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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1차 예언
민 23:1-12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5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12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민 23:1-12 /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일곱 제단을 쌓도록 하시오. 또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오도록 하시오.' 2) 발락은 발람이 말한 데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준비하였다. 발락과 발람은 각각의 제단에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씩을 희생제물로 드렸다. 3) 그러고 나서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번제물 곁에 서 계시오. 나는 여호와께서 나를 만나보실는지 알아보고 와야겠소. 그분께서 혹시 오셔서 내게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시면 내가 다시 이리로 와서 당신께 말씀드리리다' 발람은 이렇게 말하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4)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시자 발람이 아뢰었다. `주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드렸습니다.' 5) 여호와께서는 발람에게 이를 말을 그에게 주셨다. 6) 발람은 발락에게 전할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발락과 모압의 지도자들은 번제물 곁에 그대로 서 있었다. 7) 발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발락이 나보고 오라 하더라. 아람 땅 동쪽 산악 지대에서 모압 왕이 나더러 와달라고 하더라. `내 편이 되어서 저주를 빌어 주시오. 저 이스라엘 놈들이 화를 당하도록 저주를 퍼부어 주시오. 저 야곱 자손놈들이 고꾸라지도록 저주를 퍼부어 주시오' 하고 부탁을 하더라. 8) 그러나 어찌하랴.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여호와께서 저주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저주를 퍼부으랴! 그분이 악담을 퍼붓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으랴! 9) 높은 산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고 언덕 위에서 내리다보니 저 무리, 아주 별난 무리로구나. 다른 민족과는 섞여 살지도 않는 무리로구나. 10) 어찌 저들을 헤아릴 수 있으랴! 티끌처럼 한도 끝도 없는 저 무리를. 수천 수만 저 군대 이스라엘 군대. 내 최후의 날이 올곧게 살려 몸부림 치는 저들과 같다면 저들같이 최후를 맞이한다면 아, 얼마나 좋으랴!' 11) 그러자 발락이 발람에게 따졌다. `아니, 어쩌자고 이러는거요. 내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라고 이리 모셔 오지 않았소. 그런데 도리어 복을 빌다니, 정말 기막힌 노릇이군요.' 12) `어쩔 수 없소. 나는 여호와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말할뿐이오' 하고 발람이 대답하였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바란 모압 왕 발락의 기대와 달리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사와 준비(1-3) 발람은 발락에게 제단 일곱을 쌓을 것과 제물로 바칠 일곱 마리의 수송아지와 일곱 마리의 숫양을 준비하라고 요구합니다. 발락은 발람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제단과 제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발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모압 왕 발락은 바알이나 다른 이방신들의 이름으로 저주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께서 저주하셔야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명색이 그도 선지자였으나 타락한 선지자였습니다. 발람은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림으로써 여호와를 달래어 저주를 이끌어내고자 하였습니다. 목적은 막대한 재물 챙기기입니다. 제사 후 발람은 저주의 말씀을 기대하며 여호와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심(4-10)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셔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십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시지만 때로는 더러운 그릇을 사용하여 뜻을 이루십니다(잠 16:4). 발락에게 돌아간 발람은 발락과 모압의 고관 앞에서 예언을 합니다. 이는 발람이 이스라엘에 관하여 예언한 일곱 예언들(민 23:7, 18; 24:3, 15, 20, 21, 23) 중 1차 예언입니다. 발락은 당연히 저주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예언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언약대로 셀 수 없이 번식하고 번영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에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발람은 자신이 의인의 죽음을 원한다는 말로 예언을 마칩니다. 그는 의인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의인의 죽음을 원합니다. 삶이 죽음을 결정할 것입니다.
발락의 실망(11-12) 당연히 발락은 실망하며 발람을 꾸짖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모셨는데 오히려 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람도 마찬가지로 실망했습니다. 그가 막대한 재물을 기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말씀을 기대하였는데 축복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욕망도, 대적의 어떠한 방해도 이스라엘의 복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영원합니다(신 33:29).
적용: 의인으로 살려면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세요.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와 비전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소년과 거인 골리앗의 싸움을 종종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물리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대부분 두려움에 떨며 감히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는 생각을 바꾼 다윗은 물맷돌을 가지고 거인 골리앗을 넉넉히 이겨냈다고 가르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 설 교 >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민 23:7-11 / 안양준 목사
한 사람의 일생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인생이 끝난 후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도 “인생의 승부는 관 뚜껑을 덮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글은 7절에 기록된 것처럼 ‘발람의 노래’ 중의 일부입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인생에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특별히 이 노래를 부른 발람이라는 사람의 죽음, 그의 종말은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발람 소개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진행하던 때 아모리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 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정중하게 부탁하지만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치러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히려 그들을 파하고 또 바산 왕 옥이 쳐들어 올 때 그들도 파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됩니다. 그때 모압의 왕이 발락이라는 인물인데 22:2을 보면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고 심히 두려워 번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모아 대책회의를 열고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발람을 부르는 것입니다. 발람은 복술 즉 점을 치는 사람인데 이 사람에 대해 “발람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복술가 중에서는 영험있는 자였습니다.
발락이 신하들에게 예물을 주어 발람에게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발람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겠다”하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22:12에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왔던 자들을 돌려 보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발락이 더 높은 귀족을 보내 “높은 지위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줄테니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 받은 자니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미 끝난 일입이다. 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발람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발락이 은금을 집에 가득 채워 줄지라도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못하겠노라” 하면서도 22:19에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발람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발락이 내건 조건에 흔들립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하면서도 물질과 권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합니다.
물질의 유혹
현대를 자본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한 마디로 물질만능시대입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 6:24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직도 흔들리십니까? 하와를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와는 분명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꿀보다 달콤한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는 하와에게 선악과는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딤전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돈 때문에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 중에서도 돈 때문에 이미 믿음에서 떠난 자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흔들리는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응답은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철야기도해서, 금식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속지 마세요. 하나님이 체념한 겁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는 것인데 이걸 응답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왜 발람이 안되는 걸 가지고 자꾸 기도하는 겁니까? 마음 속의 탐심 때문입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미련이 많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걸 많이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사실 기도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미련을 갖고 기도하는 것은 실상 탐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하게 살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시는데 “물질의 복을 달라”고 억지로 졸라가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산에 가서 금식하고 철야하는 하나님의 뜻입니까? 결국 축복이 아니라 죽음의 길인데 알지 못하는 겁니다.
발람이 탐욕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갈 때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습니다. 발람이 타고 있던 나귀가 이를 보고 피하는데 발람은 보지 못합니다. 도리어 피하기 위해 밭으로 들어가고 돌담에 붙고 엎드리는 나귀를 향해 채찍질합니다. 하나님이 당나귀의 입을 열어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이나 때리느냐?”고 합니다. 당나귀가 말을 했다면 그래도 영험하다는 점쟁이면 깨달을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발람은 탐심 때문에 이미 영안을 잃었습니다.
발람의 눈을 밝혀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22:32에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발람이 가는 길이 하나님 앞에 패역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놓고도 계산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고, 축복의 길입니다.
