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가면 후회하고 갔다 오면 더 후회하는 게 바캉스라고 했다. 70년대가 특히 그랬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당연한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여름만 되면 사람들은 바다든 산이든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피서를 다녀오는 것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기본이며 직장동료에게나 가장으로서의 체면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난 후는? 어느 의사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버스가 됐건 기차가 됐건 표를 사기 위해 늘어진 장사진 속에 끼어있어야 하는 지루함, 땀내가 푹푹 나는 만원버스나 기차 속에서의 고통스런 몸놀림, 대낮부터 곤드레가 된 젊은이들이 목 터지게 외쳐대는 퇴폐가요와 각종 악기소리를 견뎌야 하는 무지무지한 인내력. 거기다 불량배로부터의 안전을 위한 긴장과 신통치 않은 시설 때문에 겪는 불편, 잠마저 제대로 잘 수 없게 하는 밤낮 없는 소음…
난 촌스러운 휴가 말고 지적인 ‘바캉스’
바캉스라는, 운치 있다면 있달 수 있는 휴가의 불어 표현이 한국에 상륙한 건 62년 무렵이다. 신문사 특파원들이 프랑스 파리의 텅 빈 8월을 ‘바캉스’, 그리고 9월의 귀환을 ‘랑트레’라 한다고 전해오자 이 단어들이 급속도로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잖아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같은 노래가 유행하며 그 속에 낀 "what shall I do?" 같은 외국어들이 행세하던 시절이다. 촌스럽게 휴가 간다고 하는 대신 바캉스를 떠난다는 말이 훨씬 지적(知的)으로 들리는지 너도나도 바캉스를 입에 올리게끔 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초라면 먹고 사는 게 최고의 미덕이던 시절이다. 서울엔 전쟁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적잖았다. 아이들은 미군 지프나 트럭을 쫓아가며 “깁 미 껌” “초콜릿 프리즈”를 합창하곤 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수해로 이어지고, 서울의 거리란 거리는 모두 진창이 돼 장화 없이는 다니지도 못할 시절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피서휴가라는 게 사치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떠나는 사람이야 있었지만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노동자 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 회사원도 실제 바캉스는 꿈도 못 꿨다.
현실..경포해안의 단층 1963. 8. 16 [동아일보] 1면
63년 경향신문은 외국의 바캉스 바람에 빗대 푸념을 늘어놓았다. “무덥고 가난하기만한 우리의 여름에는 휴일이 없다. 로맨스도 추억도 생의 축전도 없다. 시간과 돈에 몰리는 생활 속에 논다는 것이 곧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랜 관습이 있다…물가는 나날이 오르고 쌀 문제는 날로 절박하다. 이런 때 카메라를 메고 바다나 산으로 바람을 쐬러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겸연쩍은 일이다.” 설령 여유가 있더라도 마음이 불안해서 휴가를 못가고 직장에서도 휴가를 주지 않는다는 한탄이었다.
철없는 사치 피서 vs 여름 생활 필수품
장마갠 후 부산만 40만 인파 1965. 8. 2 [경향신문] 7면
그러나 ‘입 살이 보살’이라 했던가. 말로라도 자주 바캉스를 꿰다보니 정말로 바캉스가 사람들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60년대 중후반부터 인천송도나 부산해운대 충남대천 강릉경포대에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육체의 정글’ ‘바다 속 콩나물시루’라 부르며 붐을 조장했다. 66년엔 서울역에서 피서지 행 기차표를 사는 게 하늘의 별따기란 말이 나돌았다. 물론 암표도 돌았다. 피서휴가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어느 신문은 고무보트와 우끼(튜브의 사투리) 에어매트 구매 안내기사까지 실었다.
66년8월5일자 매일경제는 남대문일대 고물상점에서 팔고 있는 고무보트, 우끼 등은 전부 군수품으로 불하된 것이거나 부정유출된 것이라며 값이 항상 유동적이라고 썼다. 피서 철 워낙 인기 있는 상품이다 보니 불법으로 나도는 군수품 구입 방법까지 신문이 소개하고 나선 것이다. 이 신문은 68년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야전용 천막을 품종별로 소개하며 값비싼 물건은 군수품 취체반의 눈이 무서워 몰래 숨겨놓고 판다는 것도 귀띔했다.
사실 60년대 말은 피서휴가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프랑스식 바캉스가 소개되며 젊은이들은 배낭과 텐트를 짊어지고 여행에 나섰고 어른들도 슬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대학 신입생들은 고교동창과 짝 지어 피서지로 떠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반면 선풍기 하나 장만할 길 없고 얼음과자조차 사먹기 힘든 서민들은 ‘속없이 배부른 자들의 철없는 사치 피서’에 눈을 흘겼다. 겨우 찬물 등목으로 더위를 식히면서 놀기 바쁜 젊은이들을 한 목소리로 비난했다.
