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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우스에서 반지의 황제로…
안정환.
한국 축구의 가장 주목받는 신인에서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반지의 제왕으로 거듭난 그.
2006년 6월 13일 한국과 토고 전에서 다시 한번 그의 역사를 새로 쓰는 기록을 남겼다.
과연 안정환은 어떤 사람인가?
지난 1996년경 부산 대우로열즈 소속이던 그를 만나러 부산에 갔을 때, 숙소 앞 작은 카페에서 가졌던 그와의 인터뷰 기록을 다시 본다.
한때 언론에 보도된 그의 모친 안혜령 여사의 일로 인해 마음고생 또한 녹록치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바라보는 축구인으로서 안정환, 그가 떠오른다.
세간에 비춰진 것처럼 안 정환 그는 그의 모친의 일에 대해 무관심한 아들도 아니고 그의 내면에는 남 모르는 지극한 사랑이 있음을 알던 터라 그와의 인터뷰한 내용을 최초로 공개해보고자 한다.
안정환의 사주 :
안정환 선수가 말하는, ‘축구’을 제외한 안정환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이는 안혜령 여사의 말에서도 나타나는데, 안정환 선수가 어렸을 적부터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게 사는 것이라는 어머니 말씀도 있어 안 선수도 언제나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 선배의 권유로 축구선수의 길에 들어서고는 그가 느끼게 된 감정은 달랐다. ‘나는 축구 아니었으면 다른 것도 못했을 것이다’라는 생각. 물론, 안정환 선수는 아주대 재학시절에도 어머니 다음 순위를 꼽아보라면 축구 아니면 친구였다.
안정환 선수의 이름은 본명 그대로 안정환(安貞桓). 생년월일은 1976년 1월 27일(양력) 출생.
주요 축구 관련 대표경력으로는 1993년 전국고교대표선수, 1994년 19세 이하 한국청소년대표, 1997년 부산동아시아경기대회 대표 및 하계유니버시아드대표, 월드컵대표팀 상비군(1997년 3~5월), 2002년 월드컵 주전선수를 지냈다.
본적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안 선수가 다녔던 학교는 서울 노량진 본동 초등학교를 거쳐 대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서울중학교, 서울기계공고를 나와 아주대에 입학했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시기 및 동기는 본동초등학교 4학년 때다. 2년 선배인 이 광현(천안일화 선수)선배가 축구를 하면 빵과, 우유, 유니폼 등을 준다는 꼬임도 있었지만 송수일 코치님에게 배우면서 볼 차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해서 축구에 빠져들게 됐다.
대우로열즈 시절, 안 선수의 포지션은 팀내 공격형 미드필더,
대우구단으로 입단한 시기는 대우구단 관계자들에게 눈에 띄어 1998년 연고지명방식으로 입단하게 됐다. 입단 계약금은 1억2천만원을 받았고, 당시 안 선수의 연봉은 1천8백만원으로 당시 팀 내에선 막내였다.
초창기 안 정환 선수의 별명은 팬들이 지어준 ‘테리우스’, 축구 선수에겐 주력이 중요한데 100m 주파 기록은 12초이고,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는 그는 특히 김치찌개, 갈비찜을 잘 먹는다.
안 정환 선수의 취미는 당구(250점), 등산, 여행 그리고 대우구단 선수 시절에는 수영에도 취미가 생겨서 가끔 자유시간에 부산 대우구단 숙소 근처 수영장에 가기도 했다.
안 정환 선수의 애창곡은 가수 이승철의 ‘외면’, 노래방에서 만점이 나오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나오는 곡이다. 혈액형은 AB형, 종교는 기독교로서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새벽기도를 비롯해 열심히 다녔다.
안 선수가 생각하는 자기 성격의 고칠 점은 남자다운 면이 좀 적은 내성적이고 급한 편으로, 끈기가 적다는 것을 생각한다.
안 정환 선수는 잠을 잘 때면 곧잘 옆으로 누워서 속칭 칼잠을 자거나 또는 엎드려 잠을 잔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시드니 셀덴의 ‘별빛은 쏟아지고’로 남녀의 애틋한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안 정환 선수의 경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대우로열즈 구단 선수 시절에는) 정해놓고 쓰는 한달 용돈은 없다. 구단 생활에 있다보면 누구라도 아시겠지만 돈을 쓸 시간이 없다. 주량은 한때 맥주 5병까지 마셨으나 프로입단 후로는 안 마신다.
물론, 담배도 안 핀다. 안 정환 선수가 곱상하게 생긴 탓인지 미팅에 관해 그의 대답을 듣고 안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미팅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일년 365일을 합숙하며 지내고, 시간 나면 남자친구들 만나 지내는 게 더 좋았던 안 정환 선수였다.
안 정환 선수가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찾았다고 하는 초등학교 시절 여자친구(이젠 누구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이지연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 남자 성인이 된 그의 이성상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자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본 결과, 그저 착하고 지적인 여자로 키는 170㎝ 정도로 컸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 지금의 아내를 미리 그려본 것은 아니었을까?
안 정환 선수에게 그만의 옷스타일을 물어봤는데, 그저 편한 옷차림을 좋아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답변이다. 조금이라도 차별점을 찾아보자면, 여름에는 반바지, 겨울에는 가죽 점퍼를 즐겨 입는다는 정도.
안 정환 선수가 좋아하는 선수는 대우구단 內 선배였던 김 주성 선수를 가장 좋아한다. 김 주성 선배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두뇌 플레이를 보면 배울 점이 많다고 여긴다는데.
안정환 선수, 절박했던 부상 기억:
1998년 7월 18일, 부산 구덕운동장서 열린 전북 현대전 도중이었다. 안정환 선수가 볼을 잡는 순간 달려오던 이민성 선수하고 부딪혔다. 우측 눈 위 이마부근이었는데 그냥 그 충격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툭툭 털고 다시 경기를 마무리, 시합을 마쳤다.
대우구단 소속이엇던 안 정환 선수는 숙소로 돌아와서 샤워도 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더니 구토증세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구단에 말한 뒤 다시 부산 행림병원으로 갔다.