비참한 최후
발락에게 간 발람은 이미 발락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발람의 입을 막으십니다. 도리어 발람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십니다.
발람의 노래 중에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그 저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받은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을 것도 아니겠지만 그러나 저주하는 입조차도 막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발람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런데도 발람은 물질에 대한 유혹 때문에 결국 악한 꾀를 지어냅니다.
민 25:을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모압 여자들이 자기 신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니 그 여자들과 함께 먹고 그 신에게 절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니라”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퍼지고 24,000명이 죽는 불행을 가져 왔습니다.
이 계획을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발람입니다.
계 2:14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민 31:16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결국 민 31:에 여호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미디안 다섯 왕을 죽일 때 발람도 칼에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본문에 발람이 노래합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한 자, 자신의 종말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 자의 최후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까? 하나님은 발람에게 많은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얻는 그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하지만 그의 이름은 후대에 치욕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벧후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이 모든 것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생겨난 결과입니다.
약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 모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이 유혹합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우리에겐 단 한번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나의 인생이 아름답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끝이 아름답지 못한 불행한 인생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생’에 대해 노래한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들이 아름답게 가꾸시기를 원합니다.
어디를 쳐다보십니까?
민 24:1-9 / 유관지 목사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행진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 복지에 접근하기 시작할 무렵의 일입니다.
에돔 족속이 사는 땅을 바로 통과하면 가까운데 에돔 족속이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에돔 족속이 사는 땅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일은 오늘 본문 바로 앞 장인 20장14절 이하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돔 땅 가까이 와서 모세가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우리를 좀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기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당신 영토 끝에 와 있는데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그저 큰길로만 지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에돔 왕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신은 재차 간청했는데 에돔 왕은 다시 거절하고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행진을 막았습니다.
에돔은 사실은 이스라엘과 형제 족속입니다. 이삭의 두 아들 가운데 큰아들인 에서의 후예가 바로 에돔 족속이고 둘째 아들인 야곱의 후예가 이스라엘입니다.
형제 족속인데 이렇게 매정하게 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먼길을 돌아가야 하게 되었습니다.
백성 사이에서 불평이 생겼고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살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놋뱀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의 예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산다는 진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부활의 달 3월의 첫째 주일, 사순절 셋째 주일을 맞이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영적 결핍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니라'라는 말은 '카차르'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의 뜻은 '짧다'입니다.
마음이 짧아졌다는 것은 마음이 조급해진 것을 말합니다.
참지 못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안목이 좁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 멀리에 있는 골인지점을 못보고 눈앞에 보이는 고통 때문에 주저앉아 버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장 5절에서 8절까지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라고 하고 9절에서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멀리 보지 못하고' 이것이 바로 마음이 상한 상태를 말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마음이 상한 것은 한 마디로 영적 결핍에 빠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상하면, 성도가 영적 결핍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잘 참던 것도 못 참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광야의 먼길을 잘 참고 걸어왔습니다. 이제 사람 사는 곳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조금 돌아가게 되었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모세,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이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
아우성을 칩니다.
'나이가 많아지더니 예전과 같지 않구나!'
'죽을 쑤는구나!'
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말로 '모세, 외교력이 빈곤하다, 아니 외교력 부재다.'라는 비난 여론이 높아졌을지도 모릅니다.
5절 뒷부분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고 불평합니다. 지금까지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는 광야를 잘 견디며 행진해 왔습니다.
사실은 지금까지가 물이 더 없었고 먹을 것이 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광야행진 코스를 따라 순례하다보면 아주 황량하기 그지없다가 오늘 이 일이 있었던 지점부터는 푸른 풀과 나무들이 조금씩 보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불평을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 코스를 잘 달려와서 거의 끝 부분, 40Km쯤 되는 곳에 와서 코스가 험하다고 기권하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성도가 영적 결핍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은혜를 배신하게 됩니다.
5절 끝부분을 보면 백성들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 하찮은 음식'이란 만나를 말합니다. 만나,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또 만나가 처음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그야말로 환호작약했을 것입니다.
중국 인구가 13억인데 그 많은 중국 사람들 먹고사는 것을 보면서 중국은 참 용한 나라라고 하는데 광야에서 이백만이 먹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마로 만나입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르며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무서운 배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요?
어느 회사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직원 한 사람이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착실하게 일을 한 직원이어서 법에 따라 일단 은퇴를 하게 했습니다.
퇴직금을 후하게 계산해서 지불했습니다. 이익이 많이 나는 업체는 아니지만 퇴직 기념품으로 큼직한 황금 열쇠도 하나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임시직으로 더 근무하게 했습니다. 특혜를 준 것이지요. 약속한 기간이 되어 이제 완전히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퇴직금을 이미 다 지불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직원이 퇴직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내가 여기서 평생을 바쳐 몇 십 년을 일했는데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내보낸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장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었지만 이 일은 가슴 아픈 일 가운데 가슴 아픈 일이라고 회고하고 그 다음부터 정년이 된 사람의 근무연장은 좀처럼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장보다 더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배신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행여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구원을 싫어하노라.'하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이 상해 있지 않습니까?
멀리 보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어려움 때문에 불평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멀리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면 에돔 왕이 에돔 땅을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허허, 오백 년 전쯤에 우리 조상 야곱이 에돔의 조상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은 일이 있는데 오늘날 이렇게 보응을 받네 그려. 하는 수 없지. 좀 돌아가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불뱀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멀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영적 결핍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사순절은 바로 영적 충전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사순절에 힘써야 하는 전도, 성경 읽기,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기, 금식, 절제, 묵상, 구제, 선행, 모두 영적 충천을 위한 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영적 충전에 힘쓰는 절기를 우리에게 주신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영적 충전에 힘써 원망, 불평, 배은망덕, 이런 것에 빠지지 말게 되기 바랍니다. 상한 마음이 치유되기 바랍니다. 상한 마음이 치유된다는 것은 멀리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순절에 영적 충전에 특별히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금도 불뱀들이 많이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여기에 나오는 불뱀은 광야에 살고 있는 독사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이 뱀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뱀들에게 물리면 붉은 반점이 생기며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죽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합니다.
불뱀은 삼천여 년 전 광야에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유혹의 불뱀이 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남자들을 유혹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여성들을 '꽃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꽃뱀이나 불뱀이나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물리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기주의의 불뱀이 있습니다. 목양교회는 집단 이기주의라는 불뱀에게 호되게, 콱 물려서 고통을 겪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배정문제가 지금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좋은 학교에 가겠다고 야단을 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이른바 '기피학교'라고 알려진 학교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 학부형들, 특히 교사들, 얼마나 상처를 입을까 , 학생들이 쓰는말로 얼마나 '쫀심'〔自尊心〕이 얼마나 상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 며칠씩 밤을 새는 학부모들, 차라리 자녀들이 원하지 않는 학교에 들어가더라도 지금의 열심을 가지고 그 학교를 좋게 만드는데 힘쓴다면 그 학교가 들어가기 원하는 학교보다 더 좋은 학교로 변화되지 않을까 히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종교적 편견의 불뱀도 무섭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들 간의 충돌, 얼마나 무섭습니까?
