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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새벽, 쓰시마 섬(對馬島-대마도)에 집결(集結)해있던 일본군 제 1번대는
마침내 오우라항(大浦港-대포항)에서 조선(朝鮮)으로 출격(出擊)하였습니다.
일본군 제 1번대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小西行長)가
대장(大將)으로서 7000명을 지휘하고
소오 요시토시(종의지宗義智)는 5000명을 지휘하고,
마쓰라 시게노부(송포진신松浦鎭信)는 3000명을 지휘하고,
아리마 하루노부(유마청신有馬晴信)는 1000명을 지휘하고,
고토 스미하루(오도현신五島純玄)는 700명을 지휘하니,
총병력(摠兵力)이 18700명(모리가문서의 기록은 이러하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16700명으로 기록)이었습니다.
이들은 4월 13일 오후4~6시 무렵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다대포 방면 응봉 봉수대(鷹峯烽燧臺)봉수감고(烽燧監考) 이등(李登)과
거제도 연대 봉수대(煙臺烽燧臺)감고(監考) 서건(徐巾)은
추이도(杻伊島)를 지나 부산포(釜山浦)로 가는 일본군 선단(日本軍 船團) 90여척(隻)을 발견(發見)하여
경상우수군(慶尙右水軍)소속 가덕진첨사 전응린(加德鎭僉使 田應麟)과
천성보만호 황정(天城堡萬戶 黃珽)에게 알렸고
그들은 경상우수사 원균(慶尙右水使 元均)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원균은 그 정보를 바로 장계(狀啓)로 작성(作成)하여
경상우수영,전라좌수영,경상감사,조정(朝廷) 등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점점 늘어나는 일본군 선단을 보게 되어
전응린은 2번째로는 150여척의 일본군 선단이 해운대(海雲臺)와 부산진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고,
박홍의 경상좌수군은 세번째로 일본군 선단 350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한 것을 보았습니다.
조선군은 최종적(最終的)으로 일본군 선단 400여척을 탐지(探知)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군의 배는 700여척에 이르렀습니다.
이날 일본군은 부산 절영도(釜山 絶影島) 앞바다에서 정박(碇泊)하였고
소오 요시토시가 일부 병력(一部 兵力)을 상륙(上陸)시켜 부산진(釜山鎭)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시각(時刻),
부산진첨절제사 정발(釜山鎭僉節制使 鄭撥)은 군사들을 데리고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 하다가
일본군 선단이 부산 앞바다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무렵 일본의 선단이 몇년 동안 교역(交易)하러 오거나 공물(貢物)을 바치러
빈번하게 드나들다가 최근 몇 개월 동안 갑자기 출입이 없어졌었기 때문에
정발은 처음에 그 선단이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는 세견선(歲遣船)으로 추측했지만
곧 수많은 일본군을 싣은 선단이 나타나자 상황(狀況)을 알아차려서
재빨리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달려갔습니다.
정발은 성(城) 밖에 있는 군졸(軍卒)들과 백성(百姓)들을 독촉(督促)하여 입성(入城)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의 수비를 강화시키고 백성들을 침략군으로 보호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왜관(倭館)에 가서 남은 일본인(日本人)들을 잡아오라고 명(命)하여
아직까지 남아있던 일본인 4명을 잡아 가두었는데
이는 침략군과 내통하는 것을 막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진에 소속(所屬)된 전선(戰船),방패선(防牌船),중선(中船) 전함 3척에
구멍을 뚫고 자침(自沈)시켜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상좌수사 박홍(慶尙左水使 朴泓)에게 일본군의 침입(侵入)을 알리고
부산 앞바다에 정박(碇泊)한 일본군 선단을 야습(夜襲) 해줄 것을 건의(建議) 했습니다.
하지만 박홍은 정발의 요청(要請)을 거절(拒絶) 했습니다.
4월 13일 밤, 부산진첨절제사 정발은 부산진성 남문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때 그는 성 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지휘(指揮)하여 방어(防禦)를 준비하고
한편으로 퉁소(簫)를 불게하여 평정(平靜)을 유지(維持)하게 하였습니다.
다음날인 4월 14일 새벽, 고시니 유키나가 군은 군졸 몇 명을 부산진성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정발에게 명나라를 정벌(征伐)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발은 선조 임금에게 상의(上議)해야 한다면서 거절하였습니다.
(한국 측 기록에는 길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전투준비(戰鬪準備)를 마치고
부산 우암동(釜山 牛巖洞)에 상륙(上陸)하여 부산진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에 항복을 설득하기 전에 효율적(效率的)인 공성(攻城)을 위해
일본군에게 부산진성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각(燒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본군이 부산진성에 도착(到着)하니 성 앞에는 마름쇠가 깔려 있었고
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갑옷(가죽 재질에 흉갑胸甲)과 철모(鐵帽)를 갖춰 입고
소형 화약무기(小型 火藥武器),활 등으로 잘 무장(武裝)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산진성의 조선군보다 훨씬 많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을 겹겹이 포위(包圍)하였습니다.
