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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뱀과 놋뱀
민 21:1-9
1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 설 교 >
믿고 따르면 산다
민 21:4-9 / 황광민 목사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청춘 남녀가 자동차 안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달려온 구조대는 자동차의 유리문을 깨고 두 사람을 끌어내어 인공호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기가 막힌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죽음에서 건져진 청년이 경찰서에 청구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청구서는 구조대원들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린 것을 수리하고 가져온 청구서였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도 꽤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민수기 21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하다가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행하는 길(Course)문제로 원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 원망하는 사람들을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죽음 앞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모세에게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닫게 하시고 누구든지 믿고 쳐다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산다는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원망은 불신앙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원망이 불신앙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원망이 생깁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이 호르산에서 발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당을 들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불신하는 데서 나온 원망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다소 어려운 길로 인도하셨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길 해안도로를 내버려두고 홍해를 건너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해안도로를 이용하면 금방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진 치고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를 가진 블레셋이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고, 그리되면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향하였을 때 그곳은 호구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쪽은 바다였고 다른 한쪽과 앞은 큰산들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에 애굽 왕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갇혔다고 군사를 보냈습니다. 꼼짝 못하고 잡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군대는 홍해 속에 장사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인도하심은 선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인도는 선한 줄 믿고 믿음으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려운 길로 택한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범죄 하였을 때 길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는 12명의 정탐꾼이 40일 동안 정탐하였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와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신앙적인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이 좋은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하면서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동요되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적인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간 방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에서 어려운 길을 가던 하나님을 원망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무리 어려워도 최선의 길로 믿어야 합니다. 삶을 뒤돌아보십시오.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이 큰 유익이 된 것을 믿습니다. 오늘 어려움이 있다 해도 그것도 큰 유익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원망하지 마십시다.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할 지언정 원망하지 마십시오. 원망은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원망이 재앙으로
둘째로 본문이 주는 교훈은 원망이 재앙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배은망덕한 말입니까? 가나안 땅을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애굽에서 건져내셨는데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방랑하였는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이는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십시오. 광야에서 죽게 한다고 원망하던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무슨 말씀입니까? 죽겠다고 원망하던 그들이 불뱀에 물려 죽은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원망의 말이 씨가 되어 재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옛사람들이 말에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는데 헛말이 아닙니다. 말이 씨가 되어 원망이 재앙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원망이 아니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원망의 말은 재앙을 가져오지만 감사의 말은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닙니다. 불신앙의 말인지, 신앙의 말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말이 말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말로 집을 짓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엮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에서 나온 말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시간에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로 성찬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즉시 소년에게 "어서 물러가라. 다시는 제단 앞에 나오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주의자의 대 지도자인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천주교회에서 주일 미사를 돕고 있던 소년이 실수로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곧 이해와 동정이 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앞으로 더욱 신중하여 훌륭한 신부가 되겠구나." 그 소년은 자라서 유명한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대주교 홀튼 쉰의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의 말을 합시다. 원망의 말을 버리고 감사의 말을 합시다. 불신앙의 말을 버리고 신앙의 말을 합시다. 저주의 말을 버리고 축복의 말을 합시다.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긍정적인 말을 합시다. 절망의 말을 버리고 소망의 말을 합시다.
회개가 살길이다
셋째로 본문이 주는 교훈은 회개가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서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 떠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불뱀으로 인하여 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들은 원망한 것을 회개하면서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회개가 살길입니다.
신명기 30장 2-3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55장 7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아멘. 회개가 용서받는 길입니다. 회개가 살길입니다.
믿고 따르라
넷째로 본문이 주는 교훈을 믿고 따르면 산다는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 아멘. 하나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살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사건도 그렇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해독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장대에 달린 놋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에 무슨 치유의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오직 믿고 쳐다본 사람은 불뱀에 물렸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여리고 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내리신 하나님의 지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을 공격하기 전에 성을 돌라고 하였습니다. 엿새 동안은 한 바퀴씩,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셨습니다. 몰래 몇 사람이 도는 것이 아닙니다. 나팔을 불면서, 북을 치면서 돌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전법이 어디 있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전법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말씀대로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였습니다. 당당하게 성을 도는 이스라엘로 인하여 여리고 성은 기가 죽었고 힘도 못쓰고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으면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이해하고 믿으려면 믿을 수 없습니다. 믿으면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믿으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조건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은 장대에 달린 불뱀으로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위해 놋뱀을 장대에 단 것처럼 죄악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본 즉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믿고 따르십시오.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 길이 구원받는 길입니다.
요즈음 어떤 기독교인들은 자력종교에게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공로가 있어야 구원받을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그렇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불교나 천주교에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불안해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하나님의 지시대로 믿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이 구원 얻은 것처럼 십자가에게 내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믿으시면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믿고 따르십시오. 그 길이 살길입니다.
복을 불러 들이는 자 되자
민 21:4-9 / 김학규 목사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30: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여러분과 저 앞에는 생명과 사망의 길과 화와 복의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복의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살 길이 있고, 죽을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곳을 택하든 그것은 우리의 전적인 자유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내가 하고, 어느 길을 택하던 그것은 내 자유이지만 내가 택한 그 길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니 오늘 여러분과 저는 정말 택할 길을 택하여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까?
1.화를 불러들이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진행하던 중
6절에 보면, 불 뱀에 물려 죽은 자가 많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께서 불 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큰 진노, 죽음에 이르게 되는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께서 보낸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화를 불러들인 자, 화를 자초한 자들이 되어 화를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든지 잘 되어야 하고,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안됩니다.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불행해 집니다. 실패합니다. 자꾸 아파집니다. 일이 자꾸 꼬여 갑니다.
물론 이런 일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시련, 연단, 훈련하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로 이런 일들을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화를 불러들이는, 화를 자초하는 일로 인해 이런 일들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를 불러들었고, 화를 자초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화를 불러들이는 꼴이 됩니까?
①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탓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양식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 왜 하나님은, 모세는 그들이 잘 사는 애굽에서 끌어내어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고 합니다.
한 마디로 `모세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생고생을 한다`하면서 모세를 탓하고, 하나님을 탓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이야 어떠하든 말든 내가 힘들고, 내가 아프고, 내가 손해보고, 내가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종살이하는 그곳에서 끌어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정말 그들이 자기들로 인하여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살펴서 섬겨도 부족할 형편에 `너희들 때문에`라고 남 탓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불 뱀을 내려 물려 죽게 하시므로 정신을 차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화를 자초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화를 내게로, 내 가정으로, 우리 교회로 불러들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날 모든 문제를 `나는 괜찮은데 너는 왜 그러냐?` `이 모든 것이 다 너 때문이다` `너로 인해서 이렇게 손해보고, 너로 인해서 이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할 때에
결국 화가 내게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너`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너`가 잘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고, 더 큰 연약함이 있습니다.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니 남을 볼 때에 나를 볼 줄 알고, 나의 허물과 실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긍휼 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곳이 어디든 화를 불러들이지 않기를 원하시거든 남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나에 대해서 말하십시오.
남 탓하고, 남에게 문제를 전가시킬 때 화를 불러들이기 됩니다.
반대로 복을 불러들이기를 원하거들랑 `다 나 때문`이라고 하십시오.
