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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성년식-
“호동씨!”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뜨끔 하는 가슴을 누르며 생각해 본다. 천하장사 강호동, 낭랑공주의 호동왕자, 제법 널리 알려진 이름인데, 참으로 아쉽게도 이렇게 훌륭한 이름을 현실에서 직접 사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여기서 지금 나를 부르는 건 확실하다고 치고, 이 톤 높고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기억의 파편 하나가 쓸려가 버렸는지 알 듯 알 듯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뭐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그 더럽고 급한 성질머리까지 잊어버리진 않았다.
“내놔요. 호동씨”
이 냔이 나의 우람한 어깨를 가볍게 스치는 순간, 사라졌던 기억의 파편이 제자리에 돌아왔다. 내 앞으로 툭 튀어나온 선희 냔이 손바닥을 위로 하고 가느다란 양팔을 앞으로 뻗어 내민다. 똘망똘망해 보이는 그 동그란 눈에서는 내 눈 속으로 뚫고 들어 올 것 같은 레이져가 발사준비를 하고 있다. 숙취로 가뜩이나 머리도 띵해서 아 뭘!! 이 선희 냔아!! 라고 성질 뻗치는 대로 버럭 내지르고 싶다만, 그랬다가는 직장에서의 앞날이 참으로 막막해질 것 같다.
“선희씨 안녕.”
문명인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다. 올해 내 나이 31 살, 지금 내 앞에 선 이 선희 냔은 겨우 21살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무려 10년 차이! 그런데도 난 이 냔한테 꼬박꼬박 존대를 해야 하고 이 냔은 허울 좋은 직장동료의 호칭으로 나한테 꼬박꼬박 호동씨라고 부르며 오늘처럼 나를 닦달하기 일쑤다. 가끔 보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오빠 소리도 곧잘 하더만, 대체 나한테는 무슨 감정이 ..... 있을 만도 하다. 하지만 나도 조금은 억울한 면이 있다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하여튼 이 냔은 오늘도... 완소남인 내가 살인 미소까지 날리며 인사를 해줘도 미동이 없다. 목석같이 구는 꼴을 보면 아직 여성의 제 2 성징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신체적 초딩인 게 틀림없다. 생리도 하지 않을 냔이라니까... 어 ... 어... 근데 저.. 저... 봉긋한 가슴은... 뭐.. 뭐.. 생기다 말았겠지. 아니지. 아니지. 문명의 시대가 만들어 낸 가슴 가면, 뽕브라가 틀림없겠다. 그렇지. 뽕이야. 이거 안좋아. 뽕 때문에 자연스러운 곡선이 다 사라졌다니까. 아..뭐.. 근데 난 저 애송이 냔 곡선에는 전혀 관심 없다고. 결단코!!!
“호동씨만 안내고 있단 말이예요. 정말 이러기예요?”
아 이 또라이 선희 냔 때문에 내가 돌겠다. 자기 성인식 잔치 비용을 왜 직원들이 내야 하냐는 말이야. 성년이 되는 날 파티를 열어준다니까 1인당 5만원 돈으로 달라는 경우는 내 31살 생전 보다가 처음이다. 그게 끝도 아니다. 이 냔이 이름 적어가며 직접 일일이 수금까지 하고 다닌다. 다른 직원들한테는 어느 새 다 걷었는지 지금 출근하자마자 아침 대바람부터... 이건 쫌 아닌가.. 곧 점심시간이네.. 하여튼 나 혼자만 안냈다고 대 호동님의 앞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징징대면서 진상을 떨고 있다.
“하하. 줘야죠. 줘야지. 선희씨 성년 축하금인데. 하하.”
내 모습이 참 비굴해 보이지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이 상황에 가져다 놓는다고 해도 정말 나보다 덜 한심하기 힘들다. 장담한다고! 이 애송이 같은 냔이 이래 뵈도 우리 사무실의 실세중의 실세거든. 부장조카.. 아 이건 나만 아는 사실인데.. 하여튼 아침이면 사무실에 제일 일찍 나와요. 저녁에는 언제 퇴근하는 지 알 수도 없어. 사무실에서 자리 펴고 숙식을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잠을 안자는 건지 하여튼 인조인간 선희냔이예요. 저러니 간부들이 이 냔 말이라면 꾸벅 죽지. 나한테 그렇게 충성해 봐라. 지금 내가 그 꼴랑 5만원 가지고 이렇게 버티겠냐. 줄리아 나이트 통째로 빌려서 파티 열어주고 프린스 호텔 스카이 라운지의 특실도 잡아준다. 하여튼 어린 냔이 권력의 맛은 알아가지고. 회사에서 어디에 줄 서야 할 지를 너무 잘 알아. 까져가지고 정말. 선희 이 냔, 넌 밤길 조심해야 돼. 아이그 주먹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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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회사원의 임무는 자기의 사무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출근하자마자 얼른 자리에 가서 서류를 펼쳐봐야 하는 것이고 직원의 사소한 경조사 따위로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유능한 회사원인 나는 지금 왜 책상 근처에 가기도 전에 선희냔한테 잡혀서 티 테이블에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거냐고. 이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배배 꼬인 선희 냔이 또 그러겠지. 호통씨.. 다 늦게 점심 먹으러 오는 것도 출근이심? 에이 더럽다. 인물 되고 성격 되는 내가 그냥 참아 삼키고 말자. 꿀꺽.
