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왜 잘살게 되었을까?
- 착각으로 유태인을 잘 모시게 된 일본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면 내용중에 일본이 이에야스 시대에 이미 일류국가처럼 변모해가고 있었다고 나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본평정 후가 16세기 경인데 이미 남미 등지로 선단을 파송하고 일본 안에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아이리스(영국),포르투갈 등지의 상인들이 잇달아 들어와 진귀한 물건들을 들여 놓았다라고 하였다.
또, 조갑제 기자 글에 의하면, 일본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이퇴계의 가르침을 입수한 이래, 시골 백성까지 전부 그 가르침을 진실되게 행하기를 힘쓴 결과가 일본을 지금의 일류국이 되게 하였다 라고 그 일본의 일류국가 된 원인을 분석해 놓았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이 신교를 믿으면서 거리 곳곳마다 귀신이란 귀신은 죄 모시면서, 귀신을 열심히 모시면 망한다 라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미신숭배에 빠져 있는 국가 같음에도, 게다가 조선침략이라든지, 중국침략, 2차대전을 일으킨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별로 사과나 통회하지 않는 뻔뻔한 민족으로 보임에도, 게다가 지구 위에서는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두 방이나 맞은 나라임에도 저토록 급속히 일어나고 그것만 아니라 세계에서 일류국가로 진입을 저토록 빨리 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궁금함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성경적 관점에서 일본이 왜 하나도 잘 한 것 없어보이는데 초일류국가가 되었는지 풀이해 보고자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나라와 민족은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국가는 저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관점에서 일본의 현대사에서 유태민족과 어떤 식으로 접촉하게 되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가 어떤 외교정책을 펼쳐야 할 지에 대해서.
일본의 첫 유태인 접촉은 러일전쟁(1904-1905)과 관련해서 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있었을 때이고 전비가 부족했다. 그 전비를 빌려준 인물이 유태인은행가로 유명한 야곱 쉬프였다. 그가 일본에 빌려준 론은 2억불이나 되었다. 당시 러시아 포함, 유럽각국은 전세계에 식민지 건설하기에 급급하던 때였고 유럽 이외의 국가가 유럽국가와 싸워 이긴 적이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야곱 쉬프가 러시아국과 싸울 전비를 일본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일본은 러시아 흑해함대를 이겼고 그 여세를 발판삼아 조선에서 대륙으로 뻗을 발판이 생겼다. 부산에서 경성으로 철로를 연결하기 시작했고 만주로 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 야곱 쉬프는 왜 러시아 아닌 일본에게 돈을 빌려주었을까? 그것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가 그의 비밀경찰을 동원해 벌인 반유태학살운동에 기인한 바가 컸다. 러시아에선 프랑스, 영국의 자유민주정치체제로의 발전에 자극을 받은 일반인들 속에서 자유개혁 바람이 1900년 초부터 불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러시아지역에 살던 유태인들도 가담하고 있었다.
그 일단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영화가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다. 영화에는 우크라이나에 살던 유태인들이 이유없이 황제(니콜라이)의 명령에 의해 살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쫓겨나는 것이 나오고 순화되어 묘사되어 있지만, 기실은 참혹했다. 당시 보도된 뉴욕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시가지마다 유태인들의 학살된 시신이 산을 이뤘다고 되어 있고 그 학살 대상에는 어린아이도 예외가 없었다. [관련글: 지붕위에서 바이올린 켜는 연주자 ]
그 학살을 주도한 것이 황제의 비밀경찰이었다.
지금 한국인들 사이에 이스라엘민족을 경원시하는 이유로 프리메이슨 논리가 횡행하고 있는데, 그 프리메이슨 괴담 -- 유태민족이 전세계 지배의 야욕을 품고 전 세계의 정치, 경제, 군사 등 전부를 휘두르고 있다는 -- 을 지어낸 것이 러시아 비밀경찰이었다.
즉, 불어오던 자유개혁바람을 유태인의 탓으로 돌려 그것을 와해시키기 위해 프리메이슨 괴담을 지어 전세계로 퍼뜨리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 프리메이슨 괴담에는 짜집기 위해 동원된 소설원전이 있다.
프랑스작가 모리스 졸리가 쓴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 간의 지옥에서의 대화는 나폴레옹 3세를 마키아벨리로 그려 그가 전세계를 지배할 독재자로 야욕을 품은 듯이 소설화한 것이다. 그의 그런 플롯은 영국소설 미스터리 사람들(유진 수 작)에서 옮겨온 것이다. 미스터리 사람들에는 세계지배의 욕심을 예수회 신부들이 품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두개의 어느 소설에도 유태인이라든지, 메이슨(석공)이란 단어는 전혀 없다.
