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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2일 오늘의 역사
2024년 러시아 모스크바 대형공연장 총격사견 발생 사망자 최소 133명
러시아 모스크바 북서부 외곽에 위치한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최소 3명의 무장 괴한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으며, 이후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이 공격으로 133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2023년 현대중공업 세계최초 대형엔진 생산 누적 2억마력 달성
HD현대의 조선 계열사인 현대중공업이 세계 최초로 대형엔진 생산 누적 2억6277만 마력을 달성하며 세계 엔진 역사를 새롭게 썼다.
대형엔진 생산 누계 2억 마력 돌파는 현대중공업이 1979년 첫 대형엔진을 생산한 지 44년 만으로, 2억 마력은 쏘나타급 중형차 약 125만 대가 내는 출력과 같은 힘이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선박의 심장인 엔진을 자체 제작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 1976년 엔진사업에 착수, 1978년 당시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연간 생산능력 90만 마력의 대형엔진공장을 준공했다.
이후 1979년 9380마력급 엔진 1호기를 성공적으로 제작하며 세계 엔진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1992년 1000만 마력, 2005년 5000만 마력에 이어 2010년 9월 세계 최초로 1억 마력 고지에 올랐다.
2023년 영국 아파트 부엌 리모델링 공사 중 벽뒤에 400년 된 벽화 발견
2022년 이수지 작가, 한국인 최초 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
이수지 작가가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의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에 수상했다.
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은 19세가 덴마크 동화작가 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기리기 위해 1956년부터 시작된,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권위있는 국제적인 상 이다. 이 상의 수상은 한국인 최초이며, 아시아에서도 1984년 일본 작가 안노 미쓰마사 이후 처음이다.
2016년 벨기에 브뤼셀 공항과 지하철역에서 IS 연쇄폭탄테러 사망 34명 부상 230여 명.
2016년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 현직으론 88년 만에 쿠바 방문
2015년 ‘건국 1세대’ 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 별세
송인상 전 재무부장관은 재무부 이재국장과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1957년 부흥부(전 경제기획원) 장관과 1959년 재무부 장관 등 주요 경제부처 수장을 역임했다.
최초 장기 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주EC(벨기에, 룩셈부르크 겸임)대사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명으로 경제외교에 주력, 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끌어올려 ‘기적을 만든 대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같은 수출증대 경험을 높이 평가받아 1976년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초대 수출입은행장으로 임명된 바 있다.
민간에선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국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20여년 간 한국능률협회를 이끌며 재계의 큰 어른으로서 올바른 기업가의 모습을 전파하고 산업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송 명예회장은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이에 앞서 1991년 수교훈장 광화장, 2004년 한미협회 한미우호상, 2007년 국제로타리 최고영예상도 수상했다.
2014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합병 조약에 최종 서명
2013년 정부조직법 공포안 국무회의 의결 17부3처17청으로 개편
2013년 의정부시의회 대마도 반환촉구, 대한민국정부차원의 반환촉구 요청
2009년 김점선 화가 별세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졸업한 뒤 그림에 대한 열망을 누르지 못해 1972년 홍익대 대학원(회화)에 입학했다. 김씨는 같은 해 작품이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뽑히면서 두각을 드러냈고, 1987년과 1988년에는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 최우수예술가'(미술 부문)에 오르기도 했다.
김씨는 개인전만 60차례 열면서 지칠 줄 모르고 그림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고 천명할 정도였다. 캔버스 작업뿐 아니라 작품이 곽 휴지 상자에 인쇄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화실에만 안주한 것이 아니라 폭넓게 사회 활동을 했으며, 소설가 박완서·최인호씨, 이해인 수녀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김점선씨는 2007년 난소암이 발병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림과 저술 활동에 더욱 몰입했다. 최근에는 자서전 '점선뎐'을 내고 자신을 찾아온 암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초연하게 적었다.
2005년 박봉주 북한 내각총리 중국 방문
박봉주 북한 내각 총리가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초청으로 22일부터 27일까지 6일간 중국을 방문했다.
박봉주 북한 총리는 22일 중국 베이징(北京)에 도착,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경제 협력 및 6자회담 재개문제를 협의하는 등 5박6일간의 방중 일정에 들어갔다.
