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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正祖) 이산(李祘)
①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한 가지 궁금증과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 보겠다. 조선의 선비들처럼 임금도 호(號)가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임금은 제왕인 동시에 한 사람의 유학자였기 때문에 호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선비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대 임금의 호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인조(仁祖)는 송창(松窓), 효종(孝宗)은 죽오(竹吾), 영조(英祖)는 양성헌(養性軒), 순조(純祖)는 순재(純齋), 헌종(憲宗)은 원헌(元軒), 고종(高宗)은 성헌(誠軒) 등의 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일찍이 호학군주였던 정조(正祖)만큼 스스로 다양한 호를 지어 자신의 뜻과 철학을 세상에 드러낸 제왕은 없었다.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등 정조가 남긴 호는 다른 어떤 선비들의 호보다 독특하고 다채롭다.
더욱이 이 호들을 사용했던 시기를 살펴보면 왕세손과 임금으로서의 그의 삶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판도까지 읽을 수 있다.
정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임금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호를 남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호에 담겨 있는 정조의 삶과 뜻을 찾아 떠나보자.
정조가 가장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에 이름 붙인 홍재(弘齋)였다. 홍재는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하였다. "선비는 가히 도량(度量)이 넓고 마음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맡은 소임이 중대(重大)하고 나아갈 길은 원대(遠大)하기 때문이다. 어진 것으로써 자신의 소임을 삼으니, 이 또한 중대하지 아니한가. 죽은 다음에야 그치니, 이 또한 원대하지 아니한가."
정조는 증자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언급한 홍(弘)과 의(毅) 중에서 홍(弘)을 취해 자신의 생애 첫 호로 삼았다.
여기에서 홍(弘)은 ‘관대하다 혹은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은 것을 말하고 의(毅)는 ‘굳세다’는 뜻으로 마음이 굳센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홍(弘)’자를 취했다는 것은 정조가 장차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로 마음이 굳센 것보다는 도량이 넓은 것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② 정치적 핍박에도 의(毅)자 아닌 홍(弘)자 취한 까닭은?
그런데 필자는 동궁(왕세손) 시절 홍재(弘齋)라는 호를 취한 정조의 내면 심리가 무척 궁금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였던 것도 모자라 자신과 할아버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하고 음해해 왕세손의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고, 심지어 암살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던 정적(政敵)들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가 ‘굳센 마음’이 아닌 ‘넓은 도량’을 자신의 길로 선택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 얼마나 위급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죽음을 앞둔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1775년(영조 51년) 11월20일을 전후한 영조실록(英祖實錄)의 내용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영조실록 51년(1775년) 11월30일
대리청정(代理聽政)에 대한 의론이 일어나자 홍인한 등이 크게 두려워 하였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를 저지시켰으며, 더욱 긴박하게는 안으로는 자신들의 눈과 귀를 배치하고 밖으로는 당여(黨與)를 끌어들여서 혹은 말을 지어내 협박하고 더러는 떠도는 말로 탐지하거나 시험하였다.
(…)
왕실의 인척으로 이미 부귀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극악(極惡)한 죄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어찌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일로 이러 했겠는가? 오직 우리 왕세손(정조)께서 타고난 재주와 덕망이 영특하고 밝아서 화를 내지 않는 데도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두 역적이 평소 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또한 왕세손께서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을 환하게 꿰뚫고 계셨고 내척(內戚)과 외척(外戚)의 정치 간섭을 매우 증오하셨기 때문에 두 역적은 마음속으로 이를 우려했던 것이다.
(…)
두 역적이 역적이 된 이유를 살펴보면 그 원인이 오래 되었으니, 이는 유독 법령과 형벌을 다루는 사사(士師)가 된 사람만이 주벌(誅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흉악한 역적 무리가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을 만들어내 혹은 왕세손이 미행(微行)을 다닌다고 하고 혹은 왕세손이 술을 즐겨 마신다고 하였다.
김중득과 하익룡과 같은 무리는 홍인한의 흉악한 계략을 비밀리에 받아서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으로 쓴 익명의 글을 존현각(尊賢閣)에 투서했는데, 그 언사가 흉악하고 패악했다.
(…)
홍인한은 정후겸과 더불어 내간(內間)에서 한 목소리를 일으켜 말하기를 ‘동궁은 처지가 외롭고 위태롭다. 만약 외가(外家)를 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윤양후와 윤태연과 같은 무리는 이들의 뒤를 따라 설득하고 회유하여 불령(不逞)한 무리들에게 소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위엄을 세우니, 그 뿌리와 기반이 단단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고서 왕세손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왕세손은 그들의 상황과 세력을 환히 굽어 살피고 계셨다.
이에 왕세손께서는 그들의 소행을 매우 증오하고 몹시 번민하셨기 때문에 더러 언어(言語)나 안색(顔色) 사이에 드러나곤 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이 무리들은 흉악한 계획을 오랫동안 쌓고 있으면서 뉘우칠 줄 몰랐다.
