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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이 졸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구는 인터폰을 내려놓고 고개를갸우뚱했다.
그렇다면 집으로 바로들어오지 않고 다른 집에 들렀다는 말이된다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정말 알다가도모를 일이다.
그는 의자에 걸쳐 놓은 가죽허리띠를 움켜쥐고 소파를 후려갈겼다.
10분이 더 지났을 때 그는 더 이상기다릴 수가 없었다.
혹시 술에 취해 문앞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그는
현관으로 나가 철문을 열어보았다.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비상등만이을씨년스럽게 켜져 있을 뿐이었다.
밖을 휘둘러보던 그의 눈에 우산이 하나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밖으로나가 그것을 집어들어 보았다.
분명히정우희의 우산이었다. 그는 긴장해서주위를 둘러보았다.
철문에 열쇠가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도무지 그 상황을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른 생각하기에는기척이 나자 겁이 나서 우산도 던져버린 채재빨리 도망친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그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희, 어딨어?! 빨리 들어오지 못해!"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계단 아래와위쪽을 살피면서 불러보았다.
그래도응답이 없자 그는 현관으로 들어가지팡이를 들고 나왔다.
먼저 계단을 통해한 층 아래로 내려가보았다.
그녀의 모습이보이지 않자 그는 도로 올라왔다. 우
선문을 잠그고 나서 본격적으로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쇠구멍에다열쇠를 꽂았다.
열쇠 끝에 무엇인가 걸리는것이 있어 그것이 잘 들어가지가 않았다.
몇 번 신경질적으로 열쇠로 구멍을쑤셔보다가 그는 문 잠그는 것을 포기한 채보았다.
옥상으로 나가는 출입문 앞에 여자의하이힐 한 짝이 나뒹굴어 있는 것이보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어 보았다.
그것은 눈에 익은 연분홍 구두였다.
비로소그는 정우희한테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을직감적으로 느꼈다.
하이힐까지 벗어던진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년이 자살하려고옥상에 나간 게 아닐까?
그렇다면큰일이다. 빨리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년이 자살할 리 없다.
그는 문 손잡이를 잡아틀었다. 문은 쉽게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바람이휘몰아쳐 들어왔다.
그는 그 어둠 속을노려보다가 옥상으로 조심스럽게나가 보았다
옷은 금방 비에 젖어버렸다.
모퉁이를 돌자 어둠 속에서 빛이 흔들리는것이 보였다.
그는 그쪽으로 상체를 숙인채 다가가보았다.
빛은 가건물 안에서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람에 가건물이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듯 흔들리고 있었고
그때마다 나무 틈 사이로 불빛이 흔들려보이곤 했다.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그것은 귀에 익은 소리였다.
그는 문을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멈칫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몇 번이라도 기절시켜 줄 테니까 말하고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아!"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그의동거녀인 정우희였다.
그리고 그녀를바라보는것은 남자였다.
플래쉬의 불빛이여자쪽으로만 향하고 있어서 남자의 모습을잘 볼 수가 없었지만
목소리로 보아 처음보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서문구는 어디 있어? 옷을 모두 태울때까지는 말하겠지?
그때는 넌 화상을 입어죽을걸."
어둠 속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이 밑에 깔려 있는 여자쪽으로향했다. 그녀는 발버둥치면서 소리쳤다.
"말하겠어요! 제발 그만하세요!"
영대는 라이터불을 껐다. 그리고기다렸다.
가건물 주위에는 각목이며 합판 조각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조그만 사내는각목을 하나 집어들었다.
정우희가 헐떡이며 말했다.
"어느 아파트?!"
"요 아래... 1510호에 있어요."
"그런데 아까는 왜 부산에 갔다고거짓말을 했어?!"
시퍼런 불꽃이 치솟더니 그녀의 코쪽으로내려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그는플래쉬를 페인트통 위에 올려놓은 다음
한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녀의입에서는 더 이상 비명이 새어나오지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서문구는 지팡이를세워놓은 다음 각목을 두손으로움켜잡았다.
단번에 해치우지 않으면
자신이 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페인트를 쏟아부을 거야. 페인트를 마시고싶으면 마음대로 소리질러.
서문구에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놈은 직업이뭐야? 뭐하는 놈이야?"
바람에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들려왔다.