머리 부분을 사진찍던 의사는 뇌진탕 증세가 있다고 하면서 병원에 며칠 입원하라고 했다. 뇌진탕이라니? 그 날 경기 도중에 이민성 선수랑 부딪힌 결과였다.
링게르 병을 끼고 이틀 정도 있었다. 당시 부산에는 외할머니, 외삼촌, 어머니가 내려와 계셨다. 그날 경기를 보고 잠시 얼굴이나 보고 가시려고 했던지 안 선수가 병원에 간 사이 숙소로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병원에 어머니랑 친척이 달려왔다.
“어머니, 저 괜찮아요.”
당시 안 혜령 여사는 걱정스런 마음에 안 선수에게 곁에 있겠다고 했는데, 안 정환 선수는 오히려 외할머니랑 외삼촌하고 같이 댁에 가 계시라고 했었다. 다행히 그 당시엔 의사도 도와줬다. 안정환 선수는 별 이상 없으니 병원에 계실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의사가 안심시키며 말을 하자 안 혜령 여사는 그제야 안심하고, 그래도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 혜령 여사는 아들의 모습에 많이 야속했지만 안 정환 선수로서도 어머니를 걱정시켜드릴 순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도저히 누워있기가 답답했다.
안 정환 선수의 머릿속에는 온통 경기 생각뿐이다. ‘경기 있는데…’, ‘경기 있는데…’. 하루가 지나자 도저히 그대로 누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안정환 선수는 다시 의사에게 재진찰까지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기어코 병원을 빠져나왔다.
7월 20일 오전에 병원을 나섰다. 눈이 침침하던 증상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도 사라졌다.
7월 22일, 일화팀과 경기가 있었다. 병원에 한 이틀 누워있던 효과가 나오는 건지 가뿐한 컨디션이 최고였다. 전반전부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후반에 들어서 안정환 선수는 10분 동안 2골 (1도움)을 기록했다. 안 선수의 팀은 그날 4대 0 으로 대승을 거뒀고 1997년에 이어 다시 우승을 목표로 뛰기 시작했다.
안 정환 선수의 꿈은 한국 프로무대에서 안 정환이라는 이름의 큰 선수가 되는 것이고, 대망의 2002년 한일 월드컵 무대에서 활약, 2002월드컵에서는 지난 축구 선배들의 수모를 깨끗이 설욕하고 싶다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안정환은 ‘왕따’였다.
안정환 선수는 글자 그대로 왕따였다. 갖가지 사연을 겪으며 고등학교에 입학, 고교 대표로 활약하며 축구에 온 힘을 쏟고 있을 때였는데, 강인한 심성의 소유자였고 혼자로도 강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고등학교 시절만큼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축구 자체보다는 친구들이나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게 하도 힘들어 안정환 선수는 축구를 하기 싫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안 혜령 여사에게 들은 얘기지만 남서울중학교에서 서울공고로 올 때는 진학원서 접수 마감시간까지 일초를 다투던 일이 있었다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할 때 안 선수가 가려던 학교는 3 군데로 압축되었다. 동북고등학교,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숭덕공고 등이었다. 안 선수는 운동하느라 몰랐지만 어느 학교에선 축구감독님하고 교장 선생님이 직접 찾아오시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신 어머니는 숭덕공고로 결정하시고는 담임선생님이 출근 하시자마자 진학원서에 도장 받고 숭덕공고로 결정을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오신 서울기계공고의 박윤기 감독님의 간절한 요청으로 결국 어머닌 최종적으로 서울기계공고로 바꾸고 마셨다. 지금도 그래서 안혜령 여사는 가끔 학교 얘기를 할 때면 숭덕공고 교장선생님과 감독님에게 죄송해 하신다. 이 다음에 꼭 정중히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이다.
하여튼 그런 사정이 있고서 진학 온 고등학교에서 안 정환 선수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받고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다. 동료 선수들의 따돌림 원인은 안정환 선수에게 특별했던 학교의 대우조건이었는데, 그래서 안혜령 여사는 나름대로 자신도 상당한 주의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안 정환 선수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부모님들이 돌아가면서 맡게 되어 있는 식사당번도 사람을 사서 대신 보내곤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축구부 어머니회의에 처음 나가서 합숙비나 제반 비용을 내겠다고 말을 하기도 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안정환 선수에 대한 친구 선수들의 따돌림은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고, 안 혜령 여사는 아들을 청주상고로 전학시킬 생각까지 했다.
안정환 선수는 어느 때인가 축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엇는데, 그 까닭은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안 혜령 여사는 양재동에 커다란 레스토랑을 시작했는데, 안혜령 여사 자신이 갑작스런 신장염으로 병원에서 1년 정도를 입원하게 되었고, 당시 시작했던 레스토랑은 안 선수가 고 3일 무렵 투자금 1/3도 못 받고 남에게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안 정환 선수 개인에겐 큰 시련이엇다. 안 선수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축구를 계속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축구를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고 했다. 만약 계속 하더라도 실업팀으로 가서 돈을 벌어오고 싶었을 지경이었다. 축구고 뭐고 다 싫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안 선수는 어머니에게 끝내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엄마, 저 축구 안할래요.”
안혜령 여사는 기운 없이 말하는 안 선수를 묵묵히 보더니 가만히 아들을 안고 울었다. 안 정환 선수도 눈물이 나왔다. 당시 20살도 채 안된 안 정환 선수가 겪기엔 다소 정리가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모자가 잠시 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혜령 여사가 다시 안 선수를 보며 말했다.
“정환아, 이제껏 너에게 말해주지 않은 일이 있는데, 축구를 그만두더라도 그 얘길 듣고 결정하도록 하렴.”
그리고 이때 안 헤령 여사는 처음으로 안 선수의 태몽 얘기를 해주셨다.
안정환 선수의 태몽: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다. 하루는 안 혜령 여사하고 할머니하고 길을 가고 있었다고 한다. 야트막한 언덕이었는데, 사방은 온통 잔디 같은 초록색의 풀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안혜령 여사는 문득 할머니와 가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지난 온 길을 보니 어느 틈인가 올 때는 못 봤던 불을 붙이는 채화대, 뭐냐 하면 올림픽이나 체전 같은 대회를 할 때면 성화를 채화하는 그런 커다란 기구가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태양 같은 훤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안혜령 여사는 뭔가 하고 궁금하였는지 계속 보기만 하였는데, 갑자기 그 안에서 용 한 마리가 꿈틀 하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고 한다. 안혜령 여사는 깜짝 놀라 할머니를 보고, ‘이것 좀 보세요?’하고 용을 보여드리려고 했고, 할머니도 같이 봤다고 한다. 안혜령 여사는 용을 잡으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꿈이 깼다.