(…)
왕세손께서 더러 연침(燕寢)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으면 정후겸의 어미 되는 화완옹주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왕세손을 정탐(偵探)하게 하고 좌우에서 엿보게 하였다. 왕세손께서 혹시 동궁의 벼슬아치들을 불러 무슨 말이나 하지 않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대개 이러한 행동은 정후겸이 종용(慫慂)하여서 한 것으로 자신들의 행동과 자취를 말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더욱이 이들 역적 무리는 머리를 감추고 그림자를 숨긴 채 궁중 안에서부터 농간을 부렸는데, 그 허다한 죄악은 하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일 수 있었지만 털끝만큼도 속일 수 없었던 사람은 오직 왕세손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저들 무리가 왕세손에 대해 처음에는 자신들의 일을 방해한다고 미워하다가 중도에는 자신들의 간사함을 환히 알고 있다고 염려하였다.
이렇게 저들 무리가 왕세손과 각을 세우고 대립하는 형세가 이미 이루어지자 위태롭게 여겨 계략을 꾸미는 흔적이 점차 생겨났고 자신들의 세력을 보전하려는 모의가 더욱 깊어졌다.
이에 왕세손을 핍박하려는 계략이 점점 긴박해져서 마침내 목숨을 걸고 왕세손을 적(敵)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일의 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된 것이다.
(영조실록 51년(1775년) 11월30일)
이러한 위급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조는 다음해(1776년) 3월10일 경희궁의 숭정문(崇正門)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일컬어 ‘두렵고 불안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조금 지난 11월18일 정조는 측근인 공조참판 김종수를 소견하는 자리에서 그동안 깊숙이 감추고 있던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보여주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동궁 시절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존현각일기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 남몰래 기록해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던 일기 형식의 비망록(備忘錄)이다.
정조실록 즉위년(1776년) 11월18일
공조참판 김종수를 불러 친히 깊숙이 감추고 있던 존현각일기를 꺼내 보여주셨다.
임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예로부터 내척(內戚)과 외척(外戚)의 화변(禍變)과 흉악한 무리의 역모(逆謀)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겪었던 일은 지난 사첩(史牒)에서 찾아보아도 어찌 비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김종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신들은 오히려 흉악한 역모가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는지 몰랐습니다. 지금 엎드려 일기를 살펴보니 그들이 궁궐의 안과 밖에서 화란(禍亂)을 만들어내고 거짓을 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하지 못할 짓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떨리고 간담이 서늘해집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흉악한 무리가 함부로 의심과 두려움을 자아내어 혹은 유혹하거나 협박하고 혹은 위태롭게 핍박하기도 했다. 마침내 재앙의 기미가 점점 급박해지자 반드시 먼저 동궁의 관리들을 제거한 다음 나를 해치려고 모의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두려움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하였다.
김종수가 말하기를 ‘분란(紛亂)의 발단이 외척에게서 일어났고 화란(禍亂)이 궁궐에서 선동되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흉악한 역적 무리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일기를 보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일의 전말(顚末)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손이 가는 대로 기록하고 실었기 때문에 말의 뜻이 많이 통하지 않는다. 대략 교정(校正)을 가해야 널리 퍼뜨려 보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정조실록 즉위년(1776년) 11월18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정적들은 왕세손을 모함하고 무고해 내쫓으려고 했고, 심지어는 동궁의 관리들을 매수하거나 제거한 다음 왕세손을 암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
그러한 정치적 핍박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왕세손 정조는 ‘넓은 도량’을 뜻하는 ‘홍(弘)’자를 취해 자호로 삼았다.
아마도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홍(弘)’자보다는 ‘굳센 의지’를 뜻하는 ‘의(毅)’자를 취해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③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 군사(君師) 자처한 제왕
그렇다면 정조가 왕세손 시절 만천하가 알 수 있도록 ‘홍(弘)’자를 취해 자신의 호로 삼은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먼저 ‘홍재’라는 호를 통해 왕세손 정조는 훗날 자신이 왕위에 오르더라도 ‘넓은 도량’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정적을 대하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홍재’라는 왕세손 시절 정조의 호를 볼 때마다 진실과 가면이 혼재되어 있는 불안한 그의 내면 심리가 보인다.
아무리 정조가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끝없이 자신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는 정적들에게 넓은 도량만 품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아직 인격적으로 완숙(完熟)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10대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 때문에 필자의 눈에는 이 호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쓴 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적들에 둘러싸여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던 정조가 살아남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한 일종의 처세술로 보인다.
우리가 성군의 표상으로 여기는 정조는 학자 군주였지만 또한 왕세손 시절부터 예리한 안목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치적 계책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던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세손 시절 호에 새긴 홍(弘)자의 뜻처럼 넓은 도량으로 정적들을 상대했다는 점이다.
정조는 임금이 되자 가장 먼저 자신이 일찍이 노론 세력이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예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연산군처럼 피의 복수를 가하지는 않았다.
물론 화완옹주,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치려고 모의한 역적들과 그 추종세력에 대해서는 일벌백계 차원에서 중형(重刑)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의 뿌리이자 최대 정적이었던 노론(老論)이라는 붕당에 대해서는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대우했다. 일찍이 왕세손 시절 ‘홍재’라는 자호에 담았던 뜻처럼 넓은 도량으로 정적인 노론의 신하들을 대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가 폭군 연산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오히려 세종과 더불어 조선사를 빛낸 최고의 성군으로 자신의 치세(治世)를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한국사의 역대 임금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조의 제왕론(帝王論)인 ‘군사(君師)’, 즉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독특한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학(혹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임금에게 죽을 때까지 학문적 자질과 능력을 요구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경연제도(經筵制度)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비록 신분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지존(至尊)이지만 조선의 임금은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학생에 다름없었다.