동시에 인기척을 느끼고 그는얼른 고개를 돌려보았다.
누군가가 바로뒤에까지 다가와 서 있었는데 머리 위로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것이얼핏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행동을취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가겨우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은 반사적으로어깨를 웅크린 것뿐이었다.
각목은 위에서 떨어져내렸다. 머리에부딪친 각목이 오히려 튕겨나갔다.
영대는 머리를 흔들면서 천천히 몸을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서있었지만
페인트통 위에 놓여 있는플래쉬의 불빛이 아래쪽만 비치고 있어서
얼굴 모습들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드러나고 있을 뿐이었다.
가건물이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듯흔들거렸다.
영대는 그때까지도 멍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몽둥이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것까지는알 수 있었지만
그 다음에 자신이 취해야할 행동에 대해서는 얼른 생각이 나지않았다.
방어의 본능도 일지 않았고, 다만계속 후들거리고 있었고 시야는 흔들리고있었다.
상대방이 부러진 각목을 버리고지팡이를 집어드는 것이 보였다.
지팡이의손잡이 아래 부분이 빠지면서 대신쇠꼬챙이가 나왔다.
그것을 보고 영대는비로소 의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놓아두었던 잭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러나시야가 더 심하게 흔들려 몸을 가누기가힘들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양쪽으로 벌려 몸을 지탱하면서 상체를앞으로 조금 굽혔다.
그리고 칼을 들고있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대방도두손으로 쇠꼬챙이를 움켜쥔 채 그것을앞으로 내밀었다.
영대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생각했다.
나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지금까지는 어느 것 하나 딱부러지게해놓은 게 없었어.
하지만 이제부터는그러지 않을 거야. 반드시 무엇인가를이룩해 놓을 거야.
두고보라구. 나라고항상 이러고 있으란 법이 어딨어.
난앞으로 좋은 일도 할 거야.
내 딸애를데리고 어린이 공원에 놀러도 갈 거야.
그는 더 이상 생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첫번째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쇠꼬챙이를잭나이프로 막으려다가 그는 오히려 손등에상처를 입었다.
그는 싸우기가 싫었고상대방이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그것은 악에 받쳐 질러대는 소리였다.
문구는 상대방이 엄청난 힘을 가진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머리를 맞았으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벌써뻗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뻗기는커녕 머리를 한두 번 흔들어대고나더니반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불리해질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만들어주고 있었다.
상대는 상처를 입었고손에 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상처입은맹수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전에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그는 생각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빨리 찌르라니까요!
정우희가 다시 울부짖었다.
두 사람의거리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영대의 발 밑에 있었다.
영대는 흔들리는 시야를 붙잡으려고 기를쓰면서 짧은 잭나이프로
긴 쇠꼬챙이를막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깨달았다. 그
래서 그는 손쉬운 방법을택하기로 했다.
정우희가 소리를 지르지만않았어도 그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못했을 것이다.
문구는 상대가 정우희쪽으로 몸을 돌리는것을 보았다.
그녀를 인질로 삼을 생각인것 같았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상대가 허리를 굽히기 전에
앞으로내달으면서 쇠꼬챙이로 상대의 옆구리를찔렀다.
얼굴 표정 같은 것은 알아볼수 없었지만 두 눈빛이 빛나고 있는 것이몹시 분노한 것 같았다.
상처 입은 맹수의괴성 같은 외침이 터져나오는 순간
문구는다시 쇠꼬챙이로 상대방을 찔렀다.
이번에는 위쪽을 향해 찔렀는데
정확하게그것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손에전해져 왔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사내가두손으로 목을 움켜잡으며 비틀거리는 것이보였다.
틈을 두지 않고 문구는 다시 한번힘껏 쇠꼬챙이로 상대방을 찔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깊이 살 속을 파고든것 같았다.
사내는 두손으로 가슴을누르면서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오다가
그리고 괴로운 듯 몇번 몸을 뒤틀더니천장을 향해 돌아누우면서 팔다리를 쭉뻗었다.
"저좀 빨리 풀어줘요!"
정우희가 몸부림치며 소리질렀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떡 하려고그래?"
문구는 위협적으로 말하고 나서 플래쉬를집어들었다.
그는 여자를 풀어주기 전에먼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비춰보았다.
사내의 목과 가슴에서는검붉은 피가 샘처럼 솟아나오고 있었다.
