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고 같은 교무실을 쓰는 종익이형은 별명이 왕뚜껑이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그가 왕뚜껑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느닷없이 화를 잘 내기 때문이다. 그의 뚜껑이 한 번 열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얼마 전에도 뚜껑이 열렸다.
사건의 발단은 한 아이가 수업시간에 왕뚜껑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키는 160센티에 배가 볼록 튀어나오고 대머리인 왕뚜껑은 교단 앞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열정적으로 수업을 한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왕뚜껑의 침세례를 받는데 앞에 앉은 아이의 얼굴에 왕뚜껑의 침이 과도하게 튀자 인상을 썼던 모양이다.
뚜껑이 열린 종익이형은 수업을 하다말고 양동이와 사물함을 걷어차고 발정난 황소가 울부짖는 듯 소리를 지르자 새파랗게 질린 아이들은 어쩔 줄 모르고 인상을 쓴 아이는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뚜껑이 열리는 것을 자주 보아온 나는 솥에서 김이 빠지기를 기다리듯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
한 십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 상태로 돌아오고 왕뚜껑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그 교실에 들어가서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며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잘못을 빌었다.
문학박사인 왕뚜껑은 동료들 사이에서 역술선생으로 통한다.
그는 동료교사들에게 점을 쳐주는데 동료들이 자신의 점괘를 부탁을 하면 그는 안경을 살짝 내리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점잖게 물어본 다음 점괘를 말하는데 나는 한 번도 그의 입에서 나쁜 점괘를 들어 본 일이 없다.
요즘은 수업이 끝나 퇴근을 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황학동에서 샀다는 새마을 모자를 뒤집어쓰고는 파고다공원에 가서 할머니들과 어울려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데 그 곳 할머니들과는 꽤 친분이 있는 듯하다.
퇴직을 하면 파고다공원 옆에 텐트를 치고 점치는 일을 원하여 나와 동업을 하자고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호객행위밖에 없을 듯하니 내가 과연 그 일에 적합한지 요즘 고민 중이다.
아침마다 김밥을 사가지고 와서 교무실에서 먹고, 사물함에 컵라면을 가득 쌓아두고 있는 것을 보면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의 말로는 마누라가 건강치 않아서 그런다고 하는데 식성이 어찌나 좋은지 생선을 뼈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그가 먹은 식판을 보면 밥풀하나 눈에 띄는 일이 없다.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왕뚜껑에게 유효기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형은 과거에 높은 경찰간부였다가 지금은 대전 현충원 국가 유공자 묘역에 계신다.
그는 이 사실을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나는 그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대전에 살 때 나는 그의 형 묘지기를 자청하여 수시로 그 묘소에 가서 참배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아들에게는 묘의 비석을 닦는 봉사활동을 시키기도 했다.
그가 오랫동안 부장으로 고생을 했는데도 교감승진을 하지 못하자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하여 교직원 식당에도 가지 않고 점심시간이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사람들을 기피하다가 남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지하 교무실을 자청하여 쓰게 되었다.
그 교무실은 온갖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쥐가 들락거려 여자 선생님들이 그곳으로 자리가 배정되면 울면서 근무를 하지 못하는 곳이다.
왕뚜껑이 그곳으로 배정을 받자 학교에서는 그와 친하다고 하여 나를 그 교무실로 배정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빵 굽는 기계와 가스렌지를 가져다 놓고는 아이들에게 빵을 구워주고 계란을 삶아주었다.
내가 계란을 삶는 동안 왕뚜껑은 손금을 봐주고 사주를 봐주다보니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교무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을 쳐도 계란을 삶고 빵을 굽는 일에 더 신경을 쓴다.
뚜껑은 열려도 마음이 여린 종익이형은 누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사양치 못하고 동료들이 부탁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다보니 야간 자율학습감독을 도맡아 하고, 돈을 갚으라는 연락이 교무실로 종종 오기에 알고 보니 은행에서 돈을 빌려 친구들에게 꿔주고는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여 자기가 대신 갚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하 교무실로 온 이후로 스스로 왕따를 자청하며 동료들과 마주치려고도 않고, 책상에 앉아서 역술책이나 들여다보며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나뿐이다.
