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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동네의 조그만 뒷산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중간즈음에 등산로 옆으로 빠지는 작은 샛길이 하나 있다.
부러, 만들어진 인위적인 길이 아니라 사람이 왔다갔다해서 자연스럽게 생긴 길.
그 길을 따라 얼마쯤 더 걸어가다보면 그 끝에는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집 한채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그 낡아빠진 집을 동경했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폐가다, 귀신 나오는 집이라더라 하며 그 쪽 근처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지만
나만은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슬쩍 빠져나와 그 집 앞을 기웃거리곤 했다.
차마 들어갈 용기는 내지도 못한 채 한참동안 집 주변을 빙빙 돌다보면 어느새 해가져서야 집에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어렸던 내 기억에 그 집은 색색깔로 칠해진 화려한 아파트들보다 더 반짝거렸었다.
2.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쏟아져내리는 날씨였다.
나는 머리위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인상을 있는데로 구기고는 불합리한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를 원망하며
끈끈이에 걸려버린 파리마냥 불쌍하게 교실에서 파닥거리고있을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삶을 새삼 애도하면서
슬쩍, 오후 보충수업을 제끼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였다.
학교 정문이며 후문이며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든 기자들의 눈을 피하기위해 담을 넘어야했던 탓에
배로 흘린 땀이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불쾌함을 더했다.
단 한발자국의 나무 그늘이 간절해 초등학생때 이후로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뒷산으로 늘 그래왔던것 마냥 자연스럽게 몸이 향했던건 글쎄,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설령 하나님이 그러한 이유를 미리 점지어놓으셨다하더라도 상관없고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새파랗게 우거진 울창한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스팔트에서 훅훅 뿜어져나오던
뜨거운 열기에 막히던 숨이 트였다. 줄줄 흘러내리던 땀도 거짓말처럼 식어내렸다.
꽤나 마음에 드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면서 6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풍경들을 두리번거리며 생각없이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등산로를 빠져나와 모로 난 샛길을 걷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고쳐매며 툭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변함없는 산의 풍경만큼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낡아빠진 집 한채가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 기억과는 달리 집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는 그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왠 현수막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쾌적한 주민환경을 위한 쉼터 조성' 이라고 딱딱한 글씨체가 휘갈겨져 있는 현수막.
그 현수막을 목이빠져라 올려다보다가 다시 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붕위로 햇빛이 조각조각 부숴져내렸다.
"‥‥."
"‥‥."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제 막 나가려는 중이였던 듯 물빠진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목에는
제 상체 전부를 가리고도 남는 커다란 판넬을 건 새하얀 그를.
'진상 규명'
그의 판넬에 적힌 글자는 딱 네개 뿐이였다.
3.
"아저씨!"
역시나 찌는듯한 더위속을 꿋꿋이 헤치고 거의 부서져 내려가는 주제에 굳게 닫혀있는 문을
벌컥 열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 별 다를 바 없이 푹푹 찌는 열기가 훅 하고
얼굴을 덮고 흘러내렸다.
"그런다고 문 안 부서진다"
덜덜 돌아가는 선풍기 하나를 옆에 끼고 책상앞에 앉은 그가 신발을 휙휙 벗어던지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흘겨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를 지나쳐 부엌으로 걸어가 냉동실 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며 드디어 꽉 막혔던 내 숨통을 틔워주었다.
흐아, 여름 정말 싫다.
"너 고3이라며. 지금 한참 보충수업하고 있을 시간인데 왜 자꾸 여긴 와?"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나무랐다.
어제 내가 한가득 사다둔 아이스크림들 중 하나를 골라 손에 쥐고 냉동실 문을 닫았다.
부스럭거리는 봉지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밖에서는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있었다.
"숨막히는 수험생의 작은 일탈정도?"
"말이나 못하면"
그가 어이없다는듯 코웃음을 쳤다.
그를 따라 웃으며 벗겨낸 봉지를 휴지통에 대충 쑤셔넣고 방 으로 들어섰다.
그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서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책 읽어요?"
"그냥‥"
"어디 보자. 연애소설‥ 아, 가네시로 가즈키꺼다"
아이스크림을 우드득 씹으며 바닥에 주저앉자 그가 그런 나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선풍기를 내쪽으로 조금 돌려주었다.
그 세심한 배려에 감동받은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김 새게도 그는 이미 나에게서
시선을 뗀 후였다.
"가네시로 가즈키, 좋아해?"
"좋아하는 것 까진 아닌데. 재밌잖아요, 이 사람 책"
"뭐 읽었는데?"
