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白吏(청백리)는 무엇꼬
여의도 300놈 천하 몹쓸 놈들아!
나라를 망하게 한놈들 현대사 오적
정치논리로 편가라 싸우고, 국론을 분열 시키고 있다
한국의 오적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편가르고, 국론분열, 내로남불, 아시타비, 아전인수는 한국을 망하게 하였다
이 썩어 빠질 놈들아!
노조, 전교조, 가짜 유공자, 사회단체, 정치꾼 등 정신 없는 미친놈들아!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위대한 국민들이여!
청백리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라
하늘의 복을 자자손손 받을 것이다
淸白吏(청백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선비정신, 천하위공(天下爲公), 청렴결백(淸廉潔白), 무사욕(無私慾), 솔선수범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淸白吏(청백리) 삶을 살아다
도덕성 회복, 양심건국(良心建國)이 었다
"신이 부여한 본성, 인간성을 되찾아
너희들의 그 썩은 정신을 개조하고 그 부조리와 맞서 싸우라!"
“내 일생 조국에
나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사 각오
‘짧은 인생을 영원(永遠)히 조국에’청암 박태준
50여년 공직생활을 하였지만 주식·퇴직금 ‘0원’...73세에 전셋살이
38년간 살던 집을 2000년에 팔아 생긴 돈 14억 5000만원 중 1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고 73세에 다시 전세살이를 했다.
“청암의 도덕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청렴결백(淸廉潔白),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
지(志)와 의(義), 그리고 렴(廉)과 애(愛)를 행동으로 실천한 선비정신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국부 우남 이승만
‘飮水思原 물을 마시 때 그 물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라’백법 김구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이 오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쳐라.’안중근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옳은 사람이 옳은 짓을 한다’도산 안창호 義在正我
한국의 슈바이쳐
무사무욕으로 인술을 베푼 장기려 박사
세상에 남긴 것은 사랑 뿐이다
사랑을 하기전에은 사랑이 아니다
빈손으로 살아야 하늘 나라 갈수 있다
청백리로 사랑의 기적의 역사를 쓰다
끊나지 않는 사랑의 인술이 이어진다
장기려-장기용 –장여구-장지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 天知,地知,子知,我知
고대 중국 후한 왕조 시대, 청렴하기로
유명한 양진(楊震)이라는 관리가 동래군(東萊郡)의 장관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있었던 일이다.
안면이 있었던 왕밀(王密)이라는 사내가 면회를
청해와 예를 갖추며 금 천 근을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청탁의 의미였다.
양진은 거절을 했지만 왕밀은 막무가내였다.
“이렇게 밤이 늦었으니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기에 당신과 나 두 사람밖에 더 있습니까?”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네.
우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말에 왕밀은 수치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서를 읽어보면 가난하면서도 깨끗한 삶을 산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삼국사기》「열전」에 실려 있는 ‘百結 先生(백결 선생)’ 이야기가 그렇다.
4세기 初(초), 신라 慈悲王(자비왕) 때 사람으로 거문고의 名人(명인)이었던 그는,
하도 가난해 헤어진 옷을 수 없이 기워 입어 마치 옷이 메추리를 달아 놓은 것 같았다
그는 '백 번 기운(百結) 옷'을 입었다고 百結 先生(백결 선생)이다.
한 이름없는 음악인의 청빈한 삶을 높이 사 그것을 한 나라의 正史(정사)에 싣고 있다면, 우리 조상들이 그런 면을 크게 기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論語(논어)》에서는 청빈한 삶을 가르치고 있다.
「述而(술이)」편의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낙(樂․행복)은 역시 그 가운데 있더라
(飯蔬食 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 반소사 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깨끗한 高官(고관)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으로
조선왕조에서 20년 가까이 政丞(정승)을 지낸 黃喜(황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집은 하도 낡아 비가 오가 오면 천장에서 빗물이 새
방안에서 삿갓을 쓰고 앉아 있었다 한다.
바지가 하나뿐이라 화장실에 갈 때는 가족들이 그것을 돌려가며 입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世宗(세종)이 평복 차림으로 宮(궁)을 나갔을 때(微服潛行․미복잠행),
불시에 그의 집에 들렀다.
당시 웬만한 고관집에는 화문석 자리, 비단 보료가 으레 있었다.
그러나 黃喜는 멍석을 깔고 앉아 있었고 밥상에는 보리밥과 된장과 고추가 전부였다고 하니 그의 검소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왕의 微行(미행)이 경호상의 문제로 極秘(극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평소 그의 청빈한 생활태도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名官(명관) 奇虔(기건)도 깨끗한 관리로 이름이 나 있다.
그는 延安(연안) 군수로 있을 때 백성들이 進上(진상)할 잉어를 잡느라고
심한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그 후 그 생선은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한다.
그가 濟州 牧使(제주 목사)로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전복을 가져와 맛을 보라고 했는데
그는 체질상 그것을 못 먹는다며 돌려보냈다 한다.
농암 이현보 선생(聾巖 李賢輔: 1467-1555)은
청요직에 올랐지만 농암의 선택은 지방이었다. 보장된 영달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로 이어지는
여덟 고을, 30여년을 근무했다.
목민관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백성에게 관대했으며,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에 절대 개입되지 않도록 했다.
경상도관찰사 시절 친구, 친지의 공관출입금지를 시켰다.
조선의 대표적는 청백리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러기에 오리 이원익 정승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결벽성도 유명하다.
그가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집으로 뻗어 들어온 이웃집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지면
그것을 일일이 주워 그 집으로 던져 넘겼다 한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무엇이든지 내 것이 아니면 손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의도에서 그리했다고 한다.
보백당 김계행선생의 만휴정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有淸白)'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나 보물이라면 청백뿐이다. 청백과 결백을 보물로 여기다
‘寶白堂晩休亭泉石(보백당만휴정천석)’이 보인다.
‘보백당의 만휴정이 자리한 샘가의 돌’이다.
‘持身勤愼(지신근신) ’몸을 삼가고 가지런히 하며,
待人忠厚(대인충후)‘ 사람을 대할 때 충직, 온후하라’
보백당의 청백정신을 ‘삼백정신(三白精神)’
“대개 일찍이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는 것에는 세 등급이 있다.
군자는 도덕(道德)을 품은 것을 자신의 보물로 여기고,
문사(文士)들은 경적(經籍)을 탐닉하는 것으로써 보물로 여기며,
중인(衆人)은 주옥같은 보석을 보물로 여긴다.
보백당의 경우는
결백(潔白)으로써 마음을 다스렸고,
정백(精白)으로써 임금을 섬겼으며,
청백(淸白)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니,
시종일관 ‘白’자 한 글자를 자신의 보물로 삼았고,
또한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주는 유일한 비결로 삼았다.
선생의 보물은 문사나 중인(衆人)의 보물이 아니고
바로 도덕군자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해와 달과 별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
淸白吏(청백리)가 따로 있는가
남을 섬겨라
세상의 낮은 곳을 보아라
현실을 바로 보아라
진실을 이야기 하라
아무도 보아주지 않은 곳에 들꽃이 미소를 짓는다
淸白吏(청백리)가 따로 있는가
향기를 날린다
벌들에게 꿀을 나누어준다
꽃가루를 묻혀준다
그래도 나는 얻는게 있어
아름다운 열매로 생명을 낳거든
고맙다, 감사하다
결국은
사랑한다
아름답다
이것이 淸白吏(청백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