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암담하다. 십 년 가까이 그게 사랑이려니 믿어왔던 감정에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나날이 일제히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문을 꽝 닫았다. 허한 것들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톱니바퀴로 연인의 목을 쳐, 밀어대는 영화를 보며 파르르 돌아누웠다. 그게 하강인지 상승인지 마주앉은 정신을 건드려보았다. 폭죽처럼 터지는 아, 감정이여, 줄을 서서 극장표를 예매하며 저렇듯 십 년 가까이 뭉개지도록 만나고도 잎 다 떨어진 겨울나무 아래엔 혼자 서 있는 사람들. 별의별 싸움 다 붙여놓고 저 혼자 말짱한 정신, 골백번 고개 흔들고 흔들어도 오, 맙소사, 뜻 없이 뒤척이는 사랑. 헛되고 헛된 그 어느 날의 슬픈 낙하.
- 시집〈모자는 인간을 만든다〉문학동네 / 2023 -
사진 〈Pinterest〉
즐거운 사랑
김 상 미
난 참 낮게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평안하게
언젠가는 질 꽃인 줄 알았기에
허밍하듯
부드럽게 옷을 벗었다
잠자지 않고 밤에도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사람
있다는 것 알기에
난 참 낮게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아늑하게
값싼 집일수록 불친절하므로
구월의 밤바다에선
모래 위에 집을 짓지도 않았다
아무도 내게서 떼어놓지 않고도
남극의 빙산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를 녹였다
투명한 높은 생각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낮게 낮게 마주치는 사고와
그 사고 밑의 욕심을 탓하지도 않았다
헛되이 웅크리지 않고
내 사랑, 매달리는 그 아래
즐겁게 즐겁게 누워만 있었다
참 순진하게
참 겸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