마약의 불뱀, 환각제의 불뱀, 폭력의 불뱀, 탐심의 불뱀이 있습니다. 노사분규의 불뱀이 있습니다.
컴퓨터도 불뱀처럼 되는 일이 많습니다.
성지순례 할 때 광야를 통과하는데 광야에는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글거
리는 햇볕, 풀 한포기 없는 산, 가끔가다가 보이는 떨기나무와 타마리스크라는
이름을 가진 풀, 베드윈 족속의 부락,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낮에는 이렇게 아무 것도 없지만 밤
이 되면 독충들이 나오고 전갈이 나오고 독사들이 나옵니다.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전갈에게 물려 혼이 난 일이 있습니다." 불뱀들은
밤에 더 판을 칩니다.
우리 마음에 어둠이 찾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불뱀이 나타나 콱 뭅니다.
우리는 지금 불뱀들이 우글거리는 광야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7절입
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
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소
서 모세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매"
독사에게 물리면 특효약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활에서 불뱀에게
물리면 즉효약이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했습니
다. 그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여름에 야영을 할 때 뱀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백반을 뿌리기도 하고 담배가루도
뿌립니다. 회개하는 마음, 경건한 마음은 불뱀의 접근을 막아줍니다.
이 사순절에 회개에 특별히 힘쓰시기 바랍니다. 불뱀에게 물린 아픔이 있으면
치유될 것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가져 불뱀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바
랍니다.
셋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산다는 교훈을 줍니다.
요르단에 가면 느보산이 있습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올랐던 산입니다. 이곳에
는 모세를 기념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모세
기념교회가 있고 그 교회 안에 모세의 무덤이 있습니다. 가짜 무덤이지요. 모세
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없는데(신34:6) 기념하기 위해 하나 만들어 놓았습니
다.
교회 밖에는 방향판이 있습니다. 여리고, 사해, 이런 곳들을 향해 화살표를 해놓
고 몇 Km라고 거리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놋뱀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그 놋뱀 조형물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모세를 기념하는 다른 것들도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광야행진을 이끌던 지팡이도 있는데, 왜 놋뱀을 만들어
세웠을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 놋뱀을 가지고 들어가서 오래 보관
했는데 그만 이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 이 놋뱁을 파괴해 버립니다(왕하 18:4).
그 놋뱀을 왜 만들어 세웠을까요?
이 놋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
한복음 3장14절과 15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모세가 평생 한 일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고 미리 보여주
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느보산에 놋뱀의 조형물을 세웠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저주받은 것의 대표적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장대에
달리니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도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사형도구인지 십자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
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6일만에 이스라엘이 승
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6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쟁으로 요르단이 통치하
던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공사를 하는데 1968년에 도로 공사현장에서 유골
이 발굴되었습니다. 유골 상자의 기록들과 유골의 상태를 보아 특히 유골의 발
목 부근에 못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 결과 이 사람은 성전건설기술자인 요한난 벤 하그콜인
데 왜 십자가형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골의 상태를 자세하게 조사하던
고고학자들은 십자가형의 참혹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삽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목양교회는 집단이기주의 불뱀에게 호되게 물렸으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살아
난 교회입니다.
바라보는 것을 성경에서는 '앙망'(仰望)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
러러 바라본다'는 뜻이지요. 성경에 앙망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대표
적인 것은 이사야서 40장 31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
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우러러 바라보면 새 힘을
얻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을 멀리서 바라보며 환영하며 걸어간 사람들입니다(히11:11).
여러분, 지금 어디 어디를 보십니까?
조금 돌아가게 되었다고 가지 못하게 된 지름길을 보면서 원망하고 있습니까?
불뱀을 보며 두려워합니까?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135장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이 찬송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입니다. 우리 나라 여러 곳에 좋은 시를 새긴 시비(詩碑)들이 있는데 미국 여러 곳에 이 찬송가와 관련된 기념비들이 서있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하고 작곡한 분은 조지 버나드(George Benned 1873∼1958)라는감리교 목사입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믿음으로 역경을 이겼습니다.
조지 버나드 목사가 십자가에 대해 집중으로 묵상하는데 처음에는 험한 십자가만 생각났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1913년 어느 날, 집회를 인도하는 데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의미가 바르게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의 표현을 빌면 '홍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즉시 펜을 들어 쓴 것이 이
찬송입니다.
3절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험한 십자가에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십자가를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도 마음이 상하는 것을 느낍니다. 나도 눈이 짧아지고 시야가 좁아져서 멀리보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은혜를 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광야를 지나면서 불뱀에 물려 고통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봅시다. 불뱀을 보며 두려워하던 눈을 이 사순절에 방향을 돌려십자가를 쳐다봅시다.
최후 승리 얻기까지,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를 붙들고 나가는 목양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발람의 제사가 주는 교훈
민수기 23장에는 모압 왕 발락에 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초청된 발람의 제사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계산적인 예배를 주의하라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 오자 잔치를 벌여 대접했다. 다음 날 아침에 발락이 발람을 인도해 바알의 산당에 오르자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의 진 끝까지 보고 제사를 준비시켰다(1절). 그리고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제물을 드렸다. 그때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셔서 발람이 말했다.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4절).” 발람은 제물을 드린 것을 과시하며 내세웠다. 제물로 하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계산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암시다.
계산적인 예배를 주의하라. 계산적인 마음을 잘 극복하려면 평소에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힘써 훈련하라. 좋은 일을 할 때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 복을 많이 받으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기에 복을 구하되 복을 많이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앞세우라. 그래야 기복주의의 빠지지 않는다.
받기보다 주기를 힘쓰면 바보처럼 퍼준다는 소리도 듣고 계산적인 사람은 그를 속칭 호구처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잘 나누는 삶은 사람 생각으로는 호구의 길로 가는 삶 같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호박을 넝쿨째 얻는 길로 가는 삶이다. 바르고 지혜롭게 주는 삶에는 결코 손해가 없다. 드릴 때는 더 얻으려는 계산적인 마음으로 드리기보다 순수하게 드리라. 그때 하나님이 그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2. 바른 말씀을 왜곡하지 말라
발람이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린 것에 대해 말하자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발락에게 그 예언을 전하며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칭송했다. 발락이 “원수를 저주하라고 데려왔는데 오히려 축복했다.”라고 항의하자 발람이 대답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방인 점술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으려고 했다. 성도는 더 말씀을 왜곡하면 안 된다.
사람의 말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왜곡된 말이 남을 죽이고 남의 상처와 아픔을 깊게 한다. 정치인은 유권자의 표를 얻으려고 왜곡된 말을 하기도 하고 왜곡된 말에 당하기도 한다. 나중에 왜곡 사실이 밝혀져도 이미 당한 사람은 회복이 힘든 큰 피해를 입은 상태가 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왜곡된 정보로 영혼과 인생이 농락당하지 않도록 지혜와 지식과 침착함과 담대함과 밸런스를 갖추라.
