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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 왕의 거절과 아론의 죽음
민 20:14-29
14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15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우리가 애굽에 오래 거주하였더니 애굽인이 우리 조상들과 우리를 학대하였으므로
16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에 있사오니
17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우리가 큰길로만 지나가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낼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지나갈 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하나
20 그는 이르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
21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22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르시되
24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25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29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더라
민 20:14-29 / [에돔 사람이 돌아가라고 하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심부름꾼들을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당신과 한 피붙이인 이스라엘의 후손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어렵게 지내 왔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15) 옛적에 우리 조상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심하게 짓눌렀습니다. 16) 견디다 못하여 우리가 여호와께 울부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우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우리는 지금 이곳 당신 나라의 경계에 있는 가데스에 와 있습니다. 17) 부탁이니 우리가 에돔 땅을 지나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농사 짓는 밭이나 포도원을 밟고 가지는 않겠습니다. 우물물도 함부로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에돔 땅을 다 지나갈 때까지 함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고 큰길만 따라 지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전하였지만 18) 에돔 왕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당신들은 우리 나라를 가로질러 지나가지 못하오! 우리 나라를 통과하려 하였다가는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나는 당신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소.' 19) `우리는 다만 큰길로만 지나가겠습니다. 부탁이니 당신네 나라를 지나가게만 해주십시오. 만일 우리와 또 우리 가축 떼가 당신네 나라 우물물을 마실 경우에는 물값을 내겠습니다. 그러니 지나가게만 해주십시오'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간청하였다. 20) 그러나 에돔 왕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의 군대를 이끌고 나와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막았다. 21) 에돔 왕이 이렇게 자기네 나라를 지나가지 못하게 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는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22) [아론이 죽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가데스를 떠나 호르산에 이르렀다. 23) 에돔 땅 변두리에 있는 호르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론은 이제 세상을 떠나 조상이 누운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아론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므리바 샘에서 내 말을 어긴 까닭이다. 25) 너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으로 올라가 26) 아론이 입고 있는 제사장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혀라. 아론은 거기서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27)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보고 있는 가운데 호르산으로 올라갔다. 28) 모세는 산 위에서 아론이 입고 있는 제사장 옷을 벗겨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다. 아론은 호르산 꼭대기에서 숨을 거두었다. 모세와 엘르아살은 산 위에서 내려왔다. 29) 온 공동체는 아론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30일 동안 슬퍼하였다.
본문은 아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던 이야기는 지도자들의 불순종과 죽음으로 요약됩니다.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14-21) 오늘의 본문은 가나안 입경을 앞둔 이스라엘이 가장 빠른 길 에돔의 지경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되는 내용입니다. 왕의 대로를 통과하게만 해주면 에돔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며 마시는 물값을 내겠다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그라나 에돔은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출애굽기 15장 15절을 보면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주민이 다 낙담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이들은 두려워했고 경쟁 관계라서 질투했습니다. 모세는 조상 때부터 형제의 나라이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어서 그 지경을 우회해서 돌아갔습니다.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22-24) 이스라엘은 가데스를 떠나 호르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마 에돔 땅 변경인 듯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이제 세상을 떠나 조상이 누운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직 아론이 생존했었던 것은 그의 직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리바 샘가의 하나님 말씀 거역 사건은 그의 생애를 스스로 마무리 짓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백성들의 시선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하는 분노의 행동을 자아냈고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낸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25-29) 모세는 아론에게서 대제사장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습니다. 죽은 자가 입었던 옷은 부정하기 때문에 아직 아론이 죽기 전에 먼저 대제사장의 옷을 아들 엘르아살에게 넘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제 아론은 대제사장직을 벗고 아들 엘르아살에게 그 직임이 이양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은 대제사장답게 호르산 꼭대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때 아론의 나이가 123세(33:39)였으며, 모세는 120세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아론의 죽음을 위해 존경과 슬픔의 표시로 30일 동안이나 애곡했습니다.
적용: 수십 년 혹은 한 평생 희망 없는 짓을 하는 곁의 사람들에 대하여 므리바 사건의 모세 같은 실수를 드러낸 적은 없습니까? 당신은 여기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자비하심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누군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내가 그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거절을 하고 살았으니, 나처럼 거절하며 살아가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실수를 참아 주셨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결점과 실수에도 자신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허락하셨다면 그와 동일한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 설 교 >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5)아버지의 유산
민 20:22-29 / 이동원 목사
지난 5월 8일 어버이 날에 이어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날의 유래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선 이 날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시작된 날이라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의 한 감리교회에서 25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던 앤나 잘비스(anna jarvis)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11명의 형제중 9번째였던 그녀의 나이 4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무덤에서 그녀는 자신을 낳고 키운 어머니의 고마운 사랑을 정기적으로 기념하는 날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것은 그녀의 나이 12살에 자신처럼 주일 학교 교사였던 자기 어머니가 어느 주일 ‘성경의 어머니들’이란 공과를 마치면서 “주님, 언젠가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 어머니 날을 지키게 하소서”라는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해낸 까닭이었다고 합니다. 앤나는 어머니 무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이 반드시 어머니 날을 갖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섬기던 앤드루 감리교회에서 1907년 5월 12일 주일 예배에 참석한 약 500여명의 교우들에게 손수 준비한 흰색 카네이숀 500송이를 나누어 주고 어머니 기억하기 ‘어머니 날’ 캠패인을 시작합니다. 다음 해인 1908년 이 캠페인에 유명한 그리스도인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가 동참하여 버지니아 앤드루 감리교회와 필라델피아 백화점 강당에서 어머니 날 캠패인이 동시에 이어집니다. 다시 6년 후인 1914년 헌신적 그리스도인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손(woodrow wilson)의 사인으로 어머니 날이 국가적인 날로 탄생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잘비스 여사는 자기 생애 마지막 20여년을 어머니 날을 상업화하려는 사회 풍조에 대항하여 진정하고도 순수한 날로 이 날이 회복되기 위한 싸움에 다시 헌신합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대신 편지를 쓰자고, 가게에서 카네이숀을 사지 말고 우리가 손수 카네이숀을 만들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자는 등의 캠패인을 말입니다. 물론 그녀의 그런 노력은 상업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으로 우리는 오늘 날 어버이 날, 어버이 주일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처음 어머니 날이 제정되고, 1973년 대통령령으로 어버이 날로 변경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앤나 잘비스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어머니 날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오늘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데스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호르 산(에돔의 변경-출애굽 지도)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아론의 죽음 사건이 발생합니다. 전통적으로 호르산은 지금의 요르단의 최대 관광지인 페트라의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어버이 주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아론’의 죽음이 남긴 레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만 생각하겠습니다.
