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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눈을 밝히심
민 22:31-41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35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
36 발락은 발람이 온다 함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37 발락은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38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39 발람이 발락과 동행하여 기럇후솟에 이르러서는
40 발락이 소와 양을 잡아 발람과 그와 함께 한 고관들을 대접하였더라
41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민 22:31-41 / 그제야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게 해주셨다. 발람은 칼을 빼어 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심부름꾼을 보고 깜짝 놀라 머리를 숙이며 땅에 엎드렸다. 32)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발람에게 말하였다. `어쩌자고 이렇게 나귀를 세 번씩이나 후려치느냐? 나는 네 길을 막으려고 이렇게 나섰다. 네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33) 네가 타고 있는 나귀가 네 목숨을 구하려고 나를 보고 세 빈씩이나 피하였다. 만일 나귀가 피하지 않았다면 나귀만 살고 너는 벌써 죽고 말았을 것이다.' 34) 발람이 입을 열었다. `진정 제 잘못입니다. 당신께서 길을 막고 서 계신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 몸이 이 길을 가는 것을 당신께서 좋지 않게 여기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발길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35) 그러자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발람에게 일렀다. `가거라. 저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나거라. 하지만 내가 네게 이르는 대로만 말하여라.' 그래서 발람은 그 모압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36) [발락이 발람을 맞아들이다] 발락은 발람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압 국경 근방에 있는 아르논 강가의 성읍 아르까지 나가 발람을 맞아들였다. 37) 발락은 반가워하며 `어쩌자고 이제 오시오! 지난번 심부름꾼을 보내 드렸을 때에는 왜 오시지 않으셨소. 당신께 후한 보답을 못해 드릴까 하여 그러셨소?' 라고 말하였다. 38) `내가 이렇게 오지 않았소? 하지만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할 뿐이오' 하고 발람이 대답하였다. 39) 발람은 발락과 함께 기럇후솟 마을로 갔다. 40) 그곳에서 발락은 소와 양을 잡아 발람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또 발람에게 보냈던 고관들과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41)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이튿날 발락은 발람과 함께 바알의 산당으로 갔다. 발람은 거기서 이스라엘 진영을 내려다보았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든 모습을 보고도 잠시 후회할 뿐 계속해서 멸망의 길을 갑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본 발람(31-33)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주시자 비로소 그는 손에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선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에 현현하신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칼은 분명 발람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나귀를 세 번이나 때린 이유를 묻습니다. 이는 나귀의 잘못이 아니라 발람의 잘못을 깨우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악하다’는 말은 ‘성급히 가다’는 뜻으로 재물을 향해 달려가는 발람의 탐욕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나귀가 아니었다면 발람은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나귀가 발람을 구한 것입니다.
즉흥적인 후회와 계속된 죄의 길(34-35)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는 발람의 말이 회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진노의 칼을 본 발람의 즉흥적인 반응에 불과합니다. 참된 회개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발람이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말을 했지만 단서를 붙입니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밝히셨지만, 발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답만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맞추어주기를 바랍니다. 발람의 악의 뿌리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유 1:11; 딤전 6:10). 발람의 탐욕이 여전함을 확인한 여호와의 사자는 또 다시 발락에게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고집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십니다(롬 1:24-28). 이는 사실상 심판에 빠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롬 1:24, 26, 28).
발락의 환대(36-41) 모압 왕 발락은 변경까지 나와 발람을 영접합니다. 이 유명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학수고대했기 때문입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존귀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이는 저주의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조금 전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는 여호와의 사자의 당부를 기억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저주가 실패할 경우 변명의 구실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고지대인 바알의 산당으로 데려가 이스라엘 진영을 보게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사전 준비였습니다.
