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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 17,10-13)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는 불과 연관이 있다.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사제들과 대결할 때 하늘의 불이 내려와 그를 도왔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보속으로 가뭄이 들 것을 예언했다. 그리하여 삼 년 동안 불볕더위가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불 마차를 타고 승천했다(제1독서). 엘리야는 가나안의 바알 우상을 분쇄했던 인물로, 죽지 않고 승천했다. 유다인들은 종말이 되면 그가 다시 와서 사람들을 준비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에 비유하신다. 그의 활동을 종말의 준비로 보셨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경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를 모세와 동등한 서열에 두고 있습니다. 회교도들도 그를 진정한 예언자로 고백합니다. 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남긴 분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임금이었던 ‘아합’ 시절에 그는 등장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물질 숭배와 ‘바알 우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제관들을 제거하며 하느님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그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종말이 가까워지면 그가 다시 올 것이라 믿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에 비유하십니다. 당신의 오심을 준비했던 그에게 화려한 평가를 내리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엘리야는 있습니다. 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준 분들입니다. ‘삶의 마지막’을 묵상하게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엘리야의 모습’을 지닌 분들입니다. 오늘은 그분들을 떠올리며 다시 또 ‘새롭게’ 삶을 시작해 봐야겠습니다.
사는 것은 잠깐입니다.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힘들었던 사건도 지나고 보면 빠르게 느껴집니다. 언제나 함께 있을 것 같은 분들도 조용히 떠나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종말’도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엘리야의 모습을 지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엘리야
- 강희재 신부-
사제로 살면서 내 삶에 실망과 아쉬움을 가질 때마다 새기는 말이 있다. ‘사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느님은 오늘도 당신의 전능하신 손으로 네가 참 사제가 되도록 서품 때 시작하신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다.’ 결과에만 집중하고 결과로만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들에 대해 큰 의미와 가치를 체험하지 못한다(do not recognize). 그래서 뜻밖의 힘겨운 일을 겪거나 계획한 일이 실패하면 즉시 불행과 원망에 휩싸일 뿐 그것을 통한 더 깊은 배움과 성숙의 섭리는 깨닫지 못한다.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첫 본당주임을 나가서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미사 · 강의 · 교육 · 면담 · 방문 등을 했지만 당장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또 예전보다 더 악화되었다는 생각에 교우들과 자신에게 실망과 아픔을 느껴야 했다. 오로지 내 생각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즉시 완성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안 되면 결국에는 ‘안 돼 ! 안 돼는 거야. 다 쓸모없는 거야.’ 하며 그 일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와 활동을 알아보지 못하고 낙담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더 성숙한 사제가 되도록 모든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앞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교우들의 마음을 읽고 돌보는 데,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본당 사목하는 데 더 따뜻한 마음으로, 더 하느님께 의탁하며 행하도록 나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앞으로 있을 모든 순간에도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도록 엘리야의 존재와 역할을 그때 그 자리인 첫 본당 임기 중에 마련해 주신 것이다.
고독했던 예언자로서의 삶
-양승국 신부-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한마디로 ‘있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화려한 도시를
부단히 떠나야 했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거친 들꿀이요,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요, 명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투신할 수 있었습니다.
화가 빛이 되도록
-김찬선신부-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저도 어렸을 때 사고를 많이 쳤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큰 사고 중 하나는 제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많은 아주머니들이 마당에 솥걸고 음식을 만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잔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불을 유난히 좋아하여 부지깽이로 불놀이를 하던 저는
부지깽이에 붙은 불로 우리 초가집 지붕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집이 타올랐지만
다행히 어른들이 많이 계셔서 집을 다 태우지 않고 불을 껐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불의 속성을 일찍 깨쳤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고,
불은 번진다는 것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 태워 없애버립니다.
무화하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입니다.
없애야 할 것이 있으면 태워버리면 됩니다.
불은 또한 번집니다.
작은 불이 그래서 큰 불이 됩니다.
작은 빛과 열도 번지면 큰 빛이 되고 열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다 안에 불이 있습니다.