사회에서는 왜곡된 정보로 사람을 음해하지만 사탄은 바른 말씀을 교묘히 왜곡해 영혼을 속박한다. 남의 영혼을 속박하고 싶은 본능에 이끌려 말이나 말씀을 왜곡하지 말고 나 자신도 왜곡된 말씀에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특히 상처와 불안이 심한 영혼은 왜곡된 말씀에 더 잘 미혹되기에 평소에 균형 잡힌 말씀을 많이 접하고 왜곡과 음해를 일삼는 사람을 멀리하며 바른 말씀으로 상처와 불안을 잘 극복하라.
3.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말라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 진영의 웅대한 모습을 보고서 저주보다 칭송을 한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의 끝만 보이는 소빔 들로 이끌어서 이스라엘을 작게 보이게 한 후 거기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다(13-14절). 발락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한 시각 효과로 발람의 저주를 유도하려고 했다. 사탄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영혼을 미혹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말고 내면을 보는 능력을 키우라.
눈앞의 것만 보면 균형 잡힌 시각을 잃고 장점보다 단점을 보기 쉽지만 멀리 보면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랜드캐니언을 멀리서 보면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행복을 원하면 근시안적인 사고를 버리고 보이는 환경에 좌우되지 말라. 또한 내가 선 자리를 사명의 자리로 여기고 현실은 어려워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살라.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않도록 초라한 것이나 초라하게 보이는 사람을 경시하지 말라. 가까이 있는 사람의 단점보다 장점을 주로 보라. 그리고 단점은 극복하도록 돕고 장점은 발휘하도록 도우면서 미래의 복된 날까지 기다려 주라.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13:7).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말고 보이는 것을 주관하며 살라.
4.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라
소빔 들에서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약속대로 실행하시는 진실하고 변함없으신 분이란 뜻이다. 또한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고 끝까지 함께 계신다는 예언도 전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족한 사람의 핵심 갑옷이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 때 사람 취급도 못 받던 포졸, 갖바치, 백정 같은 천민들이 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때 교회는 천민을 장로로 세우는 파격도 감행했다. 신실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최고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었고 그렇게 신실하게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자의 후손은 나중에 큰 복을 받았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죄와 허물이 많은 나를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지금까지 업어 날라 주셨다. 나는 신실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셨고 나는 하나님을 잘 믿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나를 믿어 주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복된 인생길의 길양식이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면 하나님은 나의 짐을 맡아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뤄 주실 것이다.
5. 점술과 복술을 멀리하라
계속해서 발람이 예언했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23절).” 점술은 비상식적인 상황 분석으로 점치는 것이고 복술은 비상식적인 거짓 계시로 점치는 것이다. 그런 점술이나 복술로 하나님이 크신 은혜로 지켜주신 이스라엘 백성을 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도가 가장 멀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점이다. 하나님이 펼쳐 가실 미래를 사람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점은 맞지 않지만 성도에게는 더 맞지 않다.
점치는 사람이 자기 문제를 가지고 무당을 찾아와 무당 앞에서 한숨을 쉬면 무당이 묻는다. “왜 그래? 안 좋은 일이 있어?” 그때 한숨을 푹푹 쉬면서 자기 얘기를 하면 무당이 쯧쯧쯧 하면서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숨겨놓은 게 있어. 동쪽이야, 동쪽.” 그때부터 사소한 것도 동쪽과 연관시켜 생각하면서 영혼이 점차 약해지고 중독된다. 그런 점과 거짓 예언의 가스라이팅 속성을 알기에 선한 목자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시킨다.
교인이 예언과 위로를 받으려고 목사를 찾으면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의존적인 헛된 믿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신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게 한다. 그러나 돈과 영혼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는 교주는 자신의 영성과 은사를 과시하며 자신을 더 찾고 의지하게 만든다.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사람을 의지하는 순간 망하는 길로 들어선다. 선한 목자가 가리키는 하나님과 성경을 보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해야 반전의 역사가 나타난다.
6. 불신적인 긍정주의를 멀리하라
발람이 이스라엘을 계속 축복했어도 발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의 집념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로 또 말했다.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27절).” 발락은 자신의 끈질긴 노력과 정성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모습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는 불신적인 신념과 불신적인 긍정주의다.
신념과 신앙은 다른 것이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는 신념보다 “하나님 안에서 하면 된다.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라는 신앙을 가지라. 한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많은 사람이 찬란한 꿈을 가지고 경제적인 성공도 이뤘다. 그러나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이 ‘하면 된다’는 사상의 표상으로 높여지면 실력과 창의력보다 술 상무의 주량이 더 통하는 사회가 되고 능력과 인덕보다 지연과 학연과 혈연이 더 통하는 사회가 된다.
‘하면 된다’는 사상은 ‘넓은 문의 사상’이다. 넓은 문으로 쉽게 들어가서 얻은 성과는 수명이 짧아 부작용이 커지면서 결국 부작용이 성과를 압도해서 결국 파멸한다. 그처럼 넓은 문을 통과해 들어선 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좁아지고 마침내 막다른 골목을 만나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반면에 어려워도 좁은 문을 통과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 길은 넓어지고 계속 희생과 헌신으로 그 길로 가면 마침내 길이 다 사라진 대도무문의 축복 경지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민 23:1-9 / 조영식 목사
16년도 네 번째 주일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경제가 더 어려워졌다는 탄식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런 저성장의 흐름 때문에 시장들이 꽁꽁 얼어붙고 있습니다. 그래도 잘 팔리는 제품은 유명 브랜드가 아니라 이름 없는 노브랜드라고 합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가격대비 효율성을 따지는 노브랜드가 시장을 주도한다는 것입니다. 노브랜드의 흐름을 한국 교회에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유명하다는 교단과 교회와 목사들에게 교인들이 몰려들어 대형화의 많은 부작용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제는 노브랜드 시대처럼 교회도 유명한 이름이 아니라 건강하게 믿음을 세울 수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고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모압 왕 발락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미디안의 점술가 발람을 초청했습니다. 점술가 발람은 바알의 신당에 올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이는 곳에서 신탁을 받으려 했습니다(민22:41). 발람을 초정한 모압 왕 발락과 고관들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신탁이 내려오기를 기대했습니다(6,7절). 그러나 모압 왕과 고관들은 저주의 신탁을 받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점술가 발람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습니다(13절). 그들은 세 번째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시도했습니다(27절).