이때 임금은 제자였고 유학과 성리학에 능숙했던 엘리트 집단 출신의 신하들은 스승이었다. 유학과 성리학의 경전을 텍스트 삼아 높은 학문과 식견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조정의 대신들이 임금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거나 강의하는 것이 경연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 버렸다. 그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하며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쳤다. 경연의 자리에서도 시험 대상은 정조가 아니라 신하들이었다.
정조는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혹은 지적 능력으로 신하들을 다스린 임금이었다. 세종 이외에 이러한 임금은 없었다.
그것은 정조가 조정 안의 신하들은 물론이고 조정 밖의 유학자(성리학자)들을 압도할 만큼 높은 수준의 학문적, 지적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정조는 세상의 웃음거리이자 조롱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로마의 네로 황제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자신을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권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고의 시인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네로가 우쭐대면 우쭐댈수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거리로 삼았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 네로는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제왕으로 기록되었다.
무치(武治), 곧 칼과 군사로 사람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지만 문치(文治), 곧 붓과 글로 사람들을 감복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조는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와 지식인들이 스스럼없이 임금이자 스승이라고 여길 만큼 높은 학문과 깊은 식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정조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없다.
정조의 넓은 도량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부터 학문과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당대의 어떤 지식인이나 학자들 보다 높고 넓은 정신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정적들을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논리는 정적들을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것,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다.
연산군은 죄인의 아들로 더러운 피가 흐른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폭군이 되었고, 광해군은 정비(正妃)의 출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이라는 콤플렉스로 말미암아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지녔지만 암군(暗君)의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던 반면
정조는 자신을 죄인의 아들로 만든 정적들을 초월해 넓고 깊은 학문 세계와 높고 당당한 정신세계를 구축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스승이 제자를 대하듯 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듯 다스렸던 셈이다.
정조처럼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독서를 통해 넓은 학문과 깊은 식견을 갖추면서 독보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한 사람은 구태여 남과 자신의 우열을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콤플렉스가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조 나름의 독창적인 정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론(君師論)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까지 음해하고 암살하려고 한 정적조차 교화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한 높고 깊은 뜻이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자신이 호로 삼았던 홍재처럼 넓은 도량으로 자신에게 칼날을 겨눈 정적조차 가르침과 교화의 대상으로 볼 만큼 정조가 구축한 학문세계와 정신세계는 높고 거대했다.
정조가 도달한 높고 거대한 학문세계와 정신세계는 일찍이 어떤 임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개인 문집(文集)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긴 사실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송자대전(宋子大典)의 우암 송시열이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성호전집(星湖全集)의 성호 이익, 그리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다산 정약용에 견줄 만한 저술 분량이다.
더욱이 송시열과 이익은 83세까지 장수했고, 정약용 역시 75세까지 살았던 반면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단명(短命)했다. 송시열과 이익보다는 34년, 정약용보다도 26년이나 덜 살았다.
7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정조는 평생 500여권의 서적을 저술한 정약용을 넘어서는 서책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군사(君師)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단 한 사람의 제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④ 오직 인재만 취해 온 세상 협력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정조는 정적들의 암살 시도와 역모 사건에 시달려야 했다. 정조의 넓은 도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에 정적 노론 세력은 흉악무도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정조에 대한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즉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777년 7월28일과, 8월11일 밤 침소에까지 찾아든 자객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수포군에 붙잡힌 자객은 전흥문이라는 자였는데 심문 과정에서 그는 “홍삼범은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 홍술해와 홍지해를 섬으로 유배 보내고 다시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賜死)하자 임금을 시해하기로 결심한 다음 자객을 불러 모았다.”고 실토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체포해 조사하면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의 임금은 나라를 잘못 다스리고 있는 것이 많다. 새로운 임금을 추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반정 때와 같이 해야 한다.”
자신들이 속했던 노론의 전신인 서인(西人)들이 반정을 명분 삼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거머쥔 사례를 본받아 계획을 꾸미고 행동하려 했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피력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즉위 2년을 넘긴 1778년 7월18일에는 서명완의 고변으로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1782년(정조 6년) 11월20일에는 참언(讖言)으로 민심을 뒤흔든 술사(術士)들이 개입한 전국적 규모의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1785년(정조 9년) 2월29일에도 고변에 의해 역모를 꾸민 일당을 토벌하는 일이 있었고, 1786년(정조 10년)과 1787년(정조 11년) 역시 연이이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정조 스스로 임금에 오른 지 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국이 안정됐다고 말한 것처럼 1788년(정조 12년)에 들어와서야 즉위 초부터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암살 음모와 역모 사건이 잠잠해졌다.
한 해 건너 한 해 꼴로 일어난 역모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정조는 넓은 도량과 피의 복수 사이에서 고민하고 번뇌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은 성군과 현군 그리고 폭군과 암군 사이를 수없이 오고 갔을 것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12년 동안이나 암살과 역모 사건에 시달렸다는 것은 영조 재위 50여년 동안 조정 안은 물론이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노론 세력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사실을 반증했다.