어떤 가정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그만 방에 놓여 있는 끈에 발이 걸려 밥상을 엎고 말았답니다.
웬만한 가정이라면 시부모님들이 `애, 너는 눈도 없냐. 그것도 못보고 걸려 넘어져 밥상을 엎다니`하고 질책을 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에 웃음이, 행복이, 복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위로합니다.
`아가야, 내가 그 끈을 치운다는게 깜박했구나. 다 내 탓이다.`
밖에서 들어오는 시어머니는, `아니에요, 내가 당신이 치우라고 했을 때 치워야 했는데 내가 치우지 않아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오히려 위로를 합니다.
이런 가정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됩시다.
그런데 매사에 다 `너 때문이야`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나는 괜찮은데 네가 문제다`라고 여기고 탓이나 하고 있으면 결국 그 집은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화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화를 불러들이지 맙시다.
②원망, 불평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먹을 물이 넉넉하지 않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먹고 싶은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올려서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여기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고, 맨날 만나만 먹게 하느냐?`
그러니 싫다, 귀찮다, 괴롭다, 하면서 이들은 원망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불 뱀을 내려 물려 죽게 했습니다.
왜요?
그대로 남 탓이나 하고, 원망 불평을 하는 사람들을 놓아두면 이스라엘 전체에 더 큰 화가 임하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물려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광야의 삶, 세상의 삶에는 만족함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모자라는 인생이고, 힘든 세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가지면 둘 가지고 싶고, 열 가지면 백을 가지고 싶은게 사람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어진 그 여건과 환경 가운데 잘 적응하는 비결을 배워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남은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게 뭐야?
남은 가진 것도 많은데 나는 왜 가진게 없냐?
누구를 저렇게 잘 해주는데 왜 너는 그렇게 못해 주냐?
내 만족, 내 원함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우리들에게서는 원망,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원망, 불평이 곧 나를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불행하게, 안되게, 어렵게, 힘들게 하는 것이 됩니다.
즉, 화를 자초하고, 불행을 자초하고, 멸망을 자초하는 꼴이 됩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원망이 아니라 감사할 때에 그곳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 사탄이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려고 덤벼들다가도 감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불행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도망을 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욥을 자랑합니까?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욥에게 불행을, 저주를 가져다주려고 하지만 욥은 오히려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니 결국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큰복을 받아 누립니다.
주신 것이 많던 적던, 크던 적던 지금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면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셨음에도, 주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족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결국은 화가 내게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 대해서든, 무엇에 대해서든 원망, 불평은 곧 화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하니 이제는 그 사람으로 인해, 그 일로 인해 속상함이 있을 수밖에 없고, 원망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이 모습이 오늘 본문에 모세의 모습입니다.
③주님의 길로 좇지 아니하고 자기의 길로 좇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세상의 길로 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4절 말씀을 잘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이들은 자기들이 볼 때 편해 보이고, 빨라 보이는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길은 그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그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길과는 반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4절에,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들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했다면 원망도 불평도 안 했을 텐데 자기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하니 얼마나 신경질 나고, 짜증났겠습니까?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들은 만나만 아니라 좀 다른 음식도 먹고 싶은데 하나님은 맨 날 만나면 내려 주십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년을 만나면 내려 주시니 얼마나 질리겠습니까?
그러니 원망하고, 그러니 결국 화를 자초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어떻게 함이 화를 불러들이는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할 때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겠습니까?
내 맘대로, 내 고집대로, 내 생각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행하게 되면 결국 화를 불러 들이는 꼴이 됩니다.
또 믿음의 길을 가는 길이 좀 따분하다고, 금방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답답하니, 속상하니 세상 길로 좇아가고, 세상 방법을 좇아가면 결국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행하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하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고집대로 하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화를 불러들이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2.복을 불러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6절 말씀에 의하면 불 뱀에 물려 죽은 자가 많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7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놋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불행이 물려 가고 행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가난이 부요한 자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안되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통이 건강함으로 회복되어짐의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을 불러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①오늘 본문에 모세는 바로 복을 불러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기에 사는 역사, 되는 역사, 복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을 불러들이는 것입니까?
7절에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백성을 위해서
광야에서 물이 부족하고, 먹을 양식이 풍족하지 않는 것과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함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힘이 들고 고단한 것은 모세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신을 챙기고, 자신을 돌보기 전에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복을 불러들이는 길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나를 희생하고, 내가 수고하는 이 일을 주님께서 얼마나 복되다 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었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기도하매
모세는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살려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때 뿐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으로 죽게 되었을 때마다 모세가 했던 일은 바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앞장 20장2절-9절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에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6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자 이렇게 엎드릴 때에, 즉 기도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죽어 가는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 기도함은 문제를 해결 받는 축복의 사건이 되어집니다.
우리가 염려와 근심의 일들 앞에 기도함은 염려와 근심을 이길 수 있는 복을 불로 들이는 것이 됩니다.
기도는 축복의 문을 여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고자 하는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기도하므로 복을 불러들입시다.
기도하므로 복을 자초합시다.
②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여 복을 불러들이는 자가 되었습니까?
7절에,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긍휼 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불 뱀에 물려 죽어가면서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죽어가도 죽어가게 하는 그 일들을 통해서 깨닫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살려 주십니다.
여러분!
나를 물고 있는 불 뱀, 물리지 아픔이 있고, 힘이 들 때에 단순히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고 돌이키면 살게 됩니다.
9절에,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놋 뱀은 오늘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길은, 잘 되는 길을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왜요?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사람 보면 실망합니다. 사람 보면 힘이 빠집니다. 사람을 보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삽니다.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 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③감사하면 복을 둘러 들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팠던 바사의 다리오 왕의 신하들은 다니엘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함정을 파 놓았습니다.
(단 6: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 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어떻게 합니까?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 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 께 감사하였더라
여전히 변함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기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자기는 어떻게 하든지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원망하면서 불평하면서 기도합니까?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그는 감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상황이 좋았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빴을 때에도 그는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있을 때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없어도 감사하였습니다.
편할 때도 감사하였지만 어려웠을 때도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어집니까?
도리어 그 사건으로 인하여 다니엘은 더 왕에게 신임을 받고 굳은 위치에 세워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을 불러들이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언제도요?
좋던 나쁘던, 있던 없던, 하던 못하던, 건강하던 병들었던, 실패했던 성공했던, 주시던 안 주시던, 도와주던 안 도와주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무엇하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까?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 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가 이렇게 감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 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여러분!
감사하는 것이 복을 불러들이는 비결입니다.
그러니 이 번 한 주간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던, 어떤 모습이고 상황이던 감사합시다.
