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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6일 오늘의 역사
2024년 미국 볼티모어서 대형 컨테이너선이 교각 충돌로 붕괴
싱가포르 선적 컨테이너선 달리호가 동력을 상실한 채 표류하다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를 들이받아 교량이 무너져 다리 위에서 포트홀 보수 작업을 하던 건설 노동자 6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로 인해 미 최대 자동차 수출입항인 볼티모어항은 운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2023년 이집트 신전에서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 머리 미라 2000여개 발굴
이집트 관광유물부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이집트 중부 아비도스에 있는 람세스 2세 신전에서 양 머리 미라 2000여개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미국 뉴욕대 고고학 발굴팀이 이를 찾아냈다고 한다. 양 머리 미라와 함께 개, 야생 염소, 소, 가젤, 몽구스 미라도 함께 발견됐다. 이번에 발견된 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기원전 350년∼기원전 30년)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두께 약 5m의 벽 등 약 4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전의 흔적과 조각상, 파피루스, 가죽 의류와 신발 등도 발견됐다.
2022년 헌법학 대가 김철수 서울대 교수 사망
2018년 참치잡이 어선 마린711호 기니만에서 나이지리아 해적에 피납
마린 711호는 현지시간으로 지난 3월 26일 오후 5시 30분경 가나 인근 해역에서 납치되었다. 납치범들은 같이 타고 있던 가나인 선원 40여명은 그대로 두고 한국인 선원 3명만을 고속단정에 태워 나이지리아 남부로 데려갔다고 한다.
청해부대 문무대왕함이 현장으로 급파됐으며 나중에 3명은 석방 되었다
2018년 김정은-시진핑 북중정상회담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아랍다국적군(9개국) 예멘 수도 사나를 장악한 시아파 후티 반군에 대한 공습 개시 민간인 수천 명 살해
2012년 '불효자는 웁니다' 부른 반야월 별세
반야월은 1939년 경북 김천에서 열린 조선일보·태평레코드 주최 '전국가요콩쿠르 신인가수선발대회에서 우승하벼 가수행활을 시작한다
191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6세 때 진해농산학교를 수료한 뒤 양복점 재단사 보조로 객지생활을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그는 콩쿠르 우승 직후 태평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신카나리아 등 동료들과 함께 음반을 취입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그러나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물범벅이 돼 신곡을 취입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로 시작하는 '불효자는 웁니다'였다.
반야월은 해방 후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고 작사가로 본격 활동하며 대중음악계의 중심인물이 됐다. 작곡가 박시춘과 콤비를 이루며 '유정천리'(1959)등 숱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6·25전쟁 피란 통에 가족과 헤어졌다 극적으로 재회한 뒤 아내로부터 "영양실조로 고생하던 네 살배기 딸이 미아리고개를 넘던 중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비통한 마음에 쓴 작품이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6)다.
피란 시절 마산국립결핵요양소로 위문공연을 가 '불효자를 웁니다'를 부르던 반야월은 객석 뒤편에서 소복 차림으로 흐느끼는 여인을 발견한다. 그녀로부터 "사랑의 상처로 얻은 마음의 병으로 요양 중"이라는 사연을 전해듣고 노랫말을 쓴 게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1957)이다. '아빠의 청춘'(오기택·1964년) '소양강 처녀'(김태희·1968년)처럼 지금까지 애창되는 많은 노래의 가사를 반야월이 썼다.
1991년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으며, 서울 미아리와 충북 제천(1998년·울고넘는 박달재) 등 전국 10여곳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2011년 미국 첫 여성 부통령후보 페라로 별세
"언젠가 여성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때 그 길에는 제럴딘이 있었다는 게 기억될 것이다."(바버라 미컬스키 미 상원의원)
지난 1984년 월터 먼데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미국 역사상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부통령 후보로 기록된 제럴딘 페라로(Ferraro·75) 전 하원의원이 12년간의 혈액암 투병 끝에 26일 별세했다.