그러다 가끔 국어과 회식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참석을 한다.
사람들이 왕뚜껑을 보기만 해도 박장대소하는데 그 이유는 생긴 것도 괴상하거니와 말하는 것이 여간 웃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년 들어서는 혈기왕성하던 왕뚜껑도 뚜껑의 강도가 예전같지 않아 열릴 듯 말듯 덜컹덜컹하다가는 그만 김이 새는 듯하고, 마누라와의 잠자리가 두려워 거실에서 혼자 잠을 잔다는데 꼭 아들방문을 열어놓고는 아내가 문을 열고 거실에 나올 때마다 아들에게 헛기침을 해달라고 돈을 주면서 부탁을 한다고 하니 이제 왕뚜껑 인생도 다 저물었고 혹 뚜껑이 열린다 해도 김도 안 나오게 생겼다.
그런 왕뚜껑이 불쌍해서 요즘 더욱 친하게 지내다보니 나 또한 동료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왕따신세가 되었으나 그나마 아이들이 쉬는 시간이면 빵과 계란을 먹으러 오고 점을 보러오니 그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다.
첫댓글 으하하~~ 캐릭터가 재미난 선생님이시네요, 아들하고의 부당한 거래..이 대목에선 배꼽잡고 웃습니다 ㅋㅋㅋㅋ
마음이 짠 합니다...
새마을 모자..파고다공원은...미래를 위한 포석이군요. 음..다분히 전략적인 부분도 있으시고 뭐 김이 안나온들 어떻습니까? 단지 염려라면 지기님까지 컵라면을 쌓아두실까봐... 그것이
읽고나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 아니라....한번 해병은 늘 해병이시던 ㅋㅋㅋ 집에서도 직장에서도....그랬던 아버지도 나이가 드시면선.....좀 슬프네요^^
모처럼 선량한 성인 한 분을 뵙습니다. 성인과 범부의 다른 점을 생각해봅니다.
왕뚜껑 형님 잘 좀 챙겨 드리세요. 그나마 지기님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찐계란과 빵, 점을 보러 오는 분들이 계시니 왕따는 아직 아니지 싶습니다.^^
왕따가 둘이니 걱정 안 됩니다.
두 분이 즐겁게 학교생활 하시면 두 분만의 추억은 매일 차곡차곡 쌓여, 헤어질 때쯤은 두분의 우정소설 아니 수필집 한 권 나오겠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사시는 두 분이 부럽습니다.
못말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지기가 나의 친구인 것이 신기하고 고맙다. 어제 갖고 온 작품 맞지러?
그 교무실에 놀러가고 싶어집니다.
점도 보고 계란이랑 빵도 얻어먹고....
단편소설 한 편을 읽은 듯..............문학성을 가미해보시면 어떨지? 신춘문예 당선은 맡아 논 당상.
왕뚜껑 성질은급하시고 괴팍할것 같지만 정이많은신분같네요 의리좋은친구분도 계시구,,재미있게 읽고갑니다..행복하세요
저와 왕뚜껑형에게 애정과 관심을 베풀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뚜껑이와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겠습니다.
기기님의 대표 수작중의 하나가 될것 같습니다. 두분을 제외한 다른 선생님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상태로 주욱~ 밀고 나가세요. 파고다 공원은 참 좋은 계획이라고 봅니다.
파고다공원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
왕뚜껑선생님 이야기라기보다 왕따브라더스 이야기구만요, 왕뚜껑선생이 지기샘을 소재로 글을 쓰면 더 재밌는 얘기가 나올 듯 합니다. 근데, 그 학교 참 무섭네요. 하늘같은 선생님들을 지하로 내 몰다니....
왠지 덤 앤 더머를 보는 느낌이...앗 실수!..하늘같은 선생님들이신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