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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뱀과 놋뱀
민 21:1-9
1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1-9 / [가나안 사람과 싸워 이기다] 가나안 남부 지방에 사는 아랏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다림 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과 싸우러 나왔다. 아랏이 이스라엘 백성을 무찔러 몇 사람을 사로잡아 끌고 갔다. 2)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여! 우리가 이 백성을 모두 쓰러뜨리도록 해주신다면 우리가 전리품을 모두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우리가 저들과 저들이 살고 있는 성읍을 모조리 쓰러뜨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서원하였다. 3)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읍까지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파멸'이라는 뜻으로 호르마라고 지어 불렀다. 4) [구리뱀] 이스라엘 백성은 호르산을 떠나 에돔 땅을 비켜 돌아가려고 홍해 길로 갔다. 이렇게 길을 돌아가자 힘이 든 백성들은 분통을 터뜨리면서 5)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 광야까지 끌고 나왔소? 도대체 이곳에서 죽일 판이오? 여기는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지 않소? 만나를 먹는 데도 이젠 진절머리가 났소.' 6)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곳에 불뱀들을 보내셨다. 많은 무리가 그 불뱀에 물려 죽었다. 7) 무리가 모세에게 몰려와 애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당신께도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시고 제발 우리를 위해 뱀들이 사라지도록 여호와께 기도해 주십시오' 모세가 우글거리는 불뱀을 없애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자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매달아라. 누구든지 불뱀에 물린 사람이 그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나을 것이다.' 9)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다 매달아 놓았다. 불뱀에 물린 사람이 이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나았다.
이스라엘은 아랏에서 승리를 경험했지만 에돔을 피해 돌아서기는 길이 힘들어 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로 깨닫게 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호르마를 점령하다(1-3) ‘은퇴하다’는 뜻인 아랏은 헤브론 남쪽 사막 지역에 있습니다. 아랏의 왕은 이스라엘이 정탐해 온다는 것을 알고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몇 명의 포로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서원하며 가나안에서 첫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다 멸하리이다’(2)라고 말한 것은 전리품을 취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넘겨 드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명분이 있고 목적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다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리하여 승리하게 하셔서 선한 증거를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한 이스라엘은 그 지명을 아랏에서 ‘바쳐진’이라는 뜻인 호르마로 바꿉니다. 자신들이 남긴 선한 증거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에돔 땅을 우회하다(4-5) 이스라엘은 에돔의 방해로 길을 우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아랏은 진멸하셨으나 에돔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회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가까이 두고 우회하게 되자 광야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가나안에 도착하는 시간이 멀어지자 그 길을 택하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성경은 이를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합니다. 다 바쳤다는 뜻으로 호르마를 기념하였지만 이스라엘의 내면에는 아직 다 바쳐지지 않고 남은 것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분명히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고, 승리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모든 여정 결코 쉽고 순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하나님께 바쳐지지 못하고 사람이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뱀과 놋뱀(6-9)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이스라엘을 불뱀으로 징계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이 뉘우치자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놋뱀은 구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불신앙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놋뱀이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되돌리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적용: 호르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에돔을 우회하게 하시는 하나님, 불뱀의 징계와 놋뱀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통해 이스라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당신의 삶의 경험과 비교해 봅시다.
회개는 영혼이라는 밭을 경작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농부는 땅을 일구고, 자갈을 솎아내고, 땅 속에 박힌 그루터기들을 뽑아 버립니다. 회개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밭으로 들어오시도록 초대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곳에 탐욕의 돌들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제힘으로는 빼낼 수가 없습니다. 울타리 주변에 있는 죄의 나무들이 그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 있습니다. 또 여기 흙은 메말라 있습니다. 씨를 뿌리기에는 너무 굳어버렸습니다.” 회개는 영혼의 밭을 일구시도록 하나님 아버지를 초대하는 일입니다.
< 설 교 >
바라만 보아도
민 21:4-9 / 홍인식 목사
문제의 발생
오늘의 본문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는 한 고통 어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괴상스러운 병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그것을 뱀에 물려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받던 중 하나님의 지시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서 걸어 놓고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들었더니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누구나 병에서 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했던 여러 가지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으며 또 그것으로 인하여 발생한 그 많은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현재의 삶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죄, 신뢰의 부재
먼저 성서의 기록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하고 있었던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뢰의 부재였습니다. 성서는 신뢰의 부재를 바로 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원인은 죄였습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4b~5a)
죄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현실의 행복을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늘 불평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죄(신뢰의 부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삶에 매달리게 하거나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5b)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재의 광야의 삶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많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삶과 현재의 삶을 비교하면서 옛날의 삶이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먹고 있는 음식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생활하고 있을 때 얼마나 잘 먹었겠습니까?
잘 먹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정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착취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튼튼한 후손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공급되던 음식들도 이러한 정책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열악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입니까? 현실의 행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부재, 죄라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서 희망을 뺏어갑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뒷걸음을 치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독뱀이 되어서 우리 모두를 물어버립니다. 독뱀에 물린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먼 곳만 바라보다가 현실의 삶에서 그만 죽어갑니다. 우리는 오늘 독뱀에게 물렸습니까?
신뢰의 부재: 싸움과 혼란
죄(신뢰의 부재)는 한 공동체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들고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공동체는 느닷없이 나타난(성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보냈다고 기록합니다)뱀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마구 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린 사람들은 죽거나 큰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뱀은 무엇입니까?
고대에서 뱀이 상징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자 그들에게는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지혜를 쏟아 놓기 시작합니다. 죄로 물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지혜는 독뱀과 같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공동체를 혼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지혜는 독뱀이 되어서 나를 물고 또 이웃을 물고 모든 사람을 물게 됨으로서 전체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독뱀처럼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파괴적인 것입니다. 혼자만이라도 살겠다고 하는 생각은 결국에는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도 죽게 만드는 불 뱀 그리고 독뱀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정복을 성공리에 마친 후 곧 바로 개시한 작전이 아이 성 공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 공략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용이하리라고 생각하던 아이 성 작전은 큰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원인은 단 한 가지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신만을 위한 행위였습니다. 아간의 행위는(어떻게 해서든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살겠다는 지혜) 독뱀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전체를 물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간 속에 있던 독뱀이 나와서 온 이스라엘을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이 같은 독뱀들이 있습니다. 죄로 물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러 종류의 독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독뱀들을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쏟아내어서 나 자신을 물게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이웃들을 물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독뱀이 되어서 우리와 우리의 이웃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혹시 마음속에 독뱀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독뱀 때문에 오늘 내가 고통을 겪고 있고 또 나의 이웃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죄와 상처
죄의 문제는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독뱀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독뱀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상처가 남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앓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 때문에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삼으면서 더욱더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어갑니다. 죄의 문제는 당장 눈앞에 나오는 결과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가 남기고 가는 상처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죄의 상처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 남북의 문제 등을 살펴보면 죄의 상처가 그 원인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독뱀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 하나의 잘못과 죄가 나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정치가가 저지르는 부정부패는 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죄의 상처로부터 치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뱀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게 되는 형편에 이르게 되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들은 회개합니다. 자신의 잘못들을 뉘우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서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7절)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을 내려서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 위에 매달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독뱀으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병과 상처로부터 깨끗함을 얻도록 하십니다. 사람들은 구리 뱀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구리 뱀을 바라만 보면 그들은 깨끗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죄로 인한 상처와 병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온통 죄악 된 것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도 바라만 보아도 나을 수 있는 구리 뱀이 있어야 합니다.
독뱀으로 물린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는 구리 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독뱀으로 상징되는 ‘죄악 된 지혜’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구리 뱀으로 상징되는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뱀으로 인하여 입은 상처는 뱀으로 인하여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서는 독뱀과 놋 뱀을 절묘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낫더라.”(9절)
그렇습니다. 뱀에 의한 상처는 우리를 무는 독뱀과는 전혀 다른 구리 뱀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바라 볼 수 있는 구리 뱀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구리 뱀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라만 보아도 우리의 마음이 시원해지고 깨끗해지는 구리 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더러움에 시달리고 있고 오염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더러워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삶의 더러움을 제거하지 않고서 올바른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라 볼만한 구리 뱀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처럼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우리의 삶과 죄로 인한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들을 치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죄를 경험하셨으나 죄하고는 상관없으신 분, 죄의 상처로 인하여 고난을 겪었으나 죄 자체를 향하여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민수기의 구리 뱀과 비견되어 지고 있습니다. 구리 뱀으로서 매달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만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해방되고 죄로 물든 마음이 깨끗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독뱀들 때문에 희생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을 통하여 세상의 독뱀들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구리 뱀이 되셔서 독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만 보아도 우리는 독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구리 뱀을 바라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예 배
먼저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소중하게 여길 것을 권고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씩이라도 반드시 예배와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재미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진지하게 예수님의 교훈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얘기는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TV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 됩니다. 설교에서까지 개그를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그러면 우리들의 삶은 개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가벼운 이야기, 흥미로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점차 가벼워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균형 있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들을 들어야 합니다.
독뱀과 같은 가벼운 이야기를 통하여 오염되고 있는 우리의 삶은 구리 뱀과 같은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통하여 치유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진지하게 함으로서 우리는 독뱀으로부터 물린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독뱀의 독으로 독하게 된 우리의 마음을 구리 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순화시키게 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두 번째는 일상생활에서 본을 받을 만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봄으로서 독뱀의 독으로 인하여 오염된 우리들의 삶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삶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땅위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까? 이처럼 우리는 흔히 본받을 만한 사람들을 주로 소위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보곤 합니다. 특별히 물질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우리의 본받을 만한 존경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런 분들이 다 뭔가를 이룬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이런 분들의 삶을 정작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아들들에게 이런 사람들의 전기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분들의 전기는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기보다는 열등감, 경쟁심과 욕심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성 프랜시스, 성 클레멘스, 성 폴리카르포, 성녀 모니카, 성 베네딕토, 성 베드로 다미아노, 성 도미니코, 성 보나벤투라, 성녀 카타리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등 위대한 성자들의 삶, 마더 테레사, 다석 유영모 선생,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등의 삶의 모습은 큰 감동을 줍니다. 이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이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마음과 삶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사랑에 관한 다음 일화는 우리들의 가슴을 오늘까지도 울리고 있습니다. 하루는 장기려 박사가 병원 문을 나서는데 늙은 거지 하나가 구걸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호주머니에 돈을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수중에 돈이 없다는 장 박사의 말에 거지 노인은 실망해 발길을 옮깁니다. 장 박사는 갑자기 뒤돌아서 그 노인을 큰 소리로 부릅니다. 그리고 양복 속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서 노인에게 전합니다. 수표를 건네받은 노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 종이 나부랭이가 돈이란 말이오?” 라고 말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장 박사는 “이것은 수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돈으로 바꿔 줄겁니다”라고 말하면서 수표를 그의 손에 쥐어줬습니다.
며칠 후, 장 박사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기는 은행입니다. 혹시 수표를 잃어버리신 일이 없으신지요? “웬 거지 노인이 박사님이 사인한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요?” 장 박사는 그때서야 며칠 전 거지에게 준 수표가 생각났습니다. “그 수표는 내가 준 것이니 그리 알고 돈을 그 노인에게 지불해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노년에 병고(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받았습니다. 평생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손수 실천한 한국판 슈바이처 장기려는 1995년 성탄절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의사 장기려는 단순히 사람의 병만을 치료한 의사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기주의로 병든 쓰디 쓴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치료하다 간 사회개혁자요, 인술을 베푼 탁월한 의사였습니다.(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 김은식, ‘그 청년 바보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 같은 분의 삶은 나의 오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세상의 독뱀의 독으로 인해 오염되어져 가는 나의 삶의 모습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닮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의 일생을 바라보면서 오염된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상처로부터 치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구리 뱀과 같이 바라만 보아도 우리의 죄와 죄로 오염된 삶을 깨끗하게 해 줍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고난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에게 바라만 보아도 죄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을 낫게 해주는 구리 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진정 우리를 치유해 주는 구리 뱀입니다. 바라만 보아도 깨끗해지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고 그 분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오직 그 분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만 보아도 치유가 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예배를 회복하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쳐다만 보라 살리라
민 21:1-9 / 변한규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은혜로 엄청난 IMF 사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기도 했고 월드컵 4강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했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고 광야 길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릴 때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공급해 주셨고 물이 없어 목말라 있었을 때 반석에서 생수가 솟구치게 하신 것입니다. 전쟁의 때는 백발백중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도 살필 수가 있습니다. 3가지 내용을 묵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호르마의 승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3절)"여기 호르마라는 말은 파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사람 아랏왕을 파멸시킨 기념으로 붙힌 땅의 이름입니다. 아랏왕이 이스라엘을 먼저 건드렸습니다. 몇 사람을 잡아갔습니다.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는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군사가 많고, 전략이 좋고, 무기가 좋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신 1:30)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란 말은 미리서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이요 미리서 공급해 주시고,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요셉의 경우에 웅덩이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앞서 웅덩이에 들어가셨습니다. 요셉이 웅덩이에 빠질 것을 미리 아시고 앞서 들어가 청소작업을 한 셈입니다. 물을 다 제거해 주셨기에 요셉이 웅덩이에 빠졌으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그가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앞서 사자 굴에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사자들의 입을 봉해 놓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비결을 인간 편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나안을 넘어뜨리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팡이는 모세의 경우 전법이요, 무기였습니다. 그가 전쟁할 때마다 칼과 창으로 싸우지 아니하고 지팡이로 싸웠습니다. 이 지팡이는 기도의 지팡이요, 믿음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로 홍해를 건넜고, 아말렉을 박살냈습니다.
어떻게 지팡이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출애굽기 17:9) 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기 때문이요, 믿음의 지팡이기 때문입니다. 마른 막대기 지팡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여기에 기독교의 비밀이 있습니다. 삼손의 경우 나귀턱뼈가 위력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1,000여명의 블레셋 군
사를 타작마당에서 타작하듯이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윗의 경우 물맷돌도 위력이 있었습니다. 밤톨만한 돌로 육척장군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우리도 만찬가지로 힘이 없고, 부족하고, 자랑할 것 없고, 내놓을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약할 이유 없고, 낙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찬송이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세의 경우에 지팡이 하나로 애굽의 바로도 항복시켰고, 때문에 가나안 사람 아랏왕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호르마 승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모세의 기도
"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7절)"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라고 했습니다. 왜 모세가 기도했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을 형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원망했을까요?
우선 믿음이 성숙치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60점짜리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누가 짜증을 냅니까? 불평을 합니까? 믿음이 부족한 성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하기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바울이 이것을 보였습니다. 아론이 이것을 보였습니다. 훌이 이것을 보였습니다. 원망은 믿는 성도들에게는 금물이요, 불신의 산물입니다. 왜 원망합니까? 믿지 못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건망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원망의 원인으로 간접적인 것은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애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4절) 길이 멀다, 길이 험하다, 이것이 원망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험하지 않은 광야 길을 본 적이 있습니까? 죄값으로 돌고 돌고 먼길을 방황한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하루에 12번이라도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습니다. 세상을 고해라 합니다. 풍랑 없는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원망만 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문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5절) 여기 박한 식물은 보잘 것 없는 양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공짜로 공급받은 만나, 메추라기에 대하여 그들이 불평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싱싱한 생선과, 신선한 부추나 다른 채소를 먹기 원했습니다. 또 그들은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했던 것을 까맣게 잊었던 소치며, 쓴 물을 단물로 만든 사건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광야에는 물이 없습니다. 인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 바로 광야 길입니다.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이 물을 아껴쓰는 검소한 생활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했습니까?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5절)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우리를 언제까지 고생시키려 하시나이까'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배은망덕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이 아직 낫지도 아니했는데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시편에 당부하기를 "...여호와의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 103:2) 우리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미국으로 이민갈 때에 너무 가난한지라 이웃집 핸드슨 부인에게서 20파운드 빚을 지고 떠났습니다. 카네기 어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빚은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50센트씩 저축을 해서 200달러를 만들어 빚을 갚았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칭찬하고 박수까지 했습니다. 카네기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빚은 다 갚았지만 은혜는 다 갚지 못했네요."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아마 모세를 향해서는 '도대체 당신이 누구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했던가요? 그럼에도 그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짜증을 내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이곳 광야까지 우리를 인도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어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6절) 아마 수백 마리 불뱀을 일시에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 아내, 자녀들이 물렸을 것입니다. 곳곳에서 '사람 죽네!' 아우성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을까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회개시킬 목적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비유컨대 '뒤로 돌아 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의 삶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눅 15장의 탕자비유가 교훈합니다. 돼지 우리 속에서만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 뒤로돌아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어려움을 만나 회개를 했어야만 했습니다. 원망의 결과는 불뱀이요, 불뱀은 죽음의 사자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원망하다가 땅이 입을 벌려 250명을 삼키고, 또 원망하다가 염병에 걸려 14,70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일시적으로 회개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 모세를 향하여 범죄하였나이다"(7절) 했습니다. 그리고 호소했습니다. "이 뱀들이 우리를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소서" 모세를 향해서 간청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불뱀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백성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그리고 모세야 외치라 쳐다만 보면 살리라"
'쳐다만 보라 살리라'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이요, 우리가 외칠 말씀입니다. 전도는 '쳐다만 보라 살리라' 외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광야 길을 가는 인생들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이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장대 위의 놋뱀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9절) 여기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독교는 '다만 보라 살리라' 교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뱀에 물려 죽게 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장대에 구리뱀을 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쳐다만 보라 살리라'외쳤습니다. 그러나 불신자 고집쟁이들은 100번을 외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쳐다본 자들은 어땠습니까? 죽을 고생 끝에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의 살 길이 바로 여기에만 있습니다. '쳐다만 보라 살리라'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요 3:16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합시다. '쳐다만 보라 살리라' 예수님을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뜻입니다. 누가 나 같은 죄인을 거듭나게 했습니까? 누가 나 같은 죄인을 의롭다 했습니까?
