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전주이씨(全州李氏) 진남군파 사천군 종가
정종 아들 이종생 진남군파 열어 진례군 이형 혼맥으로 전라도 인연 광주·창평·장성에서 가통 이어 이진환가옥 등 유산 보존 계승 힘써 |
고유 문화 품고 은둔한 조선 왕족 후예 장성 이진환가옥 사랑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2호). 보호수로 지정된 영산홍, 소나무, 주목이 둘러싼 초가로서 남양초당, 야은재라 불렸다. 황룡강이 흐르는 전남 장성의 장성댐 아래 백계리에는 강 양쪽으로 남양마을과 야은마을이 마주보고 있다. 제갈량의 초당과 같다고 남양초당이라 부른 종가 사랑채에는 선대 조상의 당호 ‘야은재’ 현판이 걸려 있다. 마을이름과 지명이 될 정도로 많은 사연과 스토리를 품고 있는 장성 전주이씨 진남군파 사천군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역성혁명으로 개국한 왕가의 후예 전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잇고 있는 전주이씨는 신라 사공을 지낸 이한을 시조로 모신다. 시조 18세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다시 원산으로 일가를 이끌고 이주해 고려엔 의주병마사가 되고, 원나라엔 여진족 통치 다루가치가 돼 동북면 북방의 세력가문으로 성장 토대를 마련했다. 21세 이자춘(1315~1360)은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워 동북면 14주와 함흥 이북 땅을 회복에 기여하고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원계(완풍대군)와 이성계(조선 태조) 형제가 홍건적, 왜구 등 수많은 외침을 물리친 명장이다. 22세 이성계(1335~1408)는 낡은 폐습과 외적의 침략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걱정하고 명과의 전쟁을 반대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았다. 토지개혁과 과전법 등 개혁이 반발에 부딪치자 역성혁명으로 공양왕에게 선양받아 조선을 개국해 제1대 국왕으로 6년간 조선을 통치했다. 한양으로 천도를 강행하고, 관제 등 제도 정비, 조선경국전 등 법전 편찬·반포와 같은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경학 능통한 이종생 진남군파 열어 태조의 둘째아들 이방과(1357~1419, 정종)는 온화하고 지략 뛰어난 용장으로 부친과 함께 왜구 토벌 등 용맹한 전투 공적으로 익위공신에 책록됐고, 조선 개국을 도와 영안군에 책봉됐다. 1398년 태조의 양위로 제2대 국왕에 등극했다. 집현전을 설치하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와 승정원으로 개편했으며,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해 고려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들을 환원시켰다. 동생 정안군의 창업 대의에 공감하며 즉위 2년만에 직접 추천하여 태종에게 왕위를 선양했다. 24세 이종생(1393~1470)은 정종의 여섯째 아들 진남군으로 청렴하고 학덕 높아 왕실종친을 대표하는 문사로 알려졌다. 세종이 설치한 종학(왕실학교)의 종학유사로 종친을 규찰했고, 경서에 능통해 사응원·장원서 제조를 역임하고, 가덕대부에 올랐다. 그가 진남군파를 열었다. 그의 둘째아들 이형(1426~1498)은 진례군으로 쾌활하고 도량이 탁월하여 배우기를 즐겨하며 효행과 우애로 알려졌다. 벼슬은 정의대부, 행경상병마절도사, 이조참판에 올랐다. 류복강의 딸 문화류씨와 혼인해 처가인 전라도 광주와 연을 맺었다. 아들 백성군 이원이 광주에서 병을 얻었을 때 돌보기 위해 광주로 가기를 청해 역마와 포목을 하사받았다. ◇가옥·문서·요리법 보존 전승 황산군 이문(1450~1489)은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학업에 충실해 경서에 능했으며 황산수에 책봉됐다. 그의 셋째 수창군 이평의 아들이 이헌국(1525~1602)이다. 이헌국이 문과 급제해 도승지, 의금부사를 거쳐 좌의정에 오르며 완성부원군에 군봉되면서 3대에게 벼슬이 더해져 이문 역시 황산군으로 책봉됐다. 