1. 삶은 누구에게나 공과를 남긴다는 레슨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인물 평가는 늘 흑백 논리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도 완벽하게 결함이 없는 삶을 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의 삶의 장에서도 한 두 가지 결함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한 두가지 소위 결함의 흔적 때문에 그의 삶의 가치 자체를 온통 부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인생의 우상화도 허용하지 않습니다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허물로 인한 그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는 일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어떤 믿음의 사람도 흠이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과오나 허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을 여전히 믿음의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해서 장미의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영어의 ‘beautiful’이란 단어에는 ‘티’(t)가 들어가 있다고 조크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아론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의 리더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은 므리바의 거역 사건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안타깝게 기술합니다. 24절입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성경은 그의 거역을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시내산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이나 미리암의 모세의 아내 시기 사건등의 책임에서도 아론은 자유로운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론의 거역을 고발하는 것만이 본문 기록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29절을 읽어 보십시오.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일 동안 애곡 하였더라” ‘30일간의 애곡’은 한 지도자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의 경의의 표현이었다고 성경학자들은 증언합니다. 아론에게 약점이나 허물이 있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그의 기여를 함께 망각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 곁에서 제2인자로 모세의 대언자로 말없이 백성을 리드했던 아론의 소중한 기여를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은 철저하게 평화 지향적 지도자이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조부 라반 힐렐(hillel)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론과 같이 되십시오. 그는 화평을 사랑하고 화평을 추구하며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아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부모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인간이기에 결코 완전할 수 없었던 우리의 부모님들도 아론처럼 공과가 함께 공존하는 삶의 유산을 남긴 분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부모의 어떤 허물 때문에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그 지극한 헌신까지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식된 우리도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부모를 원망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들 부모님들의 인생의 비틀거림이 많은 경우 우리들 자식들 치닥거리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안다면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부모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최근 인터넷 서핑중에 발견한 어떤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 보낸 인터넷 편지를 읽고 정말이지 유쾌한 웃음을 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단만 읽어 보겠습니다. “가빈아, 저번에 니가 노래를 불러 주었잖냐?-아빠, 힘내세요, 가빈이가 있잖아요-라고. 이 노래 제목이 ‘아빠, 힘 내세요’라고 하더라. 근데 가빈아, 아빠가 진짜 힘든 게 뭔지 아니? 진짜로 힘든 건 바로 너 때문이다. 우선 한 달 놀이방비가 25만원이라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니? 6개월로 계산해 보자. 순순히 놀이방비만 해도 150만원이더구나. 거기다가 간식비, 견학비, 책값, 니가 대학생이니? 아빠는 요즈음 미치지 않을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그러니 가빈아, 앞으로 아빠 앞에서는 그런 노래하지 말라. 니가 노래 부르면 무슨 돈 벌어오라는 주술 소리로만 들린단다.” 거창한 부모님 효도를 들먹이지 않아도 저는 이 시대의 자녀들이 부모님 입장을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의 가정의 분위기는 매우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론의 레슨-삶은 누구에게나 공과를 함께 남긴다는 레슨입니다.
2. 선배의 사역은 계승되어야 한다는 레슨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큰 그림으로 본 다면 우리의 인생의 선배들이십니다. 그들은 결코 완전했던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치열한 삶의 소명은 후배들인 우리 자녀들에게 계승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부모가 하시던 일을 그대로 자녀가 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목적에는 큰 그림으로 ‘역사의 계승’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대로 모든 것을 중단하지 않으신 이유-그 자손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생육하라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가 죽고 자손이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은 매우 엄숙한 바톤 터치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비판하던 그 부모의 자리에 서서 우리가 다음 세대의 비판을 받아가며 역사의 임무를 수행해야한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류는 한 사람의 죽음을 그냥 사건이 아닌 장례 곧 의식으로 치루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죽음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론이 죽기전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아론이 그 아들을 데리고 호르산에 함께 설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26절을 보십시오.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그 명령이 수행되는 2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얼마나 엄숙한 임무 교대의 순간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으로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는 공동체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의 이름이 엘르아살이었던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엘르아살,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새로운 리더가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인 후배는 부모인 선배를 계승하여 선배가 다하지 못한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을 완성하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생각하는 이 계절 부모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부모님의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통해 내게 계승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 날 단순한 효도를 결심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의미있는 물음이 아니겠습니까?