적용: 회개란 후회가 아니라 돌아서는 것입니다. 당신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했던 경험을 나눠보세요.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5살 먹은 그의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와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시면
민 22:41-23:30 / 이정완 목사
우리는 광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문제와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지금도 이런 저런 일로 인해 두려워하는 성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능력이 큰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모압 왕 발락은 유명한 마술사 발람을 청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했으나 발람은 한 마디도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며, 그들의 축복된 장래를 예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제사
발람을 청해온 모압 왕 발락은 다음 날 아침 발람을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 신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아스라엘 백성의 진 끝가지 보니라”(22:41) 발람이 저주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자 발람은 발락에게 일곱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게 하여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할 준비를 한 것이었습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1-2절)
발람이 드린 제물과 제사는 어느 모로 보나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제물을 드린 발람의 취지와 동기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발락과 발람은 자기들이 바친 제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이방 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거나 종교적인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마음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고 합니다. 즉 신을 자기들의 의도대로 조종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헌금을 드리거나 작정 기도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헌금 드리는 것은 좋으나, 이러한 동기와 목적으로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마음을 다하여 충성하는 마음이 먼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정립되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에게 필요한 것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본적인 자세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면서도 그 대가를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고 완전하게 채워 주십니다. 오직 순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신 하나님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모든 제물을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어 가라사대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찌니라”(5절)
지금 발람은 모압 왕에게 많은 돈과 명예를 얻도록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오는 길에 칼을 빼들고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리고 혹시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할 말을 주실는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자기 의도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축복의 말씀을 넣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발락이 약속한 많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던 발람은 오히려 축복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주하지 않으신다.
발람은 입을 열자마자 양심선언부터 하고 있습니다.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7절) 발람은 자기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발락과 자기가 모의했던 일을 폭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의 입을 여셨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발람은 자신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저주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8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사랑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돌보시는데 누가 그들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발락과 발람이 모의하여 아무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으며,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요일5:18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백성된 우리를 이렇게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별하신다.
발람은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열방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9절)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다르게 복을 받고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처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별하셔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시고 다르게 취급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창대케 하신다.
발람은 또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10상)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3:16).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들을 신실하게 지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창대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하나님 백성된 우리가 받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시는 말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10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복을 받은 자들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그들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발람은 즉시 발락을 떠나 하나님 백성에게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이런 소원을 가졌으면서도 발락이 주겠다는 돈과 명예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발람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육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수13:22)
오늘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그것이 마음의 소원으로만 끝나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시도
이와 같이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축복하자 모압 왕 발락은 실망하며 발람을 책망합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11절) 그러나 발람은 발락의 요구나 자신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12절)
아마도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 진의 끝만 보이는 곳으로 발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13절) 그리고 이번에도 전번과 같은 방식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든 시도는 헛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발람이 에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18-19절)
사람은 변덕이 심하고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찌 발람 같은 자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놔두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을 축복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책임지고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람은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들 중에 있도다”(21절)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고 거역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가나안 입구에 서 있으며, 결국은 그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임재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들 중에 있도다”(21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며 지키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에는 계시지 않고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특별히 당신의 교회 안에 계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분명해졌는데, 그 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시며, 장차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런 그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신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22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23절)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데 누가 그들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또 당신의 백성을 강하게 하시며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2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유명한 술사 발람을 불러왔지만,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오직 마음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온전히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민수기 22:31-15 / 이종윤 목사
우리가 받아야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신자도, 하나님의 백성도 모두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 대기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압을 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정작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여 결국 모압은 하나님의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자고 하고, 예언가 발람을 뇌물로 데려오려 합니다. 처음엔 거절했던 발람도 뇌물을 보자 마음이 흔들려 나귀를 타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나귀는 앞으로 전진하려 하질 않습니다. 화가 난 발람은 결국 나귀를 때리고, 그 때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면서 동시에 발람의 눈을 뜨게 만듭니다. 눈이 뜨인 발람이 보게 된 것은 앞을 막고 있는 천사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입을 열어 말을 시키고 사람의 눈을 뜨이게 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 분입니다.
