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의 이상한 스님, 원효를 일약 대스타로 만든 사건이 있었다. 신라에는 국왕과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비정기적으로 황룡사에서 백고좌법회를 열었다.
백고좌는 백 개의 높은 자리라는 뜻이다. 백 분의 불상과 보살상을 모시고 백 명의 고승들이 국가를 위해 인왕반야경을 독송하고 강설하는 국가적인 법회였다.
백 명의 고승들은 다 당대에 명성이 쟁쟁한 분들이었다. 모두 중국에서 수학한 유학파 승려들로서 제각기의 교파에 정통한 내노라하는 분들로 초청되었다.
그런 전통으로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태를 위해서 다시 백고좌법회를 열기로 하고 큰스님들을 뽑기 시작하였다.
원효대사도 문무왕의 초청으로 그 후보에 올랐지만 중국불교의 법통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기득권의 텃세와 계율을 철저히 지키지 못하는 파계승이라는 상소에 탈락하고 말았다.
성사 본인이 거기에 참석하고자 원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간절히 청원하여 일순 초청되었지만 얼마 뒤에 어쩔 수 없이 취소가 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문무왕의 왕후가 병이 들었다. 온몸에 종기가 돋아나는 일종의 피부병이었다. 왕족과 대신들이 신들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쾌차함을 빌었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사실 이런 경우는 불교 역사적으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신라나 고려, 그리고 이조의 왕족들은 창병이 많았다. 그로인해 불교가 다시 일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부처님도 만년에 창병으로 고생하셨다. 그분의 종족인 아난다존자도 창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불교의 흥망은 이 창병으로 인연된 일화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해인사의 창건 연기 또한 그런 경우의 하나다. 양나라 때 신통과 예언으로 유명한 寶誌보지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신라스님들이 있었는데 순응과 이정대사였다.
그 스님들은 애장왕 때 우두산에 있던 원당암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원당암은 그분들이 거기에 들어가기 백여 년 전에 지어진 조그마한 암자였다.
그분들이 보기에 우두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지형이 특출하여 큰 수행자들이 많이 배출될 것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서 그곳을 큰 수행의 도량으로 일으키기 위해 중창불사를 기원하였다.
그때 궁중에서는 효공왕의 왕후가 등창이 나서 큰 우환이 되었다. 아무리 약을 써도 안 되고 침을 놓아도 그 효험이 나타나지 않아 근심이 그치질 않았다.
가뜩이나 후삼국시대가 본격화하여 견훤과 궁예의 공격에 간단없이 시달리던 시기였기에 효공왕은 내우외환에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디 유명한 사찰을 지어 불보살들에게 호국과 安民을 기원해야 되겠다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시기에 하루 왕후가 잠깐 낮잠을 자는데 우두산 산신이라며 그녀에게 나타났다. 그러면서 그대 병을 치유해 줄 분은 우두산에 지금 수행하고 있는 순응과 이정대사라고 하였다.
비록 꿈이었지만 그 일이 너무 생생하여 효공왕에게 보고하였다. 효공왕은 급히 우두산에 믿을 만한 대신을 보내어 그 스님들을 정중히 모셔오라고 하였다.
대신이 우두산 입구에 다다라보니 예사로 깊고 큰 산이 아니었다. 이곳 어디에서 그 스님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 중 한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하여 원당암까지 가게 되었다.
그 스님들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같이 서라벌로 가자고 했더니 구태여 서라벌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색으로 된 실을 내어 주면서 왕후의 문고리에 이것을 걸어두고 자면 수삼일 내에 왕후의 등창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대신이 반신반의 하면서 그 오색실을 받아 효공왕에게 바쳤다. 효공왕이 그 비방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왕후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에 감탄하여 효공왕은 우두산을 가야산으로 개명하고 원당암 옆에다 큰 사찰을 지어서 그 스님들을 모셨는데 그것이 지금의 해인사다.
그 일화처럼 문무왕후의 이상한 병으로 수심이 깊어가던 그때 누가 대국에 가면 틀림없이 명약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 소리를 듣고 왕은 중국에 보낼 신하를 뽑아 특명으로 신약을 구해 오라고 했다.
신하가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가는데 거센 풍랑이 일었다. 신하는 왕의 특명을 받고 중국으로 가야하니 제발 이 풍랑을 멈춰달라고 용왕에게 빌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거친 파도가 잠잠해지더니 물 속에서 한 명의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를 용궁으로 인도하였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에게 검해鈐海라는 용왕이 나타났다. 용왕은 그에게 책 한 권을 내어 보이면서 이것을 인간 세상에 유포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왕비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책이 바로 금강삼매경이다. 그러니까 왕비의 피부병은 이 책을 가져오는 모티브가 된 셈이다.
ㅡ계속ㅡ
출처: 대승기신론 해동소 혈맥기 5_공파스님 역해_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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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강삼매경을 어떤 학자들은 가짜 경전이라고 하는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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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 🙏 🙏
깜놀입니다.
신라 왕비의 병을 낫게 할 용왕의 처방은 약이 아닌 금강삼매경 유포.
심해의 고래의 심장이나 용의 구슬이 아니고?
왕비의 병은 일심의 근원을 설한 금강삼매경의 가르침을 펴는 것으로.
게다가 원효대사를 두고 일개 학인스님도 아니고, 백고좌법회에 초대될 만큼 당대 손꼽히는 고승들도 시기하고 질투를 하는군요.
출세간을 지향하는 출세한 스님의 딜레마라고 해야 하나요?
놀랍습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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