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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의 창가학회 탈출.일련정종 입문기(1)
혼자서 결심하다
A씨가 일련정종의 문을 두두린 것은 2012년 10월 12일 아침 6시 40분경이었다. 하루 전날 인터넷을 뒤져서 “일련정종 대한민국 서울 포교소”의 주소와 문 열고 닫는 시간 그리고 창제시간을 꼼꼼히 체크 해뒀다. 집사람은 창가학회 지역간부이다. 10여 년 전부터 창가학회에 대한 잘못된 점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종문 쪽을 노크 해보는 것은 어떠한 가하고 권유를 해보았지만 그녀가 줄곧 완강히 반대하였다. A씨가 종문으로 넘어가는 최대의 걸림돌은 그의 아내였다. 그런데 최근에 그 반대가 조금은 느슨해진 가운데 그녀도 A씨와 종교논쟁을 하는 것이 지친 나머지 종문으로 가려면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문으로 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창가학회 역직이 없어진데 있었다. 지방근무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A씨의 총합 부지역장이라는 역직이 중간에 부웅 떠 있었고 서울로 복귀하자 권에서도 그의 학회와 이케다 다이사쿠회장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상당히 부담이 되었는지 지역역직은 줄 수가 없고 반장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집사람과 상의하였는데 집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반장으로 끝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A씨는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는 드디어 종문으로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어차피 10여 년 전부터 종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이 무엇을 바랄 것인가하고 집사람에게도 그 누구에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혼자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오! 한강 그리고 마포대교
그 날 마포대교를 건너가는 새벽길은 안개가 자욱하니 깔렸다. 환경과 자신은 동일하다는 불법의 원리가 그의 심정을 잘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았다. 그 날의 한강은 예전에 바라보는 일상의 한강이 아니었다. 한번 건너면 돌아올 수 없는 강처럼 느껴졌다. 학회를 떠나 종문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사실이 발각되어지고 나면 그것은 바로 배반자로 우선 낙인이 찍힌다. 그리고 권에 방면에 불교회에 알려지고 그에 대하여 있었던 모든 과거의 흔적들을 죄다 들추어내서 부정적인 스토리 텔링(이야기 만들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흥종교집단의 잔혹한 배타성이다. 들어갈 때는 온갖 관심과 애정 그리고 자비심이 동원되어 들어오게 하지만 나갈 때에는 그만큼 상당한 압박을 주는 것이다. 창가학회를 탈회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우선적으로 그냥 조용히 나가고 싶지 않아 안 나갈 경우 그 집에는 그와 관련 있는 많은 학회 원들이 수없이 왕래하면서 퇴전하지 말 것을 설득시켜 간다. 입신시킬 때에는 절복한다는 것에 기쁨이 넘쳐서 서로가 축하하는 분위기에서 행동하였지만 나갈 때는 그 반대인 것이다. 나중에는 은근한 협박도 서슴치 않는다. “법화경에서 퇴전하는 것은 무간지옥의 길이다.”라고 그들은 진정 "나쁜 니찌렌주의자" 를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을 지속시킨다는 의미보다는 도가 지나쳐서 집단 패거리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의식에 그 비중이 더욱 크다고 볼수 있다. 기독교도 불교도 기타 종교들도 이러지는 안는다. 종문인 일련정종도 이러지는 않는다. 전부 보편적인 종교의 선택성을 존중해주는 면이 강하다. 그러나 유독히 이 창가학회만 이런 신흥종교다운 패거리 집단성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안나가는 것이 아니라 종문으로 갔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그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엄청 건들인 것이다. 그들은 호언장담한다. “우리들의 권에서는 불적 닛껜종(일련정종을 그렇게 부름)에게 한명의 회원도 빼앗길 수 없다”라고 결의하는데 누군가가가 종문으로 넘어갔을 경우 그들은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되고 그리고 설득하고도 안 될 경우 최종적으로는 부정적인 악담수준의 이야기가 도는 것이다
자신들의 회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예를 들어 그는 이런 저런 생명의 명문명리성 때문에, 아니면 여자문제가 심각해서, 금전문제 때문에, 마성이 너무나 강해서, 무당끼가 있기 때문에 등으로 별별 이유가 만들어져서 퍼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일련정종으로 깄다가 다시 돌아올 경우 대환영이다. 한 사람을 절복을 시키는 것은 금덩어리를 갖는 것과 같지만 종문에 있는 신도를 탈강시켜 창가학회로 돌아오게 할 경우 그것은 금덩어리의 100배인 다이아몬드의 공덕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련정종은 바로 극악이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극악을 극선으로 돌릴 경우 그 위력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종문으로 갔다가 돌아오면 그는 영웅이다. 그리고 한동안 종문으로 부터 빠져 나온 몇 번의 체험담발표로 많은 사람들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 받게 되지만 몇 달 있다가 그는 외톨이 신세가 된다. 