원 총리는 회담에서 “6자회담은 현재 대화를 통해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현실적인 선택”이라며 “마땅히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총리는 “북한은 6자회담을 반대하지 않으며 포기하지도 않았다” 고 답한 뒤 “회담조건이 성숙되면 어느 때라도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박 총리는 이날 베이징 경제기술개발구에 있는 노키아 휴대전화기 공장을 방문한 뒤 원 총리와 회담을 갖고 양국 투자 촉진 및 보호 협정에 서명했다. 박 총리는 23일 후 주석과 자칭린(賈慶林) 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을 예방하고, 기업 방문과 상하이(上海)·선양(瀋陽)·안산(鞍山) 등 대도시 경제 시찰을 이어갔다.
2004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창설자 야신 피살
팔레스타인 최대의 저항운동 단체인 ‘하마스(Hamas)’의 창설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2004년 3월 22일 새벽 가자시티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숨졌다. 야신은 이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 내 가자시티의 사브라지구에 있는 알 무자마아 이슬람 사원에서 새벽 예배를 마치고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서다 이스라엘 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진 것이다.
사건 직후 이스라엘 라디오가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직접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도하자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곳곳에는 팔레스타인인 수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격렬한 항의시위를 전개, 이스라엘군과 유혈충돌이 속출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신망이 높은 그가 표적 살해됨에 따라 보복테러 등 이·팔 간 유혈충돌 위기가 크게 고조됨은 물론 중동 평화협상 일정도 극히 불투명해졌다. 그뿐 만 아니라 미국ㆍ영국 등 유럽 지역과 전세계가 테러 공포에 휩싸였다.
12세 때 사고로 머리를 다쳐 팔·다리가 모두 마비돼 장애를 앓고 있던 그였지만, 야신은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도 반(反) 이스라엘 사상을 설파, 팔레스타인인뿐 아니라 아랍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2004년 스타더스트호, 혜성 ‘코멧 와일드 2’ 근거리 촬영 성공
표면이 들여다보이는 고해상도의 혜성 사진이 공개됐다. 영국 BBC방송은 22일 미 항공우주국(NASA)의 스타더스트 우주선이 지난 1월 혜성 바로 옆을 지나갈 때 혜성의 생생한 이미지를 카메라로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스타더스트호가 전송한 사진에 따르면, ‘코멧 와일드 2’ 라 이름 붙여진 지름 5㎞의 이 혜성은 몇 입 베어 먹은 햄버거 모양으로,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가스와 먼지를 분출하고 있다. BBC는 이 혜성을 ‘펄펄 끓으며 날아가는 산’ 이라고 표현했다.
스타더스트호는 지난 1월 2일 이 혜성을 240㎞ 간격을 두고 스쳐 지나갔으며 72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과학자들은 이 사진들을 모아 혜성핵(comet nucleus)의 놀라운 이미지를 합성해냈다.
2004년 한국,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서 11개 금메달 획득, ‘금 신기록’ 달성
12개 중 11개. 한국이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서 금메달 신기록을 세웠다. 2004년 3월 22일(한국시각)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폐막한 대회 마지막 날 경기서 한국은 남녀 1000m와 3000m, 계주, 남녀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하며 전체 12개 세부종목 가운데 11종목 우승을 쓸어담는 사상 최고의 ‘금 잔치’를 벌였다. 쇼트트랙 세계최강국인 한국은 은메달과 동메달도 3개씩을 보태 2002년에 세웠던 종전 최고성적(금8·은7·동1)을 뛰어넘으며 3연속 종합우승을 일궜다.
한국이 시즌을 결산하는 세계선수권서 이 같은 성과를 올린 이유는 현 남녀 세계랭킹 1·2위에 올라있는 안현수와 송석우, 최은경과 변천사가 기량을 100% 발휘했기 때문. 이승재, 김현곤, 고기현, 김민지 등 동료들도 계주 등서 제 몫을 다했다.
한국은 남자 세계랭킹 3위이자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 챔피언인 아폴로 안톤 오노가 1000m 준결승서 이승재의 레이스를 방해하다 실격당하는 등 한 종목에도 결승에 진출하지 못해 노메달에 그쳤다
2001년 ‘톰과 제리’ 제작자 윌리엄 해너 사망
‘톰과 제리’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등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만화를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윌리엄 해너가 2001년 3월 22일 90세의 나이로 숨졌다. 1910년 미국 멜로즈에서 태어난 해너는 원래 기술자였으나, 대공황때 실업자가 되자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퍼시픽 아트 앤드 타이틀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만화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다.
