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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5일 오늘의 역사
2024년 북한 중국 지린성 공장에 파견한 노동자 수천명이 폭동·파업
북한이 외화벌이 목적으로 중국 지린성 공장에 파견한 노동자 수천명이 폭동·파업을 일으킨 데 이어 아프리카와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북한 노동자들이 폭동과 파업을 일으켰다 보도에 따르면 아프리카 콩고공화국에서는 건설현장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수십 명이 2월로 예정된 귀국 연기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켰다.
또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의류 가공 공장에서도 2월 노동자 10여명이 귀국을 요구하며 출근 거부 파업에 들어갔다. 코로나 사태로 연기된 귀국에 대해 '30세 이상은 전원 귀국'이라는 북한 당국의 방침을 사측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미 바이든 맞으러 가던 폴란드 대통령 비행기 폴란드로 회항 비상착륙
2021년 북함 함경남도 함주 일대에서 동해안으로 신형전술유도탄 2발 발사
2020년 인도 코로나 19 확산 방지 위해 전 국민 이동금지령
2020년 경찰청 ‘n번방 사건’ 수사 위해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 설치, 텔레그램 성착취물 관련자 126명 검거
2017년 박찬욱 감독 이탈리아 피렌체서 문화예술상 받음
2009년 이미자, 가수 최초로 은관문화훈장 수상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3월 25일 청와대에서 이종환(85) 삼영화학그룹 회장과 가수 이미자(67)씨에게 각각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00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한 뒤 자택을 포함, 50여년간 기업활동으로 모은 재산 6000억원을 장학사업 등에 기부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이미자씨는 지난 50년간 600여장의 음반과 2100여곡의 가요를 발표해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다.
이날 훈장 수여식에는 이종환 삼영화학공업주식회사 회장과 부인 신명덕씨, 며느리 양문회씨, 가수 이미자와 남편 김창수씨, 정진곤 교육과학문화수석, 이동관 대변인이 참석했다.
이미자씨는 1958년 여고 3학년 때 국내 TV콩쿠르 ‘예능로타리’에서 가요부문 1위를 차지한 후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가요계에 데뷔해 1964년 ‘동백아가씨’로 국민들에 크게 알려졌다.
국민 애창곡인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지난 반세기 동안 600여장의 음반과 2100곡이 넘는 노래를 발표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미자씨는 1999년에 3등급인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바 있다. 그동안 대중가수 중에서는 이씨를 포함해 김정구, 백년설, 조용필, 남진 등이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대중가수가 2등급 이상의 훈장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7년 박태환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남자400m 우승
2003년 미국 LA법원, 스팸메일에 첫 실형 선고
미국에서 스팸메일을 발송한 컴퓨터 전문가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건에 7000여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법 루디스 베어드 판사는 25일 토네이도 디벨럽먼트사(社)의 전 시스템운영자로, 인터넷 ID ‘시크릿 스퀴럴(Secret Squirrel)’을 사용하는 피고 브렛 맥데이널(30)에게 1년4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맥데이널씨는 자신의 전 직장 고객들에게 한꺼번에 수천건의 스팸메일을 발송해 전산망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킨 혐의로 기소됐었다. 법원은 네티즌에게 불법으로 스팸메일을 발송해 특정기업에 피해를 입힌 사실이 인정된다며 지난해 그를 컴퓨터 사기 및 남용방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검찰의 편을 들어줬다.
일본에서도 이날 휴대전화 이용자에게 대량의 스팸메일을 보낸 혐의로 도쿄의 인터넷 서비스회사에 656만엔(7000여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도쿄 지방법원은 이날 “수신처가 명확지 않은 스팸메일을 대량 발송한 경우에도 정상적인 메일을 보낸 것과 동액의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이 업자는 지난해 4월부터 50일간에 걸쳐 약 400만통의 스팸메일을 발송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휴대전화 이메일 서비스를 운영 중인 i모드측은 “수신자가 내야 하는 메일 이용요금을 대신 지불하라”며 이 업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다.