누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했습니까? 누가 나 같은 죄인에게 영생을 주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하셨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없습니다. '할머니, 예수 믿고 영생 얻었으니 기쁘시죠?"
"나 예수 믿기는 한데 영생은 못 얻었어" "할머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요?" "믿지요" "함께 읽을까요?" 요 3:36을 같이 읽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있을 것'이고도 아닙니다. 지금 '있고'입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나도 영생을 얻었네요" 그러면서 기뻐하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기뻐하시고, 찬송하시고, 전도하십시오. 농부는 씨만 뿌리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물도 주어야 되고, 거름도 주어야 되고, 벌레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우리 모두도 열심히 성경 공부해야 하고 부지런히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해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의자를 빼 버리면 모두 넘어집니다. 성도들에게서 예수님을 빼 버리면 모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놋뱀되신 예수님만 바라보십시다. "쳐다만 보라 살리라"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 의지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남은 생애를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민 21:1-9 / 이성우 목사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히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덟 개 항목의 고백 문으로 되어 있는 우리 감리교회 신앙고백문의 제4항을 보면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은혜로우며 활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우리 주변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이단종파와 사이비 종파가 극성스럽게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우리 자신의 믿음을 건강하게 지켜나갈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나감으로써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달려가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정말 정신을 차리고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얼마 전 구미에서 있었던 이슬람 관련 선교세미나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멀지 않아서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이슬람이 대두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중동의 석유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막대한 자금과 세계적인 연결망을 통한 조직적인 선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이슬람은 가장 강력한 반기독교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내에서는 가장 엘리트들이 공부하는 학교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와 카이스트 대학교에서도 이미 이슬람 예배가 공식적으로 드려지고 있는 상황이고, 곧 이슬람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정부의 인가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 대학이 설립되게 되면 국내에서는 가장 좋은 대학으로 인기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누구나가 쉽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함께 신앙적인 철저한 무장을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본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이기 보다는 오랜 시간 그냥 교회 안에서 지내면서 듣고 본 정도의 연륜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제 멋대로의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와 함께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자기 입장에서 자기 생각대로 설교의 의미를 곡해시키거나 굴절된 상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만 설교자의 또 하나의 고충이기도 합니다.(어느 부흥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교 - 한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들음, 마치고 물어보니 자기 아들 생각하고 울었다고 함)
성경 66권 모두가 중요하지만 제가 공부하고 이해한 바로는 그 가운데서도 구약성경이 매우 중요하며, 구약성경 39권 가운데서도 소위 ‘모세오경’이라고 불리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대단히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세오경은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나머지 구약성경 전체의 밑그림과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이 모세오경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이는 나머지 성경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는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아래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민수기 21장 1절-9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세오경의 나머지 네 권의 성경들과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민수기라는 성경이 어떻게 연결되어지며,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모세오경 전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들이 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세오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뼈대를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 가운데, 가장 먼저 ‘창세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은혜로 선택하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면,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그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사랑의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비로소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게 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레위기’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들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의 대표적인 제사제도가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민수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광야를 무대로 해서 사랑의 밀월여행이 펼쳐지고 있는 장면을 말씀하고 있으며,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설교의 형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갈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 과거의 시간 속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축복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2년 2개월 만에 비로소 시내 산을 출발하기에 앞서서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대 진군을 시작하면서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위해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로서 20세 이상 남자들의 숫자를 세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대장정을 위한 제반 준비들에 대한 말씀이 10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11장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인구조사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26장 직전, 25장까지의 내용들은 민수기의 가장 두드러진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베푸심, 그리고 여기에 비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속되는 원망과 불평, 배은망덕한 사랑의 배반이 서로 교차를 이루면서 되풀이 되고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말씀의 흐름 가운데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한결 같이 지속되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리고 사랑의 배반과 같은 불신앙적인 행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에서 비롯된 징계의 결과는 여러 가지 질병과 죽음, 그리고 전쟁에서의 패배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 아침에 우리에게 들려주신 본문 말씀인 21장 1절-9절까지의 말씀도 이러한 말씀의 커다란 틀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고, 이 말씀이 오늘 아침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도 아주 분명해지게 된 것인데,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아주 분명하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일과 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토해내며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적인 행동을 했던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전에 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과 절망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 길로 다시 발길을 옮겨서 약 38년간의 징계의 기간 동안 광야 방랑 생활하다가 비로소 그 기간을 끝내고 다시금 원래의 출발지였던 가나안 땅의 남방 경계였던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해서는 가나안 땅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에돔 족속이 그들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아서 가데스에서 호르 산에 이르는 험한 길로 힘겹게 이동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전장인 20장의 내용입니다.
호르 산에 도착한 그들은 그 곳에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론의 죽음을 통해 슬픔에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승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기를 향해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며 불신앙적인 행동을 일삼는 그의 백성들을 여전히 돌보고 계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인 아랏 족속이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싸움을 걸어와서 몇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지만 온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과 더불어서 싸워 승리하게 됨으로 가나안 족속과의 첫 번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 뱀과 놋 뱀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호르 산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족속 때문에 험한 길로 돌아서 가나안 땅의 동쪽 방향으로 서서히 진군해 가게 되었는데, 그 길이 워낙 험준해서 다시금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 불 뱀을 보내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불 뱀에 물려 죽어가게 되자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으로 불 뱀의 형상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게 하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것을 쳐다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가 다 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셔서 신실하게 그 사랑의 약속을 지켜 가시며, 그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 그리고 사랑이 풍성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숱한 불신앙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가나안 땅의 접경까지 인도해 오셨음을 보여줌으로써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성취해 가시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가나안 족속과의 처음 전쟁이었던 아랏 족속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든지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어떤 장애물이라도 넘어서게 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불 뱀과 놋 뱀 사건을 통해서도 징계를 통해서 죄를 떠나게 하시며, 징계 중에도 살 길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호르 산에서 비스가산까지 진군해 가는 동안 비록 거칠고 험한 길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이 물을 구하지 않았지만 브엘이라고 하는 곳에 오아시스를 준비해 주셔서 물을 마시우게 하셨고, 아랏 족속에 이어서 가나안 동편 땅에 살고 있었던 강대한 족속인 아모리 족속과 바산 족속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배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땅 정복을 관철해 나가시는 능력에 찬 하나님의 후원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이 험준했던 것처럼 힘들고 불안하며 염려스러운 상황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진해 감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그리고 사랑의 돌보심을 통해서 승리의 전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그리고 사랑의 돌보심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6)치유 공동체
민 21:4-9 / 이동원 목사
언젠가 리챠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교회의 추천도서로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던지는 중요한 물음은 오늘과 같은 소위 종교 다원화의 시대에서 우리들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우리와 다른 신념 혹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접촉해야 하느냐의 교양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종교가 좋다는 식의 무분별한 포용주의가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 것처럼 내가 속한 종교외에 모든 것은 다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독선적 배타주의도 기독교인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석탄일을 지났습니다만, 사실 저는 기독교의 복음이 이 땅에 소개되기 전에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가 이 땅에 전파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문화와 윤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런 종교들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출발한 기원을 기억하십니까? 인도의 궁궐안에서만 자라오던 어린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가 어느 날 스승과 함께 백성들이 사는 궁궐 밖으로 나가 성안을 다니다가 늙은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늙어야 하고, 왜 병들고 왜 죽어야 하는가의 소위 생노병사의 문제를 고뇌한 데서 그의 출가가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고타마 싯다르타는 올바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의 깨달음이 그가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만, 우리는 적어도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직면하는 문제임을 공감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상황, 그러니까 호르산을 떠나는 출애굽 40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미 대부분의 출애굽 세대는 광야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호르 산을 떠나 직접 에돔 땅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시온 게벨’로 내려가 다시 북상하는 우회로를 선택하게 됩니다.(출애굽 지도 참조) 그러나 이 험로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불평하게 되고(4-5절) 그 결과로 뱀에 물려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6-7절) 그리고 백성들은 다시 중보자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치유를 기도해 달라고 호소하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질병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치유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1. 문제의 원인을 바로 진단해야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가 인간 고통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유사성이 존재합니다만, 그러나 이 고통의 원인의 진단에서는 기독교는 불교와 다른 관점을 갖습니다. 성경은 인간 고통은 우연한 생의 보편성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죄가 고통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이 직접적으로 개인의 죄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욥의 케이스처럼 자신의 죄와 상관이 없이도 고통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고통의 뿌리에는 내 이웃의 죄라든지, 한 사회의 집단적 죄악 혹은 조상의 죄 문제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버스 운전자의 잘못된 부주의 음주 운전으로 우리가 사고를 만난 경우 그것이 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운전자의 죄를 간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많은 환경 재앙의 경우 자연을 소홀히 다룬 전체 인간의 죄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박한 일이고 주의할 일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올바른 진단이 올바른 치유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치유가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7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여기 “우리가 범죄했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것을 회개라고 일컫습니다. 회개란 돌이킴, 방향의 전환을 뜻하는 말입니다. 누구도 죄에 대한 자각과 죄로부터의 돌이킴이 없이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행3:19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신앙의 입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병든 실존의 치유의 시작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처방을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은 병을 초래한 잘못된 습관이나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단입니다. 진단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제 의사의 처방을 수용하고 따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최근에 당원(당뇨병 환자군)에 가입했습니다만, 제가 정말 치유를 경험하려면 식생활이나 운동등의 처방에 얼마나 잘 따르느냐가 치유의 관건이 되겠지요. 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행진의 마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불 뱀에 물린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8절에 하나님의 처방이 제공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좀 이상한 처방이 아닙니까? 뱀(불 뱀)에 물린 자들에게 뱀(놋 뱀)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메시지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으로 선포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먼 훗날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방문한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구도자에게 어떻게 구원의 처방을 말씀하셨는지-기억하십니까?
요한3:14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무슨 뜻입니까?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장대위에 놋 뱀을 매다시던 하나님께서 죄로 죽어가는 인생을 살리시고자 인자(사람의 아들)되신 예수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되게 하시사 십자가에 매다시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 기막힌 유비(analogy)를 주목하십시오. 뱀에 물린 백성을 위해 뱀을 장대에 매다시던 하나님이, 죄를 범한 인류를 위해 예수를 십자가라는 장대에 우리 대신 죄인을 삼으시고 매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마다 치유를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요3:14에 이어지는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다음 구절이 요3:16인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적용하여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뱀에 물린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사 장대위에 놋 뱀을 주셨으니 그 놋 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새 삶을 얻으리라” 다시 본문 9절을 보실까요?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인 것입니다. 이 처방을 믿음으로 수용함이 바로 구원이요, 새 삶의 시작이요, 진정한 치유의 순간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처방을 전파해야 합니다.
자, 믿음으로 장대위에 놋 뱀을 보고 치유 받고 새 삶을 얻은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잠잠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죽음의 병에서 살림을 받았다면 아직도 이 구원의 처방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이 소식을 감격으로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인 것입니다. 우리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그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라고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1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994년 1월 첫 주일에 탄생 예배를 드린 우리는 그해 5월에 양재동 횃불 회관에서 우리 교회 탄생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창립 예배 및 창립 전도 축제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창립 기념예배를 드리고 오늘 오후 6시에는 임직식을 갖고 오는 수요일부터 사흘간 ‘셀 컨퍼런스’ 축제를 갖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런 축제를 갖는 이유도 우리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광야 길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이웃들에게 예수가 우리의 구원이시고 소망이심을 선포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이 길을 걷는 이 무수한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일 때마다 이 소식을 효율적으로 함께 전하고 나눌 공동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복음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존재 양식을 알리는 행2:47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생동하던 초대 교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초대 교회는 전도의 열정으로 가득한 진실로 dynamic church 였습니다.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 입국 통로를 걷다 보면 dynamic korea의 선전판을 대하게 됩니다. 저는 그때마다 우리 교회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얼마나 주님의 치유의 복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가득찬 생동하는 교회인가를!
우리 교회가 지난 2002년부터 셀 교회로 전환한 것도 이 셀 모델이 우리 교회를 진정 ‘전도 지향적 교회’로 출범시키는 가장 효과적 전략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셀 교회로 모일 때마다 빈 방석 혹은 빈 의자 혹은 포도송이를 놓고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은 전도하기 위한 사역의 꿈을 놓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특히 작년 한해 2007년에는 우리 교회 등록자의 89,5가 교회 배경이 없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더 이상 수평이동을 의존하는 교회가 아니라, 진실로 전도하는 교회로 서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처럼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우리 교회가 이 꿈을 붙들고 존재하는 한 교회의 머리되신 주께서 우리 교회의 미래를 또한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월과 함께 지역 교회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예배의 스타일도, 리더십의 체질도, 교회 행정의 방법도 달라 질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만은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인간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희망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곧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뿐이라는 것-이것이 우리 교회의 변함없는 강단의 메시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역량은 추후에도 변함없이 믿지 않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와 선교에 집중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인생을 복음의 말씀으로 치유하도록 정성을 다해 섬기는 일-이것이 우리 교회의 지속적인 존재 이유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곧 완공될 가평 필그림 하우스도 광야 길에 지치고 힘든 영혼들을 치유하는 말씀의 집으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14년전 작은 불꽃으로 우리를 출발하게 하신 우리 교회의 주인께서 이후로도 진정 우리 교회를 복음의 아름다운 횃불로 타오르게 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지난 14년 이 광야 길에 아름다운 동행자로, 동역자로 함께 섬겨주신 모든 성도들에게 담임 목사로서 가슴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순종과 회복의 상관계수
민 21:4 / 노경모 목사(함께하는교회)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상관이 있나를 살펴보고 그것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을 상관계수라고 합니다. 상관계수가 +1 이라고 하면 그것은 100%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수치가 -1이면 그것은 반대로 상관이 있는 것이고 수치가 0이면 그것은 서로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과 소비의 상관계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만일 1이 나왔다면 그것은 100%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가 많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1이 나왔다면 반대로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100%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만일 0이 나왔다면 소득과 소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종과 회복, 또는 순종과 치유의 상관계수를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회복과 치유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회복과 치유에 관한 상관계수가 높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것에 매어달려야 합니다. 올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나라의 분야별 최고의 의사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명단 중에 반가운 이름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의 동생입니다. 종합병원 유방외과의 의사인데, 요즈음 유방암 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방암 환자들이 이 의사한테 수술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올인합니다. 한번 진료를 받으려면 몇 개월을 기다립니다.
왜 이렇게 유방암 환자들이 이 의사한테 올인합니까? 이 의사와 성공적인 유방암 수술과의 상관계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사에 비해서 조금 높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높은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올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치유받고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재쳐 놓고 그것에 올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폐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뒤로 미루고 폐암을 치료받기 위해서 올인을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애굽 땅을 나온 이스라엘 배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들어섭니다. 38년 동안 광야길을 가다가 호르산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이 호르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름길로 올라가지 않게 하시고 에돔땅을 우회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하게 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렇게 돌아가게 하신 것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조금만 참고 인내하고 순종했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한결같이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처받는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모세도 그 누구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왕 바로를 꺾어시고 바로의 손에서 꺼집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하시고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불기둥으로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지금까지 받아오고 누려왔습니다.
이제 호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이 아닌 에돔땅을 우회하는 길로 이끄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이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을 것이야 라고 믿고 감사하면서 따라가야 하는데 그들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나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마음이 상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모세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여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냈습니다. 독사이지요. 이 불뱀들이 백성들을 물었고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께 중보기도해서 우리를 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이때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어시고 해결책을 주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았습니다. 뱀에 물린 자들은 누구든지 장대위에 만들어 매단 놋뱀을 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위에 달려 있는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사는 것입니다. 보라고 하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 보지 않은 자는 다 죽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다 살았습니다. 회복과 치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갔을 때,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나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간절한 권유로 마지못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하여튼 순종했더니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우리 모두다 회복되고 치유되기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면 됩니다.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할찌라도 순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순종에 대해서는 의지가 없다면 치유와 회복은 희망사항으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우리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처방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대로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폐암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의사는 이렇게 주의사항을 줍니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둘째, 술 담배를 하시 마십시오. 셋째, 적절한 운동을 하십시오. 넷째, 심호흡을 하십시오.
