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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模倣) 쓰는이 ; 예찬 왼쪽 벽면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2, 분침이 12에 가까워지자 영어로 빼곡히 적힌 종이 몇 장을 읽고 있던 P는 손에 들린 펜을 내려놓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P가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대자 온 몸에 긴장이 풀어졌다. P는 방금 전까지 복잡했던 머릿속을 천천히 비워갔다. 뿌연 안개 머릿속 한 구석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 안개는 곧 P가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뒤덮어 버렸다. 안개는 그 공간을 가득 차지하고선 짙은 색으로 변해갔다. P의 주름졌던 이마는 점점 반듯한 종이처럼 펴졌다. P는 목을 좀 더 뒤로 젖히고선 책상 위에 두었던 리모컨을 집었다. 자주 찾는 물건은 항상 책상의 오른 쪽에 두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그 물건들은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P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오디오가 켜지며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이어 바이올린 소리, 플롯소리, 각종 악기들이 연주를 하며 화음을 이룬다. 언제부터인가 P는 끝없는 피로 속에 잠시나마 휴식을 찾기 위해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 10분이면 온 몸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 또한 편안해지는 법. 방금 전까지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들을 잠시 덮어두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상태를 10분간 유지하면 P는 다시 일을 시작해도 부담 없이 할 수 있었다. P는 작은 미동조차도 없었다. P가 마지막 했던 행동은 리모컨을 다시 책상 오른편에 올려두고 가만히 손을 무릎위에 올려놓는 것 뿐. 시계의 시침소리마저 음악에 묻혀 P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음악은 이제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있었다. P의 귀에 이상한 잡음이 섞여 들렸다. 오랫동안 음악을 들어오면서 이런 잡음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의문은 점점 짙어가고, P는 마침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 부분을 다시 들어볼 생각이었다. P는 리모컨의 모양을 천천히 기억해냈다. 되감기의 버튼이 아마 왼쪽에 있었던 것 같다. P의 엄지손가락이 되감기 버튼을 누르려하자, 그 잡음이 또 다시 들려왔다. 처음엔 테이프 감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P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곤 P의 공간을 가득 채우던 음악도 정지시켰다. 그러자 다시 그 소리가 들리더니 이젠 사람의 음성도 같이 들려왔다. P의 공간 그 너머에서. “선생님, W씨 오셨어요.” 아. 그래. P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2시 10분이되기 30초 전. 약속 시간은 아직 몇 분 더 남았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빨리 도착했다. “들어오세요.” P의 말과 동시에 P만 있었던 그 공간의 문이 열렸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한 남성을 부축이며 들어왔다. 여인은 남성을 소파에 앉도록 도와주었고, P도 자리에 일어서서 그 남성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은 P에게 목례를 하고선 열린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갔다. P의 공간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다른 때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 남자, W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P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머릿속의 뿌연 안개들은 걷혀갔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모든 것을 기억해 내었다. 휴식을 완전히 취하지 않아 피로가 싹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P가 하는 일은 항상 피로가 따라다니는지라 익숙했다. P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W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만나기로 했던 손님, 몇 달 전부터 P는 W와의 상담을 주기적으로 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 상담을 하는 날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W가 먼저 담당 간호사에게 ‘선생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P는 달라진 W의 태도에 기뻐하기도 하며, 할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W는 테이블에 놓인 화분을 아무런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P는 짧고도 긴 상황 정리를 끝내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가끔 지쳐있을 때 하는 방법입니다. 의자나 소파, 침대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선 머릿속을 정리하죠.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것들을 무언가로 잠시 덮어둔다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그리곤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게 음악을 틀어놓죠.” “어떻습니까?” “아주 편안합니다. 그렇게 10분정도를 보내면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받죠. 고등학교 때 말입니다. 