안혜령 여사는 이 꿈을 할머니에게만 말했다고 했다. 할머니하고 엄마는 안 선수에겐 비밀로 하고 이십여 년을 비밀로 지낸 거였다. 안혜령 여사는 안 선수를 출산한 뒤 아는 절에 가서 스님에게 물어봤다고 했다.
스님이 말해주길 ‘이 아이는 장차 야구나 축구를 시키세요’ 했다고 한다. 안 여사는 꿈도 그렇고 스님의 말이 더 신기했던지 안 선수에게는 더욱 비밀로 하기로 하고 거의 20년을 기다렸다.
안혜령 여사는 그 때 아들에게 그랬다. 용꿈이란 태몽은 크게 성공할 인물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나타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의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날 안 선수가 갑자기 축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자, 그 때야 꿈을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안정환 선수가 6살이 되면서 묘한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 정환 선수는 생일이 빠른 관계로 7살에 학교를 들어갔고, 그래서 유치원도 6살에 들어갔다.
근데 안정환 선수는 유치원에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그 때는 이미 흑석동에 살 때였는데, 그전 아현동에서 태어난 안 정환 선수가 4살 때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셨고, 돈암동 친척집에서 엄마랑 같이 생활을 했었다.
그 당시 안정환 선수의 외할아버지는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셔서 가족 모두가 생활하는데 별 불편 없이 잘 있었지만, 잇따른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와 안 선수는 다시 흑석동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흑석동은 안정환 선수의 기억으로 당시엔 한창 재개발 지역이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댁에서 생활할 때하고는 사뭇 익숙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언제나 유치원에 가라고 집을 나서면 안 선수는 곧잘 동네 근처에 있는 중대부중 운동장에 가 있었다.
거기에 가면 안 선수보다 큰 아저씨나 형들이 조기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안 선수도 모르게 아저씨들을 졸라서 같이 축구를 하곤 했다. 그 당시 안 선수가 만나 뵌 분으로 김정남 선생님과 한규석 선생님 등이 계셨는데 곧잘 따라와서 축구를 하는 어린 안정환을 보고는 귀여워해 주셨다.
말썽꾸러기 안정환:
안 선수는 한편으로 엄마한테 무진장 혼이 많이 났다. 가라는 유치원에는 안 가고 남자들 축구하는 곳에 가서 공을 차고 있으니 엄마 눈에도 아들이 말썽장이로 보였나보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던 중에 안 정환 어린이가 가서 놀던 조기축구회가 서울 대항전에 나가는 일이 생겼다. 경기는 각 구별로 팀을 정해 서울 효창운동장에 모여 경기를 하고, 다시 우승팀은 전남 광주로 내려가 각 시도대항 축구경기를 벌이는 것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어린 안 정환은 효창운동장에 갔다. 6살 나이에 동작구팀이 나올 때 맨 앞에 서서 깃발을 들고 걸어 나왔다. 관중들이 어린 안정환을 보더니 웃거나 박수를 쳐주었다. 하긴 꼬마 기수는 그밖에 없었고 그 모습이 귀여웠나보다. 마침 경기장에 와 계시던 故 이주일 아저씨가 웃으며 다가와 어린 안정환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 당시 축구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한 어린 안 정환은 그 때 이미 축구선수가 되기로 결정했다.
서울 조기축구회 대항전에서는 어린 안정환을 기수로 내세웠던 동작구팀이 우승을 했다. 희망은 가졌지만 실제로 우승을 할 줄이야. 그런데, 문제가 다시 생겼다. 어린 안정환은 팀을 따라 광주로 내려가서 결승전을 보고 싶었는데 6살 꼬마인 안 선수가 집을 나서겠다고 하자 엄마의 반대에 부딪혔다.
“엄마, 나 갈꺼야.”
“어딜 가? 어린애가… 집에 있어!”
엄마와 어린 안정환이 싸우기를 여러 번, 아들은 울기도 하고 앙탈도 부려봤지만 엄마의 반대는 확고했다. 어린 안정환은 그 길로 다시 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 당시 신림중학교 코치이고 조기축구회 팀이던 김태욱 코치를 대동하고 집에 다시 떡 하고 나타났다.
엄마는 아들이 울면서 나가더니 한참동안이나 들어오지 않자 걱정을 하고 있었데, 난데없이 코치하고 갑자기 들어서자 놀라는 눈치셨다. 결국 어린 안정환은 아저씨들을 따라 광주로 결승전을 보러 내려가고야 말았다.
안정환은 심술쟁이 어린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으로 보자면, 안 정환 선수는 어릴 적 엄청난 심술쟁이였나 보다. 아이스크림 먹는 애들 있으면 다가가서 좀 달라는 말은 안 하고, 아이스크림을 툭 쳐서 땅에 떨어뜨리고 그 아이가 못 먹게 만들곤 했고, 동네 우물에다가는 빨래랑 비누 같은 것들을 집어 던져버리곤 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엄마한테 짜증을 내곤 했다. 물론 철이 들면서 안정환 선수 자신도 엄마에겐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되엇지만 그 때는 어린애라서 철이 없었다.
엄마는 자꾸 보채며 칭얼거리는 아들을 데리고 가는 곳이 있었는데, 하얏트 호텔 근처에 노점상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 때는 그 근처에서 옷도 팔고 신발 등등 볼거리 먹을거리가 참 많았다. 엄마는 그 곳에 가는 날이면 아들에게 선물을 잔뜩 사주곤 하셨다.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고 말이다. 그러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난 기분이 좋아져 헤헤 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심통을 부리며 자라던 어린이 안정환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도 축구하고는 거리가 먼 평범한 아이였다. 한번은 동네 아이들이랑 축구를 신나게 하다가 넘어져 왼쪽 무릎이 다친 일도 있었다.