왜냐 하면 종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밝히는 데 충분히 이용가치가 끝났을 경우 마치 완전히 단물 빠진 껌이 되어 그는 폐기 처분된다. 그 누구도 그를 신용하지 않게 된다. 한번 배신자는 또 배신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똑같은 신흥종교집단의 행태와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대한민국 일련정종 서울 포교소로 가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데로 우송빌딩앞에 섰다. 1층에 농협이 있고 지하에는 사우나탕이 있었다. 우선 차로 건물 한 바퀴를 돌았다. 정문보다도 후문이 차를 주차하기에 적절하였다. 주차공간이 널널하였다. 앞으로 차로 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으로 이곳이 대성인님이 계신 곳이라 자식이 어버이 뵈러 온것이다라고 마음으로 아무리 다짐을 하여도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타인의 공간인 것이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항상 혼자서 움직이는 그의 체질에서 오는 피할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거부하고 저항하는 오감(五感)
A씨는 1978년도에 입신하여 무려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네 집에서 법화경에 대하여 이야기는 들었지만 6개월 후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심령학을 공부한 끝에 스스로 회관을 찾아가 혼자서 제목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일련정종에 찾아간 것도 초심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혼자서이다. 누구의 소개가 아니었다. 그의 성격은 어렸을 때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개인주의적인 성향은 변한 것이 없다.
누구와 라인을 형성하는 것도 싫고 누가 자신을 추종하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을 지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은 자신의 오감(五感)을 충분히 활용하여 판단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을 그의 독특한 특징으로 한다. 남들과 연대를 맺어 결정할 경우 의견만 들어서 움직이면 되는데 그는 독립적이어서 타인과의 관계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적인 판단이 필요하게 되는 데 잘못하면 오류를 범할 수가 있어서 그것을 보충해주는 기능으로 자신의 여러 감각기관을 총동원하는 것이었다. 듣고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만져보고, 냄새 맡고, 바라보고, 소리내보고, 맛본 다음 결정을 내린다. 그의 독자성은 이렇게 남다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치 군대같은 딱딱한 학교생활이 너무나 싫어서 부모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관두고 바로 검정고시를 치렀다. 학원 한 군데도 다니지 않은 가운데 국내에서 내놓으라하는 명문의 미술대를 고등학교 1년을 단축한 가운데 입학하였다.
그리고 대학4년후 전공인 산업디자인으로 취업했어야 하였는데 디자인 직종의 회사의 말년이 40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을 알고 공부 쪽으로 선회하여 독학으로 시험을 쳐서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의 과거는 전부 이렇게 혼자이고 독자적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독자적인 판단 뒤에는 반드시 오감의 충실한 활용이 뒷받침된 것이다.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이런 체질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각계의 생명이다.
그는 한국창가학회의 1990년대 10년간의 자계반역란을 지켜보다가 학회의 회관에 들어가서 손으로 그 벽을 만져보고 냄새 맡고 해서
이곳에서 “니치렌 대성인”님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가?
아니면 “이케다 다이사쿠”의 느낌이 배어있는가?
에서 후자라고 판단하면서 10년이란 세월을 고민 해온 것이다. 1980대에는 회관에 가면 니치렌대성인님과 도다선생님의 감각이 진동을 했었다. 대성인님의 구절구절 한 어서의 배어나오는 맛과 본존님에게서 그분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생활 속 체험에서는 대성인님과 도다의 전통정신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종문과의 결별이후 1990년대에 회관에 가보면 그 두 분의 감은 점점 엷어지고 없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극단적인 사제불이의 주인공 바로 교주 이케다 다이사쿠의 느낌만 그의 오감에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오감에 충실하였다. 머리로만 판단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했다. 그러니 이런 A씨에게 창가학회의 세뇌프로그램이 먹힐 리 없었다. 머리로 들어오는 외부의 정보전달은 의식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는 오감이 작동을 하여 서로 상반될 경우 상당한 고민에 빠진다. 각 감각기관들은 서로 맞지않음에 저항하느라 아우성을 친다. 그는 이런 점에서 “대중의 편향된 세계” "집단화 의식의 세계""집단이 한쪽으로 경도 되는 세계"에 자신을 먹이감으로 내주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창가학회에서의 마인드 컨트롤 프로그램은 절대 그를 동화시킬 수 없었다. 창가학회와 종문이 결별한 이후 그는 항상 혼자였었다. “거부하는 그리고 저항하는 몸의 오감”을 도저히 달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한 번 그의 감각이 시키는 대로 스스로 혼자서 종문을 찾은 것이다.
