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1727년 8월 13일 회개와 용서의 날을 기억하자는 그들의 신앙 유산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였다. 이것은 형제단 역사 형성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선교가 내적 외적 환경으로부터 도전받을 때마다 형제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회개와 갱신과 복종의 새 출발로 일치를 이루었다. 그들의 선교와 신앙 유산의 관계는 이처럼 밀접하다. 모라비안 형제들의 선교 현상에 감동을 받기보다 박해 속에서도 면면히 호수의 실개천처럼 이어졌던 그들의 신앙 유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 저자 소개
에발트 루츠키
형제교회 호르니 포체르니체 지역 교회와 파르두비체 지역 교회 평신도 설교자, 형제단 리베레츠 지역 교회 전임 설교자를 거쳐 형제단교회(모라비안)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형제단 관구 소위원회 회원이며, 2008년에 소위원회 회장을 지냈고, 2011년에 세계 모라비안교회(Unitas Fratrum) 345대 주교로 축성받았다.
📜 목차
한국어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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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_ 형제단 출현부터 얀 아모스 코멘스키(코메니우스)의 죽음까지
│종교개혁자들의 선조들
│제1세대 형제단, 선구자들과 설립자들
│형제단 사제 선출 제도 제정
│‘다수파’와 ‘소수파’ 간의 갈등
│제2세대 형제단, 신학 토대 세우다
│제3세대 형제단, 독일 종교개혁과 가까워지다
│제4세대 형제단, 폴란드와 프로이센으로 망명한 형제들을 돌보다
│제5세대 형제단, 영적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다
│제6세대 형제단, 정치로 향하다
│제7세대 형제단, 망명을 떠나다
│폴란드 지부 형제단
│결론
2장_ 헤른후트 재건형제단부터 오늘날까지: 280년 형제단 선교
│형제단의 새로운 세대 시작
│형제단 재건과 형제들 선교의 시작
1. 서인도제도 선교: 덴마크 식민지 서인도제도(1732년부터)
1) 세인트 토머스 섬
2) 산타크루즈(세인트 크로이)섬
3) 세인트존
2. 영국 식민지 서인도제도 선교(1713년부터)
1) 자메이카
2) 앤티가(안티과) 섬
3) 바베이도스(카리브 제도의 국가)
4) 세인트키츠 섬
5) 토바고 섬
6) 트리니다드 섬
3. 그린란드 선교(1733~1900)
4. 북미주 선교(1735년부터)
1) 북미 인디언 선교
2) 델라웨어 부족 선교(1765~1903)
3) 뉴페어필드 정착촌에서 먼 서쪽 지역
4) 체로키족 선교(1801~1896)
5. 남미 대륙: 수리남 선교
1) 아라와크 부족 선교(1738~1808)
2) 부시맨 부족 선교(1765년부터)
3) 식민지의 흑인들 선교(1754년부터)
6. 남아프리카 선교
1) 호텐토트 종족 선교(1736년부터)
7. 래브라도 선교(1752년부터)
8. 새로운 선교지 개척
1) 라피 부족과 사모예드 부족(1734~1737)
2) 암스테르담 유대인 선교(1738~1743)
3) 기니 해안(1736~1769)
4) 알제리(1740)
9. 동방 선교
1) 콘스탄티노플(1740)
2) 루마니아 발라히아(1740)
3) 칼미크족(1742~1822)
4) 카프카즈의 타타르인
5) 페르시아, 현재 이란(1746~1750)
6) 이집트와 에티오피아(1752~1782)
10. 동인도 선교
1) 실론, 현재 스리랑카(1740)
2) 벵골만 및 니코바르 제도(1758~1787)
3) 벵갈, 현재의 인도(1776~1792)
11. 유럽에서 형제단의 성장
1) 실레시아에서 형제단 지역 교회(sbor) 개척
2) 다른 활동의 발전
3) 리보니아에서 디아스포라 선교
│19세기 선교
1. 남아프리카 선교
1) 카피르족 선교(1818년부터)
2. 남미 선교: 영국 기아나 선교(1835년부터)
3. 중미 선교: 니카라과 선교(1849년부터)
4. 호주 선교
1) 빅토리아 관구(1850~1907)
2) 퀸즈랜드(1891~1919)
5. 라다크와 남아시아 선교(1856년부터)
1) 기엘랑
2) 푸
3) 라다크: 레
4) 인도 라즈푸르
6. 알래스카(1885년 이후) 1
7. 동아프리카, 후에 탄자니아 선교(1891년부터)
1) 냐사: 남부 탄가니카 산맥
2) 우남웨시: 동 탕가니카
│유럽: 위기와 재기의 시기
│20세기 선교 활동 확장
1. 중미 온두라스(1930년부터)
2. 중미 코스타리카(1968년부터)
3장_ 헤른후트 영적 각성, 이어지는 선교 운동 그리고 우니타스 프라트룸 조직
│세계 형제단의 삶과 발전
1. 예수 그리스도, 형제단의 수석 장로
2. 헌법 시노드
3. 전체 시노드
4. 조상들의 땅으로
5. 시노드 유니티
6. 선교 관구
7. 선교 지역
4장_ 조상의 땅으로 다시: 관용의 칙령부터 벨벳 혁명까지
│서막
│노바 솔의 개척자
│첫 형제단 지역 교회
│등록