복을 불러들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화를 자초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도리어 여러분과 저를 복을 불러들이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어디를 바라보십니까
민 21:4-9 / 김광일 목사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보아야지 나쁜 것을 보면 그만큼 손해가 큽니다. 어느 젊은이가 골동품 가게에 취직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젊은이는 처음부터 가짜를 가려내는 법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짜를 골라내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6개월 동안 진품만 잔뜩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가짜를 하나 가져와서 점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보자마자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짜만 보니 가짜를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눈앞에 무엇이 있느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눈에는 항상 책이 보여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교사의 눈에는 제자가, 의사의 눈에는 환자가, 목사의 눈에는 성도가, 기업가의 눈에는 근로자가 보여야 합니다. 또한 정치가의 눈에는 국가의 장래가, 어머니의 눈에는 가정의 행복이 보여야 합니다. 올바로 보기만 하면 우리는 성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특히 성도들이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시 17:15). 주의 긍휼 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시 123:2).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골 3:1).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1:26).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하나님의 날이 임할 것을 바라보고(벧후 3:12),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벧후 3:13). 올바른 것만 보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행진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 복지에 접근하기 시작할 무렵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에돔 족속이 사는 땅을 통과하면 가까운데 에돔 족속이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먼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서 불평이 생겼고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했습니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살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음을 상하게 하는 환경을 바라보며 침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광야의 힘든 길을 잘 참고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돌아가게 되었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니라'라는 말은 '카차르'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의 뜻은 '짧다'입니다. 마음이 짧아졌다는 것은 안목이 좁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 멀리에 있는 목표를 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환경의 고통 때문에 주저앉아 버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마음이 상하면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침체에 빠지면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잘 참던 것도 못 참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배신하게 됩니다.
어느 회사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직원 한 사람이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착실하게 일을 한 직원이어서 법에 따라 일단 은퇴를 하게 했습니다. 퇴직금을 후하게 계산해서 지불했습니다. 이익이 많이 나는 업체는 아니지만 퇴직 기념품으로 큼직한 황금 열쇠도 하나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임시직으로 더 근무하게 했습니다. 특혜를 준 것이지요. 약속한 기간이 되어 이제 완전히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퇴직금을 이미 다 지불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직원이 퇴직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내가 여기서 평생을 바쳐 몇 십 년을 일했는데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내보낸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장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었지만 이 일은 가슴 아픈 일 가운데 가슴 아픈 일이라고 회고하고 그 다음부터 정년이 된 사람의 근무연장은 좀처럼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배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 이 사장보다 더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배신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 길을 알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길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서 너무 멀다고 불평합니다. 너무 험하다고 불평합니다. 넓은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달려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이 못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인 환경을 바라보아서는 결코 안됩니다. 영적으로 침체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영적 충전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사순절에 힘써야 하는 전도, 성경 읽기,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기, 금식, 절제, 묵상, 구제, 선행, 모두 영적 충전을 위한 노력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영적 충전에 힘쓰는 절기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다. 이제 영적 충전에 힘써 원망, 불평, 배은망덕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상한 마음이 치유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에 대해 늘 감사하며 영적으로 충만하여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물고있는 불뱀들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불뱀은 광야에 살고 있는 독사들을 표현한 것인데 이 뱀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뱀들에게 물리면 붉은 반점이 생기며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죽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뱀은 삼천여 년전 광야에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유혹의 불뱀이 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남자들을 유혹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여성들을 '꽃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꽃뱀이나 불뱀이나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물리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기주의의 불뱀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배정문제가 지금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좋은 학교에 가겠다고 야단을 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이른바 '기피학교'라고 알려진 학교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 학부형들, 특히 교사들, 얼마나 상처를 입을까 , 학생들이 쓰는 말로 얼마나 '쫀심'〔自尊心〕이 상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 며칠씩 밤을 새는 학부모들, 차라리 자녀들이 원하지 않는 학교에 들어가더라도 지금의 열심을 가지고 그 학교를 좋게 만드는데 힘쓴다면 그 학교가 들어가기 원하는 학교보다 더 좋은 학교로 변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마약의 불뱀, 폭력의 불뱀, 탐심의 불뱀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할 때 광야를 통과하는데 광야에는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글거리는 햇볕, 풀 한포기 없는 산, 가끔가다가 보이는 떨기나무와 풀, 베드윈 족속의 부락,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낮에는 이렇게 아무 것도 없지만 밤이 되면 독충들이 나오고 전갈이 나오고 독사들이 나옵니다.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불뱀들은 밤에 더 판을 칩니다. 우리 마음에 어둠이 찾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불뱀이 나타나 뭅니다.
우리는 지금 불뱀들이 우글거리는 광야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독사에게 물리면 특효약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활에서 불뱀에게 물리면 즉효약이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했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회개하는 마음, 경건한 마음은 불뱀의 접근을 막아줍니다. 이 사순절 절기에 회개하는 일에 특별히 힘쓰시기 바랍니다. 불뱀에게 물린 아픔이 있으면 치유될 것입니다. 불뱀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생명을 주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놋을 녹여서 불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놋뱀을 쳐다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에 순종해서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해독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불순종하며 땅만 쳐다보고 원망, 불평한 사람들은 서서히 독이 퍼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놋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14절과 15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저주받은 것의 대표적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장대에 달리니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도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삽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조금 돌아가게 되었다고 가지 못하게 된 지름길의 환경을 보면서 원망하고 있습니까? 불뱀을 보며 두려워합니까?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135장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이 찬송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작사하고 작곡한 분은 조지 버나드라는 감리교 목사입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믿음으로 역경을 이겼습니다. 조지 버나드 목사가 십자가에 대해 집중으로 묵상하는데 처음에는 험한 십자가만 생각났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1913년 어느 날, 집회를 인도하는 데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의미가 바르게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의 표현을 빌면 '홍수처럼' 십자가의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즉시 펜을 들어 쓴 것이 이 찬송입니다. 3절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험한 십자가에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십자가를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도 마음이 상하는 것을 느낍니다. 나도 눈이 짧아지고 시야가 좁아져서 멀리보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은혜를 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광야를 지나면서 불뱀에 물려 고통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불뱀을 보며 두려워하던 눈을 이 사순절에 방향을 돌려 십자가를 쳐다봅시다. 최후 승리 얻기까지,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를 붙들고 나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
민수기 21:4-9 / 황의봉 목사(평안교회)
기대가 무너졌을 때의 허무함을 경험하신 일이 있습니까? 어떤 부모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떨어지자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이 그 정도는 아닌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의 유명 대학도 아니고 옛날 자신이 다니던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대학인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더라고 합니다. 지방 대학의 추가 접수를 기웃거리고 2년제 대학을 찾아다니면서 들어갈 곳이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부인은 건강만큼은 자신 있다고 하던 남편이 어느 날 고목나무 쓰러지듯 병석에 눕고 말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좌절감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아무리 불경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IMF 때의 경제 위기도 이겨냈으니 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만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만 실의에 빠져 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진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은 곧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여정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겪은 일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우리의 삶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나가는 인생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요즈음 우리 상황을 보십시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코로나19를 예측이나 했습니까? 이제까지 숱한 전염병이 돌았지만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하는 독감정도로 생각했지 이렇게 전 세계를 펜데믹(pandemic) 상태로 몰고 갈 줄은 몰랐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가두어놓고 경제가 곤두박질 칠 줄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50일이 넘는 기나긴 장마, 꼬리를 물로 올라오는 태풍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사람들도 400여년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그렇게 그리던 고향인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자 마음은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향하는 여정은 그렇게 쉬운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홍해는 건넜지만 이번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한 달 후에는 식량마저 바닥이 났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고 인도하셨습니다.