정적들의 끝없는 도발과 저항 앞에 정조는 과거 연산군과 광해군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을 위기와 피의 복수를 하고 싶은 유혹의 순간을 숱하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정조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정책으로 정적들을 압도했다. 정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정조는 드디어 자신이 오랜 세월 구상했던 개혁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조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격적이고 과감한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남인(南人)인 번암(樊巖)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 것이다. 80년 만에 나온 남인 출신의 정승이었다.
정조실록에도 채제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임명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정조의 행동은 숙종 이후 80여년 가까이 조정에서 배척당한 남인을, 노론을 견제할 정치세력이자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세력 판도의 변화와 더불어 정조는 서경(書經)에서 또 다른 뜻을 취해 자호를 지었다.
재위 14년이 되는 1790년 자신의 침실에 새로이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는 탕평(蕩平)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었다.
탕탕평평은 유학의 3경(三經) 중 하나인 서경 홍범(洪範)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無偏無黨, 王道蕩蕩.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어느 한쪽 당파(黨派)에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넓고 넓을 것이다.
無黨無偏, 王道平平.
어느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어느 한쪽 의견에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고 평탄할 것이다.
無反無側, 王道正直.
항상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면 왕도(王道)가 바르고 곧을 것이니,
會其有極, 歸其有極.
그것이 모여 극(極)이 있고 그것이 돌아와 극(極)이 있을 것이다.
정조는 평소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글로 적어 기록해 두었는데, 이 글을 모아 엮은 것이 일득록(日得錄)이다. 여기에는 제왕이면서 철학자였던 정조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필자는 일득록을 처음 읽고 난 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치열한 사색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최고의 명저이자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견줄만한 책이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정작 명상록은 유명한 반면 일득록은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니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이 일득록의 정사(政事)편에서 정조는 침실의 이름을 탕탕평평실이라고 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경연의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롭게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탕평(蕩平)이라는 두 글자는 곧 우리 성조(聖祖: 영조) 50년 동안의 성대한 덕업(德業)이다.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는 오직 선열(先烈)을 추념(追念)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과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그리고 신 맛과 짠 맛 또 관대한 것과 엄격한 것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세상으로 하여금 함께 협력하고 공경하여 모두 대도(大道)에 이르도록 해 영구히 화평(和平)의 복을 누리게 할 것이다.
특별히 당(堂)에 편액(扁額)을 거는 이유는 대개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내가 표준(標準)을 세운 뜻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⑤ 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탕평정치(蕩平政治)는 정조가 아닌 영조 때 처음 나왔다. 이때 탕평책의 핵심은 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이것은 한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면 반드시 대등한 직위에 상대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는 인사정책이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나쁘게 말하자면 붕당의 머리수를 맞춰 채우는 형식적인 정책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영조 때 이 정책은 노론의 세력을 더욱 키워줬을 뿐이다.
남인을 등용하면서 노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등용하면서도 노론을 등용한다면 다른 당파와 비교해 노론은 2∼3배 이상의 세력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조정을 장악한 노론이 자기 당파의 사람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요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기 이전 80여년 동안 남인 출신으로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영조 시대 내내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이 얼마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정조는 영조 시대의 탕평책을 획기적으로 개혁한 새로운 탕평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탕평책의 핵심 취지와 기본 철학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붕당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 있는 인재를 취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조 탕평책의 근본정신이었다.
영조 시대와 다른 정조 시대 탕평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붕당을 초월해 그동안 조정에서 배척당한 채 재야에 묻혀 있던 인재들을 과감하게 중용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인 실학파의 거목인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 금대(金帶) 이가환이다.
공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던 이가환은 특히 정조 개혁정치의 파트너였던 남인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실질적 리더였다.
이가환은 이익의 가풍(家風)과 가학(家學)에 힘입어 서양의 학문 및 과학기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혜환거사 이용휴를 따라 고문체를 모방하거나 답습하기 보다는 기궤첨신(奇詭尖新)의 새로운 문풍(文風)을 개척하는 등 일세를 풍미하고도 남을 천재였다.
이 때문에 노론의 간관(諫官)들로부터 서학(西學)의 수괴이자 괴벽한 문체를 일삼아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난적(亂賊)이라는 비난과 공격을 수없이 받았다.
그런데 이때마다 정조는 이가환과 같은 사람이 기이한 학문과 괴이한 문장에 빠진 까닭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당파가 다르다고 배척해 올바르게 재주와 능력을 쓸 기회조차 주지 않은 조정 혹은 집권 세력에게 잘못이 있다고 두둔했다.
이와 관련한 기록이 정조실록에 남아 있다. 당시 정조는 노론 당파의 홍문관 부교리 이동직이 이가환을 탄핵하자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신하들에게 일찍이 자신이 자호로 삼은 탕탕평평실의 정신과 철학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일깨워 주었다.
정조실록 16년(1792년) 11월6일
저 가환(家煥)은 일찍이 좋은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100년 동안 조정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알이나 꿰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초야에 묻혀 지내는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비분강개한 언사였고, 뜻을 함께 해 모이는 사람들은 해학을 일삼고 괴벽한 행동을 하며 숨어 지내는 무리였다. 주변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말은 더욱 치우치거나 비뚤어진 것이고, 말이 치우치고 비뚤어질수록 문장 역시 더욱 기궤(奇詭)해진 것이다.