2003년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한국말의 말맛을 가장 잘 간직하고 표현한 소설가 중 한사람으로 꼽혀왔던 이문구씨가 2003년 3월 25일 타계했다. 충남 보령 출생인 이씨는 ‘관촌수필’ ‘우리동네’ ‘산넘어 남촌’ 등을 통해 충청도 고유의 토속어를 가장 정확하게 구사하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196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후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같은 진보적 문학인 단체에 몸담았으며, 문예계간지 ‘실천문학’을 맡아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1998년부터 경기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쳐 왔으며, 1999년 말부터 2001년 2월말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씨는 2001년 봄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은 후 평소와 같은 문단 활동을 펴 왔으나, 2002년 말 여러 문학상 심사와 시상식 등에도 몸을 아끼지 않는 등 무리를 하다 지병이 악화돼 재입원했다.
그 후 지인과 후배들을 불러 마지막 만남으로 이승의 연을 정리하며 “나를 화장해 뼛가루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고향 관촌 뒷산에 뿌려라. 내 이름으로 된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으로 이승에의 미련도 거두었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강진, 최소 2000명 사망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글란주의 수도 나린시에서 2002년 3월 25일 리히터 규모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어 26일에도 여진이 계속돼 2000명 이상이 숨지는 등 6000여명의 사상자와 2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카불 북쪽 140km에 위치하고 있는 나린시는 이번 지진으로 90% 이상이 완전히 파괴됐다.
피해 지역에서는 유엔 구호대가 음식과 옷, 수천장의 담요와 텐트 등 지원에 나선 가운데 영국이 이끄는 국제안전지원대는 피해 규모 파악을 위한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지형이 험하고 도로가 지진으로 파괴돼 현장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도 카불에서 피해 지역에 이르는 길 곳곳에 최근 탈레반과 전투 과정에서 뿌려진 지뢰 때문에 구조활동이 난항을 겪었다.
사고가 난 힌두 쿠시 산악 지대는 지진이 잦은 곳으로, 같은 해 3월 3일에도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 100명 이상이 숨졌으며 1998년에도 2차례 강진으로 약 9000명이 사망했다.
2002년 정부, 교육정보시스템 구축 추진 발표
1994년 조용필, 재미교포 사업가와 결혼
톱가수 조용필(44)과 동갑내기 재미교포 사업가 안진현씨와의 결혼식은 화제를 모았던 스타의 웨딩답게 소란 속에서도 성대하고 화려했다.
이들이 백년해로를 약속한 25일 오후 6시30분 여의도 63빌딩 3층 코스모스홀 결혼식장과 2층 국제회의장에는 2천여명의 하객과 열성팬들이 참석, 박수와 환호로 앞날을 축복했다. 이날 식장에는 앨 고어 미 부통령의 사촌동생 질 고어 여사, 엠마 벨라리아노 미 암연구소장, 재미교포 미 하원의원 김창준씨의 부인 김정옥씨 등 외국서 온 손님들과 강부자 정주일 의원, 개그맨 이경규 이성미, MC 임백천-김연주 부부, 가수 김정수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 탤런트 이덕화 강석우 김수미 등 동료 연예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결혼식엔 양가의 가족과 친지등 1백여명만 입장이 허용됐으나 1백여명의 국내외 취재진들이 몰려 대혼잡. 주례없이 방송인 김동건씨의 사회로 진행된 예식에서 신랑 조용필은 아이보리색 턱시도를 입고 약간 멋적은 표정으로, 신부 안씨는 톱디자이너 이광희씨가 디자인한 흰색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아버지 안석현씨와 함께 입장했다. 식은 결혼 서약에 이어 사회자의 성혼 선언, 그리고 각자 결혼예물로 18금 실반지를 교환하고 20여분만에 끝났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일반 하객들은 2층 연회장에 설치된 대형 멀티스크린으로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2부격인 결혼 축하 콘서트. 팬들이 몰려 안전요원들의 보호속에 2층 피로연장으로 내려온 두사람은 ‘사랑’을 합창하는 20여명의 어린이합창단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조용필은 자신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연주에 맞춰 히트곡인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꿈’을 불러 답례했다. 이어 신부 안씨와 나란히 5단 높이의 대형 웨딩케이크를 자른 조용필은 다시 외국손님들을 위해 팝송 ‘언체인드 멜로디’를 선사했다.