이 火가 화가 되고
이 火가 욕정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火가 欲情이 아니라 熱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욕정은 타서 재가 되지만
열정은 타서 빛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불처럼 타올랐던 엘리아처럼
욕정은 타서 재가 되게 하고
열정은 타서 빛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열정이 열정으로 번지고
빛이 더 큰 빛, 그리스도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영적 소경 -전삼용신부-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0대 초반 여성은 잘 노는 남자를 좋아하고, 20대 중반 여성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고, 20대 후반 여성은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 반면에 20대 초반 남성은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20대 중반 남성도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20대 후반이 되어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정말 남성들은 시각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제가 버스에서 어떤 한국 자매에게 천주교에 대해 설명해주자 저와 함께 탔던 후배 신부가 “형은 대단하다. 난 저렇게 생긴 여자라면 말 안 걸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렇게 태어난 게 저 사람 잘못이냐? 껍데기를 보지 말고 영혼을 좀 봐라.”라도 대답했지만, 사실 저도 남잔데 예쁜 여자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육체의 눈을 감고 영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있던 엘리야였음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메시아가 오기 전에 그의 길을 닦기 위해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이 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왔다면 누구나 다 알아보았겠지만 세례자 요한을 누가 엘리야로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혹시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았더라도 세례자 요한을 오시기로 되어있던 엘리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눈으로 본다면 두 분은 결국 같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과 갈멜 산에서 대결을 합니다. 각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제물로 놓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제물을 사르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사백오십 명이나 되었고 야훼를 섬기는 예언자는 엘리야 하나뿐이었습니다. 먼저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소리소리 질러보지만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윽고 엘리야의 차례가 되자 그는 제물에다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네 동이씩 세 번을 붓게 만듭니다. 그 물이 제단 주위 도랑까지 가득 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있던 물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태웠습니다.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제단과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하며 물은 세례를 상징하고 불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상에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희생을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하시며 바로 ‘세례’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골고타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대로 일어납니다. 세례는 옛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성령님이 내려오실 제단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물론 성모님을 제외하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그분 위로 (불 대신)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대에 이런 일이 파티마에서 일어났습니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태양이 땅으로 떨어지듯 내려오더니 모든 것을 말라버리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간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대신 이번엔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오순절 때 성모님과 사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성령님이 내려오셨던 것의 재현인 것입니다. 성탄트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또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상징한다는 것을 듣지 않았다면 우리가 성탄트리를 그리스도의 육체로, 또 영원히 살게 하는 그분의 살과 피로 볼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장님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런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9,40-41) 엘리야는 하느님의 오심을 위해서 세상의 우상을 쓸어버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서 죄의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리야도 세례자 요한도 또 그가 증언한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육체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 세분들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오셔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성령님으로 인해 바오로사도가 눈에 비늘이 떨어져나가 온전히 영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 눈도 뜨게 해 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의 눈을 감고 영적인 눈으로 보려고 해야 합니다. 육체의 삶을 버리고 영적인 삶을 살기를 결심해야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소경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콤비 플레이>
-양승국신부-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다짐 중에 첫 번째 다짐이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 "집에 잘 붙어있자"였습니다. 집에 붙어있어 보니 너무나 좋더군요. 사실 수도자가 밖으로 다녀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닫게 된 것이 올 한해 제게 있어 제일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한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두시간 짜리 강의 때문에 오랜만에 집을 비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천국 같은 곳이었기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 두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시간 동안 남 앞에 선다는 것,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제는 꾀를 좀 냈습니다. 학기말 시험 끝낸 수사님 한 명을 살살 꼬셨지요. 물론 레크리에이션이나 성가반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수사님이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두시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강의일변도로 나갔으면 정말 지루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상조해서 강의 시작 전 수사님의 성가연습, 그리고 제 간단한 강의, 휴식, 다시 모여 수사님과 함께 레크리에이션, 마무리 제 강의. 이렇게 진행하다보니 두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작은 체험이었지만 팀으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머리 맞대고 계획을 짜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일,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팀플레이로 대응하려는 노력, 공동으로 행하는 사목이 물론 더디고 때로 짜증도 나겠지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내가 모든 것을 다해야겠다", "나는 죽어도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이다. 절대로 남에게 양보 못한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모든 영광도 내 몫이다"는 사고방식처럼 피곤한 사고방식도 없습니다.