사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찬희야... 찬희야....."
영대는 마직막 숨을 몰아쉬면서 딸아이의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보다도 딸의 모습만이 눈앞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딸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견딜 수없게 슬펐다.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지못한데 대한 죄책감과 함께
지금까지세상을 헛살았다는 허무감이 엄습해 왔다.
아, 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다시일어설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와는다른 삶을 살겠건만...
찬희야....찬..."
입술이 가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이어서 마지막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소리가 들려왔다.
서문구는 사내가들이마신 숨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를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끝내들리지 않았다. 숨을 거둔 것이다.
"이것 좀 빨리 풀어줘요!"
여자가 드러누운 채 몸부림쳤다.
그는여자를 노려보다가 손에 감긴 철사줄을풀어주었다.
두손이 자유로워진 그녀는그의 도움없이 허겁지겁 발목에 감긴 줄을풀어냈다.
그런 다음 남자를 바라보았다.
플래쉬가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남자는그때서야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수가 있었다.
아까는 목숨을 건 싸움에신경을 쓰느라고,
그리고 사내의 죽어가는모습에 정신이 팔려 그녀의 모습을쳐다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멈칫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울음을터뜨렸다.
흰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는그녀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한동안 그녀의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어깨에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듯이 그의 품에 와락 안겨왔다.
그는 어쩔수 없이 그녀를 껴안으면서도
자기의얼굴과 옷에 묻어나는 페인트에 더 신경이쓰였다.
"자, 일어나!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사람이 죽었단 말이야!"
"그놈은 죽어도 싸요! 백번 죽어도 좋을놈이에요!"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쳤다.
"일어나라니까!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얼른 씻어내야 해!
우선 빗물에씻어내라구."
밖으로 나온 그녀는 바닥에 털썩주저앉은 채
칠흑 같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쳐들었다.
빗물이 얼굴을 후려갈겼고그녀는 두손으로 머리와 얼굴을문질러댔다.
불에 덴 데가 쓰리고아려왔지만
그보다는 머리와 얼굴에 덮어쓴페인트를 닦아내는 것이 다급했다.
비를흠뻑 맞고 나자 그제서야 온몸에 통증을느끼면서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남자 역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도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저 사람 누구야?"
서문구가 떨면서 물었다.
"그 사람...김영대예요. 정말죽었어요?"
"죽었어. 네가 찌르라고 했잖아?"
"하지만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남자는 그녀에게 저주스런 눈길을보냈다.
"그놈은 백번 죽어도 싸다고 말할 때는언제고 이제 와서 다른 말하기야.
너도죽여버릴까?"
"아, 아니에요! 괜히 해본 소리예요.잘못했어요."
그녀는 얼른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그녀의 손을 홱 뿌리쳤다.
"넌 언제라도 나를 배신할 여자야.
너를볼 때마다 휘발유통을 안고 사는 것 같아."
"아이, 그건 오해예요! 제가 당신을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시키는 일은 무슨 일이든했잖아요.
그래서 이런 사고가 생긴 것아니에요?"
"알았어, 알았어."
세찬 비바람이 그들의 대화를 잠시중단시켰다.
"김영대 그놈은 어떻게 만났지? 그놈이어떻게 여기까지 왔었지?"
"모르겠어요. 집에 도착해서 막 문을열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목에다 칼을들이댔어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어요.
그대로 옥상으로 끌려온 거예요.
제가그놈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당신은 모를거예요."
그녀는 영대한테 어떻게 당했는가를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문구는 그녀의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녀의손을 잡아끌고 가건물 안으로 다시들어갔다.
피에 젖은 참혹한 시체를 보자 그녀는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거세게 머리를 흔드는 것을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문구는 이렇게말했다.
"죽은 거 봤지? 문제는 지금부터야.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야."
시체를 처리하려면 날이 새기 전에 해야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시간은 별로없었다.
"이렇게 죽이지 않아도 됐잖아요."
그녀가 두손으로 거의 얼굴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플래쉬 불빛 속에 드러난시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죽게 돼 있었어.
그리고 만일 내가당했으면 너까지도 죽게 돼 있었어.
이건어디까지나 정당방위야.
이미 끝난 일을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
시체를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것이나 생각해."
"전 모르겠어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그녀는 시체 처리에 관계하기 싫다는 듯다시 머리를 내저었다.