대한민국 일련정종 서울 포교소에 도착하였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무실에 알렸다. 사무실에서는 의아해 하는 표정이다. 그가 일련정종 사무실 직원에게 건넨 내용의 요점은
“창가학회 회원입니다.”
“유수일인의 핼맥을 받으러 왔습니다.”
사무실 직원들과 옥신각신 끝에 3층 본당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도착시간은 오전 6시 55분이다. 창제시간이 7시부터이니 5분 있으면 시작이다, 사람들이 20-30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후질 근한 느낌이 전해오는 데 내부의 인테리어는 아주 깔끔하고 담백하다. 바닥은 카펫이 깔려있어서 창제시 무릎 꿇기에 부담이 없다. 그리고 불단 앞의 모든 것들은 수준급의 것이었다. 도사의 자리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는 단은 아주 최고이다. 천정은 원목을 재료로 하여 일본 전통 절 디자인을 현대화시켜서 모던한 라인으로 정리하였으며 불단주변은 정말 장엄한 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존님(만다라)은 엄청 크고 처음 뵙는다. 어본님을 향해 인사삼창을 하였다.
생명의 피난처 삼보( refuge )
그러자 조웅리 존사(尊師)님이 들어오신다. 창가학회온오프라인(ON-OFF라인)에서 그렇게 대한민국 타도(打倒)대상 1호로 놓았던 분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꼭 스타 같았다. 말 많던 그 존사님을 마주 대하니 그와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드디어 대성인(大聖人)님의 혼이 계시는 절에서 승보(僧寶)를 만난 것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갖추어진 곳에서의 처음의 근행이다. 마음의 안정이 잡힌다. 그동안 창가학회에서 삼보가 갖추어지지 않고 혼돈된 상황에서의 수행이었는데 이제 드디어 불법의 본질인 삼보가 갖추어진 곳에서의 창제이다. 삼보라는 것을 영어로 직역하면 threetreasures 즉 세가지의 보물(불보,법보, 승보)이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의(義)로써 번역하면 refuge 즉 “피난처”가 된다. 나에게는 이 삼보가 결여됨이 없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바로 “생명의 피난처”기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창가학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생사즉 열반]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아울러 [번뇌즉보리]도 추구되지 못하였다. 항상 생명은 초조했고 빠삭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뒤로 하고 삼보가 만족되어진 곳 그 도량에 그 영역에 들어 온 것이다. 생명의 대안심이 흐르고 안도감이 맴돌았다. 마음의 안식처인 쉴수 있는 곳 편안한 곳. 그 동안의 모든 딜레마들을 내려놓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에 온 것이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가 구족되어 있는 대석사의 말사격인 이 포교소야말로 바로 피난처요 안식처인 것이다.
처음 일련정종 창제회에 참여하다
드디어 초좌가 시작되었다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천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창가학회에서 10여 년간 독경의 간소화로 인해 방편품과 자아게 5분으로 축소되었다.
별도로 제천공양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1년 전에는 오좌 삼좌근행을 하고 싶어서 이 서울 포교소에 전화를 걸어 독경책을 살수 없는가라고 질문 했다가 거절당하였다. 일련정종신도가 아니면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소문을 해서 간신히 독경책을 구했는데 5일정도 수행하다가 집사람한테 들킨 후 바로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정식으로 초좌근행이 진행된 것이다. 시방에 만연되어 있는 제천들에게 인사드리고.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천들은 그대로 변함이 없이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응답하는 것 같았다. 종문과의 결별이후 22년 만에 느껴보는 감흥이었다. 가슴에서 찌르르~~~가 다가온다. 초좌에서 방편품 십여시의 3번의 읽을시 처음에
“나의 몸은 우주와 같은 법체 나는 법신여래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제천의 웅성거림이 메아리가 되어 다가온다.
