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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南楊州 光陵)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진접읍, 광릉)
크기 : 면적 1,059,289㎡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였고, 두 능의 중간지역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세웠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하였다.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기 능제(陵制)에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 주위에는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석호(石虎)·석양(石羊)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번지에 위치한다.
세조(世祖)
조선 최고의 묘호를 쓴 왕
출생 – 사망 : 1417 ~ 1468
“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따르지 않을 자들은 가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면 사직(社稷)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라도 가겠다. 계속 만류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부터 목을 베겠다. ([연려실기술] 세조, 정난조)
피의 군주와 치적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수양대군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왕조 7대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편적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이면서, 부친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군주의 이미지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 세종과 세종 비 심씨와의 사이에서 문종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차남이 아닌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文)에 몰두한 장남 문종,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달리 거침없고 욕망이 강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일찍이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수양대군의 존재를 걱정했다. 원래 수양대군은 진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고친 사람은 부친인 세종이다. 세종이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기 바랐지만, 수양대군의 속마음은 달랐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다
쿠데타의 최대 희생자인 단종은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종은 어린아들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원로대신에게 부탁했고, 이러한 구도는 당장 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단종 즉위 이후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불리는 기습 공격을 앞세운 수양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양대군은 무방비 상태의 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격살하였고 문인들의 신망을 받았던 라이벌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 버렸다. 당시 수양대군의 핵심참모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는데, 입궐하는 대신들을 향해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면 모조리 죽이는 식이었다.
쿠데타의 명분은 약했고, 어린 단종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영의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세운 공을 주공(周公)에 비유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서를 작성하게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삼문(成三問)이었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가 성삼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고 전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집에 살게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 10명을 거느린 삼군진무 2명을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 운동,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이시애(李施愛)의 난 등 즉위 초반에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이었다.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게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소외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우익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음모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세조는 김질과 성삼문을 불러 들였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인두질에 성삼문은 도모하던 동지들의 이름을 대었다. 이에 따라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에 앞서 세조는 성삼문과 거사를 도모한 박팽년을 평소 총애하고 있었다.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세조를 부를 때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며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팽년은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巨)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사건은 단종에게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어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사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둔으로써 항거했던 여섯 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저항했던 사육신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그들인데 이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은 자신과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가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힌 이후 경상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순흥에는 부사로 있는 이보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포섭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금성대군에게는 금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종이 이보흠의 종인 이동과 눈이 맞았다. 이동은 상전인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기회로 출세해 보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이에 금성대군이 작성해 놓은 격문을 훔쳐 달아나 안동부사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고, 뒤에 이를 안 이보흠도 후환이 두려워 금성대군의 역모 사실을 알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은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단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는 이후로 반역의 고을이 되었다. 순흥부의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가 죽임을 면치 못했다. 순흥부는 단종의 신원이 복위되는 숙종 때까지 쑥밭으로 남아 있었다.
세조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다 보니 문치(文治)보다는 패도(覇道) 정치로 변모해 갔다. 그 결과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서 불경 간행 등 공적도 남겼으나, 독단적인 정치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는 자신의 골육인 단종과 금성대군 등을 죽이면서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한명회·신숙주 등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이들의 권세를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도중 이시애의 난을 만나자 오히려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세조도 죽음을 예감하고 1468년(세조 14년) 음력 9월 7일 아들인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최고의 묘호를 받은 세조, 그 묘호에 담긴 뜻은
왕이 죽으면 왕가의 사당인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게 된다.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공적을 기리며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이른바 묘호(廟號)이다. 태조∙태종∙세종 등 역대 왕들의 묘호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국왕의 묘호는 두 글자로 지어졌다. 첫 글자는 임금의 업적을, 두 번째 글자는 종법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컨대 나라의 창업자는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쓴다. 조(祖)는 주로 창업 개국자에게 주어지는 묘호이고 나머지 후대 왕들은 ‘종(宗)’자를 쓴다. 그런 이유로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창업자나 그 4대조 외에 ‘조’자를 쓴 예는 거의 없었다.
세조의 경우도 원래 묘호로 거론된 것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그러나 세조라는 묘호는 후대 왕인 예종이 고집하여 결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세조는 개국자가 아닌 계승자이므로 ‘조’가 아닌 ‘종’을 쓰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계승한 왕이라는 ‘세(世)’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조(祖)’자를 모두 가진 왕이 되었다. 이런 경우는 세조 외에도 선조나 인조가 있는데 대체로 후대에 무리하게 묘호를 붙인 결과라 볼 수 있다.
비록 세조라는 묘호는 세조 자신이 작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평범치 않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특별함은 묘호만이 아니다. 세조와 그와 함께한 공신들은 국가 재건의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세조는 종묘에서 아무리 대수가 달라져도 결코 신주가 옮겨지지 않는 불천위(不遷位)의 지위를 가졌다.
