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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8년 3월 11일 주일오후설교
제 45주일(1)
본문 : 대하20:3-13; 마6:5-13
제목 : “주기도문 본문의 위치에서 보는 기도의 의미”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05편 1,2,3
성경봉독 후 찬송 - 시125편 1,2,3
설교 후 찬송 - 시90편 1,5,7,8
폐회찬송 - 시108편 1,2,4
제 45주일
116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117문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들으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입니까?
답 : 첫째, 그의 말씀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만
그가 우리에게 구하라고 명하신 모든 것을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둘째, 우리 자신의 부족과 비참함을 똑바로 철저히 깨달아
그의 엄위 앞에 겸손히 구합니다.
셋째, 비록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 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이 확실한 근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118문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까?
답 :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에 그것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119문 :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이하 주기도문)
주기도문 본문의 위치에서 보는 기도의 의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십계명 해설 부분을 마치고 교리문답의 제일 마지막 부분인 “주기도문 해설” 부분을 들어가게 됩니다. 이 부분을 설교로 들으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이전에, 무엇보다 “기도가 무엇인지 그 자체에 대하여” 배우는 일을 먼저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리문답이 기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교리문답 116문답은 제일 첫 머리에 기도를 정의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여러분이 교회에 있으면서 잘 배우셨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 기도를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모르는 분들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도 “기도는 뭐니?”라고 물으면 “감사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는 이 사실을 아는 것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기도가 감사의 한 부분이다”라는 것을 외워 알듯이 아는 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기도가 감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면,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현격하게 깨닫지 않으면, 머리로 아는 기도는 “감사의 한 부분”인데, 실제로 기도할 때는 “기복을 비는” 불일치적인 기도를 하게 됩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기도가 왜 감사의 한 부분인지 알지 못한 채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할 때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기도할 때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도만 해야 합니까? 교리문답이 “기도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정말 이런 뜻입니까? “감사기도만이 참 기도이다” 이런 뜻인가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가 감사의 한 부분이다”라는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삶에서 그 기도의 바람직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우리의 기도가 온전해지고,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어야 할 것인지가 올바르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의 위치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살펴볼 본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마태복음 6장에서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기도문 본문이 나오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께서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신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주기도문의 위치
주기도문을 이해할 때 중요한 점 하나는, 이 주기도문 역시도 성경의 문맥 안에서 한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보통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처럼 따로 배우고 공부하는 말씀인 경우에 곧잘 실수하는 것 한 가지가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본문의 문맥상의 위치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성경에서 떨어져 나와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의 해당 문맥 안에 있듯이, 주기도문 역시 해당 본문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그 내용을 세세히 뜯어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의 흐름과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그 본문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를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기도문은 전체적으로 “산상수훈”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는 산상수훈을 7장 끝부분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전체를 통으로 한 단위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시작과 끝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다 함께 마태복음 5장의 첫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이것이 산상수훈 가르침의 시작입니다.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상은 “무리”와 “제자들”입니다. 무리는 4장 끝부분에 나옵니다.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좇아온 허다한 무리”가 그들입니다. 그리고 여기 덧붙여 “제자들”이 거기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계속해서 지속되어서 7장 마지막까지 갑니다. 예수님께서 7장까지 산상수훈의 말씀을 다 하시고 난 후에, 맨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산상수훈 전체의 끝을 알리는 문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말씀을 마치셨다는 문구가 명시적으로 나옵니다. 5장에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로 시작한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는 마태복음에서 뒤에도 계속 나오는 반복 구문입니다. 이 구문은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나 마치실 때마다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총 다섯 번 이 구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모세 오경을 따라서 다섯 편의 설교와, 그 다섯 편의 설교에 따르는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다섯 편의 설교 중 제일 첫 편이 산상수훈이고, 이 산상수훈 속에 바로 주기도문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주제적 가르침
그러면 우리는 곧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기도문이 산상수훈 속에 위치하고 있다면 당연히 주기도문 역시 산상수훈의 전체 가르침과 통일성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주기도문은 성경에서 홀로 뚝 떨어져서 주님께서 “얘들아 기도문이 여기 있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의 흐름, 맥락 속에서 주어졌습니다. 즉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기도”를 말씀하실 필요가 있으셨고, 그 기도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주기도문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1)
그렇다면 당연히! 산상수훈 전체의 주제를 잘 알아야 기도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읽는 것이 주기도문을 문맥 속에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상수훈의 주제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우리가 많이 배운 대로 산상수훈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새 모세이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는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팔복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팔복을 무엇이라고 배웠나요? “천국백성의 대강령”이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래야 해!”라는 말씀이 산상수훈이고 팔복입니다. 팔복이 가르쳐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이것은 윤리적/도덕적 지침을 주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복을 받기 위한 비결을 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가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것이 산상수훈의 팔복의 주제입니다.
2)
그리고 팔복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도 보십시오. 팔복 바로 뒤의 말씀이 13절부터 시작되는 소위 “소금과 빛의 비유”입니다. 워낙 유명한 말씀이지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3-14)
이 말씀 역시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소금이요, 빛입니다. 산상수훈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나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란 무엇이냐?”, “너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산상수훈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팔복의 주제이고, 소금과 빛의 비유의 주제입니다.
기도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
여러분!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마태복음 6장 말씀을 보아야, 주기도문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주기도문이 산상수훈에 속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산상수훈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기도문 역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5장에서는 열심히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강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6장에서 불현듯 “기도”로 주제를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기도해야 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하나요? 기도 속에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가” 한껏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들
6장을 잘 읽어보시면, 기도는 6장이 말하고 있는 세 가지 주제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에는 세 가지 주제가 나옵니다. 첫째는 2절부터 4절까지입니다. 여기서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네 “구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5절부터 15절까지입니다. 이 부분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주제는 무엇입니까?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절부터 세 번째 주제가 나옵니다. 18절까지입니다.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금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세 주제를 말하는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
자, 그러면 왜 이 세 가지 주제를 말하게 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 세 주제가 나왔습니까? 그것은 1절 말씀에 나옵니다. 함께 6장 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6장의 세 가지 주제 전체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이었군요!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 그것의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말한 것입니다. 이제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방식이 어떤 것입니까?