Ⅰ.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겠다고 이미 약속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전한 축복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받은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0절에서 '야곱의 티끌을 감히 누가 능히 셀 수 있는가'라며 과거에 축복을 하셨습니다. 이렇듯 과거에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현재도 하나님은 지켜주고 계시며, 발람의 사건을 통해 지금도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은연중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거나 종종 고통 중에 놓일 때가 있는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요셉 앞에 형들이 엎드려 우리는 죽을 목숨이라며 벌벌 떨때 요셉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그들이 자신을 애굽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이며 성경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Ⅱ. 말씀하신 것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라
저주하라고 불렀더니 발람은 도리어 축복을 합니다. 그러자 모압왕은 뇌물을 더 주겠다고 하고 발람은 마음이 흔들려 저주를 하려고 하나 또 축복만 나오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민 23:2)1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승리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며 모든 것을 이기십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 불가능한 것이 놓여있지만 하나님은 결국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만 하면 우리는 승전가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3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사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자보다도 더 강한 하나님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자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때 말씀의 문을 열어 이루어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보라
10절에서 네 물통에서는 물이 넘친다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이 것은 곧, 풍성한 생명의 공급을 하신다는 것이며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현재는 아무 것도 없는지 모르지만 미래에 우리의 물통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먼 훗날 한 별과 한 규(홀)를 보았다' 여기에서 별과 규는 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왕 되신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때에 우리에게 놀라운 복이, 바로 우리의 물통이 넘쳐흐르는 복이 임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다스려주실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이 가득차고 하늘 나라도 준비되어질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꼭 확인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 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풍성히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되 영원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약한 자원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나에게 지식이 있고, 물질이 있다고 거기에 의지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주님의 자녀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짐승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십시오
민 22:31-35 / 문기태 목사
전에 어른들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무개는 소만도 못하다' '누구는 개만도 못하다'하고 말하면 아주 고약한 욕이 됩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부도덕하고 추악한 행동을 하는 못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임한다고 여겼으며 그의 명성은 나라안팍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발람입니다.
어느날 발람이 모압왕의 초청을 받아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발람의 말을 듣지 않고 길에서 이탈하여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이 억지로 고삐를 당기고 채찍질을 하여 겨우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양쪽으로 담이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자 나귀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옆에 있는 담벼락에 바짝 붙어 비비적대며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바람에 나귀를 타고 있던 발람의 발에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발람은 몹시 화가 나서 더세게 채찍을 내리쳤습니다. 몇 발짝 걸음을 옮기던 나귀가 이번에는 땅바닥에 앞드려 일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화가난 발람은 지팡이로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나귀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신께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이처럼 세 번이나 나를 세게 때립니까?"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다. 만약 내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즉시 너를 죽였을 것이다." "나는 오늘까지 당신께서 늘 타던 나귀가 아닙니까? 이제껏 이같이 하던 행습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그순간 나귀의 입을 여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발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정면에는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사가 입을 열어 "너는 왜 나귀를 때리느냐? 네가 가서는 안될 길이기에 너를 막으려고 왔다. 나귀가 나를 보고 세 번이나 비켜섰기에 망정이지 너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나귀는 천사를 보았으나 발람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귀는 주인을 살릴려고 매를 맞으면서도 멈추었으나 발람은 미련하게도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줄도 모르고 무모하게 앞으로 나가려고 나귀를 매질하였습니다. 발람은 참으로 나귀보다도 못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기도의능력이 굉장한 사람으로 알려진 발람이 한순간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내려갔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변할 가능성을 완전하게 부인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고 있던 유명한 선지자를 이처럼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끌어내렸을까요?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나라전체에 확산되어 그대로는 도저히 전쟁을 이길 수가 없을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영적인 파워가 상당한 발람선지자에게 사신들과 함께 많은 은금보물을 보내며 자기들의 진영으로 와서 그들의 적인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모압이 승리하도록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발람은 모압의 고관들에게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시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슴을 들어보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하였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너는 그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라. 애굽에서 나온 그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발람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모압에 돌아가 왕에게 보고하자 모압왕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더 직위가 높은 신하들을 더 많이 보내어 다시 간청합니다. "주저말고 오시기 바랍니다. 내 청을 들어주면 후하게 보답하며 당신을 높여 존귀하게 하고 당신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비록 궁궐에 가득한 금은을 나에게 준다하여고 하나님의 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오늘 밤 여기서 묵으시오. 내가 하나님께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이상한 점을 찾으셨습니까? 발람의 문제를 발견하였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발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게서 그에게 말씀하셧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그 백성은 내게 복을 받은 백성이다 너는 그들을 저주 할 수 없다. 너는 모압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가지 말아라."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슴하셨고 발람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의 마음은 발락의 제안에 끌리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궁궐에 가득한 금은을 준다하여도...운운하였으나 마음은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이 더 말슴하시는것이 있는지 들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밤에 하나님께서 "가라"고 허락하십니다. 이상합니다. 처음에 '가지 말라'고 명확하게 말슴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왜 '가도 좋다'고 허락하십니까? 허락하시고는 천사를 보내어 칼로 심판하실려고 기다리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발락이 가고 싶어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싶다고 반복하여 묻는 중에 자신에게 속은 것입니다. 제가 방송상담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묻기 보다는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기대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대답이 나올때까지 여기저기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발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명확하게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허락을 만들어 모압왕을 찾아나서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죽음을 만나게 되었으나 위험을 알아차린 나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그때 발람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말합니다. "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이 잘못된 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줄 알기만 했더라면 따라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하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날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은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도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슴인 성경을 통해 쉽고 분명하게 나타내신 것부터 순종하기 시작하십시오. 점차 더 많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응답하시고 보여주신 일들을 앞에 놓고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더 기도해 보자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많이 하는 것처럼 경건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기도를 했으면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큰 이유는 발람처럼 두 마리의 토끼를 좇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기쁘게 해드리고 싶고 하나님의 대적이 제시하는 조건도 놓치기 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도 해야 하겠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람을 대적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많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죄악이 가져다주는 쾌락의 달콤함도 포기하기 싫은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나라에 유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핑계로 가정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은 지극히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때로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슴에 충실하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까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합리화시키며 포기해야 할 것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다 포기한 것처럼 그럴듯하게 자기를 믿음좋은 사람처럼 포장해 놓고 뒤로는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주님께 칭찬들을 수 없습니다.
