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람과 그의 나귀
민 22:15-30
15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16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17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22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민 22:15-30 / 그래서 발락이 이번에는 지체가 더 높은 이들을 더 많이 발람에게 보냈다. 16) 그들은 발람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발락의 전갈을 전하였다. `십볼의 아들 발락이 아룁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리로 올라오십시오. 17) 그대를 성의껏 대접하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올라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애굽에서 왔다는 이 무리에게 화가 내리도록 저주를 빌어주십시오.' 18) 그러나 발람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발락이 자기 궁전에 있는 은과 금을 다 준다고 해도 나는 올라갈 수 없소이다. 나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어길 수는 없소. 19) 하지만 당신들도 이 밤을 여기서 지내도록 하시오. 내가 지난번처럼 여호와의 뜻이 어떠하신지 여쭈어 보겠소. 혹시라도 내게 다른 말씀을 하실지 모르니 말이오.' 20) 그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 이르셨다. `너를 찾아온 사람들이 또다시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졸라대거든 따라가거라. 하지만 가더라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라.' 21) 그래서 이튿날 발람은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 지도자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22) [눈이 밝아진 나귀] 발람이 길 떠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화가 나셨다. 발람이 나귀에 올라타고 두 종을 거느리며 길을 가는데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23)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는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심부름꾼을 보고서 깜짝 놀라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뛰어들었다. 발람은 길로 들어서게 하려고 나귀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24) 그러자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양쪽이 담으로 둘러쳐진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을 막고 섰다. 25) 나귀가 여호와의 심부름꾼을 보고 몸을 포도원 담벼락에 마구 비벼대자 발람은 발에 상처를 입었다. 발람은 더욱 힘껏 나귀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26) 여호와의 심부름꾼은 옆으로 피할 수 없는 좁은 골목까지 나귀를 몰아세웠다. 27) 나귀는 그러한 여호와의 심부름꾼을 바라보고는 무서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람은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나귀를 마구 때렸다. 28) 그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고 사람의 말을 하게 하셨다. 나귀가 발람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였다고 이처럼 세 번씩이나 나를 때리십니까?' 29) `네가 나를 이렇게 바보 취급하지 않았느냐? 내 손에 칼만 있었다면 너를 당장 베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고 발람이 말하였다. 30) `나는 일생 동안 주인님이 타고 다니던 나귀가 아닙니까? 이제껏 지금처럼 마구 날뛰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하고 나귀가 볼멘소리를 하였다. `없었지' 하고 발람이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발람이 가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공의로 진노하십니다.
더욱 강한 유혹(15-19)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어 발람에게 막대한 재물을 약속합니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자 더 큰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사명을 머리로는 알았고, 그래서 “집에 가득한 은금을 줄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발락의 고관들을 자기 집에 유숙하라고 하며,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경건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발람이 자기 욕심으로 하나님을 조종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과 진노(20-27)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발락의 사신들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이미 재물로 기울었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요 13:27). 발람은 들뜬 마음에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에’ 일어나 출발합니다. 그때에 발람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습니다. 발람이 가는 모습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허락은 하셨지만, 그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었기에 공의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마땅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길 막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미 탐욕으로 눈이 먼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고, 나귀가 봅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피해 밭으로 들어서서 주저앉지만 발람은 자기 욕심에 나귀를 채찍질합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피해 발람 밑에 엎드리자 발람은 지팡이로 때립니다. 발람이 진실한 신앙인이었다면, 가는 길에 벌어진 힘든 상황을 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어야 마땅합니다.
나귀의 입을 여신 하나님(28-30)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십니다. “내가...무엇을 하였기에...때리느냐?” 이에 발람은 거역하기 때문이라며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이 말이 씨가 되어 이후 발람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민 31:8). 나귀와 발람, 둘 중 누가 더 신령합니까? 적어도 나귀는 자기 앞에 있는 심판을 보고 피했지만 발람은 눈앞에 있는 진노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나귀는 비록 잘나지 못했지만 순종하는 자의 모습을, 발람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나 불순종하는 거짓 리더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실한 신자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순종하는 자입니다.
적용: ‘주님’이란 호칭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표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니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주어야지!’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줍니다.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사랑을 받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먼저 찌푸린 얼굴을 거두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 값 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 설 교 >
나귀가 말을 다하다
민 22:20-35 / 김영수 목사
제가 구약성경을 공부하던 중 가장 인상깊고 재미있었던 부분이 바로 나귀가 말을 하는 오늘의 장면입니다. 이 본문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저는 성경에 돌들이(눅 19:40), 나무들이(대상 16:33),소리지르는 것만을 알고 있다가 나귀까지 말을 하는 장면을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돌들이나, 나무, 나귀와 같은 피조물보다 무엇이 낫겠습니까? 오히려 자연과 동물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살며 고유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찾는데 우리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발람 선지자가 화를 당한 것과 같은 징벌을 당하지 않을 까? 하는 두려움의 염려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현 시대를 가르쳐 '물질만능주의시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나귀와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던져주는 교훈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Ⅰ. 발람 선지자는 어떤 사람인가?
'발람'은 '브올의 아들'(민22:5)로서 그 이름의 뜻은 '탐닉자', '백성을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석 가들은 발람을 암몬의 자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므로 정통적인 유대인은 아니지만, 롯의 후손이므로 유대인과 가까운 족속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인지, 발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면 복을 받고 그가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는 일이 있는 것 같고 그가 행한 많은 예언들이 적중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잘 통하는 선지자로 널리 알리어져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발람 선지자에게 모압 왕 '발락'이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 오늘 사건의 시작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난 후에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갈 때 지나가는 코스에 그 당시 강대국에 속한 '아모리'라는 나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나라 '시혼'왕에게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 물로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대로(大路)로만 통행하리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우리로 당신네 지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했습니다.(민21:22)
그러나 시혼 왕은 단호하게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향해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아모리 족속을 쳐부수고 아모리 족속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죽인 후 그 땅을 점령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라고 두려워서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짜낸 아이디어가 신통한 능력을 가진 발람 선지자를 찾아가 많은 물질과 권세 높은 자리를 약속하면서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요청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저주함으로 이스라엘의 힘을 약화시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대는 특별한 무기도 없고 뛰어난 병사들도 없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막강한 힘을 발하는 것을 보고, 그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도록 해 달라는 엉뚱한 요청이었습니다.
이 같은 발락 왕의 요청에 대하여 발람 선지자는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물질의 욕심에 이끌려 질질 끌려 다니다가 결국에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칼에 맞아 죽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민31:8) 이러한 저주의 심판을 받기 전까지 발람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할 수 있는 수 차례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않음으로 끝내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발람 선지자가 모압 왕 발락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 있어서 나귀를 통해 발람의 잘못된 길을 깨우쳐 주고 못 가도록 막지만 한번 물질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그 물질의 시험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것과 또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물질적 욕심의 배후에 사탄의 계략이 숨어있다는 것을 오늘 "말하는 나귀의 이적"을 통하여 깨닫게 될 것입니다.
Ⅱ.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우리가 오늘 본문 22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장면은 발락 왕이 어떻게 발람 선지자를 유혹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자를 보내어 한없이 발람을 추켜세워 교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사탄 마귀가 뱀으로 변장하여 하와를 유혹할 때도 한없이 치켜세우면서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까하여 하나님이 금한것이라."(창3:5)고 하면서 교만의 마음을 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받을 때에 발람은 사자들이 칭찬하는 말에 솔깃해서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말하고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를 " 이 사람들은 나를 오라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는데 어찌하오리까?"(8절)
그때 하나님은 단호하게 답하시기를 "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12절)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높은 귀족들을 보내어 "그대를 대단히 높여 주겠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여 주겠다."(15절)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18절에 보면 "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나는 예언하겠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발람 선지자가 참 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과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단호하게 그들을 돌려보내지 못하고 19절에 있듯이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답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면서 마음은 물질과 권세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한 손은 세상 물질의 욕심을 붙잡은 채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여, 저들이 저렇게 졸라대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만 순종하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없는 입바른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의 순종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사탄이 "선악과를 따 먹으라."할 때에 처음에는 말씀으로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의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발람이 이렇게 애원의 기도를 계속 드리자, 하나님은 그 욕심의 마음을 아시고 발람에게 가라고 허락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이 마음 중심에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에서 나올 때 '자기 마음대로 해 보라'고 허락하신 후 그 과정이나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때가 있으십니다.