1) 2절부터 4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할 때 다른 사람이 알게끔! 보게끔!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부터 4절의 내용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즉 “사람이 알게끔” 하는 것을 멈추고, 사람이 모르게, 하나님만 알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나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주제인 기도는 어떤 방식입니까? 5절을 보니까, 당시에 많은 랍비들이나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나 기도합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무엇을 알려주셨습니까? 6절,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할 때 사람들이 보게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나 기도하니까, 좀 경건한 사람이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이 많겠지만,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여기에 나옵니다.
3) 그렇다면 세 번째 주제인 금식도 같은 맥락인걸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사람들이 금식하는 걸 알면 “와! 대단하네!” 할테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웃기게도 기도원 집회 포스터 같은 것을 보면 “40일 금식기도 몇 회!” 이렇게 떠억하니 써놓습니다. 아예 대놓고 마태복음 6장 16절 말씀과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주기도문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세 주제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 세 주제는 모두 “사람에게 자기 의를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한 대표적인 세 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질문해 봅시다. 여러분은 마태복음 6장에서 이 사실을 배우심으로 기도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셨습니까? “아! 기도란 건 사람들이 보라고 하는 건 아니군요!” 맞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셨나요? 마태복음 6장에는 기도를 구제나 금식과 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나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럼 기도는 뭐냐”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기도에 대한 태도는 배울 수가 있었는데,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도는 왜 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은 아직 안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 기도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
여기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그 이유까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완성된 답을 얻게 됩니다. 이 대답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6장 전체의 주제는 1절에 요약되어 있고, 1절의 이유는 바로 그 앞 절에 나온다.”
아시겠습니까? 바로 그 앞 절, 바로 5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5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이것을 조금 다르게 쓰자면 45절을 읽으셔도 됩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것이 “기도가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입니다. 마태복음 6장이 “왜 사람들에게 보이게 기도하지 말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5장의 마지막 부분과 6장의 1절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사람에게 의를 행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게 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에서 산상수훈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를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시작은 팔복과 소금과 빛 비유입니다. 산상수훈은 팔복과 소금과 빛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는 이것이다”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을 보시면 이제 율법에 대한 풀이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옛 사람들은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문구를 반복해서 사용하시면서,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하나님 나라 법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밝히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너희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려면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하겠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너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게 되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1) 왜 구제에서 “내가 저 불쌍한 사람을 도와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선을 행해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인 것입니다.
2) 왜 금식에서 “나는 금식하고 있어요! 저 좀 경건하죠?”라고 해서는 안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처럼 온전해진다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칭찬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식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저에게 배우셨습니까? 우리 신앙 선배들이 금식을 잘 정의했습니다. 루터도 칼빈도, 금식은 “의지할 것을 의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그 “먹어야 사는 것”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금식입니다. 그런데 금식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건 가짜 금식이고, 따라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금식의 성격이 전혀 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기도가 무엇인가요? 왜 기도가 이 구제와 금식, 둘과 함께 나란히 나타났나요? 기도야말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그것이 드러나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의뢰함”입니다. 하나님만 들으시고, 하나님만 응답하시고, 하나님과만 교제하는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산상수훈” 속에 있습니다. 왜 산상수훈 속에 있습니까?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종류의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여러 세상의 신경 써야 할 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저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라는 것이 기도의 핵심이고, 따라서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기도
다시 설교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오늘 설교의 첫 부분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기도가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가요?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이것을 알아야 기도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무엇을 기도할지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리문답이 “감사”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리문답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우리의 비참에 관하여, 2부는 그 비참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에 관하여, 그리고 3부는 구원받은 이가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임을 잘 배워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말할 때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만약 우리가 “기도는 감사의 한 부분”이라는 말에서 “감사”라는 말을 그저 통상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사용하는 “감사”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교리문답의 이 표현은 그저 “기도할 때 감사기도를 하세요” 정도로밖에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리문답이 “감사”라고 말할 때, 그 뒤에, 그 배경에, 아주 많은 것을 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는 단지 “고맙다” 정도가 아니라, 그 앞에 “우리의 비참”이 있었고, “그 비참으로부터 건짐 받은 것”이 있었고, 그래서 “그 비참으로부터 건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말은, 단지 “감사기도를 하세요”의 의미가 아니라, “기도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는 가운데, 그 가능케 된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편이다.”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기도문을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살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기도의 어떤 점을 들었나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 절대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온전하라”라고 하셨는데, 이 때 “온전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전”의 뜻은 오직 그것입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가?”
여러분의 삶은 무엇으로 점철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루하루의 삶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기도는 바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나로 말미암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래서 한 순간도 주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그럼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기도는 하면 안 되는 건가요?”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신실한 의뢰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왜 구하는 기도를 못하겠습니까? 사람들의 구하는 기도가 잘못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에 대한 완전한 신뢰”는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의 목록을 하나님께 아뢰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와 “삶”과 “기도”는 다 같은 말입니다. “내가 살아간다는 것”이 만약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라면, 그 삶은 “나는 기도합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한 치도 주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한 순간도 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이 정도의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께요”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의 참된 의미를 잘 깨달아, “기도를 몇 시간 했느냐”, “새벽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 “40일 금식기도를 했느냐” 따위의 공로주의에 물들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의뢰하는 삶의 증거로서의 기도를 가진,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