러시아 경찰은 그 두 소설에 나온 세계지배 야욕인물을 고스란히 유태민족으로 옮겨놓은 "유태 장자 협약"을 러시아와 유럽 곳곳에 뿌렸다. 그 중 한 부가 러시아 볼셰비키 군대와 싸우던 러시아 백군(황제파)를 도우러 지원나갔던 일본시베리아 토벌군 소속이던 야쓰에 노리히로에게 들어갔다.(1922) 야쓰에는 그것을 일본에 갖고 가 직접 번역, 출판하면서 유태인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야쓰에는 유태인들이 유태장자협약에 나온 정도로 세계를 휘두를 만큼 막강한 재력과 힘을 갖고 있다면 유태인에게 잘 보이는 것이 일본의 국력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었고 그 믿음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직접 당시 영국령이던 이스라엘땅까지 들어갔고 그 곳에서 여러 종류의 유태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 중에는 이스라엘 건국선언을 했던 다윗 벤구리온 같은 지도자들도 있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제국군부는 만주로 벋어나가면서 만주 개발을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 등 외국인들을 그들이 점령한 지역에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하여야 했고 그 중에는 유태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지역에 이주해 온다면 그것이 일본의 국익에 큰 도움이 되리란 계산도 있었다.
1938년 야쓰에의 유태민족 우대' 주장을 채택하는 5부장관 회의가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이 점령했던 상하이에 유태인게토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히틀러의 게토와 다른 것은, 학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고 권장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상하이 유태인게토에 중국인들도 살게 두었으며 이것은 유태인들이 자유로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태인을 일본점령지으로 이주하게 하는 일의 작전명은 '복어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야쓰에 노리히로, 아키카와 요시스케와 일단의 관동군 사령부가 그 작전의 중심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일본이 상하이에 보호해둔 유태인을 접수받기 위해 나찌당원을 상하이까지 보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야쓰에의 설득과 강연, 그리고 그가 번역해 퍼뜨린 러시아비밀경찰이 만든 프리메이슨 세계지배 소설 '유태장자선언' 덕분에, 당시 나라 없이 히틀러를 피해 떠돌던 유태인들이 실제로는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는 민족이라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믿음이 강화되게 한 데에는 러일전쟁 때에 엄청난 전비를 지원해주었던 야곱 쉬프의 일도 한 몫했다.
러시아가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기 전까지 시베리아 철로는 히틀러에게서 도망쳐나온 유태인들을 실어 날랐다. 블라디보스톡까지 온 유태인들은 배로 일본 고베까지 갔고 고베에 유태인들이 감당할 수 없이 많아지자 일본군부는 이전에 고베에 살던 유태인 외에는 상하이 거리로 이주시켜 자유롭게 살게 했고 그 식량과 필수품에 필요한 자금은 미국의 유태은행가 야곱 쉬프가 맡았다. 다만, 일본군부는 유태인들이 세계지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줄곧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일은 계속했다.
또 상하이와 만주로 가기를 원치 않은 유태인들 중에는 미국 및 네덜란드 령 비자가 필요없던 크라카오까지 건너갔다.
이런 일본만주군부와 연계된 일명 복어작전, 유태인 보호정책과 별도로, 벨푸어 선언에 근거한 일본 정부의 유태인들의 국가설립을 열렬히 옹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벨푸어 선언이 1917년 말 나오자, 일본은 1918년12월 시오니즘; 유태민족의 팔레스틴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념,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성명은 한달 후인 1919년일월 일본황제의 이름으로 된 편지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기 전의 하임 와이즈만에게 보내지면서 확실하게 뒷받침되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일본정부는 유태민족이 팔레스틴에 국가적 고향을 갖도록 그들의 시오니즘 열망을 확장하는 사업에 기쁨을 표하며 그 열망을 구체화해가는데 동정적인 관심으로 지켜봅니다."
일본은 이것을 영국에 의한 팔레스타인 공식정책으로 간주했고 또 이것이 영국이 일본에게 허락해준 일본의 산동반도 관할에 대한 답례라고 여겼던 것이다.
일본에서 '시온운동'에 지지자로 나섰던 지식인들에는 간조 우찌무라, 이나조 니토베, 토쿠토미 겐지료와 동경대 교수 야네하라 타다오 등이 있다. 야니하라는 그것을 '시온 운동'이라 명명하고 "이것은 유태국가 문화 중심지를 설립키 위해 이주.이민하려는 유태인들의 권리확보 시도"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그것을 일본이 도울 수 있다고 보았고 그 대체지역으로 만주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일본정부는 유태인들이 만주로 이주해 경작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1940년까지 만주에는 유태인들 약 17,000 명이 거주하게 되었고 대부분은 동유럽에셔 온 사람들이었다.
