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아버지, 고행복 씨의 수선 가게
지난 여름, 청바지를 수선하려고 나선 길에 ‘행복옷수선’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롯데백화점 맞은편 골목길, 지난해 6월 폐업한 백화점 맞은 편 골목에 조용히 자리 잡은 그 가게는 이름만큼 따뜻한 기운을 풍겼다. 본가 근처 E마트 마산점에도 옷수선점이 있었지만, 사정이 생겨 이곳을 찾게 되었다.
가게는 약 두 평 남짓한 아담한 공간이었다. 입구를 열고 들어서면 왼쪽 벽면에 오래된 소파가 손님을 맞이했고, 맞은편에는 ㄱ자 형태의 작업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공업용 미싱을 중심으로, 오버록과 커버스티치, 지그재그 미싱이 편리한 동선에 놓여있었다. 실 전용 선반에는 ‘날라리사’, ‘코아사’, ‘투명사’ 등 다양한 실들이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선반 아래에는 자, 초크, 재단가위 등 수선 도구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어 주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사장님은 만면에 웃음꽃 넘치는 후덕한 인상이 행복해 보였다. 수선을 맡기고 작업하는 동안 조심스레 말을 붙여보니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유함과 겸손함이 묻어났다. 수선한 청바지를 넣은 종이 쇼핑백을 들고 돌아오는 길, 교통은 다소 불편하지만 앞으로 단골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방문은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수선할 옷을 맡기고 시원한 냉커피를 대접하고 싶어 근처 커피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 들고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손에 쥔 작업을 마친 뒤 마시겠다며 고마워하셨다. 이날 나는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여쭈었다. “55년생입니다.” “와, 사장님 저랑 갑장이네요!” 그 말에 사장님은 반색하는 얼굴에 화색이 돌고,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2020년 코로나 이전까지 창원 L백화점에 본점을 두고 수선 전문 직공 서너 명을 두어 체인점까지 운영했다고 한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코로나 여파로 손님이 줄어들자 백화점 입점 사업을 접고 본가 인근 현재의 장소에 새로 개업했다. 초창기에는 손님이 많았지만, 2024년 6월 L백화점 마산점이 폐업하면서 손님이 급감했다. 그래도 단골이 찾아주니 “밥 걱정은 없다”며 살아온 이야기를 겸연쩍은 표정으로 설설 풀어놓기 시작했다.
1955년 마산 완월동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졸업 후 마산 창동의 한 양복점에 시다로 들어가 재단과 봉제의 세계를 처음 접했다. 실밥을 뜯고, 다림질을 하고, 원단을 정리하며 기술을 익혔다. 재단가위가 원단을 가르는 소리, 미싱의 박음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기술을 배워갔다. “양복 한 벌을 내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솜씨를 인정받은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받은 설움은 장편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겁니다.” 사장님은 그렇게 선배들의 괄세를 견디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간 K양복점의 주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기술을 배운 분이었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가장 뛰어난 제자에게 양복점을 물려주었고, 그 제자가 바로 사장님의 스승이었다. K양복점은 1970년대 마산에서 기술과 사업 수완 모두 최고였고, 사장님을 친아들처럼 아끼며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그러나 직장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는 피할 수 없었다.
1985년, 서른 살에 독립하여 시내 길모퉁이에 양복점을 차렸다. 그 전 해에 결혼한 아내가 뒷일을 맡아 부부가 함께 일했다. 혼주용 정장과 예복을 주로 맞췄지만, 시대의 흐름이 기성복으로 옮겨가면서 양복점을 접고 백화점 인근에서 수선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날 나는 사장님의 활동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해 기념으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며칠 전, 아내의 심부름으로 겨울바지 길이를 줄이러 다시 가게를 찾았다. 그제야 ‘행복옷수선’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장님의 이름이 ‘고행복’이었던 것이다.
작업실 벽면에는 ‘위대한 아버지 상’ 상패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위대한 아버지 상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고행복
가족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오신 우리 아버지.
당신과 함께한 모든 날, 모든 순간이 감동이었습니다.
사랑으로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와 존경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 일동』
칠순잔칫날 자녀들에게 받은 상이란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참 사랑으로 자신들을 길러내신 아버지에게 그 자녀들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내린 상이었다. 한 점 흠잡을 곳 없는 상패의 문안을 읽는 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이며, 그분의 자녀들은 모두 효자 효녀임에 분명했다. 내가 상패 문안을 낭송하는 동안 사장님은 내내 흐뭇해하면서 잠시 추억에 잠기는듯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불현듯 나의 선친이 떠올랐다. 1932년 임신년생, 살아계셨다면 올해 아흔셋이셨을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6.25 직후 육군에 입대해 6년간 복무하고, 제대 후 이발 기술로 생계를 이어가셨다. 6년간의 군대시절에 배움에 한이 맺힌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어선에 기름을 대 주는 유조선에 승선해 남해안을 따라 인천까지 오가는 고생으로 돈을 벌어 장남인 나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셨다. 이후 고등어 잡이 선단의 선장이 되어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지만, 1984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재혼하면서 집안은 흔들렸다. 파란만장했던 아버지는 2015년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유골은, 어머니와 함께 국립 산청호국원에 봉안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고행복 씨처럼 ‘위대한 아버지 상’을 받고도 남을 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열어주시지 않았다.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내게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제 나도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니, 평생을 함께 고생하며 살아온 조강지처를 먼저 떠나보내고, 수없이 방황했을 아버지의 그 슬픈 마음을 자식인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때 그렇게 못해드린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행복옷수선의 고행복 사장님은 참으로 복된 분이며, 그 자녀들 또한 효자임에 분명하다. 고씨 집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하늘의 별이 되신 나의 아버지, 어머니.
죄 많은 이 불효 자식, 부디 용서하여 주소서.
2025년 10월 31일
개암 김동출
첫댓글 존경하는 시인님도 늦지 않으셨어요.
지금이라도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 상패 하나 만들어 드리세요.
귀한 행복이야기 발굴해 주셨네요.
역시 배움이 다는 아니라는 것이 입증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