넉넉히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살피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묵묵히 참고 견디어 온 사람들에게는 그야 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크고 힘이 세며 성곽은 튼튼하여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떠나지 말게 할 일이지 지금 와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오던 길을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은 38년간 방황을 했습니다. 이 40년간 방랑생활로 인해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돔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가 세운 나라입니다. 그들은 에돔 왕이 나와 환영을 하며 길을 열어줄 줄 알았습니다. 고생이 많다고 하며 먹을 음식도 내줄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40여 년간 지긋지긋한 만나만 먹었는데 오랜만에 별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에돔 사람들이 길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대표를 데리고 나가 정중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큰길로만 지나가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낼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지나갈 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민 20:19). 그러나 에돔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길을 막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만 했습니다. 「왕의 대로」라고 불리는 평탄하고 빠른 지름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홍해의 길로 나가기 위해 바란 광야로 되돌아갔습니다. 지금까지 38년 가까이 광야에서 방황했던 백성들은 지름길을 놔두고 또 다시 고역스런 광야 길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5). 하찮은 음식이라니요? 40년간 먹은 만나가 하찮은 음식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38년 동안 그들은 수 없이 원망하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한다면 ‘백성들은 계속 원망과 불평을 하였고,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셨다’라고 요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망은 습관입니다. 불평이나 원망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원망이나 불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은 사흘을 찾아 헤맸지만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겨우 물을 발견했지만 그 물은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는 사람들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릎을 꿇고 부르짖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5:25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2.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들은 불뱀에 물렸습니다.
38년간 백성들의 원망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이 무서운 불뱀이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길을 걷다가 불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밤에 장막 안으로 기어들어온 불뱀이 잠을 자는 이불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한 번 물리고 나면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마땅한 약이 없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원망하는 사람에게 불뱀은 찾아옵니다.
아담과 하와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원망을 하다가 불뱀에 물렸습니다. 하와를 보세요. 하나님의 에덴동산에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만약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또 채워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수많은 과일들 중에서 선악과가 먹고 싶었습니다. 탐스럽게 생긴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하와는 이렇게 원망하고 있다가 뱀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다윗 왕에게는 많은 왕비와 수많은 궁녀들이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했습니까? 결국 다윗 왕도 뱀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을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삼하 12:7-9).
우리의 문제는 어디서 발생합니까?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불뱀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고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불뱀이 달려듭니다. 불뱀은 사탄의 그림자입니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사탄을 옛 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와를 꾀어 멸망시킨 그 뱀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불뱀에 물려 건강을 잃고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불뱀에 물려 가정의 화평이 깨지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불뱀에 물려 모아두었던 재물을 다 잃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마치 좀비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불뱀에게 물려 사탄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갖 죄를 짓고 살면서 그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 영혼은 점점 죽어가지만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히 소망이 없단 말입니까?
3. 하나님은 불뱀을 치우지 않고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하나 둘 고통 중에 죽어갔습니다. 불뱀은 곳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불뱀이란 말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뱀으로 잘 알려진 ‘그 뱀’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불뱀이 등에 불타는 듯한 반점이 있는 아라바 광야 지역에 서식하는 독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뱀에 물리면 독성 때문에 온 몸에 높은 열이 생기며 죽어간다고 합니다.
뱀의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백성들의 모습이 측은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불뱀에 물린 사람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해결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3:14-15을 읽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 높이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놋뱀을 장대 높이 매달았던 것처럼 죄로 고통당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누구든지 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나음을 입은 것처럼 지금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나을 수 있습니다.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럽다 해도 놋뱀만 바라보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장막 밖으로 나와 놋뱀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뱀에 물려온 몸이 퉁퉁 붓고 살이 썩어 들어간다 해도 믿음으로 놋뱀만 바라보면 나았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나병에 걸려 고통당하던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면 낫는 다는 것을 알아” 하면서 장막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요단강에 씻으면 깨끗이 낫지” 하면서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의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놋뱀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지금까지의 아픔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치우지 아니하셨습니다. 지금도 불뱀은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물고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다가는 언제 어디서 불뱀에 물려 고통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건강 때문에 고통당하고 계십니까? 집에 앉아 고통만 당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새벽 일찍 집을 나와 교회로 향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업의 실패로 고통당하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편 때문에 혹은 아내 때문에 고통을 당하십니까? 자녀 문제로 고통을 당하십니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고통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고자 친히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불뱀에 물리지 않으려면
민수기 21:4-9 / 배 혁 목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광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예수님도 광야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또한 광야로 같은 상황으로 이끄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광야가 어떠한 곳인지를 잘 알아야지, 그 광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8:15절에 그들이 지났던 광야가 어떠한 곳인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광야는 물이 없는 간조한 땅입니다.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면 뜨거운 햇볕에 수분을 잃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맹독을 품은 뱀과 전갈에 물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간조한 땅을 적셔주셨고, 불뱀과 전갈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광대하답니다. 오랜 시간 그 위험과 불편함을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광야의 불뱀들이 대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불뱀에 물린 이들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때 나타난 뱀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동안 광야의 불뱀과 전갈로 부터 보호해 주셨는데, 그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니 그것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불뱀의 습격으로 죽어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모세에게 와서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그들로부터 뱀들을 떠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놋으로 뱀을 만들어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도 그 뱀을 보면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뱀을 떠나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뱀을 보는 이들마다 살도록 더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병을 주시고 약을 주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보면 병을 받게 만드는 것도 이스라엘 자신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게 만드는 것도 자신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따라서 죽음을 내리기도하시고, 또한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떠한 모습들이 뱀에 물릴만한 모습인지를 보면서, 우리는 뱀에 물릴만한 삶이 아닌지를 살펴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지름길을 막으실 때에, 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렸던 이유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놓인 지름길인, 대로가 막히고, 멀고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을 떠나서 광야를 행진하던 중에 에돔나라 국경를 만납니다. 그리고 모세는 에돔사람들과 협상을 합니다. 에돔에 난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왕의 대로는 에돔과 모압, 암몬을 잇는 대로로 그 길은 오래전부터 무역통로로 사용되었고, 전쟁시에는 군사도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길을 통과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를 편하고 빨리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왕의대로를 통과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길을 통과할 때에, 에돔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테니 통과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돔은 모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에돔은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실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먼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자손이라고 하면,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자손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돔이 이스라엘의 길을 막기보다는, 먼저 나서서 자기네 땅으로 통과하라고 해야하는 것이 이치일텐데, 도리어 에돔은 이를 막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에돔과 싸우지도 말라고 합니다. 에돔사람들이 사는 땅은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주신 기업이니 그들과 싸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형제간의 마땅한 도리를 알려주십니다. 에돔이 형제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스라엘도 그 도리를 무시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에돔가운데 있는 지름길을 포기하도록 하셨고, 에돔 주변을 돌아서 길도 없는 긴 광야길을 걷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에돔과 싸워서, 그 왕의 대로를 통과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길을 돌아가면서, 불평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대로를 주실 때도 있지만, 왕의 대로를 놔두고 길고 험한 길을 걷도록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불뱀에 물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왕의 대로를 걷기 위한 것이라면 불뱀에 물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이 땅에서 왕의 대로로를 걷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걸어야 할 길은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왕의 대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생긴 편한길이고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다고해서 그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훈련시키고자 하는 길은, 사람들이 다 걷고 편해하는 대로를 걷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걷지 않는 험한 길들을 걷게 하고자 함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대로를 가지 못한다고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험한 길을 갈 때에, 많은 사람들은 함께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길이 큰 길이건, 좁은 길이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인 줄로 믿습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하찮게 여겨질때, 불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할 때에 말하기를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합니다.