그리고 성 주변의 마을들을 불태웠습니다.
마침내 오전 6시(새벽 3~4시 라고도 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 1번대는
동,,서,남 3방면에서 부산진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일본군은 성을 공략하는데 방해가 되는 해자(垓子)와 마름쇠에
판자를 깔아두어 무력화(無力化) 시켰고
성 뒤쪽에 진을 치고 성 주변의 높은 지점(부산진성 서문 지점)을 장악하여
그 지점에서 성을 향해 총(銃)을 쏘며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이에 정발은 남문에서 서문으로 가서 일본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때 부산진성에 배치(配置)된 조선군은 불과 600여명에 불과(不過) 했지만
정발은 흑의장군(黑衣將軍)이란 별명(別名)답게 검은 전복(戰服-혹은 검은 갑옷)을 입고
대궁(大弓)로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부사맹 이정헌(副司猛 李庭憲)은 막빈(幕賓)으로서 부산성에 머물다가
이때에 참전하여 용감히 싸웠습니다.
이날 조선군의 분전(奮戰)이 대단하여 부산진성이 이날 함락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성 북쪽의 방비(防備)가 허술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곳을 공격하여
마침내 성벽 위를 장악하고 성 안으로 침입 하였습니다.
이때 성 위에 있던 일부 조선인들은 성벽에서 기어올라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성벽(城壁) 위에 해자(垓子) 쪽으로 뛰어내리며 필사적(必死的)으로 싸웠습니다.
성 안에 침입한 일본군과 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성 안에서 2차례 치열(熾烈)한 전투(戰鬪)를 치뤘습니다.
이때가 전투가 시작된 지 2~3시간 정도 지날 무렵이었는데
이무렵 정발 휘하의 비장(裨將)이 정발에게 말했습니다.
"사또(使道)! 전세(戰勢)가 악화(惡化)되고 있사오니 일단 성 밖으로 피하셔서 원군(援軍)기다리소서!
이 왜적(倭敵)은 소인(小人)이 맡겠나이다!"
이에 정발이 대답(對答)하길
"그 무슨 망령(妄靈)된 말이냐! 나는 마땅히 마지막까지 이 성을 지킬 것이다!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는 적을 앞에 두고 다만 죽기로 싸울 뿐이다!"
라고 하고 휘하 장졸(將卒)들에게 이르기를
"장사(將士)들아!
감히 성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내 칼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銘心)하라!"
라고 하니 장수들과 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하지만 정발은 쳐들어 오는 일본군을 맞아 용감히 싸우다가
머리에 일본군 조총(鳥銃)에 맞았습니다.
이에 이정녕을 포함한 여러 장수들이 정발을 부축하여 바윗돌 위에 앉히니
이때 정발은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발꿈치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는 싸우라는 말을 남기고 절명(絶命)했습니다.
지휘관 정발이 전사(戰死)했으나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백성들은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敵慨心)과 투지(鬪志)를 더 가지고 일본군과 싸우니
마침내 일본군은 조선군을 모두 전멸(戰滅)시키고 나서야 부산진성을 장악(掌握)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숫자와 전력으로 성벽을 넘었고
눈에 보이는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뒤이어 입성(入城)한 일본군은 약탈(掠奪)과 방화(放火)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대다수(大多數)는 가난한 병사들이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는게 확실해지자 정발의 첩 애향(愛香)은
목을 매달아(혹은 목을 칼로 찔렀다고도 합니다.)자결(自決)하니 그녀의 나이 18세 였습니다.
그리고 애향의 몸종 용월(龍月)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부사맹 이정헌과 중위장 장희식도 전사 했습니다.
기장 사람 신옥(辛沃)은 부산진 소속(所束)으로 정발장군 휘하에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될 때에 일본군에게 잡혔습니다.
일본군은 그에게 항복을 요구(要求)했지만 신옥은 이렇게 대답(對答)했습니다.
"내 목은 너희들이 칠 수 있으나 나의 무릎은 너희들 앞에 꿇지 못하겠다!"
결국 신옥은 일본군에게 항거하고 대항하다가 마침내 참수(斬首)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들은 아들 신기운(辛起雲)은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왜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부산진성으로 달려갔고
일본군에게 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일본에 붙잡혀 있으면서 틈틈히 수영(水泳)을 익히며 고국으로 탈출할 준비를 하여
6년 뒤인 19살때에 몰래 조각배를 훔쳐 타고 일본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 알아차리고 쫓아오니 조각배를 버리고 바다속에 뛰어들어
며칠동안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표류(漂流)하다가
다행히 조선인 어선(漁船)에 구조(救助)되어 부산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4월 14일 오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더 이상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지 마라.'