뉴욕의 3선 하원의원이었던 페라로는 당초 전국적인 유명세와는 거리가 먼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먼데일 대통령 후보에 의해 '깜짝 부통령 후보 카드'로 발탁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결국 대선에서 참패를 당했지만, 패배승복 연설에서 "나의 부통령 후보 출마는 차별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여성들은 결코 다시는 2등 시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0년 해군 초계함 천안함, 서해상에서 침몰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0분쯤 서해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 초계함 천안함(1200t급)이 갑작스런 충격과 함께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해군 역사상 초계함급 이상 대형 전투함이 폭발로 침몰한 것은 처음이다. 침몰 직후 부터 다음 날인 27일 새벽까지 구조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승조원 104명 중 58명만 구조되고 나머지 46명은 실종되었다.
이후 함수와 함미가 분리되어 각각 해저에 가라앉은 천안함의 실종자 구조, 수색작업은 해군 해난구조대(SSU)잠수사와 해국특수전여단 수중폭발팀(UDT)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작업 10여일 만인 4월 3일 추가 생존자 없이 실종자 가족의 요청에 의해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UDT 소속의 한준호 준위가 3월 30일 함수 부분 탐색 도중 실신해 순직했으며 수색 작업에 참여했던 저인망 어선 금양 98호가 4월 2일 옹진군 대청도 인근해서 침몰했다.
이후 4월 15일 함미를 인양하고 36명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24일에는 함수를 인양했다.
그외 수색 및 인양 작업에서 4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으며 이외 실종 6명의 시신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정부는 천안함 침몰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미국, 호주,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의 전문가 24명으로 민,군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합동조사한 결돠 북한 어뢰공격이 원인인 것으로 맑혀졌다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에 따르면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 침몰했고 폭발 위치는 가스터빈실, 무기체계는 북한의 고성능 폭약 250kg 규모의 어뢰인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9월 13일 최종 ‘합동 조사결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미국과 유럽연합,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UN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되었으며 안보리는 북한의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
2010년 '대한성공회 첫 한국인 주교' 이천환 주교 별세
대한성공회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이천환(李天煥·88) 주교가 2010년 3월 26일 오후 8시 7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192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이 주교는 1953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959년 영국 캔터베리 중앙신학대를 졸업했다. 196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성공회 주교 서품을 받고 서울교구장에 올라 선교사시대를 마감하고 한국인에 의한 대한성공회시대를 열었다.
대한성서공회 이사장과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연세대 재단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영국 여왕 명예훈장(1974년)과 국민훈장 동백장(1985년) 등을 수상했다
2010년 ‘김의 전쟁’ 권희로씨 별세
재일교포 차별에 항의하며 야쿠자를 살해, 무기수로 복역하다 영주 귀국한 권희로(權禧老·82)씨가 2010년 3월 26일 오전 6시 50분쯤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서 별세했다. 권씨는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재일교포 2세인 권씨는 1968년 2월 20일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에서 “조센진, 더러운 돼지 새끼”라며 욕설을 퍼붓는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이어 그는 45㎞가량 떨어진 시즈오카현 스마타쿄(寸又峽)의 한 온천여관으로 달아나 여관 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88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다 붙잡혔다. 당시 권씨는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며 일본 경찰에 사과를 요구했고, 인질극을 지켜보던 어머니 박득숙(1998년 작고)씨는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아들에게 한복 한 벌을 건네기도 했다.
당시 이 사건은 TV와 신문 등을 통해 일본 사회에 생생하게 전달돼 가려져 있던 재일교포 인권과 차별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1992년에는 권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金의 전쟁’이 국내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권씨는 8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1975년 11월 무기징역이 확정돼 31년간의 감옥생활을 하다 부산 자비사 주지 박삼중 스님 주도로 국내에서 일어난 석방운동에 힘입어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99년 9월 7일 영주 귀국, 부산에 정착했다.
하지만 권씨는 귀국 1년여 만인 2000년 10월 내연녀의 남편을 흉기로 살해하려 한 혐의로 구속됐고, 2001년 9월에는 동거녀가 귀국정착 자금 4600만원을 훔쳐 달아나는 등 잦은 형사사건에 휘말려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말년엔 병마에 시달리며 고생했다.