광야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없는 그곳에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밥을 지어 가족들에게 먹여주는 것과 같이,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여주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그들에게 있음을 손수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찾겠다고 우물을 판 일도 없습니다. 먹을 것을 위해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 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그럴만한 뭔가를 행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만나를 언약궤안에 넣어 기념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만나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음식을 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음식을 ‘박한 음식’이라고 경멸합니다. 박한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없는, 경멸할 만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왜 이렇게 없냐고? 입맛 버리겠다고 말한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하찮게 여겨질 때에 그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만나를 먹을 때에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민수기 11:8절에, 처음 만나를 먹었을 때에 소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기름 섞은 과자같은 만나가 ‘박한 음식’이 되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간이 지나니까 너무 익숙해지고, 이제는 그 은혜가 무가치하고, 도리어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하찮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에, 불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그 만한 수고를 해서 얻어졌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느것하나 우리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박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귀하게 여겨졌는데 그 사람들이 박한 식물처럼 느껴진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할 때에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자가 하찮게 여겨진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언떤 물건을 처음 대할 때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막상 며칠 소유하다가 보면 소중하게 여겼던 마음이 사라지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물건으로 전락하기 일수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람이나 물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데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 지면서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늘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때로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자족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들을 그냥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기도 하지만, 그에 합당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리자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뱀을 떠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뱀을 떠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까지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보는 자들은 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본 사람들을 살려 주셨고,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은혜를 그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떠한 노력을 해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놋뱀을 보면 살 수 있다고 하니까 그 믿음을 가지고 보았을 때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드셔서 살리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를 살리실 분을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3: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을 죄를 저지르면서 살기 일수입니다. 하나님이 거져 주신 은혜를 당연히 여기며 삽니다. 그런데 이에 더해서, 내가 원하는 것으로 주시지 않으시면 도리어 원망하며, 그 동안 베푸셨던 은혜까지도 하찮게 여기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이는 불뱀에 물려 죽기에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그 어느 은혜보다 더 큰 구속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죄인된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를 바볼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찮게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크고 편한 길을 걷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인 줄로 믿고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신 사람들, 물질, 교회, 이 사회가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구원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좁고 거친 길을 동행하는 시간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하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큼을 깨닫고, 감사로 지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죄의 결과로부터 생명의 삶으로
민수기 21:4-9 / 스데반 황목사
4절이 말하는 백성이란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말합니다.그런데 믿음의 길을 가는 주의 백성들의 삶에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깁니다.
지금 이들은 홍해를 지나 이미 38년 동안 광야에서 헤맨 백성들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이 코 앞인데 에돔을 통과하지 못하고 우회하게 되었습니다.즉, 길이 있는 행길로 가게 된 것이 아니라 멀고 험난한 길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에돔 땅을 지나지 못한 기사가 바로 앞장 민수기 20장 17-21절에 있습니다.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우리가 큰길로만 지나가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낼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지나갈 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하나 그는 이르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따라서 에돔을 통과한다면 직진할 수 있는 큰 길을 거친 광야 남쪽으로 행군하여 우회해서 올라와야 하는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며 짜증이 나겠습니까? 이에 성경은 이들이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38년간 광야에서 방황했는데 지름길을 코 앞에 두고 지나지 못하게 되면서 또다시 고역스런 광야 길로 계속 가야 하는 상황 앞에서 백성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극한 분노를 일으키고 맙니다.그러다가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화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고약한 에돔 왕에게 꿈에라도 나타나셔서 우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지 왜 그렇게 안하신담. 주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이렇게 오래 동안 고생하는데,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며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시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게 된 것입니다.
5절을 보니, 드디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이 말은 한마디로 “정말 살기 싫다. 지긋지긋하구나. 신앙 생활에 싫증이 난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불편을 겪을 때 불신앙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하나님께 크게 실망하기 쉽습니다. 마음이 한번 상하게 되면 갑자기 신앙 생활이 전부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은 것만 크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그들은 불평과 함께 당장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불신앙에 떨어집니다.지금 이들은 그들을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고 말한 사실입니다. 하찮은 음식이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하늘의 만나를 말합니다.즉, 하나님께서 매일 신실하게 제공하신 하늘 양식을 노골적으로 멸시한 것입니다.이는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곤조를 부리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싫다”는 말의 원어(쿠츠)를 보면, 그것을 준 대상이 참으로 미워서 그가 준 것을 “몹시 지겨워하고 질색하다”라는 뜻입니다. 즉,만나를 주신 분이 너무 싫고 지겹고 역겨워서 그분이 주신는 매일 먹는 이 만나가 정말로 미치도록 지겹고 역겹고 싫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밉고 싫은 사람이 해 준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미 오랫 동안 그 음식에 물렸다고 합시다. 그때 그 음식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또 옥수수 밥이야?’ 그러면서 그 음식을 쓰레기 통에 집어던져 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만나에 대해 이 정도로 악하고 강퍅해 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그 마음에 불평과 짜증이 있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싫증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을 멀리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를 들어,예수님 안 믿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잘 살고 돈도 많고 하는 일마다 형통합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며 교회 다니는 우리는 매일 고생합니다. 1년 2년도 아니고 벌써 38년째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못남이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정녕 광야를 통해 주의 백성에게 이루시려는 뜻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채,단지 불편한 상황이 지속된다는 이유 만으로 이제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러한 때 신앙을 길을 걷는다는 주의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상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께 기대했건만, “이게 뭐람!”하며 비교 의식 속에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욕심 속에서, 또는 자신의 의를 구하는 마음 속에서, 나아가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게으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크게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을 향해 화가 나는 것입니다.바로 이때 불만과 함께 우리는 죄악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나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고, 기도는 더더욱 하기 싫은 것입니다. 예배에 가면 하품만 하다가 서서히 예배도 빠집니다. 이제 마음이 비뚤어져서 세상 사람들처럼 술도 먹어 보고,쾌락에 빠져 봅니다.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 제게 물 먹이셨으니, 저도 이렇게 밖에는 못하겠습니다!주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있습니까?”라며 하나님을 향해 울분과 화를 터트리는 것입니다.그후 하나님께 오기가 생기면서 노골적인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때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 다시 믿음을 잃고 실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 세상에서 형편이 편 후에 바쁘다는 핑계로 믿음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러나 거꾸로 광야 기간이 꽤 길어서 결국 신앙을 버리고 죄악으로 치닫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실망이 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원망이 많습니다.이들은 만나로 상징되는 주의 말씀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게 되면서 기도와 말씀을 멀리합니다. 물론 입술로는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저주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고 원망하면서 소위 “하나님없이 홀로서기”를 하며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러한 모습과 신앙 태도가 아직 하나님을 향해 바르고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참된 믿음은 상황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회하게 되고 고생하게 되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의 더 크신 뜻이 있겠지 라고 하며 ‘인내’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니 그 동안 오래 광야에 있었어도 내 뜻을 내려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계속 순종하며 가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특히 가치관에 있어서, 내게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그 어떤 일들이 발생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회하게 되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광야 길이 길어도 상관없습니다.그러나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때, 즉, 우상이 있을 때는 그 우상이 실현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이유는 다른 세상 나라들처럼 편안했으면 하는 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떵떵 거리며 살고 싶었고, 남들처럼 권력과 부귀와 세상의 자랑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 만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일이 풀리지 않는 상황이라도 오직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소유하길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전히 돈과 세상 영광과 인기와 명예와 권력을 우상으로 삼으며 남들과 비교하며 사는 수준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악세서리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세서리 신앙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대했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세상적으로 무너질 때 그의 신앙도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 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신앙은 언제나 자신에게 망신이나 불편이 오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을 원망합니다. 아내를 원망합니다.부모를 원망합니다. 자녀를 원망합니다. 남을 원망합니다. 교회를 원망합니다. 나아가 구원 받은 믿음의 길을 원망합니다.그 이유는 이들이 처음부터 구원의 여정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에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여정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편안한 삶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자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평강을 약속합니다. 이 땅에서의 부귀와 건강과 권력과 명예는 주실 수도 있고 주시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깊은 사랑 가운데 한없는 하늘의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바로 영생이며 구원입니다.