1940년 리투아니아에는 일본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에가 있었다. 그는 1938년부터 부영사로 나가 있었는데 1940년 독일과 불가침협정을 맺은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자 유태난민이 몰려들었다. 스기하라는 그들 유태난민들의 탈출을 위해 일본정부에 훈령을 물었지만, 일본정부는 이 때 이미 나찌 독일의 압력 때문에 유태인이주 정책을 중지하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스기하라는 일본정부의 훈령을 기다리다 못해 그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비자를 발급해주기 시작했다. (1940.7.31~1940.8.28.) 얼마나 많은 비자를 스기하라가 발급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다. 6,000 에서 10,000 또는 그 이상까지 계산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발급한 비자 한 개로 가족 전부가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기하라를 옆에서 지켜본 한 관측자에 따르면 스기하라는 하루 18-20 시간 씩 비자를 발급했으며 용지가 떨어지자 직접 손으로 수기해서 비자 발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자를 갖고 유태인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서 거기에서 일본 고베로 가는 배에 올라탔던 것이다.
그의 작업은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훈령이 떨어지고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는 플랫홈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비자를 써주었고 나중에는 출발하는 기차 안에서 차창으로 군중들을 향해 사인한 비자들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야쓰에는 2차대전이 종전되고 미군이 들어오자 전범으로 회부되었지만, 그가 복어작전을 수행하며 유태회당에서 받았던 감사표시로 받았던 야쓰에 이름이 새겨진 유태 랍비의 은제담배케이스로 인해 전범에서 제외되었다.
스기하라는 1947년 일본 외교부에 감원바람이 불었을 때 감원되었는데, 일설에는 그 숨은 사유로 리투아니아에서 외교관 신분에 맞지 않은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던 것이라고 그의 아내가 증언했다.
1968년 여호수아 니시리가 이스라엘 주일 대사관 경제참사관이 되어 일본에 부임하자 스기하라를 찾았고 다른 유태인들도 니시하라를 찾기 시작했다. 여호수아 니시리는 1940년 리투아니아에 폴란드에서 탈출한 십대였다. 그 다음해 스기하라는 이스라엘을 방문, 큰 환영과 감사를 받았다. 많은 유태인들이 스기하라에게 나아가 그가 만들어준 비자를 보였다.
스기하라가 구한 전체 유태인들의 수는 얼마일까. 10,000 개의 비자를 발급했다고 할 경우, 한 장당 4명의 가족이 있었다면 4만명이지만, 유태인들의 그 시절 대부분 가족들의 수는 4명보다 많았다. 어떤 유태인은 스기하라가 구한 유태인들 수를 십만명 정도까지도 계산한다. 스기하라 덕분에 유럽에 있던 가장 큰 랍비학교 랍비와 생도들 전부가 목숨을 구했다. 스기하라의 기념관과 기념비, 기념동상이 지구 곳곳 유태인들이 사는 곳에 세워졌다.
종전되었을 때 상하이 유태거리에 있던 유태인들의 수는 2만명이었다. 이스라엘이 건국선언하던 때(1948.5.14) 이스라엘 내의 유태인 수가 약 70만명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일본인과 일본정부에 의해 구출되고 살아남게 된 유태인들의 비율이 얼마나 컸는지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준 일을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이 일본이 왜 귀신을 섬기면서도 잘 사는 일류국가가 되었나 는 점을 고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이것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일이 곧 내게 한 그것이라는 말씀과도 합치한다. 지구위에서 가장 작은 소자, 가장 학대 받았던 작은 자, 죽도록 고통 받고 쫓겨다녔던 그들 유태민족, 이스라엘 민족인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애에서도 최소한의 요구다.
스기하라에게 누가 왜 그리 많은 비자를 내주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그 안에 노인, 여성들, 아이들까지, 그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고 하나도 가치없는 나에게 엎드려 내 발에 입까지 맞추었을 때, 인간 도리로써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프리메이슨 환상을 경계한다. 그것은 러시아 비밀경찰의 사주에 불과한 괴담일 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프리메이슨 론을 믿는다면, 그것을 유태인 혐오 이유로 삼는다면, 아마 그도 러시아 황제일가처럼, 가문이 완전히 끊어질지 모른다. 아니면, 구러시아처럼 공산주의 귀신에 완전히 나라 전체를 삼키울 지 모른다.
그러나, 혹시 일본인 야쓰에 처럼, 그것을 유태인의 우월한 근거로 믿어 유태인 떠받들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나라에 행운일 것이다. 야쓰에가 모르고 그리 하였지만, 그것은 그와 그의 민족에게는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기독교인 수는 인구에 비해 적지만,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도 이제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일본과 이스라엘 간의 경제협력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짚어보겠다.
2009.6.08. 파아란 한은경.
http://cafe.daum.net/paaranhome
첫댓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반면에 말과 글이 다르며 문화가 다른 외국인 (예를 들면 일본인)들 중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더 신뢰하는 일부 (물론 아주 극소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개신교도들의 가슴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