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서로에게 신년 인사로 ‘부자 되세요’, ‘뜻하시는 일 다 이루세요’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이 유일한 지상과제인 것처럼 집단최면에 사로잡히고 강박관념에 눈 먼 현실의 한 단면이 그렇게 드러났다. 문제는 그리스도인 중에도 이런 착각에 빠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부자 되기’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루는 삶’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하느님께 희망을 둘까?
‘설’ 명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주목하자.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축복의 말을 나누도록 명하신다. 여기서 ‘축복’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염원하는 ‘물질의 풍요’가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1독서는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가?’,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를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이어서 2독서에서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로써 허락된 것이니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 숙고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매일의 허락된 일상이 더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루의 삶을 더 중요한 일을 돌보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또한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의 풍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영육간 건강 돌보기, 하느님·친구·이웃·가족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돌보기’와 같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는 불행한 선택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2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지금 살아있음을 당연시하며 살아가는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이 정말 꼭 해야 하는 것이 물질의 풍요를 위해 애쓰는 것인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유를 들어 ‘사람의 아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신다. 정리하면, 우리는 각자 소명을 받았다는 것, 우리가 소명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는 것,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사람의 아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이 될 수도 있지만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설 명절에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 가족과 친지들과의 만남은 큰 행복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는데, 통상적인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면 서로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더 나눌 대화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어색함은 그동안 가족, 친지들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서로의 관계가 소원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불편한 침묵은, 우리가 삶을 잘못 사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한다.
새해를 맞아 우리는 조상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조상들과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오늘의 내가 있음이 더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내가 살아가며 추구하는 가치를 성찰하고 삶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매일의 삶은 전혀 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올 해 우리가 서로에게 빌어 주어야 할 축복의 내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