찰떡 궁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인내하는 가운데,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의 몫을 척척 잘 해내는 경우를 말하겠지요. 이렇게 될 때 진정 일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와 세례자 요한은 진정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선교사업에 더할 나위 없는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두 분은 각자가 해야할 몫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는 역할이 주어졌었는데, 그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마무리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아놓자마자 정확하게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콤비 플레이였습니다.
가능한 한 최대의 지식을 갖추지 않고 판단하는 자는 그릇된 판단을 면할 수 없다.(로크)
우리를 구원하는 낯선 분
-방교원 신부-
조직 폭력배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나와바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구역 혹은 경계라는 의미인데, 낯선 사람이 이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큰 일 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꼭 폭력배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자기 마을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예의 주시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알고 거의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경험도 한두 번쯤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람들이 소돔을 방문했을 때
그곳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에서 이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들어온 이 두 사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방인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경계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롯은 낯선 두 사람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해 끝까지 변호함으로써 자신과 가족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는 낯선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보고 있고 만나고 있는 사람 안에 숨어 계시는데
어찌 그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린 사람
-김찬선신부-
내가 엘리야처럼 모든 것을 바로잡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심약한 사람.
미숙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나인데.
그러나 심약한 것으로 보면 엘리야도 마찬가지.
왕과 백성들에게 환난을 내린 그가 환난이 두려워 도망치고
거짓 예언자들을 쳐 죽인 그가 이제벨이 두려워 도망치고
하느님만을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의 예언자가 이렇게
환난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두려워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였기에
그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불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상 인간적으로 강한 사람은 하느님을 여간해서 체험치 못합니다.
애초에 하느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약한 사람은
자기가 직면한 어려움과 환난 앞에서 신을 찾습니다.
잡신을 만나느냐 참 하느님을 만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약한 사람이 신을 찾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이 들리면 이제는 신들린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제 가까이에 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이 들리면 작두 위에 올라타 춤을 춰도 다치지 않고 신탁도 내립니다.
그러다 들렸던 신이 나가면 그도 평범한 사람처럼
세상 걱정하고 아파하고, 지지고 볶고 합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러했지만 그중에서도 엘리야는
신이 들렸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심약한 그가 하느님을 입으면 거짓을 가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불같이 내려 모든 것을 바로 잡습니다.
그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사람들과 대결하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는 사람입니다.
우리처럼 세상 한 복판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어느 순간 불마차로 하늘에 들어올려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 김영수-
우리는 어릴 적부터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듣고 자랐다. 그럼 우리가 아는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린아이에게 물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얘야, 너 커서 뭐가 될래?” 하면 “대통령이오!”, “장군이오!”, “슈바이처 박사요!”, “과학자요!”라고 하면서 대개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가르쳤던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서태지요!”, “개그맨이오!”, “의사요!”, “변호사요!” 등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자신이 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대답을 한다.
우리는 풍요로운 문명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사고는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 간다. 예수님 때보다 더욱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 시대의 비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인인 경우에조차 지금 여기 현시대에 엘리야께서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 우리한테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과연 나는 말씀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세상이 바라는 인물이나 또는 시대 조류에 맞는 사상에 젖어서 내 마음대로 엘리야를 정의하고 단정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다양한 정보를 얻는 데 보내고 있다. 신문 방송 등의 다양한 정보 매체뿐 아니라 인터넷의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런 현대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주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예언자가 오시면 알아 볼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 있으면서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제멋대로
-장재봉신부-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소신대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여기는
긍정적인 의미를 풍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하무인,
저만 아는 딱한 사람을 칭하는 일에 더 많이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는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만
살아냈던
엘리야예언자의 삶이야말로
세상에서 안하무인이었으며
독야청청한 모습이었으며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쯤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오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살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쏟으며 살아간다 해도
절대 고통일 수 있으며
절대 고난일 수도 있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는 외로움이
얼마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자리한다는 이르심으로 받겠습니다.