그래서 다섯 색채로 수놓은 아름다운 문장은 당대에 빛을 본 자들에게 양보한 채 굴원의 이소(離騷)나 구가(九歌)에 가탁(假託)해 스스로 노래한 것인데, 그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복을 모아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을 모범으로 삼고 성대한 공적과 신이한 조화의 단서를 남긴 선왕을 계승하여 특별히 연침(燕寢)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걸고 ‘온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미친다’는 뜻의 ‘정구팔황(庭衢八荒)’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여덟 개의 창문 위에다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살피면서 끝없는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이에 가시덤불 길에 놓여있고 누더기를 걸치며 사는 사람들을 초야에서 뽑아 조정으로 불러 올렸다. 가환은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대는 가환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가환은 바야흐로 골짜기로부터 나와 교목(喬木: 곧고 굵으며 높이 자란 나무)이 된 것이고, 부패한 것이 변화하여 새롭게 된 것이다.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찌하여 점차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근심하는가.
가환의 재주가 우둔(愚鈍)하여 사흘 동안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들과 손자가 또한 어찌 번번이 반드시 양보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소리를 융성하게 드러내지 않겠는가.
(정조실록 16년(1792년) 11월6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초야와 시골에 묻혀 있는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주와 역량을 올바르게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조정과 집권 세력의 의무라는 얘기다.
이렇듯 영조의 탕평책이 당파적 안배를 고려한 소극적인 정책이었다면 정조의 탕평책은 당파를 초월해 조정 안팎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해 중용하는 적극적인 정책이었다.
정조 탕평책의 두 번째 특징은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붕당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하여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는 탕탕평평의 철학은 붕당의 입장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재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낳았다.
그것이 바로 초계문신이다. 초계(抄啓)란 본래 의정부(議政府)에서 학문적 재능을 갖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제도다.
그런데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가운데 참신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해 초계문신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규장각(奎章閣)에서 학문 연마 및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월 두 차례의 구술고사와 한 차례의 필답고사를 통해 성적을 평가하고 상벌을 내렸다.
이곳을 통해 장차 조선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 개혁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했던 정조는 몸소 초계문신들에 대한 강론에 나서는 한편 직접 시험 감독이 되어 채점을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규장각이라는 공간과 초계문신이라는 제도를 통해 정조는 한 사람의 스승이 되어 제자나 다름없는 젊은 개혁 인재들을 가르쳤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규장각은 국왕과 조정의 중신 그리고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토론하고 나라의 정책과 발전 방향을 의논하는 실질적인 정치의 중심무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조 즉위 6년째인 1781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20여년 동안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료들이 13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조가 길러낸 개혁 관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정조의 뜻대로 새로운 정치세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 초계문신 가운데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한 최우등 개혁 인재였다. 특히 정조는 붕당을 초월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해 중용한다는 탕탕평평의 원칙에 따라 초계문신을 선발했기 때문에 남인 출신의 정약용은 물론 정조 시대 내내 최대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서영보, 노론 시파의 김조순, 소론의 서유구 등 다양한 당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조 탕평책의 세 번째 특징이자 가장 혁신적인 정책은 서얼허통(庶孼許通)이다.
조선 시대에 차별과 배제는 붕당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정작 더 중요하고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는 신분 특히 서얼에 대한 차별과 배제였다.
정조는 붕당뿐만 아니라 신분과 출신 배경을 초월해 인재들이 나라와 백성에게 보탬이 되도록 자신의 재주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조는 즉위 초인 1777년 3월 21일에 이조와 병조에 명을 내려 서얼 출신의 관직 진출을 위한 절목(節目)을 상세하게 마련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들 서류(庶類)도 나의 신하요 자식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또한 그들이 자신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 또한 과인의 허물이 된다.”
이 서얼허통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가 다름 아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서얼 출신의 규장각 4검서관이다. 1779년(정조 3년) 이덕무를 시작으로 차례로 검서관에 발탁된 이들 4검서관은 정조 시대 문치와 문예부흥에 큰 공을 세웠다.
연암 박지원은 당시의 일을 가리켜 뛰어난 학문과 높은 식견에도 불구하고 여항(閭巷)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일생을 마칠 뻔한 이들이 성군을 만나 크게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고 했다.
비록 탕평정치는 정조가 사망한 후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와 같은 집권 노론 가문의 세도정치(世道政治)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탕탕평평실이라는 자호에 새긴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을 협력하게 하겠다는 그 뜻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이자 리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이라고 하겠다.
⑥ 달빛이 비추는 개울은 만(萬)개지만 밝은 달은 하나일 뿐
정조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그리고 수상록(隨想錄)인 일득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춘저(春邸: 동궁)에 있을 때 연침에다가 홍재라고 편액을 걸었다. 이것은 대개 군자는 도량이 넓고 마음이 굳세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문 위 가로 댄 나무에다가 탕탕평평실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또 근래에 와서는 벽에 만천명월주인(萬千明月主人)이라고 적어 놓았다. 바라건대 여러 신하들이 그 속에 담긴 나의 은미(隱微)한 뜻을 알았으면 한다.”
(일득록 훈어訓語)
여기에서 정조가 말한 그 속에 담긴 은미한 뜻이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홍재전서 / 만천명월주인옹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은 말한다.