그들이 세 번씩이나 기도했지만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반복하는 횟수만큼 내용도 중요합니다. 그들이 횟수를 더 늘려서 기도했더라도 실패의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횟수만큼 중요한 것이 “어떤 내용으로 간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는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발람은 세 번씩이나 제물을 받치며 기도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1,14,29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포했습니다(민24:13). 진정한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숙하여 자신의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들은 신탁을 시도하면서 장소를 이동하고 제단을 다시 쌓았습니다(14절). 그리고 이동하면서 신탁의 형식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심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형식에 어떤 변화를 주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형식을 바꾸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중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할 때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합니다(삼상16:7). 하나님은 밖으로 나타나는 외모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던 다윗도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라고 합니다(시51:6).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진실한 중심을 드리려고 마음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앙들이 하나님을 향한 중심은 메말라가면서 반응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심을 망각한채 신앙의 형식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다투고 있습니다. 저도 예배 형식이나 기도 방법이 다르면 거리낌이 생겨서 주님께 중심을 드리는 일에 실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외부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 안의 중심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한 중심을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진실한 중심을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진실한 중심을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람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매번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번제물로 드렸습니다(1,14,29절). 이처럼 정성스러운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서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착각이 기복신앙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치는 것을 통해 대가를 바라는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21절). 그러므로 우리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중심이 있어야 진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중심을 기지면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1. 하나님이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아니하고 용서해 주십니다(21절). 우리는 반항적인 허물의 죄를 범하고, 반역을 하듯이 마음이 자주 바뀌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허물을 용서해주십니다.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저주의 허물을 용서의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거룩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들소처럼 힘을 주십니다(22절).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실 때 우리에게 들소와 같은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게 됩니다. 만약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힘으로 살다가 결국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이 점술과 복술에서 보호해 주십니다(23절).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세상의 어떤 점술이나 복술도 우리를 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점술이나 복술이 우리에게 해를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점술과 복술 같은 무속들이 해를 미친다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믿으면서 핍박을 받았고, 집안을 망하게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또한 제가 예수 믿어서 집안에 분란을 만든다는 말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때 성경을 읽으면서 위로해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8,11절). 그래서 저주의 말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21절). 그 때부터 어떤 말을 들어도 하나님 편에 서겠다고 뜻을 정했습니다. 그 뜻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민24:13). 그 후로 하나님 편에 서고자 했던 내 중심을 몰라주는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진심으로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면 세상의 어떤 저주도 하나님이 축복으로 바꾸어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어떤 저주의 소리를 들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축복으로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의 기도가 성숙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붙잡게 하소서. 그리고 어떤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진실한 중심을 드리게 하소서. 또한 허물을 사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고 거룩해지며, 범사에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분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며, 주님이 함께 하시면 저주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심을 믿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주의 백성
민수기 23장 1-12절 / 코너스톤 교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왕의 요청을 받은 복술가 발람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압 왕을 찾아가게 됩니다. 모압 왕 발락은 복술가 발람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고, 발람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세상의 재물을 얻고자 계속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발람이 자신을 위해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신을 동시에 섬기는 제사 풍습을 따른 것입니다. 아마도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거짓 신, 잡신들을 섬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방 복술가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타나셔서 그 저주를 막으신거죠. 성경에서 발람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택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물질과 권력과 명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십니다.
발람은 하나님과 동시에 세상 부귀영화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던 것이죠. 혹시 우리들도 발람과 같이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고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 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있는 것, 하나님 말고 사랑하는 세상의 우상을 다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 오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모압 왕에게 전해줄 말을 넣어주셨습니다. 이에 발람은 모든 문무대신이 왕과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7절에서 10절까지 말씀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를 바랬던 모압 왕 발락의 기대와는 다르게 복술가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 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 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락이 저주를 시도할 때마다 동일하게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즉 모압 왕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 주의 백성을 해하려는 사람은 도리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민 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여기 보면 발람이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는 말 중에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언뜻 읽으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것이란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과 다른 뚜렷한 차이를 보이시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과 영광을 갖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실 지금 발람이 예언한 이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멉니다. 지금 이들은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가 얼마 전에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에서 떠돌던 나그네들 입니다. 입은 옷도 남루하고 얼굴도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초라한 모습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발람의 이 노래는 불과 5년 후에 성취 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고, 그 후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 주변 모든 국가들 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물론 그 후 다른 제국들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적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그들은 존속해 있습니다. 이 당시 강대국들이던 성경 속 다른 나라들 가운데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고, 이름을 더 이상 들어볼 수도 없는 나라와 민족들이 많으나 이스라엘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끝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에서 발람은 열방들과 차원이 다른 큰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예언 속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 이들처럼 살다 갔으면 좋겠다고 노래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한 평생 일관되게 존귀와 영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중간에 망한 사람, 넘어진 사람, 실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끝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까지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을 갖고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끝까지 그의 삶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데려왔던 발람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해를 입히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권능으로 주의 백성을 지키고 계시니 손 끝 하나 건들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하려고 하는 악한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비난도 당하고, 중상 모략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들도 그런 일로 힘들어 울기도 하고 좌절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 백성을 해하려고 하고 넘어뜨리려고 흔들어도 악한 세력의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 옆에 계신 하나님은 크고 강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오른팔로 감싸주시고 보호해 주시니 우린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삶에 폭풍이 몰아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는 것이 버겁고 무거워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푹풍이 몰아치는 바다 같은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위협하는 대적들이 있어도 그 배후에서 더 크게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고 그들의 삶을 복된 길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최후 마지막 날에 크게 승리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의인의 죽음같이
민 23:1-12
목사인 제가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분 각자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신자로서 교회로 모였을 때 과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나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 장차 주어질 영광된 세계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찬 채 나오셨는지, 아니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생활하면서 마음을 가득히 매웠던 현실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을 그대로 지닌 채 나오셨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께 설교하는 내용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고 기다리는 삶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매여있는 상태라면 결국 저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마음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공허하고 쓸데없는 말로 그쳐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현실 세계에 대해서는 열려있지만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는 열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인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으로 할 일은 다 끝난 것이지만 여러분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로 더욱 한발 다가가는 유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현실 세계를 향해서 열려있는 여러분의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쓸데없는 공허한 말로 여러분의 귓가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이 시간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하늘의 말, 하늘의 소리가 이 예배당을 울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여러분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또 살려 놓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인데도 불구하고 우린 여기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 자체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려 있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오로지 내 뜻과 내 계획을 위해서 움직이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은석가족 친목회를 가지면서 시 24편을 읽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온 우주 만물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 즉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린 어딜 가도 하나님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땅을 밟으면서 '난 지금 하나님의 땅을 밟고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땅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땅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물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숨을 쉬게 하는 공기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태양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느것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을 계발해서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감사하면서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인간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이 더 좋아집니다. 마음은 점차 하나님에 대해서는 굳게 닫혀져가고 세상을 향해서만 열려져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도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 없고 오히려 허황된 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세상에서야 천국, 영생,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고 한낮 정신나간 종교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그런 말씀들이 환영을 받아야 하고 설렘이 있어야 하고 기다리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하나님이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허황되고 현실성이 없는 말로 치부되는 천국, 영생,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교회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허황된 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믿는다는 말은 합니다. 하지만 믿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 희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을 믿고 영생을 소망하고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교인 되기 위해서이고 현실을 살 때 필요한 것은 역시 돈이고, 건강이고, 직장이고, 능력있는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고 또 은석교회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돈, 건강, 직장이 필요하고 죽어서는 영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는 영생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생이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되고, 돈 버는데 도움이 된다면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영생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때로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게 합니다. 이런 영생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결국 인기 없는 품목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교회를 잡화점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품목을 가져다 놓고 인기 있는 것은 앞에 진열하고 인기 없는 품목은 뒤로 밀려서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버립니다. 이것은 장사꾼이라면 당연한 경영방식입니다. 인기 없는 것은 더 이상 진열해서는 안됩니다. 인기 있는 것을 진열하고 판매해야 손님이 늘고 발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잡화점이 아니라 단일품목을 판매하는 전문매장입니다.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품목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단일품목입니다. 설령 인기가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교회는 끝까지 한가지만을 고집해야 합니다. 망한다고 해도 한가지만을 고집하다가 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그리스도의 피로 세움 받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 피를 가르치고 제공하라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는 인기가 없어서 장사가 안되니까 다른 인기 있는 품목을 가져다 팔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 하겠습니까? 제발 은석교회에서만큼은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귀한 생명이 인기 없는 품목으로 전락되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영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영생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장차 주님이 오시고 영광의 나라가 주어졌을 때 다함께 그 나라에서 만나기 위해서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찾아 나오는 사람은 영생으로 인도 받기를 기대하고 나와야 합니다. 영생 외에 다른 것을 교회에서 기대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교회가 크냐 적냐는 것은 영생과 하등에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큰 교회와 적은 교회의 영생이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큰 교회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영생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뭔가 공허한 말로 들리고, 허황된 말로 들리고, 비현실적인 말로 들리기 때문에 아무리 영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기쁨이 없고 마음에 와 닫는 것이 없고 공허한 마음을 현실성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채워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짓고, 사람 수를 채우고, 선한 사업도 열심히 하고,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임으로서 영생으로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공허한 마음을 메우려고 한 것입니다. 영생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해야 할 교회가 정작 영생을 기대하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른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은석교회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왜 교회에 오셨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마음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오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라면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고 공허한 마음 상태 그대로 돌아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빠져 있는 마음은 현실적인 것으로만 채워집니다. 마음이 이미 현실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현실적인 것이 아닌 영생으로 그 마음이 채워지겠습니까?
