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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19세기의 결핵, 20세기의 암과 에이즈를 잇는
우리 세대의 병은 만성질환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 겪게 될 아픔에 관한 이야기
오은 시인, 이길보라 감독, 김준혁 의료윤리학자 추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뉴요커] [타임] [보그] 올해의 책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나한테? 내가 뭘 잘못했나?’
어느 날 갑자기 삶을 곤경에 빠뜨리는 병이 닥치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도 자기 관리의 하나로 여기는 시대에, 아픈 사람은 실패자인 것만 같다. 게다가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병, 잠깐 앓고 마는 게 아니라 평생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병에 걸리면, 이로 인해 망가진 자기 인식을 복구하고 아픈 사람으로서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해진다.
“나는 몸이 불편했지만, 증상이 확실하고 치료법도 정해진 그런 병은 아니었다. (…) 답을 찾지 못한 가운데 심한 절망에 사로잡힌 나는, 내가 겪는 일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건강을 되찾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자신의 숨겨진 이름을 찾아야 하는 판타지 소설 속 어린아이처럼, 그 이야기를 알아내기만 하면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은 작가 메건 오로크가 10년 동안 써 내려간 그 ‘이야기’다. 오로크는 20대 초반부터 정체불명의 병에 시달렸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자가면역질환 진단을 받기도 했지만, 약을 먹어도 병은 낫지 않았다. 검사 결과에 문제가 없다며 도리어 환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의사들을 뒤로하고, 스스로 미스터리의 답을 찾아 나섰다. 면역계의 활동과 의학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온갖 치유법(때로는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도)을 시도하고, 의료계 전문가들과 동료 환자들을 만났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파고들수록 이것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온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여정은, 만성질환을 앓는 이들이 처한 현실을 탐색하고 우리 사회의 질병에 대한 인식과 현대 의학의 한계를 짚는 더 넓은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오은 시인의 추천사처럼, 아픈 몸으로 사는 일은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죽는 병이 아니어도, 남들 눈에 괜찮아 보여도, 우리는 언제든 아프고 힘들 수 있다. 그 고유한 아픔들 하나하나가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쉬이 끝나지 않는 아픔을 안고 나아가는 불확실한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이 책을 곁에 두고 함께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저자 소개
메건 오로크
시인, 작가, 저널리스트. 예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뉴요커》 《파리리뷰》 등을 거쳐 《예일리뷰》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에세이 《긴 이별》과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20대 초반부터 정체불명의 증상들에 시달렸다.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초기 진단은 증상을 완전히 설명해 주지 못했다. 스스로 답을 구하기 위해 의료계, 학계의 전문가와 동료 환자 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것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진단과 치료법이 모호한 병, 극복하기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병, 남들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병이 많은 이의 삶을 잠식하고 있었다.
저자는 만성질환의 완고한 현실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덜 외롭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가다 서다 하는 병과 보폭을 맞추느라 10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그러는 동안 찾고자 했던 답 대신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그의 여정은 여느 투병기처럼 병을 없애거나 무찌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우리 몸이 현대 의학이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할 뿐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확실성과 부족함을 안고 사는 길을 이야기한다.
📜 목차
추천의 말
서문
1부 장애물
1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2 자가면역이라는 미스터리
3 의사도 모르는 병
4 내가 나인 척
5 차트 위 숫자에 갇힌 환자들
6 대체 의학을 대하는 자세
7 점점 소용돌이의 바닥으로
8 의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9 면역, 그 우아하리만치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
2부 미스터리
10 은유로서의 자가면역
11 스트레스 때문에 스트레스
12 웃음 치료
13 의심스러운 단서
14 최악의 순간
15 라임병 광인
16 다시 쓰는 미래
17 남겨진 질문들
3부 치유
18 누구도 섬은 아니다
19 희망의 이유
20 지혜 서사
감사의 말
주
참고 문헌
📖 책 속으로
병 이야기는 보통 깜짝 놀랄 사건으로 시작한다. 슈퍼마켓에서 쓰러지거나, 정기 검진에서 복부에 혹이 잡힌다거나, 의사에게서 전화가 오는 식이다. 내 경우는 다르다. 나는 헤밍웨이 소설에서 파산한 이야기를 하듯 아팠다.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 p.15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전이지만, 아마 환자분은 자가면역질환의 한 종류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느낀 안도감이란 어마어마했다. 일단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 문제는 바로잡을 수 있다. (…) 하지만 6주가 지나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빠졌다.