이렇게 의사가 주의사항을 주면 수술을 받은 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수술 받은 환자가 오래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놋뱀은 놋으로 만든 뱀의 형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뱀에게 물려서 고통스러운데, 내가 지금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놋뱀을 바라본다고 살 수 있나? 라고 귀찮게 생각하거나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계속 버틴 자들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바로 놋뱀에 물린 자들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회복될 수가 있고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각종 각생이 병든 자와 약한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연약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인 모든 약함과 상처와 고통과 병을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 앞에 이렇게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간절히 치유와 회복을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으로 미리 다 겪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대로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려 오신 진정한 의사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치유가 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시는 의사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세상적인 것에 몰두하거나 기웃거림으로 인해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더 확대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행동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상처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드러난다는 것은 치유와 회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치유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과 치유를 원한다면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올인해야 할 것이입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치 중환자가 의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듯이 말입니다. 순종할때만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순종함으로 진정한 회복괴 치유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시험에 드는가?
민수기 21장 4-9절 / 조영식 목사
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주 초등학교 이후에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18세의 청소년이 무려 8천㎞를 날아가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이슬람국가'(IS) 테러 조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18세 청소년을 IS로 향하게 한 것일까요? 김군은 초등학교 졸업 후에 전혀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김군의 성향은 인터넷 공간에서 IS을 동경하게 되고 결국에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즘 김군처럼 정체성 확립이 안 된 청소년들이 이슬람 무장 테러 조직에 가입의사를 타진한다고 합니다. 삶에서 무엇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된 공동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합니다. 만약 김군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소속감을 느꼈다면 IS에 합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외톨이처럼 느끼는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소속감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꿈꾸어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길을 떠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마음이 상하여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면서 왜 시험에 들었는지 깨닫고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에 시험 들지 않도록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마음이 상한 이유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성령 충만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령 충만은 커녕 시험 들어서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험 들어서 불 뱀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6절). 그들이 시험 들어 불 뱀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광야의 길을 가다가 마음이 상했기 때문입니다(4절).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상할 때 시험 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평탄한 ‘왕의 대로’가 있는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였기 때문입니다(4절). 이미 그들은 광야에서 38년 동안 방황했는데 평탄한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우회하여 힘든 길로 돌아가는 현실에 마음이 상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상한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먼 길을 갈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서 능력을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법칙은 빠른 것보다 “주님과 함께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모든 것이 더 빨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빠른 세상에 떠밀려 살다보면 하나님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도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 만나는 것을 잊어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영적싸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가느냐?”에 초점을 맞출 때 시험에 들지 않고 은혜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망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5절).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원망이 합당한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우회했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길을 우회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면 원망이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이 길을 우회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 비용까지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에돔 족속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했습니다(민20: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름길로 가지 못한 원인은 에돔 족속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길을 막는 에돔 족속이 아니라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노하는 원인을 살펴보면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애꿎은 집사람에게 화풀이 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여하튼 누구에게 화풀이 하든지 분노의 원인은 “자기 기준이 얼마나 강하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기준에서 벗어나 지름길로 갈 수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지금도 자기 기준에 매달리는 신앙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 우회하는 길로 갈지라도 주님의 뜻을 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5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날마다 새벽이슬처럼 내려주신 만나는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불평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원망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은혜를 하찮은 것이 되게 합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기준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불평하여 하찮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여파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하찮게 여기다 보니 주님과 만나는 것이 싫어지게 됩니다(5절).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싫어져 가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가장 귀한 것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기준대로 되지 않는다고 시험에 들면 불 뱀에 물리는 것입니다(6절). 시험 들어서 불 뱀에 물리면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모세는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본즉 살리라고 합니다(9절). 당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본즉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놋 뱀을 바라보기 전에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7절). 그들은 회개를 통하여 장대 위해 달린 놋 뱀을 바라봄으로 용서받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신의 죄악을 회개함으로 바라보는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이 바라보는 십자가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 중의 하나도 회개 없는 십자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장대 위해 달린 뱀이 왜 놋 뱀입니까? 놋이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하면 놋 뱀이 대신 심판을 받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회개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대신 심판을 받게 됨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회개 없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회개함으로 바라보는 십자가가 되어서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시험 들어서 불 뱀들의 공격을 받는 이유는 지름길이 아니라고 마음 상하고, 자신의 기준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주님이 주신 가장 귀한 은혜를 하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디 회개 없는 십자가가 아니라 회개함으로 바라보는 십자가가 되어서 진정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민수기 21:4-9, 히 12:2
찬 양 : 259, 260, 336, 439.
할렐루야!!
오늘도 온갖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이 복되고 거룩한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느덧 5월이 다 가고 있습니다.
5월의 여왕이라고 하는 라일락 향기가 우리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고 이제는 아카시야 꽃들이 온 산을 하얗게 수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1년의 농사 중에 가장 중요한 모내기도 마무리가 되어 일찍 심은 모들은 제법 뿌리를 잡고 파랗게 어울려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우리 인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늙어만 가고 어느 샌가 우리 곁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무상을 노래하였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우리네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고 서글픈 인생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영생의 세계 곧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해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에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전15:13-19)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 위로를 받으시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믿을 때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주님이 나의 일생 가는 길을 인도하실 때, 나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아 멘!>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맘에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아 멘!>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민수기 21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생활 40년을 거의 마쳐갈 무렵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고 머물고 있는 광야에 난데없이 뱀의 떼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에 들어가 사람들을 마구 물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와 생수를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재난을 당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들은 바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이 시대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병에도 걸리지 않고,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하고, 자식들은 감람나무처럼 잘 자라고, 가정은 포도원같이 평화로워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모세도, 다윗왕도,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 부활승천 하신 후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환난이 적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더 크게 당합니다. 문제는 환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하셨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렸습니까?
(1)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원망하는 자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습니다. ‘누구 때문에, 또 무엇 때문에’ 등등 불평을 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열 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려고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비방을 합니다.
(고전10:10-11)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러면 어떤 때에 원망을 합니까?
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원망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기적과 이적으로 저들을 인도하였고 홍해를 갈라 걸어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며 추위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기를 40여 년, 그리고 물이 필요하면 반석에서 생수를 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고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② 어려운 일 당할 때 원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절대로 공짜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고난과 역경과 환난의 너울을 쓰고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모르는 사람은 당장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③ 고난이 하나님의 채찍과 축복인줄을 모르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2) 그들은 입술을 잘못 놀림으로 불 뱀에 물렸습니다.
본문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죽게 하시겠습니까? 자기의 백성을 죽이려고 40년 동안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셔서 인도하셨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이제 “죽게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은 죽을 일이 생기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고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원래가 광야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굶주리지 않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고 생수를 주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을 밝힐 뿐 아니라 추위에 떨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3)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찮은 식물이라고 악평을 하였습니다.
본문 5절 말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식물을 싫어하노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 사막가운데서 하찮은 식물이라도 주신 것을 감사했더라면 더 좋은 것을 주셨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그들은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결코 하찮은 식물이 아닙니다.
(출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고 하였으니 분명 그들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시78:29)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는 최고급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쁘다고 하찮은 식물이라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만나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2. 불 뱀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불 뱀은 사막에 살고 있는 독사의 종류로서 몸이 붉은 색이고 물리면 불에 덴 것처럼 불같은 열이 오르다가 죽기 때문에 불 뱀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9, 20:2 절 말씀에는 “뱀은 곳 마귀니라” 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해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였고 아담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불 뱀에 물렸다는 것은 마귀 사탄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며 육신을 가지고 있고 사탄은 영체이기 때문에 사탄을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마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불 뱀과도 같은 마귀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마귀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항상 깨어서 기도하면 절대로 마귀 사탄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항상 기쁨으로 찬송과 감사생활하고 충성된 믿음생활만 하면 사탄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3. 불 뱀(마귀)에게 물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마귀에게 물리면 죽게 됩니다.
아담과 해와는 사탄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회개할 기회가 있음에도 회개치 않고 숨어만 있다가 결국 그들은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2) 불 뱀에 물린 데는 약이 없습니다.
불 뱀의 독은 삽시간에 퍼져서 온몸이 붓고 고열이 오르다가 불에 타죽은 것처럼 온몸이 새까맣게 되어서 죽게 됩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해독제가 없습니다. 불 뱀의 독은 바로 죄악의 독이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약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에 죄 사함 받고, 고침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4. 불 뱀의 독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치료의 방법이 있습니다.
(1) 주의 종을 찾아가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어려운 일 당할 때 주의 종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약 5:14-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주의 종이 기도할 때 병 고침도 받고 죄 사함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왕하 4:1-7절의 말씀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생도 중에 한 아내가 부채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 엘리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왕하 5:9-14 말씀에는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 나라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와서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을 때에 그의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삼상 7:1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회개의 성회를 할 때 불레셋이 침략해 왔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침착하게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삼상7: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마가복음 5:22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의 딸이 죽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간구할 때 그의 죽은 딸이 살아나게 되었고 12년을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2)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죄악의 독을 제거하는 데는 먼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행2:37-3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니느웨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온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욜2:12-14)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다윗왕도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말에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백성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8절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쳐다보라고 하였습니다.
9절 말씀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장대 위에 놋으로 불 뱀의 형상을 만들어 달아 놓고 “쳐다보라” 고 할 때에 순종하고 쳐다 본 사람은 불 뱀의 독이 깨끗이 가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순종치 않은 사람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불 뱀에 물렸으면 해독제를 먹든지 약초를 붙이든지 해야지 그까짓 구리 뱀 쳐다본다고 사느냐’ 고 하면서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종들은 예나 지금이나 기도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성도들을 인도합니다. 주의 종이 성도들에게 무슨 직분을 맡기든지 또는 무슨 일을 명하든지 순종할 때 불 뱀과 같은 마귀의 독이 빠져나가고 치유 받아 영원히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5. 그러면 장대 위에 놋 뱀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입니다. 죄악가운데 빠진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사탄에게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주시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골고다 십자가 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죄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누구든지 사탄에게 얽매어 죽게 된 자도 이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누구든지 환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자도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누구든지 질병이나 고통을 당하는 자도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이 구원의 방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만드신 은혜요 은사요 축복인줄로 믿습니다.<아 멘>
이와 같이 에돔 땅에서 구원의 방법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그 구원은 1600여 년이 지난 후 저 골고다 산상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보혈을 흘리심으로 구속의 도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가 높이 솟아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곳에 당신의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당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런 뜻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주전(BC) 1540년경 에돔 땅에서 불 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여 죽게 한 사탄 마귀는 지금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총공격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에게 물리지 않고 불 뱀에 물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물렸다면 십자가 위에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속죄의 보혈을 흘리신 십자가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새 힘을 얻습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라 오르고, 달려가도 걸어가도 피곤치 않음같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예수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 바라보지 않고, 세상 보게 되면 불 뱀과 같은 사탄에게 물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보지 않고 파도와 물결 보다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 보지 않고 돈만 보다가 멸망 받아 죽었습니다.
마귀에게 물린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 ″ ″
환난과 고통에 빠진 사람도 ″ ″ ″
죄악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사람도 ″ ″ ″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 ″ ″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중에 고통당하는 자 있습니까?
″ 어려움 당하는 자 ″
″ 핍박을 당하는 자 ″
십자가에서 피 흘려 나의 죄를 대속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위로가 되시고, 은총과 축복이 되시고, 영생이 되십니다. 이제부터 용기와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 멘!!
이 믿음 가지고 날마다 순간마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하나님의 하찮은 일
민수기 21:4-9 / 정승안 목사(선한목자교회)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의 역사는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당시를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은 불가능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최고 강대국인 이집트의 영향력으로부터 민족을 구해낼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태양의 아들인 파라오의 나라는 종들의 신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아래 삶의 터전을 버려두고 약속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의 길은 한걸음 한걸음이 사건이며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쉼 없이 흐르는 넓은 강물이 벽처럼 멈추어 서고 바닥은 마른 땅이 되기도 했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광활한 광야에서 매일 그들을 위한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돌무더기 가 산을 이룬 광야에서도 맑은 식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두 가정, 수 십 명이 이동하는 길이 아니라 200만명정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큰 무리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는 길은 결코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1차적인 육체의 필요를 다 채웠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지 않습니다.
의식주의 문제보다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이스라엘 회중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께 까지 원망과 분쟁을 일으키곤했습니다.
인도자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조차도 자신들이 이처럼 오랫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될지 몰랐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전히 광야의 훈련중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의 막바지였습니다.
사막과 광야를 돌고 돌아 이제 좀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헬몬산에서 부터 흘러 지류를 이루며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던 ‘왕의 길’ 앞에 섰습니다.
왕의 길이 시작되어지는 곳은 에돔 족속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와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형제의 나라 에돔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모세는 왕의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정중하게 부탁을 합니다.
그 길을 지나는 동안 에돔 사람들의 우물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다만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라고했습니다.
그러나 재고의 여지가 없이 단번에 거절당하게 됩니다.
분쟁을 원하지 않았던 모세는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은 에돔의 땅들을 돌아서 ‘사막의 길’ 이라고 하는 또 다른 광야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몇 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아서 가게 되었습니다.
40년 가까이 보던 사막과 광야를 이제 또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조급해졌고 원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오랜 시간 방황하던 광야의 생활도 끝나게 되는데 쉽고 편한 길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형제의 나라, 에서의 후손들과 협상을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어찌하여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생명의 흔적조차 없는 사막과 광야로 내몰았느냐”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길에 평안함이 어디 있었느냐”
“여기 저기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과 원주민들의 공격은 우리 모두를 이광야에서 죽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 광야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죽음의 땅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봐라”
“만나라고 하는 이 하찮은 음식을 더 이상 먹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천막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들고나와 모세 앞에 던지며 소리를 지르며 소동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조급해져 있고 원망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회중에 불 뱀이 나타났습니다.
불 뱀은 사막과 광야에서 무리를 지어 사는 뱀으로 맹독을 가졌으며 순식간에 공격해서 그 이름이 불 뱀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의 천막들이 온통 불뱀으로 인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게 물려 맹독에 죽었습니다.
불뱀의 습격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임을 깨닫은 사람들은 모세에게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주십시요” 민수기 21 : 7
불뱀의 소동과 죽은 이들을 애곡하는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모세는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세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 마다 장대위에 매달아 놓은, 놋으로 만든 불뱀을 보게 했습니다.
놋뱀을 쳐다본 모든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민수기의 이 짧은 소동은 잠간 언급이 되고 말지만 이 사건이 품고 있는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까지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속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불뱀사건이 나오는 본문에 앞서는 말씀을 잠시 보겠습니다.
21장의 불뱀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의 아랏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그들 중 몇 사람을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랏의 왕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오고 있음에 두려워했습니다. 광야를 방황할 때는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나안과 가까워지자 위협을 느끼고 선재공격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가나안 아랏왕을 물리치고 그 성읍을 다 멸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서원에 응답하셨고 그들은 가나안에서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호르마’ 라고 부르게됩니다.
사실 네겝 사람들과의 전쟁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 12명이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후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에 마음이 녹은 이스라엘로 인해 몇일 만에 갈 수 있었던 가나안을 40년동안 방황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탐꾼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어느누구도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징계의 선포가 임했지만 이스라엘 회중은 군사를 모아 약속의 땅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들을 말리며 말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민 14:41-43)
말리는 모세의 말도 듣지 않고 군사들을 이끌고 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언약궤와 함께 진영에 남았습니다.
아말렉의 군사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하고 밀고 내려와 호르마까지 이르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가나안 땅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범죄하여 징계를 받았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달려간곳이 바로 호르마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지 아니하시면 실패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됩니다.
이제 40여년가까이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하게 된 가나안 접경입니다.
이스라엘이 접근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네겝지역의 가나안 사람들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선재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40여년 전과는 달랐습니다.
광야의 훈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구하게했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징계를 행했다는 의미의 지명인 호르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호르마의 전투에 고무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드디어 입성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쉽고 편한 왕의 길을 갈 수 없고 험한 사막의 길로 멀리 돌아서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흥분했던 것처럼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광야, 그 길고 길었던 훈련의 시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체험했던 시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며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끊임없이 배우며 익혔던 시간을 지나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하찮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볼 때 마다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봅니다.
그들 못지 않게 연약한 우리의 믿음은 늘 불안해 하며 조급해합니다.
밤새도록 통곡하던 이스라엘의 통곡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뱀을 만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불뱀의 독이 온 몸에 퍼져 타들어가는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고서야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찮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놋으로 만든 불뱀입니다.