“휴.. 지갑에 쓸만한 게 통 들어있지를 않네. 쓰레기통 같아.”
그래도 배추잎 하나 들어있잔아. 이 냔아. 만원짜리 한 장. 그게 우스워? 쪼끄만 게 대놓고 돈 밝히기는.
계속 앞을 막고 버티더니 급기야 레이져까지 발사하며 째리는 선희냔의 희번덕 거리는 눈깔이 꿈에 나타날까봐 무서웠다. 진정코 단지 그래서였다.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선희냔의 양손에 고희 얹어드렸다.
“뒤져서 나오는 거 님 다 가지세요.”
그랬더니 지갑을 받아가는 것도 모자라 내 손목까지 낚아채서 끌어다 티 테이블에 앉히고는 꿀물을 한 잔 타다 숙취해소용이라고 하며 밀어 준다. 지갑이 그렇게 고마워? 이 냔아. 근데 고양이 쥐 생각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거 맞겠지. 그리고 나더니 이 냔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이 호동님의 지갑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아니 이 냔이 정말 양심도 없어. 남의 지갑을 준다고 낼름 받니? 응. 하란다고 그렇게 너덜너덜할 정도로 뒤져? 하늘같은 이 호동님 지갑을 말이야. 거기서 뭐가 나오던지 놀라지나 마라.
“줄리아 나이트 클럽 10만원. 싸네.”
“어.. 그건 나누어 낸 거라서... 어.. 어...”
어.. 어.. 이건 아니잔아. 아니 그게 성인식 축하금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취조실의 형사처럼 신용카드 영수증까지 한 장 한 장 뒤지는 걸로도 모자라, 사무실에 광고하듯 떠드는 선희의 페이스에 말려 그만 내가 .. 지금 무슨 설명을 하고 있는 거야.. 근데... 아.. 아... 아.. 안돼 그건 안된다고!
“프린스 호텔 새벽 1시 30분 18만원!”
“아 그건 밤이 늦어서.... ”
근데 내가 지금 얘한테 무슨 변명을 하고 있는 거니... 선희 이 냔아... 선희야... 선희님... 선희느님... 제발.... 흐억..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결국 직원들이 다 쳐다보고 말았잖아. 특히 저.. 저.. 여직원들 눈빛 봐라. 김대리, 선영씨. 미정씨.. 살벌하잔아. 지금. 이 냔아. 니 목소리 톤이 워낙 높아야 말이지. 너 이거 다 우짤..
“회사, 집, 줄리아 나이트, 프린스 호텔, 모두 다 거기서 거기, 5분 거리 안쪽인데.. 늦으면 호텔 가서 자요? 호동씨는 이상하네.”
야! 너 정말 순진한 거니. 아니면 무지한 거니. 이 냔아 난 이제 니 냔이 너무 무섭다. 그만 좀 해라. 쪽 팔리잔아. 내 잘난 얼굴 다 없어지면 니 냔이 책임질래.. 아니.. 아니.. 취소다. 책임질까봐 더 무섭다 없던 걸로 하고 각자 가던 길 가자. 제발!!! 조용히 좀 하자고. 선희야!!!! 아.. 근데.. 잠깐 이 냔이 우리 집은 어떻게 알지. 열라 신기하네. 뭐.. 하여튼... 무서운 냔이라니까.
“호동씨. 지난달 현금으로 지급하는 출장비 50만원 미지급인데, 지금 드릴까요?”
헉쓰...김대리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프린스 호텔 때문에 벌써 나한테 삐진거야? 그런거야? 내 생활 그런 거 뭐 다 알만한 처지에도 평소엔 저러지 않았는데, 나를 볼 때마다 눈에서 하트를 빵빵 날리더니, 선희 냔의 적나라한 까발림에 갑자기 배신감이 각성을 했나. 바로 복수하려고 드는 것 봐. 이제 내 팬 클럽 다 어떻게 할거냐고요. 이 선희냔아. 차라리 그냥 주머니 뒤져서 동전 나올 때마다 죽빵 맞는 게 낫겠다. 신용카드 영수증 내역을 털리고 나니 이거 후폭풍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감당이 안된다. 후덜덜.
“네....에... 지금요? 네.. 에..”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나에게, 결국 김대리가 억지로 안기다시피 만원짜리 50개를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덕분에 선희 이 잘난 냔은 점심 밥을 먹기도 전에 수금을 완료하고 말았다. 아 쓰.. 그 놈의 프린스 호텔만 아니었어도.
“호동씨, 돈도 받았는데 우리한테도 한 턱 쏴요. 밥 먹으면서 나이트 클럽 이야기도 해주고. 호호. 나이트 클럽 가본지가 오래되서 원. 호호호.”
완전히 빡 돌아버린 김대리의 복수가 계속 이어졌다. 선희냔한테 털린 것도 억울한테 여직원들한테 단체로 밥을 사라니.. 김대리.. 왜 이래.
결국 이탈리아 식당으로 끌려오고 말았다. 나이트 글럽을 자주 가나봐요. 호동씨는 잘 생겨서, 부킹은 당연히 하겠지. 삥 둘러않은 여자들의 수다인지 질문인지 알 수 없는 공세에 나는 수저 들 틈도 없는데, 선희 저 냔은 구석에 앉아서 쉴 새 없이 포크와 수저를 움직이며, 말도 없이 꾸역꾸역 잘도 먹는다. 자기 앞으로 시킨 연어 파스타를 다 먹고 나더니 톤 높은 목소리로
“마늘 빵 추가.”