발람과 유사한 상담을 제가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 목사님! 저희가 집을 옮기려고 하는데 군문동 주공아파트는 값도 비싸고 평수도 맞지 않아서 그냥 주공 3단지로 옮길까? 도 생각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치 않은지........ 사실 교회가 새로 건축을 하고 IMF로 인하여 빗에 찌들려 있는데 교회 건축헌금도 한 푼 못하면서 내 집을 옮긴다고 하는 것이 너무 부담이 가서요..... 목사님께 집을 사지말고 건축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면 드리려고 하는데 목사님 생각은 어떠신 지요?』하고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상담을 하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상담이지 자기가 이미 일을 다 결정해놓고 '목사님 생각은 어떠신지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제가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 그 문제에 대해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결정한다고 해서 그대로 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집사님이 기도해서 결정하십시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후 보름도 채 안되어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그 일 이후 평수를 늘려 집을 옮기는 바람에 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1만원씩 하던 회비도 내지 않더니만 결국 다른 교회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물질에 욕심을 빼앗긴 인간의 모습이고 그 마음 뒤에는 사탄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신앙인과 같습니다. 물질의 가시 때문에 더 이상 신앙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작정하며 기도하지만 그 중심에 물질의 욕심이 매어있는 고로 물질의 문제만 나오면 언제든지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의 순종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진실함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막12:30) 그때 하나님은 그러한 순종을 기뻐하사 큰 능력과 이적을 통하여 삶에 참된 평안과 만족과 기쁨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간섭하심
세상 명예와 물질욕으로 가득 차 있던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모압 왕에게 가는 것을 막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건부 허락을 받고 발락 왕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발람의 회개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고자 애쓰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 말씀으로 막으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여러 번 말씀으로 발락에게 가지 말것과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 것을 발람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욕심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때로 우리 성도들도 잘못된 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혹은 설교를 통해서, 혹은 주의 종의 충고를 통해서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분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세상 길로 가다가 요나처럼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의 풍랑을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헛셀 포드 목사님 교회의 어느 한 청년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목사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사업을 잘 해서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를 위해서 축복 기도도 해주고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과연 청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졌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바빠지면서 청년은 교회를 자주 빠지고 십일조도 잘 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사업장으로 심방을 가서 "왜 주일 성수도 잘 못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느냐?"고 꾸중하자 청년은 " 죄송합니다. 사업이 잘되면서 바쁘다 보니까 자주 교회를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십일조의 액수가 커지면서 십일조를 드리기가 조금은 부담감이 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청년 실업가의 손을 잡고 "우리 한번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후 "하나님이시여, 이 형제의 수입이 너무 커서 십일조 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수입의 규모를 훨씬 줄여 주셔서 온전한 십일조를 하게 하옵시고, 또한 교회를 출석하고 싶어도 너무 바빠서 못 나온다고 합니다. 사업장을 적게 줄여 주셔서 교회를 예전처럼 열심히 출석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 그제야 청년은 눈물로 회개하면서 교회출석이나 십일조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청년이 목사님의 기도를 듣고 "너무 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화를 내며 그 말씀을 거절했다면 그 사업은 큰 풍랑을 만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당나귀를 통해서 막으셨습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인데도 탐욕과 야망의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나귀를 타고 발락을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았습니다. 나귀는 이를 보고 피했으나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한날 미물인 나귀도 하나님의 사자를 보는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만큼 욕심으로 영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질의 욕심과 정욕에 눈이 멀면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요즈음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가정 파탄과 부모 토막살해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고리대금 업자들이 선이자까지 받아놓고서도 빌려 준지 이틀만에 돈을 갚으라며 휴학중이니 대학생을 창녀촌에 팔아먹다 잡힌 이야기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등...... 우리 주위에 오늘도 물질 욕과 정치 욕에 눈이 먼 사람들로 인해 나라의 경제와 국가 신용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돈에 눈이 먼 발람은 자기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려는 애꿎은 나귀만 때립니다. 이 번에는 나귀가 안타까운 나머지 발람의 발을 돌담에다가 비벼댔습니다. 그러자 발람의 발에 상처가 나고 피자 흐르자 화가 단 발람은 채찍을 들어 나귀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러자 나귀는 아예 주저 앉아버립니다. 발람은 더 열을 받아 나귀를 마구 때렸습니다.
보다못한 하나님은 당나귀의 입을 열어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이나 때리느냐?"(28절)고 항변하게 하였습니다.
당나귀가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람은 자신이 타고 다니던 나귀가 인간처럼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아니! 나귀가 말을 다하다니.....!"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며 당황하기만 할 뿐 나귀의 입을 여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발람은 역정을 내면서 나귀에게 말하기를 "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으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9절) 나귀가 다시 말합니다.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가 이같이 행하는 행습(行習)이 있더냐?"(30절)고 항변합니다. 발람은 한발 뒤로 물러서며 "없었느니라."고 답했습니다.
이때라도 발람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멸망의 길로 갈 때에 주변의 사람을 통해서든 지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빨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요나처럼 사명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교만하지 않았는가? 내가 주의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하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어느 때는 자식의 입을 통해서 또는 남편과 아내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 엄마는 예수 믿는 집사가 되가지고 왜 그래! 그 따위로 교회를 다니려면 그만둬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말과 행동이 다르니......"하며 충고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충고와 도전을 받을 때 자신을 살펴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조그만 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때리거나 남편과 아내에게 역정을 내어서는 안됩니다.
3. 발람의 눈을 열으신 하나님
31절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어리석은 발람의 눈을 열어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목에
지켜 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탐욕 때문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옷과 물건을 숨기다가 문둥병자가 되었고, 요나 선지자가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딱한 신세가 되고, 가롯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를 팔고 후회하여 목매어 죽은 것처럼 ........
딤전 6:10에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는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사랑하다가 세상 명예와 쾌락을 사랑하다가 그만 멸망의 길로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악을 행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 말씀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딤후3:16-17)
Ⅳ. 탐욕의 끝은 죽음
탐욕은 우상숭배이기에 결국 저주를 면치 못합니다.
발람은 우여곡절 끝에 발락 왕에게 갔습니다. 그는 여러 번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받았기에 발락이 갖은 애원과 갖은 유혹, 갖은 위협을 해도 세 번, 네 번 예언을 해도 끝까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발람 선지자가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 탐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고로 훗날 미디안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하게 만드는 지혜를 만드는 지혜를 일러주는 반역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때도 미디안 사람들이 발락 왕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강하게 유혹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잘못된 행위로 말미암아 민수기 31:8절에 있는 대로 모세의 명령에 따라 칼에 맞아 죽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같은 죽음은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약1:4-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치욕적인 이름을 남겼습니다.
벧후 2:15-16절에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주 안에서 선을 심은 자는 선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악은 심은 자는 악의 열매 멸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물질만능주의로 치닫고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발람처럼 욕심을 따라 살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가 아니요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 생명과 영광과 존귀함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육간에 넘치는 축복을 받는 늘찬양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다리 신앙은 아닙니까?
민수기 22:21-30 / 조영식 목사
12월 첫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한해가 한 달도 채 남치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해를 잘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국회에서 중국과의 FTA 비준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국의 위안화가 IMF의 기축 통화로 편입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쩐의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쩐의 욕심 때문에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미디안의 복술자 발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마6:24).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저울질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양다리를 걸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무엇에 흔들리는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두 족속을 정복했습니다(민21:21-35). 이 소식을 들은 모압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3절). 모압 왕 발락은 미디안의 복술자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6절). 그리고 모압의 장로들이 복채를 가지고 발람에게 찾아갔습니다(7절).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선지자처럼 대답합니다(8절). 그는 복술자와 선지자의 양다리 모습으로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이처럼 발람이 양다리가 된 것은 예전에 선지자였으나 언제부턴가 변질되어서 복술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들 저주하지도 말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12절). 그리고 모압의 장로들을 돌려보냈습니다(13절). 여기까지 양다리 발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줄 알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은 한번 거절당한 것으로 포기하지 않고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서 높은 관직과 백지 수표와 같은 복채를 제시하면서 다시 초청합니다(17절). 발람의 처음 순종하는 마음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말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였습니다(18절). 그러나 복채에 흔들려서 유혹된 마음은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였습니다(19절). 여기서 그는 처음 순종했던 마음이 많아진 복채를 보면서 흔들렸습니다. 진짜 순종하는 믿음은 세상의 좋은 조건으로 유혹할지라도 말씀을 의지함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아진 복채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을 위해서 말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가?
