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병원 18층 병동
때로는 살기가 힘들고 답답할 때는 종합 병원의 입원실이나 응급실을 둘러보세요. 그곳에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세세한 사연을 이 지면에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려고 환자와 의사 가족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당신이 하는 고민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구나”
나의 괴로움은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비하면 하나의 사치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필자도 가족 중에 건강이 나쁜 사람이 있어 약 20년 가까이 강남성모병원을 내 집같이 드나드는 동안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느님 저 사람의 건강을 회복주세요” 하는 마음속의 기원을 하게 됩니다.
그 많은 인연(因緣)중에서 병원신세를 지는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에 의한 연분(緣分)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소망도 여러 가지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사람은 텐트집이라도 내 집을 마련하고 세끼밥해결하고 애들 공부시킬정도면 만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가 소원이라고 합니다.
공부를 못한 사람은 학교가는것이 소원입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리야커를 끌고 살더라도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어 천당 가는 소망?
부처님을 믿어 성불(成佛)하여 극락에 가는 소망?
이런 종교적인 소망은 아직 덜 급하여 여유가 있는 소망입니다.
우선은 살고 봐야 하고 천당은 다음 문제이므로 병자의 제1소망은 병이 나아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강남성모병원은 "세계로 향한 병원"이라는 목표로 병원을 신축하여 새로운 시설이 아주 깨끗합니다.
18층병동 × × ×호실!
멀리보이는 관악산이 봄빛을 받아 아련히 보입니다.
뒤로는 한강의 푸른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유람선이 한가히 지나갑니다.
눈앞의 현실은 복잡해도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 낭만의 서울의 전경입니다.
그 서울 속에 또 다른 세상 성모병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옆침대에는 30대 후반의 고운 여자환자가 신부전증(腎不全症)으로 진찰받으러 왔다가 폐암 말기의 청천 벽력같은 진단을 받고 사색이된 남편이 휴게실에서 내손을 붙잡고 절망의 눈물을 흘립니다.
필자가 어제 저녁에 소변 때문에 눈을 뜨니 환자는 턱을 고이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 침대 17~8세로 보이는 처녀!
탤런트 이해교보다 더 예뻐 보입니다.
무슨병인지 모르지만 계속 까르르 웃다가 갑자기 슬피웁니다. 그리고 끝없는 침묵과 시무룩의 연속입니다. 뒤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한숨소리---
왼쪽침대 70대 후반 치매 할머니, 아들이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자랑이 대단합니다.
가족 1개분대가 병실이 비좁을 정도로 자리 잡고 기도와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찬송으로 병실 터를 울린 후 썰물처럼 나갑니다.
그 자랑 많은 가족 중에 할머니 돌보는 가족은 없고 간병인이 간호를 합니다.
창 쪽 환자는 우리 집사람과 동갑인데 백혈병 혈액암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환자의 고통이 말이 아닙니다.
남편의 나이 나와 비슷한데 주름살이 훨씬 많고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침대 옆을 지킨 지가 3개월째랍니다.
필자가 1년 넘게 병실침대를 지킨 경험이 있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집 식구가 이 병실에서는 제일 경증(輕症)입니다.
집에 있을 때는 우리식구가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오면 중증 환자 중에는 경증에 속합니다.
집 사람은 입원 5일 만에 휠체어를 졸업하고 내손을 잡고 걷고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의기양양(?)합니까.
괜히 자신감이 생기고 어깨가 우쭐하고 곧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용기가 납니다.
더 위중(危重)한 환자와 비교위안(比較慰安)에서 오는 카타르시스(katharsis)일까요?
인간이 이처럼 간사스럽습니다.
목숨이 제일 귀하다고 하지만 대통령울 지낸 사람도 검찰조사정도의 스트레스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브라운관의 화려한 탤런트도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는지 자살을 택합니다.
부정공무원의 자살 기업인의 자살, 애인에 배반당한사람 참 여러 가지 사연으로 그 귀하다는 목숨을 간단히 버립니다.
그런데 왜 병이 들면 그렇게 쉽게 버리는 목숨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쓸까요?
80세 90세 살만치 산 노인들도 코에 고무호스를 달고 산소통을 옆에 끼고 영원히 산다는 천국 문을 열기 싫어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50년 전 별생각 없이 읽은 청량리뇌병원장 최신해박사의 “심야의 해바라기”가 생각납니다. 정신병환자의 병원생활 애환을 그린 수필입니다.
