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는 성토요일에는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다.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무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이날은 노자 성체만 허락되며, 제대포는 벗겨 둔다.
부활 성야 예식을 거행한 뒤에야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이 기쁨은 50일 동안 넘쳐흐른다.(매일미사)
복음묵상 :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부활 성야
제1독서 : 창세 1,1─2,2<또는 1,1.26-31ㄱ>
제2독서 : 창세 22,1-18<또는 22,1-2.9ㄱ.10-13.15-18>
제3독서 : 탈출 14,15─15,1ㄱ
제4독서 : 이사 54,5-14
제5독서 : 이사 55,1-11
제6독서 : 바룩 3,9-15.32─4,4
제7독서 : 에제 36,16-17ㄱ.18-28
서 간 : 로마 6,3-11
복 음 : 마태 28,1-10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3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4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알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지난 성주간 수요일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의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무수한 꽃다운 학생들이 희생되어 나라 전체가 슬픔의 바다에 침몰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온 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습니다.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 안타깝게 합니다. '도대체 왜!'라는 기자의 칼럼에 공감합니다.
“어떤 사회도 적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다.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사회기강을 흔들어 놓아서 국민을 보호할 기본시스템조차 무너뜨릴 정도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대한민국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물러서는 게 더 큰 희생을 막는 길이 아닐까.”
사회만 아니라 개인도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 안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번영을 구가하는 듯 화려하지만 내적으로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성삼일 주님 수난 금요일을 지내고 주님 부활을 앞둔 성토요일, 우리 모두 거국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알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께서 오늘 밤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끌고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주는 첫째 메시지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부활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죽음의 바다를 건너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부활의 새생명을 상징합니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천사가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바로 여기서 부활 신앙, 부활 희망이 생깁니다.
주님 부활이 없으면 우리 신앙도, 희망도 없습니다.
이런 주님 부활에 대한 믿음에서 절망은 희망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변합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부활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매일 새롭게 부활로 이끄십니다.
둘째, 예수님 부활은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감탄하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재차 창조의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지극정성의 순종의 믿음으로 이삭을 살리신 하느님께서는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당신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당신 사랑의 충실성을 입증하신 주님이십니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는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기신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부활 찬송의 다음 대목은 늘 들어도 감동이요 영감의 원천입니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셋째,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응답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주는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예수님 부활에서 샘솟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예수님 부활 소식에 큰 기쁨을 안고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복음의 여제자들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우리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고 우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십니다.
우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주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시니 그대로 에제키엘 예언의 실현입니다.
이에 대한 자연스런 응답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시편 첫 대목이 그대로 우리 심정을 대변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제 오늘 지금부터는 알렐루야, 부활의 기쁨을 노래할 일만 남았습니다.
넷째, 부활의 현장은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부활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2000여 년 전에 있었던 단 한 번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을 충실히 믿는 이들을 통해 계속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우리 역시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래아입니다.
엉뚱한 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는 무덤이 아닌 바로 우리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임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도 부활함으로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죄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이라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빛이 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빛은 우리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십니다. 아멘.
슬픈 부활절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차츰 드러나고 있는 세월호 대참사에 얽힌 소식들을 접하며 치미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일이 발생했는지, 역사와 후손들 앞에 길이 남을 부끄러움입니다.
대형 참사 후에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인재, 초기대응의 미흡, 얄팍한 상술, 무책임, 안이한 대처, 애꿎은 희생자들...
금쪽같은 자녀들, 삶의 희망이요 보루이던 자녀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황당함과 비통함에 울부짖는 부모님들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잊습니다.
마치도 예레미아 예언서의 한 장면 같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미아 31장 15절)
거짓말 같은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아직도 자녀들의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님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생길 수 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늘 먼저 드는 생각이 혹시라도 이게 꿈이었으면,
혹시라도 시계바늘을 뒤로 되돌렸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교회가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만일 지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큰 슬픔을 겪고 있다고 할 때 가장 얄미운 유형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 이런 찢어지는 가슴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사람이겠지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평소처럼 희희낙락하며 즐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고마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 이 큰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내 마음을 헤아려주고 나와 함께 눈물 흘려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따뜻한 연민의 마음을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큰 슬픔에 다양한 방법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 일처럼 만사 제쳐놓고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 활동의 최일선에 서서 움직였습니다.
피해자들의 구조 활동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피해 당사자들과 한 마음이 되기 위해 미리 계획해놓았던 스케줄들을 취소하고 있습니다.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큰 슬픔 중에 있는 가족들에게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변방’, ‘변두리’, ‘경계’란 단어입니다.
이 시대 사목자들은 이 세상의 가장 변두리로 나아가야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교황님께서 강조하시는 그 변방, 세상의 끝은 가장 고통스런 삶의 현장,
이 세상에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곳, 가장 우선적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한국 교회와 사목자들이 나아가야 할 변방,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요?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세월호 참사 현장입니다.
생때같은 자식들 잃고 혼절한 부모들이 자리한 곳입니다. 쓸쓸한 희생자들의 영안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희생된 아이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이들이만 모두 우리 아이들입니다.
영안실을 찾아가 정성껏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큰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 아직도 자녀들 생사를 확인 못해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부모들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드리는 일입니다.
각 본당이나 수도회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점점 희박해져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간절히 함께 기도해봐야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다른 해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드러내놓고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리기도 민망합니다.
