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 ㅡ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ㆍ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집, 문학과지성사 刊(2008)『광휘의 속삭임』
광화문 교보빌딩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큼지막한 걸개 시詩가 내걸려 지난 25년 동안 사람들 시선을 끌어왔다. 주로 문인들로 구성된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 위원회’가 이 문구를 선정한다. 시민들에게 그동안 내건 69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고 마음을 울린 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설문에 응한 2,300명 중 가장 많은 사람이 2012년 봄에 걸렸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을 꼽았다. 그 다음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시가 정현종 ‘방문객’이다.
최근 더민주당 회의실 벽면에 걸려있어 자주 노출된 문구이기도 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시 일부만 편집해 게시된 것이다. 장석주의 ‘대추 한 알’ 정호승의 ‘풍경 달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뒤를 이었다.
정현종 시인은 물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가는 인간의 영혼과 그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로 이름이 나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짧은 시 ‘섬’도 그 작품이다. 인생에서 성패는 사람과 관계에 달려있고, 그 능력이 8할 이상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대인관계는 만남에 대한 태도와 인식이 그 핵심이리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 만나는 것을 기꺼워한다면 대인관계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람 만나는 게 귀찮고 즐겁지 않다면 자연히 삶이 위축되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방문객’은 어떠한 만남일지라도 진실하게 성심성의를 다해 환대해야한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 일생이 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둘레의 사람들, 수없이 다녀갔을 방문객들, 쌓인 명함 주인들, 페이스 북의 많은 ‘페친’들까지 나는 그들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보듬어왔을까. 인연의 소중함은 말할 나위 없으며, 사람과 만남과 헤어짐은 생을 재설계해야할 만큼 힘든 일이다.
강은교 시인은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고 노래했고, 정희성 시인은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라며 서로 온기로 꿈꾸는 사랑을 소망했다. 함께 꾸는 꿈이 이루어진다면 기다림, 침묵, 외로움, 슬픔 그리고 겨울 혹한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내리라. 같은 꿈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아픔을 보듬고 위로하면서 조화를 이룬다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는 사람이 늘수록 가는 길을 밝히는 수십 수백만 촉광이 모아지리라. 첫 인연의 그 따뜻했던 악수를 기억한다면 알 수 없는 반목, 근거 없는 미움, 까닭모를 적개심, 대면 대면한 낯가림, 시기와 질투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온기 없는 벽난로 옆에서 오돌오돌 침묵하는 것은 꿈을 위한 기다림이 아니다. 인연의 사슬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시련은 더욱 아닐 것이다. 자기 꼬리를 물고 뱅뱅 돌면서 달궈지는 열기는 미온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는 일이다”라고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많이 늦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인연의 빛에 우리들 상처를 함께 내다 말려야 하리라.
권순진
♤ 25년 자리 지킨 광화문글판…거쳐 간 이야기들 - https://m.yna.co.kr/amp/view/AKR201508120919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