어린이 안정환은 바로 중대병원(당시 철도병원)으로 이송됐고, 돌에 찢긴 상처는 무려 2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끝에 다 나았는데, 아직도 상처가 있다. 이 날 그는 바늘로 꿰매는 수술을 마치고 나오면서 괜히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그냥 업히고 싶었다.
“엄마, 나 업어주면 안돼?”
“응? 그래, 아들 업어줄까? 그래, 업자. 자...”
엄마는 아들을 업고 다시 걷기 시작하셨다. 한강다리를 건너며 엄마와 안정환 선수는 여러 이야길 했다. 이 다음에 안 선수가 하고 싶은 일들 이야기, 엄마랑 안 선수랑 어디서 뭐 하자고 하는 얘기 등등… 엄마는 아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었고, 무겁다는 말도 한번 안 하고 집까지 걸어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때, 안혜령 여사는 전혀 무겁지도 않았고, 힘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업었는데 뭐가 힘들어요?”하는데, 훗날 안정환 선수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눈이 뜨거워진다.
이 일까지 겪은 안 선수는 축구에 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축구하면 또 어디에 상처가 날 줄 알고 미리 멀리 했다.
그런 안 선수에게 운동회 날이 다가왔다. 고학년 달리기 결선이었다. 안 선수는 4학년이었고, 출전 선수들은 6학년 선배들까지 구분이 없었다. 땅! 하는 시작소리가 들리자마자 힘껏 달린다고 달렸는데, 그만 우승을 해버리고 말았다. 6학년 형들도 제치고 말이다.
당시 본동 초등학교 축구 코치였던 송수일 코치는 어린 안정환이 달리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축구를 하라며 강력하게 추천해줬다.
안정환 선수의 담임선생은 축구를 하라는 코치선생과 대응하면서 어린 안정환을 축구에서 지켜주었는데, 결국에는 학교 선배였던 이정영 선배가 안 선수를 유혹, 축구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 본동 초등학교에서의 축구선수 생활은 잠시, 학교의 지원이 끊기면서 잠정 중단상태에 들어갔다.
이제 축구는 안 하는구나하고 있을 무렵, 대림초등학교에서 감독이 왔다. 대림초등학교 축구부는 광성성결교회라는 교회에서 선교목적으로 창단한 팀으로 교회에서 지원을 받는 팀이었다.
대림초등학교의 감독은 경기에서 뛰는 어린 안정환을 봐두었다가 안 선수의 학교가 축구부를 해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카웃하러 온 경우였다.
안 선수의 어머닌 곧바로 전학 절차를 진행했고, 안 선수는 학교에서 전학동의서도 발급되기 전부터 대림초등학교 가서 축구를 하며 지냈다.
여기서 만난 분이 피 은형 코치이다. 대림초등학교 축구팀 이름은 ‘할렐루야소년축구단’이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여기 코치였던 것이다. 본동 초등학교에서 전학동의서같은 서류도 넘어오고 대림초등학교로 전학이 확정되자 안 정환 선수는 코치선생님에게 요구를 했다.
“코치님, 저 조건이 있는데요.”
“응 그래, 뭐니?”
코치님은 어린 아이가 겁도 없이 말을 하는 것을 보시고도 웃으며 받아주셨다.
“전 머리도 길러야 하구요, 제가 좋아하는 김주성 선수처럼 등번호도 16번 주세요.”
“그래, 좋다. 그 대신 열심히 축구하는 거다?”
이렇게 안 정환의 축구선수 생활은 다시 이어졌다. 머리도 기르고, 등번호도 16번을 받았다.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더욱 잘하라는 의미로 좋은 옷이나 신발 등을 사주셨다. 축구를 할 때면 언제나 화승 나이키나 르까프 같은 유명 메이커만 입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과 차이 나게 입는 안정환을 보고 다른 부모님들이 학교로 전화를 했던 것이다. 무슨 학교에서 패션쇼하나? 는 내용부터 코치가 담당 코치로서 받는 전화만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코치는 그런 내용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은 채 축구만 열심히 하라는 지도를 했다. 안정환 선수가 기억하는 코치선생님은 운동이 끝나면 분식집으로 데려가 밥도 잘 사주었고, 선생님이 어디 외국이라도 다녀오는 일이 있으면 선물을 사다주곤 했는데, 안 선수가 가장 갖고 싶었던 빨간색 땀복을 사왔을 때는 너무 기뻤다. 피 은형 코치는 안정환 선수에게 가끔 이런 말도 하며 더욱 용기를 줬다.
“정환아, 가끔은 축구가 그만두고 싶고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고 열심히 하렴, 넌 꼭 크게 성공할 거다. 선생님은 안다.”
선생님의 안 정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다른 아이들에겐 오해를 불러왔다. 어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한 말들도 오갔다. 안 선수는 그 당시 피 은형 코치에게 축구 기본기도 확실히 배우며 한발 한발 축구선수로서 실력을 기르고 있었지만, 결국 선생님은 다른 주위에서의 오해 때문에 안 선수와 연락이 끊어지셨다.
안 선수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무렵 전해들은 소식으로는 축구코치 일을 그만두시고 다른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안혜령 여사와 안정환 선수는 아직도 그분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아아, 내 어머니:
안정환에겐 너무나 소중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존함은 안혜령이시다. 당시에는 좀 이르다 싶었던 22살에 결혼을 하셔서 안 선수를 가지셨다. 안 선수의 아버지는 평범한 수학선생님이셨다.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된 안정환 선수의 모친 안혜령 여사의 꿈은 연기자였다. 연기도 배우러 다녔고, 가끔은 카메라테스트도 받는 등 연기자로서의 길을 밟아가고 있을 때 집안 할아버님의 완고한 반대로 결국 꿈을 접어두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간혹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면 학교에 간혹 갈 때가 있었다. 중학교까지 안혜령 여사는 축구팀 총무를 맡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고, 선수들 식사를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맡아 했던 일들이 있어서였다.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안 선수를 보고 안혜령 여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면 다른 학생들이 와서 꼭 물어봤다.
“저어, 혹시 새엄마세요?”