엘리야예언자의 고통이었다는 사실은
아합 왕의 아내 이제벨의 독설이 두려워서
도망을 쳤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요?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
비를 멈추고
불을 끌어내린 예언자의 모습이 겨우 도망치는 일이라니........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홀로 대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 용기는 어디로 간 것인지.......
(1열왕 18장 참조)
딱하기만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세상은
두려울 수 있습니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평안을 흔들어댈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희망으로만 굳건합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섬기는 멋에 취하고
성령에 취해서
도망을 치더라도
주님께로 피난하는 지혜가
믿음이며 희망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주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해서
그리스도인의 멋을 풍기는 우리이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하느님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인임을 뽐내며
신앙인의 멋에 겨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아멘
단죄
-조명연 신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그가 메시아 시대를 선포할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고,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룹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조차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못하고,
다른 사람만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으로만 메시아를 기대하고 바라보았던 것이지요.
따라서 자신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일 리가 없었고,
초라한 가문 출신인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과연 완고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무엇이 틀리겠습니까?
지금 내가 싫어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엘리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흉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린
메시아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곁에 오신 엘리야,
메시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공이 많으면
-김명희-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배에 사공이 많다 보면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해지고, 서로 자기 주장만 하면 배가 가야 할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지요.
유다의 율법학자들이 말 많은 사공들처럼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들었나 봅니다.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가지가지다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여러 가지 주장 중에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말도 들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그들 곁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된다고 주장하던 율법학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 곁에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엘리야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율법학자들은 새로 오시는 엘리야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주장만 했던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에 기준을 두기보다 자기 주장만 관철시키기 위해 주장할 때 배가 산으로 가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겠지요.
저도 옳고 그름보다 그저 제 주장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에 치열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빌라도에게 소리친 유다의 군중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요?
- 김현 신부 -
“자기 배 부르면, 다른 사람 배 고픈 줄 모른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만 이해하려 하고 또 그렇게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대로만 보았기에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질책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입견에 싸여, 자신들의 구원자가 되어주실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한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예수님을 우리들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종종 우리들이 원하는,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또 우리들이 바라고 원하는 방식대로만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정의를 외치며, 입 바른 소리를 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또 한 분의 예수님을, 또 다른 엘리야와 요한처럼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다루고 살아가는 결례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 숨소리를 더 크게 만들고 있는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곁에 오신 엘리야와 요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들에겐 필요합니다. 또한 스스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 분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 분들처럼 우리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예수님을 드러내려는 마음과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 역시 나의 엘리야요, 예수님이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결례를 범하지 않고 우리 곁에 오신 참된 엘리야와 예수님을 알아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의 눈을 낮추어 우리 곁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그 분들을 잘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콤비 플레이
-양승국신부-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다짐 중에 첫 번째 다짐이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 "집에 잘 붙어있자"였습니다. 집에 붙어있어 보니 너무나 좋더군요. 사실 수도자가 밖으로 다녀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닫게 된 것이 올 한해 제게 있어 제일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한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두시간 짜리 강의 때문에 오랜만에 집을 비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천국 같은 곳이었기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 두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시간 동안 남 앞에 선다는 것,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제는 꾀를 좀 냈습니다. 학기말 시험 끝낸 수사님 한 명을 살살 꼬셨지요. 물론 레크리에이션이나 성가반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수사님이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두 시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강의일변도로 나갔으면 정말 지루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상조해서 강의 시작 전 수사님의 성가연습, 그리고 제 간단한 강의, 휴식, 다시 모여 수사님과 함께 레크리에이션, 마무리 제 강의. 이렇게 진행하다보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작은 체험이었지만 팀으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머리 맞대고 계획을 짜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일,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팀플레이로 대응하려는 노력, 공동으로 행하는 사목이 물론 더디고 때로 짜증도 나겠지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겠다", "나는 죽어도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이다. 절대로 남에게 양보 못 한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모든 영광도 내 몫이다"는 사고방식처럼 피곤한 사고방식도 없습니다.