"스피드, 레벌루션 NO.3 이 정도?"
거침없는 나의 대답에 그가 알만하다는 얼굴로 핏하고 웃었다.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과 반달 모양으로 살짝 휘어지는 눈꼬리가 이뻤다.
다 큰 성인남자에게 이쁘다ㅡ 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 말고는
그의 웃는 얼굴을 표현할 마땅한 어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것도 재밌어요?"
"개인의 취향이지."
"그러니까 아저씨 취향이냐고 물어본거에요"
"응, 난 재밌는데?"
"그럼 아저씨 다 읽고 저 빌려주세요"
게 눈 감추듯 사라져버린 아이스크림이 아쉬워 빈 막대기를 손에 멀뚱히 든 채로
입맛을 다시자 그가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또 다시 픽하고 웃었다.
"고3이 책 읽을 시간도 있고 여유만만이네?"
"이것도‥"
"작은 일탈정도?"
ㅡ맞아요, 그거.
나의 대답에 그가 이번엔 소리내서 하하웃었다.
별로 재밌는 상황은 아니였지만 그가 웃는 모습이 좋아서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책상 옆에 놓인 판넬에 시선이 갔다.
"아저씨"
"응?"
"‥어, 그러니까"
"뭐야.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은"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씨, 아무리 그래도 여고생한테 똥 마려운 강아지가 뭐에요!
발끈해서 소리치자 그가 이번엔 소리내서 킬킬 웃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는 정말 잘 웃고, 많이 웃었다. 실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물어보려던 말은 슬쩍 삼키고 남자의 손에 든 책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이스크림 무슨맛이 제일 좋아?"
침묵하던 남자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휙 남자를 올려다봤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어 책상위에 내려놓는 남자의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그냥, 다 좋은데‥"
"그 중에서도 제일 좋은 거"
"음‥ 초코?"
"왠지 너 답네"
남자가 또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일곱살 짜리 남자애처럼 해사했다.
무슨 뜻이에요?하고 쏘아붙이려고했는데 그가 나보다 한발 빨랐다.
"그럼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요, 아 근데 갑자기 왜 이런걸 물어요?"
"그냥. 심심해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귀가 따가워서 얼굴을 조금 찌푸리자 그가
내가 질문하는 거 싫어?하고 물었다.
아, 그래서 인상 쓴 거 아닌데.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매미가 시끄러워서"
"그럼 취미‥"
"아, 잠깐만요!이번엔 내가 물어볼래요!"
나의 말에 그가 그러라는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 전 물어보려다가 만 말이 떠올랐다. 한참동안을 방바닥만 쳐다보며 고민 하다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해보라는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저씨는 우리나라 작가중에 누가 제일 좋아요?"
"뭐야. 한참 고민하더니 겨우 그거?"
그러게요, 겨우 이거네요.
푸흐하고 바람빠진 웃음을 뱉어내며 남자가 공지영하고 대답했다.
그 뒤로도 남자와 나는 한참동안이나 잠버릇이라던가 신발을 어느쪽부터 신느냐 라던가
하는 시답잖고 영양가 없는 질답을 주고 받았다.
정작, 묻고 정말로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으면서.
이름이 뭐에요?
나이는요?
군대는 갔다 왔어요?
아직 학생이에요?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을 그에게는 단 하나도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일에 대해서 철저히 방관자이고 싶은 약해빠진 여고생이였고
그는 그런 나의 마음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읽어낸데다가 나를 그의 일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착해빠진 사람이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책. 나 꼭 빌려줘요 아저씨"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짐받듯 한마디하며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는데 아저씨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책에보면 그런 말이 나와"
"‥‥."
"대신, 하나 가르쳐주지. 수드라가 수드라에서 벗어나는 법."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귀 따가울정도로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리고, 그가 곧 사라질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인도에서 탈출하든지, 아니면 인도 자체를 바꿔버리든지."
ㅡ그럼, 잘가.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금붕어마냥 입만 뻐끔거리던 나는 끝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4.
"어우, 동네시끄러워서 원. 살 수가 없네"
오늘도 역시나 화장을 하고 곱게 머리를 빗어넘긴 엄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며
불혹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관리덕분에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너희 학교는 도대체 뭘 하고 있다니?"
전혀 보고있지 않지만 무의미하게 돌아가고있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채로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나에게 엄마가 괜히 눈을 흘겼다.
우리학교?글쎄, 우리학교는 뭘 하고 있더라‥
기자와 경찰들로 붐비던 우리학교의 풍경이 머리를 스쳤다.