건강할 때는 남보다 앞서고 돈 많이 벌고 승진먼저 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리고 “여차” 하면 "저차" 하겠다는 심정으로 눈앞만 보고 살아 왔는데 병들어 병상에 하루 종일 아니 한 달을 누워 천정을 쳐다보면 지난세월 걸어온 일들이 또한 앞으로 걸어갈 길이 만감이 교차되어 파노라마(panorama)되어 옵니다.
지나온 삶이 부질없는 회한(悔恨)으로 이유모르는 막연한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본인 모르게 죽을병 아니면 한번정도는 병상에 누워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했습니다.
환자 당사자와 비교야 될까마는 병상보다 낮은 간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는 환자의 가족도 반복되는 병자 간호에 본인도 모르게 “울컥” 하는 서러움에 목이 잠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도 몇 달 이내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1년지나 5년 10년 20년의 긴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여린 살이 굳어 딱딱하게되는것 처럼 감정도 무디어 갑니다.
이런 감정의 마비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병든 초년의 애타는 심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없이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합니다.
병원치료비를 위한 경제적인 뒷받침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고만고만한 가정형편에 병원비로 인한 가정파산도 한두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에 매달려보기도 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설하는 불경을 읽고, 인(仁)을 강조한 논어, 사랑의 상징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읽어보아도 현실에 고통 받는 마음을 위로받기에는 도움이 안 됩니다.
차라리 소주 한 병으로 잠간동안 정신을 마비시키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부처님이 고민한 사문유출(四門遊出)!
인간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업보를 갖게 되었는가!
기독교의 말대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원죄 때문일까?
아니면 불교의 말대로 세상(世上) 자체가 전생(前生), 현생(現生), 내생(來生)이 반복 유전(流轉)되는 윤회(輪廻)속에서 나타나는 업보 때문인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한 것에 대한 깊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서울대학을 나오고 판검사가 된 병든 자식보다 배우지 못해도 건강하게 열심히 사는 자식이 훨씬 자랑스럽습니다.
명예 돈 지식으로 인한 행복은 죽음 앞에는 모두 허구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모든 문학적 행위, 동상을 세우는 등 추모의 행사등은 살아있는 자들을 치장하기위한 위선(僞善)에 불과합니다.
내가족이 건강하고, 내 친구가 건강하고, 내주변이 건강하여야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첨단의학의 발달에 감사합니다.
의료보험 신약개발 편리한 교통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환자를 돌보는 것이 반드시 힘들고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병도 인간의 삶속에 일어나는 한 부분이기 때문에 고통 속에 행복된 순간도 있습니다.
치료를 받고 효과가 있어 병세에 차도가 있고 손을 잡고 걷는 걸음이 조금 가벼우면 그 기쁨의 순간은 어디에 비할 바 없는 행복입니다.
그 힘든 투병생활을 하면서 다시 떠오른 아침을 맞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살포시 웃는 모습에 코끝이 시큰하지만, 때로는 컨디션이 좋아 같이 시장에 가기 위해서 화장대에 얼굴을 비추고 로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가날픈 뒷보습의 어깨를 보면 환자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 한주부로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인가를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필자의 행복입니다.
저녁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미나리도 사고 홍합도 사고 게맛살도 샀습니다.
까만 비닐봉지를 든 발걸음이 한결 가벼운 것은 내일 이면 더 건강해 질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건강 앞에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되고 하루 세끼 밥 먹고 똥오줌 잘 배설하고 잠잘 자는 일상(日常)에 감사해야 합니다.
친목 모임에서 참석하지 못하는 회원이 있으면 “어디 아파서 못나오나?” 하는 염려가 되는 것이 이제 우리의 나이입니다.
오늘 아침에 아내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면서 조용히 다짐을 했습니다.
여보, 세월이 좋아서 평균수명이 80이라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과욕이요.
80을 살고 나면 90을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이요.
그래서 “할망구”라는 말이 생긴 것이요.
우리는 60세를 넘기면서 잘 살아왔소.
지금부터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요.
덤으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카리스마” 선물이기 때문에
1시간이라도 감사하게 사는 것이 남아있는 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요.
2010년 3월 26일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