찰 떡 궁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인내하는 가운데,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의 몫을 척척 잘 해내는 경우를 말하겠지요. 이렇게 될 때 진정 일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와 세례자 요한은 진정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선교사업에 더할 나위 없는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두 분은 각자가 해야 할 몫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는 역할이 주어졌었는데, 그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아놓자마자 정확하게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콤비 플레이였습니다.
참고 기다림을 몸소 가르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에 북부 이스라엘의 길르앗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열정을 지니고 바알 숭배자들과 투쟁하였다. 당시 왕은 아합이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띠로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세벨은 바알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였다. 그녀는 바알을 위한 신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데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알 숭배를 장려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에게 하느님의 징벌로 가뭄이 올 것을 예언했다(1열왕 17,1). 그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적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고 바알의 예언자들을 죽였다(1열왕 18,20-46).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였으며, 엘리야에 대한 기록은 엘리사를 통하여 예언자단 안에서 소중하게 보존되어 왔다. 엘리야는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주님을 예비하는 자로서 다시 이 세상에 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말라기서는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말라 4,5-6) 하고 예언하였다.
오늘 집회서는 예언자 엘리야가 행한 여러 가지 기적을 기리며, 그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때부터 인류구원을 약속하셨지만, 곧바로 구세주를 보내시지 않으셨다.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다. 하느님께서는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떠돌이 민족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키우셨다.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온갖 죄악에 빠지고, 그로 인하여 온갖 고통을 당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하심으로써 다시금 축복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키우시며 인류구원의 때를 준비하셨다. 때가 이르자 동정녀 마리아를 택하여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셨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이 구세주를 맞이할 수 있도록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들까지도 미리 보내셨는데, 그가 곧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이며, 세례자 요한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인류구원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마음을 쓰시면서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하여 무수한 세월 동안 준비하셨고, 한 민족을 택하시어 준비하신 기간만도 1800년이란 길고 긴 기간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참고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 사람에게 기다림을 가르쳐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무수한 세월동안 기다리시면서 세세하고 면밀하게 준비하심으로써 기다림이란 단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착실하게 준비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다. 마치 농부가 땀 흘려 수고함으로써 수확을 얻듯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땀 흘려 수고하며 참고 기다려야함을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대림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미래를 기획하고 설계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자. 막연히 시간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소중하고 귀하게 준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모든 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를 성급하게 바라기보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자. 우리의 인내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준비가 크면 클수록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은 더욱더 클 것이다..............◆
-강병규 신부-
대림시기는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 분이 꼭 오시리라는 희망 말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우리를 준비하게 합니다.
우리는 대림시기의 첫째 주에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깨어 기다려야 함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주에는 깨어 기다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의 자세, 즉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셋째 주가 되면 주님께서 오실 때가 다가왔음을 기뻐해야 함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넷째 주가 되면 주님의 탄생이 예고되고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듣게 됩니다.
기다림의 시기,
이 시간들은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는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유대교는 전통상 말라키서 3장 23절의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앞서 와서 백성들을 한데 모으고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선지자로 내세우시며 이미 엘리야가 당신의 앞길을 닦으셨지만 핍박받았음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여 고난을 받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그 당시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하고서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예전, 교목신부를 할 때 일입니다. 여학교에 꽃배달이 왔었습니다. 어느 여학생에게 남자친구가 생일이라고 보내준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그러길, 15만원어치 이상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참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겠으나 그 사랑이 얼마나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가 되는 사랑이 아니길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가진 게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얼마나 잘 쓰느냐가 중요하다.' 라는.....