"모른다고 하지 마. 우리는 함께협조하지 않으면 안 돼."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그녀를 그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했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사람을 살해한살인범이었고,
그녀는 해석여하에 따라서는공범이랄 수도 있었고 유일한 목격자라고도할 수 있었다.
만일 그녀가 시체 처리에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유일한목격자로서 그에게는 매우 위험한 존재가되는 것이다.
만일 경찰 수사에 걸려든다면
그녀는 유일한 목격자로서 결정적인 증언을하게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경찰 수사에 앞서그녀가 먼저 경찰에 자진 신고할 수도있다. 그
쪽이 그녀한테는 결과적으로유리할 것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그녀쪽에서 우려될만한 말을꺼냈다.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되나요?"
그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나는어떻게 되지?
나는 살인범으로 체포될거고, 넌 재판에서 목격자로서 증언을 하게되기를 바라냐?"
"자수해서 정당방위였다고 이야기하면정상참작이 될 거 아니에요?"
그녀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그는울화가 치밀었다.
"너 날 배신하겠다는 거냐?"
"누가 배신하겠다고 했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나쁜 년! 내가 누구 때문에 이놈을 죽인줄 알아?!
너를 살리기 위해 이놈과싸우다가 이렇게 된 거야!
어떻게 네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어?!
네가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하는 건 나를배신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어.
넌 그렇게말할 수가 없는 입장이야.
그러나 그녀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는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탓인데그래요?! 난 당신이 시킨 대로 했을뿐이에요!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뭐예요?!
당신 때문에 위험에 처해졌는데 당신이아니면 누가 날 구해 주겠어요?!
당신이 날구해 준 건 아주 당연한 거예요!
당신은나한테 큰소리칠 자격이 없어요!
나를위험에 빠뜨려놓고 무슨 할말이 있다는거예요!"
악에 받쳐 대드는 그녀를 가만히노려보다가
그는 생각을 고쳐 먹고 고개를끄덕였다.
시체를 앞에 두고 입씨름을벌인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고 위험한짓이었다.
죽어 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고집으로 들어가자고.
집에 들어가서 처리문제를 상의하자고."
그녀도 집에 들어가자는 데는 반대하지않았다.
그들은 옥상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집안으로 들어갔다.
벽시계가 새벽2시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두시간 남짓 지나면 날이 샌다는 사실이사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름철이라5시면 날이 샌다.
시체를 처리하려면 이제두 시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5시면벌써 사람들이 나다니기 시작하기때문이다.
여자는 먼저 욕실로 뛰어들더니 옷을모두 벗어버리고 샤워부터 했다.
사내는여자가 목욕하는 모습을 가만히지켜보았다.
그녀는 샴푸로 수없이 머리를 씻어내고있었다.
시체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페인트를 씻어내는 데만 정신이 온통 팔려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있자니 그는 더욱 초조해졌다.
시체를 옥상에 그대로 방치해 두면어떻게 될까.
경찰은 금방 피살자의 신원을밝혀낼 것이다.
그리고 이 아파트 건물안에 살고 있는 입주자들을 샅샅이 조사할것이다.
그 수사망에서 과연 우리가 벗어날수 있을까? 그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들 한쌍은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니기때문에
가장 먼저 경찰의 주목을 받게될것이다.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되지 않도록깊이 묻어버리거나
신원을 밝힐 수 없도록그것을 토막내어 따로따로 버리면 된다.
그러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가벼우면 몰라도 거구의 시체를 둘러메고아래로 내려가
경비원의 눈을 피해 차에싣는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거의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도와주면 시체를아래층까지 운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비원의 눈을 피해 어떻게 무사히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욕실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머리와 얼굴은 허연 거품으로 뒤덮여있었다.
그녀는 금방 끝낼 것 같지 않았다.
그에게는 수족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부하들이 있었다.
그들을 동원하면 시체를운반하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동원하고싶지가 않았다.
그런 일로 부하들에게약점을 잡히는 게 싫었던 것이다.
어떤신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닌
불법적인 이익을 위해 모인 조직의 경우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배신행위가이루어진다.
그는 부하들에게 약점을 잡혀결국에 가서는 배신까지 당하는 것이싫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그는
욕실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고 그녀를노려보았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그를쳐다보았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