작년(2007년)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시각 장애인 송 경태씨(47세,시각 장애인 도서관장)가 아들 원씨(21세)와 함께 해발 3,000-4,000m의 고지에 위치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 코스를 6박 7일간 완주한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서 송 관장은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에 이어 세계 3대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송 관장에게 산소가 희박한 그 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준한 그 코스를 달리며 포기의 유혹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왜 없었겠어요, 너무 여러번 있었지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아들 때문이지요.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하게 될 까봐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이 마라톤에 참여한 아들의 고백도 유사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눈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회 4일째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달리시는데하며 달렸지요”라고 말했습니다. 250km의 결승지점을 통과하고 포옹을 한 부자는 오래 포옹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아들은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이렇게 크고 시원한 것을 평소엔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막에서 아버지와 함께 달린 7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 부자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도 인생의 사막을 달리는 수많은 부모들이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달리는 이유-자식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 자식들 중에도 이젠 부모들의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될 자녀들도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르 산에서 죽는 아론의 마지막 소감이 궁금해집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입고 있던 제사장의 옷을 입은 아들 엘르아살을 보는 순간 그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고백했을 것으로,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을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꼭 약속의 땅을 밟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르아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들 엘르아살이 그 땅을 밟을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감사함으로 하늘 아버지께로 가겠습니다. 제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아-멘”
아버지의 옷을 입은 자
민 20:23 / 이성희 목사
토정 이지함(1516-1578)선생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조선시대의 선비입니다. 그가 충남 아산(牙山) 현감 시절에 아산 현감관아 앞에 ‘걸인청’을 세웠습니다. 당시의 관리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토정 선생은 이 땅에 가난한 자 없어야 한다고하여 걸인청을 세웠습니다. 아직도 아산에는 그 건물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가 초례(醮禮, 전통혼례)를 치른 다음날 비단도포를 입고 외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올 때는 옷을 입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가족이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가 홍제원 다리를 지나가다 거지들이 추워 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새 비단도포를 벗어서 세 조각으로 나누어 걸인들에게 입혀 주고 왔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자신의 옷을 벗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다 주는 것입니다.
옛날 양반에게 옷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굶더라도 의관(衣冠)은 절대 흩트리지 않는 것이 양반의 예의입니다. 외출 때가 아니라 방안에서도 의관은 잘 정제하고 있는 것이 양반입니다. 그런데 양반이 도포를 잘라서 다 주고 벗은 채로 온다는 것은 양반의 체모를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의식주는 생존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 의(衣)가 가장 중요합니다. 옷은 아무렇게나 입지 않고,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옷을 받아 입었다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무개의 옷을 받아 입었다는 것은 그 분의 뜻을 전수함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 옷을 주더라도 아무 옷이나 주지 않습니다. 누구의 옷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아무의 옷을 받아 입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40에는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합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합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많은 것들을 제쳐두고 왜 옷을 예로 들었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옷이 그만큼 중요한 삶의 도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준다는 것은 더 중요하고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옷을 벗어 주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선물입니다. 자신의 힘과 혼과 정을 다 준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서경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친구 관계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고 왕위계승자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8:4에는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고 합니다. 극진한 사랑을 겉옷을 벗어주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마지막 작별을 합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스승을 따라가면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요단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전 엘리야는 겉옷을 엘리사에게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엘리사는 물을 치고 요단을 가르고 요단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한 후에 호르산에 왔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론은 그 조상에게 돌아가고”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아론, 너는 죽어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 엘르아셀을 데리고 호른 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고 하십니다. 아론이 죽을 때가 되자 하나님은 아버지의 옷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입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옷을 입은 엘르아살입니다. 아버지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버지의 옷을 입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육적 가정을 계승합니다.
26절에는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고 합니다. 아론의 옷이란 대제사장의 옷입니다. 옷을 직무를 의미하는데 대제사장의 옷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말합니다. 출애급기 28장에는 대제사장들의 거룩한 봉사를 위하여 반드시 이 복장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 옷을 벗겨 입힌다는 것은 대제사장직을 전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직무를 전수하는 것은 육적으로 아버지를 계승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업무를 아들에게 전수하기를 원합니다. 육적으로 부모님을 계승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이름이 제일 많이 나오는 책입니다. 약 35,000명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름에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버지라는 표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목수 일을 순종하여 하였습니다. 십자가상에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만큼 육적 부모의 중요성을 깨우치셨습니다.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을 물려받았습니다. 바울도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가정의 전통을 잘 이어받았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 부모의 이름, 아들의 이름 그리고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적 부모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61에는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고 합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다른 불을 드리다가 큰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행하게도 큰 아들들이 아버지를 계승하지 못하였습니다.
멀리 볼 것 없이 아담의 큰 아들인 가인도 가업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계보를 잇지 못했습니다. 아담의 계보는 셈의 계보로 가문이 계승됩니다.
사사 기드온의 집도 그랬습니다. 첩의 소생인 아비멜렉이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막내 동생 요담이 피신하여 살아남아 백성들에게 나무왕의 비유를 말한 내용이 성경에 있습니다. 아무리 장자이지만 집안을 계승하지 못한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도 그 아들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무당과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것을 보시고 그 왕위를 빼앗아 다윗에게 돌리셨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왕이 많습니다. 모든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육적으로도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하는 것은 그렇게 흔한, 누구나 다 하는 일은 아닙니다. 육적으로 아버지를 계승하는 일은 중요하고, 명예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아버지를 계승하려고 하지만 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조선왕조의 임금을 보세요.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를 내려오면서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었지만 그러나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왕은 세종 비롯한 아홉 왕밖에 없습니다. 적장자라면 누구나 다 왕위를 바랄 것이고, 부왕도 적장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려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왕이 아들 세자를 죽인 경우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영조는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죽였습니다. 영조는 아들이 아닌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가 정조입니다.
이름난 정치, 경제계의 인물 가운데도 장자가 아버지의 업을 육적으로 계승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인 재벌총수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가업을 장자라 잇지 못하고 지금 장자와 현 재벌총수가 부끄러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육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헝거리 부다페스트에 성 스테파누스 성당이란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단 중앙에는 스테파누스 왕의 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고 사람의 상이 있는 사람 중심의 교회입니다. 스테파누스 왕은 자신의 아들이 죽자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려고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이런 포악한 왕이지만 교황에게 돈을 주고 성자 칭호를 샀습니다. 자신이 폐위된 다음에 기독교가 몰락할까봐 그렇게 하여 교회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상을 세웠답니다.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아버지에게 다 있습니다. 못된 왕이지만 기독교의 몰락은 원치 않았다니 기특합니다.
