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4 부처님 오신날 법문
염화미소(拈花微笑)
1234567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1은 해요. 2는 달이며, 34567은 화수목금토의 오행을 이름이니, 우주천지운행의 참모습입니다.
대(大)는 크다는 말이요. 방(方)은 방정(方正)하다는 뜻이요, 광(廣)은 한없이 넓다는 의미이니, 역시 우주천지를 뜻하는 말이겠습니다.
또 불(佛)은 각(覺), 즉 깨달음이라는 말이니, 이 깨달음은 참으로 ‘크고, 방정하고, 넓어서’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까닭에 우주천지의 본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낱낱이 이러한 모습(꽃)으로 장엄된 것이 바로 우주의 진면목입니다. 또 경(經)이라함은 이러한 모습을 설한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經)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요, 먹으로써 쓰여진 것이 아님이며, 붓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생 본연의 마음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나무(南無)란, ‘귀의(歸依)한다.’ 는 말이며, 아미타(阿彌陀)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 즉, 우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불(佛)이란, 깨달음을 불격화(佛格化)한 말이라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체중생이 다 함께 귀의함으로써 대방광(大方廣) 불화엄(佛華嚴)의 세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1, 염화시중(捻花示衆)
오는 21일은 불기 2554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2554년전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심으로 모든 중생이 다 평등한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그야말로 존재의 평등성을 통하여 낱낱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 가치와 존엄에 때한 인정은 누가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누구도 변경하거나 고칠 수 없는 확고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저 미래세가 다하여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염화시중(捻花示衆)의 미소(微笑)’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이야기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인도에‘수다스’라는 구두쟁이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근처 연못에 때 이른 연꽃 하나가 핀 것을 발견했지요.
이 연꽃을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습니다.
꽃을 들고 가다가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 부자가 탄 마차였습니다.
부자는 연꽃을 보더니 마차에서 내려 연꽃을 팔라고 했지요.
얼마를 받을지 몰랐던‘수다스’는 부자에게 얼마를 줄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부자는 500냥을 준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수다스’가 연꽃을 주려는데 왕이 탄 마차가 다가왔습니다.
왕이 연꽃을 보더니 부자가 말한 액수의 네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도 지지 않고 또다시 네 배를 준다고 했습니다.
나중엔‘수다스’가 얼만지 계산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수다스’는 이들이 왜 그토록 연꽃을 사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었지요.
이들은 설법중인 부처님께 이 연꽃을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수다스’는 이들에게 말했지요.
“내가 직접 이 꽃을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마침내 이들이 부처님께 이르렀을 때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수다스야!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이다. 너는 그 꽃을 파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수다스’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이 꽃을 부처님께 바치면 사람들이 부처님 얘기를 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저를 기억해 주겠지요. 저의 생계는 제가 꾸릴 수 있으니 돈은 필요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부처님은 아무말씀도 없었습니다.
설법이 끝날 시간이 되자 부처님은 그 연꽃을 손에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꽃을 가섭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연꽃뿐 아니라 나의 모든 향기와 빛을, 나의 마음을 그대에게 전한다. 이제 나의 법(마음)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니 이 연꽃은 그 상징이다. 나의 모든 경험(깨달음)들은 이제부터 말없는 가운데 전해질 것이다.”
마하가섭은 미소로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마음과 마음으로, 설법 없는 설법으로 전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수다스’에게서 받아 가섭에게 전한 그 연꽃은 물론, 모든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 즉, 더러운 진흙 속에 살지만 그 진흙이 묻지 않아서 항상 깨끗하듯이, 중생의 성품도 이와 같아서 온갖 번뇌와 망상, 생사 고통에 헤매고 있지만 본래 성품은 조금도 물들지 않아서 영원무구(永遠無垢)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꽃은 ‘인과동시(因果同時)’라고 하는, 즉 꽃이 피고 져야 열매를 맺는, 원인과 결란는 서로 다른 때, 다른 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생길 때 바로 결과도 함께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연꽃은 꽃망울이 생길 때 이미 씨방도 함께 생긴다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존재의 이분성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존재의 참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하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그 마음이며, 부처님이 꽃을 들자 미소(微笑)를 지었던 바로 그 소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식에 의하여 오늘 우리도 연등을 밝히고 부처님 오심을 봉축하고 찬탄함으로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설법 없는 설법으로 말없는 이 가운데서 영원무구(永遠無垢)한 저 거룩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 받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 재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저 ‘수다스’의 장자나 대왕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많은 재물을 거절하고 부처님에게 바친 그 연꽃이며, 바로 ‘수다스’ 그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오직 내가 홀로 높다.’ 고 외치신 그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의 사람들(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므로, ‘지천지지무인회(指天指地無人會),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켜도 아는 사람이 없다.’ 라는 탄식을 하고, 스스로 출가 수행하여 다시 깨달음을 보임으로서 누구나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모범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이심전심의 소식과 함께 그 가르침을 결집하여 만든 것이 불경(佛經)이며, 이는 세계 많은 종교 가운데서 가장 우뚝한 금자탑으로 서 있게 된 것입니다.