권씨는 열흘 전 자신의 석방운동을 주도했던 삼중 스님에게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뿌려주고, 반은 시즈오카현 어머니 묘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독도 개방 이후 첫 유람선 출항
2003년 천안초교 축구합숙소 화재로 25명 사상
26일 오후 11시 17분쯤 충남 천안시 성황동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에서 불이 나 이 곳에서 잠자던 축구부원 25명 중 고원주(10세)·김바울(10세) 등 8명이 숨졌다.
13분 만에 불은 꺼졌으나 축구부원들이 잠을 자고 있어 피해가 컸다. 경찰은 합숙소의 환기 시설이 모자라고 출입문도 비좁아 사망자 대부분이 질식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推定)했다. 불이 난 합숙소는 1993년 10월에 지어진 벽돌조 슬래브 단독 1층 건물이었다.
최초 목격자 문재정(35세·학원 강사)씨는 “학교 가건물에 갑자기 불이 나고 있어 가보니 축구부 코치 허림욱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건물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학교 관리인 정철호(62세)씨는 “잠자고 있던 학생들이 실신한 상태로 소방대원 등에 업혀 병원으로 후송됐다.”고 전했다. 충남도교육청 강복환 교육감과 학교·체육계 인사들은 대책 회의를 갖고, 천안교육청 3층 회의실에 사고대책본부(본부장 우형식 부교육감)를, 천안초등학교에 합동 분향소를 각각 마련했다.
충남도교육청은 27일을 ‘애도(哀悼)의 날’로 선포하고, 본청과 산하 기관 및 도내 모든 학교에 하루 동안 조기(弔旗)를 게양하도록 했다. 천안교육청과 천안초등학교는 사망 학생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조기를 계속 게양하기로 했다. 천안초등학교는 29일까지 3일간 사고 수습을 위해 임시 휴교 했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이라크전 반대
국가인권위가 발표한 ‘이라크전 반대’ 의견서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이라크전 발발일인 20일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지지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국가기관이 부정하고 나서는 초유의 사태로 볼 수 있었다. 더욱이 ‘파병반대’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반대한다’, ‘신중한 판단’을 촉구해 사실상 파병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추이가 주목되었다.
인권위측은 반전 및 파병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인권위의 ‘침묵’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여기에 인권위 젊은 직원들이 “인권위가 반전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집단행동에 나서는 상황까지 전개되는 바람에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권위측은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제출한 파병안에 대해 국가기구가 반대하면 안 된다’는 신중론도 있었으나, 25일 ‘유엔 세계인권위원회’가 이라크전에 대한 반대의견을 내놓으면서 반전 의견서를 발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말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라크전 반대’ 의견을 발표한 데 대해 “인권위 고유업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권위의 이 같은 행위는 법이 정한 인권위의 소관업무를 벗어난 월권(越權)이라는 지적도 적지않아 논란이 계속되었다.
2002년 정부, 범부처 공동 전산환경을 구축하기로 결정
2002년 제11대 조계종 종정에 법전스님 추대
우리나라가 2001년 3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특별회의에서 회원국으로 정식가입했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미국, 러시아, 영국 등에 이어 33번째 MTCR 정회원국이 됐으며, 대량살상무기 감축, 비확산협약 및 다자수출통제체제에 모두 가입하게 됐다. 이번 가입으로 한국은 사정거리 3백km, 탄두중량 5백kg까지의 미사일을 생산, 배치할 수 있게 됐고, 순수 연구-개발차원에서는 사정거리 5백km까지도 개발이 가능하게 됐다.
MTCR은 1970년대 개발도상국들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종의 확산방지를 위한 규범적 차원의 약속체계다. 공식적인 국제조약이나 협약은 아니며 법적이 효력도 각국의 국내법에 따른다. 1985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국가안보 결심명령서 제70호`를 통해 탄도 미사일 확산방지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면서 처음 구상했고, 1987년 4월 미국의 제안에 의해 서방 7개국간 비공식 협정형식으로 창설됐다.