정희왕후
세조의 왕비, 조선 전기 정치사에 족적을 남기다
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조선이 개국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또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한 여인이다. 처음 왕자의 아내로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왕비가 되었고,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쳐버리지 않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7년간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정희왕후의 65여 년 간의 인생은 격동의 조선 전기 정치사 어느 한 부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언니를 제치고 세종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다
정희왕후는 고려시대부터 명문가를 자랑하던 파평윤씨 가문의 딸로 1418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윤승례이고 아버지 윤번은 음보로 관직에 나가 신천 현감을 거쳐 정희왕후 10여세 무렵에는 군기시 판관 자리에 있었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둘째 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원래 왕실과 혼담이 오가던 것은 그녀의 언니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자녀들의 결혼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대군과 공주의 결혼에도 정식 간택 절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관여하여 훌륭한 배필을 맞아주려고 노력했다. 윤번의 집 큰 딸을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의 배필로 점찍고 궁중의 보모상궁과 감찰상궁을 파견한 세종은, 큰딸보다 둘째 딸의 자태가 더 비범하고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조선 7대왕이 되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이다.
정희왕후는 1428년 11세의 나이에 한 살 연상의 수양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왕실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는 문종이 이미 세자의 자리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 즉, 왕자의 아내였던 그녀에게 왕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자리였다. 그녀는 수양대군의 아내가 되면서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 수양대군과는 슬하에 2남 1녀(장남 의경세자. 차남 예종. 딸 의숙공주)를 두었다. 수양대군은 왕자시절 정희왕후 외에 딱 한명의 첩을 들였는데 그녀는 훗날 근빈 박씨가 된다. 근빈 박씨가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당시 조선의 상류층 남자라면 당연시되었던 축첩(蓄妾)행위를 그다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양대군과 정희왕후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 같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에 비해 문무를 모두 겸비한데다 야망도 큰 인물이었기에, 아버지 세종은 둘째 아들이 훗날 왕권에 도전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까 매우 염려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란 이름도 수양산에서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생각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변치 말라는 뜻에서 세종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의 야심을 꿰뚫어본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손(훗날의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계유정난, 수양대군에게 직접 갑옷을 입히다
왕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던 수양대군이 30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정치사는 앞날을 예상 할 수 없는 파란 속으로 접어들었다. 몸이 약했던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도 없고, 외척도 변변치 않은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의 왕위는 백척간두에 선 듯 위태로워졌다. 단종은 그가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호하고 정사를 대신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 성급하게 일선 정치무대로 내몰렸다. 신하들과 종친들은 모두 어린 왕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각자의 충성심을 과시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사리사욕에 타락할 위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채 권력의 시험대 위에 올랐다. 신하들은 왕권보다 더 큰 신권을 꿈꾸었고, 종친들은 어린 단종을 내몰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기회를 노렸다.
먼저 칼을 빼든 것은 결국 세종의 예상대로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세종과 문종의 유지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와 황보인을 비롯한 신하들이 어린 왕을 함부로 휘두르며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동생이지만 라이벌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의 왕권경쟁에 참여한 듯한 애매한 태도도 수양대군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세력을 형성하여 안평대군과 손잡은 재상들(김종서 황보인 등)과 맞섰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한다’는 의미인 정난(靖難)으로 미화시켜 거병했다. 그러나 이 계유정난은 정희왕후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정희왕후는 남편의 왕권에 대한 야심을 늘 걱정하고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남편의 결심이 굳어진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심지어는 정난을 일으키기로 한 아침, 정보가 안평대군 쪽으로 넘어가 거병할 것을 망설이는 수양대군을 독려하여 손수 갑옷을 입혀 말 위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계유정난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급습하여 죽이고 안평대군을 유배보내 죽임으로써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다.
적이 사라진 중앙 정치무대에서 거칠 것이 없어진 수양대군은 바로 왕이 되는 일에 착수했다. 정난에 성공한지 2년 만에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올리고 왕위를 꿰차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되었다. 그의 부인 정희왕후도 왕비자리에 올랐다. 이후 상왕으로 올렸던 단종을 사육신이 일으킨 복위 운동을 빌미 삼아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457년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에서 자살하도록 만듦으로써 세조는 자신이 찬탈한 왕위를 지켜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세조를 격려하고 조언하며 그를 도운 사람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왕비, 그러나 두 아들을 앞세워야 했던 비운의 어머니
명분이 취약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공포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카와 남동생,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벗들의 피를 손에 묻힌 세조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오른 왕위에 겨우 14년간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다음 왕위를 이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큰아들 의경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희왕후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침을 뱉는 꿈을 꾼 뒤 피부병에 시달리게 된 세조를 간호하면서 정희왕후 또한 큰아들 의경세자의 죽음이 예사 죽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 여겼고,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둔 뒤 다음 왕위를 이은 둘째 아들 예종마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며 차지했던 왕권이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것을 정희왕후는 그대로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왕위 계승자를 선택하고 수렴청정을 하다
야심가 세조의 곁에서 그의 정치적 행보를 지켜보았고 또 함께 했던 정희왕후는 이때 아들을 잃은 지독한 슬픔 속에서도 재빠르게 현재의 정치상황을 분석했다. 왕실의 가장 어른자리에 남은 자신의 선택에 남편 세조의 유지와 왕실의 성쇠가 달려있었다.