안 선수의 모친 안혜령 여사의 그 때 스타일은 긴 생머리에 멋진 옷맵시,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예쁜 아가씨로 보일 수 있는 옻차림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른 눈에는 안 선수의의 새엄마이거나 이모 정도로 봤는가 보다.
안 선수는 엄마가 해주는 요리라면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갈비찜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좋아한다. 운동 중 휴식기에 집에 가는 날이면 엄마는 언제나 갈비찜을 준비해주시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 맛은 여전하다. 갈비찜말고도 엄마가 해주는 요리는 김치찌개, 김밥 등 다 좋아한다.
대우구단 시절엔 안정환 선수가 갈비찜을 좋아하다는 것을 알고 어느 팬은 갈비찜까지 직접 갖다주기도 한다. 여기에 안선수가 잘 먹는 것은 후르츠칵테일이라고 해서 여러 과일을 모아둔 것을 좋아한다. 출출할 때나 간식으로 수저를 들기만 하면 어느 새 다 먹어버리고 만다.
지긋지긋한 이삿짐:
엄마와 아들은 참 이사도 많이 다녔다. 아현동에서 태어나 돈암동에 있는 외갓집에 살다가 다시 흑석동으로 왔다. 흑석동에서 다시 본동으로, 신길동으로, 상도동으로 갔다가 흑석동을 거쳐 지금은 목동근처에 산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중간에 부천과 수원에서도 살았던 적이 있다.
본동에 살았을 때에는 사고도 있었다. 한번은 비가 막 내리고 기분이 좋길래 밖에서 비를 맞으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수구로 물이 빠지질 않는 모양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집에 물이 차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한 것이다. 순식간에 집안을 덮칠 것 같았다. 안정환 선수는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날따라 심한 몸살로 자리에 누워 계시던 엄마를 깨웠다.
“엄마, 빨리 나와! 빨리 일어나!”
엄마는 아들이 왜 그러나 하면서도 가까스로 일어나 집밖으로 나왔다.
순간 집안에는 거짓말처럼 물이 가득 찼다. 사람 허리까지 물이 차 올랐다. 글자 그대로, 수재민, 안 선수는 수재민도 해봤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때 안정환 선수의 어릴 적 사진이 다 떠내려갔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사진 찍기를 싫어해서 어릴 적에는 사진기만 들이대면 엄마 뒤로 숨어버리곤 하던 그였는데, 그나마 찍어 놓았던 사진마저 다 없어져 버렸다.
안정환 선수가 수원에 살았던 때는 엄마랑 같이 움직이며 학교에 다녔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직장에 나가는 엄마를 따라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갔고, 학교 수업과 운동이 끝나더라도 일단 학교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직장을 끝내고 퇴근하는 엄마는 학교로 다시 돌아와서 안 선수를 데리고 집에 가는 것이다. 집에 가면 보통 밤 10시, 11시가 됐고, 안정환 선수는 그냥 잠에 곯아떨어져 버릴 때가 많았다.
그리운 아들, 안정환:
엄마는 아들때문에 자주 울었다. 겨우겨우 참다가 참지 못하면 안정환 선수가 보고 싶어서 밤새 울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합숙훈련에 들어가기 시작한 안 정환을 보러 밤이면 학교로 찾아와 수위 아저씨를 깨우곤 하셨다. 아들이 잠자는 얼굴이라도 한번만 보고 가게 해 달라고 사정하고 들어오셔서 얼굴을 본 뒤라야 다시 집에 가시곤 했다.
한번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엄마와 같이 집을 나선 안 정환 선수는 극장에 갔는데, 그 때 프로는 김민희 주연의 [오싱]이었다.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며 어려움을 이겨내는 김민희의 역을 보고 엄마와 안정환은 실컷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안정환 선수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바로는, 안정환 선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머닌 그때 남의 집 더부살이의 어려움을 알려주고 싶어서 아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엄마를 안 정환은 사랑한다.
엄마와 팬:
한번은 안 여사가 팬들에게 화를 내는 척하며 꾸짖었던 적도 있다. 학교에 온 안정환 엄마를 알아보고 여학생들이 다가와서는 아들한테 전해달라며 쵸콜릿하고 편지 같은 것들을 전해주곤 했는데, 안헤령 여사는 당시 그 학생들이 걱정돼서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아니, 계집애들이 이렇게 남자만 쫓아다녀서 언제 공부할려고 그래?”
그 뒤로 안 선수의 여학생 팬들은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대신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에게 갖가지 물건을 맡겨 놓기 시작했다. 팬들이 보내준 편지나 선물을 꼬박꼬박 잘 챙겨두는 것도 안혜령 여사의 몫이다. 당시 안정환 선수의 방에 보면 팬레터로 어머니가 만들어준 벽장식도 있고, 선물들도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안정환 선수는 집 전화번호나 핸드폰 번호도 자주 바꾼다. 바꾸면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팬들이 전화를 걸거나 해서 이젠 안 갖고 다닐 때가 많다. 물론 안정환 선수가 전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 때문에 축구선수 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나친 전화도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다.
안혜령 여사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껏 기억에 남는 팬이 있다고 한다. 인천에 산다는 지영이라는 학생인데, 안정환 선수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안 선수는 합숙소에 있느라 몰랐지만 이 학생이 가끔 집에 찾아와서는 통닭을 들고 오기도 하고, 포도를 들고 오기도 했으며, 한번은 안 선수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전부 모아 스크랩을 만들어 책자처럼 엮어서 갖고 왔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얘기도 있다.
안 선수가 한번은 모 방송국의 ‘스포츠가 좋아요’ 라는 프로에 나가서 우리 집 마당에는 호박밭도 가꾸고, 파라솔도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게 발단이 돼서 전에 살고 있는 동네가 한번 시끄러워졌던 일이 있다.
전국에 걸쳐 각 지방 팬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면 당시 살던 동네로 찾아왔고, 다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호박밭을 찾았던 것이다. 사실 그 전만 해도 안 선수네 집은 아무도 몰랐다.
안정환 선수의 집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은 공교롭게도 동네 수퍼 아저씨.