"그 애 오빠라는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야?이미 종결된 일을 가지고 왜 그렇게
붙들고 늘어진다니?물론 친동생이 죽은거야 안타깝지만‥제 성적 비관해서 자살한 애를 어떡해?
그러다 집값 떨어지면 책임지겠데?"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엄마의 말이 이어진 것 같았지만 더 이상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웃고 떠드는 연예인들의 목소리도 잔뜩 불만을 품은 엄마의 따가운 목소리도
더 이상, 그 아무것도 들려오질 않았다.
'대신, 하나 가르쳐주지. 수드라가 수드라에서 벗어나는 법.'
그 대신 그의 희미한 웃음과 함께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도에서 탈출하든지, 아니면 인도 자체를 바꿔버리든지.'
그리고, 아까 전에는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ㅡ그럼, 아저씨. 아저씨가 수드라라면 인도를 탈출할거에요, 아니면 바꿀거에요?
5.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는 소란스러웠다.
처음엔 자살한 여자아이에 대해 동정의 모습을 보이던 아이들도 계속되는 어수선함에 점차 짜증을 내고 있었다.
창밖으로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경찰들과 기자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이번에 Y브랜드에서 출시됐다는 한정판 신상 가방에 대해서 줄줄 말을 늘어놓던
지인이가 손바닥을 딱 소리나게 부딪히며 나와 민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 맞다. 니들 그거 알아?"
"알리가 있냐?뭔데?"
핸드폰 게임에 여념이 없는 민아가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분명, 저번주까지만해도 다른 핸드폰을 썻던 것 같은데 민아는 어느새 이번에 새로
출시 된 신형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새삼스러울것도 없는 일에 괜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빠한테 들은건데, 그 자살한 애 오빠있잖아. 매일 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순간, 지인이의 아빠가 검사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새하얀 그의 얼굴을 눈 앞에 그리며 지인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소장 냈데. 학교를 상대로"
"진짜?"
"응. 근데 솔직히 우리학교를 상대로라지만 그 판사님아들을 고소 한거나 마찬가지지"
선생님들은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미 학교내에 그 여자아이의 자살이 단순한 성적비관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판사의 막내아들이 주동이 된 무리가 여자아이를 못살게 굴었고
그에 못 이겨 그 여자아이가 자살했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나가고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판사의 막내아들과
함께 다니던 무리들 중 몇명이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면서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게됐다.
"안됐다. 그 여자애도 그 여자애네 오빠도"
"응, 그러게. 근데 그건 그렇고 너 시계 샀어?"
"아, 이거?응. 우리 언니가 미국에서 사다준 거야. 이쁘지?"
"완전 이쁜데?얼마래?"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거의 백?"
민아와 지인이의 대화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민아의 손목에 채워진 명품 시계와 그의 손목에 채워져있던 낡은 가죽시계가 겹쳐보였다.
민아와 지인이는 까르르 웃으며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나만은 웃을수도 그렇다고, 울수도 없었다.
분명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웠다.
하복 와이셔츠아래로 드러난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에어컨이, 너무, 추워서, 몸이 떨렸다.
6.
아저씨를 볼 자신이 없어서 곧장 집으로 돌아온지 이틀째였다.
그 말은 즉 아저씨가 고소장을 낸 지 이틀이 지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 엄마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힘없이 침대위로 엎어졌다.
이길리가 없는 싸움이라는 걸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여자아이가 자살한 다음날, 학교 급식실에서 우연찮게 본 판사님 막내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멀쩡한 얼굴로 제 친구들과 킬킬거리며 웃고 떠들기까지 하던.
눈을 길게 감았다 떳다.
창 밖으로 잔뜩 흐린 하늘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안개가 껴서 창 밖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최하원, 나와서 전화 받아!"
방 밖에서 엄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보니, 핸드폰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기적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탁자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나 지인이. 너 왜 핸드폰이 꺼져있어?"
"아, 배터리가 다됐나봐. 무슨 일이야?"
대충 둘러대며 쇼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틀어진 텔레비전에서는 연속극이 한창이였다.
서럽게도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여자주인공에게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켰다.
-"니가 그 여자애 오빠가 고소한거 상황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알려달라그랬잖아"
"아, 응. 어떻게 되가고 있는데?재판한데?"
-"아, 그게 고소 취하됐데."
전화기 선을 타고지인이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쏴아아- 하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7.
비가 내렸다.
예고도없이 시작되버린 장마였다.
세상을 집어삼킬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비가‥ 참, 많이도, 쏟아졌다.
8.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무섭게 퍼붓는 빗속을 뚫고 뛰었다.