발람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알면 끝까지 모압 왕의 제안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갔다”고 합니다(21절). 이런 동일한 장면이 아브라함에게도 나옵니다. 그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갔습니다(창22:3). 발람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침에 일어나서 행동하는 것은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마음이 어디로 흐르느냐?”에 있습니다. 발람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의 마음이 자신의 이익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도 온전한 순종을 위해 흐르고 있습니다. 만약 발람의 마음이 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로만 흘렀다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들고 막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는 겉모습은 동일해 보이지만 “마음이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서 서로 차이가 납니다. 봉사할 때도 “마음이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흘러야만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람의 마음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흘렀기 때문에 모압의 장로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흘렀다면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만족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종교 행위에 불과합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흘러서 깊은 만남과 순종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갈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았습니다(22절). 여기서 주님이 허락했는데 “왜 길을 막을까?”라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허락한다는 의미를 알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발람은 주님께 매달려서 그들과 함께 갈 수 있도록 조건부 허락을 받습니다(20절). 여기서 문제는 허락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지만 허락해 주셨습니다(삼상8장).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주님께 청하여 허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우리가 청하여 허락을 받은 것은 중립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죄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오늘 본문도 발람이 허락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에 선 것을 본 나귀는 첫 번째로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했습니다(23절). 두 번째로 발람의 발을 담에 짓눌렀다가 다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25절). 세 번째로 발람 밑에 엎드렸다가 주인이 노하여 지팡이로 때렸습니다(27절). 발람이 나귀의 세 차례의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자 짐승의 입을 여셨습니다(30절). 그리고 그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는 보게 하셨습니다(31절). 복술자 발람이 한치 앞도 보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말씀보다 자신의 마음이 앞서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복채를 받고 싶은 마음이 말씀보다 앞섰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길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세상 것을 비울 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마음에 있는 세상 것을 비우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짐승보다 더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여 모압 왕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복술로 예언을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자신이 죽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나귀는 주인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똑똑할지라도 짐승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세상의 지혜를 내려놓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는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발람은 무엇을 사랑하여 따라갔습니까? 베드로는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고 합니다(벧후2:15,16). 발람은 선지자와 복술자의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결국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불법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다가 그 결과가 결정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무엇을 사랑하여 따라갔습니까?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세상에 미치지 않고 바른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첫째는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바꾸지 않고, 우리들의 변화를 위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둘째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욕심으로 흐르지 않고 오직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흐르게 하소서. 셋째는 우리의 마음이 말씀보다 앞서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을 알게 하시며,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세상에 미치지 않고 바른 길을 따라 갈 수 있게 하소서.
나귀가 말을 한 이유
민 22:21-30 / 박봉수 목사
교훈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이야기방식 가운데 ‘우화’(fable)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동물을 등장시켜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게 하고, 그 동물들이 빚어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설화(說話)를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이 우화의 특징은 등장하는 동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앵무새처럼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똑같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 사자, 황새 등 수많은 동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나귀가 말을 합니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동물이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것도 직접 사람과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 본문 이야기가 우화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동물일 뿐입니다.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이 말하는 것처럼 꾸며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나귀는 진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우화가 아니라 이적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나귀가 말을 하게 됐을까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행군을 한 지 40년이 다되어갈 때입니다. 저들이 요단강동편 모압평지에 진을 치게 됐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겁이 났습니다. 주변나라 아모리와 바산이 이스라엘에 맞서다가 땅을 빼앗겼고 나라가 망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당시 유명하다는 점술가를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함으로써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신들을 유브라데 강가 브올에 살고 있던 점술가 발람에게 보냈습니다. 사신들이 복채를 주며 함께 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거절했습니다. 발락 왕이 이번에는 더 높은 지위의 사신을 보내서 원하는 것 다 해줄 테니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 테면 가는데 말씀하신 것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발람이 나귀를 타고 두 종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길을 막으셨습니다. 나귀가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의 좁은 길에서 길을 막았습니다. 나귀가 보고 몸을 담에 대고 피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피할 데가 없는 좁은 길에서 길을 막았습니다. 나귀가 발람 밑에 엎드렸습니다.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서서 말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나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발람이 “없었느니라”고 답했습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자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
그러면 나귀는 왜 말을 하게 됐을까요? 나귀가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 뜬 장님
나귀가 말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발람이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배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라고 되어있고, 25절을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라고 되어있고, 그리고 27절을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나귀가 세 번이나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죽이려고 앞에 서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나귀가 본 것을 보지 못하고 나귀를 세 번이나 때렸습니다. 왜 가지 않느냐고 때린 것입니다. 나귀도 본 것을 발람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나귀가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말에 “눈 뜬 장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엇을 보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면서도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연암 박지원의 [요술이야기 후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화담 선생이란 분이 외출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다오. "너는 왜 우느냐?"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오.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 마흔 살입니다. 예전에 길을 갈 때는 발에 보는 것을 맡기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 보이는 것을 맡기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맡기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별안간 맑아지고 눈동자가 저절로 열렸습니다.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여 온갖 사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았습니다. 손과 발, 코와 귀는 뒤죽박죽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집이 어디인지 까마득하게 잃어버려 홀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에 울고 있습니다."
그러자 화담 선생이 말했다오. "네가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저절로 알 것이다." 그러자 소경이 말했다오,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 쓰겠습니까?" 화담 선생이 말했다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을 것이다.
40년간 소경으로 살 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들어온 보이는 것들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눈 감고 있을 때 찾아갈 수 있던 집을 오히려 눈을 뜨고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오히려 과거에 보던 것을 보지 못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눈 뜬 소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발람이 그랬습니다. 높은 자리를 보장 받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온통 마음은 높은 자리에 올라 목에 힘줄 일들 생각에 들떠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소원을 말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듣기 전에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듣기 전까지 여호와의 음성을 듣던 사람인데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영안이 닫히고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버립니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됐던 것처럼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영적인 것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해도 영감을 얻지 못하고 주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고 주님과의 영적 소통이끊어집니다. 그래서 막 8:18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처럼 그렇게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오해
본문을 보면 나귀가 말을 했지만 말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서 발람에게 말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발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셨을까요?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발람을 책망하려 하신 것입니다. 먼저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을 책망하려 하셨습니다.
발락 왕이 처음 보냈던 사신들이 왔을 때 발람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을 자들이니라” 발람이 이 말씀을 듣고 분명하게 가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신들이 왔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거절해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파격적인 제안을 받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도 가고 싶어하니까 갈 테면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서 절대로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말씀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이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라는 말씀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가지 말라는 것인데 발람이 가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왜 발람이 이렇게 오해를 했을까요?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고 보니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수개소리가 기억이 납니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모처럼 곱게 단장을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햇살이 고운 한적한 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처녀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같이 가 처녀!” 누구한테 그러나 살펴보니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 소리가 들립니다. “같이 가 처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생선장수 소형 트럭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씩씩하게 생긴 청년이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 뒷모습이 처녀같이 보여서 그러나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방을 뒤적거려 보청기를 찾아서 귀에 끼고 다시 들어보았습니다. 잘 들립니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의 발람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파악합니다. 그 이유가 듣고 싶은 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욕심이 문제
그러면 앞에서 살핀 대로 발람이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듣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귀가 말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발람의 욕심을 책망하려 하신 것입니다.
사실 발람은 처음에 발락 왕이 보낸 사신이 찾아왔을 때 복채를 가지고 왔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절하여 저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직급이 높은 사신들이 와서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민 22:17을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높은 관직도 줄 것이고, 또 무슨 소원을 말하든지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발람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길을 따라나선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눈을 가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욕심이 귀를 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욕심,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 이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약 1: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게 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작이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미혹됨이니”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델레아조’(δελεάζω)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미끼’라는 뜻의 ‘델로’(δέλλω)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미혹된다는 말은 물고기가 미끼를 물어 낚인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욕심이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미끼가 탐이 나서 덥석 물고 나면 물 밖으로 끌려나오게 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욕심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음에 품으면 죄를 짓게 되고, 결국은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욕심을 제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리교단의 큰 어른 가운데 한 분이셨던 청량리중앙교회 원로목사이신 임택진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한 번은 이분이 큰 교회의 청빙을 받고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교회 선임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가시지 말라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말씀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 교회가 사례비를 많이 드린다고 해서 가시려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교회도 다음 달부터 그 교회가 준다는 것만큼 드릴 테니 가지 마십시오.”
목사님께서 그 말을 다 듣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시장의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닙니다.” 결국 목사님은 기도 끝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큰 교회로 가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례비를 올려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교회를 끝까지 목회하시다가 명예롭게 은퇴하셨습니다.