처음엔 `핵무기 운반 미사일`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93년 1월 이후 `모든 대량파괴무기 운방용 미사일`까지 확대됐다. 2001년 현재 회원국은 33개국이며 회원가입은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2001년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가입
우리나라가 2001년 3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특별회의에서 회원국으로 정식가입했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미국, 러시아, 영국 등에 이어 33번째 MTCR 정회원국이 됐으며, 대량살상무기 감축, 비확산협약 및 다자수출통제체제에 모두 가입하게 됐다. 이번 가입으로 한국은 사정거리 3백km, 탄두중량 5백kg까지의 미사일을 생산, 배치할 수 있게 됐고, 순수 연구-개발차원에서는 사정거리 5백km까지도 개발이 가능하게 됐다.
MTCR은 1970년대 개발도상국들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종의 확산방지를 위한 규범적 차원의 약속체계다. 공식적인 국제조약이나 협약은 아니며 법적이 효력도 각국의 국내법에 따른다. 1985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국가안보 결심명령서 제70호`를 통해 탄도 미사일 확산방지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면서 처음 구상했고, 1987년 4월 미국의 제안에 의해 서방 7개국간 비공식 협정형식으로 창설됐다.
처음엔 `핵무기 운반 미사일`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93년 1월 이후 `모든 대량파괴무기 운방용 미사일`까지 확대됐다. 2001년 현재 회원국은 33개국이며 회원가입은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2000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블라디미르 푸틴 권한대행이 52.64%득표로 당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 겸 총리가 2000년 3월 2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2.64%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날 투표율은 68.8%였다.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는 29.34%를 얻었다.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인 푸틴은 소년시절 007같은 스파이를 꿈꿨다.
명문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법대를 졸업한 후엔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던 KGB에 들어가 15년동안 독일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귀국후 페테르부르크 부시장으로 일하다 개혁파의 대부인 아나톨리 추바이스의 추천으로 크렘린궁에 들어가 대통령 행정실 부시장을 거쳐 1998년 7월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 국장이 됐다. 1999년 8월 총리 임명과 함께 정치인 푸틴으로 변신했고 결국 1999년 12월 31일 옐친 전 대통령의 전격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왔다
1999년 북한 원로 여배우 문예봉씨 별세
서울 출신 북한 원로 여배우 문예봉(82)이 지병으로 1999년 3월 26일 별세했다. 문씨는 1930∼40년대 한국영화 초창기를 풍미한 최고 스타였다. 15살이던 1932년 이규환 감독에게 발탁돼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나운규와 공연한 이래, 1935년 한국 첫 토키영화 ‘춘향전’과 ‘인생항로’ ‘수선화’ ‘나그네’ 등에 출연하며 해방 전까지 ‘3000만의 연인’으로 불렸다.
그는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와 함께 해방 후 좌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다 1948년 월북했다. 이듬해 북한 최초 극영화 ‘내 고향’을 시작으로 1960년대 중반까지 10여편에 출연했지만, 김정일이 문학예술과 선전선동분야를 총괄하면서 이용가치가 없는 배우로 버림받았다.
문예봉은 1965년 ‘조선영화’ 4월호에 쓴 수필이 빌미가 돼 임화계열 ‘종파 잔재’로 몰려 안주 협동농장으로 쫓겨갔다. 그는 이 수필에서 나운규를 ‘길이 빛날 천재’로 칭송했고, ‘천재’라는 용어는 김일성 부자 말고는 누구에게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반혁명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는 1980년 ‘춘향전’ 월매 역으로 복귀했고, 198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으며 복권되면서 유복한 만년을 보냈다.
1997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등 6대도시 시내버스 파업
1997년 미국 사교집단 ‘천국의 문’ 신도 39명 집단자살
1997년 3월 26일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북부 랜초 산타 페에서에서 한 무리의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시신은 여자 21명 남자 18명, 총 39명으로 이들은 잠을 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발견돼 보는 이들을 더 큰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시신들은 머리가 짧게 잘린 상태였고 옷을 맞춰입고 있었다. 또 전원 보라색 천으로 뒤덮여 있어 인위적으로 모양을 맞춘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시체로 발견된 사람들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상태였고 이들의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이상한 내용이 적힌 쪽지가, 왼쪽 주머니에서는 면허증과 5달러75센트가 발견됐다.