--- p.36
자가면역질환은 신체가 어떤 이유로 자기 자신의 건강한 조직을 공격하는 항체를 만드는 병이다. 지켜야 할 바로 그 대상에 달려드는 것이다. 자가면역은 몇몇 면역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자기 자신의 신체 조직을 “관용tolerate”하는 일을 멈춘 상태다(자가면역autoimmunity의 ‘자가auto’는 ‘자기 자신self’이라는 의미다).
--- p.41
20세기는 수전 손택의 표현처럼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주장이 의학의 핵심 전제”인 시대였다. 21세기는 의학이 질병 유발인자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시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질병 서사도 극적인 시작과 궁극적 치유(혹은 비극적 죽음)로 구성되는 틀에서 벗어나, 보다 섬세하게 변화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진화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에서 다수의 환자는 건강과 질병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안녕한 상태와 증상이 있는 상태를 별 특징 없이 오갈 것이다.
--- p.75
아프면 외롭다. 누가 안쓰럽게 여겨 주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욕망이 생긴다. 그런데 바로 그 알아주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아픈 원인이 무엇인지, 증상이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증상이 늘 나타나지는 않는 질병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 p.79
기술 중심의 미국 의료계에서,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면 사람 이하의 존재로 떨어진다. 이미 20세기 전환기부터 환자가 이제 “차트 위의 숫자, 엑스선 판 위의 그림자, 슬라이드 위의 얼룩”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평론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고 찰스 E. 로젠버그가 언급했다.
--- pp.96~97
가장 좋은 때에도, 아픈 사람의 파트너로 지내기란 힘들다. 아주 가까운 위치라고 해도, 영원히 유리창 너머에서 환자를 지켜보아야 한다. 짐은 내가 아픈데 본인은 아프지 않아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내 고통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진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39
“내가 증상을 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그렇게나 많을 수 있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거짓말 한다고 인생 좋아질 일 있나요? (…) 운 나쁘게도, 의사들이 내 병명으로 고려한 목록 1순위가 불안이었어요. 의사들은 한두 가지 확인해 보고 아무것도 안 나오면 불안이 문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차라리 ‘문제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 p.165
이처럼 자가면역질환이며 알레르기, 천식, 식품 불내증이 전통 사회에 비해 현대 서구에서 증가하는 이유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위의 논문들을 읽으면서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가하는 압박, 환경오염, 불안, 질 낮은 식품 산업, 항생제 남용, 끝없는 스트레스 요인, 허약한 사회 안전망(적어도 미국은 그렇다)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대마다 자신의 마이크로바이옴과 환경을 해치고, 이를 다음 세대에 넘겨 준다. 다음 세대의 마이크로바이옴과 환경은 식품과 화학물질에 의해 더 손상된다.
--- p.192
자가면역질환을 앓으면 이 면역계가 몸을 방어하는 대신 공격한다. 그러니 자연히 배신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자는 배신하는 동시에 배신당하는 존재인 셈이다. 은유는 사고방식을 결정짓는다. 항체가 균의 습격에 맞서 싸우는 군인이라면, 자가면역은 아군이 실수로 포격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 이런 암시는 나에게도, 이 책을 쓰는 동안 인터뷰한 사람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자기 자신을 벌하지 못한 개인적 실패의 결과 병을 앓게 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 pp.206~207
나 자신을 보살피며 쉬는 사람이라니, 한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었다. 계속 일하고 걱정하는 삶은 내 선택이자, 나 자신을 붙드는 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한 친구가 내게 쉬엄쉬엄 일하라고 조언했다. 내 대답은 “기를 쓰고 네 조언을 따르고 있어”였다. 친구는 ‘기를 쓰고’라는 부분이 목적과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 p.219
사람이 겪는 현실의 존엄성을 품는 일. 바로 그래서 내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알고 싶었다. 내 언어를 찾아내려고 그토록 애썼다. ‘극복’에 실패한 상황을 병적으로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만성질환을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면, 환자에게 품위 있게 병에 대처하라고 가르치면서 오히려 그들의 품위를 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 p.241
처음 전기 충격을 겪고 건강 상태가 나빠진 때를 시작점으로 잡으면, 어둠 속에서 15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내 문제의 이름을 찾게 되었다. 그렇지만 안도감은 느낄 수 없고, 대신 악몽에 빠진 기분이었다.
--- p.254
오랫동안 내게 문제가 있어도 고칠 수 있다고, 답은 바로 앞에 있지만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했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바로 희망을 잃는 일이었다.