임 목사님께서 탐나는 제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임 장로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면서 둘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제안을 다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미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미끼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미끼들을 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기저기 미끼가 널려있습니다. 자칫 덥석 그 미끼를 물기 쉽습니다. 물면 끌려가는 것입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죄를 짓게 되고, 그러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인가 욕심나는 것이 나타나면 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미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차분하게 먹이인지 미끼인지를 확인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거든 멘토나 기도 동역자들과 상의해 보십시오. 함께 기도하며 확인해 보십시오. 그들은 나귀처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 문제입니다. 아담이 인류최초로 죄짓게 된 것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은 욕심이 발단이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주변에도 따먹고 싶은 열매가 널려있습니다.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욕심인 줄 알아야 하고, 그 욕심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나귀가 막아선 발람
민 22:21-35 / 박형근 목사
아침저녁으로 볼에 닿는 바람이 한결 선선해졌지요. 옆의 분들과 인사 나눕니다.‘무더위에 고생 많으셨어요.’오늘 읽은 말씀에, 나귀가 주인에게‘왜, 세 번이나 때려’‘말을 안 들으니 때렸지.’‘전에 말 안 들은 적이 있었냐?’‘없었지.’그 때,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고 선 것을 보았습니다. 발람은, 그가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받는다 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주술가인데, 요사이로 무당인데, 나귀가 본 여호와사자를 못 봤지요.
나귀에게‘으랴.’하는데 안 가니, 이놈 봐라하며 채찍과 지팡이로 나귀를 때립니다, 억울하게 매 맞은 나귀가‘왜 때려.’영의 사람인 발람은 영의 눈이 어둡고, 어리석은 짐승 나귀는 눈이 밝고, 말문도 열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발람이란 이름이, 여기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곳곳에 나옵니다. 나귀가 막아선 발람을 함께 살핍니다.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갈 때입니다.
가는 길에 있는 모압 나라의 발락 왕은,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있은 이적들과 광야에서 여호와의 돌보심을 다 들어 알고 있었지요. 모압 군대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신하들을 주술가 발람에게 보내어, 모압에 와서 다가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 합니다. 왕은, 발람이라면 이스라엘을 저주로 물리칠 수 있다 생각한 거지요. 왕의 신하들이 발람에게 와서, 우리 왕에게 가자고 하니, 발람이‘오늘 우리 집에 묵어라, 여호와께 밤에 물어보고, 내일 답해주마.’
발람이 여호와께 물으니‘그들과 함께 가지 말고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아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발람이, 왕의 신하들에게 전하니, 모압 왕에게 돌아와 보고하지요. 절박한 왕은, 더 높은 신하를 보내서, 발람에게‘네가 말하는 거 다 들어줄 테니, 와서 저주해라.’신하들이 또 찾아와 그리 말하니‘우리 집에 하루 묵어라.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더 알아보리라.’여호와께서 발람에게‘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해라.’왜, 가라 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는 발람이 모압 왕에게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시고, 가라 하신 거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원치 않음을 알려주려고, 여호와의 사자가 길에 막아서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존귀하게 지으시며,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모압에 가는 걸 싫어하면서도 그냥 두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요. 하나님은, 네가 육신에 이끌려 죄와 쾌락을 좇다가 영벌에 떨어질 거냐, 그것을 멀리하고 선하게 살다가 천국 영생을 누릴 것이냐?
스스로 택해 행하라. 이에 대해, 솔로몬 왕은, 전도서 끝에‘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하지만 그 모든 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라.’우리마음에 항상 담아야합니다. 오늘말씀 3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세 번이나 돌이켜 피했는데, 그리 안 했으면 너를 죽이고 나귀를 살렸으리라.’발람은, 나귀가 말을 듣지 않아서 지팡이로 때렸는데, 듣고 보니, 나귀 덕분에 자신이 살았지요.
발람은‘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몰랐습니다. 이를 기뻐하시지 않으면, 나는 돌아가겠습니다.’여호와의 사자는‘모압 왕의 신하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할지니라.’발람이 온다는 말에, 모압 왕은 멀리까지 나와 맞이하며‘특별히 사람을 보내서 오라 하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 내가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발람이 답하기를‘내가 오기는 했으나, 무엇을 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만 할 뿐입니다.’
귀신의 도움을 받는 주술가 발람처럼, 오늘날도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이들이 많지요. 통계상으로 목회자보다 훨씬 많은데, 그것은 그들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티비에, 어느 방송국에서 점치고 굿하는 유명한 집 여럿을 택해서, 방문해서 묻습니다.‘저희 집에 아들이 서른이 넘어도 취직을 못하고 결혼도 못했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하면서 내 논 아들의 사주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둔 사람의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며, 점쟁이의 실력을 알아보려는 거지요.
찾아간 집 대부분이‘사주를 보니, 그 사람이 취직하고 결혼하려면, 굿을 크게 벌려야 합니다.’며 많은 돈을 요구합니다, 엉터리지요. 그런데 한 점쟁이는‘이 사주는 그럴 리 없어요. 지금 좋은 직장에 다니며 결혼해서 아들 둘 둔 사람의 것입니다.’딱 맞춥니다. 용한 이입니다. 그런데, 전에, 김 혜경이란 무당이‘나는 사탄의 왕관을 벗었습니다.’하는 책을 냈습니다. 오래 무당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아무리 센 귀신도 예수 이름 앞에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무당이 굿하다가 잘 안 되면‘여기 예수 믿는 이 있으면, 남 영업 방해 말고 어서 나가 주세요.’하는 이유지요. 김 혜경이란 분은 무당을 그만두고, 예수복음을 전하러 다니는데, 대상이 무당들입니다.‘무당 그만 두고 힘센 예수를 믿으세요.’발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모압 왕이 극진히 초대했지만, 발람은‘나는 아무 능력이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할 뿐입니다.’하나님이 제일 강하십니다.
모압 왕은 발람을, 높은 산 위에 있는 바알 신 산당에 데려가니, 이스라엘 진영이 끝까지 보입니다. 거기서 저주하면, 이스라엘백성 모두에게 미친다고 생각한 것이죠. 소와 양으로 제사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하신 말씀이 민 23:7절 이하인데, 8절을 함께 읽지요.‘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그것을 전해들은 모압 왕이‘이게 무슨 말이냐, 내 원수를 저주하라고 데려 왔더니, 오히려 축복하는구나.’
발람은‘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어찌 말하지 않습니까?’모압 왕은 포기치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고 나자, 발람이 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또 전합니다. 민 23:19,20을 함께 읽습니다.‘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축복을 돌이키지 않으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원치 않으면서도 발람을 보내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발람이 여호와께 받은 말을 전함으로, 여호와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널리 알리게 되었지요. 우리도 하나님이 이런 분임을 발람을 통해 알게 됩니다. 만일, 발람이 모압 왕에게 오지 않았다면, 함께 읽은 말씀은 없지요. 모압 왕은 이스라엘백성을 막는 것이 절실하기에, 발람과 세 번째 장소로 이동해서, 또 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며‘여기면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라.’하나님은 악한 발람도 들어 선하게 쓰십니다.
이곳에서 하신 하나님말씀 민 24:9을 함께 읽지요.‘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가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축복의 말씀인데, 창 12:3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입니다. 갈대아에서 아브람을 불러내며 하신 말씀이,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술사 발람을 통해 같은 약속을 하시지요. 오늘날 예수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자녀 된 우리에게도 이 약속은 효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자녀는 물론, 이웃에게 축복하면 그가 복을 누립니다. 옆의 분과 나눕니다.‘큰 복을 받으세요!’
모압 왕이 화가 났지요.‘저주하라고 불렀더니 어찌 세 번이나 축복하느냐. 이제 그대의 집으로 가라.’발람이 집으로 떠나며‘이스라엘 백성이 당신 백성에게 후일에 어떻게 할지를 알려 주겠다.’합니다. 24장17절 중간에‘이스라엘이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훗날 이스라엘에 의해 모압이 철저히 멸망함을 알려주지요. 그리고, 발람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을 읽으면, 민 24장으로 발람의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민 31:8에‘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합니다. 죽인 이유를 밝힌 민 31:16은 함께 읽지요.‘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서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이 말씀을 읽고, 민 25:9에 와 보니‘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25장 말씀에, 발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전후 말씀을 살피면 이러합니다.
모압 왕이 금은보화와 높은 자리를 준다 해서 왔는데, 발람은 여호와말씀만 전할 수밖에 없어, 저주대신 오히려 축복했지요. 모압 왕의 호통에 집으로 가는데, 금은보화가 눈앞에 어른거려 돌아가질 못합니다. 발람이 꾀를 내어, 모압 왕에게‘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생활과 여호와의 엄격하심에 세상 즐거움을 잊고 삽니다. 모압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이스라엘 진영에 보내 유혹하면, 쉬이 넘어올 것이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무너집니다.’발람의 이 꾀가 먹혔지요.