그 다음은
"쇼이쇼호 노제소~~ “
"나의 몸은 바로 우주의 변화상을 잘 읽어내는 보신여래이시다.” 오래만에 제천들 앞에서 정식으로 법미를 보내면서 소리쳐 보는 "범부즉극"을 향한 외침이었다. 그러자 다시금 제천의 반응이 있었다. “우~~웅”이다. 생명의 실감성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금 세 번째의 외침
쇼이쇼호 노제소 노제쇼~~“
"나의 몸은 현실타개 능력이 뛰어난 응신여래이다”
온몸에서 소름이 끼쳐온다 . 색심으로 주변의 환경이 A씨에게로 감싸 안고 다가옴을 느낀다. 제천들이 손을 잡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 맴돈다. 오감의 충실한 느낌이 감돈다. 자신의 오감이 반기고 있다.
약간은 건조한 단내나는 냄새가 있고 절이라서 그런지 형광등은 환하지 않고 조금은 어둡다. 손마디의 주수가 조금은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개안 공양되지 않은 창가학회 주수였지만) 바닥은 까칠한 카펫이 양말위쪽에 틈으로 삐져나온 살로 느낌을 주고 있다. 까실 까실하다. 편안한 텍스츄어(질감)이다.
그 다음 “묘호렌게교 뇨라이 주료혼 다이주 로쿠”라는 승보의 외침이 아득히 들려온다. 승보의 소리는 법을 법답게 내는 소리이다. 자신도 그에 따라 부르는 소리가 혓바닦에 감겨온다. 이후부터 제천들과의 합창이 엮어지는 것이다. 가슴에는 퉁탕대고 마음속에서는 격전고가 울려대고 우장창 온몸으로 필(FEEL)을 받아가고 있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벅찬 느낌이 A씨의 색심을 감쌀 때 바로 이 느낌이라고 외쳤다. 실로 창가학회와 종문의 결별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근행창제의 실감이다.
입신당시의 그 느낌을 기억해내다.
A씨가 처음 입신할 1970년 후반 남영동 총합본부 시절 종문과 함께한 창가학회의 “한국일련정종불교회”란 종교 명칭을 보고 들어갔을 시의 그 느낌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오리새끼가 알에서 처음 까고 나올 때 자신과 마주친 생물의 모습과 소리에 자신의 어버이로 규정하고 기억해내듯 10월12일 처음 창제시의 한국일련정종불교회속에서의 그 느낌을 알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2좌에 들어가서 여래수량품 제16의 장행이다. 본존님에 대한 법미 공양이다.
그동안 학회의 니치칸상인님의 서사 어본존을 대량복사하여 개안공양 없이 유포되어진 소위 가짜 본존을 바라보고 딜레마에 시달리면서 근행창제를 하였지만 이제 그런 갈등구조에서 벗어나서 진짜의 어본존님을 대경으로 하여 근행창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앞에 계신 어본존님이야 말로 대성인께서 본인묘초(本因妙抄)』에서 이 혈맥 및 본존의 대사(大事)는 니치렌적적좌주전법(日蓮嫡嫡座主傳法)의 서(書) 탑중상승(塔中相承) 의 품승유수일인(稟承唯授一人)의 혈맥(血脈)이니라」(어서877)라고 말씀하신 적적의 부법상인의 대사로써 서사 되어진 어본존님이시다. 결함이 없는 어본존님을 보면서 수량품 장행을 읽어나가는 감회는 남달랐다.
장자 궁자의 비유
결함이 없는 어본존님을 향해서 2좌장행을 공양하고 있다. A씨는 드디어 올바른 대경을 만났다는 안도감을 갖은 것이다. 22년전 학회가 종문과 의도적으로 결별할 당시부터 지금의 어본존님을 만나기까지는 바로 [장자 궁자의 비유]와 같다 . 한부호의 아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 집을 도망쳐 나가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았는데 장자의 집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집으로 들어가 똥치는 일부터 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이집의 주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아버지로 부터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법화경의 7가지 비유중에서 신해품의 비유이다. A씨의 경우 10년전에 이미 법의 혈맥이 종문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집사람의 극심한 반대와 창가학회에서의 종문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등으로 인해 선뜻 들어 오지 못하고 학회의 잘못된 점을 주변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 해 간 것이다. 이것은 집사람의 이야기에서 확인 할수 있다. “전생에 중이셨나 항상 절만 좋아하고 중만 좋아한다”라고 핀찬을 듣곤 하였다.