이들 중 유일하게 쪽지를 지니고 있지 않은 시체가 딱 한 구 있었다. 이는 과거 텍사스 주 휴스턴의 성 토마스대 음대 교수로 있던 마샬 애플화이트였다. 경찰은 샌디에이고 집단 자살 사건에 대해 애플화이트가 설립한 ‘천국의 문’이라는 신흥종교의 집단자살이라고 결론 내렸다.
천국의 문 신도들은 멸망이 얼마 남지않은 지구를 탈출하기 위해 집단 자살했던 것. 사람들은 39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천국의 문이라는 집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천국의 문은 1970년대 초 마샬 애플화이트에 의해 시작된 단체로 그는 지구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을 버리고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떠돌며 강연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강연을 중단,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맨션을 얻어 정착했다.
지구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받은 소수의 집단이라 강조한 애플하우스는 지구 멸망의 날이 오기 전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집단 생활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집단생활 공간에서 곧바로 추방했다.
이들의 지구 멸망 이유는 헤일밥 혜성 때문이었다. 헤일밥 혜성이 지구와 부딪치면 천국의 문 신도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UFO를 타고 지구를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주머니 속 5달려75센트는 바로 UFO 탑승권 가격이었다. 하지만 헤일밥 혜성은 이들이 집단자살을 한지 5일만엔 1997년 3월 31일 지구를 스치지도 않고 지나갔다.
이후 사교집단의 창고에서는 반자동 소총 등 다량의 무기, 미확인비행물체와 우주에 관련된 책, 인터넷 사이트를 개발하던 컴퓨터, 여러 개의 파일 박스, 그리고 수백개의 비디오 테이프 등도 발견됐다.
이후에도 미국 전역에 숨어있는 천국의 문 신도들은 지구를 떠나기 위해 동일한 방식으로 집단 자살을 시도,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을 벌이기도 했다.
1992년 정부, 통신위원회 구성
1991년 기초지방의회 의원 선거(시-군-구의회 의원선거) 실시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 의해 지방의회의 구성에 관한 유예조항이 철폐됐으며, 1988년 4월 6일 법률 제400호로 전문개정된 지방자치법이 공포됨에 따라 지방자치 부활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1990년 12월 31일 법률 제4310호로 개정된 법률에 따라 1991년 3월 26일 31년 만에 기초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마침내 1991년 4월 15일 초대 기초 시군구의회가 구성됐다.
외형적으로는 정당추천제가 배제된 선거였지만 선거결과는 예상대로 여권의 압승이었다. 정파별 당선자 분포는 당선확정자 4천3백3명 중 민자당 1천9백75(48.7%) 무소속 1천3백21(32.6%) 평민당 7백34(18.1%) 민주당 25명(0.6%)순이었다. 무소속 당선자 32.6% 중 친여성향이 70~75% 선이라는 여측 주장을 합치면 이번 기초의회는 여권이 전국적으로 70% 이상의 의석을 점하는 여대야소 구도로 귀결됐다.
1991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참가
1991년 개구리소년 실종
1990년 한국-몽골, 국교수립
1983년 중국통일학술회의에 중국과 대만학자 참가
1983년 장정구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현역시절 `짱구`라는 별명을 가졌던 장정구 선수가 1983년 3월 26일 파나마의 사파타를 3회 KO로 물리치고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다.
1988년 6월 27일 일본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오하시 히데유키를 8회 TKO로 물리치고 15차 방어에 성공할 때까지 무려 5년간이나 세계왕좌를 지켰다.
장선수는 15차 방어전을 마치고 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했다. 현역 은퇴후 다시 3년이 지난 1991년 5월18일 WBC 플라이급 챔피언 태국의 무앙차이 키티카셈에게 도전했으나 12회로 KO패한 후 링을 떠났다. WBC는 1993년 12월 장정구 선수를 지난 30년간 세계복싱계를 빛낸 가장 위대한 챔피언 40명중 한명으로 선정했다. `챔피언중의 챔피언`으로 선정된 것이다.