옷은 우리의 성품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그분의 옷처럼 솔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통옷으로 이어 붙인 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통일과 연합하여 나누인 데가 없이 온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천국에서 지상까지 통으로 짠 솔기가 없는 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어받은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옷을 온전히 이어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를 이어받아 이 땅에 오셔서 솔기 없는 삶을 사신 주님처럼 육적으로 우리 부모님을 잘 계승하고 이어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육적으로 잘 계승하여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영적 사명을 계승합니다.
28절에는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라고 합니다. 출애굽할 때 아론의 나이가 83세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 123세였습니다. 출애굽 40년 5월1일에 아론이 세상을 떠났습니다(출 33:38).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 동안 아론은 대제사장 역할을 하였는데 이제 사명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할 때 80세였고, 세상을 떠날 때 120세였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의 지도자로 사명을 마치고 죽은 다음 여호수아에게 임무를 인계한 것처럼 아론도 40년 동안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이제 아들에게 그 임무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대제사장 아론은 그 임무를 마치고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아론의 일시적인 대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직과 대조가 됩니다. 아론의 대제사장직은 그 아들 엘르아셀이 계승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대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하게 계승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에봇에 대한 말씀이 아주 엄격하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이 옷을 지어 대제사장 아론에게 입혔습니다. 에봇은 화려한 예복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우림과 둠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정확한 뜻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빛’과 ‘완전’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합니다. 대제사장직은 빛이며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직은 이렇게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직을 계승하는 것도 아주 고귀한 일입니다.
엘르아셀의 두 형인 나답과 아비후는 대제사장직을 계승해야 하지만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이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제단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온전한 영이 아닌 잡된 영으로 예배한 것입니다. 두 형이 죽고 동생인 엘르아셀이 아버지의 영적 사명을 계승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영적 사명을 계승하는 것은 영광이며 보람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을 계승하는 것은 바른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부모의 신앙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더 좋은 일꾼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의 믿음을 잘 못 계승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 배반하고 믿음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적 가업을 이어받은 것은 크나큰 영광이고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저의 형제 가운데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삼형제 가운데 제 아우가 늦게 목사가 되어 이제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형님은 교회 일이 최우선인 정말 좋은 장로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사의 직은 제가 이어받았습니다. 제가 목사로 안수 받을 때 저의 선친께서 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 때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유품 몇 가지를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책이나 다른 유품들은 다 대구제일교회와 영남신학대학교에 다 기증했는데 이 것만은 제가 가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평생 쓰신 설교노트와 가방 하나와 잠옷 하나입니다. 아버지 양복은 제 몸에 맞지 않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잠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도 그 잠옷을 가지고 있는데 입을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새롭습니다. 아버지의 영적 사명을 계승하는 것은 아버지에게나 나에게나 좋은 일이고 영광된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3:5에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합니다. 흰옷은 누구의 옷입니까? 예수님의 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흰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흰 옷을 입은 천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과거의 후손은 바로 우리입니다. 또한 우리는 미래의 부모입니다. 전대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일을 이어받은 후계자이며, 후원자입니다. 우리가 씨 뿌리지 않는 숲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전대를 계승하고, 후대에게 계승해주는 그 존재의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계승을 잘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사야 22:21에는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옷을 입고 부모의 육적 영적 가업을 계승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자녀들은 참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국수집을 몇 대가 계승한 가문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하시던 가업을 자랑스럽게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얼마 전 5대가 목사가 되어 목회의 가업을 이어온 가정이 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전 학장이신 박창환목사님의 손자가 목사가 되어 5대가 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대대로 신앙의 가업을 이어오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육적인 가업을 잘 계승하면서 영적인 가업 계승하기를 소홀하게 생각하고,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육적인 가업의 계승보다 영적인 가업의 계승이 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5:6에는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명령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잘 따르고 부모를 잘 계승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옷을 잘 받아 입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한국전쟁이 한참인 어느 추운 겨울 날, 만삭인 어머니가 아기를 낳으러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진통이 시작되어 아기 낳을 곳을 찾다가 다리 밑에 자리를 펴고 혼자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기가 추울까봐 어머니는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기에게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산후 고통과 추위에 죽었습니다. 어느 미군 장교가 다리 위를 지나다가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부대에 연락한 후 주위를 서성대고 있는데 어디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미군은 다리 밑을 내려가 보니 어머니는 죽었고 아기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미군은 아기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아기가 자라 자기의 뿌리가 궁금하였습니다. 미군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마음에 품고 한국에 와서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아들은 자기 옷을 벗어 어머니 무덤에 덮어주며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옷을 벗어 무덤에 덮어주었다는 것은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옷을 벗어주는 것은 극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옷을 벗어 아들에게 주고, 아들이 아버지의 옷을 입는 것은 사랑 이상의 소명을 의미합니다. 옷을 벗어 준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옷을 받아 입는다는 것은 사랑으로 아버지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며, 존경이며, 계승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27:16에는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멘"으로 이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부모의 가업을 기쁨을 계승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옷을 받아 육적으로 가정을 계승하고, 영적으로 제사장의 직을 계승한 엘르아셀을 본받는 우리 모든 자녀,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로운 역사의 태동
민 20:14-29
광야 40년의 세월이 지나며 출애굽을 경험한 세대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한 세대가 저무는 장면은 한편 쓸쓸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다.