A씨의 경우 창가가 종문으로부터 의도적 파문을 당하고 나서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무자게 빈곤한 삶을 살았었다. 권간부로써 창가학회 10년간의 자계반역의 난들을 눈으로 분명히 목격을 하고 그리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항상 뒤쳐져서 후배들로 부터 추격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가슴에서는 전혀 무언가 맺힌 것이 있었다. 회원들과 아무리 제목을 부르고 활동을 하여도 그들의 숙업이 전환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었다. 자신과 함께하였던 장년부들과 이궁리 저궁리하면서 뭔 뾰죽한 수를 내어 보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정말 빈궁하천한 모습이었다. 한미디로 수행의 효용성이 바짝 말라고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인터넷을 뒤지면서 온갖 정보를 입수하며 결론낸 것이 창가학회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문에 대한 희망을 갖게된 것이다. 그때 이미 그는 종문의 집에서 거름을 치는 역할을 한 것이었는 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현재 드디어 어본존님을 바라보고 장행의 독경속에서 이집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드디어 혈맥을 잇다
그런 다음 3좌근행이다. 니찌렌대성인님으로부터 닛고상인에게로 그리고 적적의 부법상인에게로 혈맥이흐르는 곳에 법미를 배증하는 공양인 것이다. 정말 창가학회에서는 혈맥이 없다고 항상느껴 왔었는데 이제 유수일인의 혈맥이 콸콸 흐르는 이 말사 격의 포교소에서의 근행이다. 창가학회에서는 법체의 혈맥운운하지 말고 신심의 혈맥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창가학회야말로 대성인님 직결의 신심의 혈맥이 흐르는 유일한 곳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니 창가학회의 인원수가 천만명을 넘어서고 전세계 192개국에서 신앙을 하여 세계광선유포를 이룬 곳이 바로 학회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증좌나 데이터를 뽑아보면 그것에는 법수가 메말랐다는 것이 잡힌다. 예전에 창가학회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은 이렇게 지도를 하였다.
신심의 혈맥”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 생사일대사혈맥초에『신심의 혈맥이 없으면 법화경을 지닐지라도 무익(無益)하니라』라고 하는 문(文)을 들어, “신심만 있으면 된다” 라는 논리와, “누구에게나 자유로 계승된다”는 등 으로 말한는 자가 있다. (중략)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신심을 함부로 내세워서 부촉상승(付囑相承)을 부정하는 것은 총별(總別)의 이의(二義)에 미혹되어 사제상대(師弟相對)의 심의(深義)에 어두워, 스스로가 혼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케다회장 명의로 발표된 대백연화 게재논문-1966년 9월호 35p)
그런데 자신들이 종문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여 형편이 달라지자 “신심만 있으면 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어상위일 수밖에 없다. 이케다 회장에 있어서 진리란 형편에 따라서 바뀐다고 보는 것인가? 이해할수 없는 처신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또 있다.
일련종 미노부파에 있어서도 南無妙法蓮連華經의 제목을 부르고 있다. 어서(御書)도 있고 경문도 법화경의 방편품, 수량품을 독경(讀經)하고 있다. 또한 본래(本來) 정종(正宗)의 승려(僧侶)였던 “정신회(正信會)”도 어법주상인이 서사(書寫)한 어본존(御本尊)을 배(拜)하고 있고 읽는 경문(經文)도 부르는 제목(題目)도 우리들과 마찬가지이다. 외견상(外見上)에서 본다면 우리들과 같게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유수일인(唯授一人) 법수사병(法水瀉甁)의 혈맥상승(血脈相承)에 따른 신심(信心)이 아니라면, 어떠한 어본존(御本尊)을 갖는다 해도 무익(無益)한 것이며, 공덕은 없는 것이다. 즉 신심(信心)의 혈맥(血脈)없이는 법화경(法華經)을 수지한다해도 무익(無益)하니라」인 것이다. (이케다 회장의 광포와 인생을 말한다. 제8권 228쪽)
한 마디로 유수일인의 혈맥상승이라는 신심의 혈맥없이는 무익한 것이다라고 지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형편이 달라졌다고 말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어상위의 문장은 12년전에 이미 A씨는 알고 있었다. 딱 창가학회는 어쩔수 없이 정신회나 현정회와 동일하게 신심의 혈맥이 없기는 매한 가지였다.