아 저것도 다 돈인데, 웨이터가 단박에 달려와 주문을 받는다. 저 냔의 목소리 못 알아듣는 것도 힘들지. 아 정말.. 이 냔의 만행은 계속 이어진다.
“호동씨는 고기 안좋아하나 봐요.”
내 앞에 놓인 접시까지 들고 가서 슥슥 썰어 입에 넣는다. 야 이 냔아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라도 졌냐고. 그래도 프린스 호텔 레스토랑 가자는 김대리를 선희냔이 말린 건 기특했다. 거기 음식이 맛이 없다나. 얌전한 냔이 부뚜막에는 다 올라가 봤군. 프린스 레스토랑 음식이 정말 맛이 없기는 하다. 프린스에서 쓸만한 건 줄리아에서 부킹하고 놀다가 한 건물처럼 바로 들어가 뒹굴 수 있는 객실 밖에 없지. 헉.. 그럼 뭐야.. 저 냔 설마 이것까지 아는 건?? 워낙 귀신같은 냔이라 알지도 몰라. 아 무섭다. 진짜 알 수 없는 냔이야. 결국 이렇게 해서 오늘 받은 출장비도 다 털리고 그것도 모자라 카드까지 긁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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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정말 피곤하게 개털리는 날이었다. 선희 냔 고거 앙큼해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했는데 낮에 겪은 일을 생각하니 진저리가 처진다. 애송이 같은 냔이 어떻게 외간 남자 지갑을, 신용카드 영수증까지 겁도 없이 뒤질 수 있어. 거기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뭘 읽어댄 거야. 이미 다 지났으니 솔직히 고백하겠다. 지갑을 받은 선희 냔이 카드 영수증을 제대로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돈이 없다고 툴툴대며 돌려줄 걸로 생각했지.
사실 그보다 더한 상상을 잠깐 하기도 했었어. 카드 영수증을 읽었을 때 말도 못하고 창피해서 울그락 불그락하는 선희냔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기도 했어. 생각만 해도 짜릿했지. 근데 그렇게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사무실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읽어댈 줄 누가 알았냐고. 그랬으면 내가 지갑을 줬겠어. 정말독사 같은 냔이야 하여튼. 정 떨어지지만 그래도 직장 계속 다니려면 할 수 없이 얼굴을 봐야하네. 내가 재벌집 자식도 아닌데 직장 때려 치울 수도 없고, 부장 조카 냔이 짤릴 리도 없고. 아씨 생각을 말자. 잊자. 잊어. 그래 이런 날은 뭐니 뭐니 해도 나이트만한 게 없지. 시원하게 마시고 신나게 흔들며 예쁜 온니들과 부비부비, 그리고 이어지는 뜨거운 밤, 사는 게 다 이런 맛이지.
“형님 오늘도 부킹 하셔야죠.”
웨이터 장동건이 오더니 귀에 대고 떠든다. 온 몸을 울리는 음악 소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지만, 내가 누구냐. 나이트의 황제. 호동님 아니시냐. 안들린다고 무슨 말인지 모를까. 이 시간에 웨이터가 와서 하는 소리는 뻔하지. 뭐 동건이 너도 대답을 뻔히 다 알면서 그래도 예의상 물어보는 거겠지. 장동건은 물어보듯 앞에 앉은 두 녀석의 얼굴도 번갈아 쳐다본다. 역시 돌아오는 형식적인 끄덕임. 다 뻔한 절차 아니겠어. 아 귀찮아. 매번 이러는 것도 문명인의 의무라고 받아들여줘야 하나. 밀림이 우거진 아프리카로 확 달아나 버리고 싶다. 그래서 문명이고 뭐고 내키는 데로 야생의 삶을 살면 소원이 없겠다. 쓰바.
“내숭이나 떠는 애들은 아니지?”
뭐 이 말도 장동건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다만, 이것도 매번 거치는 형식이다. 나이트클럽에 여자들끼리 와서 남자하고 부킹까지 하는 주제에, 요조숙녀처럼 구는 내숭덩어리들은 사절이다. 손끝만 닿아도 파르르 떨 암컷들이 몸으로 말하는 이 곳에서 왜 부킹을 하는 거냐고. 도대체 이 시끄러운 곳에서 몸을 부비는 걸 빼면 뭘 하겠냐고? 플라토닉한 대화? 무슨 수로 그걸 해. 입술을 읽어 낼 재주라도 가졌으면 몰라. 아까부터 왜 무슨 생각만 해도 복잡해지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거야. 나의 환타스틱한 유머는 다 어디로 가버리고 말이지.
“아가씨들 이리로, 여기 쌈박한 오빠들 옆으로.”
장동건 이 넘은 재주도 좋아. 말도 안들리는 이 곳에서 착착 정리도 잘 한다. 장동건의 손 짓을 따라 여자들이 하나씩 남자들 옆에 앉는다. 홋,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걸. 한 눈에 봐도 파릇파릇한 영계들이다. 어린 걸 감추려고 진하게 화장을 하고 색색의 반짝이 스티꺼까지 볼에 덕지덕지 붙였다. 가만.. 가만.. 이것들 가발도 썼네. 영 불안한데 이거.