제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현실에 빠져서 항상 현실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교회에서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생으로 채워질 수 없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 나오면서 교회를 나와도 기쁨이 없고 마음이 공허하다고 한탄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여러분의 삶에서 있으나마나하고,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인 의미 없는 단체가 되어버릴 것이고 교회에서의 시간 역시 차라리 밖에서 친구를 만나는 시간보다 못한 시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고 하면서 신자 아닌 자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신자라고 할 때는 세상사람과 분명한 차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발람이 모압으로 가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상사람들과 어떤 차이를 두고 대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창 12:3절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주어질 세상에 대한 혜택입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대우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특별난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창대케 하시고자 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자기 이름의 창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를 포기하는 삶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 역할이 이스라엘에게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곧 '나도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는 고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함께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중에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항상 현실에 눈을 돌리고 현실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신 그 모습이 이제 우리에게는 복의 근원입니다. 바로 그분, 자기를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분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받은 자를 내세워서 그자를 축복하면 복을 주고 저주하면 그자도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축복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축복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복을 빌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환영하고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안에 거하는 것이 복인줄 알고 주님 안에 살기를 소원하는 그것이 주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축복하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주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 나 하나는 포기해야하는 인생에 기꺼이 뛰어 들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찾아 나온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며, 주님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은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여전히 현실에 대하여 부족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해서 세상에서 뛰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홀로 처한다는 것이 복을 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입니다. 홀로 처한다는 것은 세상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습니다. 보통 나라와 달리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신다고 해서 열방 중에 뛰어난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세상과 똑같이 살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나와 부딪히고 나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고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예수님처럼 되기는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축복하는 것이고 그자는 하나님이 복을 받아 삽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처럼 되고자 소원하십니까? 그렇게 되려고 힘쓰며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친 자로 마쳐지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발람의 소원이었습니다.
10절에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보다'고 합니다. 발람은 자기의 종말이 이스라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바친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처럼 사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얘기들이 과연 우리들의 현실과 얼마나 연관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의 전부를 헌신하고 산다고 해도 우리의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해서 현실적인 시각에서 볼 때 신자가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쓸데없고 허황된 말로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저주 안에 있는 증거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영생과 멸망으로 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축복하면 영생을 주시고, 저주하면 저주해 버리십니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상에 던지셔서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생으로 인도하시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저주하시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발람이 자신이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바란다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하셨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죽음같이 죽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생이나,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머나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흘러 들어버리고 현실을 사는데 가치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영생보다는 직장문제가, 결혼문제가, 자식문제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여러분에게 인기 없는 품목으로 밀려나 버린 문제가 또 다시 등장합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말씀 앞에 나오는 시간마다 등장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심각한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축복 편에 서시겠다면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사랑하며 내 삶 또한 주님 같기를 소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동안 영생이 현실성이 없다고 관심 두지 않고 뒤로 밀쳐버렸다면 이제 오늘 그 영생에 관심을 두시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발람의 소원처럼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는 기도와 찬양이 여러분에게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분명히 여호와의 복에 거할 것입니다.
정말로 의인으로 죽기 원하는가?
민 23:5-12
소리통 역할만 하는 이방주술사
발람이 방세계의 최고로 신통한 주술사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가 부리던 비천한 나귀에 꾸중을 듣게 했습니다. 발락이 보낸 사신들 앞에서 그랬으니 그 명성에 크게 금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왕 발락은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최고의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어쩌면 발람 정도 되니까 여호와와의 그런 초자연적 대면이 가능했다고 여기고 점수를 더 주었는지 모릅니다. 세 번이나 제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지극정성으로 매달렸고 본문은 그 첫 번 제사의 결말입니다.
먼저 여호와가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고 그대로 전하라고 했습니다.(5절) 신이 내린 무당도 그 신의 목소리를 종종 대변합니다. 실제로 점괘나 저주를 내릴 때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중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단순히 영적인 매개체 - 영매(靈媒)로서 소리통(speaker)의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5절에서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지만 그런 방식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으로써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고 해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당신을 믿게 하려고 강제적인 힘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보시고 당신의 모든 긍휼을 끝까지 보여주십니다. 강제력은 인간이 그 긍휼을 끝가지 완악하게 거부해서 징계나 심판하실 때에 사용합니다. 결국 그분의 심판도 어디까지나 그분의 긍휼은 물론 인내까지 무시한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큰 긍휼을 드러내셨습니다. 사탄의 가장 충실한 종 두 사람이 세 번이나 당신을 거역 대적해도 당장 심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특별히 그들이 믿고 따르는 우상 신들과 어떻게 다른지 권세 있는 말씀만으로 계시하십니다. 강압적인 능력 대신 말씀만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믿고 안 믿고는 너희의 자유이며 그 결과도 너희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발람이 그 예언을 전하여 말했다고 7절은 설명합니다. 그가 언덕길에서 예언을 받아서 바알의 산당 제물 곁에 서있는 발락에게 돌아가는 동안에 마음만 먹으면 예언을 바꿀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껏 강제로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에서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우상 신들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여호와로부터 인격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발람이 자신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고 꾸짖지 않은 것을 내가 감히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라고 했습니다. 발락에게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고, 반대로 말하면 팔자를 고칠 큰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기 뜻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세밀하게 따져야 할 찬송시
이방 주술사를 통해 이방의 백성들 앞에서 선포된 말씀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인종 문화 도덕 사상 종교 등과 상관없이 반드시 당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그 진리를 익히 알아서 실현하고 있어야 합니다.