집밖 출입을 삼가했던 안혜령 여사는 수퍼에 물건을 주문하곤 하셨는데, 처음 우리 집에 배달 온 아저씨는 안정환 선수의 사진들이 집에 걸려 있는 것을 보시고 “여기가 안정환 선수 집이에요?” 하셨단다.
그 이후로도 부산에서는 어느 여대생이 찾아와 사진 찍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어머니는 안 선수보다 팬에 대한 기억이 더 많으시다.
안정환과 대우구단의 인연:
안정환 선수와 대우팀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졸업시절부터다. 졸업을 앞두고 각 대학팀들을 놓고 결정을 해야 했다. 일단 어머니와 안 선수는 연대, 고대는 제외했다. 그리고, 안 선수는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실업팀으로 잠정 결론을 냈다.
당시 전국고교대표를 하던 안 선수는 상황만 허락한다면 어느 대학이든 선택하여 갈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음에도 기꺼이 실업팀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감독님이셨던 박 인규 감독님과 아주대 감독님이신 김 희태 감독님이 오셨다.
일단, 수원에 있다는 아주대이고, 실업팀을 생각하고 있던 안 선수는 내심 내키지 않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님대로 상황이 허락하는 대학팀에서 활동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셨다. 김희태 감독님은 이런 안 선수의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정환아, 실업팀으로 가서 월급을 받으며 어머니를 돕겠다는 네 생각은 참 좋고, 나도 바람직한 생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대학팀을 거쳐 프로구단에서 활약하면 더 좋은 조건에 프로 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이 좋지 않겠니?”
결국 안 선수의 진로는 아주대로 정해졌다. 아주대에서 활동하기 첫날이었다.
김 희태 감독님께서는 일단 삭발을 하라고 지시했다. 삭발. 안 선수는 머리카락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밀어버렸다. 그리고, 감독과 동료선수들과 함께 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해 춘계대학선수권대회에서 안정환 선수의 팀은 우승을 했다. 김희태 감독의 지도아래, 안정환 선수는 1994년 19세 이하 청소년대표, 1997년 부산동아시아경기대회 대표 및 하계유니버시아드대표, 월드컵대표팀 상비군(97년 3~5월)을 거쳤다.
그리고 이듬 해, 1998년.
이미 부산 대우팀에서는 오래 전부터 안 정환을 1998년 시즌 임의 지명 선수로 기정 사실화 해온 상태였다.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지난 5월28일 98 프랑스월드컵 1차 예선 홈 경기 홍콩 전에서는 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일정상 하계 U대회에 출전, 시칠리아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국이 준우승을 하는데 힘껏 뛰었다.
복귀하고 다시 월드컵 팀으로 합류되는 줄 알고 있던 안 정환 선수는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서 제외되자 곧바로 부산선수단에 합류, 훈련을 함께 하며 손발을 맞추었다.
당시 안정환 선수가 소속된 프로축구단 대우 로얄즈는 흔히 한국의 바이에른 뮌헨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전통적으로 스타를 많이 보유한 팀이다. 프로 리그 14년 동안 MVP만 무려 4 차례나 배출했다. 박창선(84년), 정해원(87년), 정용환(91년), 김주성(97년) 등 한국축구를 이끌어 온 기둥들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박창선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 아르헨티나 전에서 국내 월드컵 본선 첫 골을 터트린 주인공. 정해원은 공격축구의 귀재이며 정용환은 한국 최고수비수의 맥을 이은 그라운드의 신사.안 선수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야생마?김주성은 아시아 MVP를 3연패한 대우구단의 간판중의 간판이었다.
또 초창기 멤버 중 조광래는 대표적인 컴퓨터 링커였고 이태호는 외눈골잡이로 이름을 떨쳤다. 지금도 김주성, 정재권, 이민성 등 초호화 멤버를 거느리고 있다. 대우 로얄즈는 90년 엥겔(동독), 91년 비츠케이(헝가리) 등 국내 최초로 외국인지 도자를 영입해 선진축구기술을 전수하는데 앞장섰으며 한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던 김주성에 이어 마니치와 하석주를 일본 세레소 오사카에 임대하는 등 마케팅에도 앞서 있던 구단이었다.
안정환 미용실을 아시나요?:
흑석동에 살 때다. 미용실을 한 곳만을 정해놓고 다녔는데, 그곳이 에덴 미용실이다. 흑석동 현대 아파트 맞은 편 골목에 있는 곳인데 지금의 안 정환 선수의 머리는 이 곳에서 기본이 다져졌던 것일까?
안정환 선수는 흑석동에 이사 온 뒤로, 아마 다른 곳에 간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대학생활 내내 이곳에서만 머리를 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길러온 안 선수의 머리를 보더니 원장님이랑 일하던 다른 분들도 정성스럽게 다듬어주셨다.
이곳은 안 선수의 어머니도 같이 단골이셨는데, 안 선수는 이 곳 분위기도 좋고, 잘 대해주시는 분들과도 친해져 단골이 되어버린 경우다.
머릴 기르고 뛰는 안 정환 선수를 프로무대에서 처음 본 팬들은 이따금 여러 가지 제안을 많이 보내주기도 했다. 머리띠를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것도 있고, 다른 선수들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해서 축구정보로 쓰라고 보내주시는 팬들도 많았지만, “신세대 스타답게 머리를 염색하면 좋겠다”는 내용도 많았다.
초등학교시절부터 길러온 머리는 다시 긴 파마머리로 변했다. 그리고, 종류별로 갖고 있는, 대부분은 팬들이 보내준 것이지만, 수 십 가지에 이르는 머리띠, 그리고 과거에는 볼 수 없었다던 안 정환 선수가 좋아하는 붉은 색깔의 축구화 등을 주로 신는다. 딱히 이렇다할 이유나 그런 건 없었다.
안정환 선수가 머리띠를 착용하기 시작할 때는 어떤 패션이라기 보다는 그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잡아두는데 가장 편리해서 했었다. 경기 도중에 땀이 흘러 머리카락과 함께 얼굴에 붙는 지경이면 영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잡아두거나, 때로는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이리저리 헝클어져버리는 영 불편한 게 영 아니었다.
짧게 이발을 해버려?