“잠시만 실례.”
손을 살짝 들면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동건이 손을 끌고 나이트 입구로 나갔다. 아 여기서는 뭐 이야기가 되야 말이지.
“쟤네들 미성년자 아니야?”
“절대 아니죠. 형. 신분증 다 확인했고요. 그 중에 한 명은 제가 잘 알아요.”
“그래도 찝찝한데 아가씨들 바꾸자.”
“아.. 형 좀 믿어요. 쟤네들 일부러 오늘 특별한 날이라고.. 하여튼 미성년자 아니고. 형은 오늘 횡재한 줄만 아세요. 아 나 바빠요.”
결국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씨. 아직 내가 늙지는 않았나 보다. 영계라고 마냥 좋지만은 않은 걸 보니. 근데 저 새끼들은 벌써 늙은 건가. 앞에 앉은 두 놈은 벌써 옆에 아가씨들이랑 히히덕 거리며 손까지 잡고 난리가 났다. 아주 얼굴에 써놨다. 영계라서 좋아요. 겁대가리도 없는 새끼들. 아 벌써 어떤 새끼가 따라준 거야. 내 옆에 앉은 이 아가씨 나를 보며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폼이 건배를 하자는 것 같다. 아 그래 나도 몰라. 씨바. 뭐 어쨌든 예쁘고 귀엽기는 하네. 몸에 착 달라붙게 입은 반짝이가 달린 티셔츠와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린다.
“이름이 뭐예요? 나는 호동.”
나는 손을 들어 아가씨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귀에 두 손을 막고 소리쳤다.
“저희는 가희, 나희, 다희. 저는 다희.
아 이 아가씨 봐라. 펜을 꺼내더니 휴지 위에 글을 쓴다. 딴은 좋은 아이디어인데, 저 이름들이 저게 현실성이 있냐고.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딱 봐도 가짜잔아. 근데 이거...
“실명은 아니랍니다. 나이트니까 실례는 아니겠죠? 벙어리도 아니랍니다. 그냥 시끄러워서요. 호동 오빠 ^^”
햐.. 이 녀석 보통 아니네. 예쁜데다가 재치도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딱딱 알고. 그래 미성년 수준은 아니야. 딱 맘에 들었어. 근데 다음 글은 뭐지?
“춤 추실래요?”
아 기꺼이. 우리 예쁜 동생 다희, 춤 솜씨 좀 볼까. 다희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한 웅큼도 안되네. 나 호동의 손에 이끌려 스테이지로 나오는 다희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다소곳하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본다. 동건아 파트너 교체 말려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 훌륭한 놈.
스테이지 위에서 춤을 출 때 파트너 몰래 주변의 여자들을 힐끗 거리는 재미도 쏠쏠했었다. 오늘은 영 시선을 옆으로 돌릴 수가 없다. 햐 이 아가씨 춤이 수준급은 아닌데, 리듬을 타는 몸 놀림이 예쁘다. 거기다 한 번씩 눈을 맞추며 방긋방긋 웃어주는 얼굴이 사람을 얼 빠지게 한다. 주변의 늑대 같은 놈들이 다희를 힐끗 거린다. 전에는 나도 너희같은 늑대였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다고. 내가 틈을 줄 것 같아. 늑대들을 슬슬 밀어내다 보니 다희가 거의 내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그리고 음악이 바뀐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희의 한 손을 마주잡고 나머지 손을 다희의 뒤로 둘렀다. 허리를 지나 살짝 위로 올라가는 손에 안기는 느낌도 나긋나긋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얼굴이 다희의 얼굴을 덮고 내 입술이 다희의 입술을 누르고 있다. 다희도 거부하지 않는다. 우리 오늘 통한거야? 기약 없이 끝나는 나이트의 하루 밤이 오늘은 야속하기만 한 이 마음은... 아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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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너무 짧았다. 다음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가희가 우리를 부르러 왔다. 나는 그대로 다희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 가희를 따라 걸었다. 가희가 데리러 오지 않았으면 다희의 손을 잡고 스테이지를 내려와 바로 프린스로 갔을 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둘만의 밀실로 가고 싶다. 방금 전까지 동건이한테 미성년자 타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이제 다 상관없다.
“헛 무슨 날... ”
맞다. 아까 동건이 무슨 특별한 날이라고 했다. 테이블 위에 핑크 빛 데코레이션 케익이 놓여있다. 커다랗고 빨간 초가 중앙에서 타오른다. 나이 수 만큼의 초를 꽂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생일 케익은 아닌가 보다. 다희가 케익의 중앙을 잘랐다. 가녀린 손목이 위 아래로 앞 뒤로 움직일 때마다 내 심장이 같이 춤을 춘다. 다희는 그리고 나서 작게 몇 조각을 더 잘랐다. 가희와 나희가 케익을 한 조각씩 들어 파트너에게 먹여준다. 다희도 한 조각을 들어 내 얼굴 앞에 가져다 놓고 나를 쳐다본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나는 얼굴을 내밀어 케잌을 물고는 크림이 묻은 다희의 손가락까지 빨았다. 그녀는 손끝까지도 달콤했다.
“무슨 날인지 묻지 마시고 그냥 축하게 주세요. 좋은 날이거든요.”