발람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신탁이 주로 그러하듯이 짧은 찬송시의 형식입니다.(7-10절) 시는 상징과 은유가 많기 때문에 세밀히 따져봐야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의 티끌”(10절)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을 얻은 후에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는 도중에 베델에서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너로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며 네 후손도 티끌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창 28:14)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부모를 떠나 홀로 타지로 떠나면서 큰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먼저 찾아와서 위로해주었고 조부와 맺은 당신의 언약을 재확인해준 것입니다. 그 언약을 실현할 수 있는 장자권을 에서는 안중에도 안 두었으나 네가 그렇게라도 소망했으니 너를 통해 반드시 실현하는 큰 은혜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분의 일도 능히 세지 못할 것”(10절)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여 년 고생한 후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 받은 새 이름입니다. 얍복강 가에서 마찬가지로 에서 때문에 두려워 떨면서도 여호와의 사자와 싸워 이겨서 얻은 이름입니다. 가나안을 떠날 때와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고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준행할 것이라고 또다시 다짐해준 것입니다.
나아가 민수기 2장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넷으로 나눠서 세 지파씩 중앙에 위치한 성막의 전후좌우, 동서남북에 배치해서 행군하도록 했습니다.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민22:41) 보이는 곳에서 저주의 신탁을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실제로 보이는 것은 사분의 일밖에 안되며 나아가 그 사분의 일도 모압이 상대해서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바위 위와 작은 산에서”(9절) 보았다는 표현도 구태여 최고 높은 바알의 산당에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안 해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알 같은 모든 우상 신들을 다 동원해도 여호와의 사분의 일에도 못 미친다고 풍자하는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요컨대 죄로 타락한 불신 세상을 하나님은 눈만 한 번 깜박해도 당장에 멸망시킬 수 있는데도 무한한 긍휼로 참고 있음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선조들의 스토리와 모세에게 주신 계명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그대로 전하고 있는 중일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와 돌아올 때에 주신 약속을 다시 확인한 셈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당신께서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축복의 계시에서 당신은 인간과 달리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1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사십 년 광야 방황의 벌까지 주면서도 그 약속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지금 모세의 영도 아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의 거룩한 과업을 실현시키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당신께 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은 세상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발람이 선포한 것입니다.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가장 눈여겨 보아야할 표현은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9절)입니다. 발락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결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는 근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 군대 숫자를 강조하는 말씀보다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을 먼저 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꼭 군대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전투는 군대의 숫자나 장비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사건의 약 오백 년 후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 블레셋을 향해 어떻게 선포했습니까?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이스라엘을 여호와가 세상 모든 민족과 다르게 대우하신다는 동일한 진리를 다윗은 표현만 달리해서 말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은 칼과 창으로만 이기려 하고 그것 외에는 전쟁에서 의지하는 수단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것 전혀 의지하지 않고도 하나님만 함께하시면 그분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대적해서 승리할 세력은 이 세상엔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로 그분은 신자를 불신자와는 다르게 여기시고 다르게 대우해주십니다. 그분만을 믿고 따르는 신자로선 삶의 어떤 문제와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홀로’는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지칭하는 표현이나 히브리 사람 한 명만으로도 모압 군대 전부를 상대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뜻도 함의한 것입니다. 늙은 노인 모세 한 명이 세계 최강 애굽과 열 번 싸워, 홍해까지 치면 열한 번 싸워 열한 번 다 엄청난 승리를 했지 않습니까?
그럼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의 정확한 뜻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 중의 하나 즉, 그들과 똑같이 여기지 않고 전혀 다르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하는 방식은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방식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 전혀 다른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누리고 있으므로 그에 걸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요컨대 다른 민족들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홀로 산다는 뜻이 됩니다. 또 그것이 다른 민족이 대적하지 못하는 근거입니다.
살펴본 대로 자기 신에게 예배 제사하는 방식에서 다르며 그 신에게서 받는 계시의 방식도 다릅니다. 나아가 그 신에게서 받는 축복의 내용도 다릅니다. 특별히 다른 나라를 침공하여 승리함으로써 탈취물로 부유해지게 해주는 복은 하나님이 전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려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하나님도 그 땅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앞뒤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주민을 몰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몰아낸다고 했고 심지어 다 몰아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생길 텐데 그들을 절대 차별하지 말고 자기 동족과 똑같이 처우하라고 율법에 규정해놓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니라 그 땅에 만연한 우상신들, 숭배하는 도구, 제사양식, 그 죄악들을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우상 신들이 보장하는 재물 쾌락 모든 것들은 더 이상 그 땅에 단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홀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하신 여리고성의 엄청난 첫 승리 뒤에 곧바로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각이 그 땅의 재물을 탐했다는 한 가지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일등 대우만 바라는 신자들.
다시 강조하지만 여호와가 다른 신들처럼 이 땅의 출세 형통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이 당신의 백성들을 다른 족속들과 다르게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출세와 형통을 목표로 살지 않는 것이 신자가 홀로 살아가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대우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열성으로 새벽 예배에서 천일 제단을 쌓는데 기도하는 제목들이 주로 무엇입니까? 사업 번창하고, 자식이 이이비 리그에 들어가 일류직장에 취직하게 해주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굴리며 번듯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홀로 사는 것이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모든 측면에서 일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질됐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그런 소망이 실현되고 최소한 모든 문제와 고난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행복해진 체험이 있습니까? 삶의 기쁨이 충만해졌습니까? 아직 내가 정해놓은 목표까지 이뤄지지 않아서 모르겠습니까? 불신자들도 재물이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다 절감합니다. 심지어 무소유가 최고의 덕목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인정하는 그 진리조차 신자는 짐짓 외면합니다. 오직 홍해를 갈랐던 하나님이 엄청난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붙들고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 오직 자기만 높이려 들기 때문에 세상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무한 경쟁하는 싸움터가 되어 있습니다. 그 죄에서 빠져나올 길은 오직 예수 십자가 은혜뿐이나 그들은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마지막 날까지 모순 불합리 불법 사기 거짓 죄악 등으로 뒤엉켜 고난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해서 재물을 아예 멀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 평생을 두고 인격을 도야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만 탐구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만으로 잘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힘만 빌려 일등을 하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주신 축복이 생육 번성 충만할 뿐 아니라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의로운 뜻에 순종해야만, 그분의 청지기 직분을 성실히 수행할 때만 참 기쁨을 얻을 수 있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입니다. 인간더러 이 땅에서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다 해도 되지만 그 모든 것을 선하게 통치하는 주인이 따로 있음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주인을 떠나면 에덴동산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풍요한 과실과 채소를 먹어도 그분의 선하심을 일절 맛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거역했던 아담과 이브는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스스로 가리려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주자 비로소 이전처럼 삶의 활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 산다는 것은?