25장 말씀에, 이스라엘백성이 모압 여인과 어울려 음행하고, 여인들이 모압 신에게 제사할 때에 가서 먹고 절하니,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가담한 자들을 죽이라 합니다. 염병이 퍼져 죽은 자들이 이만 사천 명이나 되지요. 그것이 발람의 꾀인 줄 안 이스라엘이 발람을 찾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도 나오는데, 함께 벧후 2:15,16을 읽습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발람이야기의 앞부분 나귀가 말하며, 발람을 막은 것이죠. 발람의 미친 행동, 돈에 눈이 어두워 그저 모압에 가려한 것입니다.
발람이야기 뒷부분을 알려주는 계 2:14을 함께 읽지요.‘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사도요한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중, 버가모 교회에 대해, 너희에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 왕에게 가르쳐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한 대로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거죠.
이를 통해, 민수기 25장에 이스라엘백성이 음행하다가 죽은 것이 발람의 꾀임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성경의 처음인 민수기에 나오는 말씀의 답이, 마지막인 계시록 있지요. 성경에 나오는 음행은, 남녀 간의 성적 음행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그를 통해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발람이 낸 꾀대로, 모압 여인들이 유혹하자 이스라엘 남자들이 넘어가서, 모압 신에게 제사도 지내고 절함으로, 여호와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모압을 공격하기는커녕, 많은 수가 죽어나갔습니다.
또 하나, 음행의 의미는, 성경은 예수님이 신랑, 교회와 성도를 신부라 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의 음행은,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난 안 보이는 예수님보다, 내 손의 돈이 더 좋아, 음행입니다. 오늘 발람에 관한 말씀을 나눈 것은, 날씨도 선선해져 가는데, 여러분이 성경을 더 읽기를 권하기 위해서지요. 성경을 읽다보면, 발람이 유명한 주술가이네, 집을 나서다 말 안 듣는 나귀를 때리니, 나귀가 말을 했네. 거 신기하다 짐승이 말을 다 하고..
이어,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통해 세 번이나 축복하셨구나. 발람은 원하던 재물은 챙기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갔구나. 보통 거기에 그칩니다. 그러다가 신약성경 끝에 와서 발람의 기록이 또 나오면, 이게 뭐야? 발람이 무슨 꾀를 낸 거야. 그런 것을 오늘 풀어드렸습니다. 여러분이‘아하, 그렇구나.’하며 성경말씀에 더 흥미를 갖게 되기 바랍니다. 성경이 재미가 있어야 계속 읽지요.
발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교훈은, 첫째로, 발람의 입을 통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지요. 오늘 본문을 여러 번 함께 읽은 것은, 여러분이 마음에 담으란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로, 그가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가 축복하는 이가 복을 받으니, 힘껏 이웃을 축복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발람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끝까지 잘못된 길을 갔지요. 마침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는 어떤가? 살피라 합니다. 돈을 밝히는 것은 아니라도, 연세에 관계없이, 자신을 살펴 좋지 않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욕심, 미움, 두려움, 원망, 고집 등이고, 취할 것은, 사랑, 평안, 온유, 기쁨, 이웃에 베품입니다. 거기에 성경을 읽기를 보태세요. 성경을 읽으면 새 길이 보이고, 여러분이 새것을 취하고 행하도록 돕습니다. 다 그리 살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발랍과 당나귀
민 22:21-30 / 피영민 목사
서 론
성경인물 중에 이름에 ‘발’자 들어간 인물치고 훌륭한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애굽에 요셉을 가두었던 시위대장 보디발, 욥의 친구 중 나아마 사람 소발, 또한 다윗이 방랑할 때에 다윗의 부하들을 위한 음식 요청을 거절하고 다윗의 무리를 폄하했다가 놀라서 죽은 마온 사람 나발 등 모두 별로 훌륭한 인물들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발’자가 들어간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발락이요, 또 하나는 발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발락은 십볼의 아들이요, 모압의 왕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모압이라는 나라는 원래 이스라엘과 친척지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땅을 뺏으려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신 2:9).’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통과하려고 할 때, 모압 사람들이 겁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지나가려고 할 때에 겁을 먹고 미디안 장로들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까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민수기 22장 4절 말씀을 보면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락은 모압 땅에 경제적인 손해가 올까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 것입니다.
발락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의 손에 복술의 예물을 들려 강변에 있는 발람이라는 사람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민 22:5).’ 강변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주변의 브돌이라는 지역을 뜻하는데, 이곳은 메소포타미아에 속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주 먼 곳인데, 왜 먼 곳에 사는 발람을 불러왔을까요? 아마 발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22장 6절 말씀을 보면 발락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발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모르는 발람을 불러다가 저주하게 한 겁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발람을 상대하시고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시기도 했지만, 발람은 여전히 거짓 선지자입니다. 남자 무당이었기 때문에 발람은 박수였을 뿐만 아니라 미친짓을 했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6절에 보면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서 1장 11절에도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도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능력이 아니라 흑암의 세계에서 온 능력입니다. 만약 발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막으시고 바꾸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큰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당시 마술사의 최고봉이요, 박수 가운데는 가장 이름난 박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난 박수 무당이 누구에게 망신을 당했습니까? 바로 자기가 부려먹는 당나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대 최고의 거짓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처음 마음
첫째로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교훈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 가운데 많이 쓰는 말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오는 처음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두 번째 오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요, 세 번째 오는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라.’ 모압의 장로와 미디안의 장로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할 때에, 발람은 그들에게 하루 유할 것을 청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2절의 말씀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이 말씀은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락도 처음에는 함께 동행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왕 발락이 한 번 거절을 당하니까 더 큰 귀족들과 더 좋은 예물을 보내어 발람을 다시 한 번 유혹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니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신들이 17절 말씀처럼 제안합니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이에 대한 발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말로 거절하는 것 같습니다. 18절을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겉으로 보면 참 신앙 좋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발람의 반응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발람은 19절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겉으로는 안 간다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벌써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들어내는 말입니다. “내가 이번 한 건만 잘 하면 다음에는 이 짓 안 해도 되겠다”는 탐심이 발람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의 사신들을 하루 더 유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20절의 말씀처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게 아니라 발람의 욕심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자녀들의 간청을 조건과 함께 소극적으로 허락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슨 마음이든지 처음 마음을 귀중하게 여겨야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입만 열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이 농부는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번에 송아지 쌍태를 주시면 한 마리는 꼭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도대로 이란성 송아지가 쌍태가 나왔는데 한 마리는 누런 송아지고, 다른 한 마리는 얼룩 송아지였습니다. 이란성 쌍태를 보자 농부의 마음에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누런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하필이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우리 성도들은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합니다. 이 농부처럼 처음 마음을 접어서는 안됩니다.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장애물
발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소극적 허용을 하셨지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길에 장애물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발람은 모압의 귀족들이 앞에 가고, 두 명의 종들이 따르니까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거들먹거리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 당나귀가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밭으로 빠집니다. 밭으로 빠지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쫓아옵니다. 그러니까 더 좁은 곳으로 가고, 좁은 곳으로 가다가 자기 주인의 발을 벽에다가 비비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이 당나귀가 더는 못가겠다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영안이 닫힌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선지자가 나귀만도 못한 영적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고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인생에 많은 장애물이 놓이게 됩니다. 호세아서 2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혹시라도 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장애물을 치워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꺾어서 하나님의 뜻에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책임전가
발람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장애물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행동을 주목해 보세요. 나귀는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살리려고 길 가다가 밭으로 가고, 결국 주저앉아버렸는데, 발람은 나귀를 두 번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안되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때렸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칼 든 사자를 만났고 당나귀는 오직 주인의 생명을 보호해주려고 주저앉았을 뿐인데 이 무지한 발람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책임을 당나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는데 그만 실수로 이만원권을 찍었습니다. 이 지폐를 서울에서 쓸 수가 없으니까 돈을 잘 알지 못하는 시골 중에서도 깡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자 주인장이 국수 값으로 사천원을 내라고 합니다. 국수 값으로 이만원권 위폐를 주었더니 이 주인장이 칠천원권 두 장과 이천원권 한 장을 거스름돈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보시오! 대한민국에 칠천원권과 이천원권이 어디 있소? 이거 위조지폐 아니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장이 이만원권을 가만히 보더니 “이 돈은 제대로 된 돈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발람이 책임전가하는 것은 바로 적반하장입니다. 발람의 태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당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당나귀가 히브리어를 하는 경이적인 일이 생겨났습니다. 28절을 보니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마 발람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태연한 척 “이는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가 아니냐?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30절 말씀에서 이 나귀는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고 대답하였습니다. 나귀의 말이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나귀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발람이 꼼짝도 못하고 “없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옆에서 지켜본 모압의 귀족들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발람은 당나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때, 내 인생이 장애물 때문에 망했다고 책임전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책임전가하는 분위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책임전가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니까 그 배가 풍랑을 만났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바로 살지 못하니까 이 사회에 어려움이 초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어려움이 와도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겸손과 회개
넷째로 인생을 살다가 장애물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민수기 22장 31절을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이 이제 영안이 열려서 앞을 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서 34절의 말씀처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처럼 몸의 자세를 낮추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린 발람의 자세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은 자세와 달랐습니다. 발람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발람이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돌아서 자신의 고향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에는 아직도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람은 입으로만 회개하고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러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코자 하는 계획을 축복의 언어로 바꾸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한 발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발람이 그 입술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 복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발람은 재물과 명예에 마음이 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민수기 31장 8절에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은 결국 명예와 재물을 누리지 못하고 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 발람의 회개가 겸손하고 진실했더라면 발람은 자신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고, 생명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탐심을 따라서 살다가 결국 망하는 인생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하여 ‘기도하라. 전도하라. 충성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핑계입니다. 불순종은 뭔가 거기에 달콤한 것이 있는 것 같아도 위험한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황량한 길 같아도 승리가 있는 부요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저와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성도들은 축복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저주의 말이 나오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향해서도 축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음과 동시에 나도 축복했으니까복을 받고,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복이 반사되어서 내가 두 배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이처럼 수지맞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축복의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축복의 언어를 베푸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발람을 고발합니다
민 22:15-30 .