머리띠를 고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무줄밴드,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눈길을 끌었던 멕시코의 에르난데스의 고무줄 헤어밴드를 착용했으나 좀더 편하고 멋있는 머리띠로 종목을 바꿨다. 신발도 나이키사의 흰색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패션화를 착용했었는데, 현대컵-K 리그서는 아디다스의 붉은 줄무늬 축구화로 바꿨다. 이 신발은 안정환 선수말고도 월드컵 당시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이 신었던 축구화다.
아버지가 그리운 안정환:
안정환 선수가 아직 4살이었을 무렵,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일은 아직 어렸던 안 선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도 당신의 남편이 돌아가신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셨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셨다.
하루는 안정환이 엄마를 졸라 자꾸 100원만 달라고 했다. 엄마가 물어보자 어린 안정환은 진지하게 말했다.
"시장 가서 아빠 사오게."
웃음도 많고 재롱도 잘 부리던 어린 안정환이 갑자기 내성적으로 변해버린 것도 이때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어린시절, 안정환의 마음 속 깊은 한 곳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 것이다.
웃음도 점차 사라지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버지 생각에 혼자 훌쩍이다가 잠이 들 때면 안 선수의 엄마도 잠자는 아들에게 오셔서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때 당장이라도 당장 문을 열고 웃으며 들어오실 것 같은 아버지의 기억, 아들을 유난히 귀여워 해주던 분이었다.
어머니와 안 선수는 외갓집으로 들어갔다. 안정환도 아직 어려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친척들과 같이 지내는 게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1998년 월드컵 :
축구인으로서 최고의 영광, 월드컵 무대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안 정환에게 왔다. 월드컵 대표 상비군에 선발되고 월드컵 예선, 對 홍콩 전에서 뛰었다. 그리고 다시 복귀, 하계 U 대회에 출정하게 됐다. 사실 월드컵 준비에 여념 없었던 차에 다른 경기로 빠진다는 것은 대표팀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점에 있어서 약간 불리한 면도 없지 않았다. 당시 차 감독의 허락 하에 하계 U 대회에 출전, 좋은 성적을 올리고 복귀했다.
그러나, 안 정환의 이름은 상비군에서조차 빠져있었다. 당시 준비시간이 촉박했던 월드컵 대표팀인지라 중간에 다른 경기에 출전하느라 빠졌던 안 정환은 아무래도 무리수였다. 모처럼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던 안정환에게 있어선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런 저런 불만도 생기고 가슴이 답답해진 나머지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어머니, 저 일주일만 여행 다녀올게요...”
안쓰럽게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뒤로 한 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작정 나갔다.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기차를 타고 목적지 없이 이동하기도 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많았다. 처음엔 불만으로 가득 찼던 기분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얼마나 돌아다닌 것인가? 안정환은 자신이 갔던 장소를 슬쩍 손꼽아 봤다. 대학시절에도 혼자 틈만 나면 산이고 어디고 여행 다니던 그였기에 이제 우리나라는 제주도만 빼놓고 다 가봤다.
외국도 웬만한 나라는 안 가본 곳이 없다. 외국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스위스, 몸블랑에 올라 본 그 때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괜찮아요. 저 이젠 다 나았어요.”
말씀을 드리니 그제야 안혜령 여사는 웃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아들과 어머니가 마주 앉았다.
“정환아, 많이 상심이 컸지? 그래, 엄마 생각은 지금이라도 너가 원하는 일을 하면 그게 좋은 길이라고 여긴다. 축구를 안 해도 좋아. 평범하게 그냥 살자꾸나.”
뜻밖의 말씀을 듣고는 안정환은 당시 조금 당황했다. 어머니는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아뇨, 저 축구 계속 할꺼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정환 선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머닌 아직도 마음 상해 계셨던 듯. 하나뿐인 아들이 잔뜩 기대하고 항상 즐거워했었는데 그 무대에 설 기회가 사라지자 어머니, 당신도 힘드셨을 테다.
지난 시절, 고등학교 때는 축구를 그만두겠다던 아들을 말리던 어머니가 이번엔 먼저 그만둬도 좋다고 하신 것. 안정환 선수는 당시 순간적으로 마음이 울컥했다고 한다. 아들 하나만을 알아주고 위해주는 어머니. 순간의 자신의 기분을 못 이겨 어머니를 생각지 못하고 혼자 여행을 떠났던 아들은 자신이 미웠다.
그래,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많다.
정규 입단이 예정된 1998년까지 기다리기보다는 1997년 10월부터 대우구단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겨울철 전지훈련에도 참석하면서 대우구단 선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엄마, 오토바이 사주세요:
안정환 선수가 고등학교 때였다.
시합에 나가다가도, 아니면 숙소근처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무작정 타고 싶었다. 그도 남들처럼 멋지게 달릴 수 있을 텐데…
경기를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자유시간이면 오토바이만 생각났다. 결국 안정환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전데요. 저 부탁이 있는데... 오토바이 하나만 사주세요, 예?”
“정환아, 무슨 소리야? 그건 더욱 위험해서 안돼!”
어머닌 한마디에 거절하셨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오토바이 한번만 탈 수 있다면 다른 소원은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다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저 오토바이 정말 타고 싶거든요. 오토바이 한번만 타보면 축구도 잘하고, 더 열심히 연습할께요. 예?”
어머닌 잠시 망설이시더니 안정환이 너무 간절하게 소원을 말씀드리자 마지못해 사주셨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잘 타고 다니던 그런 멋진 오토바이가 아니다. 그 때 아주머니들이나 타고 다니시던 50cc 짜리다. 쪼끄만 거….
안정환은 그래도 좋았다. 이게 어디야? 더군다나 면허가 없는 그에게 가장 적합한 모델이었다. 숙소에 잘 모셔뒀다. 경기에 나가거나 자유시간이 되도 좀체 타 볼만한 시간이 나질 않았다. 오토바이를 사다 놓고 이틀이 지났을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일을 냈다.
경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자유시간이 됐다. 후배들 몇 명과 드디어 타고 나갔다. 길을 가로질러 골목 밖으로 나가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기우뚱하더니 보기 좋게 자빠졌다.
“욱…”
떨어질 때 거꾸로 떨어졌는지 어깨, 쇄골뼈에 금이 갔다. 시승식하던 바로 그날, 병원으로 갔다.