에돔의 국경을 돌아가다(14-21절)
이제 때가 되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다. 이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에돔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였다. 왕의 대로란 다메색과 애굽을 연결하는 길로,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교역의 통로였다.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의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17절)
본문이 기록한 모세의 요청은 당시의 일반적인 외교문서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먼저 수신자를 언급하고, 요청한다는 문구가 등장하며(Thus Says), 자신이 처한 형편을 서술하고, 마지막에 요청 내용을 밝힌다. 모세는 당시의 관례를 따라 정중히 제안하였다. 그러나 에돔 왕은 무력시위까지 서슴지 않고 모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21절)
본문의 강조점은 에돔을 대하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자세에 있다. 이제 때가 되어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공격하고 그들을 점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국으로(14절, 에서와 야곱의 형제 관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에돔의 땅은 조금도 허락하신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모세는 에돔 왕이 거절하자 방향을 바꾸어 에돔 국경을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아론의 죽음과 엘르아살의 취임(22-29절)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출발하여 호르 산에 이르자, 하나님은 아론을 대신하여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25-26절)
아론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백성이 30일 동안 애곡하였다. 이처럼 아론의 죽음은 모든 백성에게 큰 슬픔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셔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신다. 이후 민수기 27장에는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장면이 등장한다(민 27:12-23). 모세와 아론은 므리바에서 불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위해 그들을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엘르아살과 여호수아를 세워주신다.
나의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민수기 20:14-21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돌아본 열 명의 정탐꾼들은 약속의 땅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들의 말을 들은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불만은 토로하게 됩니다. 그 동안 힘들게 광야 길을 통과해 오며 쌓아온 극도의 스트레스와 전쟁을 앞두고 있던 긴장감이 한 번에 폭발한 것이죠. 모세를 비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이라도 모세에게 돌을 던질 듯한 기세로 덤벼 들었고, 모세의 리더십을 인정 할 수 없었던 레위 지파 사람 고라는 250명의 족장들과 연합하여 반역 세력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물으시고 출애굽 1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긴 세월 동안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죽어 갔습니다. 아직 출애굽 1세대가 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만, 민수기 20장은 이제 그들의 자녀들인 출애굽 2세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갑니다. 현재 신 광야의 ‘가데스’란 곳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방법은 이 당시 ‘왕의 길’ (‘King’s Way’) 이라고 불리는 큰 길을 통해 북쪽으로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비유하여 말하자면, ‘왕의 길’이란 오늘날 길이 잘 닦여 있고 뚫린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이 길로 가면 곧장 가나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광야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합니다. 길도 험하고 사나운 짐승이 도사리고 있어 위험 합니다. 지금 긴 광야 생활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노약자와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능하면 이 왕의 길을 통해 가나안을 올라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왕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에돔 땅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 합니다. 17절 말씀이 바로 모세가 에돔 왕에게 부탁한 내용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민 20:17)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 하라 하였더니” 여기 17절 중간에 ‘왕의 대로’라는 표현 보이십니까? 이 길이 바로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편안하고 빠른 길 King’s way 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에돔 왕이 에돔 땅을 지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에돔 땅을 통과하며 절대로 밭이나 포도원을 지나지 않고, 곡식 몰래 훔쳐 먹지 않고, 우물에서 나오는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통과할 터이니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 했습니다.
에돔이 어떤 나라입니까? 야곱의 형 에서로부터 시작된 나라 입니다. 이스라엘은 에서의 동생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나라 입니다. 한 형제인 에서와 야곱으로부터 각각 시작된 에돔과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로는 서로 형제 국가인 셈이죠. 그래서 14절을 보면 모세가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며 이스라엘을 소개할 때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죠. 게다가 이 당시 ‘형제’라는 말은 동맹국 간에 서로 부르는 호칭으로 모세는 에돔과의 친분을 표현한 것이죠. 그러나 에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에돔 왕은 모세의 요청을 단 번에 거절 했습니다. 18절 말씀 보세오. “(민 20: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못하리라 내가 나가서 칼로 너를 맞을까 염려하라 “ 에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길에 발을 들여 놓으려 하면 칼을 들고 나가 대적할 것이라고 협박하 듯 말했습니다.
모세는 난감했습니다. 이대로 왕의 길을 걷지 않으면 그들이 광야 길에서 겪게 될 어려움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모세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에돔 왕에게 왕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 합니다. 19절 입니다. (민 20:19)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우리가 대로로 통과하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줄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통과할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하나” 모세는 에돔 왕이 걱정하는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아까는 말로만 안된다고 하던 에돔 왕이 직접 칼과 창으로 무장된 군사들을 거느리고 국경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대로로 가는 것을 막아 버렸습니다. 에돔 왕의 의지는 완고 했습니다.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의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대로 이 두 나라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형제 국가 중 하나는 반드시 멸망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자기의 영토를 지나가다가 마음이 변하면 나라 전체가 큰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보면 길 하나 사용하게 못하는 에돔 사람들이 너무나도 밉고, 화도 났습니다. 왕의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큰 광야의 고난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욱하는 마음에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에돔 왕이 많은 군대를 무장시켜 놓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지만, 수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보다 월등히 우세 합니다. 양쪽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인 거죠. 그러나 성경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수적으로 우세한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우위에 있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어떻게 했습니까?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21절 보세요. “(민 20:21)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의 그 경내로 통과함을 용납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과 싸우지 아니하고, 그 땅을 우회하여 광야 길로 돌아갔습니다. 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요? 어차피 숫자도 유리한 데 에돔과 싸워 승리한 후, 왕의 길 가는 것이 더 여러모로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에돔과 싸우지 아니하고 우회하여 고생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서를 보면 그 이유가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후예들에게 주신 기업을 건들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에돔 사람은 결국 이스라엘의 형제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한 왕의 길을 놔두고 험한 고통과 어려움이 따르는 광야 길로 우회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 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계획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 길로 다시 들어 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계획한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계획은 실패하고, 기대는 처참히 깨지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 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한 때는 원대했던 인생의 꿈이 산산조각 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진짜 모습 입니다. 출애굽 1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모세의 경우 왕의 길을 가려는 계획이 실패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좀처럼 내가 맘 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들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우회하는 길, 돌아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라가야 합니다. 비록 험한 길, 위험한 길, 피곤한 길,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이라 하더라도 주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야 합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길을 가지 않고 우회해 가면 많은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미 지칠 때로 지쳐버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다시 광야 길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돔과 싸우지 말고 다시 광야로 돌아가 우회해서 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 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갔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내가 계획한 대로만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세상이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삶은 내가 계획한 것 보다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여전히 우리 삶을 신실하게 인도해 가고 계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자세를 삶의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이나 방법으로 세상을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늘 기도와 말씀을 통해 묵상하고, 분별하며 그 인도하심에 다라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우리의 계획대로 펼쳐지지 않을 지라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삶이 될 것입니다. 남은 평생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善)을 너무나 무서워하는 인간들
민 20:14-21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제안
미국 사람들은 운동경기나 축제에 참여하거나 구경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큰 행사가 있으면 차가 한꺼번에 많이 몰려서 주차 장소가 모자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럼 근처 가정집들이 앞마당을 대당 얼마씩 받고 주차하도록 제공합니다. 집 주인은 돈을 벌고 손님은 행사장과 가까운 곳에 주차해서 서로 좋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꼴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가나안 입경을 앞둔 이스라엘이 에돔의 지경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거절되는 내용입니다. 왕의 대로를 통과하게만 해주면 에돔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며 마시는 물 값을 내겠다는 제안까지 했습니다.(19절)
에돔으로선 손해 볼 것 하나 없고 이스라엘에 물이나 음식을 팔아서 한 몫 잡을 수도 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나아가 에돔 왕은 무력으로라도 막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스라엘로선 큰 굴욕을 당한 셈인데 맞대응은커녕 일절 비난 항변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섰습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비상식적인 결말입니다.