--- p.264
“기존 의사들은 맡은 일에 아주 유능합니다. 그렇지만 진단에 딱 들어맞지 않는 증상을 다발로 지닌 환자는 그들이 맡고 싶은 환자가 아닙니다.” 외과 의사 아툴 가완디는 의사라는 직업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앓는 환자보다 더 (의사의)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없다.
--- pp.307~308
내 몸은 이제껏 나를 저버렸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계속 버림받으리라는 내 생각이 그릇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 몸은, 삶을 뒤바꾼 심각한 감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킬 능력이 있었고 그렇게 쭉 나를 지켜 왔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 p.327
설명이 안 되는 증상에 만성 라임병 진단을 받으려고 애쓰는 한 가지 이유는, 인간미 없는 현대 의학이 더 나은 설명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은 인정받고 싶다. 과학이 입을 다문 자리에 서사가 몰래 숨어든다.
--- p.336
던은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장례식과 결혼식 종소리를 들으며, 인간이 서로 정신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통찰을 구했다.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다.”
--- pp.347~348
만성질환을 앓는다는 것은 매 순간 “위장된 슬픔” 속에서사는 일이라고, 역사가 제니퍼 스팃이 말했다. 병으로 얻은 좋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친구가 조언했을 때, 바로 이 늘 곁에 있는 슬픔이 러그 밑으로 쓸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병으로 무언가 얻기는 했으니 친구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으나, 슬픔을 짚지 않고 지름길로만 가는 충고는 탐구 서사가 얼마나 복잡한지 가리는 효과를 냈다.
--- p.388
🖋 출판사 서평
제목 없는 질병, 완결 없는 고통
─현대 의학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의 이야기
대학을 졸업하고 갓 취업한 무렵, 오로크는 팔다리를 칼로 찔러대는 듯한 ‘전기 충격’을 아침마다 겪기 시작했다. 어지럼증, 피로감, 관절 통증, 기억력 감퇴, 식은땀 같은 증상도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밤마다 두드러기 때문에 깬 적도 있었는데, 병원 검사에서는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불편감이 올바르지 않은 식습관 탓이라고, 즉 자신이 관리를 제대로 안 해서라고 생각했다. 극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갈 뻔했을 때, 의사에게 물어보니 “월경통은 누구나 겪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해 보니 자궁내막증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진통제만 처방했다. 대장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나서 몇 달간 림프절이 아팠을 때는 슬픔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젊고 여기저기 아픈 여성으로 서른 중반이 된 어느 여름, 베트남 휴가에서 돌아온 뒤 2주 넘게 독감 유사 증상에 시달렸다. 이때부터 병은 본격적으로 악화했다. 신간 집필, 작가 레지던시, 이혼한 남편과의 재결합, 임신 계획 등 한창 미래를 향해 의욕적으로 나아갈 참이었는데, 당장 너무 피곤해서 노트북 모니터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자가면역성 갑상샘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호르몬제 복용하는 한편, 일을 쉬면서 건강을 되찾는 데 몰두했다. 그 덕분인지 한동안 병세가 호전되고, 자가면역질환이 있음을 나타내는 자가항체도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어떤 의사도 통증이 계속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20세기 이래 의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인류의 삶에서 거의 모든 질병을 몰아낼 기세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검사를 해도 진단이 나오지 않거나, 원인이나 치료법을 몰라 오래도록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는다. 오로크가 겪은 자가면역은 미국에서 암 다음으로 흔한 질환이다. 하지만 환자 수가 5000만 명을 헤아리는 이 병에 대해 현대 의학이 아는 바는 많지 않다. 의사들은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급성질환은 잘 고쳐도, 시름시름 환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만성질환에는 속수무책이다.