X레이를 찍어보니 어깨뼈에 금이 갔고, 안정환은 갑옷같은 것을 걸쳐야만 했다.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병원까지 부랴부랴 따라온 감독님은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집으로 전화를 거셨다 한다.
“정환 어머님, 아니 내일 모레가 큰 시합인데, 어쩌자고 오토바이를 사주셨나요?”
감독님은 노발대발하시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로 막 야단이셨다. 가뜩이나 사고 소식을 듣고 가슴을 졸이던 어머니셨지만 그저 감독님한테 야단만 들으셨다고 한다. 드디어 시합 날, 난 어깨에 그 갑옷을 두른 채 경기에 나갔다.
당시 안정환을 받았던 차는 버스였는데, 안정환을 쳐놓고 그냥 내빼는 바람에 사고처리는 집에서 다했다. 한 보름정도는 깁스를 하고 다녔는데, 그 이후로는 오토바이를 보는 걸로 만족하고 지낸다.
나의 어머니:
안정환 선수는 축구를 하면서도 어머니의 웃으시는 모습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효자다. 그는 그런 어머니를 뵙는 게 기분이 가장 좋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축구선수가 되길 잘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을까?
그의 소원이라면 좋은 축구선수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고, 경기가 없는 기간동안 어머님하고 어디 산속에 있는 산장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아마, 지금은 어머님하고 아내와 함께 가고 싶겠지만. 그런 장소에서 가족들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있으면서 어머님하고 많은 얘기도 나누고 싶을 것이다.
예전에 안정환 선수가 아는 지인에게 이런 말을 한번 꺼낸 적이 있는데, 그분이 기꺼이 산장을 빌려주시겠다고 했단다.
그때 안정환 선수는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항상 안정환 선수의 소원은 멀리도 안 가고 큰 것도 아니다. 어머님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산장 같은 곳에 가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다 오는 것, 그것뿐이다. 물론 아내와 함께 말이다.
당시에,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이다. 부산 대우로열즈 숙소 앞 카페에서 가졌던 인터뷰를 끝내며:
“만약 지구 종말이 30분 남았다면 안정환 선수는 뭐를 할래요?”
“전 어머니하고 식사를 같이 할래요.”
안정환 선수에게 질문을 하면서 내심 예상했던 말이지만, 난 역시 다소 놀라지 않을 순 없었다.
내 나름대로는 아마 안정환 선수가 축구장에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환 선수는 정말 그 대답대로 어머니랑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아는 남자, 테리우스에서 반지의 제왕으로 세계 무대를 달군 주인공.
안정환에게 2006년 독일 월드컵은 그의 진가를 다시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제 13일 밤 11시 이후, 서울 시내,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안정환을 연호했다.
대 경기에서 빛나는 승부사. 그는 이미 반지의 황제를 넘어 그 이름 석 자 '안정환'으로 새겨질 것이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지난 5월 초 안정환 선수를 다시 보고 결국 그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이제 남은 경기에서도 또 한번의 무대가 그 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난 13일 토고 전에서 한국팀의 무기력한 경기운영 방식을 논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속내를 들여다 보자.
우리가 16강 돌파를 목적으로 했을 때 우린 폴란드부터 살벌하게 싸웠지만, 이제 우리 목표는 결승이다. 모든 체력과 전술의 안배를 결승전에 맞춰야 한다.
전반전 무기력한 경기운영이 아니라 체력안배를 위한 전략이었고, 김진규, 조재현 등 신인급을 내세운 것도 경험치 축적과 후반전에 투입될 선수들의 체력안배였다. 그 신인들의 대포알 같은 뻥슛을 봤는가? 어김없이 골문에서 빗나가는 그 신인들의 슛.
후반전 아데바요르의 체력 저하 모습을 본 팬들은 얼마나 될까? 이제 축구는 체력전과 전략전이다. 예감이 좋다. 우리에겐 박주영, 설기현 등 아직도 안뛴 선수들이 많다.
16강에서부터 무리하면 준결승, 결승에서 지난 4년 전처럼 독일에 진다. 그때 우리는 체력 떄문에 졌다. 이번엔 우리 목표가 결승이다. 결승전에서 가장 좋은 체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16강, 8강 정도야 어렵겠지만 천천히 움직이며 이기는 경기만 해야한다.
올 2006년 독일 월드컵, 안정환에겐 큰 기회가 펼쳐질 것이다.
글| '콩나물' 패션디자이너 이영호 기자
첫댓글 베컴도 안정환 하고 같은 케이스네.. 외모땜에 실력이 가리는 스타..
야호
국대에서 젤 좋아요 어렸을때부터 어려움 많이 겪으셨지만 , 그리구 월드컵 이후로 여기저기 팀 옮겨다니면서 고생하셨지만 , 지금은 이쁜 아내와 귀여운 리원이도 낳으시구 , 행복한 가정 꾸리셨으니 참 다행이구.. 어제 골은 정말 완전 캐감동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ㅠㅠ.......안정환의 팬으로써 그렇게 자랑스러울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간이 벌렁벌렁했다니까요...ㅠ. 이제 다시 부활의 때가 왔습니다.ㅠ
이번 월드컵에선 첫경기부터 골 터졌으니 , 안느 이번에 골 진짜 많이 넣게될것 같아요~안느 주특기인 헤딩으로 헤트트릭도 한번!! ㅋㅋㅋ
다읽으려면 1시간정도 걸릴듯 ;; 너무 많다 으하으하
아.~ 다 읽었다.!!~ 아 눈아퍼.. 음.. 대략 30분 가량 걸린거 같군여.. ㅡ,.ㅡ;;;
안정환 .. 역시 슈퍼스타 ㅎㅎ
그렇게 사이가 좋다가 왜 지금은 모자지간 인연을 끊었지???
아내 떄문인듯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도박빚이 있답니다. 좀 많이.... 인연안끊으면 안선수 연봉 한푼 안남을정도...(빚쟁이들 몰려오죠)
부산시절에 안정환 선수 진짜 개간지였는데 판타지스타 ㄷㄷ
한국 판타지스타
인물하나는 진짜 어딜내놔도 꿀리지 않는.. 아시아에서는 단연 최고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