│형제단 고아원
│보우인 디아스포라 선교
│우스티 나트 오를리치 지역 교회를 다시 재건
│선교 활동의 발전
│양차 세계대전의 압박
│체코 구역
│독일 구역
│독일 점령과 전쟁 시기
│전후 시기
│전체주의 체제 시작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관구
│영적·사회적 위기
│에필로그
오늘날 조상의 땅의 형제들
부록
│1621년~1918년, 해외로 망명을 떠나지 않은 체코 내 형제(개혁 교도)들의 상황
미주
참고문헌
주교 리스트
📖 책속으로
1957년 11월 24일 형제단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주교 얀 블라호슬라프가 49세에 모라브스키 크루믈로프에서 죽는다. 형제들은 그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인물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필경사이며, 형제단의 주님의 백성의 아버지이자 인도자이며, 대인이며 명석하고, 매우 경건하며, 부지런하여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던 얀 블라호슬라프가 크루믈로프에서 죽었다. 그의 평판은 다른 민족에게도 널리 퍼졌다. 우리 생각에 주 하나님이 형제단의 위대하고 귀한 보석을 너무 일찍 빼앗아 가셨다.” 얀 블라호슬라프의 뒤를 이어 온드르제이 슈테판이 형제단의 필경사가 되었다. 형제단에서의 아우구스타의 지속되는 활동은 새로운 세대 형제단 주교들과 많은 오해와 새로운 갈등을 일으켰다.
---「1장_ 형제단 출현부터 얀 아모스 코멘스키의 죽음까지」중에서
1732년 8월 21은 형제단 선교의 시작이다. 결국 초창기에 약 2백여 명의 정착민들이 헤른후트를 떠나서 4개 대륙의 선교사들이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모라비아에서 신앙 때문에 투옥과 박해를 겪었다. 헤른후트의 자신들의 새로운 피난처에서 안주하는 대신 그들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원과 경험과 지식 없이 당시에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떠나갔다.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노예들과 거친 황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나아갔다.
---「2장_ 헤른후트 재건형제단부터 오늘날까지 」중에서
1836년 5월 30일~9월 3일까지 열린 전체 시노드는 형제단의 일부 지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흐름을 다루었다. 극단적 과격파 경향은 개별 지역 교회를 세울 때 완전한 자립과 모든 독특성(예를 들어 형제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수석 장로로서 준수하였다)으로부터의 분리로 더 큰 회중주의를 요구했다. 온건파 경향은 전체 시노드의 모든 결정과 보고를 인쇄하여 공개함으로 민주적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위선적이었다. 전체 시노드의 대의원 중 누구도 이러한 의견의 흐름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제단은 전체 시노드에서 의견이 일치하였으며(예를 들어 1741년 11월 13일 축일의 의미를 처음 공식화했다) 또한 형제단 안에서 예수를 수석 장로로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형제단이 다른 개혁교회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어떤 특별한 독특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방했다.
---「Part 3_ 자애 수행하기」중에서
개종 운동은 본래 19세기와 20세기 전환기에 체코 독일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옮겨와서 새로운 독일 루터 개혁교회가 빠르게 성장했다. 경건주의적인 강조와 헤른후트의 개인적 신앙심 덕분에 체코-모라비아 활동의 독일인 지역 교회들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개종을 경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수립 이후 체코인과 소수 민족 독일인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 독일 민족주의 성장을 거부하지 못했다. 독일 구역에서 알프레드 프레거가 그것을 선전 · 선동하였다. 그의 민족주의적 사고는 나치주의로 발전하였다. 헤르치발트와 두바의 두 독일인 지역 교회들만이 이를 막았다. 헤르치발트 지역 교회는 결국 저항의 표시로 독일 구역을 떠났으며, 1939년에 헤른후트에서 열린 독일 관구 시노드에서 형제들은 그들을 자신의 관구로 받아들인다.
---「4장_ 조상의 땅으로 다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