모세가“당신의 형제 이스라엘”(14절)이라고 했듯이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 먼저 나온 장남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의 별칭이자 그 후손들을 뜻합니다. 모세는 아주 손 쉽고도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도움을 청했으나 형제 에돔은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모세는 형제의 나라이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어서 그 지경을 우회해서 돌아갔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장막을 치고 있는 곳은 16절 말씀대로 가데스입니다. 그곳에서 곧바로 가나안 땅을 향해 북진하려면 험한 산들이 막고 있습니다. 사십여 년 전에 열두 정탐꾼들도 “산지로 올라가”(민13:17) 탐지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로선 광야 행군에 지친 백성들로 이왕이면 평지를 여행하게 하고 또 가데스에서 바로 북진하면 처참히 실패했던 이전의 기억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도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돔을 통과하면 모압과 암몬 족속을 만나는데 당시 에돔과 서로 경쟁하며 다투는 관계였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을 순순히 통과시켜주면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을 에돔의 동맹으로 보고 대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에돔은 자기들은 가만히 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들 대적들을 제압하거나 힘을 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모세의 제안은 형제 나라끼리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낳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에돔 왕은 너무나 확고하게 거절했습니다. 에돔은 왜 이런 좋은 제안을 거절했을까요?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는 또 왜 순순히 그대로 따라주었을까요?
돈보다 더 좋은 것
에돔의 선조 에서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려는 동생 야곱에게서 재물을 받고서 지난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사실은 재물을 받기도 전에 야곱이 일곱 번 허리 굽혀 절하며 형에게 나아오자 에서가 먼저 달려와서 피차 안고 울면서 용서해주었습니다.(창33:4)
야곱이 준비한 재물도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고 사양했으나 야곱이 강권하자(창33:11) 받고는 자기들이 살던 땅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말하자면 부친 이삭과 자기를 속여서 차지한 야곱의 장자권 즉,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권리를 인정하고 더 이상 미련을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야곱의 후손과 에서의 후손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모세도 선조 야곱처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고 전혀 손해 보지 않게끔 모든 비용은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정중히 제안했습니다. 어쨌든 형제 나라이고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선조대의 사건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대 동양에선 부계사회로 아버지의 말은 바로 법이었습니다. 이삭이 눈도 어두워지고 판단력도 흐려져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갔지만 일단 그가 내뱉은 말대로 장자권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조 에서가 야곱과 화해했으면 그 후손들도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실제로 에돔이 당장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는 뿌리 깊은 원한과 저주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돈을 주겠다는데도 에돔 왕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기대 밖이었습니다.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8절) 통과조차 하지 말라고 했으니 우리는 이대로 여기 살 테니 귀찮게 하지 말고 가만히 그냥 두라고만 말한 셈입니다. 너희와 우리는 아예 상종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정치적으로 당장에 이득도 생기고 또 이백만 이스라엘을 형제 국가로 친교를 맺어두면 언젠가 자기들 위험할 때에 동맹이나 도움을 청할 수 있는데도 상대하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단지 통과만 하는 것이 돈을 억만금을 갖다 주는 것보다 싫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인 실리도 포기할만한 더 큰 이유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답이 있다.
