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8일(주)
* 시작 기도
주님...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굴려지고 그 위에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가 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두 여인은 두려운 떨림과 끌리는 매혹으로 주를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열한 제자는 두 여인의 말을 듣고 갈릴리로 가서 주를 뵈었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의심병은 내 안에도 있습니다.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순간순간 솟구쳐 오르는 의심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자상하시면서도 엄중하신 그 말씀에 아이의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사 나를 도와 달라고 했던 것처럼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은 주의 날입니다.
공동체로 함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주님의 은혜의 빛이 넘치게 하시고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0:1-16
제목 :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는 큰 비밀을 알게 하심.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 나의 묵상
주를 믿는 작은 자들 곧 존재감이 없이 아주 미미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들은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을 범죄케 하는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을 빼거나 자르는 것이 성한 몸으로 불이 꺼지지 않는 곳에 가는 것보다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그래서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고 상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소금을 가지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신다.
한편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의 유대 지경으로 가셨다.
그곳에서도 전과 같이 그들을 가르치셨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시험하기 위하여 묻는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말하였느냐고 한다.
그들은 율법에 있는 대로 이혼 증서를 써주고 버리라고 하였다고 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모세가 말한 진의를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사실 모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창조 때에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그래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런즉 둘은 따로가 아니라 한 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와서 제자들이 이 일에 대하여 다시 물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 역시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가면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자기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께서 만져주시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들을 꾸짖었다.
이를 보신 주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절대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서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주셨다.
(9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가리켜 우리 기독교는 이혼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건 곧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 곧 인간과 종교 나아가 도덕과 윤리에 대한 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13-16절에서는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오지 못하도록 막아선 어린 아이들의 것이란다.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시면서 어린 아이를 품에 안으시고 또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도 해주신다.
그런데 10장 서두에 나오는 이혼에 관한 이야기 앞에도 어린 아이 이야기를 하신다(9:33-37).
이혼이라는 주제를 말씀하시면서 그 앞뒤에 어린 아이 이야기를 마치 샌드위치 빵처럼 갖다 붙여놓으셨다.
그것을 일컬어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라 한다.
이는 샌드위치 기법이라고도 하는데 내용물을 두 개의 빵이 앞뒤로 덮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덮고 있는 두 개의 빵이 그 내용물을 더 풍성하게 설명을 해주거나, 아니면 내용물이 두 빵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그런 구조이다.
오늘 본문은 내용물이 이혼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앞뒤로 덮고 있는 것이 어린 아이들의 비유다.
앞에 있는 어린 아이 비유(막 9:33-37)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한 것에 대한 어린 아이 비유이다.
여기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한 것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쟁은 누가 더 훌륭한 자인지, 누가 더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는지, 누가 더 선한 삶을 살았는가를 겨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역시 이 땅에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똑같은 경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지, 누가 더 전도를 많이 하는지, 누가 더 열심히 기도하는지,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봉사나 착한 일을 많이 하는지와 같은 그런 선한 경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 받은 큰 상급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우리 어른들의 극히 이기적인 탐심의 발로이다.
여기에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투입시킨다.
그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란다.
이것이 샌드위치 앞에 있는 빵이다.
또한 뒤에 있는 빵에서도 어린 아이가 등장(막 10:13-16)한다.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누구도 결단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것은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거나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협박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어떤 자들인가?
때로는 아이들이 최고로 영악하고 어른들 머리꼭대기에서 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어린 아이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가 크고 작은가 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사는 곳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딱지나 구슬을 좋아한다.
그것은 금은보화를 좋아하는 어른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런 금전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사는 그들의 순수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는 크고 작음의 비교경쟁을 하지 않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어린 아이의 삶을 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오늘 본문 13-16절을 보면 어린 아이는 다 복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오직 한 곳 15절에 나오는 어린 아이는 단수로 되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든지 않는 자는’ 여기서 어린 아이(파이디온)는 유일하게 단수로 쓰였다.
이것은 곧 그 어린 아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받들어 섬기는 자가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누구라서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똑같이 살 수 있겠는가?
실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막 10: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이혼의 문제 역시 그렇다.
물론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육신의 부부를 이루시고 또한 가정을 이루셨다.
하지만 그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결코 이 땅에서의 모든 부부의 모본은 아니다.
이 땅에서의 부부의 모본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단지 천사들처럼 산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완전한 신랑 되신 주님과만 관계할 뿐이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에베소서 5장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다.
에베소서 5장의 남편과 아내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 땅의 부부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랑이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다.
이런 영원히 완전한 관계를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결혼을 하라, 하지마라는 등의 규범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주님이 창조하신 이 땅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윤리 도덕적인 차원 안에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고 보살피는 것이 맞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날까지 함께 해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규범으로 받을 때 그것은 곧 사랑이 아니라 율법이 되고 만다.
만약 이혼이 율법이라면 그것을 어긴 자들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렇기에 그런 것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곧 교회임을 알고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를 더 잘 살펴서 주님 앞에 복종하는 자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이다.
그것은 나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짜 주님을 아는 영생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큰 비밀이라고 하였다.
그 비밀을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철저히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주를 위하여 살면 그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 역시 지극히 이기적인 어른의 사고였습니다.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이며 그 은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에 연합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아 들어가는 곳입니다.
나의 어떤 것도 거기에 가입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인간적 열심을 부추기고 그것으로 그 나라에서 더 큰 상급을 얻을 수 있다는 괴물을 만들지 않았는지요.
상급은 다른 이들과의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상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얻는 완전한 구원 곧 영생입니다.
그보다 더 큰 상은 있을 수 없음을 아오니 이 땅에서부터 그 영생을 누리는 자로 서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사이에 그 무엇도 틈입하지 못하도록 나를 붙드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