주님... 세상에 대하여 까막눈이 될지언정 주님의 뜻에 대하여는 눈이 열리기 원하나이다.
육신의 눈은 점점 시력이 약해질지라도 영의 눈은 점점 밝아지게 하옵소서.
정욕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서 지내는 일상을 깨트려 주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주의 평강과 기쁨이 나를 채우는 천국이 되게 하소서.
주님... 나를 주장하는 나의 의와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시어 천국이 임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정결케 하옵소서.
이 새벽 주님을 사모하오니 나를 만져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나의 묵상
첫 번째 초청에 실패한 발락은 전에 보냈던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발람에게 보내어 그를 다시 초청한다. 초청의 이유에 대하여 고관들이 말하기를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발락에게로 오라고 하면서 발람 당신을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할 것이며 당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것이다.
발람이 그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발락이 아무리 많은 보물을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 나는 그의 말씀에서 하나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오늘밤 여기서 머무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듣겠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이 너를 데리러 왔거든 일어나서 함께 가라. 그러나 너는 내가 행하라고 하는 것만 행할 것이다.
발람이 아침에 나귀를 타고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갔다. 그런데 발람이 가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막아섰다. 그 때 발람은 나귀를 타고 있었고 그의 두 종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나귀는 보는데 발람은 보지 못한다. 나귀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피하려고 밭으로 들어갔는데 발람은 눈이 감겨 보지 못하므로 애매한 나귀만 채찍질 하면서 밭에서 길로 나오게 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가 포도원 사이에 있는 좁은 길에 서 있고 양쪽에는 담이 있었다.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피하려고 담에 바짝 붙어서 걸어갔는데 발람의 발이 담에 닿아 긁히게 되었다. 그러자 발람은 다시 나귀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더 나아가 좁은 길을 막아섰기 때문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본 나귀는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그 순간 나귀가 입을 열어 발람에게 말을 하였다. “내가 도대체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세 번씩이나 때리는 거요?” 이처럼 나귀가 사람에게 말을 하는 초자연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놀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칼이 있었다면 너를 당장 죽였을 것이다.”나귀가 발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나귀가 아니냐? 당신이 그렇게 오래 나를 탔는데 그동안 내가 지금처럼 행동한 적이 있느냐?” 발람이 대답하기를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술사인 발람은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발락의 요청을 들어주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에게 제시하는 은금보화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 신을 믿는 다신론자이며 다원주의자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강권적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저주할 대상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는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감히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첫 번째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아쉬움에 보냈을 것 같다.
그런데 조금 후에 두 번째 사신이 그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닌가? 그의 마음은 요동쳤다. 그는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감히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강권적으로 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면 발락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사신들을 돌려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사신들을 머무르게 한 다음 하나님께 물어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가고 싶은 마음이 강렬함을 알 수 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그 사신들과 함께 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는 가라고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신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네 맘대로 해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엄마가 집에 있는데 엄마는 할머니를 드리려고 곶감을 사다 놓으셨다. 그런데 아들이 그 곶감을 보더니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아우성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오실 때까지는 먹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 날 따라 할머니는 왜 그리 늦게 오시는지..... 아들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또 먹고 싶다고 보채기 시작한다. 잠시를 참지 못하는 아들을 보고 엄마는 화가 나서 “네 맘대로 해!” 하였다. 이것은 먹으라는 말인가? 아님 먹지 말라는 말인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6학년이나 된 아들이 가서 곶감을 꺼내가지고 좋다고 먹는 꼴이라니..... 엄마는 아마도 곶감을 먹는 아들의 뒤통수를 치고 싶을 것이다.
발람에게 가라는 말이 아니라 가지 말라는 반어법을 사용했음에도 발람은 그런 하나님의 진의를 모르고 철없는 아이처럼 좋다고 사신들과 함께 나귀를 타고 가다가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행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우를 범하게 되며 심지어 미물에 지나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진짜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탄 나귀에게조차 놀림감이 되었다.
본문 28-29절에서 발람이 나귀를 때리자 나귀가 왜 나를 이렇게 때리느냐고 묻는다. 그 때 발람이 대답하기를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거역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히트알랄르테’로써 이는 희롱하다, 놀리다는 의미이다. 사실은 나귀가 주인을 희롱하거나 놀릴 의도로 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발람의 입장에서는 나귀 주제에 자기를 놀리고 희롱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 나귀는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는데 선지자라고 치부하는 발람은 그를 전혀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귀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자기를 놀리고 희롱하는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발람의 이와 같은 우매한 행동이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모습은 여지없는 나의 모습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큰 장애물이다. 내 안에 이런 탐욕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발람과 같이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웅크리고 있는 탐욕은 어쩌면 나를 일으켜 세우는 요인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욕심이 넘어진 나를 일으켰고, 사역에 열심을 내게 만들었다. 물론 의욕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내 안에 숨어 있는 욕심 그 자체였다. 사역의 열매도 많았지만,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썩은 열매였다. 물론 사역을 통하여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믿게 된 그들이 썩은 열매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행한 행동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나 의도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시는데, 나는 그저 몸으로 하는 사역에만 집중하였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나 혼자 착각 속에 빠져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다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야곱의 우물이었고, 또한 남편이었다.
어제는 우리 교회 혜지가 결혼을 하였다. 결혼 주례를 하고 식당엘 갔는데 혜지가 봉투를 주는 것이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안 받는다고 하였다. 안 된다고 하며 꼭 받으시라고 하는 혜지에게 신혼여행 가서 보태쓰라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나의 자랑이 아니라 나는 교회에서 사례를 받기 때문에 따로 수고비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언젠가부터 받지 않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내 안에서 발람의 탐욕을 보았다. 그것을 사양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양을 하고 나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이처럼 나는 자기 주장의지로 똘똘 뭉쳐 있는 자이다. 내가 하나님 되려는 의지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순간순간 주님의 심판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유다의 딸들이 주의 심판을 기뻐하며 노래하였듯이 나 또한 주의 심판을 기다린다.
(시 97: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은 나를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정욕과 탐욕 그리고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리고 오직 예수로 부요하여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오늘 발람을 보면서 나의 비참한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나이다.
감출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는 나는 나 자신을 알몸이 드러난 채로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럽고 비참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주님의 품안에서는 전혀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주님...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오직 나를 심판하시는 주님을 더욱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아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오늘은 주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공동체로 모여 예배할 때, 이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주님과의 참된 교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무나 번거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민 22:17-30 / 박진호 목사
백지수표를 받은 발람
발람은 이방세계에선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사탄의 가장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의 신하들이 많은 복채를 갖고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의 신탁은 전혀 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인 여호와께 복을 받은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12절)
발락은 곧바로 다시 사절을 보내면서 발람에게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민22:17)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번에는 복채로 백지수표를 제시한 셈입니다. 그만큼 발락은 이 일을 절박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지금 모압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지레 겁을 먹고 먼저 공격할 계획이었다면 정탐꾼을 보내 적진을 살피고 대응 전략을 짜고 자기들 군대를 재정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비용은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 않겠다며 발람의 저주의 신탁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어쩌면 발락은 발람과 별도로 이스라엘을 정탐했을지 모릅니다. 그 결과 군인들 숫자만 많았지 무기나 군대 조직은 엉성해서 군대끼리의 전투에선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점은 애굽의 최정예 군대를 팔십 넘은 한 노인이 말씀만으로 무참하게 패배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발락의 종교상식으로는 모세가 자기들 민족 신에게 저주의 신탁을 하여 이겼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강력한 신의 이름으로 저주해서 히브리 신의 힘을 빼놓지 않으면 애굽도 졌는데 자기들은 승리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가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주도하셨고 정작 모세도 몇 번이나 그 일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한 줄은 이방인들은 꿈에도 상상 못합니다.