한창 시험공부에 지쳐있었을 때,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이렇게 공부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집중력도 느려져 더 공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안절부절 거리며 공격심도 높아지죠. 그때마다 했던 이 방법은 아주 큰 효과를 주었습니다.” W는 P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P가 말을 마치고 눈 꼬리를 휘며 눈웃음을 치자, W는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화분에 담긴 꽃잎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무심코 건드린 그 꽃잎이 떨어지자 W는 떨어진 꽃잎을 주워 다른 꽃잎 위에 올려두었다. P는 말없이 W의 행동을 주시했다. 자꾸만 떨어진 꽃잎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완 다르게 입술이 아주 작게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W씨는 어떻습니까?” W가 손을 멈추고 P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쳐있을 때, 피로를 해소하는 방법이 있나요?” “피로요.” “머릿속에 잡념들이 너무 많아 복잡할 때나.” “저는…….” W가 오른손 손바닥을 활짝 펴 P에게 보여주었다. W의 손은 남자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예뻤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게 뻗어 있으며, 손바닥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매우 적당했다. 마치 TV속에 나오는 여성모델의 손 같이. 손만 본다면 사람들은 W가 남자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이 손가락들을 인형이라고 하고, 각각 이름을 붙여줍니다. A, B, C, D, E. 성별은 모두 여성이고, 나이도 다릅니다. 그리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죠. 내가 해답을 찾아낼 때까지.” “어떤가요?” “처음에는 자꾸만 다른 말을 해서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손가락으로 그 손가락을 몇 대 쳐주면 그 다음 부터는 파르르 떨며 제 말에 꼬박 꼬박 대답을 해 줍니다. 원하는 답이 나올 때 까지요.” “원하는 답은 항상 얻나요?” “아니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원하는 대답을 듣기란 어려운 일이죠. 그러면 다시 이름을 정하고 나이를 정합니다. 바꿔주는 거죠. 그리고 그 손가락은 이제 다른 손가락이 되는 겁니다.” “참으로 특이한 방법입니다. 그 손가락들은 항상 다른 손가락으로 바뀌겠네요? 항상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수첩 하나에 적어둔 적이 있습니다. 그 손가락들을요.” “왜 적어두는 거죠?” “제가 아니면 달리 기억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W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가락들을 W, 자신이 기억해 줬다는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P가 보기에 W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게 W라서 웃고 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지 보통 사람들이 현재 W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면 ‘소름끼치다.’라고 하는 것이 맞다. 쌍꺼풀이 없는 W의 눈이 가늘게 찢어지며 오른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따라서 오른쪽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P는 오싹한 느낌을 받았지만, 조금도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평소대로 사람 좋게 웃으며 W를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자세히 들리고 있었다. P는 긴장을 했다. W의 웃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1분도 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래의 아무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 얼굴로 돌아온 W는 다시 화분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떨어진 꽃잎을 들어 이번엔 손톱으로 자국을 내고 있었다. P는 곧 진정을 되찾았다. 아마 W가 계속 그 미소를 짓고 있었더라면 더 이상 상담은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화분의 꽃,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떨어뜨린 그 꽃잎에 관심을 두는 W를 관찰했다. W는 P가 말을 할 때면 정확히 눈을 쳐다보지만 이렇게 서로 대화가 없이 조용해 질 때면, 또는 자신의 말이 끝날 때면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P가 일어섰다. W는 P가 무얼 하든 자신의 일에 집중할 뿐이다. P는 잠시만, 이라고 말하고선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얇은 흰색 파일을 하나 꺼냈다. 그리곤 다시 W의 앞에 앉았다. “예전에.” W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P는 집어 들었던 펜을 다시 내려두고 W와 눈을 마주쳤다. W는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말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 네. 그래요. 한 달 전쯤인가? 그때였던 거 같습니다.” “처음에 꾸었던 꿈은 선생님께 말씀 드렸던 대로입니다. 불쌍한 한 여자의 이야기 같은.” “두 번째 꾸었던 꿈도 불쌍한 다른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하셨죠. 세 번째 여자도 그랬었고.” “네, 맞습니다.” “혹시 네 번째의 꿈도 불쌍한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까?” “……아뇨.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다른 한 여자의 이야기, 까지는 맞지만 그 내용이 완전히 틀립니다.” W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건 마치 제 기억도, 선생님의 기억도 아닌 다른 한 사람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아주 생생합니다. 