다희가 손을 닦은 휴지 위에 다시 글씨를 썼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는 뭘 해도 괜찮아. 동건이가 샴페인을 가져왔다. 동건은 요란하게 병을 흔들어 팡 소리가 나도록 샴페인을 따더니 날씬한 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른다. 계속 옆에 서있는 동건이 취하는 동작을 보니 러브샷을 하라는 것 같다. 마냥 기분이 좋은 나는 동건이 시키는 데로, 여전히 한 쪽 팔은 다희의 허리에 두른 채로, 다희의 팔이 내 목을 두르도록 한 다음에 내 팔도 다희의 목을 감싸며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테이블에서 폭죽이 터진다. 신호처럼 통로에 서있던 웨이터들이 모두 폭죽을 쏘아 올렸다. 나이트의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지자 나는 마치 계획한 것처럼 잔을 내리고 다희의 입술을 덮쳤다. 다희의 입술이 수줍어한다. 그것조차 사랑스럽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지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뭔지 모를 요란한 축하 파티의 분위기에 취해 우리는 서로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평소처럼 줄리아를 나와 프린스로 갔다. 물론 오늘도 혼자 가진 않았지. 뻔하잔아. 미치도록 달콤한 다희와 함께였지. 방에 들어올 때까지도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을 풀 수가 없었어. 잘 웃기는 했는데 다희는 참.. 뭐랄까 말 수가 적었어. 가만.. 가만.. 다희가 무슨 말을 했더라. 줄리아를 나와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물론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어. 그래서 기억이 좀 흐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파트너가 누군지 몰라 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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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 나세요. 호동씨.”
이건 왠 개 꿈이야. 선희 이 냔이 왜 프린스까지 와서 날 깨우고 있는 거냐고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면 뭐겠어. 꿈 속에서도 눈을 떴다 감았다 할 수는 있잔아. 그런 거잔아. 어제 밤에 본 걸 또 볼 수도 있고, 그러니까 빨간 색 가발이라던가, 얼굴에 붙였던 스티커라던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응. 응... 그리고 프린스에서 내가 홀딱 벗고 깨어나는 것도 ..응.. 응.. 그.. 그.. 근데 선희 냔이 목욕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걸터앉아 나체로 누운 나를 내려다 보는 건.... 아.. 이건.. 이건.. 정말 악몽이야. 그래 차라리 악몽이어야 해!!!
“호동씨, 빨리 출근 준비해요. 지각하기 전에.”
게다가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선희 냔이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내 마누라라도 된 양 잔소리를 하고 있다. 텔레비전 옆에 차곡차곡 개켜놓은 옷은.. 그래, 내가 어제 입고 간 옷이 맞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저 앙증맞게 반짝이는 셔츠와 미니스커트는 다희가 입고 있던.... 그리고 선희 냔은 지금 목욕 가운을 입고 있는데.. 그럼 이 선희 냔 옷은 어디 있는 거냐고요. 그리고 어제 같이 들어온 다희는 어디에? 그래 지금 욕실에 있을 거야. 선희 냔이 내 벗은 몸을 쳐다보는 것도 상관없이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얼른 욕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보았다. 아... 아... 니미럴... 구원은 없었다. 나를 반겨주는 건 텅 빈 욕실에 놓인 세면도구들과 방금 사용한 누군가가 남겨놓은 여기저기에 매달린 물방울들. 슬프다.
어떻게 빠져나갈 길이 없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밤에 정신을 빼놓을 만큼 달콤했던 다희의 정체가 질리도록 무서운 선희 냔이라는 걸. 그래서 지금 이 냔이 내 앞에 저렇게 버티고 서있다는 걸. 어깨가 축 늘어진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억울하고 슬프고 서럽고 분하고 지금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루 밤 새에 순결을 빼앗긴 여자의 억울한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선희 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의 순결한 밤을 낼름 빼앗아 가버리고는 저렇듯 뻔뻔하게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나를 닦달하더니, 욕실 앞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밀어넣고는 문을 닫아버린다.
“잘 씻고 나오세요. 호동씨.”
충격이 심해서 어질어질 하다. 그래도 일단 샤워기 아래 서서 꼭지를 틀었다. 물줄기가 몸을 적셔온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 것 같다. 근데 정신이 들어도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분하고 억울하다. 아 씨바 어제 밤에 줄리아에서 글씨만 써댄 건 순 사기였던 거야. 아무리 시끄러워도 저 냔 목소리는 워낙 톤이 높아서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리고 뭐 어제 밤에 오빠 어쩌고 하던 것도 다 개수작이었네. 오늘 봐봐. 저거 당장 호동씨라고 부르잖아. 무서운 냔. 부르르 몸이 떨린다.
“호동씨 아직도 샤워해요? 대충 끝내세요. 밥 먹고 가야하니까.”
으아악 선희 냔이 욕실의 문을 두드리면서 또 잔소리를 하잖아. 욕실로 처들어올까봐 무섭다 이젠. 아오 정말. 내가 미쳤지. 술 처먹었다고 눈이 삐어가지고서는. 아니지. 첨에는 술도 안취했잔아. 으.. 정말 이 두 눈깔을 확 뽑아버려야지. 아 근데 저 냔은 창피하지도 않나. 나는 이제 다시 벗은 채로 나갈 생각을 하니 미치겠는데. 일단 수건으로 물기나 좀 닦고 이도 닦으면서 생각해 보자.