언론 역시 이중적 자세를 보였다. 한편에선 “모래 위에 불 피우고 흡사 인디언 춤 같은 트위스트에 도취된 젊은이들이 한국의 앞날을 메고 나갈 수 있을지 한심한 생각”이라고 꼬집으며 도심의 육교 위나 남산 숲 속에 둘러앉아 열대야를 이기는 서민들 모습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상류사회만의 전유물이던 피서는 이제 대중화되었다”면서 “피서는 더 이상 사치가 아닌 여름 생활의 필수품이고 재충전을 위한 활력소”라는 주장을 폈다. 피서지 특집기사가 실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시원합니다..피서법 처방 1967. 7. 19 [경향신문] 7면
모두 떠나자!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마이카족 고속 달려.. 피서도 디럭스화 1970. 8. 3 [매일경제] 3면
69년과 70년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가 잇달아 개통한 것도 바캉스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여름이 되기 무섭게 너도나도 피서 길에 올랐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아빠 엄마를 졸랐다. 회사에선 살갗을 누가 더 매력적으로 태웠느냐를 놓고 은근히 자랑하는 모습이 생겨났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휴가는 갔다 와야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섰다. 전국적 바캉스 붐에는 언론 역시 큰 몫을 했다. 70년 서울의 8개 중앙일간지는 각각 수영, 수상스키 강습회와 관광회원을 모집했다. 초특급 냉방 장치가 완비된 스웨덴 제 디럭스 버스를 이용한다는 선전 문구에 신청자가 쇄도했다.
이 무렵 어느 코미디언은 “모처럼의 휴가를 집구석에서 보내는 것은 현대인의 칠거지악”이라는 우스개를 내놓았다. 작가 이청준은 한 콩트에서 아가씨들의 바캉스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아가씨들은 정오가 다되어 참새처럼 떼를 지어 바닷가에 왔다. 카메라와 트랜지스터를 메고 과일상자와 점심주머니를 나눠 들고 차양 넓은 모자에 요란스런 판탈롱과 미니스커트 차림을 하고…”
그들은 짐을 풀고 트랜지스터 볼륨을 높인 다음 한 명씩 탈의장에 가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온다. 그리곤 과일이니 과자를 먹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고, 다시 교대로 탈의장에 가 판탈롱과 미니스커트로 갈아입고 깔깔대며 해수욕장을 떠난다. 물론 몸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71년 국정감사에 나선 국회 건설위원들은 정부를 향해 호통을 쳤다. 480억 원이나 들여 만든 경부고속도로의 이용차량 중 50%가 도시민의 주말 레저 붐에 이용된 바캉스 승용차인데 이래서야 산업도로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마이카 족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속도로를 달려 디럭스 휴가를 즐기고 오는 것이 국민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내놓았다. ‘500만이 법석대는 원색 디럭스 판 바캉스’라는 신문제목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번 붙은 바캉스 열풍은 좀체 식지 않았다. 사기업들도 휴가비 주며 직원들 피서휴가를 주는 걸 당연한 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푹푹 찌는 더위에 도시의 빌딩과 아스팔트 숲에 그냥 남아있으라고 한들 그걸 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문제는 피서지로, 피서지로 사람이 몰리다 보니 여름만 되면 온 나라가 바가지 천국으로 바뀐다는데 있었다. 또 피서지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바캉스 베이비 또한 증가하는 불편한 현실이 대두됐다. 며칠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고 강절도 행각에 나선 젊은이들이 등장했고 피서지 성 문란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집나서면 고생" 짜증속 피서지옥을 벗긴다 1978. 7. 22 [경향신문] 7면
올 여름은 또 어디로 떠나 고생할 것인가
쓴맛을 남긴 피서붐 1981. 8. 14 [경향신문] 9면
안가도 후회, 갔다 오면 더욱 후회한다는 말은 7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한 신문은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 나무그늘 한 곳을 찾으려 해도 엄청난 자릿세에 놀라야 했다”며 “가는 곳마다 바가지요금에 가난한 호주머니 걱정부터 앞섰으며 불친절 또한 이루 말할 수 가 없다”고 한탄했다. 신문들마다 분수에 맞는 휴가, 바가지 없는 명랑 상도의, 건전풍토 조성을 외웠지만 그때뿐이었다. 해수욕장 물웅덩이 위에 나무다리를 세우고 통행료를 받는 봉이 김선달이 등장했고 휴가비가 떨어진 여성이 계약 동거를 하던 남자가 달아나는 바람에 여관비를 못내 고소당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는 오일쇼크에 이은 불경기와 물가고가 온 세계를 덮쳤다. ‘구두쇠 바캉스’ ‘알뜰 피서’ ‘고향마을 순례 휴가’라는 신조어가 생겼으나 그렇다고 바캉스 붐을 완전히 제압하진 못했다. 이미 한여름 더위를 피해 가족끼리 친구끼리 또는 애인과 함께 피서지를 찾는 문화가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렸고 빚을 내서라도 피서는 가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여행 자유화에 따른 해외 바캉스 바람까지 일었다. 올 여름은 또 어디로 떠나 생고생을 하고 올 것인지.
첫댓글 70~80년대는 피서라곤 거제도 해금강~~ 아이들 때문에 간 기억밖에 없단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게 진짜 피서 아닐까?
친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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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70-8-년대 바캉스라는 말을 크게 사용하지를 않은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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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간식싸들고 공원, 계곡, 바닷가 가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였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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