그 놋으로 만든 불뱀은 스스로 장대를 오를 수 없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장대위에 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찮은 것들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의 길에 허기져 쓰러지지 않도록 만나를 주셨습니다.
매일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은 40년동안 광야 길을 가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들의 식량이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고” 하며 만나를 손에 쥐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메추라기를 그들에게 보내어 고기를 먹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내뱉은 하찮은 것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독설을 퍼부으며 저주했습니다.
이 하찮은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광야의 불뱀이 왜 자신들의 천막에 접근하지 못했었는지.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의 인도자요 보호자가 되셨던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는 불뱀을 시켜 이스라엘을 물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그들이 하찮게 여기는 바로 그것을 거두신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는 이스라엘의 회중에 불뱀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하찮다 여기며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들에게 그 하찮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찮은 것들은 신령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찮은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며 생명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이야기하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겨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 : 14, 15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십자가 형벌은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반란에 해당하는 죄에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구테타가 성공하게 되었다면 황제의 왕관을 썼을 테지만 실패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나약하며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였음이 드러나게 된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되었는데 장대에 매달린 놋으로 만든 불뱀을 쳐다보라고 합니다.
해독할 수 있는 그럴싸한 뭔가가 아니라 상식이나 이론이나 경험으로도 도저히 맞지 않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놋뱀을 쳐다본들 어떻게 몸속에 퍼진 독이 사라질 수 있단말인가’ 하고 포기한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다만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놋으로 만들어 장대위에 걸어둔 불뱀을 본 사람들만이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대위에 세워진 불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성적으로, 지혜나 지식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하여 믿어져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며 영광을 얻는 것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찮은 것들은 순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은 하찮은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한 하찮은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생명을 이루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찮은 일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게 하는 하나님의 하찮은 일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훈련했던 광야는 바로 우리가 사는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만이 우리로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매달린 놋뱀을 보고 생명을 구했던 이들처럼 순종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뱀에 물리지 않으려면
민수기 21:4-9 / 배 혁 목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광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예수님도 광야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또한 광야로 같은 상황으로 이끄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광야가 어떠한 곳인지를 잘 알아야지, 그 광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8:15절에 그들이 지났던 광야가 어떠한 곳인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광야는 물이 없는 간조한 땅입니다.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면 뜨거운 햇볕에 수분을 잃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맹독을 품은 뱀과 전갈에 물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간조한 땅을 적셔주셨고, 불뱀과 전갈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광대하답니다. 오랜 시간 그 위험과 불편함을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광야의 불뱀들이 대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불뱀에 물린 이들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때 나타난 뱀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동안 광야의 불뱀과 전갈로 부터 보호해 주셨는데, 그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니 그것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불뱀의 습격으로 죽어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모세에게 와서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그들로부터 뱀들을 떠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놋으로 뱀을 만들어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도 그 뱀을 보면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뱀을 떠나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뱀을 보는 이들마다 살도록 더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병을 주시고 약을 주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보면 병을 받게 만드는 것도 이스라엘 자신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게 만드는 것도 자신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따라서 죽음을 내리기도하시고, 또한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떠한 모습들이 뱀에 물릴만한 모습인지를 보면서, 우리는 뱀에 물릴만한 삶이 아닌지를 살펴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지름길을 막으실 때에, 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렸던 이유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놓인 지름길인, 대로가 막히고, 멀고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을 떠나서 광야를 행진하던 중에 에돔나라 국경를 만납니다. 그리고 모세는 에돔사람들과 협상을 합니다. 에돔에 난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왕의 대로는 에돔과 모압, 암몬을 잇는 대로로 그 길은 오래전부터 무역통로로 사용되었고, 전쟁시에는 군사도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길을 통과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를 편하고 빨리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왕의대로를 통과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길을 통과할 때에, 에돔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테니 통과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돔은 모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에돔은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실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먼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자손이라고 하면,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자손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돔이 이스라엘의 길을 막기보다는, 먼저 나서서 자기네 땅으로 통과하라고 해야하는 것이 이치일텐데, 도리어 에돔은 이를 막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에돔과 싸우지도 말라고 합니다. 에돔사람들이 사는 땅은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주신 기업이니 그들과 싸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형제간의 마땅한 도리를 알려주십니다. 에돔이 형제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스라엘도 그 도리를 무시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에돔가운데 있는 지름길을 포기하도록 하셨고, 에돔 주변을 돌아서 길도 없는 긴 광야길을 걷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에돔과 싸워서, 그 왕의 대로를 통과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길을 돌아가면서, 불평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대로를 주실 때도 있지만, 왕의 대로를 놔두고 길고 험한 길을 걷도록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불뱀에 물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왕의 대로를 걷기 위한 것이라면 불뱀에 물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이 땅에서 왕의 대로로를 걷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걸어야 할 길은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왕의 대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생긴 편한길이고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다고해서 그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훈련시키고자 하는 길은, 사람들이 다 걷고 편해하는 대로를 걷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걷지 않는 험한 길들을 걷게 하고자 함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대로를 가지 못한다고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험한 길을 갈 때에, 많은 사람들은 함께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길이 큰 길이건, 좁은 길이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인 줄로 믿습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하찮게 여겨질때, 불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할 때에 말하기를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합니다.
광야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없는 그곳에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밥을 지어 가족들에게 먹여주는 것과 같이,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여주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그들에게 있음을 손수 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찾겠다고 우물을 판 일도 없습니다. 먹을 것을 위해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 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그럴만한 뭔가를 행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만나를 언약궤안에 넣어 기념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만나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음식을 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음식을 ‘박한 음식’이라고 경멸합니다. 박한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없는, 경멸할 만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왜 이렇게 없냐고? 입맛 버리겠다고 말한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하찮게 여겨질 때에 그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만나를 먹을 때에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민수기 11:8절에, 처음 만나를 먹었을 때에 소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기름 섞은 과자같은 만나가 ‘박한 음식’이 되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간이 지나니까 너무 익숙해지고, 이제는 그 은혜가 무가치하고, 도리어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하찮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에, 불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그 만한 수고를 해서 얻어졌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느것하나 우리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박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귀하게 여겨졌는데 그 사람들이 박한 식물처럼 느껴진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할 때에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자가 하찮게 여겨진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언떤 물건을 처음 대할 때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막상 며칠 소유하다가 보면 소중하게 여겼던 마음이 사라지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물건으로 전락하기 일수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람이나 물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데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 지면서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늘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때로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자족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들을 그냥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기도 하지만, 그에 합당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리자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뱀을 떠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뱀을 떠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까지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보는 자들은 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본 사람들을 살려 주셨고,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은혜를 그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떠한 노력을 해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놋뱀을 보면 살 수 있다고 하니까 그 믿음을 가지고 보았을 때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드셔서 살리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를 살리실 분을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3: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을 죄를 저지르면서 살기 일수입니다. 하나님이 거져 주신 은혜를 당연히 여기며 삽니다. 그런데 이에 더해서, 내가 원하는 것으로 주시지 않으시면 도리어 원망하며, 그 동안 베푸셨던 은혜까지도 하찮게 여기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이는 불뱀에 물려 죽기에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그 어느 은혜보다 더 큰 구속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죄인된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를 바볼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찮게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크고 편한 길을 걷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인 줄로 믿고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신 사람들, 물질, 교회, 이 사회가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구원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좁고 거친 길을 동행하는 시간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하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큼을 깨닫고, 감사로 지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놋뱀을 쳐다 본즉 살더라
민 21:8-9 / 강성찬 목사
어느 젊은이가 골동품 가게에 취직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젊은이는 처음부터 가짜를 가려내는 법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짜를 골라내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6개월 동안 진품만 잔뜩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가짜를 하나 가져와서 점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보자마자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짜만 보니 가짜를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눈앞에 무엇이 있느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눈에는 항상 책이 보여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교사의 눈에는 제자가, 의사의 눈에는 환자가, 목사의 눈에는 성도가, 기업가의 눈에는 근로자가 보여야 합니다. 또한 정치가의 눈에는 국가의 장래가, 어머니의 눈에는 가정의 행복이 보여야 합니다. 올바로 보기만 하면 우리는 성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특히 성도들이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은혜 베푸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의 날이 임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에서 자신들의 지난 죄를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또다시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모세야! 너는 어찌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곳에는 먹을 식물도 없고 먹을 물도 없지 않느냐! 우리는 이 맛없는 음식을 더 이상 먹기 싫다! 우리를 애굽으로 돌려 보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맛나와 메추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를 처음 먹었을 때 그들은 꿀 섞은 과자 같다고 하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출 16:31) 그런데 이제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라 할 때는 바위를 깨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껏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광야 길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 때문에 원망과 불평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해져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마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불뱀들은 이스라엘 광야 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 독사들이었는 데 몸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 뱀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독사를 불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불뱀에 물리게 되면 즉시 독이 몸안에 퍼져서 높은 열이 나며 결국은 죽어야 했습니다.
오래전 깊은 산중에서 뱀을 잡아다 팔던 한 청년이 동물원 뱀 사육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취직 턱을 내느라 술에 만취가 되었던 모 양입니다. 술에 취한 체로 동물원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산 코 브라가 있는 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코브라 한 마리를 붙들고 목에 감아보 기도 하고 품속에 넣어 보기도 하고 만용을 부리고 있습니다. 순찰을 돌던 사 육사가 "코브라다! 위험하다"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러나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꼿꼿이 일어선 코브라 코에다가 입김을 쐬는 사이에 그만 코브라가 그 사람의 코를 꽉 물고 말았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고 쓰러졌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긴급 구조반이 도착했을 때 이미 청년의 혀와 시력과 청각이 마비되었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의 몸에 독이 퍼져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어 갔습니다. 이 불뱀들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 온 광야길에는 불뱀들과 전갈들이 널려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손길을 거두시자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서 하나씩 둘씩 죽어 가기 시작하더니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자 그제야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모세에게 부탁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서 불뱀들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이 자신들의 불평 때문에 온 것임을 알고 불뱀을 떠나게 할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긴 장대 위에 매달아 모든 백성들이 보게 하여라! 불뱀에 물린 자들마다 그 뱀을 보면 모두 살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긴 장대 위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마다 저 장대 위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보십시오! 구리뱀을 바라보는 자는 모두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보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뱀에 물렸으면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줘야지! 뭐? 구리뱀을 쳐다보라구? 내가 미쳤어! 구리뱀을 쳐다보게!"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보지 않고 의심한 사람들은 몸에 독이 퍼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재앙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불뱀으로 인하여 회개합니다. 저들은 원망한 것을 회개하면서 모세에게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회개가 살길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겸비하고 자세를 낮추고, 그리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 인격을 치유하실 것이요, 그 가정을 치유하실 것이요, 그 땅을 회복케 하시고, 고쳐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 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 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합니다
[신 30:2-3]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믿는 마음으로 바라 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그 말씀을 믿고 십자가 바라보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살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장대위에 놋 뱀을 매다시던 하나님께서 죄로 죽어가는 인생을 살리시고자 인자(사람의 아들)되신 예수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되게 하시사 십자가에 매다시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뱀에 물린 백성을 위해 뱀을 장대에 매다시던 하나님이, 죄를 범한 인류를 위해 예수를 십자가라는 장대에 우리 대신 죄인을 삼으시고 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마다 치유를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100살을 살 수 있습니다. 100살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에는 90%가 암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현재 가장 무서운 병은 암입니다. 만일 어떤 암도 고치는 약을 누가 발견한다면 이는 노벨상은 맡아 놓은 것이고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약을 먹기만 하면 아예 안 죽는 약이 있다면 이는 기절할 말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영생할 수 있는 약이 도대체 무엇일가요? 예수님이 영생 약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말씀은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에 내가 구원받았다.> 이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입니다. 믿음이 영생 약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순종이 영생 약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셨으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새의 두 날개입니다.
불뱀은 죽음이었고, 놋뱀은 생명이었습니다. 불뱀은 병이었고, 놋뱀은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복입니다.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놋으로 만든 뱀은 아무런 힘도 신통력도 치유능력도 없는 무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었기 때문에 순조하는 마음으로 쳐다본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소리, 뱀독이 퍼져 가는데 구리뱀 바라보면 산다고? 허튼 소리, 병원에 가야 할지. 독을 빼야 살지, 응급처치를 해야 살지"라며 그 날 거기서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죽었습니다.
십자가 믿고 예수 그리스조를 믿고 구원받는 것도 같습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를 믿어야 산다니 허튼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된다. 현대의학이나 과학이 있는데 무슨 미신 같은 소리야"라며 믿지 않으면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순종하며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고 순정하며 바라봄으로 살리심을 받았으니 이제는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에게는 평생동안 좌우명으로 삼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해군 사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임관했을 때, 임관식이 끝나고 부임하는 식장에서 사령관은 그의 경례를 받고도 회전의자를 돌려 앉은 채, 뒷벽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카터 소위! 귀관은 사관학교 시절에 몇 등이나 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카터 소위는 당황하면서 "예, 750명 가운데 57등을 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령관은 "귀관은 어찌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어찌하여 57등 밖에 못했느냐는 말이다!" 하면서 호통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카터 소위는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라는 사령관의 말이 가슴을 찌르는 비수와 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자!" 라는 말을 자기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서.... 그때부터 그는 무슨 일이든지 주어진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군 소위로서 최선을 다하고, 가정에서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주지사로 당선이 되어서는 주지사로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일에도 최선을 다했는데,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대통령에 출마하여 유세하는 기간에도 교사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선거 참모들이 만류를 합니다. "주일날에는 아주 중요한 득표 유세 일인데 안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주일학교 교사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접어두고 교사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취재하는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것이 방송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신임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고, 주일날 유세를 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득표를 받게 되어서 이것이 결정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인 것입니다. 이 처방을 믿음으로 수용함이 바로 구원이요, 새 삶의 시작이요, 진정한 치유의 순간인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여 구언 받고 세례 받게 되었으니 최선을 다하여 사명 감당하며 영광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부활의 세가지 의미
민 21:7-9, 롬 6:3-5 / 이성희 목사
부활의 은총은 새롭게 살아나는 은총입니다.
2001년 21세기 첫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연동의 가정과 일터가 새롭게 소생하고, 우리 나라의 경제가 다시 살고, 우리 사회의 윤리가 다시 살고, 인간 세계의 인륜이 사는 부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일어남을 뜻하는 아나스타시스 그리고 일으심을 뜻하는 엥게르시스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부활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영화로운 영생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다시 죽지 않는 삶이 부활인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세 사람인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통하여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음을 주님은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살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보이실 것입니다. 부활이란 낱말의 용법을 분류하여 보면, 보통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 것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은 신약적 용어입니다. 구약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지만 신약에는 수십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구약 욥기서 14:14에는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고 합니다. 구약은 다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도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분명히 있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첫째, 부활은 영원히 사는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에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35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6:58에는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하여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으심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죽으심만 가지고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다시 사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심으로 영원히 사는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프랑수아 바리용이란 분은 그의 책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부활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다음 두 가지를 보게 된다. 첫째, 눈앞에 나타난 어떤 존재의 확인이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 그분이 보여주셨던 행동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관련된 예언들에 대한 해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에녹을 죽지 않고 데리고 가셨습니다. 엘리야를 불병거를 탄 채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또 앞으로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은 죽지 않는 방법도 있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사실은 사람이면 죽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다시 살 자신만 있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못 살아본 사람에게 잘 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늘 잘 살던 사람은 잘 사는 것이 별로 신비로울 것이 없습니다. 죽을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죽지 않아 본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죽어 본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이 더 큰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삽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감격이 한층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1:25-26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믿습니까?
둘째,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허구나 전설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헬라철학은 영혼불멸을 얘기하지만 부활의 의미는 거부합니다. 당시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가사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난해 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환각에 의하여 잘못 보았다고도 합니다. 부활한 것도 아닌데 거짓으로 기만했다고도 합니다. 또 현대 학자들 가운데는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상징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하는 설들은 다 반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드웨테(De Wette)는 "시저가 암살 당한 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 것과 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바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죽을 수 있는 죽음을 죽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죄의 대가인 죽음을 죽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신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다시 살 죽음을 죽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사셨고 우리는 예수님이 살리셔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죽을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에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의 대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시 살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도 지배하시는 분이신 것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는 산 것이나 죽은 것이 차이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다시 사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9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이신 예수님 자신을 죽여도 다시 살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살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셨습니다.