지난주에 성경상의 의문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기 15:15를 보십시오.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애굽 후에 홍해가 갈라지며 마른 땅을 건넌 이스라엘이 찬양 감사 축제를 하면서 여호와께 올린 찬양입니다. 에돔 방백이 크게 놀라 떨며 낙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까닭을 앞 1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애굽에서 행한 열 가지 기적과 바다를 가른 여호와와 비교될 신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을 상대로 그들에게 사백 년간 노예로 있던 히브리 민족이 군대와 무기 하나 없이 열 번 싸워 열 번을 무참하게 패배시켰습니다. 그것도 지팡이에 의지하는 80살 노인이 그들 신의 말씀을 대변만 했는데도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애굽이 자랑하던 우상 신들은 물론 최정예 전차군단도 찍소리 한 번 못해보고 완벽하게 당했습니다. 인류 역사를 따져도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고대의 열방들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고 그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고대 전쟁은 각 민족 신들의 힘겨루기로 여겨졌기에 주변 열국들로선 이젠 이스라엘의 신에게 맞설 신은 없겠다고 크게 낙담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에돔 방백들도 포함된다고 이스라엘은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많은 이방 족속들도 함께 따라 나서서 광야 행군에도 계속 동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했어도 모래 밭같은 사막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로 만나와 반석의 생수만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산지와 들판을 통과하고 주변 이방 족속과 사소한 교류나 다툼이 있었고 광야를 오가는 상인들과도 자주 만났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과 먹을 것이 크게 부족한 광야에서 계속 방황하는 히브리 족속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소식이 인근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광야를 잘 아는 이방 족속들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기간 중에도 히브리신의 초자연적이고 엄청난 권능으로 보호 인도 간섭하셨다는 스토리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원래 소문은 전해질 때마다 과장되는 법이므로 주변 국가들로선 히브리 민족과 그 신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공통적인 인식과 두려움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소문으로 듣던 민족과 그 팔십 노인이 120살이 되었어도 정정한 모습으로 그 유명한 지팡이를 잡고서 지금 에돔 왕 앞에 서있습니다. 여러분이 에돔 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이 위대한 여호아 신을 우리 신으로 모시고 그분 앞에 항복해서 이스라엘이 맛보고 누렸던 그 엄청나 기적에 동참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만약 그 대답이 예스라면 참으로 순진하고 아직도 성경과 하나님과 특별히 인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자존심이 너무 상한 에돔 왕
에돔 왕이 이스라엘을 통과조차 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는 사실은 간단합니다. 에돔 백성들로 이스라엘 사람과 절대로 만나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사람과 대화라도 하게 되면 에돔 사람들이 뭔가 심적 혼란이나 동요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에 극력 막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먼저 물과 음식을 돈으로 사먹겠다는 것이 오히려 에돔 왕의 기분을, 정확히 말해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에돔 사람들 개인적으로는 히브리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구태여 없지만 민족적으로는 장자권을 야곱에게 사기당해 빼앗겼다는 과거 아픔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기꾼의 후손들이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다고 들었을 때는 죄지은 것에 대해 천벌을 받는 것이라고 당연하고 고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기적으로 애굽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당당하게 탈출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애굽의 금은보화를 다 챙겨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것으로 물을 사먹겠다고 합니다. 비용 걱정은 하지 말라 돈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고 있어야 마땅한 족속들이 자기들보다 우위에 서서 돈 자랑하는 것 같이 여겨졌을 것입니다. 저라도 꼴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레 시기 질투 분노가 치솟아 올랐을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이 인간관계에서 저지른 최초의 죄도 친형제끼리의 살인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자기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분풀이로 자기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지금도 육신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이 하나님의 영적인 장자가 된 야곱의 후손에게서 동일한 질투와 시기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선조 에서가 바보 같이 장자권만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도리어 큰 기적들을 누리고 또 지금 저 많은 보화도 우리가 차지하고 있을 텐데 너무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백 년간 노예로 고생했던 과거는 까마득 잊고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만 생각이 몰렸습니다. 거기다 이성적 판단은 뒷전이고 감정에 휘둘려버리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탐욕적인 에돔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만큼, 사실은 크게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지만, 절대로 선하거나 의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애굽은 당시 모든 군소 국가들을 식민지 삼아 착취 학대하고 있는 대적이자 원수나라였습니다. 그럼 형제 족속 이스라엘이 애굽을 이기고 보물을 빼앗아서 나왔다면 박수치며 축하해주고 함께 잔치를 벌려야 정상인데 반대의 행태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골리앗을 소년 다윗이 물리치자 사울 왕이 처음에는 축하해주었습니다. 곧바로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듣자마자 분노와 저주에 휩싸였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해 아주 큰 공을 세웠고 다윗이 사울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도 죽이려 들었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도 그랬습니다. 아니 두 번이나 살려 주었는데도 그 살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울이었습니다. 원죄로 타락한 우리 모두도 그 본성상 사실상 가인과 사울의 후예일 뿐입니다.
신들이 인간 세상을 신경질적으로 훼방한다고 믿는 것이 고대인들의 종교관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 에돔 왕으로선 혹시라도 여호와도 신경질적으로 자기 땅에서 큰 재앙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에돔 백성들이 오래 동안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의 행색은 보잘 것 없는데 사람마다 보물을 지니고 있어서 크게 부러워하여 시기 탐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큰 다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에돔 왕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현명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사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차라리 거지같은 행색으로 아무 가진 것 없고 정말로 구사일생으로 애굽을 탈출해왔더라면 에돔이 나서서 물과 음식을 제공하며 쉬었다 가라고 먼저 제안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청개구리처럼 남도 아닌 형제가 잘 되는 꼴은 축하는커녕 그냥 두고 보지도 못합니다.
에서가 사냥 갔다가 허기져서 순간적으로 팥죽에 눈이 어두워진 바람에 이스라엘과 모든 처한 상황이 역전되었으니 에돔으로선 더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돈보다 더 큰 다른 원인을 추적하다보니 결국은 돈 문제로 돌아왔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탐욕이 모든 죄악의 원인인 것입니다.
선한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인간들
반면에 모세의 제안은 당시로선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라와 나라끼리 또 민족과 민족끼리의 관계는 동맹 아니면 대적 둘 중 하나입니다. 에돔은 모세가 정말로 형제나라로 여긴다면 너희와 동맹을 맺고 모압과 암몬을 무찌르게끔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만약 동맹 맺기 싫으면 애굽을 패배시킨 우리의 신 여호와가 너희도 무참히 심판할 것이라고 전쟁을 선포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면서 고대 왕들이 처음으로 묻는 질문이 “전쟁이냐 평화냐?”이지 않습니까?