이제 6절을 보니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십니다.하나님의 만나까지 멸시하는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징계 외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불뱀이 백성을 물어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불뱀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징벌하실 때 신기하게 원수를 사용하십니다. 이때 주님은 주의 백성을 막는 보호를 거두십니다.그러면 당장 주의 백성들의 원수가 날뛰어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학대합니다. 만일 주께서 죽음까지 허락하신다면 뱀이 일어나 주의 자녀들을 물어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참과 실패와 고통을 당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사탄의 악이 신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그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고 주의 자녀들을 죽도록 미워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의 자녀들을 지키시는 보호망을 잠깐 동안이라도 치우시면 사탄은 신이 나서 주의 백성들에게 온갖 악을 퍼 붓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고통 가운데 주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당장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주의 백성들을 안으시고 지키십니다. 결국 사탄은 기껏해야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과 주의 백성들 간의 참된 사랑과 연합을 돕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왜냐하면 주의 백성들이 범죄의 길에서 돌아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실은 그들이 이 우주에서 가장 큰 영원한 축복인 참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백성들은 불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정확하게 간파했습니다. 따라서 그 해결책 역시 올바른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뱀의 원인이 자신들의 원망의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세에게 중보를 요청했습니다. 이처럼 문제의 원인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불뱀이 임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면, 이들은 계속 어리석은 짓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뱀을 자기들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하면서 평생을 다 보냈을 수 있습니다.또한 자신들끼리 힘을 모아 단체를 만들어서 불뱀을 대적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완전한 실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허락 아래 그 악랄하고 무서운 사탄이 역사하는 상황인데 어찌 연약한 인간이 사탄의 능력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사탄의 역사를 제거하고 불뱀을 제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문제의 탓이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인 것을 깨닫고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부탁대로 주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8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불뱀을 하늘의 불로 없애시거나 땅을 갈라서 잡아 삼키시거나 어디론가 사라지게 하시는 역사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이상한 해결책을 제안하십니다. 그것은 불뱀과 동일한 모형으로 놋뱀을 만들어서 깃발을 단 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뱀은 성경 어디서나 간교함과 영리함의 대명사입니다. 나아가 타락한 마귀들과 천사장 사탄을 상징합니다. 놋뱀을 장대위에 매달라는 것은 그 당시의 배경 속에서 볼 때 원수 나라의 왕을 사로 잡아 죽인 후에 장대 위에 높이 매다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을 물었던 원수의 세력을 이제 물리치시고 장대에 높이 매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이 회개하자 당장 주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원수의 우두머리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매달면서 승리의 깃발을 꽂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이 놋뱀을 보면 불뱀에게 물린 상처로부터 치유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9절을 보니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해서 이 땅에서 역사 가운데 실제로 발생한 사건입니다.하지만 이 사건은 사실 우주와 영원의 차원에 있는 영원한 사건을 축소판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어머어마하고 엄청난 깊은 영적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함께 거듭남과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민수기 21장의 본문을 인용하십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복음의 핵심으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핵심 구절인 요한복음3장 16절의 배경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다루는 이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뱀에 물린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죄로 인하여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죄악의 열매를 먹는 사람, 비참한 자리의 처한 사람, 병든 사람, 움직일 수 없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때 죄와 뱀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아무리 애를 써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단결과 궐기대회를 해도 인간적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죄와 사탄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은 광야에서는 구리뱀이었지만, 죄에 의하여 영죽게 될 인류에게는 언제나 영원토록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과 장대에 불뱀이 달린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어색합니다.연상이 정확하려면 십자가에 마귀가 달려야 정상입니다. 분명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분상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하신 아들로서 결코 마귀로 상징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연상을 어떻게 풀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대신하시는 ‘죄’가 되셨다는 사실에서 풀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 주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죄’가 되셨기 때문에 놋뱀으로 연상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 모든 죄를 법적으로 다 담당하시지만,사실 그분 자신은 완전한 의인이셨습니다. 따라서 죄가 되신 예수님은 나의 죄와 부끄러움,패배. 실패를 지고, 나 대신 십자가에서 가장 큰 모욕과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모욕과 부끄러움은 우리들이 마땅히 당해야 할 것들입니다.그러나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됩니다. 부활하여 승리하신 승리자를 따라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승리자의 자리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보고 다시 살았듯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 나 대신 죄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됩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을 누립니다. 어떠한 류의 죄던, 심각한 죄이던 가벼운 죄이던, 아무리 작아 보이는 죄라도 하나님께는 무한하게 큰 죄입니다. 혹시 자신은 작은 죄를 지었다고 하며 방심하는 자는 불뱀에 물려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땅의 사람 중에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파렴치하고 악랄한 죄을 지었고 또한 죄악으로 인한 가장 비참한 결과를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죄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오직 주를 바라볼 때 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뱀에 물려 비참한 상황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됩니다. 우리가 주를 바라볼 때 치료자 예수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실패에서 회복으로, 병든 가운데서 건강으로, 비참에서 영광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주를 위하여 섬길 수 있는 자리로 옮겨 놓으십니다.그러므로 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살게 됩니다. 죄로 인한 슬픔과 좌절과 고통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의 능력과 함께 영생과 천국의 능력이 그 사람의 영혼에, 나아가 그 사람의 삶과 공동체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곳에 모든 상처의 치유, 모든 죄에 대한 해결,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기적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병 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문둥병입니다. 문둥병은 가장 징그럽고 끔찍함에도 그 특징은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이 병자인 줄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지독한 위선자, 곧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아! 나는 의롭고 나는 이 세상이 좋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도다.’그는 다름 아닌 영적 문둥병 환자인 줄 깨닫기 바랍니다.
현재의 삶을 축복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뱀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뱀을 제거하기 위해 내 선행 가지고 싸우려고 하거나 주문으로 싸우려고 하거나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여 싸우려고 하면 반드시 패배합니다.우리는 성경의 해답처럼 예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러면 뱀을 이길 수 있고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는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와 평강이 신속하게 찾아올 것입니다.생명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솟을 것입니다.하늘의 영광과 주의 응원하시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계속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과 연합하여 주께서 의도하신 온전하심의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 주와 연합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보내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죄의 결과로부터 생명의 삶으로 우리를 옮겨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언제나 천국의 평강과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민수기21:4-9, 히12:2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온갖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이 복되고 거룩한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느덧 5월이 다 가고 있습니다.
