, 이야기꾼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에게 맡겨진 몫이 있었고, 공동체는 그 모든 몫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옛 인디언의 격언은 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에 대해 가장 나쁘게 할 수 있는 말은 바로, ‘그는 마치 아무 친족도 없는 듯 행동한다’ 는 것입니다. 마치 친족이 없는 듯 행동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행위가 밖으로 파급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직 자신만 있는 듯이 대하는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묻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익숙하게 들리시나요? 이것은 사실상 서구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입니다. 곧, 땅을 단순한 재고로, 물을 공급망으로, 사람을 노동 단위로, 병든 이를 수익원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가능한 것은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며, 그 아래로 흘러가는 이가 누구인지 결코 묻지 않는 태도입니다. 제 조상들이 실천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창조 안에서 막내 형제임을 깨달았습니다. 곧, 식물과 동물, 물과 돌들이 우리보다 먼저 존재하며 세상의 질서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지배가 아니라, 귀 기울이고 배우며, 전체의 안녕을 위해 봉헌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땅과 상호적 관계 속에서 살아오며 형성된 생존의 지혜입니다. 신비가들은 언제나 '분리된 자아'가 환상임을 알아왔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창조 안에 깊이 엮여 있습니다. 곧, 가장 작은 이에게 행하는 것이 곧 거룩하신 분께 행하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이 진리를 수천 년 동안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해 왔습니다. 논쟁할 신학으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존재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저는 그것을 '조화의 길(Harmony Way)'이라 부릅니다. 관상이 우리를 이끌어야 할 자리, 그것은 바로 '연약함(vulneravility)'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관여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몫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오래 머무는 것입니다. 취약성은 자기 자신과 성찰하며 살아가는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창조 전체의 공동체—곧 모든 친족과 함께—깊이 살아가는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는 정신적 건강을 위해 자연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이미 수 세기 전에 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대부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캐나다 서부의 산골 마을에 살며, 대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의 품 안에서 지내는 것을 즐깁니다. 저는 자연이 하느님의 '기쁨의 자리'라고 생각하며, 프란치스코는 그것이 우리의 자리도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Nancy B. Reference Randy S. Woodley, “Planting for the Seventh Generation: What Is Ours to Do” ONEING 14, What Is Ours to Do? (CAC Publishing, 2026): 100–101, 10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조의 신비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아주 작은 것, 이를테면 한 줄기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 숨겨 두신 은총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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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0.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0 04:47
- 실천적 과제 앞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며칠 전 또 듣기 싫은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재속 프란치스칸 엄마의 아들이 교구 신부가 되었는데 자기는 프란치스칸이면서 아들은 교구 사제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구 사제가 되게 한 것이 물론 잘못은 아니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 말을 듣기 싫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기 싫었던 것은 교구 사제가 되게 한 이유, 곧 작은 형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 이유 때문인데 작은 형제가 되면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고 고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좋게 이해하면 자기는 고생해도 자식만은 그런 고생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나쁘게 이해하면 주님을 따르는 길을 십자가 길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것이지요.
사실 교구 사제의 길이 더 십자가의 길인지 수도자의 길이 더 십자가의 길인지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수도자의 길이 더 힘든 길이기에 부모가 반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여인이 성모 마리아를 참으로 행복한 여인이라며 부러워하는데 저는 이 부러움이 세속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멋진 말씀 선포에다 인기까지 대단한 것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주님의 어머니가 된 것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인지.
세속적인 면이 없지 않았는지 주님께서는 그렇게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 엄마가 되는 길을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입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전에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주님을 만나러 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걸 실천하면 다 내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바이지요.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신데 내게도 오신 하느님 말씀을 마리아처럼 받아 모시면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부러운 주님의 어머니 되기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쉬운 것인데 우리는 오늘 아버지의 말씀을 마리아처럼 받아들일 것인지, 내 아들이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할 것인지, 이 실천의 측면에서 보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올해 프란치스코 파스카(선종) 800주년을 맞이하여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고 그것을 본 많은 분이 새삼스럽게 감탄하곤 하는데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칸으로서 프란치스코처럼 살아내야 할 실천적 과제 앞에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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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0.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5?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10. 04:44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급진적인 포용성입니다.~~~
언젠가 한 번 나누어드렸던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그때가 떠올라 다시 한번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언어 공부를 할 때 가장 힘들고 어색했던 시간은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형제들이 함께 만찬을 나누는 저녁식사 시간이 그랬습니다. 식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때 그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냥 묵묵히 식사만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갭"(가브리엘)이라는 신부님이 다른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자기 음식 접시를 들고와 제 옆 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그 식탁에서 젊은 형제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천천히 또렷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분도 저와 마찬가지로 그 수도원에 손님으로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물론 같은 관구(예수님의 거룩한 이름 관구-뉴욕 관구) 소속이었지만 당시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는데, 안식년을 맞아 제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 순간 저는 그 신부님이 천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성모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던 진짜 가브리엘 천사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 저는 "'내'가 정말로 이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느꼈는 경험은 늘 저의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하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순간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 가운데 하나—곧 "내게도 자리가 있다"는 확신, "나는 속해 있으며, 내가 존경하는 이들만큼이나 복되다"는 확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에서 바로 그 갈망에 응답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이야기, 문화, 배경, 경험, 정체성은 중요하지만, 그 어떤 차이도 우리의 가치나 하느님 가족 안에서의 자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지 않으시며, 은총으로 모든 이를 한 가족으로 모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바로 이런 급진적인 포용성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만드는 경계를 넘어, 우리가 간과하거나 오해하거나 무심코 배제할 수 있는 이들에게까지 다가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같은 포용의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군중 가운데 한 여인이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가장 가까운 분인 어머니를 찬미하며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 이 여자의 말은 정말로 애정 어린 것이고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시선을 넓히시며 축복을 확장하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복되다."라고 하십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문을 여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더 이상 특정한 관계나 특권적 지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축복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삶으로 살아내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말씀은 귀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선택으로 옮겨질 때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찬미를 초대로 바꾸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소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넉넉히 주어집니다. 그 초대는 하느님의 사랑의 음성을 귀여겨 듣고 그 초대에 마음 깊이 응답하려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아들인 데서 더 복되었습니다."라고요...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이 함께 그려내는 그림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원을 더 크게 넓히시며, 언제나 포용으로 나아가시는 모습입니다. 물론 포용은 단순히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홀로 서 있는 이를 알아차리는 것, 판단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 추측하기 전에 배우는 것, 이름을 기억하는 것, 조용한 목소리를 대화에 포함하는 것, 그리고 우리와 다른 경험을 가진 이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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