(…)
달은 하나이고 물의 종류는 만 개나 된다. 그렇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때 앞개울도 달이고 뒷개울도 달이다. 그래서 달과 개울의 수가 동일하게 된다. 개울이 만 개면 달 역시 만 개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하늘에 있는 달은 진실로 하나일 뿐이다.
(…)
나는 수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다.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 무리지어 다니며 재빠르게 움직이며 오는 듯한 자도 있고 가는 듯한 자도 있었다.
형상이 안색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르고, 통하는 자와 막힌 자, 강인한 자와 유약한 자, 멍청한 자와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은 자와 천박한 자, 용감한 자와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와 교활한 자, 미친 자와 성급한 자, 모난 자와 원만한 자, 탁 트여 통달한 자와 무게가 있는 자, 함부로 말하지 않는 자와 말을 꾸며서 잘하는 자, 험악하고 드센 자, 멀리 바깥에 있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질에 힘쓰는 자 등 그 유형을 따로 구분한다면 백 가지 천 가지가 될 것이다.
처음 내가 그들을 내 마음으로 미루어 보고, 나의 뜻으로 믿어 보고, 재주와 역량을 시험해 돌아보고, 화로 속에서 주조하듯 단련시키고, 일어나도록 북돋아주고, 일을 만들도록 진작시키고, 바로 잡으려고 규제하고, 어긋난 것은 교정하여서 도와주고 곧게 한 것이 마치 맹주(盟主)가 규장(奎章)으로 제후들을 모아 다스리는 듯했다. 그 응대하고 수작하고 오르고 내려가는 과정에 피로함을 느낀 지 어언 20여 년이나 되었다.
근래에 다행하게도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이치를 깨우치고 또한 사람은 각자 그 생김새에 따라 다루어야 한다는 기술을 얻게 되었다. 대들보와 기둥은 그 용도에 맞춰 준비하고, 오리와 학은 그 태생에 따라 살게 하여 각각 사물의 이치에 맞게 대응하고 이치에 맞춰 순응(順應)하였다.
단 그 가운데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며, 그 선한 것은 드러내고 그 악한 것은 숨겨주고, 그 좋은 것은 안정시키고 그 잘못한 것은 제압하고, 그 큰 것은 나아가게 하고 그 작은 것은 포용하였다. 그 뜻을 오히려 높게 사고 그 재주를 뒷전으로 미루어 양 극단을 잡고서 중도(中道)를 취하였다.
(…)
그런 다음에 두루 통달한 자를 대하면 규모가 크고 주밀하게 살피고, 꽉 막힌 자를 대하면 여유를 가지고 너그럽게 행동하고, 강한 자를 대하면 부드럽게 하고, 유약한 자를 대하면 강하게 하고, 멍청한 자를 대하면 환히 밝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대하면 두루 슬기롭게 하고, 협소한 자를 대하면 넓게 하고, 천박한 자를 대하면 깊게 하였다.
(…)
모가 난 자는 수레바퀴처럼 둥글게 대하고, 원만한 자는 규각(圭角)처럼 모나게 대하고, 통달하여 탁 트인 자에게는 나의 깊은 뜻을 보여주고, 말과 행동에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마음을 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에게는 민첩하게 행동하도록 경계하고, 말을 꾸며서 하는 자에게는 물러나 드러내지 않도록 누그러뜨리고, 험악하고 드센 자는 산과 못처럼 포용하고, 멀리 바깥에 있는 자에게는 옷자락과 장막처럼 감싸주고, 명예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실질에 힘쓰도록 권유하고, 실질에 힘쓰는 자에게는 두루 지식에 통달하도록 권한다.
(…)
태극에서부터 미루어 가다 보면 그것이 각각 나뉘어서 만물(萬物)이 된다. 그 만물에서부터 궁구해 오다 보면 다시 되돌아와 하나의 이치(一理)로 귀결된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달은 수없이 많은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참으로 밝다. 그 달이 아래를 환하게 비치면 물은 그 빛을 얻게 된다.
용문(龍門)의 물은 넓고 빠르고, 안탕(雁宕)의 물은 맑아 잔물결이 일고, 염계(濂溪)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푸르고, 무이(武夷)의 물은 거세게 흘러 소리가 나고, 양자강(揚子江)의 물은 차갑고, 탕천(湯泉)의 물은 따뜻하다. 강물은 담담하고 바닷물은 짜다. 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다. 이렇듯 물은 제각각이지만 달은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춰준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머무르면 달도 함께 머무른다.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돌아 흐르면 달도 함께 돌아 흐른다. 그러나 그 물의 큰 근본은 모두 달의 정기(精氣)이다.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서 그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사람들의 형상이고,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만 개의 개울을 밝게 비춘 달에 태극의 신비로운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또한 그 달빛이 반드시 비춰 포용하는 것을 만약 태극의 테두리로 헤아리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물속에 뛰어들어 달을 잡아보려고 수고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임도 알고 있다.
이에 마침내 내가 한가롭게 거처하는 곳에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이라고 적어 자호(自號)로 삼았다. 때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 2월3일이다.”