이날 두사람은 몹시 긴장된 표정. 아이를 몇이나 낳겠느냐는 질문에 안씨는 “용필씨와 상의하겠다”고 한 반면, 조용필은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한다”며 얼굴을 붉혔다. 이들은 사회자의 요청으로 즉석 키스를 연출, 카메라맨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기도 했다. 식을 지켜본 고어 여사는 “신부는 여러해 전부터 우리 가족과 친구사이”라며 “먼 길이지만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해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참석을 통보했던 칼루치 미 전 국방장관, 중국 국가주석 이선념의 딸 리샤오린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1992년 우주미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13일 만에 귀환
우주정거장 미르호에서 우주 탐사임무를 수행하다가 구 연방의 해체로 지구귀환이 늦추어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알렉산데르 볼코프 등 우주비행사 3명이 우주선 소유즈 TM-13호를 타고 우주미아생활 313일 만인 1992년 3월 25일 귀환했다.
1991년 5월 18일 구 소 우주정거장계획의 하나로 미르호에 탄 크리칼료프는 만10개월 열흘간을 우주에 머물며 각종 측량과 기계실험을 해왔다. 크리칼료프가 우주미아가 된 것은 러시아가 돈이 없어서 그의 귀환을 위한 우주선을 발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가 돌아오게 된 것은 독일이 2천4백만달러를 지원해 귀환을 위한 우주선 발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으로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했다. 문목사의 방북에는 재일동포 정경모씨가 동행했으며 일본과 중국을 경유했다. 문목사는 평양도착 성명을 통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조국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왔다고 밝혔다.
문목사는 27일 다른 행로로 북한에 간 소설가 황석영씨와 정경모씨와 함께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다. 4월 2일에는 평양에서 문목사와 북측의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의 공동명의로 ‘4.2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문목사는 열흘간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4월 3일 북한을 떠나 중국과 일본을 경유해 4월 13일 귀국했다.
정부는 당국과의 사전협의 및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한 문목사의 행위가 명백한 실정법위반이라고 규정, 귀국하자마자 구속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그의 행동을 ‘감상주의적,이상주의적’으로 규정, 7년 징역형을 확정했으나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로 1990년 10월 20일 1년6개월여 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에 김대중, 이문영씨 등과 함께 구속돼 2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77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 뒤에도 국민연합선언서사건(1978년), 내란예비음모죄(1980년), 집시법위반(1986년), 국가보안법위반(1989년)등 모두 6차례에 걸쳐 10여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반정부 활동을 계속해왔다. 1994년 1월 18일 별세했다.
1981년 미국 보스턴의대, 사상초유의 암면역동물 생산에 성공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81년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약 80%에 이르는 초선 의원이 원내로 진출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등 각종 법적 조치에 의해 상당수 정치인들이 정치활동 구제를 받거나 정치적 이유로 처벌됨으로써 기존 정당이 와해되고 재편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야권 정치인을 중심으로 민주한국당이,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등 구여권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이 만들어졌으며, 그밖에 민권당, 신정당, 민주사회당 등이 창당되면서 정치권은 외형상 다당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총선결과 전체의석 276석(전국구 92석 포함) 가운데 민주정의당 151석(전국구 61석), 민주한국당 82석(전국구 24석), 한국국민당 25석(전국구 7석), 무소속 10석, 민권당 2석, 신정당 2석, 민주사회당 2석, 민주농민당 1석, 안민당 1석을 차지했다
1981년 삼일운동 33인 이갑성옹 사망
1981년 내무부, 연좌제 폐지
1981년 3월 25일부터 연좌제가 폐지됐다. 내무부는 새 헌법 규정에 따라 8.15직후의 혼란과 6.25 등 특수한 정치상황아래 발생한 신원특이자들에 대한 기록을 일제히 정리했으며, 形 실효에 관한 법률시행에 따라 전과기록도 정리, 말소해야할 전과자의 기록을 모두 말소했다고 발표했다.