1982년 광양만 산업기지개발 구역 지정
1982년 일본, 우라늄 공장 첫 가동
1982년 일본군의 2차대전 중 생체실험 폭로
1980년 차드 내전 격화
1980년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사망
소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문학과 이론의 전위적 움직임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바르트는 1915년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에서 태어났다.
바르트는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다양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체득했다. 청년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 시험을 포기한 바르트는 소르본느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후 젊은 시절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프랑스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3년 `글쓰기의 영도`와 1957년 `현대의 신화`를 잇달아 발표하면서였다. 문학 비평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1970년에 발간된 `텍스트의 즐거움`. 그 이전까지의 독서와 문학비평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던져놓은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문학 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저자가 아닌 `필사자`라는 용어를 썼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 부르주아사회를 둘러싼 신화를 읽어내고 그 베일을 벗겨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1980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인 1980년 3월 26일 사망했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조인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베긴 수상이 워싱턴 백악관 정원에서 31년 동안의 적대관계와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청산하는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1979년 3월 26일 서명했다. 평화조약은 31년 동안 지속되온 전쟁상태의 종결, 이집트-이스라엘간의 국경설정과 국교수립 등을 담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권, 동예루살렘 처리문제 등 복잡한 문제는 차후로 연기했다.
이 서명으로 이집트는 아랍세계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았다. 아랍 18개국 외무장관들은 이집트 카이로와의 외교적, 경제적 단절을 위해 바그다드에 모였다. 이들은 이집트로부터의 자국 대사관 즉각 철수와 1개월내로 외교단절, 경제원조중지 및 경제제재를 부과할 것을 결의했다.
1976년 한국-과테말라, 무역협정
1975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국제적으로 발효
1975년 남북적십자 제9차 실무자회의 개최
1973년 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구속
1973년 3월 26일, 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과 참모장 손영길 준장, 전 육군본부 진급심사실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과 전 육군범죄수사단장 지성한 대령 등 영관급 장교 5명, 전 범죄수사단 요원 이정표 대위 등 위관급 장교 2명 등 10명이 업무상 횡령, 알선 수뢰와 특가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됐다.
윤필용 소장은 1970년 1월 20일부터 1973년 3월 9일 육군본부 대기명령을 받을 때까지 3년 2개월 동안 수도경비사령관직에 있으면서 참모장 손 준장을 시켜 자신의 사조직에 속한 장교들에게 진급, 보직, 해외파견 등의 파격적인 특혜를 준 혐의다.
4월 28일 열린 보통군법회의는 윤소장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2천만원, 추징금 5백90만원을, 손준장에게는 징역 15년에 벌금 2천만원을 김준장에게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1971년 티토, 교황청 방문
1970년 영국 증기선 미국 도착
1969년 소련, 기상위성 메테오르 1호 발사에 성공
1967년 한-미 위성중계 직통전화 개설
1963년 한국-우간다 국교 수립
1962년 전국 10개 교육대학 개교
1962년 한국-뉴질랜드 국교 수립
1959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표적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 사망
1953년 미국 조나스 소크 박사, 소아마비 예방접종 백신인 ‘소크 백신’ 개발
소아마비 혹은 폴리오(Polio)라 불리며 어린이들의 사지를 마비시키는 병은 유사이래 가장 공포스러운 소아병이지만 인류가 이 병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불과 50여 년에 불과하다.
1953년 3월 26일, 미국의 조나스 소크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소크 백신’)을 개발함으로써 이 날은 세계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날이 됐다.
소크는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 1호로 삼아 성공을 확인한 뒤 곧 공개적인 실험접종에 나선다. 미국에서만 매년 5만 8,0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뉴욕의 한 신문이 신문 1면에 환자수를 매일 게재할 정도로 소아마비가 극성을 부릴 때였다.