발람은 그 여행을 출발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출발했었더라도 천사를 만나고서는 무조건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의 달콤한 제안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만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모압에 들어갔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는 한 마디도 없고 축복의 말씀만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장소를 옮겨가며 저주를 기대했으나 축복만 하자 발락은 발칵 화를 내며 발람을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발람은 비록 하나님이 막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지는 않았으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치명타를 날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패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를 건네 주었습니다. (민 25:1-3)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모압왕에게 이스라엘을 음란한 방법으로 유혹하여 우상숭배하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하였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축복하였으니 나는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왕에게 살짝 승리의 파일을 넘겨 주었으니 모압왕과의 친구관계도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꿩도 먹고 알고 먹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며 스스로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이 하나님게 통할리 없습니다. 민31:8에 보면 발람은 하나님의 원수들과 함께 비참하게 칼에 맞아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신약성경은 발람을 가리켜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어그러진 길을 걸은 대표적인 이중인격자로 모델로 삼습니다.
[예화]미국의 아더 머리 댄스교습소에서 춤선생으로 일하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댄스 교습을 마치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한 목사님의 설교가 흘러 나왔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운명의 시간을 어데서 보낼 것인가?"라는 설교에서 이 청년은 마음에 깊은 찔림을 받았습니다.그는 정신적으로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나는 춤이나 가르치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인가?" 그는 그 순간 쾌락적이었던 자신의 삶을 철저히 버리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그가 바로 "전도폭발"이라는 전도교재를 만들어 세계적인 전도자가 된 플로리다 코랄릿지 장로교회 케네디 목사입니다.
예수님의 심부름꾼이 되려면 부름을 받는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동창회,계모임,친목회,영화구경 다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아질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우선순위로 주님의 명령을 놓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일꾼이 되느냐는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나를 버렸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일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버렸는가? 앞으로 내가 더 버려야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되새기며 변화를 받읍시다!
가라고 해서 진짜 가냐
민 22:31-40 / 행복한 순례자
오늘 본문은 눈이 밝아진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며 돌아갈 것을 말했으나 이르는 말만 하라는 지시를 받고서는 다시 길을 가는 이야기로, 드디어 모압 왕을 만나 그 말을 전하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 들고 길에 서있었다고 했습니다. 눈이 밝아진 발람이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깜깜한 영적인 인지 능력을 주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모압의 고관들은 그런 광경들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그런 능력들이 상실된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지만 바울 외에는 다른 동행인들이 보지 못한 것과 흡사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악하다’로 번역된 용어의 원어의미는 ‘왜곡의 정도가 심하다’, ‘거꾸로 가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여호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러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막다’의 원어의미도 ‘원수가 되다’라는 뜻이 있어, 여호와께서 발람은 원수처럼 여겨 그 길을 차단하였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길을 가는 그의 모습은 단지 여호와의 대적자로 비쳤을 뿐이지요.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는 말은, 발람은 한낱 나귀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나귀를 때렸지만 나귀가 길을 피해서 발람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발람이 산 것은 그 잘난 주술능력 때문이 아니라 나귀 때문이지요. 나귀보다 못한 자이니 행여나 이스라엘을 저주할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에 발람은 범죄했다고 고백하며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진짜 회개한 것이 아니고 임기응변으로 들러댄 말입니다. 위기를 모면한 그 이후에 행동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하나님께 따질 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의 두 번째 사신들이 왔을 때 분명히 하나님이 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선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어 치도곤을 냈으니 억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압 왕의 첫 번째 사신들이 왔을 때 여호와께서 분명히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두 번 째는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정말 그가 가니까 진노하심으로 그분의 사자를 보냈던 것입니다.