기술과 진단 중심의 의학에서 “측정이 안 되는 병은 존재하지 않거나 환자가 미쳤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 수전 블록이 말했다. ‘세균(바이러스)이 질병을 유발하고, 인체는 질병을 극복한다’는 관습적 세균론 패러다임에 들어맞지 않는 질병은 현대 의학의 시야에서 가려진다. 결국 첨단 의료의 그늘진 한편에는, 병원에 가서 아프다고 증언해도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수많은 환자가 있다. 19세기의 결핵, 20세기의 암과 에이즈처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질병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만성질환이야말로 우리 세대의 병일 것이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로 나는 죽을 뻔했다
오로크는 자신의 병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현실이 신체적 고통 못지않게 힘들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의사나 친구에게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증상은 피로로 인한 심신 쇠약이었다. 안 피곤한 사람이 없는 요즘 시대에 피곤하다고 우는소리를 하다니 나약한 사람 같다. 그러나 그의 피로는 신체의 모든 기력과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마저 앗아가는 실로 끔찍한 증상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늘 달고 사는 통증도 티가 별로 안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어로 햄릿의 생각과 리어의 비극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오한과 두통을 표현할 수는 없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참이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타인에게 위로를 기대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19세기 수필가 앨리스 제임스도 오로크처럼 모호한 병을 평생 앓았다. 분명한 신체 증상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히스테리 진단을 내렸고, 제임스는 병이 자기 (마음) 탓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서 마침내 유방암 진단을 받은 그는 무척 기뻐했다. “기다리는 자에겐 반드시 때가 온다! (…) 건강이 나빠진 이래 누가 봐도 확실한 질병에 걸리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1년 뒤 제임스는 세상을 떠났다.
특히 여성의 질병은 심리적 문제라는 식의 편견은 역사가 길다. 대표적인 것이 19세기의 히스테리다. 오늘날에도 여성이 원인 모를 병을 앓으면 ‘건강염려증’으로 의심받거나 ‘신체형 장애’로 분류된다. 저자가 인터뷰한 수많은 여성이 의사로부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우울한 겁니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태도는 병의 실체를 가리고 병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핑계가 될 뿐만 아니라, 병의 책임을 오롯이 환자에게 지운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오로크가 만난 환자들 중에는 병에 걸린 것이 자기 탓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자가면역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병이라는 은유로 인해 더욱 이런 생각을 부추긴다. 아픈 사람은 잘못된 인생을 살아서 스트레스로 지치고 불행해진 만큼, 그 인생을 고치는 일 또한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병은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아 개선할 기회로 여겨지며,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문화 또한 병의 극복이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식의 사고에 일조한다.
그러나 질병을 병원체와 개인의 면역계와 환경 간의 복합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최근 의학계의 관점에 따르자면, 자가면역은 현대 사회의 화학물질과 바이러스, 트라우마, 오염이 축적된 먹이사슬을 표현하는 사건이다. 오염된 지역에 살거나, 안전하고 신선한 식품을 섭취하기 어렵거나, 사회적 차별을 겪는 등 만성적 스트레스 요인에 시달릴수록 신체는 질병에 취약해진다. 그렇다면 몸이 아픈 것은 단순히 자기 몸과 마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실패다. “개인의 면역계는 무엇보다도 그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함 있는 사회의 시민으로 산 역사를 반영한다.”
산다는 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환자로서 오로크의 인생은 시인 존 키츠의 편지 한 편을 다시 읽은 날부터 달라졌다. 이 편지를 쓸 당시 키츠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의 폐결핵은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병이었다. 형제 톰이 곧 어머니의 뒤를 이었고, 나중에 키츠 본인도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이 병으로 죽게 된다. 그는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실과 이성을 성마르게 따르지 않고 불확실성, 신비, 의심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에 대해 썼다.
오로크는 키츠의 소극적 수용력을 고통 속에서도 잘 살아가기 위한 비결로 받아들였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언제나 단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원한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 대부분은 쉽게 답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애써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도처에 있다. 만성질환자는 안다. 산다는 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갖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절, 오로크는 모든 희망을 잃고 그간 써 온 원고들을 지울 결심까지 한다. 그러다 아주 사소한 일을 계기로 불현듯 삶을 향한 갈망이 다시금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구해야 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병과 함께 계속 살아갈 의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실로 이 책은 병을 없애거나 무찌르는 대신 병과 함께 사는 이야기다. 저자 스스로 질병 탐정이 되어 자신을 아프게 한 범인을 밝혀내고 건강을 되찾으려던 애초의 목표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방향을 튼다. 이후 오로크는 새로운 진단과 치료를 받고 극적으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깔끔한 ‘회복’이나 ‘극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오로크는 만성질환자에게 ‘치유’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정의하는 건강은 질병이 없는 것을 넘어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한 상태”다. 그렇게 보면 치유는 병이 꼭 낫지는 않더라도 환자가 어느 정도 온전한 상태로 자기 몸을 관리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때 환자에게 온전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스테로이드나 항생제만이 아니다. 아픈 사람은 타인과의 접촉과 대화, 이해와 공감으로도 낫는다. 원인 불명의 병을 앓는 긴 시간 동안, 저자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아픈 신체는 그러한 인간의 특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는 것을 깊이 이해했다. 존 던의 시처럼, “누구도 섬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