자꾸만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비가 시야를 가렸지만 무조건 달렸다.
'거의 반강제로.'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던 지인이의 말이 귓바퀴를 타고 맴돌았다.
아스팔트바닥에 부딪히며 깨어져나가는 빗방울의 결정들이 눈 앞에 선했다.
"아저씨!"
쏟아지는 빗물을 그 자리에 선채로 무력하게 받아내고 있는 낡아빠진 집의 형상이
오늘따라 유독 볼품없었다.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 해 본적이 없는데도.
늘 그가 핀잔을 주곤 했지만 오늘도 역시나 부서져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흠뻑 젖은채로 물을 뚝뚝 흘리며 신발조차 벗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쯤되면, 들려야 하는데‥
'그런다고 문 안 부서진다'
하는 퉁명스럽게 나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차마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내 두 발이 방 앞에서 우두커니 멈춰섰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비어버린 방 안이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다.
‥없었다. 아무것도.
책상도, 방 한 구석에 잘 개어진채 놓여져있던 이불들도, 책상위며 바닥이며 한가득 쌓여있던 책들도
벽에 걸려있던 옷가지와 낡은 분홍색의 가방도, 책상위에 놓여져있던 액자도
‥‥늘 그의 책상옆에 가지런히 세워져있던 커다란 판넬마저도.
'아빠는 그냥 고소 취하됐다고만 말했는데 아빠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거든'
지인이의 목소리가 집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섞인다.
'학부모들 항의도 심한데다가 판사님 막내아들이 얽힌 일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해결을 해라.
무력을 써도 상관없다. 뭐, 대충 이런식이였는데‥'
떨리는 다리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던 바닥에 진한 발자국이 생긴다.
'그 여자애 자살하던 날에도 무슨 일이 있었나봐. 아빠가 증거가 어쩌고 하는 말도 했었거든'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진 네모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빗물 때문에 흐려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몇번이고 눈을 비볐다.
방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건 다름아닌, 책이였다.
'그럼 아저씨 다 읽고 저 빌려주세요'
‥‥장마는 이제 시작이였다.
9.
ㅡO월O일O시에 일어난 서울 모고등학교 여학생(이하, S모양) 자살사건이 끝내 성적비관에 의한것으로 밝혀졌습니다.
S모양은 어려운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명석한 두뇌와 노력으로 모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계속해서 하락하는 자신의 성적에 극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으로
짐작된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최진우기자 연결합니다.
‥‥
‥‥‥.
저마다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길거리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멈춰선 나를
인상을 찌푸리며 한번씩 돌아봤다.
그가 사라진 이후로 자살사건은 결국 단순한 성적비관에 의한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속에 떠 있던 국내에 다섯개뿐인 명문고등학교 답게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뉴스거리가 스크린을 통해 아프게 눈을 찔러왔다.
며칠째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비가 아스팔트바닥에 제 몸을 부딪히고 그 반동으로 다시 종아리께로 튀어올랐다.
말 그대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미친듯이 퍼부어대는 비는 거의 기함할만한 강수량을 기록했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못 박은것처럼 서 있다가 이내 천천히 발을 뗐다.
ㅡ세상은, 빌어먹을 개 소리의 연속이였고
그 속에서 나는, 나는‥
10.
그가 사라진지 이주일이 흘렀다. 학교는 아무일도 없었던 양 안정을 되찾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왔다갔다하던 경찰과 기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동네도 예전처럼 조용해졌다.
비가 계속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쉼터조성계획이라는 명분으로
그의 집이 철거 됐다.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부서져버린 그의 집을 바라보며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를 다 맞으면서 나는 조금 울었다.
더 이상, 그 곳에 반짝거리던 그의 집은 없었다.
나는 그 뒤로 두번다시 그 쪽 근처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단 한장도 넘기지 못한 책이 그대로 들어있었고,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첫댓글 '아저씨'가 '자살한 애 아버지'인 것이죠? 왜인지 모르게 혼란이 오는..(제가 바보라서 그렇슴.)
잘 보고 갑니다요.
아빠는아니고오빠에요!아저씨라는표현을써서그런가봐요ㅠㅠ..감사합니다~
이름이 뭐에요?
나이는요?
군대는 갔다 왔어요?
아직 학생이에요?
요 내용 보고 전 아저씨가 대충 20대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읽기에는 글에서는 확실히 자살한 아이와 직접적인 연관고리는 드러나지 않고, 인도 카스트의 수드라라는 표현만이 서로의 공감대 같이 느껴지는데.. 저도 잘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