이문의 장남은 회인수 이정이고, 이문의 둘째아들 이탑(1483~?, 사천군)이 사천군종가를 열어 번성하며 현재에 이른다. 사천군 6세 이억민(1617~1657) 때 창평에서 장성 진원으로 이거했고, 14세 이용중(1841~1919, 호는 야은재)이 현재의 종가인 장성읍 백계리 남양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용중은 지혜로운 관리로서 무과에 급제해 선략장군 행용양위부사과, 사헌부감찰, 진도진관병마절제도위, 해남현감을 역임하고 남양촌에 야은재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기삼연 의병장이 창의할 때 900량의 군량과 자금을 제공했고, 고종임금이 승하했을 때는 야은마을 언덕 북쪽 망곡단에 올라 통곡했다고 망곡단비에 전한다. 15세 이치홍(1873~1951, 호는 시은)은 숙릉참봉을 역임하고 남양초당에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썼고 시은집을 남겼다. 종가는 동의보감, 본초강목, 변증기문, 사요 등 고서와, 무과 홍패·교지 등 고문서를 보존하며, 화전놀이 음식(족편, 우렁쉥이꽂이, 약섭산적)과 150년 된 씨간장 등 내림음식을 전승하고 있다. 남도일보 입력 2021.07.22 18:02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야은재 현판. 야은재는 이용중의 당호로서 남양마을에 있는 초당이며 황룡강 건너의 마을 이름이 이 가옥에서 비롯된 야은마을이다. 종가 안채와 마당 그리고 중문간채 곳간채. 종가 곳간채는 세칸으로 우측 칸이 곡식을 보관하는 거대한 뒤주 기능을 했다고 종부 김병희씨가 말했다. 고조부 이용중이 사용한 밥그릇을 보존하고 있는데, 크기가 두배 이상 큰 이유는, 현감시절 일하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현감은 감기도 안걸린다며 밥맛 없어 남기기만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그 뒤부터 밥그릇을 키우고 항상 밥을 남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랑채인 남양초당 전경 안채로 통하는 쪽문. 이 집안 여인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안채문이다. 사랑채 전경. 삼면의 풍광을 누릴 수 있게 한쪽은 정자 구조로 만들었다. 뒤로는 대숲을 배경으로 영산홍, 자산홍, 목단화가 펼쳐지고, 옆으로는 솔향을 풍기는 노송 그늘이 우거졌다. 앞으로는 황룡강 고수부지 기름진 농토가 한눈에 보이지만 주목을 비롯한 정원수들이 바람막이가 돼 준다. 대문과 문간채. 이진환가옥은 해남현감을 역임한 이용중이 회계사 강당건물을 이건해 야은재라 칭했다고 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해 도지정 문화재 자료로 승격됐다. 가옥 곳곳에서 현감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데, 현감 재직 시 재치있는 민원 처리 일화가 집안에 전해진다. 전국 유림의 자녀들이 대흥사에 공부하러 몰려들었는데 주지스님은 철없는 도련님들 대접하기에 난감해 했고 절의 양식만 축내는 유생들을 돌보기가 힘들어 이용중 현감에게 상소했다. 이에 이현감은 인원수 대로 지필묵을 사서 나눠주며 명시한 날짜까지 지필묵을 남김었이 모두 사용해 과제를 제출할 것을 명했다. 이내 유상당수 생들이 서울로 도망쳐 다시 불심을 닦는 고용한 사찰이 됐다는 일화가 집안에 내려오고 있다. 그는 야은재에서 생활하며 영산홍 모란 등이 만개한 4월이면 지인들을 초대해 아름다운 초당에서 화전놀이음식을 나누며 독특한 풍류문화를 만들어 행했다고 한다. 망곡단비.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이용중이 야은마을 언덕에 올라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을 한 곳에 후손들이 단을 만들고 망곡단이라 이름했다. 언덕 입구에 단비를 세웠고 일제가 철거명령 등 갖은 압박을 가했으나 후손들이 옥고를 치루면서 탄압을 이겨내고 지켜 현재에 이른 것이다. [출처] 장성 전주이씨(全州李氏) 진남군파 사천군 종가 [출처] 장성 전주이씨(全州李氏) 진남군파 사천군 종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