프랑스의 어떤 회의주의자는 "기독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습니다. 결코 무덤 속의 죽음의 냄새, 시체의 썩는 냄새가 아닙니다. 빈 무덤의 냄새를 맡는 사람들은 다시 사신 주님의 냄새를 맡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냄새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진동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셋째, 부활은 우리가 다시 살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심은 우리가 다시 살 것을 증명하여 보이신 사건입니다. 단 하나의 다른 점은 예수님은 스스로 사신 분이고 우리는 그 분을 통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생에서 생명을 공급받아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 부활 때에 다시 생명을 공급받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아 광야생활을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뱀에게 물렸지만 장대에 높이 있는 불뱀을 보면 다시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댓가 그리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모형적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높이 달린 불뱀을 보는 자는 물렸지만 삽니다. 죽을 자가 사는 것입니다. 죽었지만 다시 사는 것입니다. 보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다시 사는 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조금도 의심할 바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6:4에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2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또한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과학은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철학은 '내세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었다가 살 수 있다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할 때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 모두의 몸이 다시 살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죄 사함이 없으면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없습니다. 몸의 부활이 없으면 영원히 사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십자가와 부활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집니다. 십자가 때문에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 때문에 영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9 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분명히 있고 모든 사람이 다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을 소유하고 삽니다.
모리스라는 분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능력이 또한 그리스도인 속에서 활동한다. 부활은 계속되는 작업이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계속되는 작업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소망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 때에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론 웨스콧(Wescott) 감독은 "부활절의 선물"(The Gift-of Easter)과 "오순절의 선물" (Gift of Pentecost)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요 오순절의 선물은 승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 된다". 다시 말하면 부활절의 선물은 살려주시는 은혜이며 오순절의 선물은 부여의 은혜입니다.
사순절 동안 경건의 삶을 사신 성도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립니다. 로마서 6:5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4-9 / 피영민 목사
서 론
목사님들이 가장 많이 설교하는 본문 중 하나는 아마 요한복음 3장 14-16절일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장대에 놋뱀을 꿰어 하늘과 땅 사이에 달았을 때에 불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된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게 되었던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요한복음 3장의 배경이 되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민수기 21장입니다. 이 경우에 민수기 21장은 보통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게 하는 데에 인용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민수기 21장은 불신자들이 구원받는데 사용된 말씀이 아닙니다. 원래 배경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불평했을 때 불뱀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불뱀의 독으로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치료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21장은 불신자의 구원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신자의 치료를 위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민수기를 불평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민수기에는 모두 아홉 번의 불평이 나오는데,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평이 아홉 번째 불평입니다. 이제 21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불평과 원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민수기는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천로역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기본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어도 어떤 분들은 승리와 기쁨과 능력을 체험하는 반면,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하고 간신히 천국에 가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기는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이 걸어가고 있는 영적인 행로요, 영적인 천로역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민수기 21장의 이야기는 광야 40년 방황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보입니다. 에서의 후손이 사는 에돔 땅을 지나기만 하면 하루 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왕의 거절로 인해 에돔 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호르산을 돌아서 홍해길로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호르산을 진행하는 도중에 아론이 123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 앞에 보이는 가나안 땅에 곧바로 들어가지 못한 실망감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4절 말씀에 보니까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망은 믿음의 반대요, 불신앙의 열매입니다. 실망은 건강한 삶의 적이요,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역기능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이 때로 실망과 좌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실망은 아무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유익도 없는 것을 왜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실망을 극복하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실망과 좌절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망하고 좌절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다 온 길을 돌아서 가라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다 온 줄 알았는데, 다시 뒤로 돌아서 홍해길로 가라고 하니 백성들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겠습니까? 제가 교수생활 할 때, 어떤 학생들은 2학기에 학점이 안 나와서 졸업식장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경우를 보기도 했습니다. 졸업인줄 알았는데 졸업이 아니라고 하니 얼마나 씁쓸한 절망감이 밀려오겠습니까? 또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해서 이만하면 영적으로 성장한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어떤 죄에 걸려서 넘어진다면 얼마나 좌절이 되겠습니까?
제가 어떤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한 여자가 대성통곡을 합니다. 저 분이 큰 은혜를 받았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에요. 이 분이 여전도사님이신데 남편이 당뇨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함께 잠자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만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동창생의 유혹에 넘어가서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하나님. 제가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여전도사 노릇을 했는데 이만한 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갔으니 내 꼴이 뭡니까?”하고 대성통곡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성장했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돌아서게 되면 마음이 상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까운 친척인 에돔의 불친절 때문입니다.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이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님이기 때문에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 즉 야곱 족속에게 있어서는 형님 집안과 다름없습니다. 아우 집안의 후손들이 형님 집안의 길을 평안히 지나가기를 원하는데, 형님 집안의 왕과 군사들이 나와서 칼로 막고 죽이겠다고 하니 야곱 집안 후손들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예수님도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반을 받았고, 심지어 다윗은 자기 자식의 배반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아버지의 후궁 열 명을 백주에 범했으니 다윗의 상처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친한 친구와 가족의 불친절, 배반은 언제나 치료하기 어려운 상처와 좌절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세 번째로 길이 멀고, 어렵고,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대로는 미국의 고속도로처럼 국가를 통과해서 가는 길입니다. 물론 잘 닦이고 평탄한 도로입니다. 이런 좋은 길을 두고 돌 많고 경사진 산길을 가려니 더 힘이 든게 당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불평이 튀어 나왔을 것입니다.
2. 실망하지 않을 이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첫째 이유는 아무리 험한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왕의 대로라도 어린 아이가 혼자 그 길을 간다면 위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험한 산길이라도 아버지가 손을 잡고 올라가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떤 군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의 행동이 망나니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군인 아버지가 하루는 아들에게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을 참고 봐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너는 죽어 마땅한 녀석이므로 내가 산에서 이 총으로 네 생명을 거두겠다”고 말하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산 속 깊은 곳으로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산길이 하도 험하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좀 쉬었다 가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이 놈아. 죽을 놈이 쉬기는 뭘 쉬어.” 그래도 아들은 쉬었다 가자고 사정합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데 이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아빠하고 등산하니까 참 좋네요.” “야. 이 녀석아. 조금 더 가면 죽을 건데 좋긴 뭐가 좋아?” “평생 동안 언제 아빠가 나하고 이렇게 등산 한 번 해본 적이 있는 줄 아세요? 내가 죽으러 가는길이지만 아빠하고 손잡고 등산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이 아버지가 생각을 해보니까 자기가 국가를 위해 충성하느라고 아들과 등산 한 번 같이 못 갔던 것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그만 마음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이처럼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은 감사하고 행복한 길입니다. 찬송가 456장에도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즐거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공급자가 되시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방황했어도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옷이 헤어지지 않았으며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땅에서 생수를 내시기를 40년 동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속도로를 달리더라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는 78년도에 공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공군 소위가 되기 위해서는 다섯 달동안 훈련을 받는데, 마지막에는 3일 동안 산악훈련을 받습니다. 방독면을 쓰고 지내야 하는 고생스러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 산악훈련은 공군장교들에게 아주 기다려지는 훈련입니다. 그 이유는 점심시간만 되면 보급부대의 차가 오기 때문입니다. 보급부대의 차가 오기 때문에 그 날은 흰 쌀 밥에 건더기도 많은 맛있는 국을 먹게 됩니다. 힘든 훈련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주는 보급부대를 생각하면 그 훈련도 받을 만한 훈련이 됩니다. 이처럼 공급자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우리는 더불어 함께 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산을 돌아서 홍해길로 간다 하니까 가나안 남방의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쳐서 몇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참 오래간만에 믿음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 곳 이름을 호르마(파괴/destruction)라고 짓습니다. 험한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험한 길로 가도 승리를 주시면 그 길이 좋은 길입니다.
3. 실망이 불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민수기 21장이 고비였습니다. 21장 이전에는 온통 고난과 불평의 이야기로 가득 찼었지만, 21장에서는 조금씩 승리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속에 실망이 있으시다면 오늘부터 불평을 그치시고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으십시오. 실망이 바뀌어 기쁨이 두 배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곧바로 불평하고 말았습니다. 실망과 좌절의 다음 단계는 불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해 불평합니다. 불평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불평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노예의 땅, 장자를 죽이는 땅, 고생하는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건져주신 것인데, 불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주셔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면 고통에 대해 불평이요, 자비를 주면 자비에 대해 불평입니다. 이런 불평을 가리켜서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불평은 식물과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근거 없는 불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만나를 주시고, 물이 없을 때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식물과 물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근거 없는 불평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소리도 들으시고, 불평의 소리도 들으십니다. 믿음의 소리에는 승리로 응답하시지만, 불평의 소리에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근거 없는 불평을 발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뱀이라는 채찍을 내리셨습니다. 이 불뱀이 사람을 물면 불처럼 열이 나서 결국 죽게 됩니다. 이 불뱀들은 원래 사막에 흩어져 사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자 집합명령을 내리신 겁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도 불뱀이 있습니까? 질병의 불뱀, 사업실패의 불뱀, 정신 혼돈의 불뱀, 자녀들이 말썽 부리는 불뱀. 이러한 갖가지 형태의 불뱀들은 결국 불평과 원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민수기도 이 불평과 원망의 문제를 아홉 번이나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21장에서 아홉 번째 불평이 깨끗이 끝나버렸듯이 여러분의 모든 불평도 오늘부로 다 끝내시고 여러분 앞에는 오직 승리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의 치료책
하나님께서는 채찍을 주실 때, 거기서 그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채찍을 주시면, 반드시 치료책을 주십니다. 이 치료책을 받아들인 사람은 살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책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해 원망하며 범죄한 사실을 인정하고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이 치료의 첫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7절 후반에 나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 온몸이 퉁퉁 붓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약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영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무당과 점쟁이들이 점치고 칼춤 추는 것은 모두 귀신 들려 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악한 영들의 역사를 보면서도 선한 영이신 하나님과 천사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해결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모세가 중보자입니다. 모세는 우리 중보자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진리는 진리로 말해야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과 문제 있는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누구입니까? 중보자는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부처나 공자, 맹자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중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피타고라스도 모두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지만 하늘의 하나님과 문제 있는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보를 요청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0절의 말씀처럼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양 편을 모두 중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세에게 하늘과 땅 사이에 놋뱀을 장대에 달아서 세워놓도록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놋뱀은 그리스도 예수의 상징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아 치료를 받았던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구원해 주시도록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아놓았을 때,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막 안에서 “모세여.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퉁퉁 부어 죽게 되었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산단 말입니까? 난 깨끗이 죽으면 죽었지 그런 거 안봅니다”라고 부정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구원을 부정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세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함 받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은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이며,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지옥을 믿지 않아. 난 깨끗이 죽고 말지 천국과 지옥 같은거 믿지 않아!”라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천국, 혹은 지옥에 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권에 달린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한 자세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영혼의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간절히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은 이처럼 기본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갖가지 불평, 낙심, 원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그런 성도님들도 오직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예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여! 제가 실패했습니다. 예수여! 저의 죄로 말미암아 이런 불뱀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지금 불뱀에 물려 실망하고 낙심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제가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오니 나를 고쳐주옵소서.”
예수님은 기본구원의 주님이시며, 또한 믿는 자의 치료와 회복을 위한 건설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구원받지 못한 분들은 구원을 받고, 치료를 받지 못한 분들은 치료를 받고, 문제가 있는 분들은 해결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해결함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쳐다보면 살리라
민 21:4-9 / 엄기호 목사
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황폐한 광야 길을 돌아 우회해야 했습니다(민수기 20:14~21) 그런데 그들이 지나온 길은 매우 험악하고 거칠었습니다. 더구나 지름길이 아닌 먼 길로 우회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심신은 매우 피로한 상태였습니다.
본문 4절에, “길로 인하여 백성이 마음이 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마음이 상하였다”라는 말은,‘위축되다’,‘용기를 잃다’,‘절망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가는 동안 되도록이면 지름길로 편하게 가고 싶어 합니다. 공부, 사업 경영, 출세 등에서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도 쉽고 편한 길로 가려고 합니다. 힘 안들이고 일확천금을 벌기 바라고, 요령으로 승진하기를 바라며, 요행이 찾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낙심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절망합니다. 방황하는 인생길, 피곤한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며칠이면 될 일이, 몇 년이 걸린다 하여도 삶의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벌었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막막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고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다가온 현실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 원망과 불평이 있다는 것은 신앙에 브레이크가 걸렸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든 원망과 불평이 있을 때 믿음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길 때문에 원망, 불평했습니다. 에돔 땅을 거쳐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너무 먼 길을 돌아서 가게 된 것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출세의 길이 늦어진다고, 성공의 길이 늦어지고 진학의 길이 좀 늦어진다고 원망, 불평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우회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멸하고 그 가는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욥기 23:10, 이사야 43:18).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물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데 있어 물은 필수적입니다. 더욱이 사막에서 물은 생명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을 가는 내내 끊임없이‘물이 없다’,‘목이 너무 마르다’,‘물을 마시게 해 달라’면서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불평과 원망에도 여전히 사랑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셨고, 엘림에서는 12샘물을 허락하셨으며, 사막에 샘과 분천과 시내가 흐르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하셔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갈급함을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육적인 갈급함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갈급함을 먼저 해소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 42: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이사야 44:3, 이사야 55:1).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에 대해서도 불평했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신령한 식물이었습니다(민수기 11: 7~9절, 출애굽기 16장 이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만나를 배부르게 먹으면서도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한 것은 저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는데도, 그들은 끝없이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출애굽기 14:12, 15:22-27, 16:1~3, 17:3, 민수기 11:1)
오늘날에도 오랫동안 은혜생활을 하고 많은 체험을 가진 성도라도, 환경을 보고 현실에 얽매여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원망,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기도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도 보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교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민수기 11장, 16:31).
우리의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향하여 쏘아 올린 화살과 같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화살은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치며, 하나님께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불뱀이 물어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들으시고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신명기 8장 15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까지 지나온 광야에는 불뱀들이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백성들을 불뱀의 피해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을 피하여 도망하던 불뱀은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하여 원망하고 불평하자 징계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여기서 불뱀은 마귀와 사탄을 의미합니다(계 12:9, 20:2). 오늘날에도 사탄 마귀는 언제나 불평하는 곳을 찾아 침투합니다. 백성이 원망하면 나라가 불안하고, 사회가 불평하고 소요 사태를 일으키면 다른 나라가 좋아하는 것처럼, 성도가 원망하면 마귀가 침투하기 마련입니다.
잠언 19장 3절에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야웨를 원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 때문에 빚어진 결과를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그 책임을 떠민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련하고 우둔한 자가 되지 맙시다. 원망과 불평을 틈타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세상 마귀, 불뱀에게 물리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삽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거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가 야웨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회개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그 맘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순종을 보기 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살기 위해 놋뱀을 쳐다보는 것은, 곧 그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놋뱀을 바라본 자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옛 뱀이요 불뱀으로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란 불뱀에게 물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의 불뱀에 물린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든 놋뱀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이사야 45:22, 히브리서 12:2).
예수 안에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에게 치료가 임하고 축복이 임하며 기적과 평안이 임합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고달픈 광야 길일지라도,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고 인내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봅시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승리의 은혜와 번성의 은혜를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토록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약속의 땅에 가기까지 이 땅에서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 순종과 인내로 전진하며 힘차게 걸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놋뱀 속에 나타난 십자가를 보십시오
민 21:4-9 / 이일기 목사
사람은 삶에 대한 방향과 목적의식이 분명해야만 세상에서 방황하지 않는 의미 있는 삶, 신령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또한 축복 된 삶을 위하여 저는 5가지 중요한 삶의 질문을 이 시간 여러분에게 던지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이 역시 유익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①내 삶의 중심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예배(worship)에 관한 문제.
②나는 어떤 성품의 삶이 되어야 하는가? 제자도(discipleship)와 관련 된 문제.
③내 삶을 어디에 기여해야 하는가? 섬김(service)에 관한 문제.
④내 삶은 어떤 전달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불신자를 향한 선교(mission)에 관한 문제.
⑤내 삶의 동역자는 누구인가? 교제(fellowship)에 관한 문제.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령한 목적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 가운데 자기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그 목적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나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 안다고 해도 그 아는 것만큼 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현실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강력한 도전, 심각한 도전을 내가 오늘 하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삶으로 인해 온 세상이 우리의 모습에 매료 되어 주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히 이루어져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호르산을 진행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불뱀 사건을 당하게 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왜 원망을 하였으며, 왜 불뱀에 물리는 고통의 비극을 당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섭리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불뱀이 오기까지의 본문 배경설명입니다.
0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광야 여정에 관한 성경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일종의 신앙행전이지요.
그런 면에서 민수기는 오늘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에나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신앙 이야기를 예시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 속에는 불평과 반역의 이야기로 거의 얼룩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 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했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 불리 먹여 주셨으며, 반석을 쳐 생수가 흘러나게 했습니다. 물론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 주시기도 했고요.
이쯤 되면 매일같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들은 눈만 뜨면 원망이요 입만 열면 불평인 것입니다. 04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의 방해로 인해(20:18~21) 평탄한 길로 진입하지 못하고 다시 바란 광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신 02:01; 삿 11:18).