1937년 MGM사에 입사해 만난 조지프 바버라는 그의 평생 콤비였다. 두 사람은 1957년까지 만화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톰과 제리’ 를 만들었고, 해너-바버라 프로덕션을 세워 ‘플린스톤’ 과 ‘더 젯슨스’ 등의 히트작을 냈다. 해너가 감독을, 바버라는 그림을 맡은 ‘톰과 제리’ 시리즈는 1백편 이상이나 제작됐다. ‘톰과 제리’ 시리즈의 첫 편격은 1940년에 만든 ‘퍼스 케츠 더 부트’ 였다. 이 작품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자 MGM은 이들에게 후속편을 주문했다. 이후 ‘톰과 제리’ 시리즈는 아카데미상을 일곱 번이나 수상했다.
1957년 MGM 등 여러 제작사가 만화영화 제작을 중단하자 두 사람은 MGM을 박차고 나와 해너-바버라 프로덕션을 설립, 이후 ‘고인돌 가족’ 으로 잘 알려진 ‘플린스톤’ ‘요기 베어’ 등 3천여편의 TV용 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특히 1960년 처음 방영된 ‘플린스톤’ 은 6년간 프라임 타임을 차지했다.
1996년 프랑스의 소설가 모리악 사망
1995년 외무부, 팔라우와 외교관계를 수립 발표
1993년 제64회 동아마라톤에서 김완기가 2시간9분25초로 국내 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
1990년 한국,체코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1987년 부랑인 수용시설 부산 형제복지원 원생 1명, 집단구타로 사망 23일 원생 35명 집단탈출
1985년 어선 제6 어성호, 소흑산도 근해서 표류중인 중공 해군 어뢰정 1척의 구조요청 받고 예인
중국 해군의 어뢰정 1척이 전남 신안군 소흑산도 부근에서 표류하다 우리 어선에 예인됐다. 1985년 3월 22일 오전 11시쯤 소흑산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마치고 귀항중이던 우리 어선 제6어성호가 표류중인 중공해군 어뢰정 1척이 구조요청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예인, 전북 부안군 하왕등도 부근 해상에 정박시켰다.
중국 해군 어뢰정에는 선상 난동으로 인한 부상자 2명, 사상자 6명을 포함하여 19명의 승무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정부는 중국어뢰정 사건과 관련하여 중공군함 수척이 훈련 중 실종된 어뢰정 1척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영해를 침범한데 대해 중국측에 엄중히 항의하고, 영해침범에 대한 사과와 관련자의 문책을 요구했으며, 홍콩에서 중국과 협상한 뒤 3월 28일 공해상에서 중국측에 어뢰정을 인도했다.
1983년 아마드 샤 말레이지아 국왕 내한
1982년 스위스 유엔가입 발의
1980년 한국여자핸드볼 올림픽예선대회 우승으로 첫 올림픽참가권 획득
1977년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 사임
1975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 발견
1975년 로디지아 민족지도자 헤르베르트 치테포의 장례식
1973년 남해대교 개통
1972년 이화여대 86년 만에 남학생 첫 수강
1971년 경북 해안 간첩 사건
1969년 삼일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완공
서울 도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삼일고가도로가 착공한지 17개월만에 준공, 1969년 3월 22일 개통되었다. 신설동 제2청계천에서 삼일로까지의 청계로 위에 1백40개의 교각을 세워 만든 이 도로는 가장 높은 곳이 17.7m, 폭 16m이고 총연장 3천7백56m의 논스톱 4차선 자동차전용 도로이다.
시속 60km로 달릴 수 있으며 삼일로 등 4곳엔 차가 오르내릴수 있는 램프(고속 도로가 입체 교차할 때 두 도로를 연결하는, 활처럼 굽은 도로. 또는, 일반 도로에서 고속 도로로 접어들거나, 고속 도로에서 일반 도로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만든 도로)시설을 갖추었다. 1967년 10월 14일 착공, 총공사비 15억3천만원을 들여 연인원 10만명을 동원하였다.