발람은 아둔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칭 선지자라는 자가 분별력이 수준 이하입니다. 그는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 인간입니다. 어린 자녀가 오토바이를 사 달라고 하면 선뜻 사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전거도 사주고선 길에서 타지 말고, 공원이나 운동장에서만 타라고 신신당부하는데요. 그렇다면 그것은 기쁘게 허락한 것이 아니지요. 마지못해 한 것이지요. 하도 보채니까 더 이상 막을 수 없어서 했을 뿐, 엄격히 말하면 승낙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람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가라고 해서 진짜 가냐?’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마음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더불어 그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 의사에 반하여 하나님도 스스로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발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도 가는 것을 소원하니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쁘게 승낙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자유의지를 꺾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결국 완악한 그를 방임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분노를 왜 내신 건가요? 그 속에 욕심이 가득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살피기는커녕 오직 탐욕을 채우기 위해 죄 없는 나귀를 채찍질 했기 때문입니다. 모압 왕에게 가는 저의가 불량했던 것이지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일의 동기가 나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을지라도 진행 중 욕심이 들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일이라고 따지거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고집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고, 다시 기도하며, 마음 속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돌이킴이고 회개입니다. 꼭 죄짓고 회개하는 것만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잘못 안 것도 더구나 욕심으로 그분의 뜻과 계획을 가린 것도 큰 죄이지요.
말씀을 보면서 자꾸 걸리거나 환경을 통한 어떤 기미가 보일 때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 가던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계속 가면서 처음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고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것이 곧 영성이지요. 우리 눈에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마음에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돈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런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그분을 더 존중하기를 원해서입니다.
발람의 눈을 밝히심
민 22:31-41 / 조상수 목사(구성교회)
내일부터 성결대 신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13년 만에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려니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요즘엔 교수 평가가 아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강의실은 어떻게 변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오래전 일을 회상하다 보니 과거가 내 앞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속 사람들이 사용했던 히브리어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나뉘지 않습니다. 신명기 4장 32절에는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네 얼굴 앞에 있는 옛날들(과거들)에게 물어보라”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가 지나간 시간이기에 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과거는 눈으로 확인한 것이기에 앞에 있다고 생각했고, 미래는 아직 본 것이 아니기에 뒤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때로는 괴로울 수 있지만, 과거를 제대로 살펴야 미래를 잘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과 같은 위대한 신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일을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발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귀’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창 3:5)만 지운다면 눈이 밝아지는 일은 너무나 큰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시 19:8). 그런데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밝히셨을 때, 발람은 자신의 눈이 어두웠을 때가 좋았을 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나귀가 아니었으면 발람이 이미 죽었을 거라고 말하자 발람은 이제야 모압의 고관들을 따라나선 일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네게 일러주는 말만 하라”는 숙제를 줍니다. 사실 이 말은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미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중간에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발람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변했기에 하나님의 사자도 하나님과 같은 말로 경고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한 일, 나귀가 자신을 살린 일,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경고한 일들은 발람과 같은 선지자에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점을 봐주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명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 말씀을 따르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자신을 마중 나온 발락에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고, 발락의 요청대로 하지 않으면 발락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발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우리도 지금 발람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지 않나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자니, 손해가 막심(莫甚)하고, 나의 이익과 가치를 추구하고자 노력하자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상황 말입니다. 어느 선택을 하든 선택에 따른 결과의 책임은 본인이 짊어지게 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연약하지 않았고 부족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와 같아야 하겠고,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주와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미친 선지자 발람
민 22:31-4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패역하다는 어긋나고 거스르다는 말이다.
어긋나고 거스른 길을 가니 가는 길을 못가게 하려고 나왔다.
민수기 22:33 KRV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그때서야 발람은 나귀가 앞으로 못가고 제자리에서 주춤거린 이유를 알았다.
