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와 순교는 예언자의 운명이 아닙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강론>
(2024. 8. 29. 목)(마르 6,17-29)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6,17-21ㄱ).”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6-29).”
1) 여기서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만 보고,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보호하려고 했고,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것은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잠깐 가두어 놓았다가 다시 풀어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을 살피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적당한 때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헤로디아는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로데가 그런 헤로디아를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20절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는, “백성들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헤로데가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하며”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잃고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임금 자리를 유지하려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백성의 지지가 중요했습니다.
만일에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는 그 책임을 헤로데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했으면서도 경청하는 척 했다는 뜻입니다.
21절의 “좋은 기회가 왔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는 뜻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에 대해서
당시의 백성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헤로디아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2)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경솔함과
경망스러움을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과
자존심이 손상된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23절).” 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의 영주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왕국’ 자체가 없었고, 자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의 절반을 로마 황제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줄 권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헤로데 자신도 자기의 약속이 헛되다는 것과 자기의 맹세가
거짓 맹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다가
권력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순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예언자가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을
‘예언자의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모두 회개했다면, 또 헤로데와 헤로디아도 회개했다면,
요한이 박해받고 순교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것,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예언자들의 순교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우리 교회가 수없이 겪었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겪고 있는 박해와 고난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 뜻을 거역하는 범죄일 뿐입니다.
물론 순교자 자신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꺼이 하나의 밀알이 된 분들입니다.
그래도 박해와 순교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또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인죄를 지은
헤로데 같은 자들을, 하느님께서는 왜 내버려 두시는가?
그런 박해자들에게 바로 천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헤로데 같은 자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잃은 양이고,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지 않고 기다리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다가
권력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순교’입니다.
예언자들의 순교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범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