2, 종교와 불교
(1) 종교
종교는 인간을 정화하고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며, 현실의 고통을 해소하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2) 불교의 특징 : 깨달음의 종교, 실천의 종교, 지혜의 종교, 자비의 종교, 평화의 종교, 평등의 종교입니다.
첫째, 깨달음의 종교 :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 즉 자각(自覺)의 종교입니다. 다른 신(神)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각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즉, 불보살에 의지하는 타력문(他力門)이 있지만 종내는 자각(自覺)으로 이르게 하는 자력문(自力門)입니다.
둘째, 실천의 종교 : 불교는 형이상학적, 현학적, 관념적 종교가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을 지향하는 실천과 행동의 종교입니다.
※ 이에 걸맞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대시인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찾아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이라고 하니, 백낙천은 웃으며 “그런 것은 세살 어린이도 다 아는 게 아니냐?” 고 반문하니, 스님은 “비록 세살의 어린애도 다 알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셋째, 지혜의 종교 : ‘지혜’란 우주의 진리,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 즉 존재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윤회와 고통의 근원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12연기(緣起)의 첫째인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넷째, 자비의 종교 : 자비(慈悲)의 원뜻은 발고여락(拔苦與樂)입니다. 자(慈)는 여락(與樂), 즉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비(悲)는 발고(拔苦), 즉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는 ‘섭수(攝受)’와 악(惡)에 대해서 분노하고 굴복시키는 ‘절복(折伏)’과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째, 평화의 종교 : 인류 역사상 종교라는 미명(美名)하에 수없는 성전(聖戰)으로 무고한 생명이 끔찍한 죽음을 당해왔습니다. 이는 종교본질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에서 초래된 비극입니다. 불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어 평화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평등의 종교 : 타종교는 신과 주종(主從)의 관계이지만, 불교는 부처와 중생의 본질에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중생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의 사성계급제도를 부정하고 이를 타파하려고 하셨습니다.
(3) 중생계의 실상(實相) : 제로섬게임, 서바이블게임, 적자생존,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 안수정등(岸樹井藤), 생사윤회(生死輪廻), 전도몽상(顚倒夢想) 등 이러한 세계가 중생계의 실상입니다.
※ 안수정등(岸樹井藤):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 쫓겨 우물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피합니다. 다행히 칡넝쿨이 있어 거기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물 안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쥐 두 마리가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했으나, 칡넝쿨 꽃에서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위급한 현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는 위급한 상황을 대처해야하는데 꿀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고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4) 불교의 이상(理想) : 이고득락(離苦得樂), 전미개오(轉迷開悟), 혁범성성(革凡成聖), 안심입명(安心立命), 해탈(解脫), 열반(涅槃), 견성성불(見性成佛) 등 이러한 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이고득락(離苦得樂) :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樂)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전미개오(轉迷開悟) : 미혹하고 어리석음에서 해탈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셋째, 혁범성성(革凡成聖) : 범부(중생)적인 것을 고쳐서 성인(부처)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넷째, 안심입명(安心立命) : 마음속의 모든 번뇌. 망상을 잠재우고 편안하게 하여 천명(인연)에 맡김으로써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 해탈(解脫) : 생사(生死)의 속박(束縛)과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 열반(涅槃) : 모든 욕망과 번뇌의 불꽃이 꺼진 고요한 적멸(寂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기 안에 내재된 부처의 참 성품을 직관(直觀)하여 부처가 되는 것, 견성성불의 목적은 구경열반(究竟涅槃), 즉 해탈열반에 있는 것입니다. 해탈열반이란, 일체의 번뇌와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대자유를 말하는 것이며, 중생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므로 그 성품을 바로 보아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2010.05.06.염화당 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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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이 필요없는 그 이심전심의 세계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중생계의 실상에서 벗어나고자 염불합니다.
일체는 아미타불 화신이다. 모든 인연에 감사하고 보은 하자.
일체경계가 일심인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