이 말은 이런 말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람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그 사람을 내가 얼마나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혼자만 잘살아보겠다고 자신들만 챙기고 다른 모든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에서 빠져나가야할 때입니다. 진실로 참된 이웃이 필요한 이 세상에 내가 바로 그 이웃이 되어줘야 하는
절박한 용단의 때입니다.
그 이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실 앞길을 닦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삶이 기다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장서 수집광
-박동진 신부-
책이 쌓여 있는 서재에 들어서면 아직 읽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쉬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대신 다른 것은 얻었을 것이라고 달래곤 합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열 가지 계명을 받습니다. 그것들에 여러 가지 살이 붙고 이리저리 해석이 되면서, 율법학자들에 의해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율법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해석이나 주석은 동양의 사서삼경이나 율법서처럼 그 양이 많긴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초본을 넘어설 수는 없나 봅니다. 500여 권에 달하도록 율법 해석은 했으되, 도무지 지켜낼 수가 없었고 어떠한 것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기에, 이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가는 바리사이파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500여 권을 통달하는 율법학자도, 그것을 지키겠다고 나선 바리사이파 사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더 잘 알아보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을 마련해 주는 참고서 역할을 하는 율법서와 그것의 실천이 도리어 주님을 못 알아보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사 짓는 일은 마땅히 농부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경당문노 (耕當問奴)의 마음이나, 수영을 하려면 몇 권의 수영서적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는 말이 더 깊이 와닿는지도 모릅니다. 낮은 곳에 오시려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마음을 낮추어야만 비로소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고,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의 과오
-민경철 신부-
가끔씩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과오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내가 그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고 후회도 해보지만
오래전의 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수작을 부렸다는 것이지요. 누가 알기라도 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곤경에 빠지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막아야 했습니다. 오리발을 내밀고, 거짓말도
해보고, 변명도 해보고, 다른 이의 잘못으로 만들기도 하고, 급기야 궁지에 몰리면 알아버린
이를 협박과 회유(?)로 매수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한 번 웃음거리가 되면, 한 번 혼이 나면 모든 게 끝이 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싫어서 범했던 과오를 감추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예수님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그네들의 모습이 또 우리의 모습이 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이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랍니다.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감춘다고 감추어질 것이 아니지요.
사실 주님은 ‘아프지 않은 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보는 눈
-오영숙 수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들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좋게 봅니다. 아무리 나쁜 일을 해도, 미운 짓을 해도 크게 마음 쓰지 않고 그래도 예쁘게 보아주며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누군가를 미워할 땐 그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훌륭한 일을 해도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깎아내리려 하고 도무지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객관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한탄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요한도 받아들일 마음이 아예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행동은 그들에게 도전이 되었고 그분들의 말씀은 양심을 자극하여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주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가 필요로 하는 주님을 믿고 있지는 않는지요? 바른 말을 하고, 정의를 세우는 또 한 분의 이 시대의 예수를,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 일신상의 안락함보다, 나 개인의 이익보다 참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워 나가는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이창주 신부-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의 앞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7장 첫부분은 예수님께서 다볼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서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난 뒤 예수님이야말로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이시라고 제자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본 기적과 같은 사건들로 들떠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시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이러한 명령에 대해서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준비작업을 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엘리야를 본 것이 곧 말라기(4,5)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당연할진데, 주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지 제자들은 궁금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엘리야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되었기에 재림한 엘리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곧 뒤따라 오실 메시아도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에게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박해하여 죽였던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박해하여 죽일 것이라고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 예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해서 이 세상의 으뜸으로 가는 민족으로 만들어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무능하리만큼 한없이 낮은 자로 오시는 예수님은 자신들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기에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매도하였습니다. 아집과 편견이 진리와 진실을 묵살시키고 거짓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기다립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번민,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당장 나 자신을 하늘나라에 올려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의 기준, 구세주의 모습만을 내세우다 보니 예수님보다 먼저 온 엘리야를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계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안에 태어나려 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내가 편하게 살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기다리는 사랑의 예수님은, 나와 너를 연결해 주고 우리와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실 사랑의 구세주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뿐입니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다림이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던져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기다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개와 겸손으로만
- 홍성만 신부-
회복할 수 있는 마음의 시력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서 구약의 대 예언자인 모세와 에리야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께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을 말입니다.