이렇게 우회(迂廻)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에돔의 동쪽 지역의 광야 길을 통하여 다시 에돔 북쪽의 모압 지역을 향하여 올라가는 도중에서 그만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이미 이스라엘은 근 38년간이나 광야에서 방황했는데 또 지름길을 제쳐 놓고 고역스런 광야 길로 나서야 했기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극한 분노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자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불평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기들의 삶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로 인해 홍해의 기적, 만나와 생수, 사막 민족인 아말렉을 물리친 사건,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은 기적 등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를 말하자면 범사에 감사해도 그 은혜를 다 살피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이 너무 적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감사했다는 말은 없고 불평하였다는 말은 아주 많이 나옵니다.
민 14:0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0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0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 11:11~15)
0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을 하는데 그 내용을 한 번 보실래요? 왜 잘사는 사람 애굽에서 끄집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제대로 없다. 날마다 먹는 만나는 이제 쳐다보기도 싫다.
정말 불평이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는데 성경은 불평과 원망 죄를 간단하게 취급치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고 지나갑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고 했는데 예, 물론 빨리 가면 좋겠지요? 매사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돌아갈 때가 있으며 때로는 시간이 많이 걸릴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나의 시간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간표보다야 앞 설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시간표보다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표를 일단 보십시다.
민 14: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시간표, 하나님의 일정표는 사십년이라고 했으니 민 13:34절에 의하면 조금 더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약도 없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길어야 사십년인데 이제 그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으니 조금만 인내를 하면 되는 겁니다.
목적지가 있고 시간표도 있다면 이때는 좀 느긋하게 기다리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2. 하나님께서 원망에 대한 징계로 불뱀을 보냈습니다.
0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 지라.
하나님은 걸핏하면 불평과 원망을 하는 이스라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불뱀들은 이스라엘이 지나던 아라바 광야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독사(毒蛇) 중 한 종류로서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 맹독성의 뱀입니다(Leon Wood).
이 뱀에 물리게 되면 그 강력한 독성으로 인해 즉시 온몸에 높은 열이 생기며 죽어가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붙여졌는데 당시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종류입니다.
불뱀으로 인한 그 죽음의 현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현장에서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즉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가 왔다고 고백을 합니다.
0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징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알고 보면 이때부터 살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거나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분고분 듣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징계로서 초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는데 이 일이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약 05:0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물로서도 하시고, 불로서도 하시고, 때로는 전쟁의 고통을 통한 징계로도 하시고 전염병으로도 하시기에 그 심판이 무서운 겁니다.
민 14: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앞서 언급한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원망하는 자는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사람들은,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며, 따라서 응답도 받지 못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하면서 찬송가 405장을 콧노래 삼아 자주 부르지요.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 아멘 ~
참으로 그 은혜가 놀랍습니까? 참으로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십니까? 참으로 찬송하며 영광스럽게 살아가십니까?
그런데 왜 근심하며 염려하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원망과 불평은 불뱀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한 시라도 잊어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신 08:0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0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3. 불뱀으로부터 치료는 놋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나아와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을 향해 틈나는 대로 원망하였기 때문에 그 원망의 결과로 인해 불뱀의 징계를 당하였습니다.(07)
이제 회개하오니 살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할 할 때 하나님은 살길에 대한 처방을 주셨는데 바로 08,09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0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0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불뱀과 동일한 모형 뱀을 만들어 깃발을 단 긴 장대 위에 매달게 했는데 여기 장대는 빛나다, 눈에 띄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많은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띄도록 깃발을 달아맨 긴 장대이죠?(시 60:4; 사 11:10)
08……. 그것을 보면 살리라 ~ 09…….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는 것이 무슨 치유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불뱀에 물려 고통과 비명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을 향하여 장대 끝을 쳐다보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놋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면 살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약을 발라도 소용없고 살을 도려낸대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목 놓아 울어도 물론 소용없고요. 어떤 사람은 걸어와서 놋뱀을 쳐다봄으로 치료함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가족의 등에 업혀 와서 치료함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놈아 저거 안 보면 죽는 거야 하면서 외치는 어머니 손에 질질 끌려와서 치료함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직 장대 끝에 달린 뱀을 쳐다봄으로 인해 치료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뱀의 치명적인 독성(毒性)을 제거하는 유일한 치료법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장대에 높이 들린 자(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길밖에 없음을 가르치는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요 14:06).
십자가처럼 생긴 높은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걸어 놓고는 누구든지 이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치료함을 받을 수 있겠다는 처방입니다.
불뱀의 맹독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처방 정말 쉽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간단히 치료될 수 있으니 이거 정말 쉬운 겁니다.
그러나 놋뱀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마음에 결단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불뱀에 물려 부은 몸을 이끌고 놋뱀을 매달아 놓은 곳까지 가야하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어가면서도,
①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불뱀에 물려서 독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사는가? 세상에 이런 일은 없어 하면서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②반면에 딱히 방법이 없으니 한번 해 보기나 해 보자.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하면서 그곳까지 반신반의하며 가서 바라보고 치료함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③지금까지는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대적했지만 이제는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해 보자는 마음으로 겸손히 나가서 치료함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원망을 한 것도 나 자신이고 그 결과로 인해 불뱀에 물린 것도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치료는 내가 받았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사랑을 깨달으면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으며, 쓸데없는 고집과 혈기도 버릴 수 있으며 고장 난 인격도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결론으로 놋뱀을 통한 십자가의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하게 만든 불뱀들은 복수로 되어있고 저들을 구원하는 놋뱀은 단수로 되어 있음을 잘 아시지요.
죄는 심히 다양할지라도 그러나 치유의 길은 하나 놋뱀이었지 여러 갈레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03장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관원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는 도중 거듭남에 대한 비밀과 구원의 은혜를 말씀하시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신 일이 있습니다.
요 0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고 하는 말 아시죠?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같이 보아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본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보아야 될 것을 보지 못하고 욕심과 자기 교만, 이기심에 마음이 치우치다 보면 인생을 그르치고 삶이 빈곤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눈앞에 무엇이 있느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성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이 얼마나 기쁘고 평안하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 등 직분자의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니 실망하거나 낙심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오직 놋뱀을 바라봄으로 인해 죽음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은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인해 모든 약한 부분들이 치료함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놋뱀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치유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어떠한 문제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4:0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문제의 원인과 해결의 방법
민 21:4-9 / 박기완 목사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의 비밀입니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자가 없듯이 죽음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는, 세상의 종말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언제 세상이 끝날지 언제 종말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 어려움입니다. 언제 어려움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평안하고 기쁘다가도 언제 슬픔을 당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 고통을 당할지, 언제 병을 얻을지, 언제 사고를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죽음의 비밀, 종말의 비밀, 어려움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비밀로 인하여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나 종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들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그 문제를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을 통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인간은 누구나 다.... 문제를 만납니다. 그 일의 크고 작은 것의 차이일 뿐.... 어려운 문제를 안 당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의 자세입니다. 그것을 대하는 자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문제를 당할 때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베드로는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일이 생기면 부인하는 형입니다.
요나는 일이 생기니 다른 길로 가서 어려움을 회피하였습니다. 요나와 같이 회피하는 형이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일이 생길 때 쉽게 좌절하는 형이고, 아담과 하와는 일이 생길 때 남을 탓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형이었습니다.
성도는 문제를 만났을 때... 회피하거나 부인하거나 남을 탓하거나 전가하지 말고 믿음으로 잘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문제를 만났을 때 지혜롭게 대처한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찾아와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10:46절 이하에서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므로 눈을 뜨게되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소리를 지르며 주님을 찾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행16:25절 이하에서 바울과 실라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다가 지진이 일어나고 손과 발에 차여 있던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남에게 전가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찬송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문제를 만났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찬미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모습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열가지 재앙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 주었지만... 너무 원통하고 분한 마음에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해방된 기쁨으로... 신나게 앞으로 전진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애굽의 군사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따라오는 것입니다.
뒤에는 군사들이 좇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어서... 이제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사히 건너가게 하시고 추격해 오던 바로의 군대는 모두 물에 수장을 시키고 말았습니다.
사기가 등등한 애굽의 기병대들이 모두 물에 수장되고, 그 유명한 부대들이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아니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내친김에 빨리 가나안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또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방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다림 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급습해서 그 중에 몇 사람을 사로잡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원하여 간구하기를 "하나님! 만일 이 백성을 우리의 손에 붙이시면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들을 붙여 주시므로 그들과 그 성읍들을 다 멸하여... 또다시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가나안을 행해 진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못마땅한 마음이 들어서 몹시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직선 코스도 있고, 샛길도 있고, 빠른 길도 있는데.... 그 좋은 길들은 다 버려두고 왜 삥~ 돌아서 가나안을 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그냥 두지 왜 광야로 끌고 와서 고생을 시키느냐?... 우리를 여기에서 죽일 셈이냐?...." 그러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를 만났을 때 원망하는 형이었습니다.
이들은 얼마나 원망을 잘하는지 무슨 일만 생기면 원망하고 불평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원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하여 원망하고 불평을 하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사방에서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마구 물었습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백성들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고 범죄하였사오니 제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를 "너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어 달아라! 그리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높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니까, 그것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은 살았지만 "아니,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본다고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나나? 만약 그러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 그러면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다 죽었고, 믿고 쳐다본 사람은 다 살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2. 문제의 원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어려운 문제를 만났습니까?... 문제의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로,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두르고 조급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지난 날의 인도하심과 감사의 역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한 순간의 어려움을 보고는 곧장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왜 다른 길로 가느냐?" 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지 않고 불순종한 죄입니다.
영적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자기의 방법을 고집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의 마음대로 행하려는 죄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55:8-9절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 이해가 안되고 계산이 안맞아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르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에 걸려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가 마중을 나와 넙죽 절을 하며 영접할 줄 알았는데, 문밖에 나오지는 않고 시종드는 종에게 일러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화가 난 나아만 장군은 뭐라고 말합니까?...
왕하5:11절에 보면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내 생각에는...." 내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병을 고치러 온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각대로만 행했기 때문입니다.
불뱀이 나타나 사람들이 죽어가자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달려왔습니다. "모세여!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애원했습니다. 이제서야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3. 해결의 방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문제는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라도 하나님께 나아와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며 복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노력하는 것도 좋고 부지런한 것도 좋습니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좋고, 생산을 증대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있는 죄를 살펴야 합니다. 회개하고 악에서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들으시며... 하늘에서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에스겔 18:21절 이하에 보면,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날의 죄가 많지만 이제라도 회개하면 그 지은 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그것을 의로 삼아 그 의로 인하여 살리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와는 상관없이 이제라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겸비하고 자세를 낮추고, 그리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 인격을 치유하실 것이요, 그 가정을 치유하실 것이요, 그 땅을 회복케 하시고, 고쳐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에게는 평생동안 좌우명으로 삼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해군 사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임관했을 때, 임관식이 끝나고 부임하는 식장에서 사령관은 그의 경례를 받고도 회전의자를 돌려 앉은 채, 뒷벽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카터 소위! 귀관은 사관학교 시절에 몇 등이나 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카터 소위는 당황하면서 "예, 750명 가운데 57등을 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령관은 "귀관은 어찌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어찌하여 57등 밖에 못했느냐는 말이다!" 하면서 호통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카터 소위는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라는 사령관의 말이 가슴을 찌르는 비수와 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자!" 라는 말을 자기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서.... 그때부터 그는 무슨 일이든지 주어진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군 소위로서 최선을 다하고, 가정에서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주지사로 당선이 되어서는 주지사로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일에도 최선을 다했는데,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대통령에 출마하여 유세하는 기간에도 교사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선거 참모들이 만류를 합니다. "주일날에는 아주 중요한 득표 유세 일인데 안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주일학교 교사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접어두고 교사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취재하는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것이 방송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신임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고, 주일날 유세를 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득표를 받게 되어서 이것이 결정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까?...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문제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은 죄가 원인이었습니다.
요9:4절 말씀에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후회하기엔 너무 늦은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문제를 만났습니까?....
더 늦기 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장대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문제를 만났을 때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을 바라보므로... 마침내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뱀 골짜기
민 21:4-9 / 류영모 목사
불평엔 해답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목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베드로 천사가 목사님 가정에 찾아왔습니다.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 줄 터이니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배우자를 바꿔 달라고 하더랍니다. "사모님께서는 어떤 목사님을 원하시오?" 사모님이 침대 밑에서 자물쇠로 꼭꼭 채워진 함 하나를 열어 보입니다. 함 속에는 계란 7개가 들어 있었고, 동전 천원짜리 만원짜리 십만원짜리 수표가 각각 몇장씩 들어있었습니 다. "아니 침대 밑에 계란이 웬일이요?" "우리 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죽을 쑬 때마다 내가 계란을 하나씩 넣어 둔 것입니다. 나도 사람인데 좀 은혜스러운 설교를 풍성히 맛보며 살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 천사가 하 는 말이 "아니 계란 7개면 죽 쑨 게 일곱 번이고 십만원짜리 수표는 그래도 홈런 친 설교인 모양인데 이 정도면 괜찮치 않수?"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계란이 한판씩 쌓일 때마다 내 다 판 돈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교인들은 흡족 한 목사를 만나고 만족한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번엔 목사님 차례입니다. "그래 목사님은 어떤 사모님을 원하시오"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간섭이나 하려들고 늘 불평이나 달고 다니는 아내는 이 제 진절머리가 납니다. 순종적인 아내를 하나 보내주십시오. 거기다 얼굴도 예쁘고 지성적이고 겸손하고 헌신적이고 부지런하고 음식솜씨까지 갖추면 좋 겠습니다" 베드로 천사가 그러더랍니다. "그건 안되겠수. 세상에 그런 여자 가 있으면 내가 데리고 살지 당신을 주겠소!" 교인들도 목사의 마음에 100% 안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불평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불평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 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평에는 승리로 가는 해답이 없습니다. 회개하 고 나를 바꾸고 감사하며 사는 길, 감사를 회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II. 본문 : 광야길은 인생길
오늘 본문 민수기는 광야 여정의 책입니다. 죽음의 땅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 안을 향해 걸어가는 백성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러므로 민수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에나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길은 인생 길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불평과 반역의 이야기로 얼룩져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 예들을 불러내 구원해 주시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 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반석을 쳐 생수가 흘러나게 했습니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 주 셨습니다. 이쯤되면 매일같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데 저들은 눈만 뜨면 원망이요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참으로 그 은혜가 놀 랍습니까?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가십니까? 찬송하며 영광스럽게 살아가십니까? 그런 데 왜 근심하며 염려하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민수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공부해 가다보면 10장이후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평 불만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11장 -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진 후미에 큰 불이 떨어지는 사건입니다.
12장 - 미리암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이가 되는 얘기입니다.
13장 14장 - 열 점탐꾼의 원망이 나옵니다.
16장 - 고라 일당이 반역하다가 지진을 만나 몰사합니다.
20장 - 마실 물이 모자란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21장 불평하다가 불뱀떼가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에 이르렀을 때 에서의 후손들 인 에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 여 그들은 에돔을 돌아 홍해 쪽으로 가다가 그만 심신이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잘사는 사람 애굽에서 끄집어 내 광 야에서 죽게하느냐고. 먹을 것도 모자라고 마실물도 모자란다고. 매일같이 먹는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음식엔 넌더리가 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성경은 불평과 원망 죄를 간단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뱀떼를 보내 백성 들을 모조리 물어 죽게했습니다. 당황한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을 이대로 죽어가게 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시고 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종아 장대 높은 곳에 불뱀 모양의 놋뱀 을 만들어 달아라. 누구든지 쳐다보면 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종함으로 놋뱀을 쳐 다본 자는 모두 나았다하는 간단한 얘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III. 불뱀골짜기① : 마음 상하여 치유받지 못한 곳
여기 불뱀떼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설교제목인 "불뱀 골짜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본문 4절 말씀에 보면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했다" 그랬습니다. 마음 상했으나 치유받지 못한 그곳, 속이 상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나 고침 받지 못 한 마음이 바로 불뱀 골짜기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얼마나 속이 썩고 상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부부간 에 살아가다 보면 속상한 일들이 있지요. 아이들 때문에 마음 상한 일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 때문에 직장생활 때문에 이 세상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심지어는 신앙생활하는 교우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마음 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치유되지 않은 마음은 마귀가 사로잡아 불평하게 하는 불뱀 골짜기가 된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상하여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의 보혈의 피 로 고침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치료하는 광선으로 성령으로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 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청사진 - 우리 인생길을 알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길이 못마땅하다는 거지요. 너무 멀 다고 불평했습니다. 너무 험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길을 선택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만 가도록 내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저들과 동행했습니다. 사랑하는 종인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저들을 양떼처럼 인도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향한 거룩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청사진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못마땅하다는 겁니다. 나는 페이브 먼트를 자동차 타고 달려가고 싶 은데 날 보고 걸어오라고 합니다. 나는 넓은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좁은 길을 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달려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이 못내 못마땅 하다는 거지요.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 면 불평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십니까? 당신의 인생길이 찬양의 골짜기가 되어 있습니 까? 아니면 불뱀 골짜기가 되어 있습니까?