에돔 왕은 정말로 두려운 신과 그 백성이라고 크게 겁을 먹고서 두 가지 제안에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노심초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는 전혀 엉뚱한 제안을 해온 것입니다. 단순히 통과하게만 해주면 그 비용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합니다. 당시 어느 민족도 하지 않은 전례가 없는 아주 특이한 제안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미칠 파급력이 상상 외로 강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신은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사가 의롭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마지막 열 번 째 재앙을 빼고 아홉 번의 큰 기적을 일으켰으나 인명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고 순전히 애굽의 우상 신들만 패배시켰다는 점을 에돔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스라엘이 화평을 유지하고 비용도 넉넉히 지불하면서 자기 지경을 통과만 하면 에돔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출애굽 때에 많은 이방 족속들이 따라 나왔듯이 말입니다. 에돔 왕이 영적으로 분별력이 뛰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한 나라의 왕이 될 정도면 이런 정도의 정치적인 계산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과 사랑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미처 돌보지 않은, 사실은 종교적 굴레를 씌워서 그 사회에서 멸시 천대 축출시켰던 불쌍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주님은 치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주님께 열광하며 따르자 곧바로 주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했고 결국에는 이방인, 그것도 자기들을 식민지배하는 원수 로마의 손을 빌려서 죽였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한 줄 알고도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으로 그치기만 해도 아주 의로운 것입니다. 이상야릇하게도 선한 것을 아주 미워합니다. 훈계하는 가르침이 분명히 옳고 자기가 잘못한 것도 인정하면서도 그 훈계하는 자가 저절로 미워집니다. 선한 자를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는 자기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아주 잘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했던 민족인 유대인들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32)
당시의 어느 나라 왕과도 비교가 안 되는 모세의 너무나 의로운 모습과 제안이 에돔 왕으로선 너무나 못마땅하고 마음에 안 들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지금 장자권이 뒤바뀐 것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데 불난데 기름 부은 격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예수님을 처음 대면한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갈리리 바다의 전문어부인 그도 밤새도록 고기 하나 잡지 못했는데 주님이 깊은 곳에, 그로선 고기가 그 시간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장소에, 그물을 내리게 하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해주었는데도 오히려 주님더러 떠나길 간청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잘 사귀어 친해지면 벼락부자가 될 판인데도 떠나라고 했고, 나아가 죄인이라는 전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주님에게서 세상에 없는 엄청난 영적인 권능이 그대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 완전한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앞에 서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자신의 영적인 초라함 비참함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모든 인간은 완전한 선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게 여겨지고 그대로 따라서 실천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안 듭니다. 오히려 심한 죄책감과 공포심을 느낍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후에 그랬던 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원죄의 굴레 아래 태어난 자연인의 본성입니다.
고대의 모든 나라 모든 족속들은 성경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편적 차원에서 아주 종교적이고 영적입니다. 범사를 신들이 간섭 조종한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여호와라는 엄청난 권능을 가졌고 세상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한 신이 함께 통과할 것을 에돔 왕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비참한 존재라는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인간이 기본적인 선조차 모르고 행할 줄 몰라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는 거룩한 일도 행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촌이 논을 사면 처음에는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 분명히 생기지만 곧바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완전히 뒤덮어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그런 생각과 반응이 잘못인 줄 빤히 알면서도 살인까지 저지르기에 비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천지를 주관하는 살아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등진 상태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 공 같은 상태가 되어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 그래서 막상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적이 거의 없기에 비참한 것입니다. 자기 모든 것을 걸고 따라고 싶은 절대적인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 영혼이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살인한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고 그래서 그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사탄의 신경질에 따라서 농간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에돔 왕은 베드로와 동일한 반응을 모세에게 보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고백은 하지 않았어도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느꼈던 것처럼 모세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영적인 카리스마를 발견했고 그 제안이 너무 선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모세가 드러낸 여호와의 권능 앞에 오히려 시기 분노 저주의 감정에 휩싸인 것입니다. 공포심과 죄책감도 함께 말입니다.
모세 같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껏 사실은 우리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에돔 왕처럼 절망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비참하고 가난하고 비겁한 상태에서 구원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물론 그 본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최소한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구원해주었는지, 성령이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본문의 모세처럼 되어 있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투기 전에 화친하고 남에게 어떤 손해도 끼치지 않는 모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신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에돔 왕은 모세를 보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에게서 여호와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며 떠나라고 하며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 적대감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 앞 2장에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를 보는 불신자들이 에돔 왕 같은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 실력, 경건함, 믿음, 도덕적 종교적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서 그분의 가신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구태여 복음을 말로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반대로 거룩하게 살아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돈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비참하고 가난 치사했던 본성은 점차 죽어 없어지고 우리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의 냄새가 번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를 따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거나 우리를 아주 미워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모세에게도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음을 아셔야 합니다. 출애굽기 강해 때에 강조했지만 하나님은 애굽의 보화를 갖고 나오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언약궤와 성막기구를 만들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 바로 본문의 경우를 대비시킨 것입니다.
그 돈으로 에돔의 물을 사먹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모세는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애굽을 패배시켜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낸 권능과 사랑에 형제 나라 에돔도 뒤늦게나마 동참시키려는 은혜의 초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백성뿐만 아니라 그 형제 이방족속에게도 선을 베푸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선한 제안을 접한 에돔 왕은 오히려 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조상들의 오랜 원한에 다시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마귀에게 그 영이 조종 농락당하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배척하고 더 완악하게 사망의 길에 자신을 방치 내지 재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모세에겐 거룩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게 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신명기 23:7에서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도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단순히 에돔이 형제 나라라서 화친을 청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이때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백성들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형제나라 에돔을 완전한 이방족속인 애굽보다 더 사랑한 것도, 동족의 원수였던 애굽을 형제 나라 애돔 사람보다 더 미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모든 이를 사랑하기에 그들을 살리려고 죄 값을 대신 감당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역할 동안에도 사람을 외모로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이방인, 헤롯당, 심지어 당신의 원수인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사랑했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말로 모든 이를 외모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기가 힘이 든다면 외모로 차별은, 특별히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겐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게 못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신자가 매일 아침 십자가를 지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속에 영원한 그분의 생명이 정말로 영원토록 살아 역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는 자로 하여금 공포감은 몰라도 근본적인 영적인 찔림은 느끼도록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