제가 그 여자의 기억을 읽어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기억이었습니까?” “옆에는 묶여 있는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여자들은 모두 말을 못합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입을 봉쇄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주인공인 그 여자, 그래요 편의상 C라고 하겠습니다. C는 그 여자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몸입니다. 묶여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구석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죠. 한 남자가 C를 찾아옵니다. 그리곤 그 C에게 질문을 던지죠. 대화가 오갔습니다. 대화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허무한 내용이었습니다. 남자는 C에게 화를 냅니다. 이때껏 잘 해왔으면서 왜 이번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하냐고. C는 조금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습니다. 둘 사이에 말싸움이 일어나더니 격한 몸싸움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C는 남자를 때리지 못합니다. 남자는 C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곤 C가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싶을 때, 찬물을 가져와 붓습니다. C가 정신을 차리면 또 다시 폭력을 휘두릅니다. 화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난 남자는 곧 이성을 잃었습니다. 이번에도 찬물을 가져와 붓습니다. 아, 찬물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투명한 액체인데. 남자는 C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게 제가 꾼 꿈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까?” “남자가 한 말만이 기억납니다. 너는 나무 아래로 가게 될 거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무 아래요?” “네. 남자는 환상에 젖은 눈빛으로 그 나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온 나무라면서. 그 나무는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섬뜩한 꿈이네요.” “다시 그런 꿈을 꿀까 무서워 쉽게 잠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P는 파일을 열어 흰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W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화분으로 시선을 돌리고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곧, P의 공간에 문이 열렸다. 몇 십분 전에 W와 같이 들어왔던 흰 옷을 입은 여인이 P에게 인사를 하고선 W를 부축이며 데리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P는 펜을 소리 내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P는 파일을 덮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던 P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여보세요.’라는 말과 함께 들려왔다. -네, P선생님. “나무입니다.” -나무요? “4번째 시신이 있는 곳은 나무 아래일 것입니다.” -이번에도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던가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와는 다르게 왜 나무죠? “살해하는 법도 다릅니다. W는 4번째 여자와 다툼이 있고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모양입니다.” -거 참 신기하네요. 매번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행각을 말하덥니까? “W는 지금 기억을 잃은 시점에서, 자신이 했던 일들을 꿈으로 기억해 내고 있습니다. 그게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줄만 알고요. 다른 한 사람의 기억인 마냥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제 3의 시선에서 보고 있다고 하면서.” P는 W에 관한 서류를 처음 받아 읽어보았을 때를 생각했다. W는 연쇄살인범으로 추적 중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은 범죄자이자 환자였다. W의 전과는 화려했다. 매스컴에서는 W가 잡히지 않는 이상 모든 여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라고 말 할 정도로. 다행히 W는 잡히고 그 일이 벌써 1년이나 넘게 지나 모두들 W에 대해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진 않지만 그가 살해한 여성들의 시신은 모두 발견되지 않았고 신원도 미확인이었다. 사건은 점점 산으로 가고, 실종 신고 된 여성이 많아 W가 살해한 여성이 도대체 몇 명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W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건을 하나하나 기억해 냈다. 놀랍게도 그 내용은 일치했다. W가 어디에 시신이 있다고 말하면, 그 장소에서 정말 실종 신고 되었던 여성들이 하나 둘 발견되었다. 경찰도 W를 체포해야 하지만, 그 여성들을 다 찾기 전까지는 W를 지켜보는 게 다였다. P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몸을 완전히 기대었다. * P의 공간에서 아까 들었던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W를 부축하던 여성은 ‘선생님 또 저 음악 들으시네.’라고 중얼거렸다. W는 발을 멈추어 뒤돌아 P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에게 또 무슨 할 말 있으세요?” W는 고개를 젓고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여성과 함께 자신의 병실로 이동했다. 이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고서. W는 자신의 병실에 도착할 때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밀을 너무 많이 숨겨놨는데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