IV. 불뱀 골짜기② : 원망의 골짜기
두 번째, 불뱀 골짜기는 원망의 골짜기였습니다. 계속되는 5절 말씀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 서 죽게 하는고" 그랬습니다.
무엇을 원망했습니까? 특별히 여기서는 본문 그대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진" 사 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백성 들을 끄집어내 가나안으로 가게 해 준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에서 멸 망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인생들을 끄집어 내 천국백성 삼아준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 었습니다. 땅의 백성들을 하늘 백성 삼아 주신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불뱀 골짜기는 불평과 원망의 골짜기요. 원망의 골짜기는 곧 멸망의 골짜기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불평이 체질화되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더란 말입 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원망거리가 왜 없겠습니까?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되겠 습니까? 불평거리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원망을 처리하는 기술이 그 사람의 인격이 요 신앙의 수준입니다.
어떤 장군이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이제 돌격하면 승리하게 될 즈음에 비가 쏟아졌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요. 장군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 면서 부하들을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얘들아,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망하게 생겼다. 저 하늘 하나님을 향하여 활을 쏘아라" 그 명령을 들었던 한 부하가 하늘 높은 곳을 향하여 시위를 당겼고 그 활이 바람에 날려 장군의 머리에 박 혀 즉사하고 말았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예정해 놓았다가도 거두어 가십니다. 원망은 곧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 원망하는 것입니까? 긍정적인 인생관을 잃어버리면 원망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중립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Neutral - 중립이 있습니다. 그 래서 Drive 기어를 넣으면 앞으로 가게끔 되어있구요. Reverse 기어를 넣으면 자동차는 뒤로 가게끔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중성입니다. 하얀천과 같습니다. 거기에 빨 간 물을 들이면 빨간 천이 되는 게고 노란물을 들이면 노란천이 되는 게고 검정물을 들 이면 검정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마음을 긍정적인 색깔로 칠해가다 보면 긍정적인 마 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색깔을 칠해가다 보면 순식간에 내 영혼 내 마음 이 부정적인 인생으로 바뀌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정은 긍정보다 빨리 전염이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오히 려 자신이 친구들을 변화시킬 테니까 두고 보라고 큰소리까지 쳤습니다. 생각 다 못해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과수원 밭으로 들어갔지요. 싱싱한 사과를 몇 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푹썩은 사과를 그 위에 몇 개 얹어 놓고 "얘야 이것을 곡간에 갖다 두면 좋겠다" "아버지 이렇게 같이 두면 큰일납니 다. 썩은 사과 때문에 밑에 있는 싱싱한 사과까지 다 썩고 맙니다" "아니다. 얘야, 이 싱싱한 사과들이 썩은 사과들을 변화시켜서 싱싱하게 만들어 줄 거 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세요. 싱싱한 사과 망친다니까요" 이때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날부터 그 친구들을 지혜롭게 정리했더랍니다.
또 어떤이가 두 앵무새를 각각 다른 새장에 길렀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노래를 배우고 한 마리는 욕을 배웠습니다. 주인은 두 마리 앵무새를 함께 두 면 노래를 배우리라 생각하고 함께 새장에 두었지요. 얼마후 주인이 문열고 들어갔더니 "주인새끼 온다" 그러더랍니다. 욕을 배우고 말았던 게지요.
불평과 원망은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는 못된 성질이 있습니다.
V. 불뱀 골짜기③ : 권태의 골짜기
세 번째, 불뱀 골짜기가 있습니다. 5반 후반절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나님의 음식에 대한 권태가 온 것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타날 신비한 음식이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나 먹고 살아 가는 만나였습니다. 그것을 먹고서도 "이 따위가 뭐냐"고 넌더리를 떨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불만이 11장에 나오지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기를 "우리가 애 굽에 있을 때 먹었던 생선과 수박과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난다. 이것들을 못 먹으니 정력이 쇠하여 졌도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이었 습니다. 애굽의 과일,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 고 세상에서 신나던 것들이 아직도 신나게 느껴지십니까? 세상에서 좋아하던 그 일들을 아직도 좋아하며 살아가십니까? 세상의 못된 습관들 아직도 짜르지 못하고 살아가십니 까? 바로 거기가 불뱀 골짜기입니다. 이 불뱀 골짜기에서 뱀에 물린 사람은 한 걸음도 신앙의 향상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입맛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여겨지던 것이 시시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신나야 합니다. 찬양하는 시간이 영광스럽게 여겨져 야 합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행복해 져야 합니다. 저주가 무엇입니까? 신 앙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교회 생활이 인생생활이 재미가 없는게 저주 더란 말입니다.
말씀을 드립니다. 속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였으나 위로받지 못하고 치유받지 못한 그 곳 - 거기가 불뱀 골짜기입니다. 한없는 은혜를 받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잃어 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자리가 불뱀 골짜기입니다. 신앙생활에 권태가 찾아온 것 거기서 빨리 벗어나지 아니하면 불뱀 골짜기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며칠전에 미국의 한 연구소가 연구한 보고서를 보니까 "절망감에 빠진 사람, 권태기가 오래 계속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보다도 성인병, 고혈압, 당 뇨 그런데 걸릴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세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VI. 그러나 구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광야 여정을 살펴보면, 한 두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 습니다.
끊임없이 실패를 하면서도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 다. 죄를 지으면서도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불평을 하면서도 천성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한번 하나님의 자녀삼으시고 천국백 성 삼겠다 말씀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불안전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냐? 하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 밖 에 안되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온 것 아니었습니까? 나는 실패하는 죄인이 기 때문에 오늘도 엎드려 기도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구원시켜 놓았더니 감사대신 불평입니다. 바로의 손에 서 건져놓았더니 찬양대신 원망입니다. 한심한 존재들이지요.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반역이나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행진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하는 것입니 다. 크리스챤은 분명히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구원의 행진을 계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승리의 행진을 계속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불뱀 골짜기에 구원의 소식을 선포합 니다. 치유의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죽음의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불뱀 골짜기는 구원의 골짜기로 바뀌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VII. 그 치유의 길 - 놋뱀
오래전 얘기입니다. 깊은 산중에서 뱀을 잡아다 팔던 한 청년이 동물원 뱀 사육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취직 턱을 내느라 술에 만취가 되었던 모 양입니다. 술에 취한 체로 동물원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산 코브라가 있는 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코브라 한 마리를 붙들고 목에 감아보기도 하고 품속에 넣어 보기도 하고 만용을 부리고 있습니다. 순찰을 돌던 사육사가 "코브라다! 위험하다"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러나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꼿꼿이 일어선 코브라 코에다가 입김을 쐬는 사이에 그만 코브라가 그 사람의 코를 꽉 물고 말았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고 쓰러졌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긴급 구조반이 도착했을 때 이미 청년의 혀와 시력과 청각이 마비되었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의 몸에 독이 퍼져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뱀 골짜기에서 불뱀과 더불어 죄악의 골짜기에서 죄와 더불어 놀지 말라는 말이지 요. 불뱀 골짜기에서 뱀과 더불어 놀다가 독뱀에게 물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란 말입니다. 지금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이 청년에게 싸늘하게 식어져 가는 이 청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소식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놋뱀 =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무서운 뱀에게 물린 사람, 사탄의 독소에 오염된 사탄의 독소에 온 피가 멍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선포되어졌습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장대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될 죽음의 자리에 주님이 피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바라보고 앙망하는 자는 구원 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불뱀·사막>
광야의 뱀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독뱀이라고 할지라도 햇빛을 받지 못하면 독이 빠지 는데 여기는 광야요 사막입니다. 계속적으로 햇빛을 받은 뱀이라 아주 독이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뱀에 물리기만 하면 즉사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뱀에게 물려 신음하는 사람이 옆에 쓰러져 누워있습니다. 가족들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 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이미 장례를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 습니다. 아무도 이 무서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슨 얘기였습니까? 우리는 죄의 결과를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 니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 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탄의 올무에 걸려든 사람, 이 불뱀에 물린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세상에 어떤 길도 없다. 지식도 선행도 철학도 도덕도 저들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분명히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불뱀 골짜기"에서 불뱀으로부터 상처받은 심령들을 향한 구원의 소식이 있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장대위에 달린 놋뱀을 보는 것이 무슨 치유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독뱀에 물려서 고 통과 비명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을 향하여 장대 끝을 쳐다 보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 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놋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쳐다보면 살리라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 한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대에 달린 놋뱀이 그 자체에 독소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불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죄인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장대에 달린 그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으리라.
다음은, 성경을 잘 보면 백성을 상하게 만든 뱀은 "불뱀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 러나 저들을 구원하는 놋뱀 불뱀은 단수로 되었습니다. 죄는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치유의 길은 하나 놋뱀이지 여럿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장대 끝이 보이지 않 는다고 유사한 뱀을 만들어 곳곳에 세워두었다 해도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겝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약을 발라도 소용없습니다. 살을 도려내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목놓아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 달려와서 그 뱀을 쳐다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려올 수도 걸어올 수도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서 왔 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등에 업혀서 왔을 겝니다. 어떤 사람은 이놈아 저거 안 보면 죽는데~ 어머니 손에 질질끌려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장대 높이 매달린 뱀을 쳐 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가운데는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여기 찾아오신 분 이 계실 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어요~ 울며울며 달려오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물 론 하나님이 저들을 소중한 백성으로 삼아 주시지요. 그러지 못하고 억지로 찾아나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여기 끌려나오신 분이 계실 줄로 압니다. 무언지 알지 못하지만 가족의 손에 이끌려 여기 앉아 계신 분도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여 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만 하면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고 백하고 믿기만 하면 이 시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가까이에서 그 놋뱀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까마득 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놋뱀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좋아 서 뚜렷하게 놋뱀의 꼬리 눈망울까지 쳐다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나빠서 희미하게 그냥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분명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구원의 풍성한 진리를 깨닫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신비한 은 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구원 해 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진리가 때로 희미하게 여겨집니다. 신앙생활이 때로 는 재미가 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갈등하고 번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찾아나오시고 주님을 바라보고 구원의 진리를 선포한 이 말씀을 듣 고 여러분들이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 시옵소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만이 나를 영접해 주실 분임을 믿습니다. 내 마음에 중심의 문을 엽니다. 이제 찾아 오셔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시 옵소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이 시간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 될 줄로 믿습니다.
VIII. 불뱀 골짜기에 사명이 있다
이제 불뱀 골짜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장대 높이 매달아라. 장대높이 매달아라. 저 먼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도록 매달아라.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사람 보이도록 매 달아라. 높이 높이 매달아라. 불뱀 골짜기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교회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땅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내 영성에 맞는 교회를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와 말씀이 있는 교회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되는 바가 있다면 이 세상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교회에 와 본적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들도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저들도 예수 만나 구원얻을 수 있도록 십자가를 높이 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 십자가를 매달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이 가정은 예수 믿는 행복한 가정이구나. 여러분의 가정에 십자가를 매달아 예수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과 사업을 통하여 십자가를 높이 매달므로 말미암아 세상 만방에 모든 열방들이 십자가 예수를 만나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러나 한달에 한번 구도자 예배를 통하여 우리주변에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 진정한 교회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 구원얻기를 원하 는 사람들,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 - 여기 한소망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이땅에 찾아오실 때에 모 두 들림받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놋뱀과 십자가
민 21:4-9 / 박종순 목사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간의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애굽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애굽을 떠나는 날부터 원망을 시작했고 결국은 그 원망 때문에 다치고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1. 저들이 왜 원망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길이 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을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을 애굽에서 살았던 탓으로 여행을 해본 일도 없었고 애굽이외의 나라를 가본 적도 없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횡단하며 겪은 일들은 어렵고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갈 길은 멀고 기후는 나쁘고 길도 없었습니다. 이정표도 없고 방향도 잘 모릅니다. 제멋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가라면 떠나고 서라면 멈춰야 합니다. 거기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입니다. 왜 불평이 안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나 더 문제는 4절 끝의 "마음이 상하니라"였습니다. 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길이 험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험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편하고 길도 편하고 하는 일도 편합니다. 그리고 결과도 편합니다.
어떤 주인이 두 종을 불러 각각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집 지을 대지, 건축비를 똑같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주인이 살집이라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지었습니다. 자재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쓰고 건축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2년쯤 지난 후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평소 마음이 편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주인이 하는 일도 마땅치 않았고 자신이 종이라는 것도 싫었습니다. 늘 불평스럽고 짜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집을 지으라고 하자 그는 속으로 주인이 살 별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는 집 한 채면 됐지 돈푼이나 있다고 별채까지 짓는다며 불평했습니다.
건축자재도 제일 싼 것으로, 건축비용도 3분의 2는 제주머니에 챙기고 3분의 1만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한마디로 형편없는 졸작이 된 것입니다. 건축이 끝나자 주인이 두 종을 불렀습니다.
"집 짓느라 수고들이 많았다. 그동안 너희들이 나를 위해 충성을 다 한 보답으로 집을 한 채씩 선물로 주고자 한다. 너희들이 지은 집은 너희들이 살집이다. 선물로 받아주기 바란다"라며 한 채씩 선물로 주었다는 이 이야기는 이미 우리가 알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기뻐했고 누가 후회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평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원망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둘째, 먹고 마시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20:2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는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고 다투었다고 했고, 21:5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0:5을 보면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며 원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향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17:2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었다"고 했고,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7:7을 보면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0:13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라고 했고, 21:5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했지만 단 한 명도 목말라 죽거나 배고파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그것말고 정력에 좋은 것들, 스테미너 식, 군것질할 것들이 없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식도락도 혐오식품을 찾아다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 먹으러 태국, 필리핀, 중국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데 끼면 안됩니다.
환경연구전문가인 유미호 씨가 쓴 글에 의하면 잘못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 정신이 산만해지고 욕구불만이 쌓이고 성급하고 폭력적이고 발육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일회용품 그릇은 대개 멜라민 용기인데 거기서 독성물질이 나오고 화학조미료나 패스트 푸드등도 건강을 해친다고 합니다. 실험 결과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먹인 닭들이 보통 옥수수를 먹인 닭들보다 2배 이상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서 생기는 병보다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하나님이 주신 식물에 실증을 느끼고 원망하다가 결국 그들의 영혼까지 병들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미호씨는 다음과 같이 글을 끝맺었습니다. "을 먹을 땐 입안에서 적어도 30번씩 씹어보자. 꼭꼭 씹으며 이 먹거리가 어디서 왔을까, 내 입으로 들어간 먹거리들이 결국 어디로 갈까, 나는 이 음식을 먹을 만하게 정성껏 살았는가, 천천히 공손하게 먹자"고 했습니다.
나쁜 것은 먹지 맙시다. 감사하며 먹읍시다.
셋째,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0:12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지도자였던 모세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였습니다. 모세에게 대들고 모세에게 덤비고 원망하고 시비를 건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4을 보면 "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나다"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3을 보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시편 136:2을 보면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고 3절에서는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비교할 신이 없으신 하나님,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구원도 무너지고 기도도 무너지고 축복도 무너져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신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2.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신, 배신의 결과는 저주, 재앙, 죽음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같습니다. 감사하면 살고 원망하면 죽습니다.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됩니다.
3.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위기를 수습했는가 입니다.
7-9을 보면 백성들이 원망하므로 범죄했다며 기도해 살길을 열어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 참담한 상황을 놓고 하나님께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사건이 중요합니다.
9절을 보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놋으로 만든 뱀은 아무런 힘도 신통력도 치유능력도 없는 무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었기 때문에 쳐다본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14-15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셨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소리, 뱀독이 퍼져 가는데 구리뱀 바라보면 산다고? 허튼 소리, 병원에 가야 할지. 독을 빼야 살지, 응급처치를 해야 살지"라며 그 날 거기서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죽었습니다.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 것도 같습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를 믿어야 산다니 허튼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된다. 현대의학이나 과학이 있는데 무슨 미신 같은 소리야"라며 믿지 않으면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단순사고라야 성립됩니다.
놋뱀을 몇 분 이상 바라보아야 하느냐? 어떤 쪽에서 바라보아야 하느냐? 각도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바라보는 눈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바라볼 때 곁에 누가 있어야 하느냐 등을 생각하고 따지면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그 말씀을 믿고 십자가 바라보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장대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과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죽기 일보 전에, 독이 퍼지기 전에, 숨이 끊기기 전에 빨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회의를 할 필요도 없고, 다수결로 결의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기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따지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미루지 마십시오.지금 여기가 중요합니다.
