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시, 곽도경 시인 낭송입니다
나무의 침묵
겨울이 오면
나무는 제가 뱉어낸 말들 버리고
벌거숭이가 된다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부드럽고 연한 신록의 말문을 열었다가
한여름 녹음의 무성한 입담으로
비바람 치는 어둠 속에서 비명도 질렀지만
온몸이 뜨거워진 날
서로에게 건네는 화려한 언어도 한 때,
나무는 겨울이 오면
그동안 내뱉었던 모든 말들 버리고
얼음 같은 침묵 앞에서
할 말을 잊는다.
김형범 시인 낭송입니다
사람의 높이
휘늘어진 앵두나무가지를 쳤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높이가 되었다
그러자 티벹 벌꾼 같은 누군가가
사다리를 타고 앵두를 따는데
새끼를 거느린 직박구리 한 쌍 날아와
한나절 시위하느라고 봄날이 수선스럽다
앵두나무 아래에선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사람의 높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다리를 치워버렸다.
김청수 시인의 낭송입니다
철없는 복숭아나무
이사 와서 심은 복숭아나무
참 푸지게도 열매 열려
몽유도원도 같다
누군가는 꿈결같은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어디선가 날아온 누군가는 맛있게 식사하는데
누군가가 밤새 담장 밖 가지 찢어 놓았다
열이 나 나무 밑동에 톱을 들이댔다가
겨우 씩씩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의 책임이 있어
순진해 빠진 복숭아나무를 각성시키려고
회초리로 종아리 때리듯 잔가지 몇 개 낫으로 쳐버렸다
여름이 지난 후 여지껏 벌을 서고 있는가 바라보니
철딱서니 없는 복숭아나무가
겁없이 담장 밖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더 넓은 품새로 무성해져 있는 것이다.
김금주 시낭송가입니다
가지를 자르다가
이사 다닐 때마다 데불고 다녔던
우리 집안 벅수 같은 석류나무
함부로 자란 가지를 솎아낸다
사다리에 올라가 삭은 가지 휜 가지 꼬인 가지
잘라낼 때마다 찔러대는 건
아직도 팔팔한 성미 때문이 아니다
언제 모진 바람 불어 올 지 모르니
가슴에 비수 하나쯤 가지고 있음이렷다
때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온 가슴이 숯이 되어 가지가 삭아내리고
때로는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어
먼 길 꼬아 가기도 했거늘
이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심사로
오직 시디신 고집이 수많은 길을 하늘에 내느니
참으로 오랜만에 석류나무의 상처와 고집을
싹둑싹둑 잘라내다가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늘 수고 많아요. 지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