발람이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여호와의 권능 앞에 꼼짝 못하고 이스라엘을 도리어 축복해주자 발락은 전쟁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만큼 히브리신에 대한 공포감이 컸다는 반증이며, 또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발람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의 힘을 먼저 빼놓겠다는 계략은 이참에 반드시 승리하여 옛날 자기들 영토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애굽의 금은보화도 빼앗겠다는 탐욕의 발로였습니다.
두 번째의 저주의 신탁 요청을 받은 발람의 첫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절) 우선 여호와를 “내 하나님”이라고 지칭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순전히 믿고 따르고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도 히브리 신이 애굽을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도 지금 그 권능에 붙들려 있지만 이방 주술사인지라 창조주 유일신 사상은 없었습니다. 그에겐 여호와도 단지 여러 신들 중의 하나의 신이었을 뿐이었고 그 모든 신들이 나의 신이었습니다. 거기다 얼마 전에 여호와가 자신에게 직접 계시를 주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최대의 친밀감을 표시함으로써 발락의 사신들에게는 이번에는 저주의 신탁이 먹힐 수 있다는 신뢰감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첫 대면에서 그 권능에 항복했던 체험이 있어서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절)고 섣부른 장담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될 때에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판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19절)고 혹시 여호와의 뜻이 전번과 달리 바뀔 수도 있으리라는 여지는 계속 남겼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일구이언 하시는 하나님
발람은 나름 그런 부푼 기대를 안고 밤중에 다시 혼자 신당에 가서 기도했는데 의외로 여호와가 일어나 함께 가라고 선뜻 허락해주었습니다.(20절)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가 다음날 일어나 모압 고관들과 같이 가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22절) 하루 사이에 하나님의 뜻이 아무런 경고 예고 징조도 없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 아닙니까? 발람이 정말로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 떠보느라고 일부러 거짓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에 더 깊은 뜻이 있었는데 발람이 미처 못 알아먹은 것입니까? 그 셋 다 아닙니다. .
많은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묵상은커녕 정독도 하지 않고 무조건 어렵다고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주일에 목사가 설교에서 조금 풀어주는 것을 듣는 것이 성경에 관한 지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앞뒤로 정독하면 성경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입이 닳도록 강조했듯이 대부분의 경우 본문 안에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정말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발람더러 함께 가라고 하면서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0절)는 조건 하나를 붙였습니다. 여전히 여호와를 우상 신들과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는 발람은 그 조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특별히 인간들이 바치는 제물과 치성의 질과 양에 따라 신들의 능력이 달라짐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들은 심지어 자기에게 바치는 제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 백성도 저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도 최고의 정성을 바치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끔 바꿀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발락이 자기에게 백지수표까지 제시했다면 히브리 신에게 바칠 제물도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양껏 제공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히브리신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기대대로 하나님이 발락의 사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자 겉으로는 표정관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히브리신은 말씀으로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발락 사신들과 함께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최소한 왜 전번과 다른 말씀을 하는지 물어봤어야 합니다.
실제로 나중에 그렇게 되었지만 혹시라도 발락을 만난 후에 저주하지 않게 할 뜻이라면 지금 여기서 거절하는 편이 낫다고 따졌어야 합니다. 그럼 자기 체면도 엉망이 되고 번거롭게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발락이 내민 백지수표는 포기하더라도 왔다갔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여기서 그냥 제 영업을 계속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했어야 합니다.
대신에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얹고 곧바로 출발했습니다.(21절) 그가 서둘러 출발했다는 것은 내심 여호와의 허락을 기다렸고 백지수표에만 마음이 쏠렸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허락했으니 어쨌든 그가 출발한 행동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럼 당연히 발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기에 진노한 것이지 않습니까?
번거롭게 일을 처리하는 하나님
지금 하나님이 우상 주술사 발람 한 명을 대하는 방식이 어딘가 모르게 조금 번잡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도 여러 단계를 거치게 합니다. 처음에는 가지 말고 저주도 하지 말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가라고 했습니다. 비록 발람의 속내가 탐욕으로 가득 찼지만 다시 간다고 진노하고, 당나귀를 시켜 지체케 했다가, 발람이 나귀를 때리니까 다시 나귀가 인간의 말로 주인을 야단치고, 마지막에는 여호와의 사자까지 보내어 크게 혼을 내었습니다.
이방 주술사인 그가 여호와를 정확히 모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불만 내지 의심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뭔가 화끈하게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주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끄는 것 같이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역사해서 큰 은혜를 주셨다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기 믿음으로 온갖 고통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한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하나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만의 순전하고도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특별히 도무지 이해조차 안 되는 억울한 고난에 처해도 신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완벽합니다. 인류에게 때로 불행과 재앙을 묵인 내지 허락하는 것도 불신자의 죄를 심판하려는 뜻은 거의 없고 당신의 인간공동체를 향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둘러싸이게 하는 것 또 그 어려움에서 매우 지루한 절차를 거치게 해서 구해주는 것 자체가 바로 그분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단번에 문제를 화끈하게 해결해주지 않는 것이 당신께서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렇다고 신자의 믿음이 맷집 즉, 의지적인 인내력 담력 용기 등을 늘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젊어서 고생은 돈을 주고 사서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자로 고난을 의도적으로 통과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고 선언합니다.
만약 모든 문제와 고난을 간단하게 순간적으로 해결해주면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신자들은 모르고 지나치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삶이 형통 풍부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미워한다고 판단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잘 역사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신자들은 단순히 고난이 끝나야만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큰 고난이라고 그 고통의 와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로 오묘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끝난다고 그것으로 신자가 받은 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끝난 후에 신자 삶의 모든 영역에 그분의 거룩한 권능은 더 강력하고도 광범위하게 작동합니다. 고난이 그분의 본심이 아니라면 고난 중이나 후에도 그분의 은혜는 반드시 있다는 뜻이며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고난 중에 은혜가 있다는 것은 아예 모르고 고난이 끝난 후의 은혜는 아예 헤아릴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원이 고난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는 것뿐이었으니 이미 고난이 끝난 상태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겉으로 드러난 고난과 형통만으로 그분을 제한하며 보이지 않게 풍성히 역사하는 하나님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돈만 주인으로 삼은 발람과 같은 생각으로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지루하게 계속되는 고난을 기도하며 참아내는 것밖에 하지 않는데, 고난이 단번에 쉽게 해결되면 더더욱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고난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평안도 그분의 본심이 아닙니다. 신자가 평안만 간구하면 그분의 본심 밖에 즉, 그분의 은혜와 권능 밖에서 자기도 겉으로 종교행위에만 몰두하는 셈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이 신자를 진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 본인에게 손해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실은 모든 신자가 아니 불신자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아이가 사탕을 달라는 대로 주면 이빨만 썩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그 간단한 진리를 자기 자식의 훈육에는 잘도 적용하면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도 해당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만 최고로 높이는 타락한 본성의 또 다른 생생한 예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세상에 불행을 방치하는 그런 불합리한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고개를 뻣뻣이 세우며 덤벼드는 것입니다. 신자마저 하나님이 왜 이렇게, 그것도 유독 나에게만 화끈하지 않고 번거롭게 즉, 불합리하게 역사하느냐고 불평하기 바쁩니다.
발람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발람더러 모압까지 가게 두었다가 발락 앞에서 벙어리로 만들거나, 이방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든 상관 않고 있다가 모압이 전쟁을 일으키면 이스라엘의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기적으로 간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나귀와 여호와의 사자까지 동원해 끈질기게 발람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나귀가 말을 하고 여호와의 사자도 사람보다 동물인 나귀가 먼저 보았다는 신기한 권능에는 구태여 주목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 증거라고 말하면 너무 멀리 나가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에게 그런 일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나귀가 말을 한 것이 큰 은혜가 됨은 하나님의 큰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나귀는 영리하지 않고 힘이 아주 세고 우직한 동물입니다. 발람이 짐을 싣거나 타고 다니면서 지팡이로 때리며 다스리는 비천한 짐승입니다. 지금 나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케 했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그런 비천한 자리에까지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과 맺으신 언약 안에서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의 복을 지켜주려는 뜻입니다.