신원특이자 기록정리작업에서는 월북자나 반국가사건관련 당사자의 일부 중요기록만을 선별 정리하고, 당사자 이외의 직계비속, 형제자매, 배우자, 부모를 비롯한 모든 연고자의 기록은 완전히 정리하여 이들이 신원조사과정에서 일반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했다.
이번 정리로 과거와 같이 반국가사건 등에 관련이 있었던 연고자는 앞으로 해외여행, 취업 및 공무원 국영기업체임직원으로 임용되려 할 경우 아무런 불이익처분을 받지않게 됐으며 신원조회처리기간도 크게 단축되게 됐다. 연좌제 폐지 및 전과말소에 관한 이같은 조치는 1980년 8월 그 기본방향이 마련되었으며, 새 헌법과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그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었다.
치안본부 관계자는 이 조치에 따라 본가는 물론 처가쪽의 그 어느 누구가 부역 등 반국가 행위를 한 일이 있어도 신원조사과정에서 아무런 차별취급을 받지 않으며 또 신원조사과정에서 적-부적판정을 보유하는 일도 없게 돼 일반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고 밝혔다
1977년 소련, 유럽 및 극동에 SS-20미사일 배치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왕 피살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1975년 3월 25일 조카에게 피살돼 오후 2시13분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조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리야드 궁전에서의 암살 사건은 국민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왕실은 정신이상인 조카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파이잘 국왕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두형에 처해졌다.
1964년 11월 국왕에 즉위한 파이잘은 곧 국가재정을 건전히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제3차-4차 중동전 때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에게 석유금수라는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중동평화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평화추진을 위해 노력했다
1974년 미국 골퍼 죠니 밀러 홀인원
1969년 국내 첫 장기 이식 수술
1969년 가톨릭의대 이용각 교수팀의 국내 최초 신장이식 장면
1969년 3월 25일 오후 6시, 서울 중구의 명동성모병원 수술실에서 국내 최초 장기 이식수술이 이루어졌다. 가족간의 신장 이식 수술이었다.
환자인 재미교포 정재화(33)씨는 미국으로 이민 가 지내던 중 수술 1년 전부터 만성 신부전증을 앓았다. 미국 병원에서 신부전증 치료를 위해 신장이식을 제안했으나, 막대한 수술비와 신장 기증자를 구할 수 없어 귀국을 했다. 이에 국내에 있던 정씨의 형 태화씨가 자신의 신장을 내놓겠다며 명동성모병원을 찾아 이식 가능 여부를 물었다. 마침 명동성모병원 의료진은 미국에서 첨단 인공 투석기를 들여와 가동 중이었고, 집도의인 외과 이용각(李容珏) 교수가 미국 휴스턴의 베일러의대에서 외과 전문의를 취득한 후 신장 이식 수술법을 익히고 돌아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장 이식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때라 정씨 어머니는 "두 아들을 한번에 다 잃을 수는 없다"며 자신의 신장을 제공하였다. 수술은 외과·내과·비뇨기과·간호팀 등 40여명의 대규모 의료진이 참여해 3시간 28분 만에 끝났다. 미국은 1954년, 일본은 1959년에 신장 이식에 성공했다. 환자 정씨는 수술 후 어머니의 신장으로 5년을 더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파키스탄 아유브칸 대통령 하야
1968년 주한미군 팬텀기대대 창설
1964년 미국 일본간 TV 우주중계 실험에 성공
1958년 서독 하원 국방국의 핵무장 결의안 가결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
1957년 3월25일 유럽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 간 자본, 상품, 노동력,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에 조인 하였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석탄과 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창하며 꿈의 실현에 나섰다. 이 제안은 유럽연합이 이 날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기념할 만큼 유럽통합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듬해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시키면서 ‘유럽 합중국’을 향한 유럽인들의 먼 여정이 시작됐다.