법대로 하자면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원자(후일의 제안대군)가 이어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불과 4살. 정희왕후 자신이 나서 수렴청정을 한다 하여도 아이가 다 자라기 전에 정희왕후 본인이 죽어 다시금 혼란이 야기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정희왕후는 50대를 넘어서고 있어서 환갑을 넘기기 어렵던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감안할 때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원자는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두번째 후보는 죽은 의경세자의 첫째 아들 월산대군이었다. 당시 월산대군은 16세로, 지금 당장 왕위에 올라도 별다른 무리없이 정치에 임할만한 나이였다. 그는 어머니 수빈(의경세자의 빈, 훗날 소혜왕후)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품성과 교양을 가진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그가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다.
그런데, 정희왕후는 망설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월산군이 병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월산군에게는 그를 뒷받침해줄 세력이 미약했다. 월산군은 병조판서 박중선의 딸과 결혼했다. 명문가문이긴 했지만 권세가는 아니었다.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직접 골라준 혼처였다. 세조가 월산군에게 이런 혼처를 마련해준 것은 왕위를 이을 둘째 아들 예종을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손자보다는 아들이 가까웠던 아버지 세조는 월산군이 권세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예종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손자 월산군이 세력을 키워 아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일찌감치 막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세조는 예종이 1년 만에 북망으로 자신을 따라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고 보니 스무살 예종의 죽음 이후 정희왕후는 처가가 뒷받침이 되어주지 못할 것 같은 월산군을 선뜻 다음 왕으로 선택하지 못했다.
정희왕후는 월산군의 동생 자산군을 주목했다.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조선 최고의 권세가가 된 한명회를 장인으로 둔 자산군은 이제 13세였다. 자산군이 한명회의 딸과 결혼한 것은 그의 어머니 수빈 한씨 (훗날의 소혜왕후)의 의지 덕분이었다. 첫째 아들의 혼처를 정해준 세조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던 수빈 한씨는 내심 시아버지의 그러한 결정이 섭섭했던지 세조가 병으로 정신이 혼미한 때를 틈 타 한명회와 사돈을 맺었다.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왕비가 될 뻔 했던 수빈 한씨로서는 아들에게 처가나마 제대로 선택해 힘을 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수빈 한씨의 이러한 욕심이 결국 자산군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자산군의 장인 한명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가도 처가도 변변치 않았던 단종이 수렴청정을 해줄 할머니마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남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정희왕후는 왕에게 있어서 배후가 될 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뒷받침할 세력이 미약한 월산군이 왕이 될 경우, 자산군을 사위로 둔 한명회가 가만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정희왕후는 골육간의 또 다른 피바람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정희왕후에게는 또 하나의 욕망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성인에 가까운 월산군이 왕이 되어 바로 정치 일선에 나서면 자신은 그야말로 궁궐의 뒷방에 머무는 대왕대비자리에만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나이 어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있었다.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희왕후가 어린 왕을 끼고 수렴청정이라는 공식적인 정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으로 정국을 직접 운영하게 되면 그야말로 조선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정희왕후는 마침내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했다.
일단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기 전에 이미 자산군은 궁궐에 들어와 있었다. 정희왕후가 공식발표 전에 자산군을 은밀히 불러 들여놓고 여타의 잡음이 일기 전에 즉위식을 재빨리 거행할 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희왕후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자산군은 그대로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 9대 왕 성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성종의 뒤에 발을 치고 정희왕후가 국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이다.
신숙주 등이 굳이 이를 청하고, 이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전략)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니 온 나라 신민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자성왕대비전하(정희왕후)께서는 슬픈 정리를 조금 억제하시고, 종사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중략) 모든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들어 재단하여 사군(성종을 이름)이 능히 스스로 정사를 총람하기를 기다려 환정(還政)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를 허락하였다.
-[성종실록] 1권, 즉위년(1469 기축) 11월 28일(무신)
정희왕후는 1469년부터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종친 정리작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비록 단종은 복권하지 않았지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를 신원하여 단종에 대한 죄의식을 어느 정도는 상쇄하려 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정책면에서는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을 강화시켰다. 불교의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사찰을 폐지하였으며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했다. 또한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고 농업과 잠업을 육성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를 도운 것은 세조의 근신이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었다. 이들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엄청나게 큰 정치, 경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훗날 새롭게 정계에 들어오게 되는 사림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 되어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단성있고 노련했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조선의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고 사회는 정돈되어 갔다. 이것은 이후 성종의 친정기에 문물제도가 완성되는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던 해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녀는 세조가 거동(擧動)하던 온양온천에 자주 내려가 있었고 죽음도 온양에서 맞이하였다.
광릉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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