(홍재전서 만천명월주인옹자서)
모든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답게 철학적 어법을 빌어 달(月)과 개울(川)에 비유해 백성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국정과 세상의 운영 원리를 해석한 뛰어난 작호기(作號記)다. 군사(君師)라는 호칭에 걸맞는 정조의 당당한 기상과 고고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다.
앞서 소개한 대로 탕탕평평실이 붕당과 적서 차별 등 양반 지배계층의 폐단과 문제를 시정하고 개혁하겠다는 뜻과 철학을 담고 있다면, 필자가 보기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에는 노비와 같은 최하층민이나 가난하고 힘없는 소상인 등 피지배 계층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까지 해결하겠다는 정조의 뜻과 의지가 담겨져 있다.
하나의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는 것처럼 한 사람의 제왕으로서 만백성에게 두루 은택(恩澤)을 베풀겠다는 정조의 뜻과 의지가 반영된 대표적인 개혁정책은 다름 아닌 노비제도의 혁파와 신해통공(辛亥通共)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임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은택을 베풀어야 할 민(民) 즉 백성의 범주에 노비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비를 하나의 재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후손에게 토지와 재물을 상속하듯 노비 또한 물려주었다. 더욱이 노비는 하나의 상품처럼 매매되기도 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실제 (노예는 제외하고) 시민권을 가진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제한된 민주주의였던 것처럼 유학에서 정치의 대의명분으로 주창한 민본(民本)에 노비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조는 노비 역시 자신의 신민(臣民)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고 역설했다. 정조의 이러한 사고는 유학의 민본주의 사상 보다 한발 더 나아간 근대적 개념의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해통공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상업 특권과 횡포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던 소상인, 행상(行商) 그리고 노점상 등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해주는 경제조치였다.
통공정책은 정조 개혁의 선봉장이나 다름없는 채제공이 주도했는데, 당시 그가 이 정책에 크게 반발해 ‘통공 정책을 폐지하라’고 시위를 한 시전 상인들에게 한 말은 정조의 인본주의 철학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다.
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3월10일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과 도성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나라의 백성이다. 행상이든 점포를 갖고 있는 상인이든, 또 물품이 많든 적든 장사를 하는 행위는 모두 떳떳하다.
그런데 시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자기 물건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내쫓아 도성 안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도 백성이고 저 사람도 백성인데, 어찌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3월10일)
양반이나 특권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주는 임금이 아니라 일반 백성 심지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노비에게까지 은택을 베푸는 제왕이 되겠다는 뜻과 철학은 정조 재위 24년 동안 여러 가지 개혁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정책은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끊임없는 저항과 반발에 부딪쳤다. 그래서 개혁은 부분적인 성과를 내는데 그치거나 혹은 유명무실해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좌초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까닭에 정조는 즉위 이후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정책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강력한 뜻과 의지를 담아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지었을 것이다.
만백성의 주인이자 보호자로서 그들에게 혜택이 미치는 일이라면 결코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발에 양보하거나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언이었다.
이렇듯 정조가 말년(1798)에 자호로 삼은 만천명월주인옹의 뜻을 보더라도, 그의 개혁정치가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조의 개혁정치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 속에 담겨있는 ‘인본주의’ 철학만은 결코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⑦ 해와 달의 빛이 한 사람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간다
앞서 언급했지만 정조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홍재전서의 편찬 작업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제1차는 정조가 살아있던 1799년(정조 23년) 12월 이루어졌다.
1798년 가을 정조는 규장각의 각신인 서호수에게 자신의 어제(御製)를 편찬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호수가 사망하자, 다시 어제(御製)의 편집과 교정 작업의 지휘를 서영보에게 맡겼다.
그리고 1799년 12월21일 규장각에서는 2본의 필사본을 완성해 정조에게 올렸다. 이때 정조가 자신의 어제 필사본에 붙인 이름이 홍우일인재전서(弘于一人齋全書)였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정조의 저작집 이름은 홍재전서다. 이렇게 된 까닭은 정조가 사망한 직후에 규장각에서 다시 정조의 어제(御製)를 정리해 편찬하는 2차 작업을 하여 이듬해(1801년. 순조 1년) 12월11일 완성된 필사본을 순조에게 올렸고, 그 이름을 동궁(왕세손) 시절 정조가 처음으로 자호(自號)한 홍재(弘齋)를 취해 홍재전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조가 생전에 간행한 자신의 문집에 이름 붙인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는 그가 사용한 마지막 호라고 할 수 있다.
이 호는 상서대전(尙書大傳) 우하전(虞夏傳)에 나오는 일월광화(日月光華) 홍우일인(弘于一人)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해와 달의 광화(光華; 빛)가 한 사람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간다는 뜻으로 정조는 이전 만천명월주인옹에서 달을 빌었듯이 여기에서는 달은 물론 해까지 빌어 밤낮없이 만백성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제왕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밝혔다.
당시 정조는 3단으로 된 보관함을 따로 만들어 홍우일인재전서라고 이름 붙인 문집을 간직했고, 다시 여기에다가 한 편의 글과 명문(銘文)을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홍재전서 홍우일인재전서의 장명(欌銘) 병서(幷序)
홍우일인재전서는 곧 나의 저술(著述)이다. 나는 세 살 때부터 글을 배워서 대강 군자의 대도(大道)를 들었지만 말을 꾸미거나 글을 잘 짓는다고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근본이 되는 의론을 주고받거나 나랏일을 경영하면서 그 언어를 형용(形容)하고 그 명성과 공적을 꾸미고 다듬다보니 공교롭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교로워졌다. 이것은 어찌 보면 내가 문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학문은 노(魯)나라의 공자와 추(鄒)나라의 맹자를 종주(宗主)로 삼고, 정치는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를 숭상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일컬어 덕목(德目)으로 삼고, 예의와 염치를 일컬어 세속의 규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글과 문장은 의사(意思)를 전달하면 그뿐이었다.