이리하여 부산진성 전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날 일본군은 서정일기(西征日記)에 부산진에서 조선인 3000여명을 참살(斬殺)했다고 기록했으며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에는 소수의 조선군과 여인들과 아이들을 일본군에게 잡혔는데
여인들은 일본군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솥과 냄비의 검댕이로 얼굴을 칠하고
혹은 초라하고 남루(襤褸)한 의복(衣服)을 입어 신분(身分)을 속이려고 하였고
어떤 여인은 갑작스럽고 엄청난 재앙(災殃)을 맡아 눈물로 범벅이 되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항복하기도 했으며
귀하고 용모(容貌) 단정(端正)한 아이들은 부모가 가르쳐 준대로
일부러 발을 절뚝거리며 절름발이 행세를 하고
어떤 아이들은 미친 것처럼 입에 경련을 일으켰지만
일본군은 속임수임을 눈치채고 그들을 계속 포로(捕虜)로 잡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부산진성 전투에 참전(參戰)했던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인은 성이 함락(陷落)될 때에
시체더미에 숨어 있다가 고니시가 살육(殺戮)을 멈추게 할 무렵에 기어 나와서 항복(降服)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일본군 배에서 억류(抑留)되어 있다가 4월 17일에 풀려났고
후에 일본군 점령지(占領地)에서 탈출(脫出)한 뒤에 정발의 부산진 전투를 증언(證言)하였습니다.
부산진성이 함락된 4월 14일, 이날 일본군은 다대포(多大浦)와 서평포(西平浦)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다대포를 지키는 장수는 다대포첨사 윤흥신(多大浦僉使 尹興信) 이었습니다.
다대포의 군대는 4월 13일 오후에 응봉 봉수대에서 일본군 선단 침입을 보고 받은 이후에
함대를 바다에 띄워 경계태세를 갖추었으며
윤흥신 비문(尹興信 碑文)에 의하면
윤흥신의 군대는 일본군이 부산에 나타난 4월 13일 부터 일본군과 맞서 싸워
일본군의 침입(侵入)을 격퇴(擊退)시킴으로서 일본군의 침략(侵掠)을 지연(遲延) 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4월 14일, 윤흥신은 다대포의 군졸들과 백성들을 지휘하며
다대포를 공격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또 윤흥신의 동생 윤흥제(尹興悌)도 다대포에서 형 윤흥신과 함께 싸우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다대포와 서평포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부산진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부산진성에 머무르며 부상자(負傷者)들을 치료(治療)하고
식량보급(食粮補給)에 대한 조치를 하여
조선 침략의 교두보(橋頭堡-침략의 발판)를 확고(確固)하게 하는 한편,
소규모 부대를 동래성(東萊城)방면으로 보내어 정찰(偵察)하게 하였습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 개황(釜山鎭 槪況)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 전투 개황(釜山鎭城 戰鬪 槪況)
참고 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번역:국사편찬위원회
재조번방지 번역-한국고전번역원
연려실기술 번역-한국고전번역원
징비록
난중잡록 번역-한국고전번역원
임진전란사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 이었다.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프로이스의 일본사) 번역-오만,장원철
부산시청 홈페이지
파워꼬레아- 600인의 전사! 부산진성 전투(권순삼-산하)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
이순신의 두 얼굴
기장군청 홈페이지
영일군군지
전투도(戰鬪圖) 제공(-파워꼬레아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권순삼-산하)
첫댓글 임란시 일본군의 최초 상륙지점이 어딘가요? 절영도(지금의 영도)앞에 정박했다고 나오는데 절영도를 밀고 지금의 중앙동이나 초량방면으로 상륙했는지 우암동으로 상륙해서 초량으로 밀고 왔는지...최초의 전투는 정발의 부산진성에서 부터인데 ... 동시에 여러곳에서 상륙해서 부산진성까지 밀고왔나요?
4월 13일 오후에 부산진 앞바다에 도착한 일본군은 그날 절영도 앞바다에서 정박하고 소오 요시토시가 이끄는 소수 병력(불과 몇 명)이 부산진 정찰을 목적으로 상륙했다고 했는데 소오 요시토시가 상륙한 곳은 알 수 없습니다. (부산진성 바로 앞으로 추측됩니다.)다음날 일본군이 우암동에 상륙하여 부산진으로 진격했으니 진정한 대규모 상륙은 우암동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윤흥신 비문이나 부산진 순절도,조선측의 몇가지 기록을 보면 부산진 앞이나 다대포 방면에도 상륙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자료감사합니다,
자료 정리한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압도적인 적을 맞이하고도 끝까지 제 위치를 사수했던 조상님들에게 고개가 숙여지네요.
와 정말재미있어서 끝가지다읽었습니다. 좋은자료감사합니다^^
최후까지 용감히 항전한 정발,윤신장군 및 병사들의 투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