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의 신전포의 모습(2002년)
신라때부터 대당교역 중심 가능성
두어 달 전 평택항홍보관 소장을 지냈던 분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포승읍 출신인데다 홍보관 소장을 지내면서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소장님은 짤막한 한문이 적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평택항의 역사적 정체성을 위해 만호리 옛 대진나루에 유래비를 하나 세우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대진(大津)에 관한 내용으로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백제영역으로 혜군의 가리저(可里渚)였으며 동쪽에 수군창이 설치되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 객관과 곡식을 쌓아둔 뒤로는 경관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이 모두 이 객관을 이용했으며 신라인들이 조공을 바치러 갈 때에도 이곳을 경유하였으므로 대진이라고 하였다.”
내용을 번역하고 보니 대단히 중요한 글귀였다. 대진은 백제시대에는 혜군의 가리저에 속하였으며 수군창이 있었고, 신라가 지배할 때에는 객관과 조창이 있었으며, 당나라와 신라의 사신들과 상인들이 이곳을 경유하였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대진은 삼국시대 이후 대당교역의 중심이었고,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사실과 최근 평택시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실크로드사업과 혜초길, 원효길이 평택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료의 내용이 객관성을 가지려면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먼저 ‘혜군’이라는 옛 지명이 어디를 뜻하는가와, 대진이 포승읍 만호리를 지칭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였다. 여러 가지 지도와 문헌을 조사하던 중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 혜군이 충남 당진군 면천의 옛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고, 가리저도 면천의 영역으로 고려시대까지 ‘가리저부곡’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당진군의 한진나루도 ‘대진(大津)’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기록은 만호리의 대진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남는 것은 내용이 쓰여 있는 대동여지도에는 포승읍 만호리 대진(大津)은 표기되었지만 당진의 한진(漢津)은 표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고산자 김정호는 만호리 대진이 백제시대 혜군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면천군에 속한 것으로 알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있어 쉬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조선전기에는 수군첨사가 배치되기도
평택은 나루와 포구가 발달한 고장이다. 강원도 춘천을 호반의 고장이라고 부르듯 평택도 물의 도시, 호반의 고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어쩌면 춘천과 평택의 차이는 지명도와 활용도의 차이일 수 있다. 평택의 수많은 나루와 포구 중에서도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은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 없이 거론되는 군항(軍港)이었기도 했지만 삼국시대부터 대당교역 및 당진, 면천, 서산, 태안 등 경기만 일대의 여러 고을과 교역했던 나루였기 때문이다.
나말여초를 거치며 쇠퇴하였던 대진이 역사적으로 다시 부각된 것은 고려 말 왜구가 침입하면서였다. 수 십 또는 수 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해안에서부터 내륙 깊숙이까지 노략질을 했던 왜구들은 하양창이 있는 아산만 일대를 집중 공략하였다. 왜구의 공격으로 서평택지역의 용성현(안중읍), 광덕현(현덕면), 경양현(팽성읍 서부지역), 평택현(팽성읍 동부지역)은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은 보따리를 이고 피난을 떠났다. 만호리 앞바다에 우뚝 솟은 영옹암에 영웅바위 전설이 전해지게 된 것이라든가, 만호리에 황장군 전설이 전해오는 것도 왜구의 침입, 청일전쟁 같은 외적의 침입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왜구 퇴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왜구가 퇴치되지 않는 한 국가안정을 기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세곡운송에도 지장을 초래하여 국가운영에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태종과 세종 대를 거치며 수군을 증강하고 화포와 신무기개발, 함선의 건조가 활발했던 것도 왜구격퇴와 관련이 있었다.
경기만 일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던 화성시에 경기수군절도영을 두고 포승읍 만호리에 수군도만호를 설치하였다. 도만호는 나중에 종3품 무관직인 수군첨사(수군첨절제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세종 때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지자 종4품 수군만호로 급을 내렸고, 세조 때에는 만호마저 혁파하고 모든 병선을 아산만 입구의 난지도 수군만호로 옮겼다. 수군주둔지는 옮겼지만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에는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만호리’도 그렇고 만호리 ‘원터’마을과 같은 지명도 그러하다.
근대전후 상업과 어업으로 성가 높여
나루는 만호5리 솔개바위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진’보다는 ‘솔개바위나루’라는 지명을 즐겨 부른다. 옛 기록에는 솔개바위나루가 남북으로 10리가 넘는다고 말한다. 10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6㎞쯤 되므로 만호5리에서 신영리 신전포사이가 나루터였다는 말이다. 10리가 넘는 큰 나루에는 각처에서 배들이 닿았다. 가까운 곳으로는 면천과 당진, 서산, 태안에서 배들이 들어왔고, 문산포, 강화, 옹진처럼 먼 지역에서도 왔다.
근대전후에는 안중일대의 황무지가 개간되면서 논농사가 크게 발달하였다. 논농사에는 농우(農牛)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직산현의 조창(漕倉)과 가까운 황산리에 장시가 개시되었다. 황산1리 상안중 마을의 직산장터가 그곳이다. 개시된 장시는 나중에 안중읍으로 옮기면서 안중마을에서 이전한 장시라는 뜻으로 ‘안중장’이라고 불렸다.
안중장의 대표상품은 쌀과 농우였다. 우시장은 안중성당 건너편에 있었다. 장날이 되면 시장은 미곡과 가축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산만 건너편의 당진, 서산, 태안, 면천지역의 장사꾼들도 한 배에 열 마리씩 소를 싣고 만호리 대진으로 건너와서 거래를 하고는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갔다.
봄, 가을 파시(波市)에는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아산만 어장에서는 강다리, 우어, 숭어, 대하가 넘치도록 잡혔다. 1980년대 후반에는 싱싱한 생선회를 맛보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뱃터 근처 들물횟집에서부터 호성식당 사이에는 횟집만 30여 개가 들어섰다. 솔개바위나루에서 전망대횟집을 운영하는 지경엽(64세)씨는 40여 년 전 어선수리공장을 하러 마을로 들어왔다. 당시 만해도 솔개바위나루에는 배를 대는 어선만 50척이 넘었다. 조개잡이는 겨울철 부녀자들의 부업이었다. 아산만 갯벌에는 조개와 같은 수산물이 지천이었다. 부녀자들은 배를 타고 갯벌가운데까지 나아가서 조개를 잡았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거친 풍랑에 배가 전복되어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대진은 크게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평택항이 개항하고 1990년대 초부터 항만시설을 확장하면서 나루터는 메워지고 어업은 중단되었다. 항만으로 변한 나루에는 수 만 톤이 넘는 배들이 자동차와 철강제품을 실어 나르고 있다. 당진의 한진으로 건너가던 나루터에는 중국 산둥반도로 건너가는 여객선이 취항하고 있다. 염전이 즐비하였던 도곡리 일대에는 포승국가공단이 들어섰으며, 원정리 범바위 일대에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가 주둔하였다. 몇 년 뒤에는 만호리, 희곡리 일대 천 수 백만 평의 대지가 경제자유특구로 변모할 것이다. 이름만 달리하였을 뿐 대진의 전통과 조선 초 군항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진의 현주소다.
첫댓글 아 그렇군요 감사 합니다..오늘도 좋은 시간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