살짝 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는데, 선희 냔은 보이지 않고 텔레비전 옆에 개켜둔 속옷과 셔츠 바지만 문 앞에 놓여있다. 저 냔이 또 나타나기 전에 후다닥 옷을 집어 들고 다시 문을 닫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니 좀 자신감이 돌아오는 것 같다. 이제 나가면 저 냔하고 한 판 뜰 수 있을 것 같다. 아 근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이건 숙취는 아닌데..
“마셔요. 호동씨.”
도대체 재주도 좋은 냔, 정말 잘난 냔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멀쩡한 출근복을 차려입은 선희 냔이 그건 또 어떻게 구했는지 테이블 위에 꿀물을 대령해 놓고 있다가 건내 준다. 그런다고 넙죽 받아드는 이 손은 소속이 어디냐 대체. 아씨 선희 냔이 주는 꿀물을 마시면서 속이 풀리는 이 느낌, 아주 기분 나쁘다. 내 양복 재킷을 탁탁 털어서 의자 손잡이에 걸쳐놓는 선희 냔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쭉 마시고 뭔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자 출발.”
아 저 냔은 잽싸기도 하다. 남자의 하루 밤을 낼름 훔치고 양심도 없이 저렇게 도망을 가려는 건가. 벌써 신발을 꿰어신고 있다. 할 수 없이 나도 입구로 가서 신발을 신는데 선희 냔은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다. 아 정말. 나이트 손님이 대부분인 프린스 같은 호텔에서 객실 문 활짝 열고 그렇게 서 있다니. 나 원 나잇 했소 하고 동네방네 광고 할 일 있냐고요. 도대체 부끄러움을 몰라. 저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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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많이 보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왜 그 우연히 사고처럼 첫 날 밤을 치른 두 남녀가 함께 숙소를 나선다. 하룻밤 욕망으로 여자를 범한 남자는 진한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앞에서 걸어간다. 어제까지 어떻게 여자를 안아볼까 궁리하던 머리로 이제는 어떻게 문제없이 여자를 떼어낼까 고민을 한다. 여자는 울먹울먹 뒤를 따른다. 남의 눈이 무서워 남자에게 붙어 서지 못하면서도 남자가 도망갈까 하는 조바심이 여자의 얼굴에 잔뜩 묻어있다. 근데.. 오늘 아침에 프린스 객실 복도에서도 밤을 함께 지낸 남녀 한쌍이 나타났다. 여자가 뚜벅 뚜벅 앞 서 걸어간다. 그 뒤를 어깨를 떨군 남자가 맥 없는 걸음으로 따라간다. 도대체 이 막되 먹은 그림은 뭐냔 말이다. 아 정말 돌아버리겠다.
“이모 순대국밥 2개.”
이모, 이모라고 내 원 참, 그래 너 정말 회사에서 숙식하는구나. 그러니 회사 앞 순대국집 주인이 이모겠지. 근데 왜 니 맘대로 2개? 설마 하나 내 꺼야? 그래 너 따라 들어와서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은 내가 미친놈이다.
“호동씨 순대국 괜찮죠?”
“아 ... 네... ”
참 빨리도 물어본다. 괜찮지 않다면 어쩔래. 또 나를 덮칠래? 아.. 그건 아니었나. 덮친 건 난가. 아 젠장.. 뭐가 생각이 나야 말이지. 그나저나 나 오늘 일어나서 처음 한 이야기가 고작 이건가? 아... 네... 진짜 쓰바,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린 냔한테 이렇게 농락당하고 계속 고추 달고 살아도 되는 거야. 아주 눈을 감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밥 알이 모래알 같은데, 이 냔은 순대국도 잘 퍼먹는다. 뚝배기를 싹 비우고 나더니 휴지를 한 장 뽑아 입을 쓱 닦는다. 흘낏흘낏 쳐다보면서도 나는 창피해서 이 냔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겠는데. 이 냔은 턱까지 받치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고마워요. 호동씨.”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거냐? 하룻 밤? 아님 뭐! 뭐! 뭐! 아씨 마구 마구 무지막지하게 뻔뻔한 냔, 슬며시 팔을 뻗더니 수저를 잡지 않은 내 왼손을 덮어버린다. 이렇게 날 농락해도 된다고 생각해!! 아.. 근데 뭔가 감촉이 이상하다. 선희 냔의 손바닥이 닿는 느낌이 아니다. 내려다보니 이 냔의 손등 아래로 삐죽하게 모서리가 튀어나온 종이가 보인다.
“감사의 카드를 썼어요. 어제 제 성년식 같이 해줘서 고마워요.”
허걱.. 그거였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들들 볶아대며 돈 받아내더니 성년식이랍시고 친구들이랑 나이트 가서 크게 한 판 사고치려고? 가뜩이나 삼켜지지 않았던 순대국이 이젠 아예 목을 막아버렸다. 아 진짜 웃기는 상황이다. 이거 축하하다고 해야되? 그럴 상황도 아니잖아 지금. 남자들이야 성년식 빙자해서 총각딱지 떼는 일이 흔하지만, 요즘은 여자 애들도 그러나. 근데 이건 심하지 않아. 니가 내 얼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직장 동료인데. 아무리 철 없는 21살이라도 넌 넘치도록 철이 든 냔이었잔아. 이 모든 말이 다 입으로 나와야 하는데 왜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고 지금 난 선희 냔 손 하나를 뿌리치지 못하고 이 꼴이냐고. 나란 놈은 얼 빠진 새끼.