1955년 4월 12일, 미국의 44개주에서 ‘소크 백신’이 안전하고 유효하다는 결과가 발표되자 패닉현상으로까지 발전했던 부모들의 불안은 열렬한 환호로 바뀌었고 소크는 일약 영웅으로 부상했다.
당시 소아마비 백신 개발은 사균과 생균 두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소크의 방식은 바이러스를 포르말린으로 사멸시킨 사균방식이었다. 곧 이어 알버트 사빈도 약독화(弱毒化)한 생균 즉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백신을 개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소아마비는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빈이 개발한 백신은 주사에 의한 소크 백신과 달리 먹는 백신이어서 간편하고 면역효과도 컸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까지는 매년 2,000여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나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는 연간 200명 정도로 감소되다가 1984년 이후부터는 한 명의 환자발생도 보고되지 않아 2000년 10월에 소아마비의 종식을 공식선언했다.
1948년 바이올린 연주자 정경화 출생
1923년 프랑스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사망
1916년 박중빈, 원불교 창설
1911년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출생
19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단지혈서로 조국 독립에 헌신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안중근 의사는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한다.
동지 우덕순과 상의, 승낙을 얻은 안 의사는 다시 이강의 후원을 받아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안 의사가 살해한 일본인 곧 초대 통감 이토는, 비록 그 자리에서 막 물러나기는 했지만 한반도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의거 후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진 안 의사는 여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됐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이날 사형이 집행됐다.
1902년 ‘다이아몬드 왕’ 세실 존 로즈 사망
영국에서 태어난 로즈는 19세기 후반 다이아몬드 광맥 개발이 시작되자 아프리카로 찾아와서 1887년까지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드비어스사 De Beers Company’ 를 세웠고, 몇 년 사이에 세계 다이아몬드 물량의 90%를 공급하는 벼락부자가 됐다.
남아프리카 재계 1인자로 떠오른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의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1890년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케이프 식민지 총독에 올랐다.
로즈는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했으나, 600명의 군인들이 포로가 되거나 죽는 바람에 국제적인 비난만 샀다. 결국 총독 자리를 내준 로즈는 명예를 잃은 것은 물론 몸까지 쇠약해진 상태로 말년을 보내야했다.
1892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시인 휘트먼 사망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인쇄소 직공으로 일하며 주경야독한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와 신문 편집 등에 종사하다 뉴욕으로 이주, 그 곳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1846년에는 브루클린의 미국 민주당계 일간지 ‘이글(Eagle)’의 편집자가 되었으나 1848년 ‘프리 소일(free soil) 운동’을 지지하는 그의 논설이 민주당 보수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임, ‘프리 소일 운동’의 주간신문 ‘자유민’을 창간해 주필로 활약했다.
1850년대에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목수일을 도와 독서와 사색으로 지내며 시인으로서의 변신을 시작했다. 1855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 시집 ‘풀잎’은 종래의 전통적 시형을 크게 벗어나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한 시집으로 평가받았다.
12편의 무제시가 수록된 `풀잎`의 초판은 전통적인 시작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목소리로 새로운 미국의 이상과 현실을 노래했다. 이 시집은 지속적인 수정과 중보를 거쳐 1892년에는 400여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9판까지 발행했다.
‘카리스마’ 등의 시를 새로이 수록한 3집 발행으로 그는 ‘예언자 시인’으로 자리매김했고, 1867년 발행된 4집에는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북소리’와 링컨 대통령을 추모한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 등을 수록해 민주주의와 우애에 대한 미국인의 신념을 형상화했다.
1884년 독일 피아니스트 바카우스출생
1881년 루마니아왕국 성립
1874년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출생
1827년 독일 작곡가 베토벤 사망
청각을 잃은 작곡가 베토벤이 1827년 3월 26일 사망했다. 독일의 본 출생으로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다. 그래서 그의 재능은 아버지로 인해 펼쳐질 수 있었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했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 할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됐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년), 오라토리오 `감람산상의 그리스도`(1803년),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 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년)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년) `피아노 협주곡 제5번(황제)`(1809년) `바이올린 협주곡` (3곡, 1806년),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년) 등이 유명하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1279년 남송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