자꾸 고집을 피우며 나아가지 않는 나귀를 발람이 지팡이로 세 번을 쳤습니다. 그러자 나귀는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고 항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킨 말로 알기 쉽게 바꾸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지금껏 했던 말이 우습게 여겨지느냐?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는 것은 내가 이르지 않은 일는 결코 하지 말고 감히 하려고 마음먹지도 말라는 뜻 아니냐? 지금 네가 신이 나서 나를 대적하는 자리로 가고 있지 않느냐? 그러고도 네가 나를 때릴 자격이 있느냐?”
돈에 눈이 어둔 발람이 당장 그 뜻을 알아챌 리 없습니다.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8절)고 도리어 나귀를 야단쳤습니다. 모든 정황을 앞뒤고 살피면 지금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나귀가 발람에게 그렇게 야단쳐야 하지 않습니까? 거꾸로 발람이 나귀에게 그러고 있고 나귀는 그대로 맞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발람의 채찍을 맞고 잇는 셈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해도 야단은커녕 오히려 불쌍하고 애처로운 눈길로 가만히 바라보면서 로마 군병의 채찍을 맞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이방 주술사 앞에서도 그렇게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발람의 눈을 뜨게 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진짜로 칼을 들고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때서야 나귀가 고집 부리지 않고 자기 지팡이로 때리는 대로 걸어갔다면 자기는 여호와의 사자의 칼에 죽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거역한 나귀가 오히려 그를 살려준 것입니다. 나귀와 함께 하신 여호와가 그를 끝까지 살려준 것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신탁이 가능하고 그래서 크게 횡재해야지라고 마음먹은 것이 완전히 들켰다고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히브리신은 자신의 깊은 속까지 다 꿰뚫어 보기에 절대로 속이려고 해선 안 된다는 점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히브리 신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않거나, 그 반대로 여호와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면 죽음의 벌을 면할 수 없다는 점도 알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바치는 대로 신들의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여호와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과 치성은 물론 그 처해있는 현실적 상황과도 전혀 무관하게 당신의 뜻대로만 능력을 발휘하되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만 행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모압 왕 발락 앞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두 번째 예언할 때에 발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본문 사건에서 크게 혼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하나님이 시쳇말로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이방 주술사 발람을 복잡하게 다루고 있는 까닭은 상천하지에 당신만이 유일한 주인임을 그래서 당신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만이 인간이 참된 복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발람이 진심으로 당신께 항복하든 안하던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증명하면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볼 사실은?
여러분 나귀와 발람이 나눈 대화를(28,29절) 듣고 뭔가 찔리는 점이 없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가요?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분이 가기를 원하시는 길과 너무나도 어긋나게 걸어갔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극렬히 반대했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내 눈앞에 데려다가 보여 주어야만 믿을 것을 고려해보겠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서양 종교의 창시자이자 로마의 사형수에 불과한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느냐?”고 큰소리쳤습니다. 본문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눈에 안 보이지만 제 옆에 실제로 칼을 들고 서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 사악한 말을 저에게서 세 번이 아니라 수도 없이 듣고도 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쳐다봐 주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작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상황이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열심히 믿고 희생하며 사역한 보상을 안 주시느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불만과 의심을 품습니다. 무식하고 힘만 자랑하는 나귀처럼 왜 나를 하루에도 세 번이나 당신의 몽둥이로 때리느냐고 저의 주인에게 덤벼들기 바쁩니다. 여전히 제 곁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다는 진리는, 아니 그분의 완전한 사랑은 까마득히 잊고서 말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로 너를 인도하고 있고 때로는 나귀를 통해서, 말하자면 아주 비천한 사람과 억울한 사건을 붙여주는 내 뜻을 제발 깨달아 달라. 내가 얼마나 큰 사랑으로 참고 있는지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어서 빨리 구해내라고 떼만 쓰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
하나님이 금방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그분의 뜻은 신자의 주변 여건과 사건 자체를 해결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신자 본인을 당신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바꾸고 성숙시키는 방식으로만 당신께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뜻을 신자들이 완악하게 거부하니까, 아니 신앙연륜이 몇 십 년이 되어도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도 당신으로선 하지 않아도 되고 본심이 아니게 번거로운 절차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신자라는 한 인격체에만 집중됩니다. 당신의 전 인격을 다 동원해서 당신이 지으신 소중한 자녀로 신자를 대우해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진정으로 소원하십니다. 세상 모든 것은 더럽고 추하고 썩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은혜만이 인간에게 순전하고도 영원한 소망과 은혜와 사랑이 됩니다. 요컨대 그분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기보다는 당신이 바라는 어떤 존재, 특별히 거룩한 제사장들이 다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더러 당신의 복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이미 그분의 나라 안으로 옮겨진 백성입니다. 발람이 히브리 신에게 온전히 몰랐던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들이 복을 주는 것은 인간의 치성에 달렸다고 여겼고 심지어 자기들 신마저 수시로 변덕을 부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한 히브리 신의 복은 아무리 제물과 희생을 많이 바쳐도 끊거나 감소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 공로 자격 노력 없이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는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정말로 고난 중에 더 큰 은혜를 찾아서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 고난이 끝나고 반성회라도 제대로 열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이 지금 당장에 내 주변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어야 나도 풍성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게 바꾸어서 내 주변과 이웃을 거룩하게 만들려고 하시고 또 그래서 온갖 당신께서 하지 않아도 되는 번거로운 절차로 이끌고 계신다는 진리를 알고는 있습니까? 나아가 우리의 고난 중에 정말로 끝까지 인내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라도 해봤습니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인간 주술사 발람이 짐승인 나귀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적인 영적인 수준으로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은 하나님께 거역할 생각도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자기가 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최소한 그 신의 기분에 들게 뇌물을 바치며 아부할 수 있다는 정말로 사악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발람이 재물을 탐한 것보다는 당신을 다른 신들과 동격화 시킨 것에 더 진노하신 것입니다. 또 당신의 말씀을 절대성을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끔 상대화시킨 것이 그의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특별히 고난과 문제 중에 더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신자 눈에 번잡해 보이는 그분의 역사도 결코 당신의 본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확정해준 것이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 증거를 체험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신자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호와의 사자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섬김을 받는 고귀한 신분이 이미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에게 딱 하나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들의 눈치만 본 기회주의자 발람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치는 정성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절대 기대하지 말고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지으신 그분의 권능과 사랑은 오직 당신의 말씀 안에서만 역사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 그분께 신자가 받을 복은 없습니다.
발람과 그의 나귀
민 22:15-30 / 구성교회
젊은 사람(10~20대)들은 몸의 근육에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30대부터 몸의 근육이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몸의 근육뿐만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마찬가지인듯합니다. 삶을 살다 보니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말이 너무 소중한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지혜자는 아직 사리 분별이 정확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지키라(잠 4:23)”라고 강조한 듯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마음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의 삶에 순응하고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이 돈 앞에서 마음을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돈 앞에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돈보다 더 큰 가치를 바라볼 때입니다. 문제는 그 가치가 눈앞의 돈이 아니라 미래의 권력과 힘까지 포함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 그를 설득하려 합니다. 그런데 발락은 눈앞의 이익과 명성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발람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신앙의 가치를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발락이 보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일만 해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19절)”라고 답합니다. 발람의 말을 스치듯 들으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살피기 위해 집중하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그게 아니라 자신이 마치 대단한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교만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에게 발락이 보낸 사람과 함께 가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20절)”는 명령을 내립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발락의 요구사항과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 상충(相衝)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아시고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발람이 아침에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길을 나설 때, 하나님이 진노합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발람의 어리석음을 하나님이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귀 앞을 가로막았고,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자 이 모든 상황을 알 수 없는 발람은 나귀 탓을 하며 나귀를 때립니다. 나귀의 눈은 밝았고, 발람의 눈은 어두운 상태입니다. 나귀는 몸을 담에 대고 비벼 발람의 발을 상하게 하자 발람은 다시 나귀를 때립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사자가 피할 수 없는 곳에 서자 나귀는 엎드립니다. 발람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자, 나귀가 입을 열여 왜 나를 세 번 때리냐며 항의합니다. 나귀가 말을 하는데도 발람은 놀라지 않고 나귀와 다투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발람이 무당 혹은 마술사와 같은 존재였기에 신비한 현상에 익숙한 듯합니다.
천사가 손에 칼을 들었다는 것은 발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발람은 나귀를 책망할 뿐이었습니다. 발람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눈이 먼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발람과 똑같은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호소서(시 119:18)”라는 시인의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진실한 고백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주시는 가치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눈을 열어 주를 봄으로 새 은혜를 누리며 사는 하나님 사람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