“호동씨는 생각보다 입이 짧은가 봐요.”
아.. 진짜. 이 식충이 같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내가 수저를 놓은 틈을 타서 선희 냔이 내 앞에 놓인 뚝배기를 끌어간다. 이제는 아주 내 밥이 다 이 냔 밥이다. 야 됐고.. 웃지는 마라. 그냥 밥이나 먹어라. 어제 밤 그 웃음에 정신 쏙 빠진 걸 생각하면 내가 치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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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10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선희 냔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냥 움직이다 회사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이건 말도 안되는 시간이다. 바른 생활 선희 냔이나... 아니 저 냔도 알고 보니 바른 생활은 순 포장지였던거야. 하여튼 무늬는 바른 생활인 선희 냔이나 회사에 나올법한, 이 꼭두새벽에 이 호동님께서 출근을 해버렸네.
“우리 선희, 어제는 잘 놀았어?”
아 선희 냔의 삼촌인 부장놈은 조카 단속은 안하고 출근하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저게 뭐냐. 아무리 그래도 사무실인데 우리 선희는 또 뭐고. 그러다 나를 힐끗 보더니 놀란 눈초리다. 그래 놀랐겠지. 이 시간에 여기서 나를 보는 게 보통 일이냐고.
“선희가 성년이 되니 좋은 일이 많이 생기네. 호동씨가 이렇게 제대로 출근도 하고 말이야.”
아 시방 뭐라고 하시는 겨. 선희 냔 성년식 때문에 미친 출근 한 거는 맞는데, 이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거든요. 어제 밤 저 냔 꾐에 빠져 같이 프린스에 갔다고 확 불어버려. 아니지. 저 냔이 인정할 리가 없지. 부장 놈은 선희 냔 말만 들을 테고. 그럼 또 나만 개 털 되네. 아 이것도 아니네. 길이 없다. 정말.
“워.. 호동씨 왠 일?”
들어오는 인간들마다 똑같은 반응이다. 눈을 뜨자마자 시작된 두통이 한 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레벨 업 되는 것 같다. 회사원의 임무에 충실하느라 펴놓은 서류는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내 머리통에 달린 이 미친 놈의 눈깔은 주인 허락도 없이 계속 저 선희 냔의 뒤꽁무니만 좇고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만 정신줄을 놓을 것 같다. 결국 점심시간이 끝날 때 쯤 조퇴를 했다. 작전상 후퇴도 아니고 무조건 퇴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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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어제 조퇴를 하고 사우나에 가서 몸을 담궜다. 몸이 풀렸는지 머리가 좀 맑아졌다. 그리고 나니 줄리아에 함께 갔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가희, 나희, 본명이 뭐건 여하튼 선희 냔의 친구들이렸다. 너희들 오늘 다 죽었어.
“어제 집에서 전화가 와서 가희씨랑 그냥 헤어졌어.”
“아.. 난 술을 많이 마셨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깨어보니 집이더라. 나희씨는 글쎄.. 잘..”
아 뭐 이런.. 개같이 황당한 경우가. 기껏 퇴근을 기다려 불러냈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사우나로 맑아졌던 머리가 다시 아파온다. 그래서 미친 듯 마시기 시작했다.
“아주 죽겠다고 마시네. 그만해.”
하는 이야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깨어보니 집이다. 출근을 할 시간도 훌쩍 지났다. 평소에도 뭐 정시에 출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이 회사에 도착할 시간까지 자리에 누워있지는 않았었지. 아 몰라 잘리면 잘리는 거지. 목이 타는 갈증이 느껴진다. 그래도 귀찮아. 이대로 목마르다 죽어버리지 뭐. 이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안선다. 선희 냔이 아무리 어려도 21살 더구나 그 날은 성년식까지 했고 지 냔이 좋아서 벌인 일이니, 뭐 양심에 꺼릴 것도 없다고 혼자 중얼거려봐도, 이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쩌란 말이냐.
“딩동. 딩동”
현관벨이야 울리거나 말거나 들어올 인간이면 오겠고 안봐도 되는 인간이면 알아서 가겠지. 계속 울리던 벨이 잠잠해졌다. 애초부터 갈 사람이었던게지. 근데..
“삐이익.”
입구에서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관문이 열린다. 쳐다볼 필요도 없다.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야 뻔하다. 친구 녀석들 아니면 엄마다. 누구건 지금은 그저 귀찮다.
“호동씨.”
헉.. 높은 톤의 귀에 익은 이 목소리. 어디서 그런 정신이 들고 힘이 났는지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뜨고 발딱 일어났다. 경악할 것 같은 내 표정을 보는지 마는지 선희 냔이 자기 손을 내 이마에 가져다 붙인다. 이게 어따대고 함부로 막!! 이젠 고마 내 몸도 니꺼냐? 이걸 콱!!
“어. 열 있다. 호동씨. 그냥 누워요.”