서울의 또 하나의 명물로 등장한 이 도로의 개통으로 도심부의 동서소통시간이 일반도로에서보다 5분이나 단축되며 이 고가도로는 4분에 주파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당 1차선에서 1천2백대의 차량을 흡수, 하루 1만5천여대를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간접적으로는 종로, 을지로 등의 교통 소통도 한결 수월해졌다.
1968년 석유화학계열 공업단지 기공
1967년 북한 이수근 판문점서 위장 귀순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던 이수근이 조선노동당 대남사업총책 이효순으로부터 위장 월남귀순하라는 지령을 받고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의를 취재하다가 회의가 끝나자 UN군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 올라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월남귀순하게 됐다.
정부는 그가 북한의 언론계 거물이며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의 여러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수근은 더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됐다.
1967년 금강대교 기공식
1966년 켄터베리 대주교 교황청 방문
1965년 단일변동환율제 실시
1963년 3군 비상지휘관회의서 3.16성명 지지결의, 박정희의장 방문
1962년 윤보선 대통령 정치활동정화법에 항의하여 대통령 사임(24일 최고회의, 수리)
1962년 3월22일 "나는 대한민국 국민 앞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성명하는 바입니다"로 시작하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 성명서가 발표됐다. 이날 오후 3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사임 의사를 발표한 윤대통령은 고별회견에서 구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정화법이 국민의 인화와 단결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되며, 모든 질서가 안정되고 국제적 신망이 두터워져 안심하고 물러선다고 밝혔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월 24일 본회의를 열고 윤대통령의 사임을 받아들여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이양시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윤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고친지 19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1960년 8월22일 민참양원 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된 윤대통령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자 한때 사임을 발표한 바 있으나 박정희 소장의 요청으로 사임을 번복한 바 있다.
1958년 미국, 열전자엔진 발명
1957년 미군기, 태평양 횡단중 실종으로 67명 사망
1953년 헌병총사령부 신설, 초대 사령관에 원용덕 소장
1948년 딘 군정장관 선거법 및 시행세칙 공포
1948년 일본정부, 재일교포 학교 폐쇄
1947년 트루먼, 파괴분자의 관직추방 명령
1947년 남한에 24시간 총파업, 이를 계기로 좌익조직 검거 시작
1947년 3월 22일 전평(全評-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남한 전역에서 24시간 동시파업을 단행했다. 요구조건은 3·1절 기념대회에서 만행을 저지른 경찰관 처벌, 노동자 권리보장, 박헌영 체포령 취소, 구속된 전평 간부 석방, 노동법령 개정, 좌익계 신문 정간조치 취소 등 6개항이었다. 이 파업으로 노동자 2천여 명이 검거되어 전평의 조직이 사실상 와해됐다.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으로 조직손실이 큰데다 다시 이번 파업으로 간부들이 대량 검거돼 전평은 최후의 결정타를 맞은 셈이 됐다.
1945년 카이로에서 이집트 등 7개국 아랍연맹 결성
중동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고 아랍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아랍연맹이 1945년 3월 22일 결성됐다. 초기 가맹국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이집트 예멘 등 7개국이었으나 현재는 20개국과 PLO가 가입되어 있다. 그러나 창설멤버인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이유로 자격정치처분을 받았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며 유태국가를 팔레스티나에 건설하려하자 전쟁돌입을 결의했다. 1990년 8월 카이로에서 열린 긴급정상회의에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고 쿠웨이트에서의 이라크군 즉각 철수 및 사우디아라비아에 아랍연합군 파견을 결의한 바 있다.
1935년 독일, 유럽최초로 정기적인 TV방송 개시
1933년 계초 방응모 조선일보사 경영권 인수
계초 방응모 선생이 1933년 3월 22일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골드 러시’의 주인공이었다. 적수공권으로 일어나 1920년대말 평북 교동광업소를 경영하는 ‘광산왕’이 됐다.
1932년 고당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이날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다. 계초가 금광을 매각했을 때 받은 돈은 135만원이었다. 35만원은 직원과 광부들에게 나눠주었고, 50만원은 조선일보 인수에, 나머지 50만원은 육영사업과 조림-간척사업을 펼치는데 썼다. 1933년 1월 계초는 자본금 20만원을 일시 불입하고 조선일보 창립 총회를 열었다. 이해 3월 사장에 고당을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에 취임했다.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혁신호 100만부(12면)를 4월 26일자로 발행해 전국에 배포, 조선일보의 부흥을 알렸다.