신자란 하나님이 나를 다르게 대우하고 있기에 나도 다르게 살고 있고 그래서 세상에서 실제로 홀로 서있는 외톨이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다르게 살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에게서 다르게 대우 받아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과 다르게 대면 즉, 홀로 만나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었다고 쉽게 생각하고 치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기독교 교리로만 인식 수긍 동의해선 안 됩니다. 실제로 자신이 죽은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정작 심판을 받아 죽었어야만 하는 자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았던 나입니다.
그분이 정말로 나를 대신해 죽으셨고 또 그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결코 이전처럼 살아선 안 되며 또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예정해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해준 체험이 있는 자는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풍요 쾌락을 다 누리고도 만족은커녕 평안도 없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도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분을 증거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위대한 종이 되라는 뜻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을 만난 자는 최소한 이전의 삶으로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기에 이전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심판에서 제외해주었기에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을 뒤쫓던 애굽의 군대와 병거를 바닷물로 덮어서 하나도 남지 않게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갈 길을 하나님이 막았습니다. 그 뒤로는 애굽의 군대와 병거를 이스라엘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돌아갈 옛날의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세상의 불신자들의 삶을 볼 때에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어야 합니다. “이전에 왜 내가 저렇게 더럽고 추하게 살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이지, 이제는 저렇게 살아보려 해도 도무지 살 수 없어, 억만금을 주어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래, 생명을 앗아가도 십자가 은혜 밖에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야.”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도덕적 옛 자아를 죽이는 것 즉, 악하게 살았거나 덜 착하게 살았던 것들을 회개하고 이제 더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여기고 기독교 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닙니다. 반드시 옛 사람이 죽었어야 하고, 실제로 죽지 않으면 새 사람이 절대로 안 되며, 그것도 나의 전적인 동의는 물론 넘치는 기쁨과 감사로 자발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이 사는 인생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활기가 넘쳐야 합니다. 세상 어떤 것을 주어도 바꾸지 않고 예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이 되어서 사치와 권력을 세상 최고로 평생 동안 누리는 것보다도, 여호와의 궁정의 문지기로 하루 있는 것과도 바꾸기는커녕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의인으로 죽고 싶은가?
그런 차원에서 본문에서 정말로 배워서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진리는 10절에 나오는 발람의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에게 두려움을 크게 끼쳤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을 말씀 한마디로 이겼다는 그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는 방식이 애굽 사람들은 다치지 않게 하고 이방신들만 상대해 승리했습니다. 애굽을 이겼으면 훨씬 더 부강한 나라를 그 자리에 세우고 그동안 당했던 설움과 고난을 되갚으려고 반대로 애굽 백성을 노예로 부려 먹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허겁지겁 밤중에 식사 도중에 탈출했고 멀쩡한 고속도로를 놓아두고 앞뒤가 막힌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도 여호와는 도무지 상상도 못하는 방식으로 바닷물을 갈라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먹을 것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로 이끌고 가서 죽도로 고생만 시킵니다. 백성들이 오죽하면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아우성쳤고 하나님은 무려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다시 방황시켜 그 불순종한 세대 전부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세대들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면서 에돔과 마주쳤으나 아무 일 없이 통과만 시켜주면 모든 음식이나 물 값을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고대에 자기들의 진로를 막는 이방에게 이렇게 제안하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제 모압의 눈앞에 땅의 티끌같이 허다하고 여호와의 성막을 중심에 모신 일사불란하게 체계를 갖춘 강건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압 왕 발락으로선 탐욕이 앞서 그들과 전쟁치려 하지만 뭔가 정확히 알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도 못했지만 영적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히브리 신은 뭔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우리가 그 앞에 꼼짝도 못하고 오히려 죽었다고 여겨진다. 사지가 완전히 묶여서 꼼짝도 못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계속해서 두렵고 부끄럽고 찔리기만 한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을 없애 보려고 지금 최고 우상 주술사 발람에게 목매달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 승리만이 목표가 아닙니다. 성경에 주술사더러 전쟁을 대신 치러달라고 세 번이나 요구하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마치 아담이 범죄 한 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없애보려고 노력했듯이 말입니다. 발락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호와의 권능에 지금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셈입니다.
발람은 히브리 신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귀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그분의 권능은 절감했고 지금껏 몇 번 영적 교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가 느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정확히 말해 경외감이 엄청 크게 생겼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우상 신들의 신탁을 할 때는 자기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강력한 힘으로 꼼작 못하게 해서 소리통 역할만 했습니다. 때로 자기가 생각해도 사악한 신탁이 많았고 그마저 신들의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지금 자신을 완전히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선 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조급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막으로부터 따뜻한 긍휼의 기운이 번져 나오고 있음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우상 신들에 신탁한 저주가 히브리 신에게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백성을 향한 축복으로 바꾸는 일에 자기가 쓰임 받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이 사악한 직업인 이방주술사는 그만두고 이스라엘처럼 그분의 백성으로 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일시적으로 강력히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만은 그의 진정한 고백이었습니다.
신자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
신자가 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영적인 찔림을 넘어 두려움까지 주어야 합니다. 기도해서 암이 낫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60억 중의 꼴등입니다. 다른 이를 외모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합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로 혼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이 자연스레 신자를 통해 주위에 비춰나가야 합니다. 신자의 윤리적 착함과 인간적 사랑이 아닙니다. 신자의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이 모든 이에게 어떤 형태로든 전해집니다. 신자는 그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을 하며 그 고백한 대로 하나의 가감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주변 사람이 자연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이 일이 옳고 선하니까 행하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다 알고도 자기 스스로 결코 완전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대신에 신자더러 예수 안에서 네가 누구냐고 자꾸 묻습니다. 정말로 옛 사람이 죽었느 새 사람으로 살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 대신 죽은 은혜를 절감하고 그 안에 거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자로서, 최소한 인간이라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옵니다. 하나님만 참 기쁨 만족 행복 활력 생명입니다. 그분을 떠나선 어떤 기쁨 만족 행복도 없고 절망과 죽음입니다. 정말로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날 길로 가면 우리 안제 내주하신 성령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고 때로는 강권적으로 간섭하셔서 제 길로 되돌려 놓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물질 만능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류는 역사상 최고로 편리하고 안락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물질에서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비인격적이라 인격인 인간이 그 안에서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가장 신령해야 할 교회는 외면합니다. 다르게 살고 있는 교인들 아니 목사들마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홀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보는 자가 여러분을 통해 비춰 나오는 주님의 긍휼 앞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외감을 느끼게 만듭니까? 그들이 본문의 발람 같은 고백을 합니까? 일시적일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좋은 반응 나아가 호기심을 갖게 만듭니까? 요컨대 그들이 여러분을 자기와 분명히 다르게 살고 있다고 인정해줍니까? 최대한 양보해서 본인이라도 오직 예수 십자가 안에서 살다가 그 은혜 가운데 죽겠다는 헌신 즉,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다는 준비와 마음가짐이라도 되어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