수많은 우리 어린 영혼들이 희생된 대형 참사 앞에, 전 국민적인 비극 앞에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이번 부활절 다른 무엇에 앞서 영성적 회개, 공동체적 회개, 범국민적 회개의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안전 불감증으로부터의 회개,
적당주의로부터의 회개,
물질만능주의로부터의 회개,
극단적 이기주의로부터의 회개...
예수님 부활절 때마다 드는 생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류를 위한 엄청난 선물인 예수님 부활,
너무나도 감동적인 주님의 부활이건만 별 감흥 없는 부활,
별 의미 없는 부활, 나와는 거리가 먼 부활은 웬일입니까?
부활의 개별화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부활에 대한 개인 체험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내 안의 변두리, 내 안의 변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한계, 내 비참함, 내 죄, 내 적나라한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포장들을 모두 벗겨내야 합니다.
내 영혼에 덕지덕지 덧칠해져있는 거짓과 위선, 교만과 아집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 내 부끄러운 알몸, 나의 정확한 현주소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거짓 자아에 완전히 죽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제의 나, 그릇된 나, 우상숭배의 나에서 완전히 죽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상국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과 좌절과 절망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두 가지 말씀은 서로 통합니다. 곧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성령을 주시고, 용서의 해0ㅇ위를 실천하라 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주도 아래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 약하디 약한 의탁 행위 안에서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활동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에 개입하시고 그 안에서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에 대한 영광이나 성과가 아니라, 평화임을 알아야겠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생활성서와 함께 ‘소금항아리’>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허물어진 경계
이은하 수녀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전하는 오늘 말씀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한 구절 한 구절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잠시 복음의 장면을 관상해 보자.
죽음과 생명이라는 마치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가, 열린 주님의 무덤 앞에서 만나고 있는 듯하다.
이 순간 지상에 인간으로 오셨던 그분 탄생의 순간을 함께 기억한다면 지나친 걸까?
하지만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떠올려 보고 싶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던 그분의 탄생이
천사들을 통해 가장 비천한 이들이었던 목동들에게 처음 알려졌고
그 소식은 분명 살아있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천사들을 통해 영광스런 주님의 부활이
아직 어두운 새벽 그분의 시신이라도 보기 위해 서둘러 달려온 여인들에게 처음 전해진다.
그리고 그 소식 역시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메시지가 된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이런 측면에서 언제나 동일하다.
전대미문의 이런 엄청난 사건들에서도 그분은 언제나 영광스러운 당신 자신을 비워내시며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고요히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전하시는 생명력은 지상에 계실 때 만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치유하시고, 살리셨던 것처럼 언제나 강력하다.
친구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북받쳐 오르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셨던 그분께서
몸소 죽음을 지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로 먼저 다가가신다.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현실들이
지금 이 빈 무덤 앞에서 인간에게 열리고
천사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드러난다.
그분이 오늘 우리 곁으로 다가오며 건네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야곱의 우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특히 죽음과 어둠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의 빛이
이 땅에 고통 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 버림받은 이들에게 환히 비추어 지기를 바랍니다.
2.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동틀 무렵에 두 여인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곳으로 달려갔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마태 28,5-6;7).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3.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는 다름 아닌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회개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마태 4, 17참조),
가난한 이,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에게 참된 행복을 말씀하신 자리입니다.
또한 사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랐으며,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생활했던 자리,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삶을 살았던 자리가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바로 그 갈릴래아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가십니다.
주님께서 희망의 빛으로, 생명과 사랑의 빛으로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찾아가십니다.
20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갈릴래아는 어디일까요?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현대세계에 관한 사목헌장 1항’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이 땅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이 그리스도 제자들인 우리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그들의 슬픔과 고뇌가 그리스도 제자인 우리들의 슬픔과 고뇌가 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의 갈릴래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는
다름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곳이 생명과 희망, 위로와 사랑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요,
또한 예수님과 함께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4. 오늘날 우리 사회는 참된 평화와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불안과 부조리, 그리고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의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장애인, 노인, 결손가정 아이들의 인권과 복지는 뒷걸음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땀 흘려 일하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소통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권력의 힘에 의해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집단의 이익만을 쫓아가며, 생각과 가치가 자신과 다르다고 하여
비난하고 증오하는 삶의 풍토가 이 땅에 만연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땅에 희망의 빛,
생명과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등의 골을 메우는 데 앞장서는 그리스도인들, 물질 만능주의의 풍조에 맞서
생명 존중과 인권 존중을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서 묵묵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나는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이 꿈꾸는 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 모습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교황님은 세례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가 세상에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하고 계십니다.
신자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금년 8월 ‘아시아 청년대회’ 참석을 겸한 한국 천주교회 사목방문을 오십니다.
그리고 바쁘신 일정 중에 꽃동네를 방문하시어 ‘장애 아동들과의 만남’을 가질 예정입니다.
교황님의 음성 꽃동네 방문과 장애 아동들과의 만남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우리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특히 장애인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교황님의 꽃동네 방문이 교구의 평신도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성직자들의 삶을 쇄신하여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고,
가장 작은이들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6월 4일에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지방선거에서,
나라와 지역사회를 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선출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 선출되도록
모든 교우들은 소중한 선거권을 신중하게 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