A씨 22년간 혈맥이 차단되었다가 지금 3좌에서 처음으로 혈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4좌 5좌근행을 마치고 제목창제속에서 니찌렌대성인님에게 감사함을 보고 드렸다.
5좌를 마치고 대성인님의 어서 “종종어진무어서”를 함께 읽는 순서가 있었고 존사가 일어나자 바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A씨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따라내려 갔는데 객전에서의 독경이 또 있었다. 방편품과 자아게의 독경이었다. 그러더니 2-3분 제목을 하고 마치었다. 끝나는 시간이 오전 8시이었다. 휴게실도 그 속에 커피박스도 있었다. 9시까지 출근이므로 포교소에서 직장까지는 20분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커피한잔을 뽑아서 마시니 사무실 직원이 자꾸 쳐다보면서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회사로 와서는 일단 옛날 전화번호부를 전부 뒤져서 종문으로 간 국악인 지역부인부 간부의 연락처를 찾았다. 아무래도 내일 가면 사무실 직원들과 또 신경전을 벌여야 할 것 같았다. 종문을 무지막지하게 공격한 단체인 창가학회, 그 간부가 가서 “종문아침 근행” 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들도 납득이 안갈 것 같아서이다.
< 퍼온글 : "한국SGI.일련정종" http://cafe.daum.net/kyssea0327
첫댓글 위의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흐름님 자신의 이야기일 것 입니다.
참으로 괴이하고도 무당같은 팔자를 타고 나셨습니다()
천마 닛켄종과 흐름님의 신끼는 마성으로써 닮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주 기본적인 것에 미혹해 있습니다.
흐름님의 생각이나 주장이나 신심은 외도이며 지독하게 저급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인부장님과 백년해로하시면서 학회에서 제명하지 않는 이상
에는 부인부장님과 마주 손잡고 어본불과 창가학회를 떠나지를 마십시오()
아마도 예언하건대 흐르님은 종문에 이용당할 대로 당하고 쫓겨나거나
스스로의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썩어빠진 종문에서 나올
그리고 한가지 당부드립니다.
자신의 글만 올리면 되는데도
미끼 링크를 거는 것은 차후에는
무조건 삭제하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에궁~~~ A씨의 오감의 직감력이 무당끼였다면 그것보다 백천만억배 심한 도다의 옥중오달(인간혁명에 나와 있음 읽어보시기 바람)은 초 슈퍼 하이레벨의 무당끼의 였을 것입니다.
만약 저글을 그대로 퍼오고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 저작권법에 걸리는 것 아닌가요. 반드시 글을 퍼올때는 글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 순리아닌가? 그래도 싫다면 저도 싫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무단으로 " 한국SGI.일련정종"카페에서 글 퍼오시면 안됩니다. 제글은 저작권이 저한테 있으니 그냥 퍼올수 있습니다만~~저도 법에 저촉되는 짓은 안하고 싶습니다. 3번이상 저작권법에 걸리면 카페 문닫아야 한다나...
ㅎㅎㅎ
도다샘의 오달과 흐름님의 감잡기는 차원이 다르지요^^
무당의 신기와 불보살의 영험이 같다는 말씀이라 우습습니다.
그리고 위의 글은 흐름님이 스스로 퍼 온 것인데 무슨 소리인지요?
출처를 밝히는 것과 의도적으로 링크를 거는 것은 다릅니다.
이제는 흐름님은 쪽바리의 행동을 가감없이 따라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 시인하기 보다는 변명하고 호도하는 것이지요?
님이 말하시는 그곳 카페는 이제 별 볼일이 없어서 퍼나를 가치도 없습니다!
이제 할 말이 없으니까 얼토당토않는 법이야기까지 하시니 딱해 보입니다^^
"죽을 때 까지 불교회와 같이 할것"이라고 호언장담 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하셨네요.
어쨌던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겠지요.
그렇지만 “제 닉네임이 왜 흐름 일까요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이보그가 아닙니다. 그 댓글을 쓸때는 대안이 없던 것입니다.”라는 말은 다시는 하지 않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마음 고생 많았을 텐데, 편안한 마음으로 신심하시길 바랍니다. 이건 제 진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