5월의 여왕이라고 하는 라일락 향기가 우리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고 이제는 아카시야 꽃들이 온 산을 하얗게 수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1년의 농사 중에 가장 중요한 모내기도 마무리가 되어 일찍 심은 모들은 제법 뿌리를 잡고 파랗게 어울려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우리 인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늙어만 가고 어느 샌가 우리 곁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무상을 노래하였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우리네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고 서글픈 인생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영생의 세계 곧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해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에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전15:13-19)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 위로를 받으시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믿을 때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주님이 나의 일생 가는 길을 인도하실 때, 나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아 멘!>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맘에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아 멘!>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민수기 21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생활 40년을 거의 마쳐갈 무렵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고 머물고 있는 광야에 난데없이 뱀의 떼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에 들어가 사람들을 마구 물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와 생수를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재난을 당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들은 바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이 시대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병에도 걸리지 않고,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하고, 자식들은 감람나무처럼 잘 자라고, 가정은 포도원같이 평화로워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모세도, 다윗왕도,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 부활승천 하신 후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환난이 적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더 크게 당합니다. 문제는 환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하셨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렸습니까?
(1)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원망하는 자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습니다. ‘누구 때문에, 또 무엇 때문에’ 등등 불평을 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열 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려고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비방을 합니다.
(고전10:10-11)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러면 어떤 때에 원망을 합니까?
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원망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기적과 이적으로 저들을 인도하였고 홍해를 갈라 걸어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며 추위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기를 40여 년, 그리고 물이 필요하면 반석에서 생수를 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고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② 어려운 일 당할 때 원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절대로 공짜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고난과 역경과 환난의 너울을 쓰고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모르는 사람은 당장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③ 고난이 하나님의 채찍과 축복인줄을 모르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2) 그들은 입술을 잘못 놀림으로 불 뱀에 물렸습니다.
본문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죽게 하시겠습니까? 자기의 백성을 죽이려고 40년 동안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셔서 인도하셨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이제 “죽게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은 죽을 일이 생기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고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원래가 광야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굶주리지 않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고 생수를 주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을 밝힐 뿐 아니라 추위에 떨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3)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찮은 식물이라고 악평을 하였습니다.
본문 5절 말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식물을 싫어하노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 사막가운데서 하찮은 식물이라도 주신 것을 감사했더라면 더 좋은 것을 주셨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그들은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결코 하찮은 식물이 아닙니다.
(출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고 하였으니 분명 그들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시78:29)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는 최고급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쁘다고 하찮은 식물이라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만나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2. 불 뱀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불 뱀은 사막에 살고 있는 독사의 종류로서 몸이 붉은 색이고 물리면 불에 덴 것처럼 불같은 열이 오르다가 죽기 때문에 불 뱀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9, 20:2 절 말씀에는 “뱀은 곳 마귀니라” 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해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였고 아담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불 뱀에 물렸다는 것은 마귀 사탄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며 육신을 가지고 있고 사탄은 영체이기 때문에 사탄을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마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불 뱀과도 같은 마귀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마귀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항상 깨어서 기도하면 절대로 마귀 사탄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항상 기쁨으로 찬송과 감사생활하고 충성된 믿음생활만 하면 사탄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3. 불 뱀(마귀)에게 물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마귀에게 물리면 죽게 됩니다.
아담과 해와는 사탄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회개할 기회가 있음에도 회개치 않고 숨어만 있다가 결국 그들은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2) 불 뱀에 물린 데는 약이 없습니다.
불 뱀의 독은 삽시간에 퍼져서 온몸이 붓고 고열이 오르다가 불에 타죽은 것처럼 온몸이 새까맣게 되어서 죽게 됩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해독제가 없습니다. 불뱀의 독은 바로 죄악의 독이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약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에 죄 사함 받고, 고침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4. 불뱀의 독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치료의 방법이 있습니다.
(1) 주의 종을 찾아가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어려운 일 당할 때 주의 종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약5:14-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주의 종이 기도할 때 병 고침도 받고 죄 사함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왕하 4:1-7절의 말씀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생도 중에 한 아내가 부채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 엘리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왕하 5:9-14 말씀에는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 나라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와서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을 때에 그의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삼상 7:1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회개의 성회를 할 때 불레셋이 침략해 왔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침착하게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삼상7: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마가복음 5:22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의 딸이 죽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간구할 때 그의 죽은 딸이 살아나게 되었고 12년을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2)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죄악의 독을 제거하는 데는 먼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행2:37-3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니느웨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온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욜2:12-14)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다윗왕도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말에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백성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8절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쳐다보라고 하였습니다.
9절 말씀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장대 위에 놋으로 불 뱀의 형상을 만들어 달아 놓고 “쳐다보라” 고 할 때에 순종하고 쳐다 본 사람은 불 뱀의 독이 깨끗이 가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순종치 않은 사람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불 뱀에 물렸으면 해독제를 먹든지 약초를 붙이든지 해야지 그까짓 구리 뱀 쳐다본다고 사느냐’ 고 하면서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종들은 예나 지금이나 기도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성도들을 인도합니다. 주의 종이 성도들에게 무슨 직분을 맡기든지 또는 무슨 일을 명하든지 순종할 때 불 뱀과 같은 마귀의 독이 빠져나가고 치유 받아 영원히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5. 그러면 장대 위에 놋 뱀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입니다. 죄악가운데 빠진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사탄에게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주시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골고다 십자가 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죄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누구든지 사탄에게 얽매어 죽게 된 자도 이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누구든지 환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자도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누구든지 질병이나 고통을 당하는 자도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살리라”
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이 구원의 방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만드신 은혜요 은사요 축복인줄로 믿습니다.<아 멘>
이와 같이 에돔 땅에서 구원의 방법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그 구원은 1600여 년이 지난 후 저 골고다 산상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보혈을 흘리심으로 구속의 도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가 높이 솟아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곳에 당신의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당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런 뜻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주전(BC) 1540년경 에돔 땅에서 불 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여 죽게 한 사탄 마귀는 지금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총공격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에게 물리지 않고 불 뱀에 물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물렸다면 십자가 위에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속죄의 보혈을 흘리신 십자가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새 힘을 얻습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라 오르고, 달려가도 걸어가도 피곤치 않음같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예수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 바라보지 않고, 세상 보게 되면 불 뱀과 같은 사탄에게 물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보지 않고 파도와 물결 보다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 보지 않고 돈만 보다가 멸망 받아 죽었습니다.
마귀에게 물린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 ″ ″
환난과 고통에 빠진 사람도 ″ ″ ″
죄악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사람도 ″ ″ ″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 ″ ″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중에 고통당하는 자 있습니까?
″ 어려움 당하는 자 ″
″ 핍박을 당하는 자 ″
십자가에서 피 흘려 나의 죄를 대속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위로가 되시고, 은총과 축복이 되시고, 영생이 되십니다. 이제부터 용기와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 멘!!