구세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던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셔야 했던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나머지 세례자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표징을 표징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무지몽매함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마음의 밝은 시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연유에서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의 시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회개와 겸손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도 회개의 겸손으로 표징을 투시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우리 시대의 엘리야를 그리며
-강영구 신부 -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대에게
시절이 수상하고 삶이 고달플수록 예언자 엘리야 같은 인물이 기다려집니다.
열왕기 상권이 전하는 엘리야 시대의 상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기원전 9세기 경 북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 더 악한 짓을 합니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제벨과 혼인하고, 가나안의 우상 바알의 신전을 짓고 제단을 세웁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아세라 목상도 세웁니다. 그리고 국록(國祿)으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을 고용하여 참모로 삼고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1열왕 16,29이하) 간부(姦婦) 이제벨의 농간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가로채며 끊임없이 악한 일을 골라서 하던 그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습니다.(1열왕21,1-29)
도탄에 빠진 백성들 앞에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는 가르멜 산에서 궁내(宮內) 예언자 무리들을 숙청하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아합과 왕비 이제벨은 예언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왕과 왕비의 박해를 받으며 외롭게 악의 세력과 싸우던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릅니다.(2열왕2,1-18)
그 이후로 백성들은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환난과 핍박의 시절을 만날 때마다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엘리야의 재림을 고대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도 예언자 엘리야 같은 인물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대림절(待臨節)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재림과 성탄 대축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이 시대의 엘리야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당신이 이 시대의 엘리야입니다.
당신은 말과 행동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선포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一明)
예수님의 장난감
-이찬홍 신부-
대림시기와 사순시기 때나, 죄 체험에 괴로워할 때나, 그릇되고 중심적인 삶을 돌이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자주 듣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여 이 죄인이...” 라는 성가 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 잡은 맘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 죄인이 다시 눈물 흘립니다.
오, 내 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은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모든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이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보면, 자신의 그릇된 말, 행동, 생각, 곧 삶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반성,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의 잘못, 허물을 내어 드리며, 용서받고 싶다고...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 성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참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자신의 욕심과 마음대로 살아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 저자가 자신을 반성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제멋대로 생각하고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방식대로 믿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복음에 율법학자들이 세례자 요한을 자신들 마음대로 다루어 결국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였듯이, 그리고 예수님까지도 자신들의 마음대로 다루어 결국 십자가상에 돌아가게 하였듯이, 이 성가의 저자 역시 많은 잘못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자신의 마음대로 대하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 믿어왔기 때문에 통회의 눈물을...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종 하느님을 내가 바라고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대로 믿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곧, 이 성가 저자의 잘못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모습을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되지 않을 때, ‘하느님 왜 저는 늘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반듯이 무엇을 드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청하고 원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며 매달리는 것과, 하느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요, 우리가 지녀야할 모습이지만, 하느님을 제멋대로 대하고, 자신의 의지와 뜻에 하느님을 끌어 들이려 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요, 교만입니다.
이런 모습을 자주 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대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는 분이 계십니다.