1957년 3월 25일에는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 간 자본·상품·노동력·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창설에 조인함으로써 유럽통합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1967년 7월에는 EEC, ECSC, EURATOM이 '유럽공동체(EC)'로 헤쳐모여 유럽통합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했다. 공동시장을 단일시장으로 전환려는 시도가 진행되는 가운데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몰락은 유럽에 새로운 통합방식을 요구했다. 1993년 11월 궁극적으로 유럽연방을 지향하는 '마스트리히트조약' 이 발효됨으로써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이 출범했다.
1954년 제1회 학-예술원 회원 선거
1951년 이라크, 석유국유화 법안 결정
1951년 국군, 동해안 38선 돌파
1949년 주미한국대사관 창설, 초대 주미대사 장면
1949년 3월25일, 장면(張勉) 초대 주미대사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한미 양국의 대등한 동반자 관계가 시작됐다. 장면은 주로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막 건국된 대한민국을 세계속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으로서 우리나라 외교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그의 첫 외교활동은 1948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제3회 유엔총회에 수석 대표로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각국 대표를 상대로 한 3개월간의 노력은 마침내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12월12일)을 받는 결실을 맺도록 한다. 장면은 그해 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을 승인(1949년1월1일)한 미국과 양국간의 현안을 논의하던 중 1월5일 주미대사 발령 소식을 접한다. 그는 곧 일제 때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가 들어있던 빌딩을 임시 청사로 정한 뒤 1시간 당 5달러의 렌트카(곧 ‘뷰익’을 구입)를 빌려타고 각국 대사를 만나 신생국의 존재를 알려나갔다.
장면의 활약상은 6ㆍ25때 두드러진다. 6월24일 오후 5시경(미국 시각)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쟁소식을 전해들은 장면은 즉각 미 국무성으로 달려가 유엔 안보리 소집을 협의한다. 25일과 27일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자 장면은 북한의 즉각철수와 군사행동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라디도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미국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1929년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제1회 졸업식
1928년 미국의 우주 비행사 - 1970년 아폴로 13호 비행사령관 - 제임스 러벨 출생
1926년 항일투사 박열, 사형 선고
1919년 독일의 조각가 렘브루크 사망
1918년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사망
‘방탕한 아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유희’ ‘아라베스크’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 드뷔시가 191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드뷔시는 근대음악에서 제일 처음으로 낭만음악에 반대하여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상파 음악의 원조이다.
드뷔시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11살 되던 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22살 때에는 칸타타(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을 받아 로마로 유학했다. 그러나 유학생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경험과 감수성을 풍부히 하기도 했다.
드뷔시의 작품을 보면 초기에는 후기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으나 무소르크스키의 음악을 접하고 바그너로부터 멀어지며 점점 인상주의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눈에 띤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은 미술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섬세하고 감각적인 음색으로 표현해 낸다. 문학에서의 상징주의를 음악에 표현하기도 했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한 첫 작품이다. 드뷔시는 관현악곡, 성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09년 창경원 동물원 준공
1895년 을미개혁 추진
을미개혁은 을미사변(1895.10.8) 직후 새로 입각한 김홍집내각에 의해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으로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을 광의(廣義)의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이 중 제3차 갑오의 개혁은 1895년 8월 하순부터 1896년 2월 초순까지 추진된 개혁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3차 갑오의 개혁기간 중 을미사변이 발생하였고 이를 전후하여 내각의 교체가 있다. 이에 논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을미사변 직후 새로 개편된 김홍집내각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을 별도로 구분하여 을미개혁으로도 부른다.
을미개혁은 전년도에 시작된 갑오개혁의 연장으로서,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근대화에 중요한 관건을 이루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1881년 이만손 등 만인소 상소
1881년 헝가리 작곡가 벨로 바르톡 출생
1871년 군포제 폐지, 호포제 실시
1867년 이탈리아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출생
1864년 독립운동가 이승훈 출생
1829년 그리스 독립
1801년 독일 시인 노발리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