본래 무엇을 모으거나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흩어져 없어지더라도 내버려 두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문장을 이루는 것이 적지 않았다. 일찍이 재잘거리거나 흥얼대거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풍속이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 마침내 시(詩)의 초고(草稿)는 불살라버리고 문장만 몇 편을 남겨놓았다.
내각(內閣; 규장각)을 설립하고 관청을 세워서 춘저(春邸; 동궁) 시절의 작품을 취해 1집(一集)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름을 좋아하여 자신이 죽고 난 뒤 마름을 가지고 제사 지내달라고 한 굴도(屈到)와 양조(羊棗: 대추)를 좋아한 증석(曾晳)처럼 다만 한 차례 제삿밥을 올리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종묘나 사직단에 올리는 제기(祭器)나 조정에서 임금을 배알할 때 입는 관복(官服)도 원래 그 시작은 들판의 나무나 누에고치에서 나왔다.
여기에 실린 나의 글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른바 2집(二集), 3집(三集), 4집(四集)은 곧 각신(閣臣)이 저보(邸報)에 반포한 것과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흩어져 있던 것을 유형별로 모으고 부목(部目)을 나눈 것이다.
내가 일찍이 책상을 가깝게 두지 않고 하찮게 여긴 것이 지금까지 20여 년이나 되었다. 또한 미처 보고 듣지 못하거나 기록하여 싣지 못한 것은 나의 성급한 성격 탓에 문자로 세상을 희롱하거나 때때로 괴기(魁氣)를 부린 것이 있어서 그 글을 묶어둔 보자기를 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대면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약간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의리가 더욱 밝아지고 규모가 더욱 정해지면 비로소 함께 편찬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겨울에 각신들이 유형별로 나누고 부목을 취한 초본을 또한 이미 정리하여 120권을 만들고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껴서 올렸는데 각각의 체제가 잘 구비되고 보존되어 있었다.
대악(大樂)을 완성하려면 한 가지 음악만 취해서는 안 되고, 훌륭한 요리를 만들려면 한 가지 맛만 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회옹(晦翁: 주자)이 스스로 목재고(牧齋稿)를 편찬한 뜻이 아니겠는가.
스승이 있으면 도(道) 역시 있다는 말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마침내 종이를 발라 만든 보관함에 넣고 쌓아 두게 하였다. 3층으로 된 보관함의 넓이는 겨우 세 권의 책을 넣을 수 있다. 길이 역시 넓이와 비슷하다.
(…)
옛날 대부(大夫) 거백옥(蘧伯玉)은 자신의 잘못을 줄이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나이 50세가 되자 지난 49 년간의 잘못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명년(明年)이면 내 나이 50세가 되는데, 만약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면 이 문집을 다시 고쳐서 편집해야 할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가운데 제각각 다른 것을 의뢰하는 것은 이미 의혹이 없다.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현혹되지 않고, 용기가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군자의 도리 세 가지란 바로 자신의 도(道)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총명함은 젊은 시절에 미치지 못하고 학문과 지식의 조예는 초심(初心)에 부끄러움이 있다. 이러하니 내가 어찌 여러 가지 학문을 높이 쌓아 우뚝하게 자립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내가 상제(上帝)를 대해 그 복을 백성들에게 내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어렵고 큰일을 이어받아 부지런히 백성을 보호하고 긴급하게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구하였다.
어진(仁) 것이 아닌 집에는 거처하지 않고 의(義)로운 것이 아닌 길은 밟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문자로 기록 하였으니, 내 몸 속의 피가 흘러나온 것임을 자연히 속일 수 없다.
(홍재전서 홍우일인재전서의 장명欌銘 병서幷序)
그리고 정조는 이 글의 마지막에 명문을 새겨 성군(聖君)과 현자(賢者)의 도리와 단서를 터득해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일생을 노래했다.
임금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 군주 정조의 자부심과 더불어 그가 도달했던 높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내 일찍이 듣건대 /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다 /
풍운(風雲)의 바깥에서 활달하게 움직이고 /
우주 가운데 충만(充滿)하여 /
탁월한 그 문장이여 /
텅 비고 넓은 그 공정함이여 /
아득히 깊고 엄숙한 곳에 올라 바라보면 /
권세(權勢)란 대개 만물을 변화시키는 봄의 공교로움과 비슷하네 /
내가 오로지 정밀하고 깊고 넓게 생각해 모으고 머무르니 /
비록 감히 도통(道通)의 전수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
경서(經書)를 씨줄로 삼고 사서(史書)를 날줄로 엮어 /
생각하건대 성군(聖君)인 복희씨, 신농씨,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과 성현(聖賢)인 공자, 맹자, 주자의 단서와 여분을 스스로 터득한 사람은 /
구태여 묻지 않더라도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