6.25가 발발해도 “내가 왜 피하느냐”며 신당동 자택에 머물다 1950년 7월 6일 성동내무서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그것이 계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923년 프랑스의 무언극 배우 마르셀 마르소 출생
1914년 호남선 개통
1910년 스코틀랜드 열차 충돌로 227명 사망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7년 3월 22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개통당시 철로 길이는 노량진-제물포 간을 잇는 33.2km였다. 영국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올린지 74년 만이었다.
경인선은 1889년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 모형을 가져 온 것이 철도부설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정은 처음 민족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철도건설을 시도했으나 자금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게됐다. 모스는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 쇠뿔고개에서 인부 350명을 모아놓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자금난에 봉착한 모오스는 부설권을 놓친 일본의 집요한 매수공작까지 더해지자 1898년 12월, 170만원을 받고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속도를 높여서 9월 18일에 경인철도 가영업을 시작했고, 1900년 11월 12일에 서대문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개통당시의 경인철도는 탱크처럼 생긴 미제 ‘모갈’형으로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 이었고 1일 2왕복 주행시간 1시간 30분이었다. 경인철도를 처음 주행한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의 탱크기관차. 기차가 내뿜는 불똥으로 철로변 민가에는 화재가 빈발했다고 한다. 9월 19일자 독립신문은 철도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기관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경인선은 조선식민지배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러시아 침략을 위한 바란으로 일본이 해외에 부설한 첫 철도였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월미도행 ‘꽃열차’ ‘경인통학생 열차’ 등으로 유명했던 경인선은 일제하, 광복 공간, 한국전쟁 등 급변하는 역사 속 철길을 숨가쁘게 달리면서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 전철로 모습을 바꿔왔다. 경인선은 1965년 9월 18일 복선에 이어 1974년 8월 15일 전철화됐다
1889년 화폐 남발로 물가폭등, 주전소 폐지
1832년 독일 문호 괴테 사망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정열을 남김없이 써버리고 후회없이 살다간 근대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었고 예술가였다. 그를 정의한다는 것은 그를 속박할 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신적인 예지까지 터득했다는 평가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하이네는 그를 가리켜 “머리 끝에서 발바닥까지 천재”라고 예찬했고, T S 엘리엇은 “시인이라기보다 현인”이라고 경외했다. 시인·화가·무대연출가·정치가·과학자…. 괴테의 관심분야는 다양하다 못해 실로 초인적이었다. 문학사에 우뚝 선 존재였음은 물론 2,700여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였고 26년간 바이마르 궁정극장을 이끌며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280번이나 공연한 무대연출가였으며 바이마르 총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였다.
자연을 인간과 예술의 연원으로 간파한 그의 관심은 식물학·기상학·해부학·지질학·색채학 등으로까지 폭넓게 발전한다.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간악골(間顎骨)을 찾아낸 것도 괴테였다.
괴테는 평생을 사랑과 실연 사이에서 갈등했던 영원한 낭만주의자였다. 뭇 여성들과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든셋 괴테의 삶은 그가 왜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첫 사랑 프리데리케와의 이별은 시 ‘제젠하임의 노래’를 부르게 했고, 친구의 약혼녀인 샬로테(로테)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켰다. 약혼까지 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 릴리 쇠네만, 궁정에서 만나 1,500통 이상의 연서(戀書)를 보냈던 유부녀 샬로테 폰 슈타인 등 그의 삶을 거쳐간 수많은 연인들은 언제나 마르지 않는 창조의 원천이었다.
30여년간을 함께 살았던 본부인 크리스티아네가 숨지자 괴테는 71세 나이로 16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를 만나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지핀다.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나는 요즘 춤 추듯 살고 있다”며 사랑의 찬가에 열을 올린다. 이때도 괴테는 그녀에 대한 절절함을 담은 시 ‘마리엔바트 비가(悲歌)’를 남긴다. 1832년 3월 22일, 바이마르에서 숨져 살아생전 진한 우정을 나눴던 실러 옆에 묻혔다.
1687년 프랑스 작곡가 장바티스트 륄리 사망
1229년(고려 고종 16)삼사고 문장고 화재로 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