작은 길의 영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신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성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나는 예수님의 장난감이 되고 싶어요. 아주 귀하고 값비싼 장난감이 아니라, 그저 흔하디흔한 장난감. 예수님께서 가지고 놀다가 그저 아무렇게나 버려두어도 좋을 그런 장난감이 되고 싶어요!’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의 뜻과 의지에 맞추어 살아가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만하게 성녀처럼 똑같은 삶을.. 같은 생각과 말과 마음으로 살아가겠노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져가는 존재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인 성녀들처럼 살아가지는 못해도, 그분들의 삶을 본받으려는 노력은...그분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성인 성녀가 된 후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처럼 노력하며 살다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믿음과 불신의 대결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높은 산으로 데려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체험하게 한 뒤(마태 17,1-9) 산을 내려오면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다. 대화내용의 핵심은 물론 엘리야와 메시아,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이다. 대화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는 제자들에게 요한과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은 지난 목요일의 복음이다.(마태 11,11-15)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모든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셨고,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특사’와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증언하셨다.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그리고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말라 3,23)고 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야훼의 특사가 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야훼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던(2열왕 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 부분은 오늘 독서의 집회서(집회 48,1-4.9-11)가 재삼 확인하고 있다. ‘집회서’는 이를 성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집회서는 기원전 132년경 예수 벤 시라에 의해 집필된 책으로서 자기 손자를 위해 희랍어로 번역해 둔 덕분에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벤 시라는 역사적 인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을 찬양하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판관들, 다윗, 솔로몬 등 역대 선조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기원전 850년경 북왕조에서 활동했던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벤 시라는 불마차를 타고 불 소용돌이 속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가 주님의 심판 날에 다시 와서, 하느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하면서, 재림하는 엘리야를 볼 수 있고 그와 사랑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집회 48,9-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야훼의 종말심판은 메시아에 의한 새로운 세상의 개벽(開闢)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예언이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이신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고 계시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에 대한 단순한 불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볼 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 즉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도모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참수된 까닭에 ‘재림한 엘리야’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메시아의 도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의심은 예수님의 증언에 의해 차차 풀려가지만, 정작 해답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속에 들어 있다. 사람의 아들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대접을 받아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 차례나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통하여 제자들은 차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깨달아 간다. 이제 선구자와 메시아에 대한 제자들의 수용과 믿음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배척과 불신의 대결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은총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얻지 못하고, 그분의 부활 후에야 얻었던 믿음을 예수님 성탄의 구유에서 앞당겨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멋대로 다루었다
-유 광수신부-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과연 엘리아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제멋대로 다룬 원인이 무엇인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무지함" 때문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이성과 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지성이 없다면 짐승과 같을 것이고 로봇트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알고 그에 알맞게 대처하며 지혜롭게 생활해야 한다. 즉 내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신자로서 알아야할 기본적인 교리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대림절을 지내고 성탄을 맞으면서 대림절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고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여자의 몸을 빌려 태어나셔야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등에 대해 정말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느님에 대한 나의 무지함, 교리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무지함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제멋대로"살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면서도 알아 보지 못하고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 가르쳐 주신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제멋대로"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함에 대해서 바오로는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신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서로 헐뜯고 하느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꾀하고 부모를 거역할뿐더러 뿐더러 분별력도, 신의도,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을 행하는 남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로마 1,21-32)참조)
우리 같으면 상대방이 무엇을 잘 모르고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즉각 "바보같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 네가 모르고 저지른 것이 아니냐? 뭐 좀 알고 말을 해라. 이 멍청아!"하고 야단을 치던지 나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던지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육박지를 것이다. 상대방이 모르고 저지른 일인데도 전혀 양보를 한다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을 멸시하고, 무시하며, 왕따 시키고, 그리고 모르고 저지른 잘못인데도 가차없이 그에 상응한 손해 보상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의 무지함에 대해서 조금도 관대하지 못하다. 그것이 인간이고 오늘 우리 사회의 분위기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분명히 인간의 무지함 때문에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을 아시면서 "제멋대로" 다루게 놔두신다. 그 결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하셨다. 그것이 하느님의 관대함이며 사랑이다. 이사야서는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씌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 6-7)라고 하였다.
"제멋대로 다루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무지함" 때문이다. 즉 하느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고 또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의 행동의 기준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다."(마태 13,11) 즉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다."(마르3, 35)
아무튼 오늘 복음을 요약하면 처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는 말씀으로 끝났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물어야할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몰랐던 것을 깨닫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복음을 읽을 때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어야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복음에서 찾고 깨달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몇 십 년을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제멋대로"살아갈 것이다. 많은 의문을 안고 살아가면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발전이라고는있을 수 없을 것이며 삶의 질 또한 항상 같은 수준에서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