주님! 내가 주를 바라옵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아멘
불신앙을 막아라
민 21:4-9 / 박지온 목사
저희 집에 아들이 지 엄마한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버지가 교회에서 월급 받나?' 그러더라 구요.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사례 받는 줄을 전혀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쩌다가 그걸 본인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왜 교회에서 월급을 받느냐?'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하고 그래서 얻어지는 이 소득을 가지고 한달, 한달 그렇게 살아간다!' 이렇게 설명을 해 줬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참 재미가 있습니다. '아빠도 예배드리고 나도 예배드리는데, 왜 아빠는 월급 받고 나는 왜 월급을 주지 않느냐? 불공평하지 않느냐?' 이래가지고 자기는 월급 안 준다고 상당히 화를 내더랍니다.
여러분 이 예배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이 진짜로 감사가 되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막 달려오다가도 안 들어오는 분들이 있더라 구요. 실컷 잘 와놓고 돌아서는 이런 분들 참 많습니다. 저는 우리 청년부들에게 메시지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교육관 4층이 청년부 실이거든요. 아이들이 나름대로는 은혜 받겠다고 오다가 어떤 아이들은 2층까지 올라오다가 돌아가는 아이들, 3층까지 올라오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는 아이들, 심지어는 4층까지 올라왔다가 문을 빼꼼히 열다가 뭔가 마음이 또 달라졌든지, 또 돌아서는 아이들 참 많더라 구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오시고 은혜 받는 것도 여러분들의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여러분 이 은혜의 역사가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또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은 제가 의자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데 엉덩이에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아니나 다를까 하고 보니까, 여름철에 껌 있죠. 껌이 찐득하게 붙어 가지고, 이 겨울이면 좀 나은데 이 여름에 쭉쭉 늘어나잖아요. 이게 붙어 가지고 상당히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더라 구요. 그래서 이제 손으로 떼어봤는데요. 이게 막 얽히고 섥여가지고 이 손으로도 잘 안되고, 심지어는 얼룩이 더 심해지는 이런 모습들을 봤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성도들 속에 이것 하나가 들어오면 절대로 빠져나가지를 않습니다. 빠져나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성도들을 엄청난 고통과 멸망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뭘까요? 불신앙입니다. 이 불신앙이 한번 들어오면 절대로 빠져나가지를 못합니다. 우리 한 개인과 성도들을 완전히 망치고, 그러면서 완전히 한 인생을 실패시킬 때까지, 끝까지 붙어있는 것이 뭐냐하면, 이게 불신앙입니다.
여러분 거머리 잘 아시죠. 제가 옛날에 그 대민 지원을 갔더랬습니다. 벼이삭을 심는 그런 일을 했었는데, 한참 심는 도중에 뭔가 다리 종아리 쪽에 따끔한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 뭔가 싶어서 보니까, 거머리가 두 마리나 붙어 가지고 이게 제 피를 쭉쭉 빨아먹고 있는 겁니다. 손으로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이게 잘 떨어지지를 않더라 구요. 그래서 이제 거머리한테 한 단어를 더 붙이죠. 뭐라고 합니까? '찰거머리!' 찰 싹 달라붙었다 하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찰거머리! 이 거머리가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저와 여러분 속에 불신앙이 들어왔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이 불신앙이 지금 자리잡고 있습니까! 이 불신앙이 한번 들어오면 절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합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누리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인가 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그런 자리에 지금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불신앙이 지금 자리잡고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서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가만히 보십시오. 왜 이스라엘 역사가 그토록 처참하게 멸망을 했습니까? 힘이 센 블레셋 민족 때문 에요? 아모리 족속 때문에, 여리고 민족 때문에 그렇게 망했습니까?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게 철저하게 망했던 그 근본적인 이유가 뭐냐? 바로 그들 속에 일어난 불신앙이, 불신앙의 역사 때문에 얼마나 처참한 모습으로, 그러면서 완전히 망하는 그 날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이 성도에게 파고드는 최고의 통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바로 이 불신앙입니다. 일단 믿지 못하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끝나거든요. 그래서 어쨌든 믿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도록 사용하는 그 도구가 뭐냐하면, 그게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27절에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데 이들이 이런 속에서 뭘 믿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어찌하여 네 원통한 사정을 내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철저하게 불신앙 속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죽으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믿으려고 애를 써도, 아무리 힘을 쓰고 공을 드려도 전혀 믿지 못하는 사람! 참 불쌍합니다. 그런데 저는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믿어지고, 예수님의 부활도 믿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능력도 믿어지고... 여러분 진짜 믿어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자신에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 이것을 믿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지금 휴가철입니다. 들로, 산으로, 바다로, 엄청난 그런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답답한 환경 속에, 또 더운 이런 환경 속에 왜 들어오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음도 믿어지고, 하나님의 능력도 믿어지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 참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 이런 하나님의 역사들이 믿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자유주의 신학자들 있죠. 신 신학자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온갖 이야기를 다 꺼냈습니다. '성경은 설화다! 하나님 말씀은 신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짜다! 허구다!' 이래가지고 온갖 비아냥을 다 드러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세 오경이죠.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중요한 역사들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 신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아니냐! 어떻게 홍해가 갈라지고, 어떻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어떻게 큰 역사들이 일어나느냐? 신화다! 설화다!' 이래가지고 '문서설, 죄의 피비설' 해 가지고 믿지 않으려고 막 발버둥을 치는 이런 모습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한 것은 저는 믿어지니까 감사합니다. 아니 죽으라고 안 믿어지는데, 그런데 저는 하나님 말씀도 믿어지죠. 그리스도의 축복도 믿어지죠. 참 믿어지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들어오는 불신앙을 철저하게 막아야됩니다. 이 불신앙을 막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신앙의 역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모든 기독교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불신앙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일어납니다. 삶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불신앙이 들어와 있습니까? 이 불신앙을 막아 보십시오. 이 불신앙을 막지 못하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불신앙을 막지 못하면 절대로 내 자신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속에 역사 하는 불신앙을 이겨내지 못하면 교회 건축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건축! 중요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여러분 돈이 문제입니까? 경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살아가는 게 힘들고, '돈을 모으는 게 참 힘들다!' 그래서 교회 건축을 못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불신앙에서부터 빨리 벗어나십시오.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여러분의 개인 속에, 교회 전체 속에 일어나는 그 불신앙의 문제가, 그게 문제이지! 절대로 물질과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에는 이 불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 자신들이 잘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 했구나! 그래서 하나님께 두들겨 맞았구나! 그래서 실패했구나! 그래서 포로로 끌려갔구나!' 잘 압니다. 그런데 그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지금 우리도 밟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억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경이 지금 무엇 때문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더 이상 과거의 불신앙의 역사를 밟지 마라!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깨달아라! 그리스도의 역사를 제대로 알라!'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개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그 불신앙 속에 우리 자신도 점점 빠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불신앙의 역사를 빨리 깨닫지 못하고 이것을 막지 못하면, 저도 망할 수 있고, 여러분도 망할 수 있고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 민수기를 통해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놓쳤느냐?'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 속에 역사 했던 불신앙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느냐?' 오늘 이 사실을 한번 확인하고, 더 이상 우리는 그 불신앙의 역사를 밟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 우리 자신들이 제대로 세워 져야 될 것입니다.
첫 번째입니다. 민수기 20장에 보시면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앞에 20장 2절에 한번 보십시오. 거기에 보시면,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여기서 회중은 누구를 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하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여러분 오늘 이 본문에 말씀을 보시면서 뭐 조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제가 2주전에 설교에 메시지의 제목을 벽을 넘어서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우리가 누리기 위해서는 가로막힌 모든 벽들을 넘어서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막고 있는 최고의 벽이 뭡니까? 의식주의 벽이라고 했죠. 먹고사는 문제! 먹을 것, 마실 것, 사는 것!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 보십시오.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쭉 광야 생활을 진행하다가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가데스 바네아 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 가데스에 머무는 동안에 물이 떨어졌습니다. 상당히 목이 갈 했겠죠. 그때에 백성들의 마음에서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들과 함께 우리를 굶어죽게 하시는 구나! 우리를 목이 말라서 죽게 하시는 구나!' 철저하게 이 육신적인 문제 때문에 엄청난 불신앙이 그 속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국에는 우리 속에 찾아 들어오는 것이 뭡니까? 그게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물이 없어서 주리게 만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그 하나님께서 먹을 것이 없어서 망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공박하니라!' 모든 불평 원망들이 그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앞에 민수기 20장 5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무화과도 없다! 포도도 없다! 석류도 없다! 마실 물도 없다! 그런데 비슷한 내용 같은데, 완전히 정 반대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뒤에 보시면 하박국 3장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비슷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 반대죠. 17절, 18절입니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아멘.
참 보십시오. 여러분 같은 상황입니다. 똑같은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석류도 없다! 무화과도 없다! 포도도 없다! 마실 물도 없다! 그런데 이 하박국서에 보시면, '무화과나무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우리에 양이 없어도 나는 구원에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뭐가 문제입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 속에 철저하게 불신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이 불신앙 때문에 구원의 축복까지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때문에, 먹고사는 육신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이 구원의 축복을 지금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전부다 아우성입니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필요하겠죠. 그렇지만 내 삶 속에 진짜 구원받은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육신적인 이유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절대로 이런 불신앙 속에 우리가 빠져들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사건 때문에, '므리바의 물' 사건 때문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 줄 압니까?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를 했습니다. 그런데 더 처참한 것은 지도자 모세도 범죄를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들을 인도하고 쭉 진행을 해 왔는데 순간, 순간 불평하거든요. 그래서 이 므리바의 물 사건 때문에, 그때 모세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자가기 가지고 있는 지팡이 있죠. 이걸 가지고 반석을 한번만 쳐야 되는데, 몇 번 쳤습니까? 두 번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했습니다. '모세야, 너도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구나!' 이스라엘 속에 일어난 불신앙 때문에 백성들도 범죄 했습니다. 지도자 모세도 범죄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그리던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이게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시면 고라의 반역사건이 일어납니다. 레위 자손인 고라죠. 또 르우벤 자손 중에 엘리압, 다단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라와 엘리압, 다단 이런 사람들이 아주 이름 있고 힘있는 족장들 250명과 더불어서 모세에게 대항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고라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너희만 레위 지파냐? 나도 레위 지파다! 너만 똑똑하냐? 나도 똑똑하다!' 이래가지고 수많은 세력들을 규합해 가지고 하나님의 권위에,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됩니다. 언 듯 보면 모세를 향해서 도전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땅이 갈라졌습니다. 고라의 세력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때 사건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께서 중요한 표적을 하나 줬습니다. 그 표적인 뭘까요? 아론의 지팡이에 뭐가 났습니까? 싹이 돋아났습니다. 지팡이는 마른 나무 막대기입니다.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른 나무막대기에 싹이 돋아났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임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도 하나님이 권위에 도전해서 살아남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언 듯 생각하면, 우리가 기분이 나쁘고 내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내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고 뭔가 자꾸만 주동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만일 그것이 조금이라도 불신앙의 역사라면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여러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내뱉은 말 한마디, 내가 실수로 뱉은 이 말 한마디가 모든 회중 속에 불신앙을 불러일으켰다! 여러분 이것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도 불신앙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그렇게 쭉 이끌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불신앙이 들어오면 전체 질서가 무너집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명심하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가 지금 하나로 쭉 뭉쳐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불신앙의 기운이 들어오면 이 속에 있는 모든 질서들, 모든 축복들이 갈갈이 찢겨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불신앙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또 불평을 합니다. '물이 없다!' 심지어는 '만나도 지겹다!' 여러분 잘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에 죽지 않도록 하늘에서 내려진 신령한 음식이 뭡니까? 그게 만나 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진짜 맛있는 과자가 내려져 있거든요. 그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기름 썩인 꿀 같은 과자다!' 먹고 나니까 너무 맛있어 가지고, '이게 뭐냐?'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만나 입니다. 입에 살살 녹거든요. 너무 맛있어 가지고 '이게 도대체 뭐냐?' 그게 만나 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의 음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속에 불신앙이 들어오니까, 또 원망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원망을 했느냐 하면, '이 박한 식물이 싫다!' 5절에 보십시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여기서 말하는 박한 식물이 뭡니까? 만나입니다. 신령한 양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을 했던 그 만나!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그 만나를 가지고, '우리는 싫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런 자리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참 불신앙이 무섭습니다. 이 불신앙은 내 개인도 망하게 하고, 우리의 가정도 망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교회도 망하게 합니다. 여러분 왜 인생 속에 고통이 찾아왔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창세기 3장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창세기 3장 사건을 뭐라고 했습니까? 불신앙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앙하여 그때 일어나 사건이 뭐냐하면, 그게 창세기 3장 사건! 그리고 이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저주, 재앙, 죽음의 고통이 끊임없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오늘날 이 땅에 왜 재앙과 죽음과 고통이 역사가 자꾸만 끊이지 않느냐? 우리 조금 전에 장로님이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 부자!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부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느냐?' 결국에는 창세기 3장 사건! 다시 말하면 불신앙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거역해서 일어난 사건이 뭡니까? 그게 불신앙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불신앙의 역사가 지금도 저와 여러분 속에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신앙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망한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또 그 전철을 밟아야 되겠습니까? 더 이상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목을 "불신앙을 막아라!" 왜냐하면, 이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에, 불신앙이 조금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개인이나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가정에, 또 우리 교회 속에 조금이라도 불신앙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들어오면 즉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에, 그때에 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겉에다가 틈틈이 바른 것이 뭡니까? 역청을 발랐습니다. 왜냐하면 건축을 하다보면 물이 조그마한 틈새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전혀 물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 틈새에 뭐를 발랐습니까? 역청을 발라 가지고 밖에 더러운 물, 오염된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왜냐하면 오염된 물이 들어오면 전염병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방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도, 동물도 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오염된 물이 들어오지 말아야 되겠죠. 그래서 역청을 발라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림에 있어서 뭐가 문제입니까? 여러분 불신앙이 조금만 들어와도, 그 불신앙이 전체를 완전히 장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불신앙을 막아라!"
결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신앙을 막을 수 있느냐?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첫째는 여러분 어쨌든 은혜 받으십시오. 지난주 메시지 기억나십니까? 산이 잠기고, 집이 잠기고,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 받으면 됩니다. 아무리 불신앙이 급속하게 들어와도 진짜 여러분들이 은혜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살아남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9절 말씀에 보시면,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어떻게 되어요? "살더라!" 이게 복음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화가 나가지고 불 뱀을 보냈습니다. 그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몸이 퉁퉁 불어터지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전부다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너는 저 높은 장대에 놋 뱀을 매어 달아라! 그리고 저 놋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아날 것이다!'이걸 보고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고 '은혜'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들어오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앙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입니다. 두 번째로 불신앙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뭐냐하면, 성령 충만하십시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시면,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어떻게요? '권능을 받고...' 끝났습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여러분은 성령 충만하십니까? 여러분들이 만이 90% 성령 충만하시면 90% 불신앙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1% 불신앙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 1% 때문에 성령 충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의 인격이나, 생각이나, 모든 삶 자체가 어느 정도 성령 충만하냐? 이게 불신앙을 이길 수 있는 중요한 해답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항상 기도제목으로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 잡아야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영적 싸움을 싸우십시오. 이게 불신앙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 속에 불신앙을 집어넣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단과의 싸움에서, 즉 말하자면 영적 전쟁, 영적 싸움이 제대로 안되면 결코 불신앙을 이겨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래께 금요 전도 학교 때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적 싸움을 쭉 이야기를 하면서 딱 중요한 단어를 하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필연적인 영적 싸움!' '필연적'이라는 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런 차원이 아니죠. 필연적이라는 말은 꼭 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영적 싸움을 제대로 못하면 무너집니다. 필연적인 영적 싸움이 되어지지 못하면 순식간에 사단의 역사가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하고, 염려가 일어나고, 모든 사업들이 망하고, 모든 관계 자체가 힘들어 지고, 그렇다면 이 불신앙을 이기는 영적 싸움이 필연적으로 이루어 져야 됩니다. 이게 여러분의 삶 속에 완전히 자리 잡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한번 불신앙을 막아 보자는 것입니다. 내 개인 속에 들어오는 불신앙도 막아보고, 또 내 가정 속에 일어나는 불신앙을 막아내고, 더 나아가서는 지금 교회 속에 들어오는 이 불신앙, 이것도 철저하게 막아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제가 불신앙을 듣기 지겹도록 이야기했습니다. 메시지 서론을 꺼내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불신앙, 불신앙...' 듣기 싫을 정도로... 어떤 면에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담이 될 정도로 '불신앙, 불신앙!'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막으면 살고, 막지 못하면 죽습니다. 살고 죽는 일입니다. 여러분! 불신앙, 우리는 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불신앙을 여러분 막을 수 있습니까?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 속에 침투하고 있는 이 불신앙을 막지 못하면 저도 죽고, 여러분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신앙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 사실이 실감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불신앙을 막기 위해서 내 개인이 먼저 은혜 받자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연적인 영적 싸움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필연적인 영적 싸움! 그래서 철저하게 불신앙을 막고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의 삶 속에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