이 믿음 가지고 날마다 순간마다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왜 시험에 드는가?
민수기 21장 4-9절 / 조영식 목사
들어가는 글
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주 초등학교 이후에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18세의 청소년이 무려 8천㎞를 날아가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이슬람국가'(IS) 테러 조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18세 청소년을 IS로 향하게 한 것일까요? 김군은 초등학교 졸업 후에 전혀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김군의 성향은 인터넷 공간에서 IS을 동경하게 되고 결국에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즘 김군처럼 정체성 확립이 안 된 청소년들이 이슬람 무장 테러 조직에 가입의사를 타진한다고 합니다. 삶에서 무엇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된 공동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합니다. 만약 김군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소속감을 느꼈다면 IS에 합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외톨이처럼 느끼는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소속감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꿈꾸어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길을 떠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마음이 상하여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면서 왜 시험에 들었는지 깨닫고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에 시험 들지 않도록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마음이 상한 이유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성령 충만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령 충만은 커녕 시험 들어서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험 들어서 불 뱀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6절). 그들이 시험 들어 불 뱀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광야의 길을 가다가 마음이 상했기 때문입니다(4절).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상할 때 시험 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평탄한 ‘왕의 대로’가 있는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였기 때문입니다(4절). 이미 그들은 광야에서 38년 동안 방황했는데 평탄한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우회하여 힘든 길로 돌아가는 현실에 마음이 상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상한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먼 길을 갈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서 능력을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법칙은 빠른 것보다 “주님과 함께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모든 것이 더 빨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빠른 세상에 떠밀려 살다보면 하나님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도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 만나는 것을 잊어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영적싸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가느냐?”에 초점을 맞출 때 시험에 들지 않고 은혜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망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5절).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원망이 합당한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우회했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길을 우회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면 원망이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이 길을 우회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 비용까지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에돔 족속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했습니다(민20: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름길로 가지 못한 원인은 에돔 족속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길을 막는 에돔 족속이 아니라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노하는 원인을 살펴보면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애꿎은 집사람에게 화풀이 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여하튼 누구에게 화풀이 하든지 분노의 원인은 “자기 기준이 얼마나 강하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기준에서 벗어나 지름길로 갈 수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지금도 자기 기준에 매달리는 신앙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 우회하는 길로 갈지라도 주님의 뜻을 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5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날마다 새벽이슬처럼 내려주신 만나는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불평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원망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은혜를 하찮은 것이 되게 합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기준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불평하여 하찮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여파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하찮게 여기다 보니 주님과 만나는 것이 싫어지게 됩니다(5절).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싫어져 가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가장 귀한 것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기준대로 되지 않는다고 시험에 들면 불 뱀에 물리는 것입니다(6절). 시험 들어서 불 뱀에 물리면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모세는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본즉 살리라고 합니다(9절). 당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본즉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놋 뱀을 바라보기 전에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7절). 그들은 회개를 통하여 장대 위해 달린 놋 뱀을 바라봄으로 용서받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신의 죄악을 회개함으로 바라보는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이 바라보는 십자가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 중의 하나도 회개 없는 십자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장대 위해 달린 뱀이 왜 놋 뱀입니까? 놋이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하면 놋 뱀이 대신 심판을 받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회개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대신 심판을 받게 됨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회개 없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회개함으로 바라보는 십자가가 되어서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시험 들어서 불 뱀들의 공격을 받는 이유는 지름길이 아니라고 마음 상하고, 자신의 기준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주님이 주신 가장 귀한 은혜를 하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디 회개 없는 십자가가 아니라 회개함으로 바라보는 십자가가 되어서 진정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순종과 회복의 상관계수
민 21:4-9 / 노경모 목사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상관이 있나를 살펴보고 그것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을 상관계수라고 합니다. 상관계수가 +1 이라고 하면 그것은 100%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수치가 -1이면 그것은 반대로 상관이 있는 것이고 수치가 0이면 그것은 서로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과 소비의 상관계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만일 1이 나왔다면 그것은 100%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가 많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1이 나왔다면 반대로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100%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만일 0이 나왔다면 소득과 소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종과 회복, 또는 순종과 치유의 상관계수를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회복과 치유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회복과 치유에 관한 상관계수가 높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것에 매어달려야 합니다. 올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나라의 분야별 최고의 의사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명단 중에 반가운 이름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의 동생입니다. 종합병원 유방외과의 의사인데, 요즈음 유방암 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방암 환자들이 이 의사한테 수술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올인합니다. 한번 진료를 받으려면 몇 개월을 기다립니다.
왜 이렇게 유방암 환자들이 이 의사한테 올인합니까? 이 의사와 성공적인 유방암 수술과의 상관계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사에 비해서 조금 높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높은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올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치유받고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재쳐 놓고 그것에 올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폐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뒤로 미루고 폐암을 치료받기 위해서 올인을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애굽 땅을 나온 이스라엘 배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들어섭니다. 38년 동안 광야길을 가다가 호르산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이 호르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름길로 올라가지 않게 하시고 에돔땅을 우회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하게 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렇게 돌아가게 하신 것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조금만 참고 인내하고 순종했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한결같이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처받는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모세도 그 누구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왕 바로를 꺾어시고 바로의 손에서 꺼집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하시고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불기둥으로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지금까지 받아오고 누려왔습니다.
이제 호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이 아닌 에돔땅을 우회하는 길로 이끄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이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을 것이야 라고 믿고 감사하면서 따라가야 하는데 그들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나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마음이 상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모세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여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냈습니다. 독사이지요. 이 불뱀들이 백성들을 물었고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께 중보기도해서 우리를 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이때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어시고 해결책을 주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았습니다. 뱀에 물린 자들은 누구든지 장대위에 만들어 매단 놋뱀을 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위에 달려 있는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사는 것입니다. 보라고 하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 보지 않은 자는 다 죽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다 살았습니다. 회복과 치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갔을 때,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나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간절한 권유로 마지못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하여튼 순종했더니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우리 모두다 회복되고 치유되기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면 됩니다.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할찌라도 순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순종에 대해서는 의지가 없다면 치유와 회복은 희망사항으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우리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처방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대로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폐암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의사는 이렇게 주의사항을 줍니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둘째, 술 담배를 하시 마십시오. 셋째, 적절한 운동을 하십시오. 넷째, 심호흡을 하십시오.
이렇게 의사가 주의사항을 주면 수술을 받은 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수술 받은 환자가 오래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놋뱀은 놋으로 만든 뱀의 형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뱀에게 물려서 고통스러운데, 내가 지금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놋뱀을 바라본다고 살 수 있나? 라고 귀찮게 생각하거나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계속 버틴 자들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바로 놋뱀에 물린 자들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회복될 수가 있고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각종 각생이 병든 자와 약한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연약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인 모든 약함과 상처와 고통과 병을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 앞에 이렇게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간절히 치유와 회복을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으로 미리 다 겪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대로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려 오신 진정한 의사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치유가 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시는 의사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세상적인 것에 몰두하거나 기웃거림으로 인해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더 확대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행동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상처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드러난다는 것은 치유와 회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치유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과 치유를 원한다면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올인해야 할 것이입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치 중환자가 의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듯이 말입니다. 순종할때만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순종함으로 진정한 회복괴 치유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