아. 이 냔 정말. 여기가 어디라고 니 냔이 들어와. 너 때문에 더 아플 것 같다. 지금도 너 때문에 아픈데. 그러면 뭐하냐. 선희 냔이 누우란다고 다시 침대에 붙는 이 얼빠진 등짝 좀 보소. 언제부터 내가 이 냔의 명령을 고분고분 듣게 된 거야. 속 터진다. 선희 냔이 내 방을 두리번거린다. 아 뭐냐고. 주인 눕혀놓고. 두리번 거리던 선희 냔이 갑자기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끌어다 침대 머리맡에 붙인다. 보이기만 야리야리하지 그 어제부터 내 밥을 뺏어 먹은 걸 보면 천하장사 강호동도 찜쪄먹을 냔일텐데 그 정도쯤이야 뭐. 이 냔이 들고 온 쇼핑백을 열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다.
“죽 좀 먹고 약 먹어요. 호동씨. 몸을 위로 조금 올려서 베게에 등 좀 받쳐 봐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이 미친 몸은 선희 냔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잘도 따라한다. 하튼 그냥 저 놈의 호동씨, 호동씨. 어제 밤에 나긋나긋 호동오빠 하던 다희는 어디 가고. 아..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되는 생각을.. 그래 쭉, 일관성 있게 호동씨라고 불러라. 이 냔은 이제 수저로 죽을 떠서 내 입안으로 퍼다 붓는다. 떠먹이는 게 아니고.. 그래 뭐.. 내 생각에는 그렇다. 날 죽이러 온 걸까. 어느 한 오피스텔에 누워서 죽 먹다 죽은 시체로 내일 신문에 날지도 모르겠다.
“다 먹었다. 이제 약.”
이건 뭐 자기가 먹은 거 같은 말투네. 약까지 고이 입에 털어 넣어주더니 테이블을 다시 원래 자리에 끌어다 놓는다. 그러더니 이제는 또 뭐 하자는 건가. 의자도 내버려두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윽한 눈길로 나를 내려 보다가 내 이마를 다시 짚더니 머리칼을 쓸어 넘겨준다. 아 정말 이대로라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다. 내 생각을 읽고 현실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선희 냔의 얼굴이 내게로 점점 다가오더니 자기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떨구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거 뭔가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어쩌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작은 입술이 떨어지려고 한다.
/
“하아.”
위에 있는 작은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팔을 뻗어 내 위에 있는 얼굴이 떨어지지 않게 뒤통수를 누르고 그 여린 허리를 감아버렸다. 울찔하며 잠시 놀랐던 선희는 몸을 침대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혀를 움직이며 천천히 선희의 입술을 핥아본다. 작은 입술을 부드럽게 빨다가 아래 위의 입술 사이를 문질렀다. 선희가 입술을 벌린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선희의 입술 안쪽에 혀를 붙였다. 감촉이 부드럽다. 온 몸을 쓸고 가는 쾌감에 후욱 하고 숨이 내쉬어진다. 머쉬맬로우 같은 속 입술을 고루 더듬고 잇몸과 치열을 다 쓸어 준 후에 선희의 혀에 내 혀가 가서 닿았다. 작고 어린 혀가 꿈틀거린다.
그래 지금부터 이 호동이 제대로 안아주겠어. 너 선희 기대해도 좋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원 나잇을 말이야.
선희는 지금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다. 오늘 선희를 안으면서 지난 밤의 일이 하나씩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 너...”
함께 샤워를 했다. 원나잇을 하는 여자와 함께 샤워를 하는 게 내 취향은 아니니 다희가 그러자고 했겠지. 잔뜩 만취한 상태에서도 나는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운 선희를 알아보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향해 폭풍 같은 키스를 퍼붓고는 그대로 쓸어안고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선희는 오늘 다시 내 품안으로 돌아왔다. 웃기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어제 밤에 알아버렸다. 이 철 없고 개념 없어 보이는 행동으로 그녀는 내게 책임을 요구해 온 것이다. 그래 오래 전에 그럴만한 일이 있었지. 그래서 부장의 조카인 선희가 회사에 나타났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었지. 그래도 쌩깠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고 그 때는. 이야기 하자면 참 .. 뭐하다. 장난삼아 키스를 했을 때는 선희가 정말 미성년이었거든. 하여튼 선희는 집요한 냔이다. 나는 앞으로 그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젠 네가 나를 책임져야할 걸. 이 선희 냔아. 나도 한다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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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이 맑아지면서 나는 선희가 흘리는 익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를 맡고 있자니.. 이제는 ..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분이 든다. 사무실에 출근해 있는 바로 그런 기분 말이다. 이건 별론데. 아씨 선희 저 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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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있는 호동의 책상 서랍에는 주인이 펴보지도 않은 카드 하나가 뒹굴고 있다.
선희의 카드
호동씨. 저 선희예요. 그러니까 사무실 동료 말고요.
부장님 댁 뒤뜰에서 당신이 키스를 했던 16살 소녀,
호동씨는 기억을 못하실까요?
그렇다면 슬프지만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저는 다시 시작하겠어요.
호동씨는 제 첫사랑이고 첫 키스의 상대니까요.
어제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 아니랍니다.
제가 성년이 되는 날 당신과 함께 할 밤을 준비했어요.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죠.
누군지는 묻지 마세요.
분장을 지운 저를 알아보고도 꼭 안아주었던 호동씨
이제 당신은 제 꺼랍니다.
당신의 선희
전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첫사랑, 풋사랑 이루어지다. 뭐 이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