민수기 22:34 KRV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이것은 발람이 자기 행위를 회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칼을 빼들고 금방 내리칠듯한 기세로 서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바로 왕도 거듭되는 열가지 재앙을 보고 한가지 씩 재앙이 내릴 때 마다 모세를 불러 '내가 죄지었다' 말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 그 재앙을 거두게 하면 바로는 딴 사람이 되곤 했다. 히브리 노예를 고스란히 내보내는 것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든 것이다.
깊은 뉘우침이 없이 그냥 그때그때 임기응변 당장 급한 불을 끄려고 잘못했다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민수기 22:35 KRV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찌니라 발람이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가니라
그냥 거짓 선지자가 가던 길을 그대로 가라 했다. 대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말만 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민수기 22:36-37 KRV
발락이 발람의 온다 함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특별히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케 하지 못하겠느냐
모압왕 발락은 선지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 큰기대를 가지고 모압 국경선 아르논 성읍까지 가서 발람을 특별대우로 영접한다.
모든 권세와 부귀영화로 당신을 높여줄 것인데 왜 이제야 오느냐고 사탕발림한다.
민수기 22:38 KRV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할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발람의 말을 들으면 참 선지자처럼 들린다. 그러나 발람은 이미 칼을 빼든 하나님의 천사에게 단단히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한 상태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참 선지자라면 발락이 자기를 초대한 이유를 잘 알것이다. 오히려 단호하게 모압 왕 발락을 꾸짖어야 마땅하다.
그저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거짓 선지자도 얼마든지 참 선지자처럼 그럴듯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만큼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가리기가 어렵다.
민수기 22:39-40 KRV
발람이 발락과 동행하여 기럇후솟에 이르러서는 발락이 우양을 잡아 발람과 그와 함께한 귀족을 대접하였더라
모압 왕은 자기 꾀와 계획대로 진행해 간다.
소를 잡고 양을 잡아서 큰 잔치를 벌여서 발람과 귀족들을 대접했다.
발락은 발람을 앞세워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싸워서 이기려는 지기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는 것이다.
시편 127:1 KRV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이 세상에는 헛된 일에 분요한 자들이 많다.
시편 39:5-7 KRV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모든 일은 헛된 수고일 뿐이다.
민수기 22:41 KRV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극진히 대접하여 잘먹이고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을 끝까지 살피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시키는 것이다.
다니엘서 4장에 보면
다니엘 4:1-3 KRV
느부갓네살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찌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 한다. 또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나라' 라 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다.
다니엘을 불러서 꿈을 해석하게 한다.
다니엘 4:19-24 KRV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대로 일이 왕에게 일어날 것을 말했다.
다니엘 4:25 KRV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줄을 아시리이다
대제국 바빌론 왕이 사람에게서 쫒겨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림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었다.
다니엘 4:26 KRV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아무리 큰 나라의 권세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께서 위에 계셔서 다스리심을 알고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다.
다니엘 4:27 KRV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지금껏 부당하게 행한 것을 공의를 행함으로 속죄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 간했다.
그러나 약 1년 동안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냥 죄가운데 보낸 것이다.
그래서 왕이 이상한 병에 걸리게 된다.
'동물화 망상'병이다.
짐승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들에서 소같이 풀을 먹고 이슬을 맞고 짐승들과 잔다.
머리털은 독수리같이 되었다.
손톱은 새 발톱같이 되었다.
다니엘 4:34 KRV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자기 권세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살다가 벌을 받고 깨달아서 하나님을 높이게 된 것이다.
다니엘 4:35 KRV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주권의 엄위하심을 고백하게 되었다.
다니엘 4:36 KRV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다시 느부갓네살 왕이 복권된 것이다.
다니엘 4:37 KRV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온세상에 공포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여러해 혼이 나고서 일시적 깨달음을 백성들에게 공포한 것뿐이다.
그다음에는 또 다시 옛날 느부갓네살로 돌아가서 바빌로니아 황제로 정치한 것이다.
짐승과 같이 되는 이상한 경험을 하니, 하나님께 큰벌을 받고 하늘의 하나님을 일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발람 선지자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질 명예 권세욕이 많은 자다.
눈이 어두워져서 나귀에게 책망받은 자다.
그런 발람같은 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시키는 말만 하게 만드신 것이다.
다니엘 4:34-35 KRV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